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이래서 나한테 잘해 줬구나, 라는 태서의 한 방에 진규민이 웃음이 터지려는 걸 겨우 참아 냈다. 급히 입을 막고 괜히 헛기침하면서도 진규민의 두 눈은 강세헌과 태서를 돌아보기 바빴다.
얼추 둘이 내뱉은 말이나 상황으로 봐서는 오해가 생긴 거 같은데 결과적으로 잘 대해 주긴 했나 보다. 어떻게 해 줬는지 듣고 싶지만 강세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어금니를 꽉 깨물어 턱 근육까지 실룩이는 강세헌에게 한마디 했다간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일단 검사부터 해.”
강세헌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태서가 두말하지 않고 일어났다. 어쨌든 제가 진짜 임신인지 아닌지는 태서도 궁금한 참이었다. 간호사를 따라 나가려던 태서가 문득 멈칫하더니 강세헌을 돌아보았다.
“바쁘면 먼저 가셔도 돼요.”
저번에도 바빴던 게 생각나서 한 말이었다. 그때처럼 핸드폰이 계속 울려 대는 것보단 아예 회사로 가도 된다고 한 말이지만 강세헌이 알아서 하겠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생각해 줘도 참…….”
태서가 고개를 저으며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진규민이 두 손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강세헌이 주먹을 쥔 걸 봤기 때문이었다.
“너 그 주먹 날리면 큰일 나는 거 알지? 친구래도 안 봐줄 거다.”
“잘해 주라며.”
강세헌이 이 오해를 만들어 낸 진규민의 망발을 끄집어 냈다. 그가 잘해 주라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이런 오해 안 했다. 괜히 추가 검사해야 한다고 그러더니 정 신경 쓰이면 잘해 주라고 해서 그대로 따른 게 아닌가.
하지만 진규민도 나름 할 말이 있었다.
“내가 임신했다고 했어? 나도 검사해 봐야 안다고 했잖아. 의사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결과를 모르는데 예상만으로 말하는 건 환자의 불안을 키울 수 있다고.”
“그러면 검사만 하라고 하지 그랬어.”
“나름 친구니까 해 준 말이다.”
진규민의 항변에 강세헌이 어금니를 콱 물었다.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저작근이 튀어나오며 위협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낸 강세헌이 잇새로 말했다.
“……맛있는 거 많이 사 주고 안정을 취해 주라며.”
그래서 아침부터 태서를 신경 써 주고 괜히 클래식……까지 틀어 줬다. 전부 쓸데없는 짓이었다고 말하려는데 진규민이 손을 들었다.
“다 임신했을 때의 의사가 할 수 있는 말들이지. 애초에 나는 정밀 검사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이건 오해한 네 책임도 있다.”
일단 뻔뻔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는 걸 깨달은 진규민이 아예 훈계조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다 널 생각해서 한 말이다. 말이 나온 김에 내가 응? 널 얼마나 생각하는지 아냐? 회장님 건강도 생각한다고 연락드리고 예약 잡고, 가끔 회장님 핏줄이 내가 아닐까 한다고.”
“회장님이 왔었어?”
“응. 한 번 오셨지.”
강세헌의 물음에 진규민이 별일 아닌 듯 대꾸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강세헌이 심각하게 생각에 빠졌다. 얼마 전에 맡았던 그 알파의 향을 의심하던 강세헌에게 진규민은 친구이자 의사로서 조언을 가장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아무튼, 나는 다 태서 씨를 위해 한 말이었다. 임신하면 감정 기복도 커지고 몸도 예전이랑 달라진다고. 갑자기 잠이 많아지고 힘이 없어지는데 그게 임신인 걸 모르면 요즘 왜 이러나 싶어진단 말이지. 그러니까 검사받고 진짜 임신이라고 하면 잘해 줘. 그게 애 아빠의 역할이지.”
그래서 나한테 잘해 줬냐는 태서의 한마디로 애 아빠가 누군지는 확실했다. 이게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그런데 너 임신이라고 하면…… 아니다.”
책임질 건지 뒷일에 대해선 지금 물어보지 않아도 알게 되겠지, 싶은 진규민이 입을 다물었다.
***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다가 이름 부르면 그때 들어가시면 돼요.”
“네.”
간호사의 친절한 안내에 태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기하는 소파에 앉았다. 복도에 길게 자리한 소파에 끝에는 태서처럼 기다리고 있는 부부로 보이는 커플 한 쌍만 자리했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던 태서는 복도 벽에 머리를 기대고는 긴 숨을 내쉬었다. 아까는 강세헌이 있어 억지로 가벼운 듯 행동했는데 혼자라는 생각이 들자 감추기 바빴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말도 안 돼.’
임신 가능성을 본다는 말에 심장이 멈춘 것만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연속으로 벌어지자 심장이 빠르게 뛰고 숨이 막혀 오는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태서가 제 가슴께를 주먹으로 꾹꾹 눌러 보았지만 답답함이 가시질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지금껏 제게 벌어진 모든 이상한 현상을 두고 태서는 그저 원작과 다르게 발현을 한 것 때문이라고 여겼다. 각인인 건 아닌지 향을 맡지 못하는 원인을 알고 싶었지, 임신은 생각한 적도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만약 진짜로 임신이라면 어떤 대처를 해야 할지 막막했다. 히트가 와서 하룻밤을 보낸 것뿐인데 그로 인해 달라지는 게 너무도 많았다.
