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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14화 (14/130)

14화

꺼진 핸드폰은 그냥 가벼운 벽돌과 다를 게 없었다. 연락처를 뒤져 보고 싶어도 핸드폰을 다시 켜면 한 비서에게 전화가 올 것 같고 또 위치 추적이 안 되리란 법도 없었다.

“대학교로 갈까?”

가서 걷다 보면 아는 얼굴을 만날 수도 있으니…… 운이 좋으면 박한수를 만날 수도 있고. 그래서 막 걸음을 떼려던 태서가 다시 멈칫했다. 요즘 걔랑 계속 어울리는 걸 한 비서가 봤는데 연락을 안 할까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럼 다른 호텔이라도 가서 잠시 시간을 끌며 생각해 볼까 싶은데 그것도 걸렸다. 카드를 사용해야 할 텐데 그럼 바로 찾으러 오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미치겠네.”

애도 아닌데 갈 데가 없었다. 좋은 집안이라고 안주했더니 제가 제 발목에 족쇄를 채워 놓은 거나 다름없었다. 자립적으로 굴지 못한 건 제 탓이었다.

아무 쓸모가 없어진 핸드폰이 점점 버겁게 느껴져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어디 카페라도 갈 생각에 막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검지를 쿡쿡 찔러 오는 무언가. 뭉툭한 듯하면서도 손끝을 베일 듯 눌러 오니 태서의 신경이 온통 주머니 안으로 향했다.

핸드폰과 지갑만 달랑 들고 다니던 터라 주머니에 넣어 둔 것의 정체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무심코 그것을 쥐어 꺼내 들었다. 손안에서 구겨지는 느낌에 약간 감이 잡힐 것도 같은데……. 시선을 내려 손에 쥔 것을 펼쳐 본 태서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

“그래서 잘 됐다고?”

[그걸 말이라고 해? 오늘 분위기 장난 아니었거든?]

맨발에 슬리퍼 차림으로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박한수가 손을 바꾸며 핸드폰을 반대쪽으로 옮겼다. 핸드폰은 뜨거워지는데 상대가 끊을 생각이 없어서 제 귀를 보호하고자 취한 방법이었다.

소개팅을 주선해 줬으니 어느 정도 소감을 들어 주는 것까지 서비스 정신으로 해 주고는 있지만 그것도 어지간한 수준일 때였다. 30분이 넘어가도록 오늘 둘이 있었던 일을 듣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까 소개팅 잘됐고 분위기 장난 아니었으면 된 거잖아. 대체 나한테 뭘 바라기에 이렇게 질질 끌고 있으실까?”

[그게…….]

박한수가 아이스크림을 갉아 대며 웅얼거리는 말에 한미래가 화끈한 본래 성격답지 않게 머뭇거려 왔다.

[다음 약속을 잡아야 하는데 연락하면 받아 줄까?]

“응? 그건 태서가 너한테 연락할 수도 있잖아. 그리고 분위기 좋았다며.”

[그렇긴 한데 언제 연락 올 지 모르잖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소리 하고 있네. 너 오늘 소개팅했어.”

그런데 벌써 다음 약속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토록 관심 있던 상대와 소개팅을 했으니 그 마음이 이해되기도 했다.

“어차피 학교도 같은데 뭐가 문제야. 연락 기다리기 힘들고 네가 할 용기도 없으면 학교에서 자연스럽게 부딪히면 되지.”

[그런가?]

“별걱정을 다하네. 그렇게 윤태서가 마음에 들더냐? 얼굴이 잘생겼다고 다른 것도 다 좋다는 건 아니지?”

제가 본 윤태서는 잘생겼지만 까탈스러운 인간이었다. 그래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점만큼이나 장점이 많은 놈이긴 한데 그걸 한미래가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거라 여기지 않았다.

[얼굴이야 처음에 흥미가 생길 정도면 되는 거지.]

“윤태서 낯짝이 고작 흥미 정도로 끝날 게 아닌데?”

[어쨌든 나는 오늘 걔랑 만나면서 그 성격에 더 반했단 말이야.]

“성격?”

얘가 오늘 다른 애를 만나고 왔나? 박한수가 핸드폰을 내려서 한미래 이름을 보고는 다시 귀에 댔다.

[말도 잘 들어 주고 세심하고 또 상냥했단 말이야. 걔는 얼굴보다 마음이 더 예쁘더라.]

”나 지금 닭살 돋았으니 그만하자. 어쨌든 너랑 다시 자리를 마련해 주든지 연락해 보라고 옆구리 찔러 달라는 거 아니야.

[부탁해 친구야.]

“그 말 듣겠다고 희생한 내 귀 보상할 생각이나 해라.”

한미래한테서 오케이 대답을 듣자마자 박한수가 미련 없이 통화를 종료했다.

“제대로 빠졌네, 빠졌어.”

정작 윤태서에게는 연락 한 통 없는데. 박한수는 조용해진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다시 아이스크림을 물었다. 어쨌든 주선자로 욕은 듣지 않아 콧노래가 나왔다.

“박한수 군?”

그때 길쭉한 그림자와 함께 한 남자가 박한수의 앞을 막았다.

“어? 어디서 많이 본 분 같은데? 누구세요?”

“한동화입니다.”

남자가 박한수에게 제 명함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든 박한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시 명함을 바라본 박한수는 이름과 전화번호를 눈으로 훑은 후 대답했다.

“저 연예인 할 생각 없는데요.”

“…윤태서 도련님의 비서입니다.”

“아, 어쩐지 낯이 있다 했어요.”

