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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15화 (15/130)

15화

태서가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눈동자만 굴려 강세헌의 집 안을 구경했다. 아까 자기를 미친놈 보듯이 했지만 그래도 집에 들여 주었다.

‘의외로 잘 꾸며 놨네.’

생긴 건 되게 집에 딱 필요한 것만 두고 살 것만 같았다. 블랙으로만 가구를 들여놓고 주방엔 사용 흔적이 없는 삭막한 분위기의 집을 생각했는데 완전히 제 예상을 벗어났다.

태서의 눈동자가 제 발가락을 부드럽게 감싸는 러그로 떨어졌다. 두툼하게 깔린 러그는 회색인 데도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면서도 동시에 집 안의 분위기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검은색이 대신 자리한 밝은 그레이 계통의 패브릭 소파는 몸을 푹신하게 감싸 주었다.

라운드형 테이블 위에는 리모컨이 줄지어 놓여 있는 것 외에도 생화가 담긴 꽃병이 자리해 있었다. 전체적으로 깔끔하지만 곳곳에 생활감이 넘치는 물건을 보면 제법 혼자서도 잘살고 있는 거 같았다. 결정적으로 오렌지 주스도 직접 따라 줬다.

아니 생긴 건 컵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그냥 냉장고에서 생수만 꺼내 마실 거 같은데…….

“구경 다 했어?”

“거실은 다 했어요.”

“그럼 나 말해도 되지?”

아까부터 태서가 집을 구경하는 걸 가만히 기다려 주던 강세헌이 확인차 물어 왔다. 태서가 고개를 끄덕이니 강세헌은 기다렸다는 듯 제 머릿속에 걸리적거리던 사항들을 하나씩 꺼냈다.

“일단 세헌 씨라는 호칭은 바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한테 맞먹는 기분이 들거든.”

“알겠어요,”

어차피 부를 호칭이야 많은데 뭐. 태서는 흔쾌히 대답했다.

“혹시 더 진한 걸 원하시면 말해 주세요. 괜찮은 범위 안에서 골라 불러 드릴게요.”

“이건 무슨 서비스 정신일까?”

“직급으로 부를까요? 아니면 강세헌 님? 형은 어떠세요?”

“…그건 차츰 고민해 보자.”

강세헌은 당장 마음에 드는 호칭을 고를 수 없어 뒤로 미뤘다. 가장 나은 게 형이긴 했지만 그건 사적인 친밀감을 높이는 거 같아서 보류하는 대신 태서의 머리부터 다시 훑어 내려갔다. 오늘 낮에도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호텔에서 봐서 그런가 어딘가 있는 집 자식 같고 그랬는데 지금은 같은 옷인데도 이상하게 불쌍해 보였다.

“너…….”

그 이유가 뭔가 잠시 고민해 보니 금방 답이 나왔다. 저답지 않게 남의 눈치를 보는 거.

강세헌이 아는 윤태서는 뻔뻔한 애였다. 제가 원하는 게 있으면 그것을 당당하게 요구했고 네가 감히 날 거절하냐는 분위기마저 풍기던 놈이었지 이렇게 뭐 마려운 듯 구는 애가 아니었다.

“아니다, 무슨 일이 있는 거 같은데 물어보면 얽힐 거 같아서 못 물어보겠네.”

강세헌은 말해 주고 싶으면 들어 주겠지만 얽히기는 싫단 어조로 말했다. 그걸 태서가 알아들을까 싶지만, 나이는 어려도 꽤 똑똑해서 의심되진 않았다.

태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놨다. 그러고는 두 손을 무릎 위에 살포시 얹은 채로 강세헌을 올려다보았다.

되게 잘 봐달라는 듯 안쓰럽게.

물론 강세헌에게 원하는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까처럼 정색하고 싫어하는 걸 보고도 태서는 꿋꿋하게 밀어붙였다.

“제가 아까 혼자 밥 먹을 때 무슨 생각 드셨어요?”

“궁상맞다?”

“그래서 같이 있어 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죠?”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막 질문을 던져 가던 태서가 중간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강세헌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랬다.

“왜 자꾸 말을 의문형으로 끝맺어요.”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장황하게 깔아두는지 의심스러워서.”

강세헌의 철벽에 태서가 헤실거리며 웃었다. 하긴 나 같아도 이럴 때 많이 경계하겠지.

“역시 우린 대화가 잘 통하는 거 같아요.”

“본론은?”

“저 좀 잠시만 거둬 주세요.”

강세헌이 단박에 받아쳤다.

“싫어.”

“적어도 고민이라도 하는 척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

그렇게 바로 거절하면 앞사람 민망할 걸 모르네. 태서가 툴툴거렸지만 강세헌은 절대 받아 주지 않았다.

“널 거둘 바엔 강아지를 키우지.”

“걔보단 제가 나을걸요?”

“어디가?”

한순간 강아지와 자신을 나란히 비교 선상에 올려야 한다는 사실에 현타가 온 태서는 입술을 삐죽이다가 손가락을 쫙 폈다.

“저는 말귀도 잘 알아듣고 대화도 통하고 알아서 청결을 유지할 수 있어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있을 수 있고요 무엇보다 귀엽잖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와닿지 않아. 너 나중에 프로젝트 맡으면 볼만하겠다.”

그렇게 설득력이 없어서야, 강세헌이 혀를 찼다.

