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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21화 (21/130)

21화

강세헌과 강인혁이 사촌이라는 건 진즉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강세헌과 있을 때 강인혁과 마주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야만 했다. 아니, 생각했었던 거 같았다. 분명히 그런 날이 올 수도 있겠다고 상상한 적이 있었는데 무방비한 순간에 명치로 주먹이 훅 들어온 것만 같은 타이밍이었다.

“네가 왜…….”

강인혁의 물음에 태서의 입술이 딱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머리가 희게 변해서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게, 그러니까…….”

실은 강세헌과 아는 사이라는 게 뭐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강인혁과도 집안끼리 아는 사이인데 강세헌과 그렇게 안다고 해도 되고 아니면 너야말로 강세헌과 무슨 사이냐고 물어볼 수도 있는데 태서는 입만 달싹이며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질 못했다.

“갑자기 멍청이가 되기라도 한 거야?”

태서의 머뭇거리는 태도에 강인혁이 인상을 찡그리며 재촉해 왔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나 당황스러운 건 강인혁도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오늘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던 터라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제 앞에서는 이젠 안 그런다느니, 소개팅을 한다느니 그래 놓고 여기 있다라……. 아주, 영악한 짓은 혼자 다 하고 있구나.

“너 또 이상한 짓을 꾸미려고 그러는 거냐?”

“…그런 거 아니야.”

태서가 울컥해서 강인혁을 노려보았다. 사람 오해하는 것도 정도껏이지. 지금 제가 여기에 있는 게 쟤한테 무슨 피해를 끼쳤다고 대뜸 화부터 내는지 억울했다.

“그럼 말해, 왜 여기 있냐고 묻잖아.”

“그걸 네가 알아서 뭐 하게?”

그때였다. 태서는 등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동시에 옆으로 넘어온 팔이 현관문을 잡는 게 보였다. 그가 현관문을 밀어 주고 나서야 손잡이를 잡은 제 손이 떨리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세헌이 형.”

“내 집에 누가 있든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묻지?”

“그게 아니라 혹시나 윤태서가…….”

“나한테 할 말 있어 온 거 아닌가?”

강인혁이 태서에 대해 말하려고 입을 뗄 때였다. 어쩌면 지금까지 자기한테 관심이 없는 척 제 주변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걸 강세헌에게 말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형한테 할 말 있는 거 맞는데 윤태서가 있으니까…….”

“그래서 누구 만나러 왔는데?”

그러나 강세헌이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강인혁이 태서의 이름만 불렀다 하면 툭툭 말을 끊어 왔다.

“나한테 할 말 있으면 들어오고 아니면 가라.”

안으로 들어가도 좋다는 듯 어깨를 돌리는 강세헌의 손짓에 태서가 못 이기는 척 집 안으로 들어갔다. 태서의 어깨에 얹었던 손길이 제법 부드러운 것에 비해 제게 하는 행동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강세헌의 비교되는 태도에 강인혁이 다문 입 속에서 이를 깨물었다. 평소에 살갑진 않더라도 사이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에게는 차갑게 말하면서 태서는 보호하듯 안으로 들이는 모습에 짜증이 올라왔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요즘 자기를 봤다 하면 그렇게 가시를 세우던 태서가 강세헌의 앞에선 한없이 유순하게 굴고 있었다. 강세헌의 말을 따르는 게 무슨 문제가 있냐 싶으면서도 이유 모를 불쾌함이 느껴졌다.

“윤태서랑 아는 사이라서 그랬어.”

“하아, 인혁아. 내가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하는 것 알 텐데. 너 나한테 윤태서가 누군지 소개하러 왔니? 빔이라도 띄워 줄까? 프로젝트 할래?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어떤 사이인지 발표해 주고 싶어?”

“…형한테 줄 게 있어서 왔어.”

강세헌의 말이 길어지는 게 그의 심기가 안 좋다는 신호와 다름없기에 강인혁이 한발 물러났다. 그제야 강세헌은 강인혁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천천히 닫히는 문이 강인혁에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시간제한을 주는 것만 같았다.

강인혁이 거친 손짓으로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강세헌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으로 들어온 강인혁은 테이블 위로 어지럽게 늘어진 노트북과 종이를 챙기는 태서를 발견했다. 방금까지 거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던 듯 챙기는 손길이 부산스러웠다.

“왜 갑자기 자리를 정리하는 거지?”

“들고 방에 가서 하려고요.”

“뭐 하러 번거롭게 굴어.”

강세헌이 소파에 앉으며 태서에게 치우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니 태서가 힐끗 강인혁의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방에 가서 할게요. 계속 여기서 공부하려니 허리도 아파서요.”

“그냥 편하게 있어라. 어울리지 않게 왜 눈치를 보고 있어.”

“제가 불편해서 그래요.”

강세헌이 태서의 머리통을 잡더니 뒤로 끌어 소파에 앉혀 버렸다.

“응, 자세가 구부정해서 그래. 편하게 앉아 있어.”

“몸이 불편하다는 게 아니잖아요.”

태서가 울컥해서 따지다 다시 강인혁을 의식하며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무슨 말을 해 봐야 좋은 꼴을 보이지 못할 걸 알기에 그랬다. 강세헌은 제 옆에서 불편한 티를 팍팍 내는 태서를 무시한 채 강인혁에게 맞은편을 가리켰다.

