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인혁아 지금까지 조사한 거 나한테 보내 주면 내가 정리해서 마무리할게.”
서다래가 노트북을 바라보며 말했다가 대답이 없어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인혁이 생각에 잠긴 채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의 주변으로 물이 얕게 고여 있는 것으로 보아 그러고 있은 지 꽤 된 거 같았다.
“인혁아?”
“어. 미안, 뭐라고 그랬어?”
“무슨 일 있어?”
서다래의 물음에 강인혁이 잘게 고개를 저었다. 뒤늦게 제 아메리카노를 들었다가 얼음이 전부 녹은 걸 보더니 도로 내려놓았다. 아무것도 아니라고는 하는데 그의 표정이 나아지지 않으니 서다래는 노트북을 덮고 아예 팔을 올렸다. 지금은 과제보다 강인혁이 더 중요했다.
“너 표정이 안 좋아.”
“그랬나.”
강인혁이 제 볼을 쓸어내리지만 그런다고 표정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실은 윤태서네 가족과 점심 식사한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갑자기 만들어진 자리는 강인혁의 평온한 일상을 깨 버릴 정도로 꽤 여운이 남았다. 어른들이 아닌 윤태서 때문에.
어른들이 있을 땐 친근하게 대하다가 둘만 남자 곧장 제게 가시를 세우던 게 차례로 대조되었다. 자신을 대하던 윤태서의 눈빛과 태도가 손끝에 박힌 가시처럼 거슬렸다. 만지면 따가워서 빼려고 하는데 눈에 보이지는 않고 그렇다고 무시하자니 계속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그런 가시.
-너 오늘 나 만나는지 몰랐던 거 같은데 나도 그래. 우리 부모님이 무슨 생각으로 자리를 마련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부모님이라 분위기를 맞췄을 뿐이야. 괜히 우리 사이 나쁘다고 어른들 불편하게 할 마음도 없었고.
-너희 부모님이 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도 문제고 내가 오메가가 되면 바로 너랑 붙여 줄 우리 부모님도 문제지. 그래, 그건 있어.
그래 놓고 강인혁의 앞에서 대놓고 소개팅을 잡았다. 정말로 네게 아무 감정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예전엔 투명하게 비치던 그의 속을 이제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소개팅을 핑계로 그 자리를 빠져나가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아무리 그래도 윤태서를 떠올리느라 앞에 있는 사람을 걱정시키다니. 서다래가 계속 바라만 보자 강인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말 아무것도 없어.”
“혹시…….”
서다래가 목구멍에 걸리는 이름을 말할까 잠시 망설이다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며 입을 다물었다. 굳이 여기서 윤태서의 이름을 거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집중 안 되는 거 같으니까 나머지는 각자 집에 가서 할까?”
서다래가 어떠냐고 바라보니 강인혁이 눈을 내려 제 노트북을 바라보았다. 이것저것 찾긴 찾았는데 하나도 정리가 되지 않아 단시간에 해결할 순 없을 거 같았다.
“그러자.”
서다래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문득 강인혁이 그를 불렀다.
“태워다 줄게.”
“아니야. 전철 타면 금방인데.”
“어떻게 금방이야, 전철 타고 내려서 버스도 타야 하잖아.”
“그때마다 공부하면 얼마나 효율이 높은지 모르지, 너?”
서다래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강인혁의 제안을 에둘러 거절했다. 그의 차를 타고 집에 갈 때마다 다시 돌아갈 그의 시간이 미안하기도 하고 또 아닌 척해도 경제적 차이가 자꾸만 피부에 와닿았다.
“다래야.”
가방을 전부 챙긴 서다래와 달리 강인혁의 앞은 여전히 어지러웠다. 아직 덮지 않은 제 노트북을 보던 강인혁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가라앉은 눈빛에 서다래가 부지런히 놀리던 손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아직도 내 제안은 거절이야?”
“아…….”
인혁이 말한 건 서다래에게 대학교에 다닐 동안 제집에서 머무는 게 어떠냐는 거였다. 그건 꽤 오래전부터 종종 말해 오곤 했다.
“지금 학교 다니는 거 너무 멀잖아. 그리고 나도 본가에 자주 들리니까 자주 비는데 너 거기서 공부하면 시간도 절약되고 좋잖아.”
“인혁아, 나는 진짜 괜찮아. 학교 먼 거 알면서도 내가 지원해서 왔잖아. 그리고 오가는 시간 고스란히 버리는 것도 아니고 다 알차게 쓰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응?”
“너 그렇게 집에 갈 때까지 기다리는 내 생각은 안 해?”
강인혁이 자기로 초점을 맞추자 서다래가 당황한 티를 감추지 못했다. 지금껏 자신은 다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말해 왔는데 강인혁의 마음을 물어 오면 더는 그런 말로 피해 갈 수 없었다.
“매일 너 집에 잘 들어갔는지 걱정하고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누가 널 쫓아다니진 않는지 신경 쓰는 나는?”
“인혁아.”
“네가 약하다는 말이 아니고 그냥…… 네가 너무 예뻐서 자꾸 이상한 것들이 꼬이니까.”
