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거울을 보며 제 머리를 이리저리 만져 보던 태서가 조금씩 고개를 틀어 봤다. 저번에 깔끔해 보이고자 머리를 넘겼을 때 강세헌이 잘 어울린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오늘도 머리를 넘겨 보았는데 썩 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 잘생겨야 되는데.”
워낙 기본이 있으니 다 괜찮지만 제 마음이 만족해야 했다. 다른 날도 아니고 오늘은 태서가 모든 것을 계획한 날이니 더더욱.
계속 만져 대니 머리는 점점 이상한 형태가 되다가 결국 처음보다도 못하게 되었다.
“이게 뭐냐.”
태서가 제 엉망인 머리를 보다가 웃었다. 이대로 가면 강세헌이 즐겁게 웃어 주겠지만 종일 그럴 순 없으니까. 결국 머리를 감고 와서 말리기만 했다.
자연스럽게 내려온 머리가 이마를 덮으며 평소와 똑같아져 버렸다.
“그래, 평소처럼 굴면 되지.”
특별한 날이지만 너무 유난스럽지 않은 것도 괜찮겠다.
“그래도 옷은 달라야지.”
태서가 줄지어 걸려 있는 옷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옷은 깔끔하고 단정하게. 순간순간을 가볍게 넘기지 않기 위한 저만의 기준이었다.
전신 거울에 제 모습을 비쳐 본 태서는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돌아섰다. 그대로 방을 나가려던 찰나 태서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이걸 잊을 뻔했네.”
손에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으면 어색할 거 같다. 태서가 방에 올려 둔 물건을 들고 도로 방을 나섰다.
***
오랜만에 들른 강세헌의 집 앞에서 태서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 드나들던 집이었다. 익숙하고 친근하기까지 느껴지는 주변을 보고 있으니 괜히 비밀번호에 시선이 갔다. 벨을 누르지 말고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당장 어제까지 살았던 것처럼 안의 구조가 빠삭하게 떠오르는데 여기에 서 있기만 하는 게 아쉬웠다. 하지만 오늘은 예전의 추억을 되새기는 게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태서가 꿀꺽 침을 삼키며 벨을 눌렀다. 안에 누가 있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는 인기척에 현관문이 참으로 두꺼운 게 아쉬웠다. 그렇게 안에 모든 신경을 쏟아붓는 사이 도어 록의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자 태서는 남자의 목과 가슴 사이를 맞닥뜨렸다. 늘 단정하게 매어 있던 단추가 오늘따라 여미지 못하고 벌어져 있었다. 슬금슬금 시선을 올리니 시원하게 뻗어 나간 쇄골 위로 길고 곧은 목, 그리고 단단한 턱이 자리했다. 이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르는데도 보고 싶었었다.
태서를 마주한 강세헌이 제 손목을 톡톡 두드렸다. 아직 온전히 채우지 않은 손목시계가 덜렁거렸다.
“약속 시간까지 제법 남았는데…….”
“데리러 왔어요.”
태서가 한 손을 내밀었다. 늘 강세헌이 제 학교에 데리러 왔으니 이번엔 제가 왔다.
“기분은 좋은데 아직 준비가 덜 됐어.”
“기다릴게요. 잠깐만요.”
태서가 얼마든지 시간을 주겠다고 말하다가 대뜸 손을 뻗어 왔다. 직접 단추를 여며 주고 싶었다. 태서의 생각을 알아챈 강세헌은 피식 웃으며 그를 향해 상체를 숙여 주었다.
그저 약간의 거리를 좁힌 것에 불과한데 강세헌의 향이 짙게 다가왔다. 예전엔 향수라도 뿌렸나 생각했던 바로 그 향이었다. 이제는 이게 페로몬이라는 걸 알았다.
페로몬이라고 인식한 게 언제였더라. 어느 날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인정한 거 같았다. 그에게만 느껴지는 향이 자꾸 제 몸을 감싸 오는 것만 같다고 여겼고 그 향을 맡은 날은 밥도 맛있었고 잠도 잘 왔다.
