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강세헌의 집은 공기가 희박한 모양이었다. 쫓기듯이 밖으로 나온 강인혁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야 제가 원하는 만큼 숨을 들이마실 수 있게 된 강인혁이 맥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공기는 핑계였다. 그저 강세헌의 앞에서 제가 아무렇지 않게 서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멍청하게 굴어 댔다.
“내가 무슨 짓을 벌인 거지.”
그냥 윤태서가 오메가인지 아냐고 물어보려고 찾아갔을 뿐이었다. 그런데 제가 원하는 질문은 하나 못하고 말도 안 되는 투정만 부렸다. 그것도 강세헌에게 먹히지 않을 투정을 말이다.
강인혁이 제 답답한 마음을 풀 길 없어 한숨을 쉬었다. 이게 전부 윤태서 때문이었다.
“왜 하필 지금…….”
윤태서와 카페를 가는 게 아니었다. 계속 그와 사이가 안 좋았다면…… 그러면 정말 윤태서를 하등 신경 쓰지 않았을 거고 강세헌에게 가서 멍청하게 굴다가 나올 일도 없었다.
그런데 윤태서가 제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어정쩡한 관계가 되어 버렸다. 이제 자신은 완전히 윤태서가 밉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그에게 온전히 마음이 열린 것도 아니었다. 그게 강인혁의 마음을 엉망진창으로 꼬아 버렸다.
“전부 윤태서 네 탓이야.”
***
“다음 학기에 만납시다.”
교수가 이번 학기를 마무리 짓는 인사를 건네고 강의실을 나갔다. 그와 동시에 남은 학생들이 저마다 기지개를 켰다. 그중에서 박한수가 가장 크게 기지개를 켰고 가장 크게 입 벌려 하품했다. 보다 못한 태서가 책을 들어 박한수의 입을 가려 줄 정도였다.
“아니, 시험지만 제출하면 나가도 되잖아. 왜 저 교수는 시간을 다 채워야 하냐고.”
“그래서 시험 보는 내내 잤어? 나 순간 네가 대학생이 아니라 고등학생인 줄 알았잖아.”
태서가 못 말린다는 듯 책을 치웠다. 마지막 시험이 유난스럽긴 했다. 컴퓨터로 시험 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험을 다 보면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직하게 자필로 시험지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쓰는 것도 모자라 시험 시간을 전부 채워야 하는 게 교수의 고집이었다.
“그래도 다 같이 끝나서 좋긴 하네. 안 그랬으면 너 기다리느라 지루해 죽을 뻔했어.”
박한수는 당연히 자기는 일찍 나가고 태서는 늦게 나올 것처럼 말했다. 틀린 말도 아닌 게 이번 주 내내 겹친 강의 때마다 박한수가 먼저 나가긴 했다.
“시험 잘 봤는지는 안 물어볼란다. 윤태서라면 어련히 잘 봤을 테니까.”
“그거야 결과가 나와 봐야 알지.”
이전까지의 성적은 지금의 태서가 낸 게 아니었다. 그러니 이번에 성적이 다르게 나올 수도 있었다. 그런 것 치고 태서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지만.
“이해 못할 줄 알았는데.”
실은 태서 스스로도 의아한 부분이었다. 신입생도 아니고 중간고사도 보지 않았다. 이전의 지식이 있어야 시험을 잘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은 불안감은 있었다. 그런데 과제할 때도 그렇지만 크게 어렵지 않았다. 과제할 때야 긴가민가했었는데 이번에 공부하면서 깨달았다.
‘내 머릿속에 윤태서의 지식이 다 들어 있나?’
그러면 더 신기한 건데. 아니면 원래 똑똑해서 이번 시험이 별로 어렵지 않았다거나. 나중에 찬찬히 생각해 봐야 할 과제가 생겼다.
‘일단 세헌이 형부터 챙기고.’
태서가 펜심을 집어넣으며 히죽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어떻게 해석한 건지 박한수가 슬쩍 엉덩이를 들이밀며 거리를 좁혔다.
