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집으로 들어온 태서가 부른 배를 어루만지며 소파에 앉았다. 아까 병원에 가서 중요한 말을 들은 거 같은데 기억에 남는 건 갈비집이었다. 태서가 맞은편에 앉은 강세헌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그 식당 맛있었어요.”
“하도 빨리 삼키길래 갈비 맛을 못 느낄 줄 알았는데?”
“자꾸 녹아서 맛을 못 느낀 거예요. 제 탓이 아닌데요.”
“그 집으로 데려간 내 잘못이네.”
태서의 얼굴에 떠오른 만족감에 강세헌은 아무려면 어떠냐는 식으로 미소 지었다. 그러다 미소가 잦아들 때쯤 강세헌은 태서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임신했다고 해서 새삼 태서가 달리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예전보다 그의 얼굴이 좋아 보이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살이 막 오른 건 아닌데 피부가 반들반들한 게 잘 먹고 잘 잔 얼굴?
호텔에서 햄버거 먹을 때만 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새삼 내가 잘 먹였구나.”
“그것도 다 노리고…….”
“아니야. 아니라고.”
강세헌은 병원에서처럼 당하기 전에 태서의 말을 바로 잘라 버렸다. 태서가 임신해서 잘해 주거나 잘 먹여 준 게 아니었다.
“그럼 왜 잘해 줬어요?”
“내가 먹을 밥에 숟가락 하나 더 올린 것뿐이야.”
태서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작아졌다. 그런 것 치고 제가 먹고 싶은 것도 잘 챙겨 주고 또 아침에 먹지 않는 음식들도 다 알고 신경 써 줬다.
“그래도 잘 먹긴 했어요. 그전엔 입맛이 없었거든요.”
아침엔 바로 일어나서 뭘 먹고 싶지 않았고 저녁엔 혼자 먹어서 밥맛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강세헌의 집에선 매일매일 저녁이 기다려졌다. 그게 다 이유가 있었음을 알아낸 태서가 운을 뗐다.
“알파 페로몬 때문인가 봐요.”
아까 집에서 오는 길에 잠깐 검색해 본 태서가 제가 찾은 정보를 말해 주었다. 임신한 오메가는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제 페로몬은 감추는 동시에 타인의 페로몬에 예민해진다. 특히나 아기 아빠인 알파가 아닌 다른 알파의 페로몬에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어 몸에서 신호를 보내 온다.
그게 식욕 부진이 될 수도 있고 울렁증이 될 수도 있고. 그러니 몸이 안정되기 위해서라면 아기 아빠인 알파의 페로몬은 필수였다. 오메가는 제 알파의 페로몬으로부터 보호받는 느낌을 받아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계속 입맛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세헌이 형 페로몬 때문에 잘 먹었나 봐요. 아침에도 잘 먹었잖아요. 그죠?”
주말에 강세헌을 따라 나와서 먹은 브런치도 맛있었고 요 며칠간 그가 회사에 나가지 않아 계속 얼굴을 맞대고 식사했다. 그럴 땐 굳이 저녁이 아니어도 다 맛있게 먹었다.
이게 다 이유가 있었구나, 신기하다고 중얼거리는 태서의 고갯짓을 보던 강세헌이 돌연 화제를 바꿨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장난은 여기까지라는 듯 강세헌의 물음에 방금까지 재잘대던 태서가 입을 다물었다.
“집에 들어가려고요.”
일단 중요한 사항이니 가장 먼저 부모님께 말씀드려야겠단 생각이었다. 나이로는 성인이지만 아직 부모의 품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태서를 제일 걱정하고 신경 쓰는 사람들이기에 가장 먼저 말해야 한다고 여겼다.
아직 아기를 낳을지 말지 아무것도 결정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데려다줄게.”
태서의 결정에 강세헌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빠른 움직임에 태서가 얼떨떨할 정도로.
“지금 바로요?”
“시간 끌 필요 없잖아.”
강세헌이 차 키를 집어 드는 걸 보곤 태서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마지못해 일어났다. 시간 끌 필요가 없다지만 조금 더 머물라거나 가서 무슨 말을 할지 정도는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서운한 마음 때문인지 태서는 강세헌의 차를 타고 가는 내내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
“들어가.”
강세헌이 시동도 끄지 않은 채 건네는 인사에 태서의 손이 잠시 허공을 맴돌다가 차 문을 열었다. 지금 그의 집을 나온다고 해서 못 만나는 것도 아닌데 어딘가 아쉬움이 맴돌았다.
그의 아기를 임신한 걸 알면서도 저렇게 태연히 인사할 수 있다니, 서운함과 아쉬움이 범벅된 감정은 어느새 강세헌을 향한 불만으로 변질되었다.
“갑니다.”
태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강하게 문을 닫은 그는 강세헌을 돌아보지 않고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간 태서는 뒤로 문이 닫히는 둔중한 소리에 맞춰 한숨을 내쉬었다.
“낳을 건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뭐가 저렇게 남 애 보듯이 하는지. 정작 그가 물어본다고 해도 확실히 답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다녀왔습니다.”
집으로 들어온 태서는 언제나 그렇듯 일하는 아주머니께서 반겨 주실 줄 알았다.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태서가 몸을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오늘 안 나가셨어요?”
부모님이 서 있자 태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 왔다. 늘 바쁘니까 오늘도 어련히 집에 안 계실 줄 알았다. 그러나 자신들이 집에 있는 게 중요하냐는 듯 황당해하는 부모님의 반응에 제 상황이 떠올랐다.
‘나 가출했지.’
“죄송합니다.”
태서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 다짜고짜 허리부터 숙였다. 어떤 이유가 있든 아들이 되어서 집을 나간 건 잘한 짓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걱정할 걸 생각하면 더욱 잘못된 행동이었다.
