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여기서 지내면 된다.”
강세헌이 들어가서 봐도 좋다는 신호에 태서가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하나가 전부인 깔끔한 방은 옆에 드레스룸과 작은 화장실까지 딸려 있었다. 생수 몇 개만 챙겨 오면 방에서만 지내도 될 구조였다. 방을 둘러보던 태서가 문득 강세헌의 방이 궁금해져서 물었다.
“혹시 그쪽 방은 어디세요?”
“……나는 저기 끝 쪽.”
강세헌의 대답이 살짝 늦게 나왔지만, 그는 손가락을 세워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가 문에 기대고 있는 터라 나가서 확인하기엔 굳이 그 좁은 곳을 통과해야 했다. 잠깐 고민한 태서가 고개만 문밖으로 내밀어 강세헌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거실을 두고 방과 방 사이가 멀었다. 거리가 있어서 어지간한 생활 소음으로는 집주인의 심기를 거스를 일도 없겠다.
태서는 다시 고개를 넣으며 방을 둘러보았다. 집이 넓어서 여유분의 방 하나가 있을 거 같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조건이 좋았다. 태서는 내친김에 침대를 살살 쓰다듬어 보며 부드러운 느낌을 즐겼다.
“여기 무슨 방이에요?”
“없는 듯 지내겠다는 애가 궁금한 것도 많아.”
“안 물어볼게요.”
주면 주는 대로 감사합니다, 하고 끝내는 게 제일 좋긴 했다. 이제 정말 안 물어보겠다는 듯 입을 꾹 다문 태서가 갑자기 난감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제 배를 붙잡고 화장실을 바라보는 게 생리 현상 때문인가 싶어 강세헌이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저 그런데요.”
강세헌이 돌아보자 태서가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제가 이 동네는 처음이고 또 저 나간 사이에 마음이 바뀌셔서 안 들여 보내 주실 수도 있고 그러잖아요.”
“날 이상한 놈으로 만드네?”
“아니, 꼭 그쪽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건 아니고 솔직히 누가 아무 상관도 없는 애를 재워 줘요. 그건 중간에 마음이 바뀌었다고 해도 절대 이상한 게 아니죠.”
“그래서 할 말은?”
“저녁밥은 먹어야 할 거 같은데 그거까지만 어떻게 안 될까요? 그쪽도 아시다시피 낮에 버거 조금 먹은 게 전부라서요.”
강세헌이 얼굴에 황당함과 기막힘이 얼룩덜룩 묻어났다. 배를 매만진 게 다른 이유 때문이었구나. 내 알 바 아니라고 돌아설까 고민하던 강세헌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낮에 괜히 궁상맞다고 밥 먹는 걸 지켜봐 줬다.
“이리와.”
강세헌의 고갯짓에 태서가 환하게 웃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간 태서는 구경을 하면서 슬쩍 식탁에 앉았다. 어차피 일어서 있어 봐야 제가 할 건 없었으니까.
“아무거나 먹어도 상관없지?”
“네.”
아까 호텔에선 뭐 먹을지 한참 고민했지만, 지금은 정말로 다 상관없었다. 새삼 제 처지를 떠올리니 더 가리는 게 없어졌나? 하다가도 아무렴 어떠냐는 듯 굴었다. 태서의 반응이 진짜인가 확인해 보던 강세헌이 냉장고를 열었다.
태서가 식탁에서 상체를 쭉 빼며 냉장고 안을 힐끔거렸다. 이 정도 넓은 집에서 혼자 사는데 일하는 사람을 두겠지? 그럼 미리 준비한 요리를 꺼내 데워서 내어 주려나? 그러다 강세헌의 손이 양파를 집자 태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직접 요리하시게요?”
“안 그러면 나가서 사와야 해.”
강세헌이 몇 가지 채소를 가지고 나와 싱크대로 향했다. 팔을 걷어 올리고 채소를 다듬는 모습이 너무 의외라 태서가 신기한 듯 보았다.
“아니, 별로 밥에 관심 없고, 사 먹고, 일하는 사람이 주는 대로 먹고 막 그럴 줄 알았는데.”
“그렇게 살아.”
강세헌이 태연히 내뱉으며 다듬은 채소를 도마에 올려 하나씩 다듬어 갔다. 금세 다지기까지 마친 채소의 물기를 빼는 동안 프라이팬을 꺼내고 기름을 둘렀다. 한 번씩 꺼내 먹을 수 있도록 소분된 냉동 밥 2개와 달걀을 꺼낸 이후로는 순식간이었다.
제 앞에 놓인 볶음밥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온기에 태서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가서 사 먹는 게 지겨워서 가끔 만들어 먹는 거야. 일하시는 분이 만들어 둔 것도 먹는데 요즘 통 집에 들어오질 못해서 요리 넣어 두지 말라고 해 뒀고. 안 먹어?”
김치 하나만 사이에 두고 제 볶음밥을 내려놓은 강세헌이 태서의 숟가락을 눈짓했다.
“아니면 거창한 것만 먹는다거나 그런 거 아니지? 국이랑 찌개 있어야 하고 5첩 반찬이어야 먹는다고 대답하면 혼난다?”
“저 다 잘 먹는다니까요. 그냥 신기해서 그랬어요. 와, 덩치 크다 싶었는데 손도 크시네. 양이 너무 많아요.”
“다 먹어라. 한창 시기엔 잘 먹어 줘야 해.”
“저 한창 시기 지났어요.”
태서가 숟가락을 들면서도 제 나이를 다시 한번 말해 줬다. 그러나 강세헌은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태서는 괜히 제 머리를 매만지고는 볶음밥을 떠서 먹었다.
