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할 말이 뭐야.”
서다래의 날카로운 물음에 태서가 손을 들어 잠깐 기다려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고는 서다래에게 살짝 몸을 틀며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골랐다.
‘지금 서다래랑 강인혁 사이가 어떻지?’
태서는 둘의 사이를 구체적으로 가늠해 보았다.
둘의 사이가 좋긴 하지만 자신이 중간에 껴 있어서 서로 사귀지는 못하고 있었다. 서다래는 강인혁이 깊숙이 들어오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했다. 제 가정 환경이 부끄러운 건 아니지만 혹시나 강인혁이 자신으로 인해 난처해질까 봐 그랬다.
그 관계가 온전히 뒤집히는 사건이 파티가 있던 날 맺은 관계였는데, 아무 일도 없었기에 지금 둘의 사이는 여전히 미적지근했다. 서로 눈빛이 통하지만 아직 이렇다 할 진전이 없는 상태. 거기다 앞으로 등장할 강인혁의 부모까지. 서다래의 앞길은 아직 한참 어두웠다.
“서다래.”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태서의 얼굴에 여유로움이 배어 나왔다. 아까 신경질적으로 틱틱 대던 그 모습이 사라지니 서다래가 인상을 쓰며 제 얼굴을 살펴 댔다.
“그때 샴페인은 받아 갔어?”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서다래가 입술을 깨물며 태서를 노려보았다. 강인혁에게는 언제나 사랑스러운 남자이지만 태서의 앞에선 아니었다. 지금껏 그의 괴롭힘에 당해 온 만큼 이젠 말 한마디에도 자연스럽게 가시를 세우곤 했다.
“오해하지 마. 네 집이 가난하다고 무시하는 게 아니니까. 그냥 그 샴페인으로 강인혁이랑 좋은 시간 보내라는 의미였을 뿐이야.”
“지금 그렇게 말을 바꿔 봤자…….”
“진심인데. 나 이제 강인혁한테 관심 없어. 걔 안 좋아해.”
태서는 서다래에게 먼저 제 마음을 확실히 말하고자 했다.
“그전에 괴롭힌 건 진짜 미안했다. 이제 앞으로 안 그래. 그리고 이건 변명이라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지만 내가 강인혁을 좋아해서 그랬어. 알지?”
“그렇다고 누구를 괴롭힐 이유가 되지 않아.”
“맞아. 지금까지 내가 너한테 한 행동 모두 미안해. 사과할게. 앞으로 하나하나씩 갚아 나갈 거야.”
“그 말을 믿으라고?”
“한 번만 믿어 줘. 진짜로 달라질 거야.”
태서의 말에 서다래가 반박하지 못하고 제 입술을 사리물었다. 정말로 윤태서는 요즘 조용했다. 제 가난을 비웃지도 않았고 자신을 보고도 그냥 지나칠 때가 많았다. 특히나 아까 강인혁과 제 사이를 보고도 별 감흥없어 보이는 눈빛이…….
“역시 널 못 믿겠어. 네가 인혁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도 그리고 나한테 사과하는 것도 다.”
태서는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꾹꾹 삼켰다. 애초에 말 몇 마디로 이 모든 상황을 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더욱 제가 악역의 몸에 들어온 걸 난감해했었지.
“윤태서!”
그때였다. 강인혁이 차갑게 굳은 얼굴로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인혁아 잠시만.”
서다래가 강인혁에게 다가가려고 몸을 틀었다. 여기서 괜히 일을 키워 봐야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었다. 거기다 방금까지 태서가 자신을 괴롭히는 게 아니라 나름 사과의 말을 전해 왔던 터라 더욱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강인혁은 서다래가 아닌 태서를 보고 있었다.
“이제 그만 좀 해.”
“강인혁, 지금 뭔가 오해하고 있는데 나 아무것도 안 했어.”
태서가 대충 어깨를 추어올리며 아무 짓도 안 했다고 했지만 강인혁은 여전히 굳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태서를 노려보는 시선이 길어지고 있을 때였다.
“인혁아 페로몬 좀…….”
태서는 느끼지 못하고 멀뚱히 있는데 서다래만이 제 가슴을 쥐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태서 때문에 뿜어져 나온 공격적인 페로몬이 엉뚱하게도 서다래에게 튀어 버렸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벽에 등을 기댄 서다래가 고개를 푹 숙인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강인혁이 빠르게 서다래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감싸 안았다.
“다래야 괜찮아? 미안해.”
자신도 모르게 나온 페로몬이 서다래를 공격하게 되었다. 강인혁의 품에 안긴 서다래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멀뚱히 둘을 보게 된 태서는 이게 무슨 짓거리인가 싶은 얼굴이었다.
