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여보, 태서는 아직인가요?”
김미경의 물음에 윤석훈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태서가 집을 나간 지 벌써 5일이 넘었다. 처음에 한 비서를 통해 태서가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을 땐 당장 그를 찾을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핸드폰을 꺼 두고 익히 알던 주변 사람 누구에게도 가지 않으면서 의외로 난관에 부딪혔다.
핸드폰은 중간에 잠깐 킨 것 같지만 금방 꺼졌고 카드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증발하듯 사라져 버린 아들 때문에 머리끝까지 치솟던 화가 어느새 걱정으로 바뀌어 버렸다.
윤석훈은 자꾸 누그러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려 일부러 얼굴을 굳혔다.
“제가 벌인 일을 책임질 생각은 안 하고 도망치다니, 내가 아들을 잘못 키웠나 봐요.”
창립기념 파티에서 누군가에게 악의로 먹일 약을 구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상대가 같은 학교의 학우인 것도 모자라 그 전부터 괴롭혀 왔다는 정보가 줄줄이 딸려 오자 윤석훈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학우의 부족한 집안마저 걸고넘어졌다고 하니 태서의 잘못이 얼마나 큰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태서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다. 자신들이 가진 부가 태서를 부족함 없이 채워 주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윤석훈은 항상 태서에게 조언과 충고를 건넸다. 남들보다 더 감사한 환경에서 태어났으니 그만큼 겸손해야 한다고 말이다. 제 말 한마디가 가진 무게를 알아야 하고 그에 대한 책임까지 질 수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일렀는데.
“태서도 사정이 있었을 거예요.”
“그건 핑계에 지나지 않아요.”
“그 약도 태서가 먹었다잖아요.”
만약 그 약을 다른 아이가 먹었다면 김미경도 이렇게 제 아들을 감싸지 못했을 거다. CCTV를 통해 태서가 약을 먹은 것까지 본 김미경은 시큰해져 오는 눈을 깜박였다. 다른 아이에게 먹여도 안 되지만 제 아들이 먹어서도 안 되는 약물이었다.
그걸 수습해 보겠다고 먹은 거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다.
“처음부터 약을 구하지 말았어야 해요.”
“태서의 잘못이 없다고 안 해요. 다만 아이가 돌아올 순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연락 하나 없이 기다려도 될지 모르겠어요, 전.”
김미경은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자신들이 일을 한다고 태서를 못 볼 때와 다른 불안감이었다. 그 눈물에 윤석훈도 마음이 약해져 고개를 돌렸다.
“우선 아이가 알아서 돌아오겠다고 하니 기다려 봅시다. 우리한테야 아직도 어린아이지만 엄연히 성인의 나이잖아요.”
태서가 보낸 하나의 메시지. 창립 파티에서의 일은 전부 제 잘못이고 돌아가면 그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다만 며칠간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것을 끝으로 더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태서가 누구의 집에 머물고 있는 걸까요?”
아는 사람의 집에 있다고는 하는데 그게 누군지 말해 주지 않았다. 따로 사람을 풀어 알아보고 싶지만 그건 태서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궁금한 건 별개이니까. 윤석훈의 침묵이 곧 대답이라 김미경이 넌지시 한 사람을 들먹였다.
“혹시 인혁이네 있는 건 아닐까요?”
“뭐가 되었든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면서 기다립시다.”
윤석훈이 확신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지금껏 손을 놓고 있던 서류를 집었다. 태서가 잘못했지만 그래도 자신들의 아들이다. 그만큼 믿고 기다리기로 하며 억지로 서류에 시선을 내렸다.
김미경이 윤석훈을 보다가 나왔다. 그녀는 아직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 태서의 방에 앉아 있기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어머, 김 대표님.”
막 밖으로 나와 로비를 가로지르던 김미경은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한미순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미경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어? 미경 언니.”
막 김미경에게 반갑게 종알거리던 한미순이 당황하더니 호칭이 달라졌다. 김미경은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미순을 불렀다.
“미순아.”
***
한바탕 눈물을 뽑아낸 김미경은 화장이 다 지워진 눈을 들어 한미순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못난 모습을 보였네.”
“나한테는 얼마든지 보여 줘도 돼. 우리가 한두 해 알아 온 것도 아니고.”
지금이야 만나면 사회적인 위치 때문에 서로를 높여 부르고 예의를 갖추지만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친한 언니 동생으로 어울려 다녔다.
“태서 일이지?”
한미순의 넘겨짚는 물음에 김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그녀가 이렇게 운 게 처음이 아니었다. 태서가 오메가가 되지 못해 속상해하는 걸 봤을 때도 한미순의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아직도 오메가로 발현하지 못해서 그래?”
“그건 아니야.”
다른 데서야 언젠가 오메가가 될 거라고 말은 하지만 실은 김미경도 확신하진 못했다.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을 내려놔야 할 때라는 걸 알면서도 제 말이 누군가의 입을 통해 태서에게 들어갈까 봐, 그래서 태서가 실망할까 봐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면?”
“태서가 집을 나갔어.”
“어머. 태서, 그 태서가 말이야?”
한미순이 놀라서 재차 확인하는 말에 김미경은 제 앞에 있는 물 잔만 매만졌다.
“이번에 태서가 잘못을 좀 했어. 그걸 그이가 알아서 태서를 불렀는데 그날로 나가 버렸어.”
“무슨 잘못을 했기에 가출까지 해.”
“음…… 큰 잘못을 했지.”
