53화
“매일 이렇게 데려다주면 우리 한 비서님 할 일 없으신데…….”
“너희 한 비서님도 휴가가 필요해 보이는데 보내는 게 어때?”
“그럼 저는요? 전 누가 챙겨 줘요?”
태서가 자신을 가리키는데 강세헌에겐 아무 말 없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던 태서의 눈이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다.
“이럴 땐 자기가 챙겨 준다고 말해야 하지 않나? 왜 아무 말이 없어?”
“보통 그런 건 생각으로 하지 않아?”
“생각으로만 하려고 했는데 입 밖으로 나왔어요? 내가 그랬구나.”
태서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제 말을 받아쳐 오는 강세헌의 대답이 재미있어서 자꾸만 기대가 되고 순간순간이 즐거웠다. 태서가 창틀에 팔을 기대며 고개를 숙였다.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바짝 거리를 좁히니 강세헌의 흑백이 뚜렷한 눈동자가 보였다. 항상 자신을 직시해 주는 시선이 담긴 눈동자였다. 자신 외에는 다른 데 볼 거 같지 않은 확신이 드는 그런 눈동자였다. 제가 어디에 있든 자신을 찾아내 줄 것만 같은 그 눈동자였다.
그래서 태서는 그의 시선이, 그의 눈동자가 좋았다.
“들어가면 연락해요. 기다릴게요.”
태서가 한 걸음 물러서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뒷짐 지자 강세헌이 몸을 바로 했다가 다시 태서를 돌아보았다. 태서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강세헌은 이내 손을 내밀었다. 인사도 나눴으니 이제 갈 줄 알았던 태서가 그 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했다.
강아지처럼 턱이라도 얹어 줘야 하나 싶다가 밤새도록 장난칠 순 없으니 그냥 제 손을 올려 줬다. 그것 역시 강아지와 다를 바 없다는 것도 모른 채.
“손 잡아 줬으니 이제 그만 가…….”
세요, 라는 말은 갑작스럽게 그에게 끌려가 버리는 바람에 입 안에서 빙글 돌다 사라졌다. 강세헌은 손을 잡아끄는 것으로도 모자라 태서의 목뒤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여 입 맞춰 오면서 태서의 눈이 놀람으로 한껏 커졌다.
입술만 맞닿은 가벼운 접촉이지만 떨어질 때 강세헌의 혀가 아랫입술을 훔치고 떨어졌다. 태서가 무의식적으로 혀로 제 아랫입술을 쓸어 내는 사이 강세헌이 태서의 머리에 코끝을 비볐다.
“간다.”
그의 기습적인 뽀뽀에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어느새 차는 출발했고 강세헌이 가 버렸다. 그의 인사에 제대로 된 답도 못 했는데.
태서는 괜히 제 머리를 비벼 댔다. 강세헌과 맞닿은 곳은 전부 신경이 예민하게 달아올라 있는 듯 그 자리만 화끈거렸다.
“저 응큼한 아저씨를 어떻게 하지?”
아까 했어야 할 말을 뒤늦게 중얼거리며 태서가 돌아섰다. 다음부터는 미리 말하고 달라붙으라고 말할까? 방금처럼 갑작스러운 것도 나쁘지 않긴 하지만 매번 그러면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텐데.
강세헌의 생각에 느려진 발걸음 뒤로 이상한 무언가가 느껴져 태서가 옆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아래 늘어진 길쭉한 그림자. 뭉개져 있지만 사람의 형체를 띠고 있는 그것을 발견한 태서의 걸음이 멈췄다.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태서의 집 담벼락을 비추는 하나의 가로등 아래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무시하고 들어가기엔 찝찝한 기분이 든 태서가 그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누구세요?”
태서가 고개만 옆으로 내밀어 바라보니 상대방의 옷자락이 보일 듯 말 듯했다. 이미 누구냐는 제 물음을 무시했다. 태서는 손에 쥔 핸드폰에 강세헌의 번호를 띄우고 엄지손가락으로 당장 통화 버튼을 누를 수 있게 준비한 채 한 걸음 디뎠다.
그리고 옷자락과 함께 가로등 아래 서 있는 인물을 확인하자마자 어깨를 파드득 튀었다. 상대방에게 말 걸기 전에 제 핸드폰을 확인한 태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세헌에게 전화 걸지 않은 걸 확인한 태서는 뒤이어 강인혁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깜짝 놀랐잖아.”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강인혁은 태서의 말에도 미동 없이 서 있었다.
“계속 그렇게 서 있기만 하면 나 들어간다.”
오죽하면 태서가 경고를 날리고 나서야 강인혁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분명 빛이 있는 곳에 서 있는데 강인혁의 얼굴 곳곳에 그림자가 졌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더욱 어두워 보이는 그의 표정에 태서는 인상을 찡그렸다.
“왜 여기 서 있는 건데?”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
“그래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나를?”
강인혁이 다시 입을 다물었지만 아까처럼 완전한 무시가 아니었으니 태서는 한 번 봐주자 여겼다.
“그래서 무슨 말하려고 온 건데?”
태서가 어서 말하라는 듯 어깨를 펴는 동시에 턱을 들었다. 어떤 질문이든 다 받아 주겠다는 제 나름의 태도였다. 그러나 태서가 그렇게까지 하는데도 강인혁은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네가 …되었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뭐?”
중간에 목소리가 사라지다시피 해 태서에게 닿지 않았다. 강인혁에게 집중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태서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자 강인혁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자세히 보였다.
“너… 표정이 왜 그래?”
심각함을 넘어서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만 같았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음영이 불빛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어떤 일로 하여금 얼굴에 새겨진 것만 같았다.
