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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24화 (24/130)

24화

“계속 말해 봐.”

“얼마 전에 히트가 왔다면 오메가가 됐다는 거잖아요. 그럼 페로몬을 느껴야 하는데 못 느끼는 거 같아서요.”

태서의 사정을 듣고서야 핸들을 쥔 강세헌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 중에 각인이 있다고 해서 그 생각을 해 봤어요.”

“그리고 그 상대가 나고.”

“네. 제가 오메가가 된 걸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데 또…….”

같이 밤을 보낸 사람이라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알아들은 강세헌은 더 묻지 않았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신호를 기다리는 강세헌의 손가락이 톡톡 핸들을 두드렸다. 그도 이전부터 생각했던 거였다. 윤태서를 만나고 그와 밤을 보낸 날 맡았던 페로몬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다음에 만난 윤태서는 페로몬이 느껴지지 않았다. 꼭 베타처럼.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에서라면 제 형질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데 윤태서만 제 형질이 부끄러워 감추는 줄만 알았다.

페로몬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에도 달라지는 건 없었기에 윤태서가 일부러 그런다고 여겼는데 제가 넘겨짚고 있었나.

“형질과 쪽으로 검사해 봐야겠네.”

형질과라는 낯선 용어에 태서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겠죠?”

“그럼 기본 검진에 형질과 검사를 추가해 보자.”

강세헌이 다시 차를 출발시키며 다음 신호에 걸렸을 때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젊은 남자의 음성이 들려오자 강세헌이 ‘빠르게 검진할 수 있게 준비해 둬.’라고 말하고는 끊어 버렸다.

태서는 그저 가만히 앉아 강세헌이 데리고 가는 병원으로 가는 게 전부였다.

***

진규민이라는 명패를 앞에 둔 의사는 강세헌 또래의 남자였다. 은테 안경을 들어 올린 남자가 강세헌과 태서를 번갈아 보다가 다시 차트를 바라보았다. 간단한 신상 정보를 통해 검진을 받고자 하는 이가 누군지 파악한 진규민이 운을 뗐다.

“혹시 둘 사이가…….”

“집주인.”

“누가 집주인인데?”

“당연히 내가 집주인이겠지. 얘가 얹혀사는 애고.”

강세헌의 정리에 진규민은 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 친구 놈이 혼자 사는 집에 들일 정도면 그냥 사이가 아닌 거 같은데 애매했다. 집안끼리 아는 사이라 데리고 사는 것인지 아니면 애인이라도 되는 건지. 애인이라 하기엔 사이를 물었을 때 바로 대답이 나왔어야 했다. 그게 강세헌의 성격이니까.

그렇다고 또 적당히 거리를 두는 사이면 보통 건강까지 신경 써 주나? 그것도 어디를 다쳐서 오는 것도 아닌 건강 검진을? 심지어 특정 과에 치중된 검진을?

‘형질과란 말이지.’

진규민이 몇 가지를 체크하고 있는 사이 태서가 방금 나눈 대화로 둘의 관계를 파악했다. 태서가 몸을 기울여 강세헌에게 속삭였다.

“친구인가 봐요.”

“비슷해.”

“그런데 그 집주인이라는 말…….”

의사가 어떤 사이냐고 물었을 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태서가 입을 가리지 않은 다른 손으로 엄지를 세웠다.

“정확한 소개였어요.”

“빌붙어 사는 애라는 말에 좋다고 웃는 건 너뿐일 거야.”

강세헌이 고개를 저어 대는 걸 보고도 태서는 그거 이상으로 깔끔한 소개는 없었다며 좋아했다.

“일단 검사해 보자. 오래 걸리진 않겠지만 항목이 많아요. 금식해야 할 항목은 뺄게요.”

강세헌에게 그리고 태서에게 차례대로 설명해 주던 진규민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어 붙였다.

“혹시나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항목을 추가해도 됩니까?”

“네, 괜찮아요.”

태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강세헌이 무리하지 않는 한에서 추가해도 된다고 덧붙였다. 당사자보다 더 신경을 쓰는 강세헌을 잠시 바라보던 진규민이 간호사를 호출했다.

“윤태서 님은 절 따라오세요.”

간호사의 친절한 안내에 태서가 어정쩡하게 일어나 그녀를 따라 나갔다. 단둘이 되자 진규민의 사무적인 표정이 사라졌다.

“어이, 집주인.”

“아직 문 열려 있다.”

지나가는 누군가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냐는 강세헌의 타박에도 진규민은 개의치 않고 말을 걸었다.

“요즘 집주인은 주말에 검진 잡아 두라고 연락해 주고 그래? 그냥 어떤 사인지 말해 보지 그래?”

“특별히 규정할 만한 사이는 아니야.”

“쓸데없는 말은 집어넣자.”

강세헌이 먼저 태서를 밀어 냈고 태서 역시 수긍했기에 둘은 적당한 선을 그어 두고 있었다. 서로를 편하게 대하면서도 그어 놓은 선을 넘어온 적은 없었다.

“그런데 형질이라니 무슨 문제가 있나?”

“발현한 지 얼마 안 됐어.”

“아, 그럼 한 번쯤 해야 했네.”

강세헌이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니 진규민은 제 차트를 클릭해서 태서의 나이를 확인했다.

“발현하기엔 늦은 나이야. 전체적으로 검사해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 봐야 해. 감응이 느린 건 아닌지 페로몬샘에 아무 문제가 없는지. 그런 걸 생각하면 잘 왔네.”

“하나 더 있어.”

“뭔데.”

“각인했을 수도 있는지 살펴봐야겠는데.”

“각인? 누구한테? ……설마 집주인은 아니겠지.”

