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강세헌에게 제대로 주의를 받아 놓고 그새 잊었는지 태서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이번에도 누구와 연락하고 있는 걸까?
“뭐 해?”
“검색이요.”
강세헌의 물음에 태서가 곧장 대답했다. 태서의 대답을 듣고 보니 아까와 다른 점이 보였다. 언뜻 핸드폰에 빠져들 것만 같은데 누군가와 연락하는 것 같진 않았다.
태서가 다시 핸드폰을 두들기더니 화면에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가만히 응시하는 와중에 아랫입술을 말아 물어 대고 있는 게 제법 심각해 보였다.
강세헌의 시선을 느껴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부터 할 말이 있었는지 태서가 반쯤 몸을 틀었다.
“계속 아기라고 부를 거예요?”
대뜸 내뱉는 질문에 강세헌이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태서가 눈빛으로 되물었다.
“내가 너를 아기라고 불렀던 건 아니고.”
“당연히 날 말하는 게 아니라 얠 말하는 거죠.”
태서가 느릿한 손길로 제 배를 어루만졌다. 아까 강세헌이 실컷 만진 덕분에 배가 따뜻해진 기분이었다. 아니 살갗의 온도가 분명 더 올라갔다. 그래서인지 유독 아기 생각이 많이 났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에게 지어 주는 이름을 태명이라고 한대요.”
제 설명이 부족하면 이걸 보라는 듯 태서가 핸드폰을 강세헌에게 내밀었다가 도로 회수했다. 지금 강세헌은 운전하느라 핸드폰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없기에 그랬다.
“우리 아기한테도 태명이 필요하지 않아요? 어제부터 생각하긴 했는데 이건 형이랑 같이 정해야 하니까……. 우리 아기잖아요.”
그러니까 같이 정했으면 좋겠는데, 태서의 뒷말이 작게 울렸다. 대뜸 아기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렇지만 무언가를 같이 하자고 말한 것도 처음이었다.
강세헌이 빨간불을 확인하고 차를 정차시키는 동시에 핸들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커다란 덩치가 핸들을 온전히 가리는 것도 모자라 부들거리며 떠는 걸 보아하니 차의 진동이 온통 그에게 옮겨 간 것만 같았다.
차의 진동이 좋아 차창에 머리를 기대기도 했던 태서가 강세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 진동이 더 묵직하지만 마찬가지로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좋은 거 같기도 하고.
“귀엽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가 벌써 귀여워요?”
“……그래.”
강세헌이 핸들에서 몸을 떼며 대답했다. 귀엽다는 게 누구를 지칭하는지 빤히 알면서 태서는 능청스럽게 말을 돌렸다. 제 나이가 어리다고 자꾸 아기와 자신을 두고 장난치는 강세헌에게 똑같이 돌려 줬다.
“아무튼 생각해 봐요. 저도 틈틈이 생각할 테니까요.”
태서가 다시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실은 어떤 태명들로 짓는지도 검색해 봤다고 말할까 하다가 말았다. 그것보단 둘이 마음에 드는 태명으로 짓고 싶었다.
“생각해 둔 거 없어?”
“음…… 아직은 없어요. 실은 태명만이 아니에요. 앞으로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태서가 핸드폰을 턱에 살짝 기댄 채 목을 울렸다. 강세헌을 향해 고개 돌리지 않은 채 태서는 그대로 입술만 달싹였다.
“나 정말로 무식했구나.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기를 낳을 생각만 했구나, 내가.”
태서가 멋쩍은 웃음을 내보였다.
“제가 그랬네요.”
그러고는 강세헌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태서가 재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혼자 있을 때마다 아기에 대해 찾아보고 있어요. 지금 주 수에는 어떤 변화가 있는지 아기는 얼마나 크는지 검색해 봐요.”
강세헌이 태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견하다.”
왜 그런 것도 모르면서 아기를 낳을 생각만 하냐는 타박이 아니었다. 이제라도 잘했다는 듯 강세헌의 칭찬이 뒤따라왔다.
“내가 널 본받아야겠다.”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태서가 열심히 검색해서 알아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에 대한 화답이라도 되는지 강세헌의 향이 부드럽게 풍겼다. 크레파스를 덧칠하듯 그의 향이 덧칠되어 다가왔다.
이런 것 때문에 강세헌의 차에 타는 걸 거절할 수가 없다. 태서에겐 한 비서님이 있는데 말이다.
“그날 이후 부모님과 따로 대화 나눈 적은?”
“다음 병원 예약날에 같이 가자고 하셨어요. 그것뿐이면 나한테 관심이 없으신가 싶은데…….”
태서는 자신의 부모님의 사랑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게 아기에게까지 영향이 미칠지는 미지수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아직 아기에 관해 깊은 대화는 나누지 않아서 그랬다.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 듯 부모님은 태서에게 별말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집에 가면 이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차려진 식사나 수시로 울려 대는 한 비서의 핸드폰 등이 달라졌다.
“나 혼자 먹는데 얼마나 화려하게 차려 주시는지 귀족이 된 기분이라니까요? 거기다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침구를 자주 교체해 주는 거 같아요. 냄새도 좋고 방이 더 깨끗해지고 한 비서님은 더 바빠지고.”
