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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13화 (13/130)

13화

방금까지 잘만 넘어가던 버거가 목구멍을 콱 틀어막은 것만 같았다. 태서는 양념이 묻은 손을 대충 훔쳐 내고 물 잔을 쥐었다. 시원하게 넘어가고는 있는데 탄산 특유의 톡 쏘는 느낌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탄산음료도 하나 시킬걸.

아니, 그냥 강세헌이 앉는 걸 보고만 있지 말고 보내 버렸어야 했다. 태서가 주먹을 쥐고 제 가슴을 두어 번 두드리자니 강세헌이 혀를 찼다.

“애도 아니고 맛있다고 우걱우걱 먹을 때부터 알아봤다.”

“버거 때문이 아니라 그쪽이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그러죠. 왜 그런 말을 하세요?”

“너 미래한테 잘 웃어 주더라.”

“그 말을 지금 왜 하는데요. 설마 그거 때문에 걔한테 고백할 거냐고 물어본 거예요?”

태서가 설마 진짜냐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강세헌이 그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오메가가 그렇게 멋지게 웃어 주는 거 아니다. 다른 사람이 오해해.”

“오메가는 다 이뻐야 한다는 고정 관념부터 좀 버리세요. 어느 시대 사람이지? 사회생활은 가능하시죠?”

태서가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는 강세헌을 이상하다는 것처럼 보았다. 여기서 오메가가 왜 나와. 설마…… 지난번 제 페로몬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던 그거의 연장선인가? 제가 베타인 척 다닌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아니 근데 베타인 척하고 다니든 말든.’

태서의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혹시 아닌 척하더니 같이 잤다고 막 이상한 감정이 휘몰아치나 싶어서 찔러봤다.

“아니면 질투하세요? 제가 미래에게 고백할까 봐 걱정되세요?”

“그럴 리가.”

“그런데 무슨 상관이라고…… 진짜 말 이상하게 해.”

오해는 무슨 오해. 진짜 오해는 강세헌이랑 이상한 사이라고 소문나는 게 오해지. 입맛이 뚝 떨어진 태서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 더 머물러 봐야 좋을 것도 없고 그냥 집에 가는 게 제일이었다.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지만 자기를 위해서 앉아 줬으니 강세헌에게 예의상 꾸벅 고개를 숙여 주었다.

“잘 가라.”

강세헌은 천천히 일어나려는 듯 태서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방금까지 이상한 말을 한 사람답지 않은 특유의 태연함에 태서는 못마땅한 눈빛을 띠다가 돌아섰다. 그러다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태서가 다시 강세헌을 향해 섰다.

“우리가 이상하게 호텔에서만 만나는 거 같아서 그런데요.”

태서에게는 이 호텔을 드나드는 게 거리낌 없지만 딱 한 사람 강세헌에게는 예외였다. 내내 아닌 척 굴긴 했지만, 그와 관계를 나눈 곳이기도 했으니까. 남들은 자신을 베타로 여기지만 강세헌만큼은 계속 자신을 오메가로 보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더욱 자신에게 이상한 마음이 생길 수 있다는 의심도 지울 수 없었다.

“만약 다음에 만나게 될 일이 생기면 그냥 제가 찾아갈게요.”

“이런 식으로 다음 약속을 잡는 거야?”

“진짜 성격 왜 그래요?”

제 마음대로 해석하고 결론을 내려버리는 저 인간을 어떡하지? 괜히 말을 꺼냈나 싶어 태서가 그냥 갈 걸 하는 후회를 할 때였다. 강세헌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금방 태서의 앞으로 다가왔다.

언제나 마주 서면 느껴지는 특유의 위압감에 태서가 눈썹을 찡그렸다. 자신도 작은 키가 아닌데 강세헌의 앞에서는 너무도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 기분을 떨쳐 내려 태서는 더욱 턱을 치켜들고 강세헌을 바라보았다. 그래, 덩치가 크다고 무서울 게 있나.

그런 태서가 귀엽다는 듯 강세헌이 픽 웃더니 두 장의 명함을 내밀었다. 하나는 KH전자 쪽과 관련 있는 공식적인 명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무것도 없이 주소와 연락처만 담겨 있었다.

“이거 설마 집 주소?”

“벨 누르고 도망가면 혼난다.”

강세헌이 태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돌아서서 가 버렸다. 멀리서 지켜보던 비서인지 하는 사람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혼자 남은 태서는 깨끗이 닦지 못한 손으로 쥔 두 장의 명함을 바라보았다. 기름진 냄새를 풍겨 대는 명함은 정말로 강세헌의 이름이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

“저 미친놈은 왜 집 주소를 주고 가?”

진짜 사람 헷갈리게 하는 아저씨네.

***

“아무래도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 보는 게 나을 거 같은데.”

강세헌과의 찝찝한 만남에 대한 여파는 집에 돌아오고서도 계속 이어졌다. 그와 만나고 나면 항상 제 형질에 대한 고민이 찌꺼기처럼 남았다. 그래, 나 히트가 왔다고 했었지. 그러니까 베타처럼 보인데도 오메가잖아. 강세헌이랑 잤는데 그가 설마 착각을 한 것도 아닐 거야…… 이런 생각들.

그런데 여전히 다른 사람의 페로몬을 느낄 수 없었다. 그 개념이 모호해서 맡고 있으면서도 못 알아채는 거라면 이해하지만 이 정도로 아무것도 모르는 건 조금 심하긴 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강세헌을 제외한 다른 사람의 것을 못 느낀다는 거였다.

