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강학중 회장을 중심으로 모인 두 일가가 서로를 볼 수 있도록 나란히 앉았다. 강학중의 장남, 현 KH전자를 틀어쥐고 있는 강진한과 그의 아내 서은희와 아들 강세헌이 회장의 왼편에 자리했고, 차남 강수학과 한미순, 강인혁이 오른편에 앉았다.
정기적인 모임이지만 오늘따라 불편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강수학과 강세헌의 일 때문이었다.
강수학은 마트를 맡은 김에 제 능력을 보이고자 새로운 일을 벌였다. 그리고 그는 그 일에 KH전자를 끌어들이려고 했다.
꼭 KH전자의 손을 잡지 않고 진행해도 될 사업이었다. 그러나 그건 아무리 잘 되어 봐야 잠깐 반짝하고 말 이벤트였다. 강수학이 원하는 건 강세헌이 이번에 성공시킨 것만큼의 파급력을 원했고 그러려면 강세헌이 내놓은 핸드폰이 필요했다.
처음엔 강수학이 직접 강세헌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정식으로 제의하라는 답을 받았다. 그래서 한미순이 강인혁에게 서류를 안겨 주며 강세헌에게 찾아가도록 시켰고 강인혁은 쫓겨났다.
그것만으로도 서운할 지경인데 설상가상 정식으로 넣은 서류마저 사업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결국 이래저래 아쉬움이 중첩되어 불편한 자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강수학은 계속 헛기침을 내뱉고 있었고 한미순은 무슨 생각인지 계속 강세헌을 보며 할 말을 고르고 있었다. 그리고 강인혁은 어딘가 복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분위기에서 강세헌만이 묵묵히 식사를 이어 가고 있었다.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듯 아주 태연한 얼굴로.
“세헌이를 아주 잘 키웠네, 형.”
강세헌이 흔들리지 않는 모습조차 거슬렸는지 강수학이 절대 좋은 뜻으로 들리지 않을 칭찬을 건넸다. 그것도 강세헌이 아닌 그의 부친이자 제 형인 강진한에게 돌려서. 동생과 아들 사이에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을 알고 있던 강진한은 적당히 대꾸했다.
“일에서만큼은 나도 세헌이한테 한 수 무를 때가 많아. 내 아들이지만 얼마나 고집이 센지.”
강진한이 적당히 사람 좋은 미소로 받아쳤다. 강진한의 남몰라라 하는 말투에 강수학이 눈썹을 좁혔다. 그냥 이렇게 넘기려는 게 뻔히 보였다. 강수학이 다시금 강진한에게 한마디 하려고 할 때, 강학중의 무거운 목소리가 울렸다.
“수학아.”
“네, 아버지.”
“사업이 어그러지는 거야 늘 있는 일이니 개의치 말아라.”
“……네.”
더는 언급하지 말라는 의미에 강수학이 억지로 불쾌함을 달래야만 했다.
한편 강인혁이 맞은편에 앉은 강세헌을 힐끔거렸다. 강인혁 역시 강세헌을 봤을 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왜 윤태서가 그 집에 있었는지, 둘이 무슨 사인지,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등등. 그러나 무엇 하나 이 자리에서 언급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인혁아.”
강세헌이 막 국을 뜨려던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강인혁과 눈을 마주쳤다.
“할 말 있으면 해.”
“…아니야.”
강인혁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고는 입술을 지그시 사리물었다. 강세헌이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강인혁마저 강세헌에게 고개를 돌리자 한미순은 한숨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제 남편이나 아들이 하나같이 형님네한테 당당하질 못하니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아득한 건 앞날이었다.
강세헌이 갑자기 실패라도 하지 않는 이상 후계 구도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갈 게 뻔했다. 강학중 회장 역시 강인혁보단 강세헌에게 더 마음을 줄 게 분명하니 한미순은 이것을 변화시키려면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계속 이렇게 흘러갈 순 없어.’
한미순이 물 잔을 꼭 쥐었다. 마침 그것을 해결해 줄 만한 적당한 구실을 가져왔다.
“이번에 정 교수님을 만나고 왔는데 딸이 유학을 끝내고 돌아왔더라. 세헌이 넌 기억나? 정해진이라고 어릴 때 종종 만나곤 했었는데.”
“기억납니다.”
“그래? 해진이 정말 예뻐졌더라. 세상에, 지나가는 남자들이 다 한 번씩 돌아볼 정도라니까?”
한미순이 끌어들인 이름에 강세헌을 제외한 모두가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그거 아니? 해진이가 어릴 때 너 좋다고 쫓아다니더니 아직도 마음이 있는 거 같더라. 너 사귀는 사람 있냐고 물어보던데, 어때? 이참에 내가 제대로 자리 마련해 줄까?”
“괜찮습니다.”
강세헌이 단박에 거절했다. 너무도 확고한 그 대답에 한미순이 당황했다가 슬쩍 질문을 돌려보았다.
“혹시 만나는 사람 있니?”
“없습니다.”
“그런데 왜…… 설마 아직 일에 더 집중하고 싶다는 건 아니지?”
“일과 연애는 별개입니다만.”
일을 하더라도 연애는 따로 잘 챙기겠다는 투였다. 이렇게 나오면 그를 설득하기가 힘들어졌다. 한미순은 강세헌이 일을 핑계 댈 줄 알고 말을 준비했다가 급히 방향을 틀었다. 그래도 바로 떠오르는 말이 없어 잠시 대화가 멈춘 사이 강인혁이 나섰다.
“어머니, 그만해요.”
