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원하전자와 협약을 맺기로 강수학 대표의 결제가 떨어졌다고 합니다.]
비서와 통화를 나누는 강세헌의 눈은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는 태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키스한 지 얼마나 됐다고 긴장은 저 멀리 내동댕이치고 마음껏 침대의 푹신함을 즐기고 있다.
불편하다고 자켓은 벗어던지고 셔츠만 입은 채로 누워 있는데 얼마나 비벼 댔는지 바지에 넣어 뒀던 셔츠 밑자락이 다 빠져나왔다. 침대에 엎어져서 핸드폰을 하고 있으니 그의 늘씬한 허리가 드러났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허리가 드러나는 걸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거기다 뭐가 재밌는지 몸을 뒤집어 가며 웃을 땐 오목하게 들어간 옆구리와 납작한 배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확실히 옷을 입고 있을 때와 벗었을 때 다른 느낌이 드는 몸이었다. 옷을 입고 있으면 넓은 어깨 아래 일자로 선이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면 벗으면 숨겨졌던 오목한 라인들이 드러났다.
그래서인지 태서는 베타같기도 하면서 동시에 오메가같기도 했다. 장난칠 때나 어딘가에 집중할 때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베타인데 긴 속눈썹 아래 젖은 눈동자나 잘록한 허리는 오메가의 느낌을 물씬 풍겨 왔다.
태서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자만이 알아챌 수 있는 은근한 차이가 반전의 매력을 뿜어냈다. 그것을 아는 이는 아마 자기뿐이겠지.
“와하하.”
또다시 소리 내어 웃은 태서가 침대에 벌러덩 누워 핸드폰을 위로 들었다. 자칫 잘못했다가 떨구기라도 하면 얼굴에 맞을 텐데…….
강세헌이 못 말리겠다는 듯 제 손에 관자놀이를 괬다. 태서를 바라보던 강세헌이 뒤늦게 비서의 말을 떠올렸다.
“미련을 못 버리시는군.”
강세헌에게까지 올라왔던 그 사업은 여러 각도로 분석한 결과 사업성이 없다는 판단과 함께 기각되었다. 작은아버지가 하시니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도와주는 셈치고 손을 잡아 주는 건 어떠냐는 한 임원의 말에도 강세헌은 가차 없이 끊어 냈다. 작은아버지를 도우려고 제 사람들을 의미 없는 일에 투입시키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 할아버지의 귀에도 들어가서 그대로 엎어질 줄 알았다. 그런데 기어코 감행하려는 걸 보니 KH마트를 맡고 어지간히 마음이 급하신 모양이다. 거기다 원하전자라….
“원하전자가 무슨 생각이지?”
강세헌 때문에 KH쪽으로 시소가 기울었지만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제법 대등하게 평행을 이루던 곳이었다. 지금도 대한민국에서는 2등에 불과하지만 해외까지 뻗어 나가 제법 내실이 탄탄한 곳이었다.
[알아보겠습니다.]
비서의 대답을 끝으로 통화가 종료되는 신호음과 동시에 태서와 눈이 마주쳤다. 아직 통화 중인 줄 안 태서가 눈이 휘어지도록 예쁜 웃음과 함께 입술을 달싹거렸다. 소리를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만 전하려는 메시지에 강세헌이 웃음을 터트렸다.
핸드폰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선 강세헌이 다가가자 태서가 핸드폰을 한 손으로만 든 채 고개를 들었다.
“통화 다 끝났어요?”
“그래.”
강세헌이 침대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태서의 올라붙은 엉덩이에서 휘어지는 굴곡을 따라 드러난 허리를 훑으며 강세헌이 그의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옷 벗고 편하게 있으라니 우리 자기 긴장할 필요가 있어.”
“말 그대로 해석해 주실래요? 그냥 편하게 있었으면 해서 한 말입니다.”
태서가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미로 정장을 차려입은 건 좋은데 함께하는 몇 시간 동안 강세헌은 처음 그대로 무엇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게 대단하다고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힘들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건데 강세헌이 다른 식으로 받아쳐 왔다.
이 아저씨가 한번 엉큼하기 시작하니 끝도 없네.
“그래서 우리 태서는 옷이 다 뒤집어지고 있는 것도 상관없이 편하게 있는 거야?”
“그거야…….”
오늘 태서는 제가 계획한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전망 좋은 룸을 잡았고 강세헌을 데리러 갔다. 그리고 그를 데리고 와서 식사도 하고 커피도 마신 후애 제 마음이 담긴 고백까지 건넸으니 할 건 다 했다. 어느덧 마음이 풀어져 갑갑한 겉옷은 벗어던지고 침대에 누워 있다 보니 강세헌도 불편해 보이지 않을까 해서 그랬다.
“그냥 그렇게 있으세요.”
태서가 마음대로 하라며 다시 제 핸드폰으로 눈을 돌렸다. 방금 또 메시지가 왔는지 우웅, 진동이 울려왔다. 핸드폰을 본 태서가 다시 키득거리며 답장을 보내고 있으니 강세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신과 있는데 자꾸 핸드폰을 보고 웃는단 말이지.
“무슨 연락인데?”
“미래한테 메시지가 왔어요. 시험 잘 봤냐고요.”
미래라고 말하면 알려나? 그러나 쓸데없는 고민이었던 듯 강세헌이 바로 예민하게 굴어 왔다.
