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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45화 (45/130)

45화

한미순이 동요하지 않은 척 커피를 향해 손을 뻗었다가 부들거리는 제 손가락을 발견했다. 커피 잔을 드는 대신 손가락을 오므리며 도로 다리 위로 올린 한미순은 잠시 다른 곳을 보았다.

‘약혼 이야기를 없던 일로 하자니…….’

지금 당황해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당황할수록 생각이 좁아지고 대응할 수 있는 순발력이 줄어들 뿐이었다. 흥분이 차올라 얼굴이 뜨거워지려 했다.

이제껏 그녀는 태서만 기다려 왔다. 인혁이한테 태서만 붙여 주면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달아 주는 거라고 여겨 왔다. 그런데 지금 김미경이 제 아들의 앞날을 막아서려 하고 있었다. 한미순이 몇 번 심호흡으로 평정심을 찾는 동안 김미경이 말했다.

“실은 조금 더 확실해진 뒤에 말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말하게 됐네.”

아마 한미순이 단순히 일상 이야기만 하고 돌아갔다면 김미경도 약혼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태서가 오메가가 된 것도 모르는데 인혁이와 이어 주자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언급하고 말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언니. 없던 걸로 하자니.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있는 거야? 응?”

“태서한테 만나는 사람이 생겼어.”

“태서가?”

김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사리 꺼낸 만큼 한미순에겐 미안하지만 지금 태서의 상황을 제대로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다만 무거워지는 마음에 김미경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너한테 이런 말 하는 거 나라고 쉬운 건 아니었어. 그런데 시간 끌어 봐야 뭐해. 차라리 빨리 말하는 게 낫지.”

김미경이 이해해 달라는 듯 굴면서도 미안한 마음 때문인지 한미순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녀가 커피를 들어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을 깬 건 아쉬운 게 많은 한미순이었다.

“만나는 사람이야 정리하면 되지. 가볍게 지나가는 인연을 두고 약혼을 없던 일로 하는 게 말이 돼?”

한미순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을 저었다. 아예 반쯤 몸도 틀어 김미경의 말에 거부감을 드러냈다.

“언니, 인혁이랑 태서 자그만치 10년이야. 그 시간 동안 태서가 우리 인혁이 좋아하는 거 내가 마음 아파하면서 다 지켜봤어. 언니도 잘 알잖아.”

“알지. 나도 아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서가 인혁이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줄 알았다. 아직도 오메가가 되지 못해서 인혁이를 놓칠까 봐 불안해하는 줄 알고 속이 새까맣게 타 버렸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됐다고 태서가 다른 사람을 향해 웃는 걸 보고 있으니 김미경도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런데 인제 와서 왜 그래. 태서가 인혁이 좋아하니까 내가 특별히 마음 쓴 건데 잊은 거야?”

태서가 인혁이에게 반한 걸 김미경이 말했던 날 한미순이 두 아이의 약혼을 언급했었다. 태서가 먼저 인혁이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인혁이도 나중에 태서를 좋아하게 될 거라면서 적당한 때에 두 아이를 이어 주자고 했었다. 그때 김미경은 한미순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나도 미안하게 생각해. 그런데 태서가 지금 만나는 사람과 결혼까지도 고려하고 있어. 단순하게 만나는 사이 아니야.”

김미경이 잠깐 말을 멈췄다가 이내 어렵사리 뒷말을 이어 나갔다.

“얼마 전에 태서가 만나는 사람이 집에 왔었어. 둘 보니까 가볍게 흘러갈 인연은 아닌 거 같아.”

“인연으로 따지면 인혁이랑 더 깊지. 태서가 인혁이를 좋아하던 시간이 훨씬 길잖아. 그 사람이랑은 얼마나 됐대?”

김미경이 살그머니 제 입술을 깨무는 걸 포착한 한미순이 더욱 그녀를 몰아세웠다.

“태서가 이제 인혁이 안 좋아한대? 내가 보기엔 태서, 지쳐서 잠시 다른 사람 만나는 거 같은데 그래 봐야 오래 못 가.”

“그건…….”

“아니면 결혼 날짜라도 잡았어?”

“그런 건 아니야.”

강세헌이 집에 왔을 때 언제 결혼한다는 그런 이야기는 하나도 한 게 없었다. 그러니 한미순의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지만 가볍게 만나는 게 아닌 건 확신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태서가 임신했고 강세헌이 그 아이의 아빠라고 자신을 소개했었으니까.

차마 한미순에게 태서의 임신까지 말하지 못한 김미경은 애매하게 말을 매듭지었다.

“어쨌든 약혼은 못 할 거 같아.”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김미경이 모든 걸 설명하지 못한 대가는 그대로 한미순의 원망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목소리가 이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워졌다. 한미순은 아까와 다르게 제 부들거리는 손을 감추지 않았다. 옆에 놔둔 가방을 가져오면서 한미순이 김미경을 노려보았다.

“태서가 오메가가 되기만을 기다렸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래? 언니한테 정말 서운하네.”

“미순아, 조금만 진정해 줘. 나중에 내가 다 설명할 테니까…….”

“오늘은 그만 일어날게.”

