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태서가 메뉴판을 보며 나올 요리를 상상해 보았다. 저번에 잘 먹고 갔던 코스는 오늘 몇 가지 메뉴가 당기지 않아 패스했다. 단품 위주로 보는 태서의 눈이 요리의 이름 하나하나에 머물렀다.
“해산물은 비릴 거 같아.”
실제로 먹어 보면 전혀 비리지 않겠지만 그냥 태서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기는 질길 거 같은데.”
이 역시 실제로 먹으면 입 안에서 부드럽게 씹히겠지만 어쨌든 태서는 제 마음대로 생각했다.
“아, 뭐 먹지.”
쉽게 눈에 들어오는 게 없어 태서가 괴로운 듯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러다 제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한 태서가 결국 한 가지 메뉴를 선택했다. 곧바로 서빙하는 직원을 부른 태서가 메뉴판을 덮기 전에 주문했다.
“치즈버거 주세요.”
앞에 주륵주륵 붙어 있는 최고급이라거나 한우라거나 하는 이름은 가뿐하게 생략했다. 심지어 방금 한 고기는 질길 거 같다는 혼잣말은 어느새 잊어 버린 듯했다.
그나마 먹을 만할 거 같아서 시키긴 했는데 굶주린 것에 비하면 버거도 크게 끌리진 않았다.
“필요하신 건 더 없으십니까?”
“네. 그것만 가져다 주세요.”
“알겠습니다.”
직원이 메뉴판을 들고 사라지자 태서가 곧장 목을 가다듬으며 손을 뻗어 물잔을 쥐었다. 버거를 시킬 때 콜라까지 마실까 싶었는데 이상하게 탄산은 끌리지 않았다. 그래서 찬물을 마시며 식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불쑥 태서의 앞으로 길쭉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직원이 할 말이 있어서 다시 왔나? 고개를 들은 태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궁상맞게 뭐 하는 거지.”
“제가 궁상맞게 굴었어요?”
“까였으면 얌전히 집에 갈 것이지 뭐 하러 꾸역꾸역 여기까지 올라와.”
“배가 고파서요.”
밥 먹으려고 온 건데 어디가 궁상맞다는 건지.
태서는 오랜만에 만난 강세헌에게 잘 지냈냐고 인사해야 할지 아니면 갈 길 가시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향을 맡은 태서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서 있는 강세헌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혹시 저 따라 올라오셨어요?”
“내가 널 왜 따라와.”
“그럼 갈 길 가시라고요.”
호텔을 집처럼 다니는 사람도 아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치 흐트러짐 없는 걸 봐서는 볼 일이 있어서 온 게 맞았다. 적당한 질문으로 확신하고 나니 그대로 가시면 된다고 생각했다.
태서의 간단한 정리에 강세헌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원래도 눈높이가 안 맞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눈썹까지 드니 더 오만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비쳤다. 그러니까 네가 뭔데 나보고 가라고 하냐는 그런 느낌.
“배웅이라도 해 드려요?”
어디를 가려는지 모르지만, 아는 얼굴이니 잔뜩 반가워 해 주고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어 주길 바라나 보다. 태서가 석상처럼 꼼짝하지 않는 강세헌을 보다가 물어봤다. 그러자 강세헌이 황당과 기막힘이 범벅된 눈빛을 띠더니 이내 태서의 맞은편에 앉았다.
“왜 앉으세요?”
“같이 먹어 주려고.”
“저랑 같이 밥 먹겠, 아니 먹어 주시겠다고요?”
“그래.”
딱히 그럴 필요는 없는데 거절한다고 일어날 거 같지 않았다. 애초에 먹어 주겠다는 말을 할 때부터 태서의 의견은 무시될 것 같았다. 태서는 강세헌을 밀어 내는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런데 저 안 까였어요.”
“분위기는 좋더라.”
강세헌의 말에 태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거 아무래도 뭔가를 본 게 확실한데…….
“제가 미래랑 있는 거 봤어요?”
“난 또 혼자 밥 먹길래 결과가 안 좋은 줄 알았더니…….”
“그럴 게 어딨어요. 미래가 시간이 안 된다고 해서 다음에 만나기로 했는데. 아니, 내가 왜 이런 걸 설명하고 있지?”
“대학생이 공부할 시간도 부족할 텐데 소개팅할 시간은 있네.”
“소개팅인 건 또 어떻게 알았대?”
태서는 지금 강세헌을 처음 봤는데 그는 자신이 아까 미래를 만나는 것도 알고 그게 소개팅인 줄도 알았다.
“그러면 그 분위기가 사업차 만나는 미팅이라도 될까.”
“분위기가 어땠는데요?”
“아주 싱그럽다 못해 풋내가 다 나더라.”
“와…….”
그냥 보기 좋다고 해 주면 될 것을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태서가 왜 그렇게 말하냐고 하려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생각이 바뀌었다.
“이런 관심은 별론데?”
태서가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상체를 기울였다. 말로는 별로라고 하면서 상체가 다가오니 강세헌이 뒤로 물러나며 언짢은 티를 냈다.
“뭐야.”
“나한테 다가오지 말라고 그렇게 선을 그었으면서.”
태서가 강세헌의 앞에 대고 손가락으로 투명한 선을 죽죽 그어 놨다. 예전에 강세헌이 이렇게 선을 그었다는 걸 표현하려는 듯.
“왜 이렇게 나한테 관심이 많으실까.”