강세헌이란 인간과 잦은 만남을 통해 서서히 그에게 익숙해지듯 페로몬도 마찬가지였다. 페로몬이라는 걸 인식했어도 놀랄 게 아니었고 그냥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굳이 달라진 걸 찾자면 이제 그 향을 제 몸에 간직하려 깊이 숨을 마시는 정도였다.
강세헌의 페로몬이 태서의 목을 간지럽히며 휘감아 왔다. 목을 조여 오는 게 아니라 제자리라고 인식하고 안착하듯 그렇게 머물렀다. 덕분에 태서는 오랜만에 느끼는 향에 기분 좋게 취했다.
“넥타이까지 해 줄거야?”
“그건 아직 익숙하지 않은 관계로 매일 하시던 분이 매세요.”
잠시고 취할 시간을 안 주지. 태서가 얄미운 듯 눈을 가늘게 흘기다가 강세헌의 가슴을 밀어 냈다.
“다 했으니 마저 준비하고 나오세요.”
“아쉽네. 이럴 줄 알았으면 전부 풀고 있었을 텐데.”
“원래 부족하다고 여길 때 더 원하게 되는 법이죠.”
태서가 그의 빳빳한 깃에 의도적으로 손을 스치며 뗐다. 별거 아닐 수 있는 접촉인데 강세헌의 향이 더욱 짙어졌다. 아마 자신도 그렇지 않을까.
이상한 기분에 휩쓸리기 전 태서가 몸을 틀었다. 헛기침을 내뱉으며 벽에 등을 기대고 있으니 강세헌의 바람 빠진 웃음이 다시 들려왔다. 그러고는 기다리라는 말을 흘리고 도로 들어갔다.
“하아, 윤태서.”
강세헌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태서가 곧장 제 이마를 찰싹 내리쳤다. 방금 그의 단추를 만진 것밖에 없는데 왜 홀린 듯 굴었는지 제 스스로가 한심했다. 강세헌과는 처음 만났을 때 이후로 어떤 접촉도 없이 담백하기만 했는데 이번엔 조금 위험했다.
‘페로몬 핑계 대지 말자.’
그의 향이야 언제든 맡았던 거고 방금은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갔었다. 태서가 머리를 휘저어 제 몸에 묻은 강세헌의 페로몬을 털어 내려 해 봤다. 그러자 페로몬이 공기 중에 떠올라 태서의 코를 괴롭혀 대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먼지가 들어가면 간지러워 재채기라도 나오련만 페로몬은 차곡차곡 태서의 몸속으로 들어가 쌓일 뿐 떨어지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뱀처럼 똬리를 틀 뿐이라 태서가 애먼 허공을 노려보았다.
“지루할까 봐 서둘렀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네. 우리 태서 어린이는 혼자서도 잘 노는 아이였어.”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요?”
“네가 이마를 내리친 것만 못 본 거 같은데.”
“그런데 이마인 건 어떻게 알았대.”
태서가 거짓말도 참 잘한다는 듯 강세헌의 장난을 튕겨 버렸다.
“그 붉어진 이마 보고 알았는데.”
태서가 급히 고개를 흔들어 앞머리를 재정비했다. 그런다고 이미 들켜 버린 걸 돌이킬 수 있겠냐마는. 그사이 강세헌은 문득 태서의 옷을 훑어보았다.
“저번에도 그랬지만 이상하게 슈트가 안 어울린단 말이야.”
“그거야 잘 입지 않으니까 그렇죠.”
나름 신경 써서 입었는데 안 어울린단 말이 기분 좋을 리 없었다. 제 얼굴이 못나지 않아 어떤 옷이든 찰떡같이 소화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는 형은 무슨 정장만 입어요? 문신이야? 어떻게 사람이 다른 옷이 없냐고요.”