“작은어머님이 많이 급하시네.”

한눈에 강인혁이 여기 오게 된 배경에 한미순이 있음을 알아챘다. 딱히 숨길 것도 아니라 강인혁은 말없이 자리에 앉으며 서류를 내밀었다.

“이거 전해 주래서…….”

“이게 뭔지 알아?”

“자세히는 모르는데 KH마트에서 이번에 기획한 프로젝트 관련해서…….”

“잘 아네.”

강세헌이 강인혁의 말에서 얻을 걸 얻었다는 듯 그의 말을 잘라 냈다.

“도로 가져가.”

“…뭐? 하지만 이거 열어 보지도 않았잖아.”

“KH마트에서 기획한 프로젝트라며. 그런데 왜 네가 들고 오는데. 너 KH 사원이야? 이 프로젝트 책임자야? 이 안에 든 서류를 볼 자격이 있어?”

“그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아버지가 진행할 첫 사업이다 보니 신경을 많이 쓰고 계셔. 그래서 형이랑 같이 하고 싶다니 내가 온 거야.”

강인혁은 또다시 중간에 말이 잘릴까 빠르게 내뱉었다.

“그러니까 너 뭐냐고. 네가 왜 이걸 전하고 있어. 도로 가져가서 정식 절차 밟아.”

“형!”

강세헌이 팔짱을 끼고 서류를 내려다보기만 하자 강인혁의 언성이 높아졌다. 원래도 강세헌이 쉽게 받아줄 거라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가져가라고 거절하면 웃으며 그의 기분을 맞추거나 한 번 봐주면 안 되냐고 말할 생각이었다.

이래서 이 심부름이 싫었다. 형이 싫은 건 아니지만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성격은 가끔 피곤하게 다가왔으니까.

그래도 아버지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왔는데 강세헌은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딱딱했고…….

윤태서가 보고 있었다. 아까는 방에 들어갈 것처럼 굴었으면서 지금은 가만히 앉아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

강인혁이 이를 꽉 물며 눈에 힘을 주었다.

“형, 우리 같은 KH 가족이야.”

이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는 강인혁과 강세헌이고 윤태서는 생판 남이었다. 그러니 적어도 제 입장도 생각해 주길 바랬다.

“인혁아.”

강인혁의 서운함을 알아본 강세헌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너는 지금 남이 보는 앞에서 절차도 무시한 채 주먹구구식으로 사업을 펼치는 모습을 보여 주려는 거냐? 널 생각해서 이 서류 받아 주면 돼?”

“형!”

결국 폭발한 강인혁이 그를 강하게 불렀다. 강세헌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지금의 편협한 생각으로는 그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가서 작은어머니한테 말해. 네 사촌 형은 집에만 오면 멍청이가 되어 버려서 이런 어려운 거 모른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강인혁의 마음을 돌아봐 주지 않는 태도였다. 결국 강인혁은 거친 숨소리를 몇 번 내쉬다가 서류를 들고 나가 버렸다.

쾅, 하고 강하게 닫히는 현관문 소리에 태서가 어깨를 움찔했다.

‘강인혁 무섭네.’

그리고 그런 강인혁을 말 몇 마디로 밀어 낸 강세헌은…….

“왜 그렇게 보냐.”

“멋있어서요.”

완전 어른미가 넘쳐 났다. 치기 어린 강인혁을 여유롭게 밀어 내면서도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세상에, 그 강인혁이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밀리다니. 이제껏 숨죽이고 지켜만 보던 태서는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구경을 했다.

“저한테만 밉게 말하는 줄 알았는데 사람을 가리지 않으시네요.”

“칭찬이냐?”

“뭐, 비슷해요.”

뭐가 되었든 강세헌이 멋져 보이긴 했으니까 비슷하게 해석해도 좋겠다. 마치 어른을 동경하는 아이의 심정을 보던 것도 잠시 태서가 슬쩍 눈치를 보다가 소파에서 엉덩이를 뗐다.

“그럼 저는 마저 공부하러 가 볼게요.”

“윤태서.”

강세헌이 어림없다는 듯 그의 이름에 족쇄를 걸었다. 태서가 움찔하더니 도로 소파에 앉았다.

“강인혁이랑 아는 사이였네.”

“네. 학교를 오가다가 몇 번 본 얼굴인데 이렇게 또 인연이 이어지네요?”

“강인혁이랑 약혼까지 생각하는 사이가 아니고?”

호텔 거지인 줄 알았더니 호텔 자식이었어. 강세헌의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강인혁과 아는 사이라고 하는 순간 제가 누군지 정확하게 집어내니 태서가 놀란 눈을 깜박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렇구나, 네가 그…….”

강세헌의 눈썹이 쉴 틈 없이 꿈틀거렸다. 아직까지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굳게 다물렸던 입술이 한숨과 함께 열렸다.

“얌전하고 착한 애였구나.”

맹랑하고 영악한 애가 아니라 얌전하고 착한…… 말을 내뱉고도 여전히 기가 막힌 건지 강세헌이 헛웃음을 흘렸다.

“저요? 제가 얌전하고 착하대요? 누가 그랬지?”

태서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말똥말똥 뜨기만 했다. 그런 말을 한 게 누군지 뻔히 예상하고 있으면서 모른 척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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