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박한수에게 제 형질을 밝힌 건 반쯤은 충동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굳이 제 부모님처럼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해야 할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친구니 부모님보단 편한 사이기도 했고 또 방금처럼 미래가 아니더라도 박한수가 다른 누군가를 소개시켜 줄 수도 있으니 미리 자를 겸 해서 말했다.
박한수가 어떻게 받아들이든 제 할 말을 한 태서는 키보드를 두들겼다. 빨리 과제를 끝내야 강세헌에게 가서 따질 수 있었다.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면 누가 좋아한다고.’
어제 분명 난감하던 찰나에 나타난 강세헌을 보고 반가워했으면서 태서는 샐쭉하니 입술을 내밀었다.
‘다음엔 꼭 말하고 나타나라고 해야지.’
애초 그가 오지 않았으면 하는 전제는 없었다. 이전엔 그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강세헌이라는 존재가 꽤 든든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어제 저녁은 먹었나.’
“발현?”
“……깜짝이야.”
대뜸 소리를 질러 오는 박한수 때문에 태서가 어깨를 움찔거리며 뒤로 상체를 물렸다가 자세를 바로했다.
“뭐야. 발현이라고? 발현했다고?”
박한수의 목소리가 커지자 태서가 그의 입을 막았다가 놔줬다. 적당히 흥분을 가라앉히라는 의미로 힘 조절을 하지 않았더니 박한수의 입술 주변에 손가락 자국이 남았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목소리가 크다, 너.”
“지금 내 목소리가 문제야? 언제? 언제 발현했는데?”
“언제 발현했는지가 뭐가 중요해.”
태서가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지만 박한수에게는 가벼운 이야기가 아닌 모양이다. 그가 태서의 손을 치우며 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어제 발현한 건 아니잖아.”
“아무튼 그렇게 됐다.”
태서가 박한수의 얼굴을 뒤로 밀어 내고는 더 묻지 말라는 듯 노트북을 두들겼다. 타닥거리는 소리만 울리는 와중에 박한수는 한껏 혼란스러운 눈으로 태서를 훑어 내렸다. 지금껏 제가 알던 베타 윤태서는 사라지고 이제 알파든 오메가든 형질을 띠게 되었다는 건데 딱히 달라진 점을 찾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베타가 아니라는 건데…. 박한수의 혼잣말이 다 들려오는데도 태서는 노트북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너 그럼 그…… 페로몬도 뿜어내고 있는 거냐?”
외양으로 달라진 걸 찾지 못한 박한수가 어색한 목소리로 페로몬을 들먹였다. 그도 베타로 살아왔고 페로몬이라는 게 저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보니 낯설기 짝이 없었다.
“아니.”
“그래? 그런데 진짜 발현했다는 거지?”
“그래.”
“미래한테 연락 안 한 것도 그 탓이고?”
“그거랑은 별개야.”
태서가 진동이 울리는 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상단에 뜬 한미래의 메시지를 읽은 태서는 박한수와 눈을 마주쳤다.
“미래는 예쁘고 성격도 좋은데 이성적으로 끌리진 않았어. 친구로 지내면 좋을 거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밥 먹자는 내용에 적당히 다음에 먹자는 답을 전송한 태서는 작게 목소리를 흘렸다.
“다른 베타도 소개 안 해 줘도 돼.”
태서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단순히 베타만이 아니라 다른 형질인도 그렇지만 더 말하진 않았다. 나머지는 말 안 해도 알아듣겠지.
박한수를 놀라게 할 마음은 없었지만, 그가 조용해지니 태서는 한결 차분히 과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까 말한 시간은 이제 2분밖에 남지 않았다. 2분 안에 강인혁과 서다래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냥 일어나야지.
“그런데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되냐?”
박한수가 몇 번 입술을 달싹였다. 물어보겠다고는 했는데 말해도 될까 싶어 하는 망설임이 대놓고 드러났다. 제 나름 난감할 수 있는 질문을 하려는 모양인데 박한수의 머릿속이 투명하게 보였다.
