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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43화 (43/130)

43화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랜만에 호텔에 온 한미순은 비서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오늘 김미경과 만나기로 약속한 한미순이 제 얼굴의 반을 가린 선글라스를 벗으려 손을 들 때였다.

“앗.”

옆을 지나가던 남자가 들고 있던 무언가와 팔을 부딪힌 한미순이 놀라 짧은 비명을 흘렸다.

“죄송합니다.”

한미순이 돌아보니 남자가 꽃 때문에 앞을 제대로 못 본 걸 알았다. 심하게 부딪힌 것도 아니고 그녀의 팔에 꽃이 스친 정도라 한미순은 괜찮다는 대답으로 넘겼다. 남자가 고개를 숙여 다시 인사를 해오 는 것으로 일이 마무리되니 그는 다시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다만 한미순만이 방금 부딪힌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서 아닌가?”

워낙 큰 꽃다발이 얼굴의 반을 가려서 제대로 보질 못했다. 한미순이 따라가 볼까 고민하다가 돌아섰다. 잘못 본 거라면 괜한 걸음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거기다 지금은 태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만나러 온 길이었다.

한미순이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문에 드문드문 비친 제 얼굴을 보며 한미순이 입가를 조였다 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눈 아래 유난히 두껍게 올린 화장을 약지로 훔치며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확답을 받아야지.”

요즘 한미순은 마음이 불편해 제대로 먹고 자지 못했다. 밤에 자려고 누우면 아들의 집에 있는 서다래가 떠올랐고 눈을 뜨고 있으면 강세헌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계속 심란한 마음이 들다 보니 결국 그녀의 건강에도 영향을 끼쳐 왔다. 신경성 두통을 달고 살았고 불면증으로 수면제를 처방받았다. 샵에서도 피부가 까칠하다며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올 정도였다. 그러면서 침침하게 낀 눈 아래에 유난히 붓이 오래 머물렀다.

그래서 한미순이 먼저 김미경에게 연락했다. 태서가 오메가로 발현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지만, 그러다가 제 신경 줄이 얇아져서 쓰러질 것 같았다.

“태서랑 약혼이라도 시켜 놔야겠어.”

그리고 아이들이 졸업하는 시기에 맞춰 결혼만 시키면 한미순을 골치 아프게 하는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었다. 인혁이의 옆에 붙은 서다래를 떼어 놓을 수 있고 강세헌을 상대할 든든한 힘도 얻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김미경을 설득시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동시에 한미순은 그 어느 때보다 굳은 눈빛으로 앞을 내다보았다.

“언니.”

한미순의 인사에 김미경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반가운 눈인사와 함께 소파를 가리켰다. 그리고 비서가 나가기 전 차를 준비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오랜만이네.”

“그러게. 그동안 바빠서 연락을 못 했어. 언니도 일 때문에 바빴지?”

가장 최근에 만났을 땐 김미경이 태서로 인해 마음이 아플 때였다. 그래서 한미순은 그날의 일을 떠올리지 않게 말을 돌렸다.

“나야 늘 그렇지.”

비서가 들어와 커피를 내려놓는 사이 김미경이 한미순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곤 커피 잔을 든 채 흘러가듯 말했다.

“일도 바쁘고 태서한테 신경도 많이 썼지.”

예전에 태서가 집을 나간 일로 김미경이 한미순의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태서의 이름이 언급되니 한미순은 기다렸다는 듯 운을 뗐다.

“안 그래도 그때 인혁이 집에 가 봤는데 태서는 없었어.”

오히려 서다래가 그 집에 있는 걸 알고 얼마나 기함했던지. 당시에 정신이 없어서 김미경에게 제대로 연락도 못 했다. 그런데 그 일로 김미경도 할 말이 있었나 보다.

“응, 태서 다시 집에 들어왔어. 아는 사람……의 집에 있었다네.”

아는 사람에서 어쩐 일인지 김미경은 잠시 생각에 빠진 듯 말을 늘였지만, 곧 태연하게 굴었다. 한미순이 반색하며 김미경에게 더 가까이 엉덩이를 붙였다.

“태서가 다시 들어왔다니 다행이네. 얌전하고 착한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겠어. 언니는 놀라겠지만 난 얼마나 태서가 안타깝던지…….”

한미순이 김미경의 팔을 쓰다듬으며 연신 잘됐다고 말하면서 그녀를 달래 주었다. 제 아들이 태서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기에 한미순이 더욱 나서서 태서를 예뻐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 주었다. 그래서인지 김미경도 한미순의 태도가 별로 이상하다는 걸 느끼지 못했다.

“나는 태서 마음도 이해가 가.”

한미순은 거기에 더해 태서의 마음까지 들여다보듯 굴었다. 태서가 잘못을 저질렀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집을 나간 사정은 예전에 김미경에게 들었다. 그때는 태서가 어디를 갔을까 싶은 궁금증에 초점을 맞춰서 대화를 나눴다면 오늘은 달랐다.