태서의 능글맞은 눈빛과 음침한 웃음에 강세헌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태서의 어지간한 성격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이건 정말 별로라는 감정을 고스란히 내보였다. 그러나 태서는 물러나지 않았다. 진짜로 이상했으니까.
강세헌은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가 버릴까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정말로 우연히 혼자 라운지에 들어간 걸 보지만 않았다면 곧바로 호텔을 나갔을 텐데.
다행히 직원이 적절한 타이밍에 메뉴를 내오며 둘 사이의 대화가 끊겼다. 강세헌은 태서가 시킨 메뉴를 가볍게 스캔하고는 손을 저었다.
“먹기나 해.”
“안 드시고 저 먹는 거 보시게요?”
“배고프면 먹을거야.”
그래서 시키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태서는 입을 삐죽이며 버거를 두 손으로 집었다. 양쪽에 늘어진 식기는 처음부터 무시했다.
“버거라고 꼭 손으로 집어 먹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은 버리지?”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태서는 이미 집어 버린 버거를 내려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보란 듯이 강세헌의 앞에서 한 입 크게 벌려 버거를 물었다. 빵 사이로 치즈가 흘러나오면서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양껏 버거를 입에 문 태서가 만족스러운 듯 웃으니 그의 입술이 소스로 매끌매끌 빛났다.
시킬 때만 해도 크게 끌리지 않았는데 막상 버거를 먹으니 입맛이 싹 돌면서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태서가 어깨를 살짝 떨며 잔뜩 미간을 구기는 그 모든 표현이 전부 강세헌에게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래 봐야 빵 사이에 다진 고기를 끼워 넣은 건데 뭐가 저렇게 맛있다고 난릴까.
“너 진짜…….”
“복스럽게 잘 먹죠? 안 그래도 오늘 첫 끼여서 그런지 맛있네요.”
“…그래.”
회의할 때마다 늘 다른 사람을 주눅 들게 하고 말문을 막히게 하는 강세헌이 반대로 그들의 입장이 된 듯 입을 다물었다. 정말 제 앞에 있는 놈은 잘생기고 매력적이지만 뻔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너는 내가 어렵지 않아?”
“제가요? 제가 왜요?”
태서가 황당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 눈을 크게 뜬 것도 모자라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내가 누군지는 아냐?”
“강세헌이요. 회사원이잖아요.”
“그냥 회사원으로는 안 보일 텐데?”
“그렇다고 제 상사도 아니고 직급에 따라 대우해야 할 상대로도 안 보여요.”
“너 말 잘한다.”
“더 할 수 있어요. 그 커다란 덩치로 사람 기 많이 죽이고 다니신 거 같은데 저 때릴 거 아니잖아요.”
그 어디에도 제가 강세헌을 어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대답해 왔다. 물론 딱 하나 걸리는 건 있었다.
‘강인혁의 사촌 형.’
그러니까 앞으로 강인혁과의 사이를 끊어 낼 걸 생각하면 강세헌과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것도 좋은 건 아니었다. 이왕이면 처음에 말한 그대로 서로 갈 길 가는 게 제일 좋은데…….
태서가 버거를 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혼자 먹는 게 궁상맞다고 앞에 앉아 준 김에 다 먹고 나서 헤어지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버거가 맛있긴 하지만 강세헌을 만나서 더 그런 기분이 드는 것도 같아서…….
“그런데 이 호텔 좋아해?”
손가락에 흘러내린 치즈를 쪽쪽 빨던 태서가 눈동자를 돌려 강세헌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한 질문을 곱씹어 보았다. 그가 이런 질문을 한 요지는 계속 호텔에서 마주쳤으니 그런 거 같은데…….
이 호텔을 좋아하냐면 부모님이 운영하는 곳이니까 당연히 좋아했다. 그런데 꼭 좋아해서 이곳을 자주 드나드냐면 그건 아닐 뿐.
“좋아해요.”
태서는 그냥 간단한 대답으로 무마했다. 구구절절 설명할 이유도 없고 또 강세헌이 강인혁의 사촌 형인 걸 알기에 제 정보를 많이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너…… 다른 사람한테 고백하는 거 되게 볼만하겠다.”
태서의 미간이 팍 좁혀졌다. 갑자기 무슨 고백이래? 하지만 강세헌은 태서의 지저분한 입은 물론 손가락을 보며 말했다.
“좋아한다고 말할 때 되게 긴장감 없을 거 같아. 혹시 뭐 먹을 때 충동적으로 고백하지 말고.”
“남이사 고백하든 말든.”
“미래가 싫어해.”
“이 아저씨 자꾸 선 넘네.”
태서가 버거를 든 상태로 눈을 치켜떴다.
“버거를 먹다가 고백하든 김치찌개를 먹다가 고백하든 그건 내 일이죠. 내가 알아서 미래랑 분위기 있는 곳에서 잘 이야기할 테니까 더는 말하지 마세요.”
태서는 툴툴거리며 다시 버거를 크게 물었다. 강세헌과 대화를 하는 동안 꽤 식었는데도 역시나 맛있었다. 오늘 한 거라고는 자고 일어나서 미래랑 조금 떠들고 칼로리 높은 버거 먹는 게 전부네. 거기다 오지랖 넓은 아저씨 상대까지…….
“그러니까 미래한테 고백하겠다는 거네?”
어딘가 핀트가 어긋난 대답에 태서의 행동이 우뚝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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