“들어와라.”
지그시 태서를 내려다보던 윤석훈이 말했다. 제가 벌인 짓으로 부모가 속상해하는 건 알고 반성하는 태서의 행동 덕분인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더불어 생각보다 태서의 얼굴이 괜찮아 보여 한시름 놓인 영향도 있었다.
소파에 앉은 태서는 제 앞으로 내밀어지는 오렌지 주스를 보고도 손을 뻗지 않았다. 목이 마르지 않기도 했지만, 딱히 뭔가를 마시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어디서 지냈니?”
김미경의 물음에 태서는 “아는 형 집이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김미경이 윤석훈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눈빛이 뜻하는 바를 알아챈 윤석훈이 나직이 헛기침을 했다.
실은 김미경에게는 놔두라고 해 놓고는 남몰래 태서와 어울리는 박한수에게 전화했다. 태서가 인혁이네 집에서 지내고 있는 건 아닌지 알아봐 달라고 한 걸 뒤늦게 김미경에게 털어놨던 것이다. 김미경 역시 한미순을 통해 인혁이네 있는지 알아봤던 터라 태서의 말이 의외이긴 했다.
아는 형이 누군지 궁금하지만, 그보다 먼저 나눠야 할 대화가 있었다.
“말해 봐라. 파티에서 일을 벌였니?”
“네.”
윤석훈의 물음에 태서는 감추지 않고 털어놓았다.
“그게 서다래라는 아이를 괴롭힐 생각으로 그런 거고?”
“…네.”
태서는 조금 늦지만 그 역시 솔직히 대답했다.
“그래선 안 되는 행동인 걸 알고도 했구나.”
윤석훈은 복잡한 마음으로 말했다. 모른다고 발뺌했다면 실망했을 테지만 반대로 솔직하게 말해 오니 화를 낼 생각도 들지 않았다. 태서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어떤 마음으로 그런 일을 벌였을지 알기에 착잡한 기분이었다. 윤석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아까보다 더 냉정하게 말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네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어. 그건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네가 나쁜 마음을 먹고 행한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게 된 거다. 네 마음 뒤로 숨는 건 비겁한 짓이야.”
윤석훈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태서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윤석훈의 말이 태서의 심장을 아프게 찔러 왔다. 왜 하필 죽는 악역의 몸에 들어왔냐며 제 사정에만 억울해서 다른 사람을 돌아보지 못했다. 그래 놓고 또 태서의 조건은 좋다며 그건 한껏 누렸다. 참 이기적인 선택이었다.
“알고 있다니 더 말하지 않아도 네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지?”
“네. 다래에게는 진심으로 사과할게요. 그리고…… 인혁이한테도요.”
“그 아이들이 네 사과를 받아 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하지 말아라. 전부 네가 벌인 짓이니 그것 역시 네 탓이야. 몇 번이고 사과해라. 그들이 원한다면 무릎도 꿇어라.”
윤석훈은 태서에게 사과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고 덮어 둬선 안 될 일이었다. 애지중지 키워 온 아들이지만, 다른 사람의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면 기꺼이 그러라고 당부했다.
그게 태서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이라면 그 길을 걸어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럴게요.”
태서가 깊이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자 윤석훈도 더는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피곤하진 않니?”
“음…… 조금요.”
“올라가서 쉬어라.”
태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윤석훈, 김미경과 차례로 시선을 마주쳤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윤태서가 되어 모든 죄를 뒤집어썼다며 억울해할 게 아니라 저들을 돌아봐야 했다. 태서를 낳은 죄로 남은 책임을 기꺼이 자신들이 짊어졌다. 태서를 바른길로 이끌려고 노력한 사람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태서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반쯤 몸을 틀 때였다.
“집에 꼬박꼬박 들어와라. 아들이 잘못했다고 굶기는 매정한 부모 아니다.”
헛기침과 함께 건네 온 윤석훈의 따뜻한 한마디에 태서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방으로 돌아온 태서는 오랜만에 본 제 침대에 몸을 던졌다. 몸을 감싸 오는 침대의 익숙함에 잠시 얼굴을 부비던 태서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모님과는 잘 풀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웠다. 임신한 걸 말 못 해서 그런가 싶었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그 원인이 누군지 깊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강세헌.”
자신을 집으로 미련 없이 보내 버린 그 인간을 생각하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태서는 몇 번 베개에 얼굴을 비비며 눈을 감았다. 계속 강세헌을 떠올리느니 자는 게 이득이었다.
***
눈을 비비며 낮잠에서 깨어난 태서가 느지막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시계를 보고 창문을 보니 커튼이 쳐져 있어 밖이 보이지 않았다. 태서는 침대에서 천천히 내려와 창가를 향해 다가갔다. 커튼을 치고 하늘을 보고 있으니 완연한 저녁이었다.
부모님은 호텔로 갔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태서가 돌아서다 멈칫했다. 무심코 아래를 보다가 걸린 낯익은 차. 설마 하는 눈으로 그 차를 자세히 들여다보던 태서가 급히 방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의 차는 아닐까 생각했다. 세상에 같은 차가 몇 댄데 눈에 익다고 다 강세헌의 차일까.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차에 기댄 누군가의 뒷모습을 본 태서는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왜 여기 있어요?”
태서의 당황한 물음에 차 보닛에 기대고 있던 강세헌의 몸이 천천히 돌아섰다. 그는 태서를 데려다줄 때와 다름없는 차림이었다. 설마 계속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어디든 갔다가 왔다면 좋겠는데. 태서의 불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세헌은 그를 보낼 때와 다름없는 무심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밥 못 먹을까 봐.”
알파 페로몬이 있어야 잘 먹는다며.
강세헌의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에 태서는 어떤 대답도 건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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