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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44화 (44/130)

44화

일단 태서가 한미순이 거론한 그 아이인지는 미뤄 두었다. 그거야 나중에 따로 확인하면 될 일이고 지금은 앞에 있는 태서에게 집중했다. 눈을 마주칠 때마다 미소를 지어 주는 태서는 풋풋한 분위기의 아이였다. 세헌이 못지 않게 잘생긴 데다 성격도 좋아 보였다. 제법 인기가 많아 보이는데 왜 제 아들과 만날까?

“가장 중요한 질문을 깜박했네요.”

내 정신 좀 봐, 서은희의 중얼거림에 태서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떤 질문을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여기 오기 전에 꽤 많은 질문을 추려 봤지만 막상 이곳에 오니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태서는 정신 바짝 차리자는 의미로 눈에 힘을 줬다.

“세헌이랑 어디서 처음 만났어요? 내 아들이지만 딱히 상냥한 편은 아니라 연애하기도 힘들 줄 알았거든요.”

“네?”

의외의 질문에 태서가 되물었다. 생각보다 무난한 질문에 자기도 모르게 눈을 깜박거렸다. 방금 힘을 준 터라 시려 왔던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어갔다. 앞의 질문은 어느 정도 예상했는데 뒤의 질문에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계속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가 풀기를 반복하다 보니 이제 손끝이 다 저려 왔다. 태서는 남몰래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대충 첫 만남이라고 하면 강세헌의 벗은 등짝이긴 한데…….

태서가 강세헌을 바라보자 그는 어떤 대답이 나올까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만난 건 여기 이 호텔이었습니다. 제가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데 세헌이 형이 도와줬어요. 왕자님까진 아니었지만 키다리 신사같이 운명처럼 나타났어요.”

대답이 제법 로맨틱하다? 강세헌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정작 그날 강세헌은 자신을 버려진 물건 취급했고 자신은 주워 달라고 했었는데 말이다.

강세헌의 눈이 자신의 대답을 비웃는 거 같아 태서가 뒷말을 붙였다.

“그리고 세헌이 형이 상냥한 편이 아니긴 해요.”

“그렇죠?”

서은희가 그럴 줄 알았다며 목소리가 올라갔다. 태서가 맞다는 듯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고 가만히 있으니 이제껏 듣고만 있던 강세헌이 끼어들었다.

“그다음은 없어?”

“뭐요?”

“상냥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뭐, 재밌었다든가 또는 잘 챙겨 줬다든가 그런 거 있잖아. 내가 그때 어떻게 해 줬는데.”

왜 가만히 있냐는 강세헌의 불만에 태서가 그의 말꼬리를 잡았다.

“솔직히 말해서 형이 재밌진 않죠. 그때도 나보고 뭐라고 했었는지 잊었어요?”

핏덩이라고 했던 게 어디의 누구더라?

“그럼 우리의 대화가 즐거웠던 건 다 네 덕분이다?”

“에이, 그렇게 대놓고 말씀하시면 저 부끄러운데요.”

태서가 강세헌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며 실실 웃었다. 지금까지 대화를 주도한 건 강세헌이지만, 대화에 생기를 불어넣은 건 솔직히 자신이었다. 그건 강세헌도 인정해야 하지 않나, 태서가 빙그레 웃다가 아차 싶었다. 강세헌의 부모님이 계신 자리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받아치고 만 것이다.

조금 더 야무지게 굴었어야 했는데. 가벼운 이미지로 비춰지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데 강세헌이 태서에게만 들리게 속삭여 왔다.

“그냥 네 모습 그대로 있어도 돼. 계속 긴장할 거 없어.”

태서가 그를 올려다보는 동시에 손에 커다란 온기가 덮였다. 강세헌이 제 손을 덮은 것도 모자라 약하게 힘을 줘 쥐었다 풀어 주었다. 옆에서 제가 계속 긴장하고 있음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것을 고스란히 강세헌에게 들켰다고 생각하니 태서는 이제 굳이 감추려 들지 않았다.

자기 혼자 주먹을 쥐었다 푸는 것보다 강세헌이 주물러 주니 손끝의 저림도 사라졌다.

“어지간한 마사지기보다 낫네.”

“당연히 그런 기계와 비교할 수 없지.”

태연하게 대답하던 강세헌이 뒤늦게 웃음이 나오는지 반대 손을 들어 제 이마를 가렸다. 강세헌이 따뜻한 눈빛으로 태서를 응시했다. 진짜 태서와 있으면 심심할 틈이 없었다. 제 부모님에게 소개시켜 줬으니 이제 태서만 데리고 나가고 싶어졌다.

한편 조용히 둘을 지켜보던 서은희가 미소를 삼킨 채 제 남편을 돌아보았다.

“둘이 어떻게 어울리는지 잘 알겠네. 당신도 그렇죠?”

“그러게.”

강진한이 흥미로운 기색을 드러냈다. 둘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 보니 제법 재밌는 연애를 하고 있었다. 제 아들은 일할 때와 비슷하게 구는데 그에 받아치는 태서가 상당히 말주변도 좋고 센스가 남달랐다. 그러니 둘이 나누는 대화도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는 거다.

이제 강진한도 태서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졌다. 그런데 아쉽게도 강세헌이 그 기회를 앗아 갔다.

“그럼 일어나 보겠습니다.”

강세헌이 일어나면서 덩달아 그와 손을 잡고 있던 태서까지 딸려 갔다. 태서가 얼떨떨한 눈으로 강세헌과 부모를 번갈아 보았다. 인사하고 대화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제 겨우 3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일어난다고?

“다음에 또 봐요.”

