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먼저 일어날 테니 대화 더 나누다가 와.”
한미순이 제 남편의 팔을 톡톡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신호에 맞춰 윤석훈, 김미경까지 일어나니 함께 나갈 타이밍을 놓친 태서가 뒤늦게 머뭇거리며 일어났다.
“태서야, 다음에 또 만나자. 그때는 아줌마랑 더 깊은 이야기도 나누자.”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어쩌면 인사도 저렇게 야무질까. 아줌마 갈게, 또 보자.”
한미순은 끝까지 태서에게 눈을 못 떼다가 돌아설 때 제 아들의 등을 툭 쳤다. 어른들이 있는 자리라 태서가 일어날 때 마지못해 움직였던 강인혁은 엄마가 보내는 신호에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둘만 남자 언제 화기애애했냐는 듯 삭막한 공기가 감돌았다. 더는 억지로 웃을 필요가 없어진 태서가 자리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엉덩이와 의자 사이에 깔려 계속 울려 대던 진동에 누군가 부지런히 보내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윤태서.”
“나 부르지 말고 적당히 앉아 있다가 가.”
태서는 강인혁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지금 바로 나가면 부모님들과 마주칠 수 있으니 태서도 도로 앉아 엉덩이를 뭉개고 있는 거였다.
태서의 말이 먹혔는지 아닌지 몰랐다. 그러나 적어도 그에게 할 말이 있기에 강인혁은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직이 윤태서를 불렀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부모님을 내세워 봐야 달라지는 건 없어. 우리 약혼이고 결혼이고 아무것도 안 할 거니까 오늘 같은 자리 만들지 마.”
“미안하지만 나도 부모님이랑 식사하는 줄 알고 나왔다가 널 만난 거라서…….”
“네가 만들어 놓고 아닌 척하지 말고.”
“응, 네 억측 잘 들었어.”
태서가 핸드폰의 화면을 터치하며 강인혁의 말을 대충 받아쳤다.
“윤태서.”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에 강인혁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자신의 억측이라고 말하는 게 꼭 다음에도 이런 짓을 할 거 같았다. 그러나 태서가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친 순간 강인혁은 어딘가 낯선 느낌을 받았다. 제가 알던 윤태서가 아닌 느낌. 늘 아닌 척 굴어도 자신을 향한 애정을 바라던 눈빛이 아니었다. 무심하고도 차가운 눈빛.
“너 오늘 나 만나는지 몰랐던 거 같은데 나도 그래. 우리 부모님이 무슨 생각으로 자리를 마련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부모님이라 분위기를 맞췄을 뿐이야. 괜히 우리 사이 나쁘다고 어른들 불편하게 할 마음도 없었고.”
“…네 말을 어떻게 믿고.”
“너희 부모님이 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도 문제고 내가 오메가가 되면 바로 너랑 붙여 줄 우리 부모님도 문제지. 그래, 그건 있어.”
안 그럴 거라던 태서가 갑자기 말을 바꿔 오자 강인혁의 한쪽 눈썹이 들렸다. 지금 자신에게 말장난을 하는 거라면 그만두라고 강하게 언급할 생각이었다.
그 순간 태서가 핸드폰을 들어 귀에 댔다. 시선은 여전히 강인혁을 향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연결이 된 통화 상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생각 바뀌었어.”
[갑자기 무슨…….]
“소개팅할래. 시켜 줘.”
[…정말?]
상대방의 목소리가 핸드폰을 타고 강인혁에게도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가 박한수라는 걸 알자 얼마 전에 태서에게 소개팅을 해 준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말 바꾸지 마라. 당장 내일 소개팅 잡는다.]
“그러든가.”
태서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핸드폰을 내려놨다. 그러고는 여전히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고 있던 강인혁에게 말했다.
“들었지? 내가 먼저 소개팅해서 상대를 만들어 볼게. 너도 알아서 만들든가.”
이제껏 저지른 일이 있으니 태서도 이 정도면 많이 양보했다고 생각했다. 막말로 강인혁을 못살게 군 거야 이전의 윤태서니까. 지금의 자신은 그저 태서라는 이름을 짊어지게 된 만큼의 책임을 질 뿐 그 이상으로 비굴하게 굴고 싶진 않았다.
“먼저 일어난다.”
태서는 강인혁의 시선을 뒤로 하고 룸을 나왔다. 밖으로 나온 태서는 주변을 둘러보며 부모님이 있나 확인하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모님은 갑자기 자신을 위한다면서 말도 없이 강인혁을 부르지, 강인혁은 무슨 꿍꿍이냐 으르렁거리지, 중간에 낀 태서만 갑갑해 죽을 지경이었다. 다음엔 절대 인혁이네 가족이랑 자리 마련하지 말라고 꼭 당부해야겠다.
태서는 아직 풀리지 않은 피로에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잠이나 자자.”
방금까지는 제가 왜 윤태서가 되어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나 싶었는데 지금은 좋은 점도 생겼다. 호텔이 부모님의 것이라 마음껏 이용해도 좋다는 것. 태서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호텔 방을 이용하기 위해 데스크로 향했다.
***
“아, 맙소사.”
분명 호텔에서 조금 놀다가 잔 거 같은데 날이 바뀐 것도 모자라 늦게까지 자 버렸다. 태서는 아직 잠이 깨지 않은 멍한 눈으로 핸드폰을 다시 올려서 메시지를 읽고 내려놨다.
