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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47화 (47/130)

47화

“그만하세요.”

강인혁이 이 이야기로 더는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티를 냈지만 한미순은 가차 없었다. 가뜩이나 태서의 일로 속이 복잡한 그녀는 가늘게 뜬 눈으로 제 아들을 노려보았다.

“서다래 걔가 뭐라고 그렇게 놓질 못해. 걔 뭐가 그렇게 널 흔드는지 나는 도통 모르겠다.”

한미순의 말이 이어질수록 강인혁의 얼굴이 더욱 굳어져 갔다. 그의 시선이 잠깐 방을 향했다 돌아왔다. 한미순과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 시선을 내리니 테이블 위에 모아 올려 둔 종이가 그의 마음처럼 엉망으로 겹쳐 있었다.

강인혁이 인상을 찌푸리며 제 입 안의 살을 깨물어 댔다. 아릿한 고통이 강인혁의 흐려지려는 정신을 바짝 당겨 줬다. 지금은 방에서 기다리는 서다래가 우선이었다. 그래, 지금은 말이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요.”

“나중에 할 게 뭐가 있어.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어?”

“그냥 나중에 하시라고요.”

강인혁이 짜증스러운 말투로 대답하자 둘의 대화에 점점 가시가 돋아나고 있었다. 서로의 낯빛이 사납게 변하니 팽팽한 긴장감까지 맴돌고 있었다.

“그럴 시간 있으면 태서한테나 신경 써. 걔 페로몬도 맡아 보고 말도 걸란 말이야.”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

“그러니 태서가 오메가가 된 줄도 모르지.”

한미순이 혀를 차며 강인혁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원래 이렇게까지 아들과 날 선 대화를 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서다래라는 이름을 본 순간 그녀의 오갈 데 없는 화가 강인혁에게 향해 버렸다.

“걔가 발현한 건…….”

강인혁이 울컥해서 질렀다가 제 입술을 깨물어 억지로 말을 끊었다. 태서가 발현한 걸 가지고 몰아세우는 건 억울했지만 더 따져 봐야 유리할 게 없었다.

먼저 두 손을 든 건 강인혁이었다. 더 이상 이 대화를 지속하는 것보다 차라리 제가 물러나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할 말은 그거뿐이세요?”

그녀를 보내고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위를 울려 대던 허기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지금은 그녀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전부였다. 그런데 괜히 물어본 것 같았다.

“태서랑 약혼할 거야. 그렇게 알고 빨리 걔 정리해.”

“엄마!”

한미순이 서다래를 끝까지 물고 놓지 않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렸다. 아까 참자고 한 발 물러났던 강인혁이 언성을 높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내가 네 엄마야. 지금껏 옆에서 널 봐 온 게 나란 말이야. 그러니까 이 엄마 말 들어.”

한미순이 핸드백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부터 이 말을 하려고 온 게 분명했다. 강인혁이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에도 한미순은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아예 작정하고 온 듯 굴어 댔다.

“누구를 좋아하든 그거야 어쩔 수 없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네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누굴지.”

제 할 말을 마친 한미순은 더 머물기 싫다는 듯 핸드백을 팔에 꽉 끼고 자세를 잡았다. 턱을 치켜든 그녀는 강인혁에게 한 토막의 눈빛조차 건네지 않은 채 지나쳤다.

현관문이 무겁게 닫히는 소리와 함께 강인혁이 긴 숨을 내쉬었다. 제 어머니와 나눈 대화는 강인혁의 숨통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게 이제야 조금 트이는 것 같지만, 곧 그녀가 던지고 간 한마디가 강인혁의 심장을 다시 조여 왔다.

“윤태서가…… 발현했단 말이지.”

강인혁이 마른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오메가가 되고 싶어 하더니 결국 됐네.”

축하해 줘야 할 일인가. 너무 늦어서 아예 발현하지 못할 줄 알았다.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이라고 어머니는 찾아와서 압박하고 또 자신은 그것을 그냥 흘려 넘기지 못하고…….

그러다 거짓 웃음을 뚝 멈췄다. 윤태서가 발현했다니? 자신은 그에게서 어떤 페로몬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언제 발현했는지, 윤태서는 왜 제게 말해 주지 않았는지 점점 머릿속이 윤태서의 이름으로 가득 차올랐다.

