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인데 임신했다-10화 (10/130)

10화

끊임없이 울려 대는 진동이 태서를 억지로 잠에서 끌고 나왔다. 태서가 눈을 감은 그대로 침대를 더듬었다. 손끝에 닿는 단단하고도 차가운 감촉에 그것을 끌고 왔다. 익숙하게 감겨 오는 그립을 느끼며 귀에 댔다.

“여보세요.”

잔뜩 잠긴 태서의 물음에 상대방이 웃음으로 반응해 왔다.

[아직도 자냐?]

익숙한 목소리, 굳이 눈을 떠서 이름을 확인하지 않아도 박한수라는 걸 알았다. 태서가 침을 한 번 삼킨 후 줄곧 엎어져 있던 몸을 뒤집었다. 그제야 한쪽 얼굴에 드리워진 빛에 왜 자신이 엎어져서 자고 있었는지 알았다.

“지금 몇 신데?”

[10시 넘었어.]

태서가 귓가에 댄 핸드폰을 살짝 떼서 실눈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19분이었다. 핸드폰을 쥔 손을 떨구고는 그대로 몸을 옆으로 돌렸다. 10시가 넘었다는 걸 알고도 딱히 일어날 생각이 없는 게으른 몸짓이었다.

“어차피 주말인데 늦잠 자면 어때.”

거기다 아직 눈이 안 떠지기도 했다. 여기서 박한수가 전화를 끊어 주면 더 잘 수도 있을 거 같았다.

[그러지 말고 나와. 집에 있어 봐야 답답하기밖에 더 해?]

“음…… 안돼.”

태서가 아직 잠이 덜 깬 머리를 억지로 굴려 생각하더니 거절했다.

[왜!]

“이따가 부모님이랑 밥 먹기로 했어.”

지난주에 이른 저녁을 먹고는 또 한동안 바빠서 못 봤더니 어제 저녁 아버지한테 연락이 왔다. 주말이라고 잔뜩 퍼져 있을 생각이었던 태서는 오래 생각하지 않고 알았다고 했고 이따가 나가 봐야 했다.

[그럼 내일은?]

“내일?”

태서는 좀처럼 전화를 끊지 않는 박한수 때문에 슬쩍 한쪽 눈을 떴다.

[실은 저번에 말한 소개팅 있잖아.]

“응, 안 해.”

[…나 아직 말 안 끝났어.]

박한수가 억울하다는 듯 굴었지만 태서는 좀처럼 말을 바꾸지 않았다. 소개팅이라고 해 봐야 강인혁이 있을 때 나눈 그것밖에 없었다. 그날 적당히 박한수의 장단에 맞춰 줬더니 이렇게 잊고 있을 때 제대로 한 방 들어왔다.

[걔가 너한테 관심이 많다니까? 언제 만나게 해 줄 거냐고 나를 들들 볶는데…….]

“네 사정.”

태서는 더 귀찮은 말이 나올 거 같아 통화를 종료시켰다. 그때까지도 박한수가 뭐라고 하는 거 같았지만 더 들을 생각도 없었다.

“무슨 소개팅이야.”

태서가 뻑뻑한 눈두덩이를 비비며 하품했다. 박한수가 전화 건 줄 알았으면 그냥 안 받을걸. 핸드폰을 대충 내던진 태서가 이불을 당겨서 허리까지 덮었다. 아직 부모님과의 약속까진 시간이 남았다. 그러니 더 자도 좋겠다고 눈을 감았는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진짜 박한수, 도움이 안 되는 애야.”

제가 일어나지 않으면 누군가 깨우러 왔을 테지만 잠이 깬 김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암.”

많이 잔 거 같은데 아직도 하품이 나왔다.

***

“잠을 잘 못 잤니?”

“네? 아니 그건 아니고…… 주말이라 조금 늘어지나 봐요.”

김미경의 물음에 태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반응했다.

“학교생활로 피곤한 건 아니지?”

“그럴 일이 있나요 뭐, 아직 시험 기간도 아니고 수업만 듣는 게 전부라 피곤할 것도 없어요.”

거기다 부모님의 풍요로운 지원 덕분에 따로 알바를 할 필요도 없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아니고 미친 듯이 어려운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니 요즘 태서의 생활은 더할 나위 없이 여유롭고 좋았다.

적당하게 수업을 듣고 나면 남은 시간은 얼마든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쓰면 되니 시간에 쫓기는 날도 없었다. 가끔 수업 시간에 강인혁과 서다래를 만나 불편하긴 했지만 그것도 뭐, 적당히 무시하니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그사이에 한 번 더 조모임을 했는데 그땐 박한수가 하드 캐리한 덕분에 크게 불편하지도 않았고.

‘진짜 부러운 인생이지.’

굳이 자신의 바뀌지 않는 형질에 얽매어 일을 친 게 안타까울 정도로 태서의 하루는 평온 그 자체였다.

‘내가 윤태서가 된 지 얼마나 된 거지?’

얼추 따져 봐도 한 달은 넘고 아직 두 달은 안 됐다. 그 정도 시간이 흘렀으니 파티에서 벌인 짓도 묻힌 것 같고 이젠 정말 걸릴 게 없었다.

원래는 이 나라라도 떠야 하나 싶었는데 이젠 그럴 필요도 없을 거 같고…….

“어?”

한참 생각을 이어 가던 태서는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강인혁을 보고 놀란 소리를 내고 말았다. 태서의 반응이 가장 빨랐을 뿐 다른 사람들의 등장을 알아챈 윤석훈과 김미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태서의 옆으로 자리를 이동하며 강인혁의 부모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보니 정말 반갑네요.”