“내가 강세헌 전용 개새끼가 된 것도 아닌데.”

강세헌한테만 좋은 냄새가 난다니. 아무래도 뭔가 문제가 있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맡은 그의 냄새가 페로몬이라면 더더욱 검사를 받아 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가 보자.”

결정한 김에 그대로 실행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태서가 외투를 집어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막 태서의 방문을 두드리려던 한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한 비서님? 무슨 일이세요?”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급히 가 보셔야겠습니다.”

“아버지가요?”

어제 점심 식사를 하고 하루만의 호출이었다. 갑자기 부를 일이 뭐가 있을까 싶지만 우선 급하다고 하니 금방 목적지를 변경했다.

“그럼 아버지한테 가요.”

집으로 돌아올 때 타고 온 차의 엔진이 식기도 전에 다시 시동이 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호텔에서 조금 더 밍기적거리다가 올 걸 그랬나? 싶었다. 태서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다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옆을 바라보는 듯하더니 룸미러로 한 비서를 바라보았다.

룸미러로 한 비서와 자꾸 눈이 마주치는 기분이었다. 그 의심이 확신이 된 건 그와 눈이 마주친 지 정확하게 세 번째가 됐을 때였다.

“할 말 있으세요?”

“회장님께서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당연히 궁금하죠. 한 비서님은 아세요?”

태서의 물음에 한 비서가 입을 다물었다. 눈치로 보아서 아는 거 같은데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걸 보니 가벼운 주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럴 게 뭐가 있을까.

‘강인혁이랑 약혼하라는 거 아니야?’

아직 오메가가 된 걸 모르실 텐데? 설마 형질이 바뀌는 걸 기다리기 힘들어 우선 약속부터 해 놓자는 개념이라면 꼭 못 할 것도 아니었다. 베타와 알파의 조합이 아예 없진 않았으니까. 다만 남자 베타의 경우 후손을 낳을 수 없는데도 밀어붙일 생각이라면 정말로 집안에 이 약혼이 필요하다는 거겠다.

“혹시 인혁이 이야기예요?”

“그건 아닙니다. 실은… 예전에 창립 파티에서 도련님이 벌인 일을 아셨습니다.”

“제가 벌인 일이요? 아…….”

설마.

“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 단호하게 나오시는 바람에 계속 비밀로 할 수 없었습니다.”

태서가 그날의 일이 벌어지기 전의 과정을 떠올렸다. 서다래에게 먹일 약을 구해 온 게 한 비서였다. 그래서 제가 한 일이 빼도 박도 못하게 들통난 것이다. 지금껏 그걸 간과하고 있었다. 아무 일이 없었으니 조용히 지나갈 줄 알았기에 태서는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따로 들인 자들로부터 그날의 일을 알아내시고는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건 즉 태서가 서다래를 엿 먹이려고 히트 사이클을 일으키는 불법 약을 구한 걸 들켰다는 소리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윤태서의 부모는 절대 그 일을 그냥 넘어가실 분들이 아니었다. 그러니 윤태서가 죽고 나서도 서다래에게 화를 내는 것보다 그간의 죄를 그들이 다 겸허히 사과하지 않았나.

‘죄송하다고 하면 평화롭게 끝날까?’

태서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제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윤태서란 인물이 벌인 짓이니 제가 감당해야 하겠는데 그 수준이라는 게 결국은…….

“한 비서님 잠시만 멈춰 주세요.”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아침에 먹은 버거 때문에 체했나 봐요. 소화제 하나만 사 먹게요.”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부탁할게요.”

한 비서가 한쪽에 차를 정차하고 빠른 걸음으로 약국으로 향하는 걸 보던 태서는 그가 보이지 않자 바로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한 비서와 반대 방향으로 달려갔다. 어디로 가겠다는 그런 건 없었다. 그저 한 비서가 찾지 못할 정도로 최대한 거리를 벌릴 생각뿐이었다.

‘아직은 안 돼.’

이 일이 윤태서를 완전히 죽음으로 몰아간 계기였다. 그날 서다래가 약을 먹지 않았다 할지라도 결국은 태서가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났고 그 이후에 벌어질 일을 감당하기엔 그 시달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시달림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돌고 돌아서 결국 내가 한 짓인 게 드러났는데 내가 죽지 않으리란 법이 없잖아.”

그 대가가 너무도 큰 탓이라 감당하기 버거웠다. 그렇게 원작을 비틀려고 노력했는데 결국 정해진 운명대로 죽어 버린다면?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어 서야 멈춘 태서가 제 무릎에 손을 얹으며 거친 호흡을 골랐다. 태서를 이상하게 보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지만 당장 아무렇지 않은 척 진정이 되지 않았다. 한참을 허리를 구부리고 호흡을 가다듬은 태서가 천천히 허리를 폈다.

주머니에서 울려 대는 진동에 태서가 천천히 그것을 꺼내 들었다. 한 비서라고 이름이 박혀서 울려 대는 핸드폰은 당장 태서에게 돌아오라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태서는 핸드폰의 사이드 버튼을 꾹 눌러 전원을 꺼 버렸다.

이내 잠잠해진 핸드폰을 쥔 채 태서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처음 보는 낯선 거리. 길 한복판에 선 태서는 길을 잃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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