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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35화 (35/130)

35화

“오랜만이네요. 결정했나요?”

일전에 본 산부인과 의사였다. 그는 모니터를 향한 시선 그대로 마우스를 달칵거렸다. 지난번엔 혼자 왔고 이번엔 아기 아빠로 보이는 남자까지 함께 왔지만, 의사의 표정엔 일절 변화가 없었다.

아기 아빠가 그 유명한 강세헌이든 말든. 의사는 관심 없다 할지라도 태서는 그게 아닌 듯했다.

태서의 시선이 계속 강세헌과 의사를 부지런히 오갔다. 오늘 산부인과 예약했다는 거야 굳이 감출 필요가 없어서 밝혔다. 그러자 강세헌이 태서를 데려다주겠다고 했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태서는 별생각 없이 그러겠다고 했다.

그런데 강세헌이 진료실까지 함께 들어오는 순간 태서는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반쯤 정신이 나가고 말았다.

-진짜 안 나갈 거예요?

-나도 들을 자격 있잖아.

의사가 앞에 있는지라 태서가 눈으로 문을 가리켰지만, 강세헌은 알면서도 더욱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을 뿐 일어나지 않았다. 그게 불만스러워 태서가 눈을 흘겼다.

아기 아빠라는 거 알려서 뭐가 좋다고.

태서가 강세헌을 말린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그가 알려진 사람이라서 그랬다. 굳이 다른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까 하는 염려에 그에게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데 강세헌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렇게 진료실까지 들어왔으니 의사는 둘째치고 아까부터 강세헌을 알아본 듯 계속 시선을 보내는 간호사를 보아 완전히 감출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걱정해야 할 강세헌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앉아 있으니 태서가 먼저 포기했다.

“낳고 싶어요.”

오래 고민한 것에 비해 다소 싱겁게 느껴질 정도로 간단한 답이었다. 어떻게 보면 특별할 게 없는 결정으로 비치기도 했다.

“낳으려고요.”

그러나 한번 결정하고 나니 이젠 다른 생각 따윈 들지 않았다. 어떤 이유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말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그것을 물어보지 않았다. 태서의 결정에 의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강세헌은 제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잠깐 건드린 게 전부였다.

“생각한 병원은 있나요? 아니면 앞으로 계속 나랑 약속하고 만나도 좋고요.”

의사가 간호사에게 눈빛을 보내며 키보드를 두들겼다. 태서가 아이를 낳겠다고 하니 입력할 게 많은 모양이었다. 일단 ‘낳겠다’까지만 결정했던 태서가 뒤늦게 병원을 고려하지 못한 걸 깨달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결정해야 하는 걸까 싶을 때 강세헌이 끼어들었다.

“여기로 등록할 겁니다.”

의사가 강세헌의 말대로 해도 되냐는 눈빛을 태서에게 보냈다. 그러자 태서는 강세헌을 스치듯 본 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자신도 놓치고 있던 부분이니 강세헌의 결정을 따라도 좋을 부분이었다.

태서의 뜻을 확인한 의사가 태연히 다음 말을 이어 갔다.

“갈 때 임신 확인서 받아 가시고 초음파 사진도 줄게요. 그리고 수첩도 받아야 하니까 간호사한테 설명 들으시고요.”

“감사합니다.”

“그래요. 그럼 다음에 또 만나요.”

태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강세헌이 따라 일어났다. 아기를 낳기로 결정했고 앞으로 예약에 맞춰 오기로 했으니 오늘 진료는 끝이었다. 볼일이 끝났으니 태서가 미련 없이 돌아섰을 때였다.

“윤태서 씨.”

태서가 반쯤 틀었던 몸을 바로 하며 의사를 바라보았다. 오늘로 단 두 번 본 게 전부인 상대였다. 처음엔 자신이 당황한 거 같으니 생각하고 오라며 배려해 주었고 오늘은 어떻게 할 건지만 물었을 뿐 곤란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잘 생각했어요.”

의사의 태도는 담백 그 자체였지만, 그래서 더욱 태서에게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왔던 거 같았다. 지금의 한마디가 크게 다가온 걸 보면 더더욱.

“……감사합니다.”

“아기 태어날 때까지 잘해 보자고요.”

의사의 인사를 끝으로 태서가 먼저 진료실을 나갔다. 강세헌은 뒤늦게 궁금한 게 떠오른 모양인지 뒤따라 나오지 않았다. 간호사까지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태서가 벽에 등을 기댄 체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아기. 아기를 가졌네. 내가…….”

태서가 제 배를 어루만졌다. 이전부터 품고 있었으나 낳겠다고 결정한 지금 완전히 다른 기분이었다.

“윤태서가 되고 아기가 생겼고, 또…….”

혼자서 중얼거리는 와중에 문이 열리는 소리에 태서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막 진료실을 나온 강세헌이 태서의 시선에 잠깐 멈칫했다가 그보다 빠르게 움직여 다가왔다.

“표정이 왜 그래.”

“제 표정이 어떤데요?”

“별로야.”

“되게 주관적인 대답인 거 알죠?”