“시험도 끝났는데 우리 뭐 할까? 술 마실까?”
“바빠.”
“이제 방학인데 뭐가 바빠. 나랑 술 마시기 싫어?”
“응.”
태서가 가방에 책을 집어넣으며 예쁘게 미소 지었다. 바쁜 것도 맞고 박한수랑 술 마시기 싫은 것도 맞았다. 지금 제 배 속에 아기가 자라고 있어 술은 더더욱 사양이다.
“치사하게. 네 유일한 친구를 이렇게 버려 두면…… 나는 혼자 술 먹어?”
“그래 그러자.”
박한수 친구가 자기밖에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술이야 혼자 먹어도 맛있으니까. 윤태서가 가방을 등에 메자 박한수가 뒤늦게 제 책도 쓸어 담아 가방에 대충 욱여넣었다.
“그러지 말고 나랑 놀자.”
“정말 네 친구가 나밖에 없는 거니? 그런 거니. 친구야?”
“그런 거지. 친구야.”
박한수가 가방끈까지 잡고 애원하는 눈빛을 보내니 태서가 안타까운 듯 고개를 내저었다.
“네가 그렇게 나한테 매달리는 이유가 있었구나.”
“내 친구는 너뿐이야.”
지나가던 누군가가 박한수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박한수가 돌아보니 혀를 내밀고 가는 게 평소에 장난치고 놀던 동기였다. 그뿐이 아니라 다른 이가 박한수의 어깨를 툭툭 치며 연락하라고 말하고 갔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친구가 나뿐이라고 말하는 것도 박한수만의 뻔뻔함이었지.
“술 말고 밥 먹자. 내일부터는 연락하지 말고.”
“내일은 왜 안 되는데?”
“내일은 중요한 날이야.”
강세헌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내일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데 그날을 박한수와 보낼 순 없지.
“마침 밥 먹으면서 할 말이 있던 참이었어.”
어디까지 말할지 모르지만 일단 박한수에게 밥 한 번은 사 줄 생각이긴 했다. 학교에서 시간을 외롭게 보내지 않은 데 전적으로 박한수의 영향이 컸다. 그가 원작에서 태서의 마지막을 본 인물이라는 이유로 박한수가 다가오는 걸 막지 않았다. 박한수가 제 부모에게 입이 가벼운 건 좀 그렇지만 그거야 애교로 넘길 수 있었다.
‘얘한테는 세헌이 형과의 사이를 말해 줘도 될 거 같고.’
더 나아가 임신도 말해 줘도 되겠는데 아직 확실하게 정하진 않았다. 밥 먹으면서 하고 싶으면 하고 아니면 말아야겠다.
“밥이라니 아쉽긴 한데 우리 태서가 원한다면… 어? 인혁아. 시험 잘 봤어?”
박한수의 부름에 태서가 뒤를 돌아보았다. 같은 강의실에 있었지만 끝과 끝에 앉아서 마주치지 않을 줄 알았다. 거기다 강인혁은 박한수가 아닌 태서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서 있을 때 다가와서는. 저도 작은 키는 아니였지만 강인혁은 그보다 더 컸다. 뭐, 키가 대수라고 세헌이 형이 더 크다.
‘나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냐.’
어린애들 키 재는 것도 아니고 또 내가 작으면 작은 거지 강세헌을 끌어들이냐. 태서가 고개를 잘게 저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집어치우고 강인혁을 올려다보았다.
“왜?”
저번에도 그렇고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게 도통 이상했다. 카페에서 사과까지 건넸고 나름 사이좋게 헤어졌다. 이제 마주친다고 으르렁거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태서의 기준에서 사이가 좋아진 거다.
그런데 그건 태서만의 생각이었나 보다. 제 물음을 무시한 채 빤히 응시하는 강인혁의 침묵이 무겁게 다가왔다. 어딘가 할 말이 있다는 눈빛인데 입술은 꾹 다물려 열릴 줄 몰랐다. 그 어색한 순간이 계속 이어지는 건 제게만 이상한 게 아닌가 보다.