알알이 풀어지는 밥 사이로 기름을 머금었음에도 전혀 느끼하지 않은 채소와 고소한 달걀이 어우러졌다. 방금 해서 그런지 다 씹고 넘기는데도 속을 데울 정도로 따뜻함이 오래 갔다.
한 번 맛을 보고 난 후엔 더 망설일 것도 없었다. 태서가 부지런히 숟가락을 움직이는 걸 본 강세헌이 뒤늦게 자신도 숟가락을 들었다.
“학교는?”
“다니죠. 일주일에 4번 나가요.”
“여유롭네.”
“그런가요?”
태서가 직접 시간표를 짜지 않아서 몰랐다. 생각해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고. 하루에 수업이 3개까지 있는 날도 없었고 전공과 교양이 적절하게 혼합되었다.
“그런데 그 여유도 얼마 안 남았어요. 곧 중간고사거든요.”
“공부도 해?”
“……저 방금 학교 다니냐고 물어보셨잖아요.”
태서가 놀란 강세헌의 표정에 입술을 삐죽거렸다. 학교에 다니니까 공부는 당연한 거지. 태서는 볶음밥이 강세헌이라도 되는 듯 노려보다가 푹 펐다. 다 씹어 먹어 버려야지.
“그쪽은 대체 날 어떻게 보길래.”
“아까부터 그쪽이라는 호칭 거슬리네.”
태서가 그쪽이라고 부를 때마다 강세헌의 반응이 조금씩 느렸던 이유가 있었다. 태서도 그쪽이라고 하는 게 다른 호칭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랬을 뿐 딱히 끌리지 않았다. 그리고 강세헌이 싫다면 바꿔 줘야지.
“……주인님은 어떠세요?”
강세헌의 한쪽 눈썹이 올라가는 걸 본 태서가 빠르게 뒷말을 붙였다.
“집주인님이시니까 주인님. 아니면 주님?”
“그냥 형이라고 불러.”
“그래도 돼요? 아까 좀 싫어하는 거 같아서 주인님 쪽으로 생각해 본 건데.”
“여기 머물 동안에만 그렇게 부르고 나가면 직급으로 불러라.”
내가 회사원도 아닌데 왜 직급으로 부르냐, 따지고 싶은 태서는 억지로 미소를 만들어 냈다. 그래, 호칭이 문제냐. 밖에서 사장님, 사장님 부르기도 하고 드라마 보면 죄다 전무님, 이사님 하는데 그런 흔한 호칭이 뭐가 대수라고.
“네, 세헌이 형.”
지금은 까라는 대로 까야지.
***
넥타이를 매만지던 강세헌의 눈동자가 힐끗 옆으로 비껴갔다. 어제 저녁을 먹고 방에 들어가서는 지금까지 아무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누군가의 행적이 궁금한 탓이었다. 조용히 있겠다더니 제법 말을 잘 지켰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 조용하니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아예 눈에 보이지 않으면 모를까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내려놓기가 쉽지 않았다. 그 탓에 강세헌의 몸이 현관이 아닌 방문 앞에 있는 거겠지.
강세헌은 굳게 닫힌 방문을 보다가 이내 손을 들어 노크했다. 혹시나 제가 나갈 때까지 방안에서 머물고 있을 생각이라면 이제 나와도 좋다고 말하면 되니까. 기다려도 태서는 나오지 않았다.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린 강세헌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노크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강세헌이 그냥 갈까 싶어 몸을 돌렸다가 다시 문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까지 반응이 없는 건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내 집에서 송장 치르게 하면 너 가만 안 둔다.”
강세헌이 혼잣말과 함께 손잡이를 내렸다. 잠그지 않아 부드럽게 움직이는 문을 연 강세헌이 자는 태서를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모로 누워 몸을 둥글게 만 채 자고 있었다. 어제부터 애라고 하긴 했지만 반쯤 장난이었는데 고롱거리며 자는 걸 보니 애처럼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빌붙는 처지에 그렇게 태평하게 잘 수 있는 거냐?”
강세헌이 기가 막혀서 팔짱을 끼고 태서를 내려다보았다. 무사한 것을 확인했으니 돌아서면 되는데 이상한 심술이 샘솟았다.
“태서야, 일어나 봐라. 형 출근한다.”
“으음.”
그래서 잘 자는 태서를 깨웠다. 어제는 집주인부터 온갖 호칭을 다 갖다 붙이더니 이제 뭐 다시 남으로 돌아섰다. 강세헌의 목소리에 태서가 손으로 눈을 비비며 몸을 뒤집었다. 강세헌이 깨운 걸 알고도 태서는 침대에서 몸을 비비며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겨우 상체만 일으킨 태서가 반쯤 감긴 눈으로 강세헌을 올려다보았다.
“너무 졸려요.”
까치집을 만든 채 칭얼거리는 게 아직도 얼굴에 잠기운이 그득그득 묻어 나왔다. 아침에 일어나기 힘든 타입인가, 강세헌이 그 머리를 헝클어 댔다.
“다녀오마.”
“자기야.”
태서가 강세헌을 불렀다. 그가 돌아보자 태서는 다시 이불 속으로 몸을 꾸물꾸물 집어넣으며 말했다. 지금 나한테 자기라고 한 건가?
“저녁은 초밥.”
“…….”
강세헌이 어이없는 눈으로 태서를 바라보았다.
쟤가 잘 자더니 미쳤나?
잘 자는 애를 깨운 제 탓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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