“발현해 놓고…… 그토록 원하던 오메가가 되었으면서도…….”

윤태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내뱉을 땐 언제고 지금은 온갖 감정이 치덕치덕 묻은 말이 흘러나왔다. 적어도 제게는 발현했다는 걸 알려 줘야 하는 거 아닌가?

혹여나 히트라도 왔다면 더욱 제게 말해야 그를 도와줄 수 있었을 거다. 제가 아닌 다른 알파가 그를 발견하기라도 했다면.

“다른 알파…….”

강인혁이 이마를 짚으며 고민하다가 돌아섰다. 당장 현관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머릿속엔 어느새 태서로 가득 찼다.

“인혁아. 어디 가?”

어느새 방에서 나온 서다래가 강인혁의 팔을 붙잡았다.

“아, 만날 사람이 있어서.”

“급한 일이야?”

“조금.”

분명 어머니의 날카로운 말에 다래가 상처받을까 걱정했었다. 방에 있을 다래에게 어머니의 목소리가 닿지 않기를 바랐다. 그랬는데…… 분명 그랬는데 태서를 생각하느라 다래를 잊고 말았다.

“미안한데…… 잠깐이면 돼. 그러니까…….”

강인혁이 제 팔을 잡은 서다래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떨어뜨렸다. 그의 온기에 달가웠던 것도 잠시 제 손을 밀어 내자 서다래의 눈이 제 손에 머물렀다.

“금방 올게.”

함께 저녁 먹자고 한 건 어느새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당장 강인혁의 붕 떠 버린 마음이 지금 당장 가야 할 곳만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것을 알아챈 서다래가 어렵게 입을 뗐다.

“……윤태서 만나러 가는 거야?”

서다래의 목소리가 끊어질 듯 말 듯 가늘게 흘러나왔다. 태서를 만나러 가냐고 물어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득해서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느라 그랬다. 그런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서다래는 간절히 바랐다. 강인혁이 윤태서를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길. 제발.

서다래는 질문을 던져 놓고 정작 강인혁을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린 표정을 들켜 버리고 싶지 않았다.

“아니야.”

서다래의 바람이 통했는지 강인혁이 옅은 미소를 지어 왔다. 그는 서다래의 둥근 어깨를 쓰다듬었다.

“윤태서 만나러 가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잠깐만 시간을 줘.”

“걔량 관련된 것도 아닌 거지?”

“다녀올게.”

강인혁이 서다래로부터 몸을 돌렸다. 곧 현관문이 열리며 바깥에 머무르던 바람이 들어왔다. 그 바람이 서다래를 스치고 지나갔다. 유독 따뜻한 날씨에 그 바람만이 유독 차갑게 느껴지는 건 서다래의 착각이겠지.

“인혁아.”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서다래의 혼잣말이 울려 퍼졌다. 그는 거실에 남아 있는 강인혁의 페로몬을 흠뻑 들이마시고 한숨과 함께 내쉬었다.

“윤태서가 오메가가 되었어도 너는 신경 쓰지 말아야지.”

걔가 오메가가 된 게 뭐라고. 그가 모친과 나눈 대화를 전부 들은 서다래가 제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네 손을 잡았는데 이래. 너는 왜 내가 어렵게 선택한 결정을 흔드는 거야.”

이럴수록 내 마음이 얼마나 불안해지는지 모르고 그러는 거야?

“나는 널 보내지 않을 건데.”

어떤 짓을 해서라도 너를 내 옆에 두고 싶은데.

***

“일정을 전부 재조정했습니다.”

“수고했어요.”

“중요한 것은 따로 추려서 정리해 두었습니다. 파일에 따로 넣어 두었으니 그걸 확인하시면 됩니다.”

비서의 보고를 들으며 강세헌이 제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태연히 바라보던 강세헌이 돌연 입가를 끌어 올렸다. 헤어지기 전 태서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대뜸 휴가가 언젠지 물어보는 통에 그의 일정을 수정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그게 번거롭기는커녕 다음 주가 기대되었다.