한미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들어올 때 지었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 없다고 여긴 한미순이 김미경에게 마지막 말을 건네고 돌아섰다.

“언니, 나는 우리의 약속을 깨지 않을 거야. 태서가 아직 발현하지 않았는데 약혼하자고 한 건 내가 성급했네. 기다릴게.”

“미순아.”

바깥의 비서가 나설 틈도 없이 벌컥 문을 연 한미순이 그대로 나가 버렸다.

“하아, 이를 어쩐다.”

김미경이 제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태서가 오메가가 된 건 언급도 못 했다. 이러다가 나중에 알면 어떻게 나오게 될지.

***

“세상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언니가 내 뒤통수를 칠 줄 몰랐네.”

한미순이 연신 혀를 차며 입술을 이죽거렸다. 늘 사람 좋은 미소로 김미경을 대해 왔다. 그녀와 친하게 지내는 것만으로도 언젠가 제게 도움이 될거라 여기며 제 시간을 갖다 바쳤는데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이게 전부 제 남편이 마트로 옮겨 간 게 원인이었다. 제가 잘 나갔으면 김미경의 입에서도 쉽게 약혼을 없던 일로 하잔 말이 나오지 않았을 텐데.

어쩐지 요즘 되는 일이 하나도 없더니 이런 일까지 벌어질 건 한미순의 예상 밖이었다.

“호텔 몇 개 가지고 있다고 아주…….”

“동서?”

급기야 김미경이 굴리는 호텔을 깔아뭉개며 잔뜩 기분 나쁜 티를 내던 한미순이 낯익은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형님.”

동서 맞네.

서은희를 본 한미순이 억지로 목소리를 짜냈다. 가뜩이나 기분이 안 좋은 판에 서은희를 만나니 달가운 인사가 나올 리 없었다. 한미순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은희는 환한 웃음과 함께 다가왔다.

“여긴 어쩐 일이야?”

“제가 묻고 싶은 말이네요. 여기 제 친한 언니가 대표로 있는 곳인데 형님은 어쩐 일이세요?”

“아아, 나는 세헌이 만나고 왔어.”

그제야 서은희가 왜 이 호텔에 있는지 이해한다는 듯 한미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호텔에 강세헌이 사업 미팅으로 드나드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조카가 바쁘니 형님이 이쪽으로 왔나 보네, 딱 그 정도로만 생각한 한미순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들어가세요, 형님.”

서은희를 포함해서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한미순이 적당히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혹시 또 아는 얼굴이라도 마주해서 쓸데없는 인사를 주고받기 싫은데. 가방에 넣어 둔 선글라스에 생각이 미친 한미순이 가방을 살짝 위로 들 때였다.

“지금 많이 바빠? 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잠깐 시간 안 될까?”

“다른 날은 안 그런데 오늘은 바쁘네요. 연락 주세요.”

나중에 강세헌의 선 자리를 주선하려면 서은희와 좋게 헤어지는 게 좋았다. 한미순이 적당하게 그녀를 밀어 내면서 다음을 기약하는데 서은희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 태서라는 아이 아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뭐. 다음에 봐.”

“누구, 태서요? 윤태서?”

“응 그 윤태서.”

“당연히 잘 알죠.”

한미순이 선글라스를 꺼내며 심드렁히 대답하다가 불현듯 서은희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형님이 어떻게 태서를 아세요?”

“혹시 그 아이 오메가야?”

“아직 베타예요. 그래서 오메가로 발현하기를 기다리고 있……. 음?”

“그럼 다른 앤가? 아니지. 윤태서라는 이름이 그렇게 흔한 것도 아니고.”

서은희가 만나 본 태서는 인혁과 같은 나이에 대학교도 같았고, 인혁을 아는 눈치였다. 인혁의 모친인 한미순이 태서를 알까 싶어서 물어본 거였는데. 서은희가 흘린 말을 주워 담은 한미순은 조금씩 심각해졌다.

“잠깐만요. 태서가 왜요?”

한미순이 선글라스를 손에 쥔 그대로 돌아선 서은희를 잡았다. 이제 아쉬운 건 서은희가 아니라 그녀였다.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님이 태서를 언급한 건지도 궁금했다.

“세헌이가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더라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동서가 몇 번 말했던 게 생각나서 물어 본거야.”

“세헌이가 태서를요?”

“응. 인혁이랑 나이도 같기도 하고 그래서 물어봤는데 역시 맞는 거 같네.”

서은희의 말이 이어질수록 한미순은 점점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가고 있었다.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세헌이 태서를 소개한다는 건지 그것부터 이상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형님 방금 태서가 오메가냐고 물었었죠?”

“응.”

한미순은 복잡한 마음에 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분명 태서는 베타였다. 방금도 김미경을 만나고 왔는데 다른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런데 왜…….

한미순의 표정이 복잡해지는 걸 바라본 서은희가 어느 정도 눈치채고 앞뒤 상황을 맞춰 봤다.

“나한테는 오메가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최근에 발현한 거 같네.”

한미순이 움직임을 뚝 멈추더니 이내 서은희를 돌아보았다.

“……태서가 발현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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