강세헌의 눈에만 별로인 걸 뭐 어쩌라고. 그냥 무시하고 흘려 버리려는 태서는 갑자기 제 턱을 가볍게 감싸 오는 강세헌의 손길에 다시 그와 눈을 마주쳤다.

“내 눈에 보이는 네가 중요한 거잖아.”

남들이 태서를 어떻게 바라보든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강세헌의 눈동자가 올곧게 태서를 향해 왔다. 그 시선이 길어지자 민망해진 태서가 고개를 옆으로 틀어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알았어요. 알았어.”

“무슨 생각을 했는데.”

“내가 진짜 아기를 가졌구나 했어요. 그게 다예요.”

태서는 숨긴 게 없다는 듯 두 손바닥을 들었다. 다른 건 정말 없기에 강세헌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강세헌도 태서가 숨긴 건 없는지 더 살펴보고는 돌아섰다.

“가자.”

분명 간호사가 기다리라고 했는데 싶었던 태서가 뒤늦게 강세헌의 손에 들린 낯선 물건을 발견했다. 크지 않은 노트 같은 생김새의 물건을 보다 보니 아까 말한 그 수첩인가 싶었다. 태서가 받아야 할 걸 언제 강세헌이 받아 온 건지.

덕분에 따로 챙겨야 할 게 없는 태서는 마음 편히 강세헌을 따라 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태서는 쉽게 강세헌을 따라가지 못했다.

‘뭐가 이렇게 자연스럽지.’

처음부터 제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아는 사람처럼 행동에 거침없었다. 정작 자신은 강세헌의 속을 하나도 모르겠는데 말이다.

‘이대로 넘어가면 안 되는데.’

그나마도 천천히 따라가던 태서가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강세헌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한 걸음 두 걸음 멀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느 순간 강세헌이 걸음을 멈추고 태서를 돌아봤다.

왜 안 따라오냐는 시선에 태서는 마른침을 삼켰다. 왜 지금 물어보고 싶은지 모르지만, 그래도 묻고 싶었다.

“아기 아빠가 되셨는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태서는 약한 긴장감을 감추려 슬그머니 주먹을 쥐었다. 자신은 아기를 낳겠다는 결정을 했지만, 강세헌의 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이 결심을 굳히는 동안 그는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고. 만약 아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자신 혼자 키우면 될 일이었다.

조금 외롭긴 하겠지만, 강세헌이 자신의 결정을 존중해 주는 만큼 자신 역시 그의 의견을 충분히 수용할 생각이었다.

태서가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강세헌은 잠시 고개를 틀어 주변을 바라보았다. 주변을 지나가는 부부를 보기도 하고 가운을 휘날리며 돌아다니는 의료인을 보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강세헌의 시선이 크게 돌아 태서에게 돌아왔다.

“내가 전부 챙겨 주고 싶다는 생각뿐인데.”

“그게 뭐예요.”

태서가 힘없이 풀려 버리는 입가를 감추지 못한 채 그에게 다가갔다.

“누가 들으면 내가 아기를 가진 게 아니라 아기가 된 건 줄 알겠네.”

“그만큼 아기 아빠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싶다는 뜻이야. 네게도 그리고 아기에게도.”

“형의 생각은 잘 알았어요.”

태서가 강세헌의 옆에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기 아빠가 되겠다는 강세헌의 대답은 잘 들었다. 이제 둘이 하나의 뜻을 가졌음을 알았으니 앞으로도 함께 하면 될 일이었다.

아까보다 한결 가벼워진 표정의 태서가 언제 그랬냐는 듯 속도를 올렸다. 이제 강세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아까까지 눈에 들어오지 않던 주변을 구경하기 바빴다.

태서의 기분이 달라졌음을 느낀 강세헌이 그와 속도를 맞춰 걸어가며 담담하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말했어?”

강세헌의 별거 아닌 질문이었지만, 태서는 순간 가던 걸음을 멈췄다. 입술만 달싹이고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하는 듯한 행동에 이미 답을 들은 듯했지만 강세헌은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아직이요.”

이윽고 태서가 민망한 듯 제 머리를 쓸어내렸다. 아침에 김미경이 쓰다듬어 주었던 그 자리였다. 말해야 하는데 타이밍이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제가 자꾸 부모님이 바쁘단 이유로 말을 못 했다고 하면 변명이라고 생각할까 봐 태서는 쉽게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말해야죠.”

그러나 겨우 내뱉은 한마디는 그냥 이제 해야겠다는 투로만 나왔다. 강세헌이 태서의 머리에 올라간 손을 잡아 내려 주었다. 그는 태서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마치 태서의 복잡한 마음을 정리해 주려는 듯.

“혹시 말하기 힘든 거라면…….”

“아니요.”

태서가 급히 손을 들어 강세헌이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을 막았다.

“단순히 만나기 힘들어서 말 못 한 거예요. 전화로는 할 수 없는 말이니까요.”

“그래.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연락하면 바로 달려오기라도 하게요?”

“그 전에 네 앞에 나타날게.”

“든든하네요.”

장난으로 주고받는 대화인데도 무거웠던 마음이 금방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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