“지금껏 연락한 게 소개팅한 상대라는 거지? 그것도 오늘 연인이 된 상대가 버젓이 눈 뜨고 있는 앞에서 말이야.”
목소리에 깃든 언짢음에 태서가 핸드폰을 든 채 움찔했다. 미래랑 소개팅한 거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한 게 없었구나. 원래 친구 이상의 감정이 없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가 이상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등 뒤가 싸늘해진 기분에 태서마저 얼음이 된 듯 꼼짝없이 굳어 버렸다.
“세상에, 내가 애인의 소개팅 상대까지 신경 쓸 줄은 몰랐네.”
분명 웃음이 섞인 말인데 화내는 것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왠지 회사에서도 웃으면서 상대방을 한없이 깎아내릴 것만 같았다. 아니, 분명 강세헌이라면 정말 그럴지도.
숨을 죽인 태서가 꼼질꼼질 검지만 움직여 핸드폰 화면을 껐다. 화면이 어두워지며 검은 거울이 되었다. 태서가 그것을 기울여 강세헌을 비췄다.
그러다 핸드폰을 바라보는 강세헌과 눈이 마주쳤다. 제 행동은 다 그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나는 기분이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강세헌의 한쪽 눈썹이 천천히 올라가며 어디 말해 보라는 듯 냉소를 지어 왔다.
“설마 형 질투해요?”
“신경 쓰이는 건 당연한 거야. 태서야.”
“이건 그냥 학기 마무리하면서 돌리는 인사나 마찬가진데. 그리고 저 얘한테 아무 감정 없어요.”
정말로 아무 감정이 없어서 숨기지 않고 편하게 언급했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다.
“첫 만남이 소개팅이긴 했지만 그때도 그냥 즐겁게 대화하다 헤어져서 이렇다 할 뭐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며칠 전에 만났는데 저한테 연락 하나 없었다고 해서…….”
일단 강세헌이 오해할까 말을 늘어놓던 태서는 어느 순간 저 스스로도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알았다. 급기야 뒷말이 사라지고 말았다.
“너도 이상한 걸 알겠지? 태서야. 연락을 기다린다는 건 네게 마음이 있다는 거야. 그렇지?”
“그냥 친구…….”
“응. 그래. 너는 그렇구나.”
태서가 핸드폰을 던지며 한 손을 들었다. 다른 손은 엎어져 있는 자세라 침대를 짚고 몸을 지탱하느라 아쉽지만 한 손으로 족했다.
“진짜로 친구예요. 친구.”
강세헌의 눈빛이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자 태서가 진짜로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려다 멈칫했다.
“태서야.”
강세헌이 침대에 한쪽 무릎을 올려 왔다. 곧 그가 상체를 온전히 숙이며 엎드려 있던 태서를 가두듯이 두 팔을 내렸다. 엎드려 있긴 하지만 강세헌을 본다고 상체는 반쯤 틀어 있던 태서가 제 위로 드리운 그림자에 굳어 버렸다.
“이런 식은 곤란해.”
그림자가 태서의 체온을 빼앗아 간 듯 오싹함에 목뒤가 쭈뼛 섰다. 어떤 말이든 해야 하는데 강세헌이 가까이 다가오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이렇게 기회를 주면 거절할 수 없잖아.”
“…제가 미래한테 무슨 기회를 줘요.”
“나. 너 지금 나한테 기회를 주고 있잖아.”
한미래가 아니라 강세헌이라니 태서는 그의 말이 이해되질 않아 어떤 대답도 못 했다.
“널 잡아먹고 나서 질투심에 사로잡혔서 그런 거라고 하면 되잖아.”
그것뿐일까. 오늘 애인이라는 명분도 얻었는데. 강세헌이 송곳니가 드러날 정도로 입술이 벌려 웃었다
태서가 숨죽인 채로 들었던 손을 내렸다. 허공에 뜬 채로 두는 것보다 당장 급할 때 방어하려면 제 몸에 가까이 붙여 놔야 될 것만 같았다. 아까 전에 침대를 가지고 장난쳤을 때와 달랐다. 지금은 정말로 위험했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자꾸만 마른침이 넘어갔다.
아까부터 제 숨통을 꽉 막아 올 것처럼 진해진 향은 또 어떻고. 그런데 허공에 무슨 가루를 탄 듯 향이 조금 바뀌었다. 은연중에 그것을 피하고 싶었지만 제 피부에 달라붙은 향이 스멀스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내려갔던 체온이 올라가고 숨마저 데워진 것처럼 뜨거워졌을 때 태서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당장 이 아찔한 분위기에 넘어가기엔….
“저…… 애 있는 남잔데요.”
제가 혼자가 아니라는 게 걸렸다. 제 몸속에 있는지 평소엔 자각도 잘 못하면서 이럴 땐 또 아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래, 네가 애 같지만 정확하게는 아기를 품고 있지.”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이쯤에서 넘어갈, 으악.”
작살에 꿴 물고기처럼 태서가 허리를 튕겼다. 그만큼 갑작스럽게 제 옆구리를 짚은 강세헌의 손길에 놀라 버렸다.
“아니까 적당히 하자.”
강세헌의 손이 옆구리에서 허리로 미끄러져 내려가자 그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에 태서가 다시 몸을 움직였다. 아예 손을 떼고 싶은데 뱀처럼 휘감아 오는 그의 손을 벗어나지 못했다.
태서는 허리와 옆구리, 배를 제물로 바치고 나서야 호텔에서 나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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