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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18화 (18/130)

18화

강세헌 없는 강세헌의 집 거실 러그에 쪼그리고 앉은 윤태서의 고민은 두 가지였다. 일단 강세헌이 나갈 때 잠깐 깼는데 이후로 완전히 일어난 건 해가 져 가는 오후였다. 어떻게 잠을 그렇게 잤나 싶어 황당할 지경이었지만 조용한 공간이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고요함이 원인 같았다. 처음 누운 침대가 제법 안정적으로 다가오는 것도 한몫했고.

다음으로는 아직도 켜지 않고 둔 핸드폰이었다. 까만 화면의 핸드폰을 가만히 바라보던 태서가 제 머리칼을 거칠게 비벼 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당장 일은 벌였는데 그것을 수습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차라리 마음 편하게 어릴 적의 윤태서에게 빙의하면 더 좋았을 거다. 그랬다면 강인혁을 차지하겠다고 서다래를 괴롭히지 않았을 테고 당연히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나는 왜 다 수습만 해야 되는 거야.”

정작 그걸 저지른 놈의 영혼은 있지도 않은데. 억울해서 미치겠는데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어제는 무작정 부모님으로부터 도망쳤지만 이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당장 내일 학교에 가면 한 비서가 그의 앞에 나타날 수도 있었다. 그러면 피하지도 못하는데 무작정 안 가겠다고 버틸 수도 없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태서는 이내 마음을 굳힌 듯 핸드폰을 들었다. 어떻게든 제게 시간을 벌려면 무작정 핸드폰을 끄는 건 방법이 아니었다. 전원을 켜고 있으니 핸드폰을 만든 회사와 통신사가 차례대로 화면에 떴다.

“이거…….”

지금껏 그냥 사용해서 몰랐는데 KH에서 만든 핸드폰이었다. 그렇다는 건 이 기기가 강세헌의 컨펌을 받아서 나온 걸 수도 있다는 소리고. 강세헌을 떠올리자 태서가 굶주린 배를 움켜쥐었다.

“초밥 사 오려나?”

아침에 말했을 땐 아무 말 없이 나가긴 했는데…….

“아니지, 기대하지 말자.”

어제처럼 그가 있는 동안엔 조용히 방에 틀어박혀 있자고만 생각한 태서가 로딩이 끝난 핸드폰을 들었다. 꽤 많이 온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를 대충 훑어보던 태서는 아버지의 연락처를 바라보았다. 전화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메시지 어플로 들어가 몇 번 고심하던 말을 글로 표현했다.

마지막 전송에서 태서는 엄지손가락을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딱 한 번만 누르면 되는데 쉽지 않았다. 이걸 보낸다고 자신을 이해해 줄지 모르겠고 더욱 역정을 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당장 제 핸드폰을 위치 추적해서 잡으러 올 수도 있고. 이래저래 생각이 부정적으로 흘러가자 태서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혼나는 거야 얼마든지 혼나도 되지만 죽고 싶진 않은데…….

그때였다. 덜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 태서의 몸이 움찔했다. 고개를 돌려 막 들어온 강세헌과 눈이 마주친 태서가 입을 헤 벌린 채 그를 보다가 제 핸드폰을 보았다. 아까 놀라면서 핸드폰을 건든 거 같은데 역시나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아…….”

태서가 핸드폰을 내려놨다. 어차피 보낼 거였는데 잠깐 망설였던 것뿐이었으니 차라리 잘됐다. 태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세헌과 눈을 마주했다.

“오셨어요?”

“멀쩡한 소파는 놔두고 왜 거기 있어.”

“러그가 되게 푹신하고 좋네요.”

“역시 개과인 거 같아.”

“네?”

강세헌의 혼잣말을 이해하지 못한 태서가 되물었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

“밥 먹자.”

강세헌이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자 태서가 그를 따라가며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식탁에 올라오는 종이 가방에 찍힌 익숙한 로고에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진짜 사 오셨네.”

“자기야, 보고만 있지 말고 먹어. 싱싱할 때 먹어야지.”

강세헌은 아침에 태서가 그를 부르던 호칭을 그대로 돌려 주며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

“먼저 먹고 있어.”

그리고는 태서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곧장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버렸다. 혼자 남은 태서는 여전히 놀란 마음을 다독이지 못했다.

“저 인간이 왜 저러지?”

말만 밉게 하고 다 들어주는 사람인가 봐. 태서는 금방 기분이 좋아져 종이 가방 속에서 도시락을 꺼내 들었다. 도시락 안에 정갈하게 놓인 초밥을 보니 군침이 돌았다. 종이 가방을 의자 옆에 내려놓고 앉은 태서가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막 하나를 집어 먹으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강세헌이 들어간 드레스룸을 보았다. 정말 먼저 먹고 있어도 되나?

그가 언제 나올지 모르는데 가만히 기다리자니 초밥이 먹고 싶고 그렇다고 그냥 먹자니 눈치가 보이고. 태서는 강세헌이 언제 나오려나 싶은 표정으로 드레스룸에 고개를 고정한 채로 본능이 끌리는 대로 집히는 초밥을 입에 넣었다. 기다리면서 초밥까지 먹는 제 나름대로의 타협이었다.

“와…….”

태서가 홀린 듯 초밥으로 고개를 돌렸다. 싱싱할 때 먹으라던 말이 농담인 줄 알았는데 사실이었다. 비린내가 하나도 나지 않았고 입에 넣자마자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벌써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

“이거 갓 잡았나?”