“말귀를 알아듣는 게 더 문제야, 너 너무 뻔뻔해. 우리 대화 잘 안 통해. 청결…… 거둬 달랄 때 널 씻겨 줘야 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거 아니었지? 그리고 네 성격에 있는 듯 굴겠지. 어디서 없는 듯이라고 거짓말을 까. 마지막으로 넌 귀여운 상은 아니야.”

“와… 지금 프로젝트 맡으시는 것마다 볼만하시겠네요.”

그걸 다 기억했다가 하나하나 받아치는 게 더 어이없었다. 저렇게 발표하는 직원들도 다 깠을 거 같았다. 아니 안 봐도 뻔하지. 태서는 강세헌의 눈치를 보며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이렇게까지 나오면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제발요.”

“호텔에서 밥 먹었잖아. 호텔에서 자.”

“그럴 수 있으면 당연히 그랬죠.”

“내가 매달리지 말랬지.”

“절 불쌍하게 여겨서…….”

강세헌의 코웃음이 태서의 말을 잘랐다.

“지금껏 널 만난 곳이 호텔인데 네 어디가 불쌍해? 너 호텔 거지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강세헌은 태서의 정공법을 대차게 걷어찼다. 그러자 태서는 오기가 치밀어 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러면 저도 어쩔 수 없네요.”

“그 어쩔 수 없다 소리가 왜 이렇게 불안하냐. 설마…… 그날 일을 가지고 책임지라니 뭐라니 해 봐야 소용없어.”

“책임은 무슨 책임. 자기야말로 책임지고 싶어서 그러나. 툭하면 그때 일을 언급하네.”

태서가 핸드폰의 카메라를 구동시켜 강세헌의 사진을 찍었다. 신호도 없이 갑자기 찍은 터라 강세헌이 미간을 찡그리며 태서가 왜 저러나 지켜보았다.

그의 앞에서 태서는 핸드폰을 건드는 척 다시 꺼 버렸다. 물론 강세헌이 제 화면을 볼 수 없게 세운 채로.

“제 부모님께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래요.”

“너 되게 잘 짖는구나.”

아까는 강아지보다 낫다면서 왜 강아지가 됐지? 강세헌이 중얼거리는 말에도 태서는 이판사판으로 나갔다.

“그럼 절 사랑하는 부모님이 당장 찾아와서 누가 내 아들의 마음을 훔쳐 갔냐고 할 거예요.”

“그런 너는 왜 널 사랑하는 부모님의 집에서 가출하려는데.”

강세헌이 그냥 사정을 다 털어놓으라는 듯 굴었다. 이젠 왜 저러나 듣지 않고는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태서는 사정은 하나도 설명해 주지 않은 채 매달렸다.

“며칠만이요. 사정이 있어서 그래요.”

오래 있지 않겠다. 밥도 적게 먹겠다. 조용히 있을 테니 러그 취급해도 좋다 등 줄줄이 내뱉는 태서의 말에 강세헌의 그 단단했던 철벽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럴 걸 예상했는지도 몰랐다. 태서란 애를 만나면 자꾸 시선이 가고 신경 쓰이다가 결국은 그를 상대하고 있었으니까.

강세헌이 졌다는 듯 검지와 중지로 제 이마를 쓸었다.

“너 사고 쳤니?”

“사고야 세헌이 형이랑 쳤고요.”

“설마 그 일로 쫓겨나는 거야?”

“그건 아니에요.”

이리저리 말장난과 같은 대화를 하면서도 둘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팽팽한 기 싸움을 벌였다. 태서는 쉽게 제 속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고 강세헌은 어떻게든 그에게서 정보를 얻어 내려 했다.

“그 며칠은 얼마나 되는데?”

“잘 모르겠어요. 일단 부모님의 기분이 풀어지시는 동안 저도 어떻게 할지 고민해 봐야죠. 잘 해결되면 당장 내일 나갈지도 몰라요.”

“…명함을 괜히 줬어.”

강세헌의 허락과 다름없는 말에 태서가 작게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고는 그의 마음이 바뀔까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집 구경 해도 돼요?”

“아직.”

강세헌의 칼 같은 거절에 막 엉덩이를 들썩이던 태서가 도로 소파에 앉았다.

“왜요?”

“전부는 아니더라도 주의 사항 정도는 들어야지.”

“…알겠어요.”

“내가 없을 땐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좋지만 내가 오면 서로 부딪히지 말자. 나도 매일이 기분 좋을 순 없으니 너한테 어떻게 굴지 몰라.”

“당연하죠. 집주인이 하라는 대로 할게요.”

“그리고…….”

방금까지는 기본적인 걸 말했다면 이건 조금 더 사적으로 들어가는 말이었다. 강세헌이 잠시 태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툭 내뱉었다.

“관계 안 맺어 준다. 페로몬도 안 풀어 줄 거고.”

“안 바랍니다. 손님방에 함부로 들어오는 몽유병 같은 거 없으시죠?”

“…….”

“이제 집 구경해도 되죠?”

“마음대로 해라.”

강세헌의 포기한 대답에 태서가 냉큼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눈에 보이는 대로 아무 손잡이를 하나 잡아서 열고는 “우와, 방 진짜 좋다.”라고 소리쳤다.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됐다.’

태서는 방문을 잡은 채로 코를 찡긋거리며 웃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집에 무작정 신세를 지게 되었지만 당장 시간을 벌었다는 게 중요했다. 이제 여기서 잠시 머물며 제 죽을 운명을 벗어날 방법을 생각해 봐야 했다.

태서가 생각에 빠진 사이 강세헌이 고개만 돌려 그를 보더니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화장실을 네 방으로 줄까?”

강세헌의 말에 태서는 말없이 화장실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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