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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34화 (34/130)

34화

서류를 넘기던 강세헌이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품 속으로 손을 넣었다. 그와 동시에 비서가 입을 다문 채 서류로 고개를 돌렸다. 핸드폰에 뜬 이름을 확인한 강세헌은 손짓으로 비서를 부르며 통화를 연결했다.

[오늘이지?]

“맞아.”

다짜고짜 물어오는 진규민의 질문에도 강세헌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오늘 태서의 산부인과 예약이 잡혀 있는 터였다. 진규민이 그것을 알고 전화했을 테니 굳이 숨기지 않았다. 강세헌이 다시 서류를 들어 올리자 비서가 그 옆에서 태블릿을 꺼내 와 부지런히 화면을 두드렸다.

강세헌이 그 화면과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 진규민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태서씨 결정했대? 낳을 거래?]

“아직 듣지 못했어.”

어쩐지 바로 물어보지 못 한다 싶더니 그게 궁금했나 보다. 강세헌의 시선이 잠시 핸드폰을 향했다 돌아왔다. 최종 결제란에 사인을 하고 펜까지 얹어서 그대로 비서에게 내밀자 그가 그대로 전부 받아 들었다.

“오늘 일정 전부 미뤄.”

“알겠습니다.”

강세헌이 오늘 더 이상 일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미 펜까지 함께 내밀었을 때 그 뜻을 알아들은 비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그는 곧바로 태블릿을 품에 끼고 핸드폰을 꺼내 상사의 일정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비서가 움직이는 걸 바라보던 강세헌이 핸드폰을 들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진규민이 강세헌이 핸드폰을 든 걸 알아채기라도 한 듯 말해 왔다.

[예전엔 일이 우선이던 놈이 일정을 다 미루네.]

“할 말은?”

[할 말은 나 말고 네가 있을 거 같은데?]

진규민이 먼저 전화를 걸었지만 외려 강세헌에게 할 말 없냐고 화살을 돌리고 있었다.

“곧 갈 거야.”

강세헌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태서가 어떤 선택을 하든 원하는 대로 바로 움직일 수 있게 준비해 줘.”

[그게 다야? 너도 아기 아빤데 네 생각은 없어?]

강세헌은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태서의 집으로 가는 길은 몇 번 가지 않았음에도 금방 눈에 익었다. 태서에 관한 건 전부 그랬다. 어떤 음식을 먹든 계속 뇌리에 남았고 그와 함께 한 시간은 일주일이 지나도 어제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건 처음 느꼈던 태서의 페로몬도 마찬가지였다. 일부러 히트 사이클에 맞춰 제 앞에 나타난 건 아닐까 싶었다. 강한 페로몬을 이용해 관계를 맺고 어떻게든 그것을 잡아 보려는 그런 부류의 인간인 줄 알았다.

그런데도 강세헌이 태서를 무시하지 못했던 건 그의 페로몬 때문이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지 못할 만큼 태서의 페로몬은 달고 아찔했다.

다음 날 태서에게 하룻밤을 핑계로 달라붙지 말라고 했으면서도 계속 그를 생각하고 신경 쓴 건 오히려 강세헌 본인이었다. 그가 오메가임을 드러내지 않는 게 궁금했고 또래의 여자애와 있을 때는 신경 쓰여 다른 일도 미뤄 버렸다.

이제 강세헌도 제가 태서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신경 쓰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렇게 맺어진 태서와의 인연이 지금 갈림길에서 멈췄다. 여기서 함께 하는 길을 걸어가게 될지 아니면 각자의 길로 가게 될지는 전부 태서에게 달렸다. 진규민의 말대로 제 생각은 없냐 싶지만….

“굳이 내 생각을 얹을 필요는 없어서…….”

[그게 무슨 말이야? 너 태서 씨가 무슨 선택할지 아는 거 아니…….]

진규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세헌은 종료 버튼을 눌러 버렸다.

***

나갈 준비를 하던 태서가 문득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처음 윤태서가 됐을 때 제가 누군지 보려고 자세히 봤던 이후로 이 정도로 뚫어져라 본 적은 오랜만이었다.

그땐 서다래와 자신의 외모를 비교했었다. 서다래에 비해 전혀 부드럽지 않은 제 얼굴에 안타까워했었다. 이런 얼굴로 오메가가 되기를 바랐고 강인혁의 사랑을 받지 못해 질투하는 인물이라는 게 참 서글펐다.

왜 하필 소설 속 악역이 되어 버린 건지. 사랑받을 자격이 박탈되어 버린 것만 같아 상실감이 컸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태서가 거울에 대고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만족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오늘 더 괜찮은 거 같기도 하고…….”

준수한 얼굴이었다. 웃으면 호감형이기도 하고 오메가처럼 느껴지지 않는 게 제 마음에 들었다. 베타와 가까운 삶을 살았기에 당장 오메가의 삶에 적응해야 했다면 오히려 그게 더 힘들었을 수도 있었다.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는 마냥 약하게 보이는 인상이 아니라 좋았고 제법 높은 콧대나 매끈한 입술 선도 마음에 들었다. 피부가 하얗지 않아서 그런지 색이 진한 머리카락과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이게 윤태서의 얼굴이었다. 서다래와 다른 매력을 가진 윤태서. 예쁘진 않아도 잘생긴 윤태서.

