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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36화 (36/130)

36화

「언제든 말해.」

병원에서 한 말이 그대로 문자로 전송되었다. 주머니에서 반만 꺼낸 핸드폰의 상단에 떠오른 강세헌의 메시지를 본 태서가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으려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러다가 말도 없이 나타나는 거 아냐?’

연락하면 달려올 거냐는 태서의 장난에 그 전에 나타난다고 했던 강세헌의 대답이 떠올랐다. 요즘 자기랑 밥 먹고 어울리느냐고 회사 일이 장난 아니게 밀려 있을 텐데 말이다. 어제만 해도 저녁에 비서라던 남자가 나타나더니 더는 일정 조율이 불가하다는 말을 해 왔다.

결국 카페는 가지도 못하고 급하게 헤어졌는데 그 탓인지 강세헌의 연락이 더욱 잦았다. 지금 부모님과 식사 중이라는 간단한 답을 보내고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잠깐 강세헌의 메시지에 신경을 쓴 것도 잠시 식사로 돌아온 태서는 젓가락을 든 채로 어떤 반찬을 집을지 고민했다. 선뜻 끌리는 게 없어서 허공에 뜬 젓가락의 끝이 좀처럼 내려오질 못했다.

“입맛에 안 맞니?”

“네? 아…….”

김미경의 물음에 태서가 제 젓가락을 어색하게 움직였다. 오랜만의 가족과의 식사 자리다 보니 잘 먹는 모습을 보이면 좋았을 텐데. 딱히 먹고 싶은 게 없기도 했지만, 생각이 다른 데로 가다 보니 부모님에겐 그렇게 비쳤나 보다.

“그게 아니라… 아니 그것도 맞아요.”

태서는 일단 아니라고 부정했다가 금방 말을 바꿨다. 지금 입맛이 없는 게 맞았다. 오랜만에 부모님과 함께 식사할 수 있다고 하니 좋았지만 강세헌이 없다 보니 음식이 끌리지 않았다.

‘이렇게 확인하고 싶지 않았는데…….’

강세헌의 페로몬이 태서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었다. 그와 함께라면 식욕도 돌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안정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태서가 슬그머니 젓가락을 내려놨다.

“저 실은 할 말이 있어요. 아주 중요한 말이에요.”

지금이 말해야 하는 타이밍이라는 걸 느끼자마자 심장이 말도 못 하게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태서가 제 가슴을 어루만지며 마주 앉은 부모님의 표정을 살폈다. 윤석훈은 태서를 따라 젓가락을 내려놨고 김미경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숨을 골랐다.

“안 그래도 네가 할 말이 있는 거 같다고 했는데 계속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고 있었구나.”

윤석훈이 김미경과 눈을 마주치며 말하더니 이내 태서에게 고개를 돌렸다. 특히나 오늘 집에서 조용히 식사하게 된 이유엔 태서의 말을 듣기 위한 배려도 담겨 있었다.

“그러니까…….”

태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운을 뗐다.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두 분을 보고 있는데 저 표정이 바뀔 걸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지.

막상 입을 열긴 했는데 태서가 쉽게 말을 내뱉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부모님께 자신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아마 제 부모님은 제가 아직도 강인혁에게 마음이 있을 거라 여기실 수도 있겠다.

어떤 건 오해로 쌓일 수도 있으니 일단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말해 보자면…….

“저 오메가로 발현했어요.”

“어머나. 언제? 언제 발현한 거야?”

아니나 다를까 김미경이 바로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자신들에게는 태서가 베타든 오메가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태서가 오메가가 되지 못해 초조해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남몰래 속상한 마음이 있었다.

“잘됐다. 잘됐다. 태서야.”

“축하한다.”

김미경과 윤석훈의 축하에 태서는 어색하지만 수줍은 미소로 화답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즉 발현했음을 말할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태서는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야 할 때라는 걸 느끼며 이 분위기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임신했어요.”

방금까지 기뻐하던 윤석훈과 김미경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둘은 제가 들은 게 맞는지 확인하려 눈동자만 부지런히 굴릴 뿐 누구도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

아무 말 없는 부모님의 모습에서 제가 조금 성급했나 싶어 태서는 괜히 입술을 깨물어 댔다. 중간에 다른 말을 조금 더 했어야 했나. 부모님이 좋아하는 모습에 충격을 덜 받으실 줄 알았더니 제 착각이었다.

어떻게든 부모님의 충격을 줄여 드리기 위해 태서가 어지럽게 손을 놀리며 고백에 살을 붙여 보았다.

“오메가로 발현할 때 히트 사이클이 같이 왔어요. 처음으로 겪는 일이라 당황했는데 어쩌다 보니 아기까지 생겼네요.”

“그, 그런 일이…….”

“어떤 놈이야! 어떤 알파 놈의 새끼가!”

부모님을 진정시키려 한 말이 두 분을 더 흥분시키게 될 줄은 몰랐지만.

“잠시만요. 아직 제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어요.”

“설마 인혁이는 아니지?”

“강인혁? 당장 그놈을 불러서…….”

