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그…….”
윤석훈이 무슨 말을 하려다가 결국 헛기침으로 마무리했다. 김미경은 벌써 몇 잔일지 모를 물 잔을 비우고 있었다. 태서가 계속 물 잔을 채우면서 상황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이런 식으로 부모님을 놀라게 해 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태서가 아무리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할지라도 이미 내용이 놀랄 내용이었다. 거기다 강세헌마저 얹어 버리니 오늘 부모님을 몇 번이나 놀라게 하는지 몰랐다.
“제가 다 말하려고 했어요.”
태서는 작은 목소리로 제 나름의 변명을 내뱉은 걸 김미경이 들었다. 태서의 알파라니, 너무도 당연하게 내뱉던 그 인사에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 찾아온 이유가 있었네요.”
김미경이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강세헌과 태서를 번갈아 보았다. 태서가 임신했고 아기 아빠가 강인혁이 아니라고 한 이후에 기다렸다는 듯 그가 나타났다. 실은 강세헌을 보자마자 당신이 맞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혹시나 강세헌이 아니라고 한다면 태서의 사정을 엄한 사람에게 밝히는 꼴이 될 테니 김미경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강세헌이 제가 생각한 그 사람이 맞는지. 강세헌이 태서의 식사를 챙기는 걸 본 순간 의심이 확신이 되자 김미경은 더는 감추지 않았다.
“둘의 이야기를 들어 봐야 할 거 같네요.”
상황 파악이 우선이었다. 태서가 약을 먹은 것 이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어야지만 속이 풀릴 것 같았다.
김미경이 더 듣고 싶다고 했고 강세헌이 전혀 상관없는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자 윤석훈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머지는 자리를 옮기고 하죠.”
이제 편안하게 식사하면서 들을 이야기가 아니었다.
자리를 옮기자마자 태서는 아까 못했던 이야기를 이어 갔고 중간중간 강세헌이 설명을 덧붙였다. 히트 사이클을 넘기는 과정에서 강세헌의 도움을 받았던 일을 말할 땐 조금 버벅거렸지만,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부모님은 더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이후로 호텔에서 종종 마주쳤던 것. 그리고 태서가 무작정 강세헌의 집에 신세를 진 것과 최근 제 몸이 이상하다는 생각에 병원을 갔다가 임신임을 알아챈 걸 끝으로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
“……여기까지예요.”
태서는 홀가분한 한편 불안한 눈빛으로 부모님을 보았다. 제 이야기에 어떤 반응이 나올지 몰랐다.
윤석훈은 강세헌의 얼굴을 보며 복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우연히 맺어진 인연이 다른 사람도 아닌 강세헌이라니. 당장 그의 배경은 둘째치고 강인혁과 사촌인 게 걸렸다. 앞으로 어떻게 관계를 정리해야 할지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얽히고설킨 관계부터 떠올린 윤석훈과 달리 김미경은 오로지 태서에게 모든 신경이 쏠렸다.
그녀는 태서가 혼자서 마음고생했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미어졌다. 그런데 그날 발현한 것으로도 모자라 비밀로 감추느라 혼자서 끙끙 앓았을 줄 알았는데 고맙게도 누군가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 때문에 김미경은 처음보단 여유를 찾은 얼굴로 강세헌을 바라보았다.
“고맙다는 인사부터 하고 싶네요.”
“인사를 받으려 한 일이 아닙니다.”
강세헌의 대답에 태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뿐인 인사도 그냥 받으면 될 걸 굳이 짚어 버리니 참 강세헌답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 윤석훈과 김미경의 표정이 안정되어 가는 걸 본 강세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서가 부모님께 고백해야 할 말은 다 했고 자신은 태서가 먹는 걸 확인하러 왔으며 분위기 탓에 제대로 먹지 못했지만, 태서와 붙어 있는 사이 페로몬을 묻혀 놨으니 다른 거라도 먹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하며 돌아갈 채비를 했다.
“다음에 정식으로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제 목적을 이룬 강세헌은 갑자기 들이닥친 것처럼 사라질 때도 그랬다. 오죽하면 강세헌이 가고 덜렁 남겨진 태서가 얼떨떨함을 지우지 못했을 정도로.
***
“그렇게 마음대로 하기도 참 쉽지 않을 거야.”
어제 강세헌이 들이닥쳤다 바람처럼 사라진 걸 떠올린 태서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세상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사는 것도 신기한데 그 와중에 제 부모님께 인사는 잊지 않았다.
오늘 만나면 어제 일을 꼭 짚고 넘어가겠다고 여기며 태서는 테이블에 하나둘 제 물건을 꺼내 놨다. 책을 놓고 노트북을 부팅하며 조별 과제할 준비를 하는 사이 누군가 다가왔다. 박한수인 줄 알고 올려다보지도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도 맞은편에 선 사람에게 아무런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안 앉고 뭐 해? 어?”
“우리 오랜만이지?”
막 상대방을 올려다본 태서의 놀란 반응에 미래가 기분 좋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일전에 박한수의 주선으로 소개팅했던 상대였다. 같은 학교에 다닌다고 들었는데 자신을 발견하고 다가온 모양이었다.
“그러네, 잘 지냈어?”
태서가 금방 놀란 감정을 수습하고 물어보니 미래가 콧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지냈냐는 물음에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잘 지내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왜? 무슨 일 있었어?”