한미순이 왜 네가 나서냐는 눈빛에도 강인혁은 물러나지 않았다. 순전히 강세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 때문이었다. 강세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괜히 태서가 떠올라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인혁이 너는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히 있어. 해진이 유학에서 돌아왔다고 다들 눈독 들이고 있던데 정작 해진이가 세헌이한테 관심을 비치잖아. 이 기회에 해진이를 데려오면 얼마나 좋아.”
한미순은 전부 강세헌을 위해서라는 식으로 포장했다. 정작 강세헌의 부모는 전혀 신경 안 쓰는데 말이다.
“해진이가 얼마나 괜찮은 앤데, 괜찮기만 해? 집안도 교수 집안이잖아. 세헌이 지금 잘나가고 있을 때 옆에 해진이 붙여 주면 안정적으로 일에 집중하기도 좋지. 안 그러니, 세헌아?”
“괜찮습니다.”
아까와 다름없는 대답으로 거절한 강세헌은 물을 마시며 식사를 마무리했다. 강세헌이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으니 한미순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스쳐 갔다.
실은 이번에 인혁의 집에 서다래가 있는 걸 본 후부터 한미순의 마음이 영 차분해지질 못했다. 인혁이가 태서랑 결혼하면 좋을 텐데 제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인혁이가 그 보잘것없는 서다래란 아이와 이어지기라도 한다면? 한미순이 불안하게 치닫는 생각을 억지로 접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였다. 그러니 지금부터 어떻게든 태서와 결혼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움직일 생각이었다.
예쁘고 참한 교수 집안의 딸. 적당히 이어 줄 구실 정도는 되는 집안이지만 사업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어 줄 수 없는 아이와 이어 주고 나면 인혁이는 꼭 태서와 붙여 놓을 계획이었다.
인혁이가 태서와 결혼만 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등에 날개를 달 수 있으니 한미순이 다시금 강세헌에게 말했다.
“해진이 놓치면 얼마나 아깝겠어. 형님은 해진이 어떻게 생각해요?”
“글쎄, 갑작스러워서 모르겠네.”
한미순의 질문에 이제껏 조용히 있던 서은희가 어깨를 으쓱였다. 거기다 강진한까지 강세헌의 결혼에 관심이 없는지 입을 열지 않으니 한미순 혼자 열을 내고 있었다.
“어쩜 다들 이렇게 세헌이한테 관심이 없어요?”
“놔둬라.”
“아버님.”
세헌이에게 관심을 가져라. 이제 결혼할 시기가 아니냐 등으로 몰아가려던 한미순의 말을 받아친 건 다름 아닌 강학중 회장이었다.
“아버님은 세헌이가 안정적으로 일에 집중하는 걸 원하지 않으세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학중 회장이 말릴 줄은 몰랐다는 듯 한미순이 더 흥분해서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강학중 회장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손을 흔들었다.
“저놈이 알아서 하겠지.”
“그러다 시기 놓쳐요. 이게 다 세헌이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걸요.”
강학중마저 놔두라는 소리에 한미순이 서운하다는 듯 굴었다.
“지금도 일 잘하고 있는데 뭐가 문제야. 그리고 저놈이라면 짝이 될 아이도 알아서 구해 올 거야.”
“어머? 세헌이가 사업하는 눈이 좋은 건 알지만 그게 어떻게 짝을 보는데도 같겠어요. 그런 건 다 저나 형님이 나서야 한다고요.”
괜히 어른들이 신붓감을 구해 오는 게 아니라며 한미순이 어떻게든 강학중 회장을 설득하려 했다. 해진이와 결혼시켜야 제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지겠는데 강세헌은 꿈쩍하질 않고 의외의 곳에서 방해가 들어왔다.
“해진이 같은 애가 상대로 아주 제격이에요. 걔 말고 세헌이한테 더 잘 어울리는 아이가 어디 있다고 그러세요.”
“그거야 모를 일이지. 떡하니 제 옆에 어울리는 놈으로 들여놓을지….”
강학중 회장이 모호한 대답을 했다. 한미순은 잠시 이상한 눈빛으로 보았지만 이내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어쨌든 세헌이 너 잘 생각해 봐. 해진이가 계속 너한테 관심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말란 말이야.”
한미순은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듯 굴었다. 이제 누가 그녀를 말려도 절대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까지 엿보였다. 이렇게 된 김에 어떻게든 이 결혼을 성사시켜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강학중 회장마저 나섰지만, 한미순은 전혀 개의치 않고 밀어붙였다. 이제 강세헌이 단호하게 말하지 않으면 언제고 자리가 마련될 듯했다. 아니, 그런 쪽으로 분위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핸드폰이 울리자 그것을 잠재운 강세헌이 한미순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이제껏 담담하게만 반응하던 그가 처음으로 한미순과 직접적으로 눈을 마주쳤다. 그의 시선을 맞닥뜨린 한미순은 일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만나는 상대는 없지만,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은 있습니다.”
아닌 척 귀를 기울이고 있던 강인혁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설마 같이 살고 싶다는 이가……. 차마 윤태서는 아니겠지 싶지만 확신할 순 없었다. 강인혁만큼이나 놀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강세헌은 처음과 다름없이 무심하고 덤덤했다.
“제 짝은 제가 알아서 고르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른들의 눈에 차는…….”
“찰 겁니다.”
한미순이 미련을 못 이겨 꺼내는 말을 강세헌이 단호하게 잘랐다.
“애초에 제 마음에 차는데 다른 사람이 싫어할 리가 있겠습니까. 사랑스러운 친구로 데려 올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언제나 그렇듯 당당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그게 참 얄미워야 하는데 너무도 강세헌스러워서 모두가 저도 모르게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약속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강세헌이 일어나서 나갈 때까지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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