그러나 태서만 당황했고 다른 이들은 아닌가 보다. 서은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태서를 보며 다음을 기약했다. 강진한은 조금 아쉬운 듯하지만 역시 비슷한 인사를 건네 왔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흘러가는 분위기를 살피던 태서가 적당한 인사를 던지자마자 강세헌이 의자를 돌아 나왔다. 여전히 태서의 손을 잡은 채로 말이다. 그리고 성큼 룸을 가로질러 금방 밖으로 나왔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태서는 순간 이동이라도 한 듯 복도의 벽면을 보며 기막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뭐야.

“이렇게 빨리 나와도 돼요?”

“안 될 이유가 있나?”

딱히 안 될 이유는 없지만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게 문제였다.

“나는 오늘 세헌이 형 부모님 뵙는다고 새벽부터 준비했는데…….”

다소 허탈하다는 듯 태서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뭐가 이렇게 짧아요.”

나중엔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옷을 고르고 단정하게 머리를 넘기고 꽃을 사고 만나면 어떤 대화를 나눌지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고. 태서가 주머니에 넣어 뒀던 종이를 꺼냈다. 몇 번 접어서 주머니에 넣고 의자에 앉아 있었더니 종이가 잔뜩 구겨졌다. 엄지로 종이의 표면을 비벼 대며 태서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면접 보듯이 자기소개서까지 준비했더니.”

“제법인데? 그래서 어떤 모습을 보여 주려고 그랬어?”

강세헌이 보고 싶은지 종이를 향해 손을 뻗어 왔다. 그러나 그의 손이 닿기 전 태서가 종이를 뒤로 숨겨 버렸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가 열심히 준비했다는 걸 보여 주려는 거지 강세헌에게 보 여주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외동아들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습니다. 제 장점은 순발력이 좋다는 것이고 단점은 생각이 많다는 겁니다. 단점이지만 그만큼 신중하다는 게 저만의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세헌이 형과는 호텔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제가 곤란한 와중에 형의 도움을 받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몇 번의 만남을 통해 싸운 날도 많았지만 잘 지낸 날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도 어느 순간…….

종이를 쥔 손이 흔들렸다. 강세헌에게 언제 마음이 넘어갔지?

‘아무튼 이건 절대 못 보여 줘.’

아마 읽으면 배를 잡고 뒤집어질지도 모른다.

“단정하고 차분하며 의젓하고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해서 미래가 기대되는 인재상이요.”

“……그건 나중에 진짜 취직할 때 써먹어.”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강세헌의 가차 없는 판단에 태서가 입술을 삐죽였다. 안 그래도 준비 많이 한 거 치고 제 예상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다.

버벅거리고 부끄러움만 타고 강세헌과 장난치듯 주고받은 대화를 보여 준 게 다다. 태서가 한숨을 내쉬며 제 걱정을 드러냈다.

“절 잘 봐주셨을지 모르겠네요.”

“네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 거로 충분해.”

“제 평소의 모습이 그렇게 괜찮아요?”

그래서 남들에게 보여도 전혀 부족하지 않다고 여겼나? 태서는 제 객관적인 모습이 그렇게 괜찮냐면서 강세헌에게 더 좋은 말을 들려 달라는 은근한 기대를 내비쳤다.

“처음부터 꾸며진 이미지로 다가가 봐야 너만 피곤해져. 나중을 생각해. 그냥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게 가장 좋지.”

“그러니까 내가 괜찮은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다?”

“……밥 먹자.”

태서가 기분 나쁘다는 듯 받아치자 강세헌이 말을 돌렸다.

“말 돌리지 말죠?”

“배고프지 않아? 멀리 갈 거 없이 여기서 먹고 가자.”

“아까 한 말 다시 설명해 보라니까요?”

“저번에 먹은 버거 맛있어 보이던데 그거 먹자.”

“계속 말 돌린다 이거죠?”

“그 종이 나 보여 주면 제대로 대답할 생각도 있어.”

강세헌이 종이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자 태서가 상황을 정리했다.

“그냥 밥 먹으러 가요.”

“잘 생각했어.”

강세헌이 터트린 웃음이 복도를 울렸다. 그 웃음이 자신을 놀리는 것만 같아 태서의 볼이 씰룩 올라갔다. 계속 자기를 놀리기만 하고 오늘 만남을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형은 아무 생각도 없이 왔어요?”

“딱히…….”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왔던 강세헌이 그대로 대답하려다 갑자기 멈춰 섰다. 복도의 중간에 멈춰선 만큼 지나가는 사람들이 강세헌을 힐끔거렸다. 그리고 맞잡은 손을 타고 시선이 넘어와 태서까지 바라본 후 지나갔다.

아까 손을 잡은 이후로 왜 아직까지 계속 잡고 있는지. 태서는 이제라도 손을 놓을까 하다가 딱히 의미가 없을 거 같아서 놔뒀다. 대신 왜 멈췄냐는 듯 강세헌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까 깜박한 게 있어.”

“뭔데요?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말할래요?”

“그럴까?”

태서가 순순히 몸을 돌렸다. 아직도 그 자리에 계시다면 바로 가서 말하고 나와도 괜찮았다.

“자기를 잊었어.”

-자기 소리에 뭐가 이렇게 반응이 좋아. 앞으로도 불러 드려요?

[좋지. 이왕이면 다른 사람 앞에서 불러 주면 더 좋고.]

일전에 나눴던 대화가 떠오르자 태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 인간이.

***

“있잖아. 태서와 인혁이의 약혼 이야기는 없던 일로 하자.”

김미경이 어렵게 내뱉는 말에 한미순이 입가가 부르르 떨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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