부모님은 태서만큼이나 아기에게도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불편한 건 없는지 부족한 건 없는지 수시로 살펴주었다. 아마 곧 태서를 불러 부모님의 생각을 말해 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게 병원에 가기 전일지 아니면 갔다 와서 일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때 어떤 말을 할지 태서도 궁금하지만 꾹 참았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아서 부모님의 생각이 정리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태서가 다시 핸드폰을 들여다보더니 뭔가를 발견했다는 듯 강세헌을 돌아보았다.
“다른 알파의 페로몬을 조심하라네요.”
“아기를 품은 오메가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숨기게 돼. 오메가의 페로몬이 사라지고 다른 알파의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게 되지. 전부 아기를 지키기 위한 건데 그로 인한 문제도 종종 발생하지.”
강세헌이 임신한 오메가에게 미칠 위험 중 하나를 알려 주었다. 임신한 오메가는 다른 알파의 페로몬을 못 느낀다. 그러나 못 느낀다고 해서 그게 없는 게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알파들의 페로몬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오메가의 몸에 부담이 올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제 알파의 페로몬이 묻은 물건을 소지하거나 혹은 내내 쌓였던 부담을 알파의 품에서 쉬면서 풀어내는 거야.”
강세헌의 설명을 들으며 태서는 다른 알파를 만난 적이 언제 있었나 떠올려 봤다. 그때마다 제가 어땠나 되짚어 보지만 이미 지나고 난 후라 그런지 막상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래서 태서는 생각을 바꿔 강세헌의 페로몬은 어떤지 생각해 보았다.
강세헌의 페로몬은 태서에게 활력을 주었다. 입맛도 돌게 했고 기분도 끌어 올려 주며 없는 힘도 만들어 줬다. 더없이 안정적인 느낌을 주었고 날 지켜 주는 사람이라는 막연한 신뢰가 생겼다.
그렇다면 다른 알파의 페로몬은 그 반대이지 않을까?
***
핸드폰이 쉴 틈 없이 다시 울려왔다. 받을 때까지 울릴 거라는 양 집요하고도 끈질긴 탓에 어둠 속에서 손이 나오더니 핸드폰을 덮듯이 쥐었다. 핸드폰의 진동이 묻히나 싶지만 손가락 사이로 우웅, 미약한 소리로나마 반항해 왔다.
진동이 멈출 기미가 없으니 손이 핸드폰을 뒤집어 버렸다. 반강제로 진동을 꺼 버린 손이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싶더니 곧 인기척과 함께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침대에서 내려온 강인혁은 무의식적으로 거실로 걸어 나왔다.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꺼내 마시는 그의 눈동자는 그 어떤 것도 담고 있지 않았다.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생수병을 기울이는 강인혁의 눈동자가 움직이더니 창밖을 확인했다. 시험이 끝나고 그가 한 거라고는 들어와서 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벌써 해가 지고 있으니 하루가 넘게 잠이 든 모양이었다.
“오메가…….”
한참을 조용히 있던 강인혁이 흘리듯 내뱉은 단어는 오메가였다. 윤태서가 오메가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조금 놀라고 말았다. 그냥 그 정도라고 생각했다. 따로 충격받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제가 기뻐할 이유가 없어서 다른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다음이었다. 자꾸만 태서가 오메가로 발현했다는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잠을 잘 때도 책을 볼 때도 계속 떠올랐다. 왜 그런지 몰랐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 잘 어울려 놀던 친구가 그토록 원하던 형질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그런 거라면.
“그럴 리가 없잖아.”
강인혁이 자조 어린 미소를 지었다. 단순히 친구로서 윤태서가 발현한 걸 축하해 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신경 쓰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만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부쩍 달라진 윤태서의 태도.
과거처럼 친구로 돌아간 것도 아니고 서로 얼굴만 마주쳐도 으르렁거리던 그런 때로 돌아간 것도 아니었다.
윤태서는 제게 일절 관심 없다는 듯 굴었다. 대화를 나누게 되어도 담백하게 제 할 말만 하고 사라졌다. 그러다가 제 잘못을 사과하고는 어정쩡한 사이가 되어 버리니 이젠 남보다 못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
그게 자꾸 강인혁의 신경을 갈짝거리며 긁어 왔다. 긁을수록 가려움은 더 커져 왔고 이젠 수시로 윤태서가 떠올랐다.
“대체 뭐지.”
나는 왜 이렇게 윤태서를 떠올리고 신경 쓰고 있는 걸까.
…윤태서는 왜 내게 관심 없는 듯 구는 걸까.
나는 윤태서에게 뭘 원하고 있는 걸까.
그때 방에서 핸드폰이 울려왔다. 누가 계속 그를 찾는지 끊임없이 진동하는 핸드폰을 보다가 강인혁이 생수병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핸드폰을 가지러 갈 줄 알았던 강인혁은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는 지금 자신을 찾아대는 누군가보다 윤태서가 보고 싶었다. 그를 만나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제 신경 쓰이는 이 마음의 정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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