태서가 노트북을 덮으며 그 위로 팔꿈치를 기댔다. 그대로 턱까지 얹으며 심드렁히 말했다.
“서다래처럼 생겨야지만 오메가인 건 아니다.”
“그래? 잘됐네. 축하한다.”
박한수가 제 머리를 긁적였다. 태서가 발현했다고 하니 방금까지 제 나름의 조언이라고 건넨 말들이 다 의미 없어졌다. 베타끼리 만나는 게 좋은 만큼 오메가가 된 태서는 한미래보다 강세헌이랑 더 잘 어울리는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또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자니 걸리는 게 있었다.
“그런데 나 조금 헷갈린다. 너 이제 강인혁 안 좋아한다면서. 그런데 오메가가 됐으면 걔한테 고백할 거냐?”
“오메가가 되었다고 걔한테 다시 마음이 생길 리 없지.”
“그래? 그럼 이거 비밀인 거지?”
태서가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보니 박한수가 저 멀리에서 다가오고 있는 누군가를 가리켰다.
“인혁이한테 말이야.”
태서는 10분 안에 나타난 강인혁과 나란히 걸어오는 서다래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각을 핑계로 일어나려고 했더니 제때 나타났다.
“마음대로 해.”
딱히 강인혁에게 숨길 이유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꼭 밝히고 얻어 낼 것도 없었다. 태서가 도로 노트북을 여는 동안 박한수는 오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태서의 속을 짐작하기 힘들다는 듯 굴던 박한수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네 형질을 내가 왜 말하냐. 난 그냥 가만히 있을 란다.”
박한수가 입 무겁게 있겠다니, 웬일이냐는 시선을 보내는 것도 잠시 태서는 마음대로 하라고 놔뒀다.
그사이 강인혁과 서다래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박한수가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시간 맞춰 왔네.”
“커피가 늦게 나왔어.”
강인혁을 일부러 늦은 게 아니라는 듯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막 자리를 둘러보다가 난감한 눈빛을 드러냈다. 박한수와 태서가 마주 앉은 탓에 남은 자리가 애매해져 버렸다. 누군가 한 사람은 태서의 옆에 앉아야 했다.
‘뭐야.’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자리 가지고 저렇게 망설이는 건지. 태서는 박한수에게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내가 태서 옆으로 갈게.”
태서의 신호를 읽은 박한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제 책과 노트북을 정리하는데 강인혁의 손이 그의 책을 눌러 왔다.
“됐어.”
강인혁이 태서의 옆에 앉아 제 노트북과 커피를 내려놨다. 박한수가 어정쩡하게 서서 바라보고 있으니 강인혁이 외려 그를 무심히 올려다보았다.
“어차피 금방 끝내고 갈 건데 번거롭게 움직일 필요가 뭐가 있어. 다래야, 너도 앉아.”
“어? 어.”
가만히 지켜보던 서다래가 눈치껏 적당히 박한수의 옆자리에 앉았다. 셋이 자리 잡았는데 이제 와서 옮기는 게 유난이라고 보일 수 있어 따르는 거 같았다. 강인혁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제 맞은편에 앉은 서다래의 책을 자신이 직접 보기 좋게 정리해 주었다. 마치 옆이 아니라 맞은편에 앉아서 더 잘 챙겨 줄 수 있다는 듯 살가운 손짓이었다. 그 덕분에 굳어 있던 서다래의 표정이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그럼 그렇지.’
강인혁이 제 옆자리에 앉은 이유를 안 태서는 코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고 고개를 돌렸다.
‘옆에 앉으니 얼굴을 보지 않아도 돼서 좋네.’
나름의 장점을 찾은 태서가 제 핸드폰을 톡톡 두드렸다. 강세헌에게 따로 메시지가 왔나 확인했다. 한미래한테 온 메시지가 최신인 것으로 보아 강세헌에게는 아직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사이 모든 준비를 마친 강인혁이 펜으로 책을 톡톡 두드렸다.
“공유한 기사는 다 봤어?”