“연락받고 놀랐어요. 어떻게 시간이 맞아서 너무 좋네요.”

김미경과 한미순의 대화로 얼추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해 보려는 태서가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려 댔다. 그 모습에 김미경이 웃음을 참으며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를 알려 주었다.

“인혁이네랑 시간이 맞아서 같이 식사하기로 했어.”

태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새롭게 자리가 세팅되는 동안 강인혁을 힐끔거렸다. 자기처럼 아무것도 몰랐는지 강인혁의 무표정한 얼굴 뒤로 은근한 불만이 읽혔다. 하긴 너는 나보다 더 싫겠지.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을 놈이 저 강인혁이었다. 윤태서의 애정은 싫고 서다래와의 관계는 진전되었으면 하는데 말이다.

아까보다 많은 인원이라 누군가 말을 하지 않아도 은근한 소란이 공간을 메웠다. 그 와중에 태서는 제 앞에 있는 샐러드를 몇 번 먹는 척만 하고 뒤적이는 게 고작이었다. 배가 고팠는데 막상 정식 코스가 시작되고부터 입맛이 전부 사라졌다. 덕분에 먹는 것보다 마시는 게 더 많았다.

“태서도 안 본 사이에 많이 예뻐졌구나.”

막 물잔을 집어 들려던 태서가 자신을 언급하는 말에 한미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 나보고 예쁘다고 한 거지?

“태서는 예쁜 것보단 잘 생겼지.”

“어머? 내 눈엔 예쁘기만 한걸요? 딱 우리 인혁이 짝으로 두고 싶을 정도로 예뻐 죽겠어요.”

한미순이 하이 톤으로 웃으며 태서를 향한 욕심을 드러냈다.

“인혁이 네가 봐도 태서 예쁘지 않니?”

제게 돌아오는 화살에도 강인혁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받아쳤다.

“예쁜 얼굴은 아니죠.”

태서는 순간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하긴 태서도 제 얼굴이 예쁘단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거기다 강인혁은 서다래라는 예쁜 오메가를 매일 같이 보고 있으니 더욱 이해할 수 없겠지.

“어머 얘도……. 태서야 인혁이가 말은 이래도 너 예쁘다는 말을 많이 했었어.”

“제가 언제요.”

한미순이 제 아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듯 눈빛으로 찍어 누르며 억지로 분위기를 끌어 올렸다.

“아줌마는 널 어릴 때부터 봐서 그런지 여전히 네가 예쁘고 그래. 이상한 마음으로 한 말 아닌 거 알지?”

“네.”

“그래, 착하다.”

뭐가 착하고 뭐가 예쁜 건지 모르겠지만 하나는 알겠다. 한미순이라는 아주머니는 자신을 원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태서와 인혁이가 이어지면서 따라오는 호텔이라든지 그 영향력이라든지. 아마 이것 때문에 원작의 윤태서가 그렇게 날뛰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서다래에 비해 태서는 강인혁의 부모가 자신을 원하고 있으니 그것을 무기처럼 생각했던 거다.

‘전부 부질없는 짓이지.’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다고. 원작에서 강인혁이 애절하게 서다래를 원하는 모습에 그의 부모는 서다래를 제 가족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태서가 물 잔을 집었다. 불편한 자리라서 그런지 밥은 먹히지 않았고 그저 시원한 물만 계속 찾았다. 전부 비운 물잔을 내려놓은 태서가 은근슬쩍 식기를 내려놓고 두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부모님들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요량이었다. 나름 조용히 움직인다고 움직였는데 그게 다른 사람에겐 전부 드러났나 보다.

“불편하면 일어나지?”

“얘, 인혁아.”

강인혁의 날이 서린 목소리에 한미순이 다급히 그를 말렸다. 화기애애 좋은 분위기로 나아가도 모자랄 판에 제 아들이 초를 치고 있었다. 그것도 태서의 부모까지 있는 마당에.

순식간에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태서는 제 부모님의 당황한 반응을 느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억지로 자리를 만든 것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선지 난감해하고 계셨다.

태서는 진짜 싫지만 굳이 제 부모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거짓 미소를 장착하고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인혁이가 사근사근한 애가 아니잖아요.”

그는 먼저 한미순에게 말을 거는 척 강인혁을 깠다. 그러고는 강인혁을 보고 대놓고 혀를 찼다.

“애냐? 어른들 있는 데서 아주 싸가지가…….”

강인혁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걸 본 태서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제 과제 때문에 못 잤는데 네가 해 줄 거 아니면 신경 꺼.”

“…….”

“아니면 내 몫도 네가 해 줄래? 같은 조 된 김에 네 덕 좀 보자.”

태서가 콧등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내 것도 해 줘라. 덕분에 눈치를 보던 한미순이 옳다구나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머, 둘이 같은 조였어? 학교를 같이 다니니 그런 일도 있구나.”

“네, 제 친구가 얘 성적 좋다고 한 조로 데려왔어요. 그래서 좀 편하게 가 보나 했더니 치사하게 딱 자기 몫만 하더라고요.”

이건 그냥 칭얼거림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태서는 그 조 모임에서 강인혁에게 어떤 걸 요구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으니까.

“인혁이 너는 친구 좋다는 게 뭐니, 태서도 좀 챙겨 주고 그래.”

“아니에요. 그렇게 맡겼다가 나중에 쟤가 저한테 뭘 요구할지 몰라요. 그냥 제가 하는 게 낫겠어요.”

“오호호. 둘이 아주 재밌게 학교 다니네.”

적당히 분위기를 띄운 태서가 강인혁을 향해 눈웃음 지었다.

‘눈치 챙겨.’

나도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니니까.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0)============================================================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