“그럼 저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비서가 가벼운 인사와 함께 드레스 룸을 나갔고 강세헌은 마저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다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강세헌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비서가 제 일을 다 끝내지 못하고 되돌아왔다고 생각했다.

“번거롭게 일하는 재주가 있네.”

지금껏 제법 능력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초인종을 눌러 왔다. 비밀번호라도 알려 주면 알아서 들어와서 편하지만 비서는 윤태서가 아니니까. 강세헌이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나와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을 연 강세헌은 의외의 인물을 발견하자 현관문에 한쪽 어깨를 기댔다.

“뛰어왔니?”

숨을 헐떡이는 강인혁이 손등으로 제 입가를 훔쳤다. 차라리 땀이 흐르는 관자놀이를 닦아 내면 좋겠는데.

“이번에도 서류 들고 온 거면 돌아가고.”

“할 말이 있어서 왔어.”

“말로 사업 이야기 할 거면 그것도 돌아갔으면 좋겠네.”

실은 뭐가 되었든 강인혁이 제집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면 하는데. 강세헌이 대놓고 제 생각을 드러냈지만 강인혁은 그를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인혁아, 형이 상당히 피곤해.”

“형이 말한 그 상대가 윤태서야?”

“그거 물어보려고 온 거야?”

강세헌이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내는 동안에도 강인혁의 시선은 그에게 떨어지지 않았다.

“혹시 형은 태서가…….”

오메가인 걸 알고 있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강인혁은 목소리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왠지 그 말을 하는 거 자체가 그에게 태서가 발현했다는 걸 알려 주는, 만약 알고 있다면 확인시켜 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 강인혁이 이리저리 고개를 움직였다. 그러다 바라본 강세헌의 표정에 강인혁이 설마……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너무도 태연했다. 제가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르는데 강세헌은 전부 아는 듯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윤태서가 오메가가 된 걸 알고 있는 건가? 아니, 모른다 쳐도 강세헌의 저 태도는 윤태서의 형질 따위 상관없다는 것 같았다.

“이렇게 밤중에 찾아와서 태서를 들먹이고, 우리 인혁이가 사람을 잘 챙기네.”

강세헌이 언제 나갈 거냐는 눈빛으로 현관문을 가리켰다. 이제 그만 가 줬으면 하는데.

“비꼬지 마. 나는 형이 윤태서를 가지고 노는 게 싫을 뿐이야.”

“가지고 논다라…….”

강세헌은 반쯤 남은 물통을 빙글 돌렸다. 병 안에서 만들어진 소용돌이를 바라보는 강세헌이 이내 피식 웃었다. 자신이 태서를 가지고 논다고? 오히려 태서가 만든 소용돌이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이 나이에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는데 인혁아. 내가 알아서 할게.”

“그렇게 장난치듯 넘기지 마. 태서 건들지 말라고 하는 거잖아.”

강인혁은 평소와 다름없는 강세헌의 여유로운 태도가 보기 싫었다. 혹시나 윤태서가 오메가가 된 걸 알고 가지고 노는 거라면 그냥 지켜볼 수가 없었다.

“걔가 나랑 무슨 사이인 줄 알아?”

“너랑 무슨 사이인데?”

강인혁이 막 지를 듯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친구? 대학 동기? 아니면 집안끼리 친분 있는 사이? 그 무엇도 지금 상황에선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물며 친구가 맞는지조차 스스로 확신할 수 없었다.

‘윤태서랑 나는…… 무슨 사이지?’

강인혁이 혼란스러운 눈빛을 감추려 고개를 돌린 사이 강세헌의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친구라고도 말할 수 없나 보구나.”

“그건…….”

“태서와 내 사이는 네가 신경 쓸 게 아닌 거 같다.”

강세헌은 사촌 동생에게 명백한 선을 그었다. 그에겐 끼어들 자격이 없다는 듯한 단호한 어투에 강인혁이 살며시 제 입 안을 깨물었다.

반박하고 싶은데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속은 분명 짜증이 치솟고 있는데 그렇다고 그것을 풀어 낼 방법이 없었다.

강세헌이 빈 물통을 식탁에 내려놨다. 이제 강인혁과의 대화는 그에게 불필요했다. 강세헌이 강인혁을 지나치다가 한마디 던졌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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