강세헌이 말한 잘생기고 예뻐서 소문이 도는 그런 윤태서였다.

“그래, 나는 윤태서지.”

이제 왜 하필 서다래가 아닌 윤태서가 되었는지 왜 곧 죽을 지경에 처한 인물이 되었는지 그런 불만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없어진 게 아니라 누군가와의 만남을 통해 조금씩 옅어졌다는 게 맞았다.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자 태서의 얼굴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걸렸다.

“지금 생각해 보니 형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강세헌이라는 의외의 인물의 출현이 당황스럽기도 잠시 그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직도 원작에 매달려 아등바등하진 않았을까? 죽을 날을 받아 둔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며 초조해하진 않았을까?

“지금도 내가 윤태서가 됐다는 것에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었겠지.”

매일 밥만 잘 먹여 주는 줄 알았더니 또 이런 영향을 받았을 줄이야. 태서가 괜히 배를 만지작거렸다. 오늘도 잘 먹으면 또 살찔 걱정할 거 같은데……. 이런 사소한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게 웃기기도 하고 신기했다.

“살찌워서 잡아먹으려는 건 아니겠지?”

이걸 강세헌에게 말해 줄까? 고민하던 태서는 갑자기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네.”

태서가 목소리를 높이자 문이 열리며 나타난 사람은 김미경이었다. 그녀는 태서의 방을 돌아보며 들어가도 될지 싶은 눈빛을 보내왔다. 태서가 넓은 보폭으로 그녀에게 다가가서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태서의 허락에 안으로 들어온 김미경이 아들의 차림을 가볍게 스쳐보더니 물었다.

“나가는 거니?”

“네, 어머니는 어쩐 일이세요?”

오늘만 해도 새벽같이 나갔던 그녀가 해가 지기 전에 나타나니 태서가 의아한 듯 물었다.

“잠깐 들어온 김에 얼굴만 보고 나가려고.”

김미경이 한 손에 서류를 들어 보였다.

“요즘 별일 없었지?”

태서가 강세헌에게 부모님이 바쁘다고 한 만큼 김미경도 그걸 신경 쓰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이렇게 태서를 잠깐이라도 볼 생각에 올라온 듯했다. 태서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산부인과 예약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지금이라도 그녀에게 제 사정을 말하면 좋을 거 같아 태서가 운을 뗐다.

“혹시 오늘 시간 있으세요?”

이왕이면 아버지도 같이 있으면 좋겠지만, 요즘 해외에 짓는 호텔이 막바지에 접어든 걸 알기에 더 욕심부리지 않았다. 그래도 병원에 가기 전, 어머니에게만이라도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는데 눈에 띄게 당황한 반응이 돌아왔다.

김미경이 손에 쥐고 있는 서류 봉투를 보더니 손목을 들어 시간까지 확인했다. 그 일련의 행동들을 통해 그녀가 지금 얼마나 바쁜지 알 수 있었다.

“당연히 낼 수 있지. 잠깐만 기다려 봐.”

그런데도 김미경은 그 모든 것보다 태서가 우선이라는 듯 서류를 내려놨다. 그리고 당장 비서에게 전화해서 일정을 바꾸려는 게 역력해 태서가 급히 손을 들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음? 하지만 할 말 있는 거 아니었어?”

“제가 찾아갈게요. 그땐 지금처럼 굳이 시간 안 빼도 되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그럴래?”

김미경은 태서의 표정으로 정말 괜찮은지 살피고 이제 막 울리기 시작하는 핸드폰을 쥐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들에게 더 신경 써 주지 못해 미안한 듯 그녀의 눈썹 끝이 내려갔다.

“꼭 와.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시간 낼 수 있으니까.”

“그럴게요.”

“조만간 같이 저녁 먹자.”

김미경이 태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방을 나왔다. 문이 닫히기도 전에 핸드폰을 들어 귓가에 대는 그녀의 모습에 태서는 쓴 미소를 지었다.

전화로 임신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참, 태서야.”

그러다 막 사라졌던 김미경이 깜박한 말이 있는지 태서를 불렀다. 태서가 급히 미소를 지운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들어올 거지?”

예전에 태서가 집을 나갔을 때가 뇌리에 강하게 남았는지 김미경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래서 태서는 그녀를 달래고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이제 말없이 나갈 일은 없을 거예요.”

“그래.”

김미경이 손을 흔들며 사라지고 나서야 태서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제가 충동적으로 저지른 행동이 부모님의 마음을 힘들게 했다는 걸 알아 죄송스러운 마음이었다.

“죄송해요.”

처음부터 윤태서로 태어난 게 아니라 부모님이라는 존재에 대한 마음이 크게 없었는데 이번에 태서의 심장이 크게 흔들렸다.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해 주는 그들을 보면서 태서의 마음속 거리감도 한껏 좁혀지게 되었다.

물론 부모님을 다시 놀라게 할 일이 또 있겠지만.

“다녀올게요.”

태서가 억지로 지었던 미소 그대로 중얼거렸다. 울려 오는 핸드폰 진동이 태서에게 갈 시간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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