연예인 캐스팅인 줄 착각했으면서도 박한수는 전혀 부끄러운 기색 없이 받아쳤다. 캐스팅 아니면 대충 종교 믿으라는 줄 알고 찍어 봤는데 아니면 마는 거지 뭐,

“혹시 도련님께 따로 연락 받은 거 없습니까?”

“태서요? 아침에 소개팅하면서 전화한 거밖에 없는데.”

박한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한동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두드렸다.

“그럼 혹시 연락 오면 저한테 알려 줄 수 있습니까?”

“아, 네.”

딱히 어려울 게 없는 부탁이었다. 박한수의 알겠다는 소리에 한동화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돌아섰다. 그가 핸드폰을 귀에 대며 “친구를 만나진 않은 듯합니다.”라고 하는 게 들렸다.

갑자기 나타나서 제 할 말만 하곤 바람처럼 사라지는 한동화를 보던 박한수가 명함을 매만졌다.

“뭐야, 명함 하나 준 게 끝이야?”

무슨 일인지 말은 해 줘야지.

***

“이렇게 될 줄 알고 명함을 주신 건 아니겠죠.”

둔중한 문을 앞에 둔 태서가 제 탓이 아니라는 듯 핑계부터 주절거렸다. 살벌하게 지키는 경비를 볼 때만 해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걱정했다. 다가오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자신을 발견한 경비원이 먼저 경계심 짙은 눈빛으로 다가오기에 명함을 보여 준 게 다였다. 그런데 이 구깃한 명함이 프리 패스권이라도 되는지 한 방에 강세헌의 집 앞으로 이동시켜 주었다.

순식간에 온 탓에 아직도 어리둥절한 태서는 문 옆에 버젓이 달려 있는 벨을 보고도 선뜻 손을 올리지 못했다. 이 명함을 줄 때 강세헌이 한 말이 떠올라서 그랬다. 벨 누르고 도망가면 혼낸다는 싱거운 농담에 코웃음 쳤는데 그게 현실로 이루어졌다.

“뭐, 도망가진 않을 거니까. …뒤늦게 생각이 바뀌어서 돌아갈 수 있는 거지.”

벨을 앞에 둔 태서가 입술을 작게 모으며 웅얼거렸다. 명함을 받은 지 반나절도 안 됐는데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자신을 보고 뭐라고 할지 걱정되어 자꾸만 망설여졌다. 벨을 누르더라도 생각이 바뀌면 돌아설 수 있다고 변명하는 것도 그 이유였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까…….”

태서가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 대며 검지를 세웠다. 당장이라도 벨을 누를 준비 태세까지 갖췄다. 지금 태서는 강세헌 말고 다른 대안이 없었다.

핸드폰은 켤 수 없고 가진 현금도 별로 없다. 이 세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서 아는 것도 없고 친구 놈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박한수 하난데 그건 집에서도 잘 알 거다. 그냥 카페에 죽치고 있을까 싶었지만 오늘 하루에 다 해결될 거 같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강세헌은 정말 울퉁불퉁한 퍼즐에서 찾은 마지막 조각 같은 남자였다. 부모님을 통해 아는 인연도 아니었고 자신이 누군지 물어보지도 않아 아는 것도 별로 없고 결정적으로 집 주소를 알고 있어 목적지가 분명했다.

“다 좋아, 조건은 다 좋은데 날 받아 줄지가 문제잖, 으헉!”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기겁한 태서가 제 심장을 부여잡으며 상체를 뒤로 쭉 뺐다. 현관 앞에 서 있는 강세헌은 문에 기댄 체 아예 팔짱을 끼고 태서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앞에 있는 걸 알고 있었던 듯 심드렁한 눈빛이었다.

“벨 누르고 도망가면 잡아채려고 했더니 왜 이렇게 시간을 끌어.”

“…이왕이면 신중하다고 해 주세요.”

“그래서 명함 주자마자 쪼르르 달려왔어?”

“그게…….”

강세헌 저 남자의 화법이 상대방의 말문을 턱턱 막히게 하는 말투라는 걸 알고 있던 게 다행이었다. 앞에서 망설이긴 했지만 그를 만나면 어떻게 말할지 이리저리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고 왔으니까.

다만…… 해도 될지.

태서가 슬쩍 바닥을 훑던 눈동자를 올려 강세헌과 눈을 마주쳤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그래, 그렇겠지.”

“제가 세헌 씨한테 각인했나 봐요.”

“…….”

당연히 할 말이 있어서 왔겠지 싶던 강세헌의 얼굴이 굳어졌다. 별로 눈, 코, 입을 크게 움직이는 것도 아닌데 눈썹을 모으는 것만으로 그의 당황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게 신기했다. 곧 강세헌이 제 이마에 손가락을 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 진짜 장난치려고 왔구나.”

벨만 안 눌렀지 사상이 글러 먹었다며 받아치는 강세헌을 향해 태서가 전혀 꿀리지 않는 얼굴로 제 생각을 전했다.

“진짜예요. 저 자꾸 세헌 씨만 생각나고 세헌 씨 거만 맡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강세헌에게서 맡아지는 이 냄새가 페로몬이 맞다면? 그와 히트를 보내면서 각인을 한 건 아닐까 싶은 가설을 세웠다. 이것도 여기 오면서 불현듯 떠오른 거였다. 제법 그럴싸한 거 같아서 이걸로 물고 늘어지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리고 강세헌이 계속 생각나는 건 진심이었다. 뭐, 굳이 그가 보고 싶다거나 만나면 안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어도 어쨌든 그 이름을 떠올렸으면 됐지. 나름 타당하게 앞뒤를 맞춰 가며 결론을 내린 거라 꿀릴 것도 없었다.

태서의 당당한 추론에 돌아오는 강세헌의 반응은 깔끔했다.

얘가 왜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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