“어. 전부 써도 좋을 거 같은데 그러면 너무 양이 많아질 거 같으니까 몇 개 선택하면 되겠던데.”
강인혁이 먼저 말을 걸어올 줄 몰랐지만 과제에 관한 거라 그런지 태서도 누그러진 음성으로 받아쳤다. 어쨌든 한 조가 되었으니 아예 대화가 없이 시간을 보내진 못 하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인혁아, 안 그래도 내가 어떤 걸 선별할지 미리 정해 왔는데 볼래?”
서다래가 제 노트북의 화면이 보이게 돌렸다. 그에 강인혁이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서다래가 가리키는 기사를 보기 시작했다.
어느새 둘을 중심으로 과제가 진행되면서도 태서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끼어들 생각도 없었고 훼방을 놓지도 않았다. 중간중간 할 말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박한수의 시선은 무시했다.
“이대로 갈까?”
어느새 서다래와 대화가 마무리된 강인혁이 모두에게 물었다. 지금껏 둘이 대화를 나눈 대로 기사를 선택하고 그에 맞춰서 발표 자료를 정리해도 좋겠냐는 물음이었다.
“난 괜찮아. 이대로 준비하면 결과물 장난 아닐 거 같은데?”
박한수가 선뜻 좋다고 말해 오자 서다래가 기분 좋은지 미소를 지어 왔다. 강인혁이 다음으로 태서를 돌아보았다.
“나도 좋아.”
태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게 강인혁에게 어떻게 비쳤는지 그가 재차 확인해 왔다.
“나중에 다른 말 해도 못 바꿔. 네가 가져온 자료는 하나도 안 들어갔는데 상관없어?”
“다른 말 안 해. 그럼 다 한 거지? 나 간다.”
강인혁이 말한 대로 태서도 이것저것 준비해 왔다. 그런데 그 자료들이 하나도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태서는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제 책을 정리했다.
강인혁이 그동안 봐 왔던 태서는 무엇이든 제 마음대로 결정하기를 원했기에 지금의 모습은 낯설게 다가왔다. 물에 물 탄 듯 구는 그 모습에 오죽하면 강인혁이 일어서는 태서를 붙잡았다.
“뭐야.”
“진짜 할 말 없어? 이대로 가도 괜찮아?”
강인혁의 불신이 가득한 눈빛에 태서는 목까지 한숨이 차올랐다.
“두 번씩이나 물어볼 필요가 있어?”
“나중에 바꾼다면 골치 아파지니까. 지금껏 네가 어떻게 굴었는지 잊었어?”
“야, 인혁아.”
자칫 태서에게 기분 나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과거 태서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대놓고 말하고 있으니 상황이 악화될까 박한수가 끼어들었다. 괜히 점수 잘 받겠다고 애들을 모아서는 매번 모일 때마다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박한수가 강인혁의 팔을 잡으려고 손을 뻗기 직전 태서의 짧은 웃음이 울렸다.
“어제의 내가 아니라니까.”
기분 나쁘다고 티 낼 줄 알았던 태서가 웃어넘기니 할 말이 없어진 건 강인혁이었다. 그는 태서가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느라 어느새 서다래가 그의 어깨를 짚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인혁아, 그만해.”
서다래는 강인혁과 태서가 얽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강인혁을 데리고 자리를 벗어났으면 하는데 그의 어깨가 꿈쩍하지 않았다.
그사이 태서는 강인혁에게 잡힌 팔을 빼내며 가방을 어깨에 멨다.
“지금 할 말이 생각났다.”
아까 웃음으로 넘긴 줄 알았던 태서가 강인혁을 놀리기라도 하듯 말꼬리를 잡았다. 강인혁의 미간이 찡그려지는 걸 실시간으로 들여다본 태서가 느긋하게 말했다.
“다음엔 강의실에서 이어 하자. 괜히 오늘처럼 바깥에서 하지 말고……. 한수야.”
시선은 강인혁을 향한 그대로 박한수의 이름으로 말을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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