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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33화 (33/130)

33화

태서가 제 앞에 놓인 음료수를 노려보았다. 어제는 스무디 계열이었는데 오늘은 에이드였다. 카페인을 마셔도 좋지만, 자꾸 이런 종류가 끌리는 탓에 선택했는데 어딘가 마음에 안 드는 눈빛이었다.

“왜 그렇게 노려봐. 걔가 뭐 잘못했어?”

“너무 상큼해요.”

“상큼해서 문제구나.”

강세헌은 태서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기보단 맞춰 주기로 작정한 건지 음료를 들어서 입가에 갖다 댔다.

“그럼 다 마셔서 없애 버려.”

“그러려고요.”

태서가 단단하게 빨대를 이빨 사이로 물고 힘차게 에이드를 빨아들였다. 상큼하고도 시원한 음료가 태서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제 만족해?”

“아니요.”

“이번엔 또 뭐가 문젠지 말해 봐.”

다 해결해 주겠다는 듯 강세헌이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게 다 문제죠. 이건 왜 이렇게 쓸데없이 상큼해서 제 생각을 방해하는지 모르겠고 또 나는 왜 오늘도 형을 만나고 있냐고요.”

태서가 전부 비워 버린 빈 컵을 흔들어 보이며 말하다가 대뜸 화살을 강세헌에게로 돌렸다.

“내가 왜?”

“저 생각할 시간 준다면서요.”

“아직도 안 했어?”

강세헌의 뻔뻔한 물음에 태서가 울컥했다가 겨우 마음을 다스렸다. 여기서 흥분해 봐야 제 손해였다.

“수업이 끝날 때마다 부르고 이렇게 마주 앉아서 밥 먹고 커피 마시고 한참 있다가 놔주는데 어떻게 생각하라고요.”

“누가 들으면 내가 밤새 붙잡고 있는 줄 알겠다. 집에 가서 한다며.”

“가서 씻고 나면 졸리던데요?”

그래서 자고 일어나면 다시 학교에 가야 할 시간이 되고 또 끝나는 시간에 맞춰 세헌과 시간을 보내는 반복적인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아니, 씻고 나서도 시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는데 그것마저도 누군가가 가져가 버렸다.

“그리고 계속 통화하느라 눈 떠 보면 아침이라고요.”

태서가 괜히 빨대로 음료수를 휘저으며 꿍얼거렸다. 정말로 매일 자신을 데리러 오는 강세헌과 같이 시간을 보내고 나면 그날 하루가 그대로 끝이 났다. 그와 함께 있으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를 정도였다.

이런 태서의 불만에 강세헌도 할 말은 있는지 담담하게 짚어 주었다.

“시간이 필요하면 다음에 통화하자고 해도 되는데.”

“그건 그렇지만…….”

태서의 뒷말이 잦아들었다. 강세헌의 말이 맞았다. 그의 말대로 통화를 짧게 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강세헌과의 통화하고 있으면 중간에 언제 끊어야 할지 모른 채 그냥 흘러가듯 대화하고 있다는 거였다.

“좋아요. 오늘부터는 전화하지 마세요.”

이제 휘둘리지 않겠다는 듯 태서가 강경하게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그것을 본 강세헌이 예쁜 하늘색의 마카롱을 쥐여 주었다.

“일단 먹자.”

태서가 제 손바닥에 놓인 마카롱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대로 입에 집어넣었다. 오늘은 마카롱이 유명한 카페로 왔다. 그만큼 사람이 많아서 조금 놀란 것도 잠시 익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강세헌이 유명하다고 한 곳은 다 사람이 제법 차 있어서 어느 정도 적응하고 말았다. 그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디저트를 누릴 수 있는 수준이 된 것이다.

쫄깃하면서도 적당히 달콤한 마카롱을 먹고 있으니 강세헌이 새로운 음료수를 주문해서 가져왔다. 목이 메이지 않도록 적당한 때에 가져오더니 다른 마카롱까지 먹으라며 내밀어 주었다.

강세헌이 주는 대로 아기 새처럼 받아먹던 태서는 불현듯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열심히 오물거리던 입을 멈췄다.

“이거…….”

태서가 마카롱을 강세헌 보란 듯이 들며 말했다.

“원래 안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 먹히는 거예요. 내 입맛이 바뀌었구나 싶었는데…….”

뒷말은 더 잇지 않았다. 예전에 박한수가 제 기분을 맞춰 주려 좋아하지도 않는 마카롱을 사 왔던 일이 떠올랐다. 태서가 되어서 새삼 마카롱이 맛있었나 싶었는데 그보단 임신하고 나니 입맛이 달라졌다는 게 맞았다.

“마카롱만이 아니고 이런 디저트를 밥 먹고 나서 즐기는 거 자체가 생소했죠.”

원래 태서는 이렇게 간식을 즐기지도 않았고 또 카페에 앉아서 그 분위기를 누리는 것조차 하질 않았다. 그런데 강세헌과 매일같이 카페를 들락거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긴 너 호텔에 주로 있더라.”

“남이 들으면 오해할 말을 잘도 하시네. 저 호텔집 아들입니다. 호텔집 아들이 호텔에 있는 건 당연하죠.”

“좋겠네.”

“형도 호텔집 아들 할래요? 형이 장남이고 내가 차남.”