바로 잡아서 밥 위에 올린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적절한 와사비의 양과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밥까지, 태서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버지한테 메시지를 보낼 때까지만 해도 전전긍긍하던 윤태서는 사라졌다.

“맛있어?”

다시 하나를 입에 문 태서가 초밥의 끝을 마저 입 안으로 집어넣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입술 사이에 삐죽 튀어나와 있는 초밥 끝이 같이 흔들렸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강세헌이 그의 붉은 입술을 보더니 픽 웃었다.

“아침엔 뭐 먹었어?”

강세헌이 젓가락을 들며 물어보는 말에 태서는 부지런히 입 안의 음식을 씹었다. 초밥이라 몇 번 씹지 않아도 된다지만 그래도 빨리 대답을 하는 게 초밥을 사 준 사람에 대한 예의라 여겼다.

“못 먹었어요.”

“왜 못 먹어. 밥할 줄 몰라? 밖에서 사 먹어도 되잖아. 아, 비밀번호를 몰라서 못 들어올까 봐 안 나갔어?”

그럴 수도 있구나. 나갈 생각이 없었던 태서가 다행이라는 티를 냈다.

“늦게 일어났어요. 잠 깨려고 앉아 있으니까 형이 왔어요.”

“너 진짜 잠이 많구나.”

태서는 다음으로 먹을 초밥을 고르며 말했다.

“그런 건 아닌데 오늘은 진짜 푹 잤어요. 침대가 진짜 좋은 건가 봐요.”

“호텔 침대가 더 좋을 텐데?”

“거기서는 친구의 연락에 일어났었죠.”

“그러니까 잠이 많은 거네.”

“그런가?”

요즘에만 잠을 좀 잤지 원래 자신은 잠이 많진 않았기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다음 초밥을 들자 방금까지 생각하던 걸 전부 잊은 듯 집중했다. 태서가 행복한 얼굴로 초밥을 먹고 있자 강세헌이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미팅 취소된 게 다행이네, 그거 아니었으면 초밥 안 사다 줬을 텐데.”

“전 오늘 먹을 복이 있네요.”

아까 강세헌이 생각한 걸 태서가 그대로 말해 왔다. 이제 강세헌과 눈을 마주치는 시간도 아까운지 부지런히 초밥을 제 입으로 나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강세헌이 제 도시락을 그의 앞으로 밀어 줬다.

“안 드세요?”

“3개를 사 왔어야 했는데 2개밖에 못 사 온 책임지려고.”

태서는 괜찮다고 손을 젓지만 강세헌은 이미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오늘이야 늦게 일어났다지만 앞으로도 계속 잠만 잘 거야?”

“내일은 학교 가야죠. 그리고 과제도 해야 하고…… 아.”

태서가 뒤늦게 떠오른 제 처지에 눈썹 끝을 내렸다. 이 집에 머무는 동안 입을 옷이야 대충 몇 개 사서 돌려 입으면 되는데 과제를 하려면 노트북이 필요했다. 학교에 있는 컴퓨터실에서 죽치고 있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노트북이 한두 푼도 아니고, 이걸 해결하려면…….

“혹시 여유분의 노트북 있으세요?”

“물에 빠진 사람 거둬 줬더니 보따리 대신 노트북을 달라네.”

“책도 되게 많더라고요.”

“……그렇게 요구하는 게 많아지면 하숙비 받는다.”

태서가 멋쩍은 듯 웃었다. 그날 저녁 태서는 써도 좋다는 허락 하에 최신형 노트북을 받았다.

***

다음날 학교로 간 태서는 곧장 제 팔을 잡아챈 박한수에게 끌려 카페로 왔다. 끌고 온 놈이 커피를 사 주는 법이라며 태서가 메뉴를 불러 주자 박한수가 바람같이 가서 주문하고 받아 왔다.

“너 어떻게 된 거야?”

“뭐가?”

태서가 빨대를 입에 문 채로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주말에 한 비서님이 나 찾아왔었어. 너랑 연락되냐고 물어보더니 자기한테 알려 주라던데?”

명함도 받았다면서 아직 집어넣지 않은 지갑을 펼쳐 보여 주었다. 태서가 슬쩍 한 비서의 이름을 확인하더니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집 나왔어.”

“뭐?”

박한수의 목소리가 크게 울린 탓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돌아보았다. 태서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젓고 있으니 박한수가 목을 가다듬었다.

“집을 왜 나와. 사춘기도 아닌 게 무슨 반항을 가출로 해.”

“그럴 일이 있어.”

“너한테 그럴 일이 뭔데? 혹시 막 서민들의 삶을 체험해 보고 싶었다든지…….”

태서가 고개를 저었다. 제집만큼은 아니지만 강세헌의 집도 좋았다. 땅값 따져 보면 얼추 비슷할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그와 살겠다거나.”

“그럴 상대가 없다.”

“아, 강인혁 안 좋아한다고 했지.”

이 와중에도 강인혁 이름을 굳이 언급하는 박한수가 얄미워 태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수업에 갈 시간이기도 했다.

“아니, 왜 나왔냐고.”

“죽을까 봐.”

태서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뒤따라온 박한수가 못 들었다며 다시 되물었지만 태서는 입을 다물었다.

윤태서가 된 지 얼마 안 됐는데 죽을까 봐 도망쳤다. 원래 제 몸도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데 영혼마저 소멸하여 사라질까 봐 무서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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