충격이 커서인지 부모님이 태서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점점 상황이 복잡하기 꼬이기 시작했다. 태서가 그게 아니라는 듯 두 손을 저었지만 윤석훈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흥분했다. 거기다 김미경마저 부들 떨리는 손으로 제 핸드폰을 꺼내고 있었다.

“잠깐만요.”

태서는 일단 김미경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제 손으로 덮는 동시에 윤석훈의 팔을 잡았다. 그제야 두 사람이 태서를 바라보게 되면서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강인혁 아니에요. 제 이야기 좀 들어 주세요.”

태서가 흥분을 가라앉히라는 듯 두 손으로 허공을 눌렀다. 그러자 김미경이 제 이마를 잠시 짚었다가 고개를 들어 완전 일어선 태서에게 약한 추궁의 눈빛을 보냈다.

“임신이라니, 너는 대체 그 중요한 말을 왜 지금에서야 하는 거니.”

“말하려고 했어요. 전화로 하기엔 중요한 말이라서 오늘처럼 얼굴 보고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 네가 호텔로 찾아왔어야지.”

태서의 대답이 변명처럼 느껴졌는지 윤석훈이 곧장 받아쳐 왔다.

“만약 오늘이 아니었다면 제가 직접 호텔에 갈 생각이었어요. 아니, 솔직히 말해서 망설였던 건 있어요. 그건 죄송해요.”

태서가 곧장 제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부모님의 놀란 마음을 아는데 제 상황만 알아달라고 할 순 없었다.

그러나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윤석훈이 막 태서를 몰아세우려다 제 팔을 붙잡는 다른 손에 멈칫했다. 그 손의 주인이 김미경인 걸 확인한 윤석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김미경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윤석훈에게 너무 흥분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윤석훈은 어느새 자신이 일어나 있던 걸 깨달으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거칠어진 숨을 정리하고 나서 아까보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 거야.”

“……창립 기념 파티에서요.”

태서가 기어들어 가는 음성으로 답했다. 그 설명이 너무도 부족했는지 윤석훈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발현하기 전에 이미 징조가 나타났을 텐데 그것도 몰랐니?”

“그게…… 아무래도 정상적인 발현이 아니었던 거 같아요.”

태서는 말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털어놓기로 했다. 이미 여기까지 말이 나온 이상 더는 숨길 것도 없었다.

“서다래한테 먹이려고 구했던 약이 원인이었던 거 같아요.”

“뭐?”

윤석훈이 다시 놀라서 의자에서 일어났고 김미경은 두 손으로 비명이 나오려는 제 입을 막았다. 둘의 반응에도 태서는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뿐이라 말을 멈추지 못했다.

“서다래는 제가 샴페인에 약을 탄 지 몰랐고 그동안 제가 괴롭혔던…… 일이 있었으니 단순히 샴페인을 뺏어 가는 줄로만 알더라고요. 그래서 그 샴페인을 먹지 못하게 하려다 보니 제가 마셨어요.”

이전에 태서가 서다래를 괴롭혔던 일까지 언급하며 설명해야 했기에 중간에 잠깐 머뭇거렸지만, 그래도 제가 할 말은 다 했다.

“그날 갑자기 열이 올라서 정신을 잃었는데 다음 날 제가 발현했다고…… 알려 주더라고요.”

누가 알려 줬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것 자체가 아기 아빠가 누군지 말하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부모님에겐 그 상대가 누군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나 보다.

“누구니?”

윤석훈을 달랜 김미경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꾸며 낸 목소리로 태서의 대답을 이끌었다. 어떻게든 그 상대를 알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랬다.

“안 그래도 지금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면…….”

이제 강세헌의 이름이 나올 차례였다. 그런데 누군지 밝혔을 때 아까처럼 욕이라도 들려올까 싶어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모님. 손님이 오셨어요.”

그때 밖에 있던 가사 도우미가 들어왔다. 그녀도 격하게 흘러가는 분위기를 아는지 잔뜩 눈치를 보며 말해 왔다.

“조금 더 기다렸다가 말할까 싶은데 손님이 계속 초인종을 누르고 있어서요.”

그제야 초인종 소리를 들은 세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워낙 태서의 이야기에 빠져 초인종이 울리는 것도 듣지 못했다.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오라고 해요.”

김미경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데도 가사 도우미는 곧장 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머뭇거렸다.

“그게…… 저도 그렇게 말했는데 꼭 지금 만나야 한다고 하네요.”

“대체 누구기에 그리 무례한 거죠?”

김미경이 이 중요한 상황을 자르고 끼어드는 인물에게 불쾌함을 느끼며 일어났다. 그녀와 함께 상황을 정리할 생각으로 윤석훈마저 일어나니 태서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온 건지 모르지만, 잠깐 쉬는 시간을 얻은 기분이었다.

부모님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생각을 정리하면 아까보단 차분히 설명할 수 있겠지.

“태, 태서야.”

그러나 무슨 일인지 아까보다 더 당황한 듯한 김미경의 목소리에 태서는 이상하다는 걸 느끼며 다이닝 룸을 나왔다.

“왜 그러세요?”

김미경을 바라보며 물어보던 태서는 대답을 얻기 전에 현관에 우뚝 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강세헌입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그를 태서는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전에 네 앞에 나타날게.

아까 생각만 하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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