태서가 키득거리며 농담을 던졌다. 순전히 강세헌과 함께 하면서 누그러진 마음으로 친 장난이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야멸찼다.

“아니.”

“그렇게 칼같이 잘라 버릴 정도로 싫어요? 형네 집이 좋아서?”

태서가 너무한다는 듯 굴어도 강세헌은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얼굴로 받아쳤다.

“장남이랑 차남은 같이 못 살아. 나는 지금 이 관계가 좋아. 너랑 형제 말고 부부 정도면 생각해 보지.”

갑자기 훅 들어온 그의 고백과도 같은 말에 태서가 입술을 달싹거리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무슨 부부까지…….”

태서는 얼굴로 올라오는 열기를 느끼며 강세헌에게 들킬까 슬쩍 고개를 틀었다. 그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한 말일 수 있는데 제가 이렇게까지 동요한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옆으로 고개를 돌렸어도 강세헌의 시선을 피하지 못했나 보다.

“네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 모르지만, 그중 하나엔 우리가 부부가 된다는 결론도 있을 테니까.”

태서가 아이를 낳기로 하고, 또 강세헌과 함께 산다고 한다면 둘의 관계가 달라질 것이다. 강세헌의 말대로 부부의 이름으로 관계를 이어 갈 것이고 두 사람이 함께 아이를 키우게 된다.

그냥 그렇게만 따지면 너무도 단순한데…….

태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순히 아이를 낳느냐 마느냐로 생각하기엔 제 상황이 많이 복잡해요.”

태서가 고개를 저으며 제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걸 말해 왔다. 실은 강세헌이 아니더라도 제 머릿속에 엉켜 있는 복잡한 실을 풀어내기가 난감한 참이었다.

‘나는 윤태서가 아닌데 윤태서가 된 거란 말이야.’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 흔들리니 실은 임신까지 갈 수도 없었다.

이제라도 어떻게든 실을 풀어내야 할 텐데.

“그럼 하나씩 고민해 보자. 내가 도와줄게.”

“형이요?”

태서의 가라앉은 표정을 본 강세헌이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 지금껏 열심히 먹여서 올려 둔 태서의 기분을 유지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은 어땠어?”

어떻게 도와줄 거냐고 물어보려던 태서는 그의 나직한 한마디에 모든 행동을 멈췄다. 심장이 멈춘 듯 반응하는 걸 멈춰 버린 태서의 굳은 얼굴을 강세헌이 세밀하게 훑었다. 곧 태서의 눈동자가 어색하게 강세헌의 얼굴을 비껴 갔다.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 어떠냐니…….’

마치 윤태서의 몸에 제 영혼이 들어온 걸 아는 것만 같았다. 제 상황을 그가 단박에 찌르고 들어온 것만 같아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태서가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 강세헌은 그의 손에 들려 있기만 한 마카롱을 가져왔다. 오늘은 평소만큼 먹이지 못한 게 걸리는지 강세헌의 시선이 테이블을 훑다가 태서에게로 돌아갔다.

“베타였던 네가 갑자기 오메가가 된 것도 모자라 임신을 했다는 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지.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일 거 아니야.”

그의 설명이 태서의 막혔던 숨통을 틔워 주었다.

“……그렇긴 한데.”

강세헌의 말이 맞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꼭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태서가 어색한 대답을 하자 강세헌이 바로 말을 이어 갔다.

“만약 내게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많이 흔들릴 거야.”

강세헌의 낮은 목소리가 태서의 굳었던 심장을 천천히 다독여 주었다.

“너처럼 웃을 수도 없었을 테고 지금까지 고민할 여유도 없었겠지.”

“그건…….”

“그래서 네가 더 대단하고 그렇기에 너의 결정을 존중하는 거야.”

태서 또한 강세헌의 말대로 임신했을 때 그 어떤 여유도 느끼지 못했다. 당장 제가 오메가가 된 것도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이었는데 임신이라니. 그러나 그 모든 충격을 완화해 준 건 다 강세헌이었다.

그의 페로몬이 태서의 예민한 신경을 보듬어 주고, 충분히 고민해 보고 결정해도 좋다는 배려를 해 준 덕분에 성급한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오히려 그가 자신을 대단하다고 말해 오고 있었다.

‘이게 무슨…….’

태서가 먹먹한 제 가슴을 손바닥으로 눌러 보았다. 제가 윤태서가 된 건 평생 혼자 안고 가야 할 비밀이라고 여겼다. 어떻게 윤태서가 되었는지도 몰랐고 그만큼 원래 자신으로 돌아가는 방법도 몰랐다. 그러니까 윤태서라는 인물에 적응해서 살아가자 결심했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했었다.

누구도 알아주지 못할 자기 혼자의 고민이 될 테고 그것을 혼자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강세헌의 말을 들으니 제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돌이 하나 사라진 기분이었다.

‘왜 자꾸 이러는 거야.’

제가 힘들고 답답할 때마다 적절하게 자신의 마음을 달래 오는 이유가 뭔지. 벌써 강세헌에게 두 번이나 위로를 받았다. 처음엔 원작대로 흘러서 결국 죽을 운명에 처하는 건 아닐까 싶었을 때, 그리고 지금.

“있잖아요.”

태서가 강세헌이 내려놓은 마카롱을 들면서 운을 뗐다.

“저 결정했어요.”

복잡하게 꼬여 있던 실이 한순간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풀려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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