“윤태서.”
강인혁의 무거운 입이 다시 열린다 싶었는데 답답하기 짝이 없는 소리로 고작 제 이름만 불렸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태서가 고민하고 있는데 강인혁이 다시 말해 왔다.
“세헌이 형 만나?”
“뭐?”
“너 세헌이 형이랑 만나는 거야? 둘이 사귀어?”
한번 입이 터지자 태서를 몰아붙일 듯 질문이 날아왔다. 태서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보단 강인혁의 얼굴을 보다가 몸을 돌려 강세헌의 차가 서 있던 자리를 보았다. 강인혁의 자리에서 차가 섰던 자리가 잘 보였다.
강인혁이 계속 여기 있었다면 강세헌과 제가 한 모든 걸 지켜봤겠지.
“응. 사귀어.”
태서는 강인혁을 돌아보지 않은 그 상태에서 대답했다. 강세헌과의 관계가 이렇게 드러날 줄은 몰랐다. 그러나 딱히 감출 생각이 없었기에 대답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왜?”
“뭐? 세헌이 형이랑 사귀는데 왜냐니?”
“왜 하필 강세헌이야?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강인혁의 물음이 이해가 되질 않아 태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가 강세헌과 어떤 사이든 강인혁이 이렇게 몰아붙이듯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혹시 네 사촌 형과 사귀는 걸 미리 허락이라도 받아야 한다는 건 아니지? 그 정도로 유치하게 굴 애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강인혁은 말도 안 되는 소리만 지껄이고 있었다. 태서의 미간은 여전히 일그러져 있는데 어이가 없어 한쪽 입가를 올리니 괴상한 표정이 나와 버렸다.
“그러지 마.”
“그건 네가 상관할 게 아닌 거 같은데.”
강인혁의 말도 안 되는 고집에 태서는 황당한 감정을 그대로 내보였다. 세상에 사촌 형의 연애를 사촌 동생이 반대하고 있었다. 네가 뭔데.
“인혁아, 내가 지금 기분이 좋아. 그래서 너랑 이상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
태서는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억지로 목소리를 낮췄다. 흥분하지 않고 강인혁을 잘 설득할 생각이었다. 강인혁이 강세헌을 특별한 사촌으로 여기니까 그래서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선 넘는 행동을 용납하는 건 아니지만.
“너 강세헌이 어떤 사람인 줄은 알고 그러는 거야?”
“너보단 모르겠지. 그런데 이 나라에서 강세헌 모르는 사람도 있어?”
“나 지금 너랑 장난치려는 거 아니야.”
강인혁이 언성을 높이며 태서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지금 누가 장난치는 것처럼 보이는지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태서는 나누는 대화와 별개로 심각한 강인혁의 눈빛에 새삼 기막힌 웃음이 나왔다.
“가볍게 만나는 그런 사이, 그래. 그럼 만나도 되겠지. 그런데 나중에 상처받을 건 생각하지 않는 거야?”
누가 상처받는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강인혁이 걱정하는 게 강세헌인지 자신인지. 그런데 강인혁은 태서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제 말을 늘어놨다.
“지금까지 세헌이 형, 누구든 선 넘지 못하게 막아 왔어. 나중에 적당한 상대 구해서 결혼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이란 말이야. 어릴 때부터 그랬어. 첫눈에 반하는 것도 모르고 사랑이라는 건 더더욱 몰라. 그런데 너는 형한테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 그거야말로 착각이야. 태서야. 정신 차려.”
“지금 정신 차려야 할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네.”
강인혁이야말로 제대로 선을 넘고 있는 거 같은데.
“형이 너 사랑한대? 응? 사랑한다고 말한 적 있어?”
태서가 가만히 듣고만 있자 의기양양해진 강인혁이 그것 보라며 말했다.
“그 관계 유지해 봐야 너만 손해야. 내 말 흘려듣지 말고 꼭 기억해 둬.”
“있잖아. 인혁아, 지금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내 연애는 내가 알아서 할게. 내가 세헌이 형한테 버림받아서 상처받아도 절대 네 탓하지 않을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급기야 다시 언성이 높아진 강인혁의 강한 반응에 태서가 멈칫했다.
“나는…… 그러니까 나는…… 하아.”
강인혁이 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 세헌이 형 좋아해?”
“와, 그걸 이제야 물어보는 거야?”
두서없는 대화에 끌려가는 자신도 문제였다. 태서는 강인혁에게 어떤 대답을 할지 고민했다. 당연히 좋아하니까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막상 다른 사람에게 강세헌을 향한 제 마음을 표현하려니 저절로 신중해져서 제 마음을 되짚어 보게 되었다.
가랑비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가랑비에 젖어 버린 태서는 강세헌을 좋아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딱 거기까지였는데…….
아까 강세헌의 눈동자를 들여다봤을 때 제 심장이 흔들렸다.
“좋아.”
태서의 한마디에 강인혁이 심장이 내려앉을 듯한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하는 강세헌을 향한 태서의 고백에 강인혁이 마른침을 삼켰다.
“좋아해.”
그러다 자신을 향한 태서의 눈동자를 들여다본 강인혁이 얼굴을 굳혔다. 자신을 보는 태서의 눈동자에는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제가 아닌 다른 이를 생각하고 있는 듯 시선은 금방 강인혁을 지나쳤다.
“너…….”
“세헌이 형을 좋아해. 그런데 단순히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해. 그러니까…….”
“그만. 더는 말하지 마.”
태서가 제 감정이 어떤지 막 말하려는 순간 강인혁이 몸을 돌렸다.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태서의 말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떠올리며 웃는 걸 보는 게 견딜 수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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