“집에서는 편하게 입는데.”
“그러니까 나 만나는데 편하게 입고 오면 되잖아요.”
“긴장하려고.”
고작 한 걸음 다가왔을 뿐인데 강세헌과의 거리가 겨우 손가락 두 마디 정도로 좁혀졌다. 서로의 숨소리까지 다 들릴 가까운 거리에서 태서가 그와 눈을 마주치려 고개를 들었다.
“윤태서와 만나는데 내 모든 최선을 다해야 하잖아.”
“와, 진짜 멘트가 장난아니시네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네 복장도 내게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강세헌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그런 마음에서 차려입고 온 거니까.
“가요.”
인사는 서로에게 관심 가득한 대화로 충분히 나눴다. 이제 태서가 준비한 본격적인 일정의 시작이었다.
***
강세헌에게 하루를 달라고 호기롭게 외친 것에 비해 태서가 짠 일정은 별거 없었다. 배고플 테니까 밥 먹고 목 마를 테니까 커피 마시고 돌아다니기엔 더우니까 적당히 시원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면 되겠지. 그 단순한 골격에 맞춰 살을 붙여 넣었다.
늘 강세헌이 잘 아는 곳으로 갔으니 이번엔 태서가 아는 곳으로 갔다. 아는 곳이 많지 않다는 이유로 그 장소가 호텔이라는 게 문제지만 다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꼭 지역구에 걸쳐서 이동할 필요는 없으니까.
“룸으로 끌어들이고 제법이네.”
넥타이는 도로 풀어야 하나, 강세헌의 중얼거림에 태서는 미리 시켜 둔 룸서비스를 기다렸다. 머지 않아 룸서비스가 도착했고 태서는 곧장 강세헌을 테이블로 데리고 갔다.
“일단 밥부터 먹고요.”
메뉴는 일전에 먹었던 버거부터 한식과 양식 골고루 시켰다. 덕분에 기다란 테이블의 반 이상이 채워졌다.
“마음껏 드세요.”
태서는 고소한 향이 풍겨 오는 수프를 집으며 강세헌에게도 얼마든지 즐길 것을 권유했다. 강세헌은 못 말린다는 듯 웃고는 태서의 생각에 맞춰 주었다. 어느 하나의 음식에 치중하지 않고 다양한 요리를 맛보고 즐겼다.
적당히 배가 부른다 싶을 때 태서는 커피를 주문했다. 그리고 적당한 때에 도착한 커피를 들고 전망 좋은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 덕분인지 따뜻한 커피가 몸을 데워 줘서 좋았다. 강세헌과 맞닿은 팔을 통해 전달되는 페로몬도 그의 기분을 한껏 올려 주었다.
태서가 두 손으로 머그잔을 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좋다.
“한 곳에서 다 해결할 생각이었어.”
태서의 깜찍한 계획에 강세헌이 기분 좋게 웃었다. 그는 태서가 준비했다는 모든 것을 다 즐겁게 받아들였다. 그의 반응에 제가 준비한 게 의미 있게 다가간 거 같아서 뿌듯해졌다.
“우리가 가장 많이 만난 장소잖아요.”
“그래, 그랬지.”
호텔에서 같이 관계를 맺기도 하고 우연히 만나기도 했다. 거기다 태서가 소개팅하는 것까지 봤으니 호텔이라고 하면 많은 기억이 떠올랐다.
“거기다 하나를 더 얹는 거예요. 우리가 오늘 이 룸에서 한 일들도 잊지 못할 걸요.”
“의미심장하게 들리네.”
“곧 그렇게 될 거니까.”
강세헌의 농담에도 태서는 태연히 받아쳤다. 정말로 잊지 못할 시간이 될 것은 확실했다. 왜냐면 자신도 그럴 거니까.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다음은 뭐야?”
“자야죠.”
태서의 명쾌한 목소리가 짧고 굵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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