태서가 걱정과 함게 미래와 눈높이를 맞추려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미래가 손을 들어 태서의 어깨를 도로 눌렀다.
“아무 일도 없었어. 장난친 거야.”
미래의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에 태서가 마음이 놓인 듯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나 진짜 놀래.”
“그렇게 반응만 하지 말고 미리미리 물어봐 주면 좀 좋아? 나 네 연락 기다렸던 거 알아?”
“아, 미안해.”
“사과받으려고 그런 말한 거 아니야. 그래도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더 반갑네.”
미래가 살짝 토라진 듯 눈을 가늘게 떴다가 곧 배시시 미소를 지어왔다. 태서의 연락이 없던 건 정말 서운했지만, 지금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분 좋아 보이는 것만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이랬던 거 같은데. 부담감이 없어서 태서도 금방 미래와 웃으며 대화를 나눴었다.
“수업 가는 길이야?”
“응. 곧 시작이야.”
미래가 제 손목을 보며 한숨 쉬었다. 안 그래도 미래의 친구로 보이는 여자가 멀리서 어서 오라고 손을 휘젓고 있었다.
“수업에 늦겠어. 어서 가 봐.”
“그래야지. 다음 학기에 같은 수업 들으면 좋겠다. 그러면 꼭 누가 연락하지 않아도 주기적으로 만날 수 있잖아.”
“다음 학기? 아…… 그러겠네.”
미래의 말에서 새삼 다음 학기를 떠올린 태서가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그때가 되면 배 속의 아기가 얼마나 커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마 다음 학기엔 휴학해야 하지 않을까.
“핸드폰 고장 난 거 아니면 종종 연락해. 나도 네 생각날 때 전화할게.”
미래가 핸드폰을 제 귀에 대는 제스처를 보이고는 손을 살랑거렸다. 태서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미래가 기다리고 있던 제 친구에게 달려갔다. 그러고도 다시 태서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으니 함께 하는 친구가 그녀의 어깨를 치며 뭐라고 말을 거는 게 보였다.
거리가 있어 들리지 않았지만, 저에 대해 물어봤는지 미래가 친구에게 한껏 몸을 숙여 귓속말을 건넸다. 그렇게 작게 말하지 않아도 못 들을 텐데. 그래도 미래의 행동이 귀여워 미소 지을 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짚어 왔다.
“매정한 네놈은 그날 이후로 미래를 잊어 버린 거 같은데. 불쌍한 내 친구 한미래.”
“나도 네 친구다.”
태서가 제 어깨에 올라온 박한수의 손을 쳐 냈다. 방금 미래에게 보였던 상냥한 미소는 사라지고 특유의 뚱한 표정을 짓자 박한수가 쯧쯧, 혀를 차 댔다.
“진짜 이런 놈 뭐가 좋다고.”
“내 인기에 연연하지 말고 빨리 노트북이나 꺼내. 다른 조원은 언제 오는 거야.”
“곧 있으면 오겠지.”
그냥 수업이 끝난 후 바로 강의실에서 조별 작업을 하면 될 것을 굳이 바깥에서 보자고 하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었다. 거기다가 각자 커피든 마실 것을 사 오라고 한 덕분에 뿔뿔이 흩어져서 태서의 불만이 한껏 올라가 있었다.
“태서야. 그렇게 나를 째려 봐야 아무것도 나올 게 없다. 강인혁이랑 서다래도 금방 오겠지. 조금만 기다려 봐.”
“10분만 기다렸다가 일어날 거야.”
태서가 핸드폰의 시계를 띄워 박한수에게 보여 주고는 제 노트북을 두드렸다. 이미 아까부터 모든 준비를 다 해 놓은 상태라 절전으로 들어간 화면을 밝힌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너 진짜 미래 마음에 안 드냐? 솔직히 미래 괜찮잖아.”
“어, 그래.”
“그런데 왜 안 사귀냐고.”
박한수가 의심을 가득 담은 눈초리로 태서를 힐끗거렸다. 미래와 잘 어울리는 커플이 될 거 같은데 정작 태서가 생각이 없어 보이니 주선자로서 조금 아쉬운 마음이었다.
“혹시 소문 때문에 그래?”
요즘 수업이 끝날 때마다 나타나던 사람. 그가 강세헌이라는 것은 학교의 대부분이 알게 되었고 이제 그가 갑자기 학교에 모습을 보여도 놀라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만큼 소문이 단단히 굳어지는 동안에도 태서는 굳이 강세헌과의 사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게 소문이 어떻게 나도 상관없다는 건지 아니면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라서 신경 쓰지 않는 건지 그들만 알 일이었다.
다만 지금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답답하게 느껴진 박한수가 심술궂게 태서의 노트북의 탁 닫아 버렸다.
“무슨 짓이야.”
“내 말에 집중하라고. 나는 알파와 베타가 만나는 거 아무 생각 없거든? 그런데 너는 아니야.”
“나는 왜 아닌데?”
“너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는 박한수는 눈에 온갖 감정을 담아 왔다. 아마 태서가 강인혁을 좋아했던 과거 때문이라고 대놓고 말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태서가 박한수의 손을 쳐 내며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남의 연애사에 관여하기 전에 너나 잘해라.”
“내가 괜히 그러냐? 아무튼 같은 베타끼리 만나는 게 나중을 위해서라도…….”
“나 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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