「11시 XX카페로 한다?」
「메시지 확인해라」
「일단 걔한테는 그렇게 전했어. 너는 늦게 봤으니 선택권 없다.」
「……내 톡 씹냐?」
「연락 좀…….」
「자냐? 혹시 몰라서 걔 연락처 남길게 010-XXXX-XXXX」
「너 마음에 든다고 했던 애니까 꼭 나가라 응?」
이후로도 이어진 메시지는 대충 읽어 버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지금 10시 50분이었다. 당장 씻고 나간다고 해도 무조건 지각이었다. 태서는 간밤에 한 번도 깨지 않은 자신을 탓하며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헝클었다. 강인혁 보란 듯이 소개팅을 잡았는데 그 상대에게 못할 짓하기 직전이었다.
태서는 잠시 제 머리를 몇 번 더 헝클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박한수가 이런 일을 예지했는지 몰라도 남겨 놓은 번호가 온통 제 신경을 잡아끌었다.
잠시 그 번호를 내려다보던 태서는 긴 한숨과 함께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
차가운 물로 아침부터 울렁거리는 속을 눌러 주던 태서의 앞으로 한 사람이 다가와 섰다.
“안녕.”
태서를 본다고 고개를 숙인 여자의 머리가 앞으로 흘러내려 왔다. 태서는 급히 물 잔을 내려놓으며 그녀에게 사과부터 건넸다.
“안녕, 여기로 불러서 미안해.”
장소를 옮기고 나서 박한수와 통화하면서 상대가 동갑이라는 걸 안 태서가 자연스럽게 말을 받아쳤다. 물론 여자 역시도 태서에게 편하게 말을 걸어왔기에 딱히 걸릴 거 없다는 듯 맞은편에 앉았다.
“갑자기 장소를 바꾼다기에 밥이라도 먹자는 건가 했더니 호텔로 부르네?”
“어? 아, 미안. 실은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원래 태서는 전화를 걸어서 지각할 거 같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었다. 그런데 여자는 대뜸 태서에게 어디냐고 묻더니 자기가 오겠다고 했다.
“한미래야.”
“아, 난 윤태서. 그리고 내가 널 여기로 부르긴 했지만 다른 의미는 없어. 어제 여기서 잤거든.”
호텔로 부르다니. 간단히 커피를 마시고 식사를 한 대도 혹시나 이상하게 들릴까 봐 태서가 변명을 덧붙였다. 정말 다른 의미는 없고 여기서 자고 일어나서 그런 거라고 강조했다.
“혼자, 혼자 잤어. 그렇다고 또 내가 호텔에 와서 자는 그런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말할수록 뭔가 꼬이는 거 같아 태서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러자 한미래가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흘리더니 태서에게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 여기 너희 부모님 호텔이잖아.”
“어? 어떻게 알았어?”
“나 너 봤어.”
한미래의 말에 태서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박한수에게 들어서 제 얼굴이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을 거라 여기긴 했지만 부모님의 사업까지 알 거라곤 생각 못했다. 딱히 박한수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없고.
“실은 이 호텔 창립기념 파티에 왔었어. 너 보고 마음에 들었는데 바로 나가는 바람에 말을 못 걸었거든.”
“아…….”
그때라면 서다래가 마실 약을 대신 먹고 쓰러진 날이었다. 다른 사람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그 자리에 한미래가 있었나 보다.
“같은 학교라 네 이름 몇 번 듣긴 했었는데 직접 보니까 괜찮은 거 같아서 한수 졸랐어. 다리 좀 놔 달라고….”
이런 사정이 있었을 줄 몰랐다. 그냥 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고맙다고 해야 하나?”
“당연하지.”
“고마워.”
태서의 순수한 인사에 한미래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런데 그거 알지? 너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인기 많아. 예쁜 내가 너한테 관심 주는 거니까 너 운 좋은 줄 알아야 해.”
한미래의 능청스럽고도 뻔뻔한 모습에 태서가 기가 찬 웃음을 흘렸다. 지금 처음 본 상대인데 박한수만큼이나 편했다. 태서의 웃음에 한미래가 따라 웃었다.
“웃으니까 더 잘생겼네.”
“와,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잘생겼다는 말 많이 듣지 않았어?”
“그렇다고 대답하면 나 어떻게 돼?”
“객관적인 애 되는 거지 뭐.”
한미래의 툭툭 내뱉는 화법에 금세 물든 태서가 결국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태서의 웃음에 전염된 듯 한미래도 웃으니 둘의 모습이 꽤 좋아 보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돌아볼 정도로 눈에 띄는 남녀이기도 했고.
그리고 그건 익숙한 웃음에 돌아본 강세헌도 마찬가지였다. 미팅차 호텔에 들른 강세헌이 팔짱을 낀 채 태서의 웃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앞의 여자와 말 몇 마디 나누기 무섭게 기분 좋게 웃는 걸 보고 있으니 알 만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러려고 페로몬을 감췄네.”
예쁘장한 여자애와 시원한 이목구비를 가진 잘생긴 태서까지 한눈에 담으니 제법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풋풋한 커플 정도로 보일 지경이니 말 다 했지.
그런데 어쩌나, 아무리 베타인 척해도 결국 티가 난다니까.
강세헌이 혀를 차더니 돌아섰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