이건 몇 번 강인혁에게 들켰기에 서다래도 할 말이 없었다. 제 오메가 향을 맡고 따라온 알파를 강인혁이 쫓아내 준 적도 있었다. 이렇게까지 나오니 정말 괜찮다는 대답은 할 수 없어졌다.
실은 자신도 학교가 가까운 게 좋았다. 더 편하게 공부에 집중할 수 있고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는 시간도 촉박하게 짜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강인혁에게 기대는 것만 같아서 망설였는데 점점 거절할 힘이 줄어들고 있었다.
“다른 사람 못 오게 할 테니까 내 집으로 들어와. 졸업하면 안 붙잡을게.”
“생각해 볼게.”
결국 서다래는 온전한 거절 대신 여지를 주었다.
“그것도 생각해 본다는 거야?”
강인혁이 사귀자던 고백도 서다래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며 대답을 미루고 있었다. 계속 그에게 같은 대답만 하게 되는 거 같아서 서다래가 그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자신도 강인혁이 좋았다. 그가 고백했을 때 심장이 떨려 잠을 못 이뤘는데 어떻게 싫어할까. 하지만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강인혁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다르고 걸리는 게 많았다.
“차라리 잘됐네. 나랑 사귀는 날부터 같이 살면 되는 거잖아.”
“그게 뭐야.”
강인혁이 가볍게 분위기를 띄워 주자 서다래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제 일어나자.”
강인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제 노트북과 책을 정리했다. 이미 다 정리한 서다래는 강인혁을 도와 그의 펜을 챙겨 주었다. 누가 봐도 다정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그들의 눈빛도 서로에 대한 호감을 품고 있었다. 그런 것치고 아직 사귀지 않는 건 이상했지만.
“아, 잠깐만.”
막 가방을 들려던 강인혁은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누가 전화를 걸었는지 확인하자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그 반응으로 봐서 누군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서다래가 강인혁의 눈치를 보며 반쯤 뗐던 엉덩이를 도로 내렸다.
“네, 무슨 일이세요?”
핸드폰 너머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 강인혁의 모친이리라.
“혼자 있어요. 말씀하세요.”
강인혁이 흘낏 바라보다 대답하는 말에 서다래는 어깨를 움츠렸다. 겨우 전화 통화에 불과한데 제가 보이기라도 할까 저절로 몸을 웅크리게 되었다. 인혁이가 좋지만, 그의 부모님은 서다래에게 있어 무섭고 버거운 사람들이었다. 제 존재를 눈엣가시로 여기니 더욱 그랬다.
인혁은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지만 그의 부모님인데 인정받지 못하는 게 아무렇지 않을 순 없었다. 그래도 강인혁과 눈이 마주쳤을 땐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그게 서다래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속은 곪을지라도 겉으로는 티 내지 않는 게 제 자존심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럴 땐 윤태서가 참 부럽네.’
세상이 다 제 위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윤태서의 당당함이 이럴 때만큼은 부러웠다. 강인혁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마저 전부 드러내는 그를 보고 있으면 제 세상은 너무도 초라했다.
“세헌이 형한테요?”
서다래의 생각을 모른 채 강인혁은 제 어머니와의 통화에 집중했다.
“제가 왜 형한테 가요. 아버지 비서 있잖아요.”
강인혁은 내키지 않은 듯 말했지만 그의 모친이 계속 말을 늘어놓는 모양이었다. 강인혁은 서다래에게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내면서도 통화를 끊지 않고 이어 갔다. 분위기상 그의 모친이 무언가 시키는 모양이었다.
“하아, 알겠어요. 형한테 갖다 주기만 하면 되는 거죠?”
한숨을 내쉬면서도 결국 받아들이는 걸 보며 서다래는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제 부모에게 져 주니 자신과의 관계도 어느 순간 끝이 나겠지. 그게 서다래가 망설이는 이유였다.
그래도…….
“저기 인혁아.”
인혁이를 포기하지 못하는 제 마음이 자꾸 못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
“결재 서류는 여기까지입니다. 취소된 미팅은 다음 주로 옮겼습니다.”
강세헌은 비서의 보고를 대충 흘려들으며 펜을 굴렸다. 한 달에 걸쳐 잡은 미팅이 상대방의 다급한 사유로 뒤로 밀리면서 저녁 시간이 붕 떠 버렸다.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음…….”
강세헌이 펜을 내려놓더니 제 턱을 쓰다듬었다. 집이라고 하니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침에 잘 자는 자기를 깨웠다고 초밥을 사 오라던 고양이. ……개과인가?
“가는 길에 초밥집에 들리죠.”
“식사하시겠습니까? 그럼 미리 전화해서 준비하겠습니다.”
“그것보단 2인분으로 포장해 달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집에 가는 길이니 사 주는 것뿐이지 다른 의미는 없었다. 미팅이 취소된 것도 어떻게 보면 태서가 먹을 복이 있는 거라고 보면 되겠지.
집으로 가려고 외투를 집어 든 강세헌의 앞으로 비서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강수학 사장님이십니다.”
KH마트를 담당하며 강세헌에게는 작은아버지가 되는 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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