처음부터 애인이라고 소개해 주지도 않은 놈과 각인 뭐 그런 거 아니지? 진규민의 눈이 강세헌을 훑어 내렸다. 내 친구가 각인을 하고도 인정하지 않을 쓰레기가 아니길 바라며.

***

태서는 검진을 끝내고 병원 1층 카페에서 강세헌을 기다렸다. 검진 내내 옆에 가면 계속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중간중간 전화가 올 때마다 짧게 나누는 대화로 일한다는 걸 알았다. 자신은 괜찮으니 회사에 가 보라고 해도 주말엔 가지 않는다며 끝까지 곁에 있어 주었다.

그러다 막판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전화 한 통만 하고 오겠다고 했다.

“주말도 없이 바쁘네.”

직급도 높아서 주말엔 취미 생활을 즐길 줄 알았는데 다 편견이었다.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지만 그중 강세헌은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괜히 그에게 민폐를 끼친 것만 같아 태서가 우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검사받을 때부터 기분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는데 혼자 남으니 점점 걷잡을 수 없어졌다. 왜 이러지, 싶어서 생각해 보니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자꾸 강세헌에게 도움만 받아서 그런 거 같았다.

“다음엔 말하지 말아야 하나.”

오늘 같은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입을 다무는 게 제일 좋긴 하겠는데…. 그런데 답답해질 땐 어떡하지?

아메리카노에 담긴 얼음을 보던 태서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껏 억지로 모른 척하고 있었는데, 아까부터 느껴지는 시선이 있었다. 자신처럼 혼자 앉아 있는 할아버지였다. 묵직한 분위기의 할아버지는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음에도 태서를 향한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혹시 저한테 할 말 있으세요?”

“젊은 청년 같은데 어디가 아픈가?”

중후한 목소리에 한 번, 처음 보는 사람에게 건네는 걱정 어린 물음에 두 번 놀란 태서가 뒤늦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냥 제가 요즘 큰 변화를 겪었거든요. 그거 검진차 왔어요.”

“혹시 말해 줄 수 있나?”

“어렵진 않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제 사정을 전부 내보이는 거 자체가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뭐, 오늘 보고 말 사람이라는 생각에 부담을 덜어 냈다.

“제가 늦게 발현했어요. 원래 나이가 들어서도 바뀌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되었네요.”

태서가 씁쓸하게 웃었다. 서다래에게 먹이려고 구했던 약을 제가 먹은 게 원인일 것이다. 원작의 윤태서는 오메가가 되지 못한 것에 괴로워했는데 자신은 전혀 원하지 않게 오메가가 되었다.

“발현을 원하지 않았나 보군.”

“그게 처음엔 순식간에 겪은 일이라 당황했었는데 또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니까 찝찝하기도 하고 복잡해요.”

오메가가 되는 것도 놀랄 일인데 남들과 같지 않다니 마음이 무거웠다.

“원래 이런 생각 많이 안 했는데 오늘 검진해서 그런가 봐요.”

낯선 사람에게 제 속을 털어 내자 태서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이런 말을 강세헌에게 해도 그는 나름의 위로를 해 줬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자신을 걱정해 병원까지 같이 와 준 이에게 계속 우울한 기분을 전염시키고 싶진 않았다.

“그저 눈이 가는 친구라 보고 있었더니 마침 내가 좋은 해답을 줄 수 있겠어.”

“정말요?”

그저 하소연에 불과했는데 해답이 있다니 태서가 반색하며 물었다.

“먹고 싶은 걸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게.”

“네?”

“이왕이면 같이 사는 이에게 생각나는 음식을 말하고. 먹고 싶은 걸 먹는 게 소화도 잘되거든. 더불어 기분도 좋아지지.”

“그게 그렇게 되나요?”

거창한 무언가를 기대했던 모양인지 못 미더워하던 태서가 점점 노인의 말에 넘어가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특별한 해답은 필요 없었다. 맛있는 걸 먹고 기분 좋아지면 되는 거였다.

“어?”

강세헌이 다가오는 걸 발견한 태서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제 집에 돌아가서 실컷 뒹굴 수 있겠다. 그때였다. 이제껏 대화를 나누던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또 만나지.”

“네, 안녕히 가세요.”

인연이 이어질지 모르는 일이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태서는 기분 좋은 인사를 건넸다. 긴 다리 덕분인지 금세 가까이 온 강세헌이 태서의 주변을 훑어보았다.

“방금 대화 나눈 사람 누구야?”

“오늘 처음 봐서 누군지는 모르겠어요.”

“그 친화력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구나.”

“제가 호감 가는 인상이라는 생각은 못하는 거죠?”

태서가 가볍게 받아치며 강세헌의 옆에 섰다.

“바로 집에 갈 거죠?”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꼭 그런 건 아닌데 먹고 싶은 게 생각나서요. 가는 길에 들려도 될까요? 예전에 한 번 우연히 들린 곳인데…….”

태서의 재잘거림을 들으며 강세헌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자리에 남아 있는 아주 미세한 알파의 향이 그의 신경을 찔러 댔다.

***

“결과 나왔나요?”

“몇 가지 항목 빼고는 보실 수 있으세요.”

“고마워요.”

저녁을 먹고 온 진규민이 간호사의 말에 의사 가운을 입으며 의자에 앉았다. 눈은 모니터에 고정한 그가 마우스를 움직였다. 몇 가지 창을 클릭하고 나서야 원하던 결과를 볼 수 있게 된 진규민이 흥얼거렸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천하의 강세헌이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오…….”

흥얼거리던 입을 꾹 다문 진규민이 심각한 눈으로 결과지를 살펴보았다.

「……등의 이유로 산부인과 추가 검진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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