태서가 눈을 감고 잠시 생각을 멈춰 보려 했다.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하든 기분이 다 땅을 파고들어 가기만 할 뿐이라 우울해지고만 있었다. 그러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생겨났고 태서는 어떻게든 다른 생각으로라도 덮어 보려 애썼다.
순간 아까 진료실에서 본 강세헌의 표정을 떠올린 태서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의 클래식이 떠올라서 그랬다. 제가 임신인지 아닌지 모르고 한 행동이겠지만 그게 정말 딱 맞아떨어진 게 웃겼다.
만약 임신이어도 그라면 자신의 아이라며 같이 이 일을 헤쳐 나가 주지 않을까 생각하던 태서는 곧 고개를 저었다. 처음부터 강세헌은 자신의 히트를 잠재워 주려고 했을 뿐 그 이상의 관계를 원하지 않았다. 혹시나 아이를 가졌다고 해서 그와 책임을 나눠질 순 없었다.
‘임신이라고 하면 집으로 들어가야겠다.’
더는 강세헌의 집에 머물 수 없다고 판단한 태서는 심란한 마음에 제 머리카락만 헝클었다. 부모님을 만나 파티에서의 일도 수습하고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도 말하고…….
“윤태서 씨.”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태서는 내키지 않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며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의사를 향해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검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저 시키는 대로 움직였더니 다 됐다고 하며 앉으라는 말을 해 왔다. 이것도 집에 갔다가 며칠 후에나 결과를 듣는 건 아닌가 싶었던 태서는 조금 어리둥절한 상태로 의사를 바라보았다.
“임신이 맞네요.”
의사가 태연하게 내뱉는 통보에 태서는 남몰래 제 두 손을 꽉 잡았다.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태서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자 그의 기분을 살피던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해 왔다.
“가는 길에 초음파 사진 드릴 테니까 충분히 생각하시고 나서 다시 오세요.”
우선 생각을 정리하는 게 좋다고 판단한 의사의 결정에 태서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처음 본 의사와 계속 마주해 봐야 할 말도 없었다.
진료실에서 나온 태서는 아까와 다른 밝은 벽이 아닌 어두운 벽을 마주하며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강세헌이 태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임신이래?”
강세헌의 물음에 태서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싶어 제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 댔다. 진실을 밝혔을 때 그의 반응이 걱정돼서 그랬다. 실망하면 어쩌지? 자기보다 더 놀라고 당황스러울 텐데……. 부정적인 반응을 생각하니 끝도 없었다. 제 아이가 맞냐고 물어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럴 바엔 아예 아니라고 거짓말로 넘겨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전에 자기에게 잘 대해 준 건 어디까지나 임신인 것을 몰랐던 거니까. 뻔뻔하게 임신했다며 그에게 기대도 될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러나 이미 태서의 표정으로 답을 얻은 강세헌이 커다란 손으로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더니 말했다.
“기분은?”
강세헌은 다른 말 대신 태서의 기분부터 물어보았다. 임신인 걸 알았을 테니 심란할지 아니면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은지 싶은 물음이었다.
“기분이요? 그러니까…….”
강세헌의 물음에 태서가 놀란 듯 되물었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임신이면 어쩌냔 생각만 했지 아기를 품는 것에 대한 생각 자체는 해 본 적이 없었다. 남자의 몸으로 아기를 가지는 것 자체가 놀랄 일이라서 그랬다.
그리고 임신인 걸 안 강세헌이 어떻게 나올지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의 질문에 머릿속을 한 번 정리하고 나자 의외로 제 감정이 단순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자 태서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임신했다는 사실이 놀랍고 당황스럽긴 한데 그렇다고 막 제 인생이 끝났단 생각은 들지 않는 그런 기분.
“그냥 얼떨떨해요.”
“그것뿐?”
“네. 갑작스러워서 혼란스러운 거 빼고는 그냥 그래요.”
태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강세헌이 그의 옆에 가서 섰다.
“가자.”
“네? 어디로요.”
“집에 가야지. 검사할 거 더 없다니까 이제 가서 쉬면 되겠네.”
“아…….”
임신이라는 걸 알았으니 이제 그만 나가겠다고 말해야 하는데. 태서가 망설이면서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강세헌이 그의 등에 손을 댔다.
“오늘은 가는 길에 먹고 들어갈까? 먹고 싶은 거 없어?”
“……갈비요.”
이 와중에 먹고 싶은 게 있다는 게 신기해서 태서가 제 배를 둥글게 매만졌다. 그걸 본 강세헌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소? 돼지?”
“…….”
“다 먹자.”
간단하게 해결한 강세헌이 태서와 속도를 맞춰 걷다 문득 의문이 들었는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냐?”
아까 임신인 거 알고도 별말 안 하더니 결국 할 말이 있었나 보다. 어떤 말을 할지 몰라 태서는 긴장한 채 강세헌을 올려다보았다.
“임신해서 잘 먹는 거냐 아니면 원래 잘 먹는 거냐?”
“세헌이 형은 그 쓸데없는 질문이 제일 문제인 거 알죠?”
“소도 먹고 돼지도 먹고 싶다길래. 아니면 말고.”
강세헌의 실없는 말에 태서의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빠지며 입매도 풀어졌다. 이렇게 된 거 뒷일은 갈비부터 먹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일단 갈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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