“그게 어떻게 태서의 탓이겠어. 발현이라는 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기다리는 아이한테는 지칠 일이지. 그러니까 그 답답한 마음에 일을 치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만큼은 태서를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나도 이번에 생각을 해 봤는데…….”

한미순이 말끝을 흐리자 김미경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시간을 끄는지 싶었다.

“태서랑 인혁이랑 약혼시킬까?”

“약혼?”

김미경이 당황해서 되물었다.

“응, 조금 더 기다리다가 시킬까 했는데 지금 약혼하고 후에 결혼시키면 되는 거니까. 태서가 발현하려는 것도 다 인혁이한테 마음이 있어서 그런거 잖아. 그것도 모르고 내가 너무 기다리게만 한 거 같아서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나 몰라.”

원래라면 누구보다 기뻐할 김미경이 복잡한 눈빛을 띠었다.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한미순이 말했다.

“언니 나는 태서가 오메가가 되지 않아도 괜찮아.”

한미순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 당장 태서의 형질이 문제가 아니었다. 제 아들의 앞날을 위해서라면 평생 발현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저 윤태서, 그 아이가 필요했다.

***

“대학생이구나.”

어쩐지 슈트가 어울리지 않는다 싶었다. 태서의 나이와 현재 대학생이라는 걸 들은 서은희와 강진한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태서의 앳된 얼굴을 보고 어리다고 생각했기에 별로 놀라지 않은 서은희와 다르게 강진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나이 차이가 제법 컸다. 거기다 회사원인 제 아들과 다르게 아직 풋풋한 대학생이었다. 흡사 제 아들을 도둑놈 취급하는 강진한의 눈빛을 강세헌이 모를 리 없었다.

“그렇게 본다고 태서의 나이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네 나이도 달라지지 않겠지. 대체 몇 살이나 어린 아이를…….”

강진한이 대놓고 아이라고 표현하자 태서가 제 볼을 쓰다듬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중요한 자리였기에 예의를 갖추기 위해 슈트를 차려입은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강세헌과 조금이라도 어울렸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제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

그렇게 어린 나이도 아닌데 강세헌의 부모님에게는 한껏 어리게만 비치나 보다. 태서가 어쩌나 싶은 눈빛으로 강세헌을 보았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너보단 내가 욕먹을 테니 마음 편하게 있어.”

그 눈빛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강세헌이 태서를 달랜다고 나름 위로의 말을 건네 왔다. 다만 받아들이는 사람한테 그게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형이 욕먹는 걸 마음 편히 보라고요?”

태서가 강세헌에게 상체를 살짝 숙이며 속삭였다. 그에 강세헌도 제 부모가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낮췄다.

“너라면 팝콘 들고 볼 거 같은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윤태서다. 강세헌을 놀리는 재미에 사는 윤태서라면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 같았다.

강세헌의 장난에 태서가 발끈했다.

날 뭘로 보고.

“그렇게 말하면…… 맛별로 팝콘 사 들고 봅니다.”

“마음대로.”

강세헌이 웃으며 상체를 들었다. 그리고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궁금해하는 부모님을 향해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슨 사업 설명회에서 이 정도 리스크는 안고 간다는 말하는 듯한 태도였다. 강세헌의 당당한 표정에 강진한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젓고 말았다. 일 할때도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아들인데 지금이라고 다를까.

“그런데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나요? 이름도 그렇고 왜 이렇게 낯익지?”

서은희가 태서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얼굴은 둘째치고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어디선가 들은 거 같은데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넘기자니 괜히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녀의 의문을 강세헌이 채워 주었다.

“인혁이와 같은 학교입니다. 어릴 때부터 어울렸다고 하니 작은어머님을 통해 들으셨을 수도 있고요.”

“어머, 그런 거 같네? 어쩐지 들어 본 이름이다 했어…….”

제가 생각한 게 맞았는지 서은희가 반색하며 말하다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점점 목소리가 잦아들어 갔다. 태서가 왜 그러냐는 듯 바라보는데도 서은희는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누군지 깨달으니 줄줄이 소시지처럼 한미순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인혁이와 어울리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가 인혁이를 좋아한다. 지금은 베타지만 나중에 오메가가 되면 이어 주려고 한다. 우리 인혁이는 정해 둔 짝이 있는데 세헌이도 이런 아이가 있으면 얼마나 좋냐 등등등.

한미순이 꽤 오래전부터 제 마음에 담아 둔 아이가 있다고 했었는데 설마 그 아이는 아니겠지?

잠깐 고민하던 서은희가 확인차 물었다.

“혹시 형질이 어떻게 되니?”

“저 오메가입니다.”

오메가라고 하니 그 아이가 아닌가? 아니면 발현했을까? 서은희가 헷갈린 눈빛을 지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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