“얘 왜 이래? 눈깔은 왜 저러고.”
박한수가 강인혁을 이상한 놈 취급했다. 태서가 슬쩍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강인혁의 눈동자가 울렁거리는 게 바라보고 있기 부담스러웠다.
한편 강인혁은 슬며시 풀어 낸 제 페로몬이 태서를 감싸는 걸 보고 묘한 느낌을 받았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이상한 만족감이 드는 것이다. 괜히 태서가 제 것인 것만 같은…….
‘그런데 왜 내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지?’
오메가라면 제 페로몬을 느낄 수 있어야 했다. 그게 아니면 오메가의 페로몬이 새어 나오거나.
어머니가 잘못 안건 아닐까, 강인혁의 침묵이 길어지자 점점 그가 불편해졌던 태서가 뒤늦게 한가지 떠올렸다.
‘아.’
강인혁이 말없이 바라보기만 한 이유를 알았다. 아직 서다래한테 사과하지 않은 걸 말하려나 보다. 태서가 박한수의 눈치를 보다가 입술을 최대한 작게 달싹였다.
“서다래한테는 나중에 할 거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너 다래한테 뭐 할 거 있어?”
박한수에게 안 들리길 바란 내가 잘못이지. 태서는 제 어깨에 올라온 박한수의 턱을 툭 밀어 버렸다.
“다래 때문이 아니라 다른 할 말이야.”
서다래가 강인혁의 정답 버튼이었나 보다. 이제껏 울렁거리는 눈빛만 보내던 강인혁이 입을 열었다.
“할 말? 저번에 다 했잖아.”
태서가 뚱하게 받아쳤다. 서다래가 아니면 얘가 나랑 할 말이 뭐가 더 있다고. 제 기분을 알아주라는 듯 눈까지 말똥말똥 떴다.
“그거 말고…….”
“잠깐. 인혁아, 잠깐만. 혹시 태서랑 따로 어디를 가려는 거 아니지? 태서 나랑 밥 먹으러 갈 건데.”
박한수가 두 손을 들어 태서와 강인혁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정리하고자 강인혁에게 말했다. 사실상 제 약속이 먼저라는 걸 알려 주기 위함이었다.
“혹시 같이 밥 먹을 거면 너도 껴 줄게. 그거 아니고 태서만 쏙 빼 가려면 그건 안 돼.”
박한수가 강하게 말했다. 절대 태서를 보내 줄 수 없다는 태도에 강인혁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박한수의 생각대로였나 보다.
“내일 만나자.”
강인혁이 한숨이 섞인 말을 내뱉었다. 제가 할 말은 윤태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끼어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박한수를 놓고 가자니 그게 너무 귀찮을 것만 같아 아예 다른 날로 잡았다. 강인혁의 비키라는 시선에 박한수가 선뜻 한 걸음 물러났다.
“내일 안 되는데.”
태서가 멀뚱히 내뱉었다. 제 대답에 강인혁의 표정이 언짢아지는 건 모르는 척 넘겼다. 딱히 여기서 강인혁의 기분을 맞춰 줄 이유는 없었다. 당장 그를 무시하지 않는 게 어디야.
“네 시간 오래 안 뺏어. 그러니까 잠깐이면 돼.”
“잠깐도 안 돼.”
“윤태서. 장난치지 말고. 중요한 일이야.”
“나도 중요해.”
태서가 말장난하듯 강인혁의 말을 반복해 왔다. 사뭇 가벼운 말투긴 하지만 진짜였다.
“나 내일 진짜 중요한 일이 있거든. 그래서 너한테 잠깐도 시간 못 내.”
“그게 뭔데. 그게 뭐기에…….”
“음…….”
내일은 강세헌과의 사이를 단정 짓기 위한 결전의 날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태서가 강인혁의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
“내 사람을 만들러 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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