차마 제 아들의 일이라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아 김미경이 에둘러 표현했다.
“그런데 금방 들어올 줄 알았던 애가 아직도 안 들어오고 있어. 누구네 집에 있는지도 모르고 카드를 쓰지도 않아.”
“학교로 가면 만날 수 있잖아.”
“그렇지만 거긴 태서가 사회생활하는 곳이잖아. 안 그래도 그이가 한 비서 통해서 태서의 친구를 찾아갔다기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그건 아닌 거 같아서 말렸는데 괜히 그랬나 싶기도 하고. 나 실은 어제 태서 친구한테 물어보자고 말하고 싶은 거 겨우 참았어.”
“언니도 참…….”
한미순은 답답하면서도 그게 김미경의 성격이라 더 말도 못 했다. 만약 인혁이가 그랬다면 자신은 곧장 찾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김미경은 그녀가 낳은 자식일지라도 존중해야 할 사람이라 여기며 무작정 찾아가는 걸 무례라고 생각했다.
“혹시…….”
김미경이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다가 한미순을 보았다. 한미순이 왜 그러냐고 어서 말해 보라는 재촉에 김미경은 조심스럽게 제 생각을 꺼냈다.
“태서가 인혁이네 있는 건 아닐까 해서.”
“어머, 그러네. 인혁이가 있었네.”
한미순이 손뼉을 치며 받아쳤다. 인혁이라면 지금 학교 근처에 아파트를 얻어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니 거기에 태서 하나 더 들인다고 해서 부담될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태서가 그걸 노린 거 아니야?”
“음?”
“인혁이 좋아하니까 이 기회에 아예 눌어붙을 수도 있지.”
“그런가.”
김미경도 태서가 인혁이를 좋아하는 걸 알기에 한미순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인혁이네 간 건 아닐까 생각한 원인 중 하나도 그것 때문이었으니까.
“그래도 인혁이네 갔는지 확실히 모르니까 내가 확인해 줄게.”
“네가?”
“안 그래도 인혁이한테 심부름시킨 게 있었거든. 아들 만나러 왔다고 하면 돼.”
한미순은 걱정할 거 없다며 손을 저었다.
“내가 다녀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있어.”
한미순의 자신만 믿으라는 말에 김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
서다래가 커다란 책상을 돌아보다 책꽂이에 막 책을 꽂아 둘 때였다. 책상에 올려 둔 핸드폰이 진동하더니 강인혁의 이름이 떠올랐다.
“어, 인혁아.”
[정리하고 있었어?]
“어. 책 꽂고 있는 중이야.”
[내 집에 들어오라고 해 놓고는 도와주질 못해서 미안하네.]
강인혁의 시무룩한 목소리에 서다래가 막 꽂으려던 책을 든 채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 짐인데 내가 정리하는 게 맞지. 그리고 네 집에 신세 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걸.”
서다래는 얼마 전 카페에서 강인혁의 집에 들어가 살겠다고 말했다. 강인혁이 모친과 통화하는 걸 보다가 충동에 저지른 대답이었다. 모친의 말을 끝내 거절하지 못하는 그를 보면서 과연 자신과 끝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에 그랬다.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았다. 아직은 자신이 많이 부족하지만 언젠가 그의 부모님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대신 그때까지 강인혁과 계속 만나고 싶은 마음에 그가 내민 제안을 받아들였고 적당한 날을 찾아서 들어왔다.
다 좋은 와중에 딱 하나 아쉬운 건 강인혁이 볼 일이 있어 외출하게 된 것 하나였다.
[비밀번호는 알려 줬으니 잘 기억하고, 일하시는 분 외에 드나드는 사람 없으니까 괜히 방에만 있지 말고.]
“알았어.”
[……내가 벨 누르면 문 열어 주고.]
강인혁의 달콤한 음성에 서다래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집주인이 비밀번호가 아니라 벨을 누른다는 말이 왜 이렇게 간지럽게 들려오는지.
“자고 있으면 못 열어 주는데…….”
서다래가 마저 책을 꽂으며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그리고 잠시 거실로 나온 서다래의 시야에 무언가가 걸려들었다.
서다래가 손을 뻗어 손바닥만 한 액자를 들었다. 어릴 적 인혁의 모습이었다. 제법 풋풋하고 귀여움이 남아 있던 시절인 거 같은데 사진 속에 인혁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다른 곳을 보는 태서가 뒤에 배경처럼 들어와 있었다.
이걸 인혁이가 직접 인화해서 넣었을 리가 없다. 아마 그의 부모님이 해 주셨을 거 같은데 누가 했든 이 집에서 태서의 흔적을 발견한 것만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잠시 그 액자를 보다가 살포시 엎었다.
[다래야?]
“어? 어어. 계속 말해.”
언제 그랬냐는 듯 서다래의 얼굴에 미소가 걸리며 둘은 달달한 대화를 이어 갔다. 강인혁은 서류만 주고 오면 되는 거라며 얼마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어디를 가는지 누구한테 가는지 모르지만 아까 나가기도 했고 간단한 심부름이라면 금방 돌아오지 않을까?
서다래가 집 안을 둘러보며 빨리 오라는 대답을 해 주었다. 이후로는 태서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 가라앉았던 기분이 다시 올라왔다.
통화를 끝낸 이후로는 다시 제 짐을 정리하며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집중했다. 옷을 걸어 두는 것을 끝으로 마무리할 때쯤 초인종 소리가 울려 왔다.
시간이 딱 맞아떨어진 게 기분 좋아 서다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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