자기가 보기엔 강인혁이 무서운 얼굴로 다가왔고 서다래가 귀신이라도 본 듯 놀라서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딱 그거뿐이었다. 서다래가 페로몬을 말해서 대충 알겠는데 정작 느껴지는 게 없었다. 덕분에 두 사람의 가슴 아픈 신파만 보는 기분으로 멀뚱히 서 있는 게 다였다.
“너, 서다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인혁아, 무슨 짓은 네가 했지. 나는 사이좋게 대화를 나눈 것뿐이야.”
강인혁이 맞냐는 듯 서다래를 보았다. 서다래는 여전히 앓으면서 태서를 보았다. 태서가 어깨를 으쓱이며 네가 말해 보라는 듯 굴었다. 그러자 서다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거 없었어. 가자, 인혁아.”
강인혁이 서다래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태서에게 나직이 경고했다.
“네 열등감으로 남을 괴롭히는 치졸한 짓, 이젠 더는 안 봐줘.”
‘열등감…….’
강인혁의 말이 맞았다. 제가 오메가가 되지 못한 자격지심에 더욱 서다래를 미워했다는 걸. 특히나 제 것이라고 여겼던 강인혁을 빼앗긴 분노까지 더해지면서 하지 말아야 할 짓까지 저질렀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자신은 악역이자 욕먹는 장치였다.
그래도 막상 자신이 윤태서가 되니 조금 서운했다.
“강인혁.”
태서의 부름에 막 돌아섰던 강인혁이 고개만 틀었다.
“너는 내 열등감을 보면서 어땠어?”
“…뭐?”
“내가 누구 때문에 오메가가 되고 싶어 했는지 알잖아. 그걸 보듬어 주고 싶단 생각은 안 해 봤어?”
그러니까 아무리 이 인물이 악역이라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을지언정 강인혁이 제게 딱 한 번이라도 동정심을 품어 준 적이 있을지 궁금했다. 그는 소설의 주인공이니까 잘 먹고 잘살고 행복한 마무리를 짓는 게 당연하겠지. 그런 인물이니까 한 번쯤 태서에게 동정심을 가진 적은 없을까 해서 한 말이었다.
“윤태서…… 달라졌다고 하더니 여전히 뻔뻔하네.”
“뭐?”
태서가 무슨 뜻이냐는 듯 눈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면서 고작 베타라는 이유로 네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다는 듯 구는 거. 너는 남을 괴롭혀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 아무것도 아닌 우리 사이에 내가 널 돌아봐야 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게 전부 그대로잖아. 그런데 네가 뭐가 변했다는 거야?”
“그래…… 그렇구나.”
자신은 짝사랑하던 이에게 동정조차 받지 못한 인물이었구나. 태서는 강인혁에게 실망도 기대도 한 적 없다는 듯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태서가 먼저 걸음을 옮겨 그들을 지나쳤다. 그러고는 멀찍이서 발을 동동 구르며 바라보고 있는 박한수를 쳐다보았다. 왜 여기 있냐는 태서의 시선에 박한수가 강인혁과 서다래를 한 번 보고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제가 저지른 일이 이렇게 커졌음에 반성한다는 듯.
“커피 마실래?”
박한수의 애절한 목소리에 태서가 뚱한 표정으로 지나갔다.
“따라와.”
***
“무슨 커피 마실래?”
“알아서 사와.”
“넵.”
“주문은 짖는 소리로 하고.”
“컹.”
찔리는 게 많은 박한수가 곧바로 강아지 소리와 함께 일어났다. 조를 만들 때만 해도 사정없이 머리를 갈겨 주고 싶게 얄미웠는데 저렇게 몸을 낮추는 걸 보니 또 웃음이 나왔다.
아메리카노와 함께 곁들일 수 있는 케이크와 마카롱을 종류별로 사 온 박한수가 태서의 앞으로 전부 밀어 주었다.
“나 단 거 안 먹어.”
“소금 쳐 드릴까요?”
“그 소금 네 몸에 치기 전에 말해 봐.”
태서는 박한수가 사 온 걸 힐끗 보기만 할 뿐 손대지 않았다. 오히려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팔짱을 꼈다.
“왜 그런 거야?”
“아니, 그냥 네가 요즘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니까 이번 조 모임 할 때도 그 시크한 태도를 보여 주면 좋겠다 했지.”
“그걸 왜 네가 정하냐.”
“미안하다. 그런데 진짜 나는 네 생각을 한 거야. 강인혁 좋아한다고 제대로 된 친구도 못 사귀고…….”
“안 좋아해.”
태서가 박한수의 말을 싹둑 잘라 냈다.
“그래, 너는 이 방법을 안 좋아하겠지. 그래도 나는 이게 나름의 내 대안이었어.”
태서는 강인혁을 안 좋아한다는 건데 박한수는 그렇다고 이렇게 조를 만든 것 자체가 안 좋다는 줄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태서는 박한수의 말을 하나하나 짚어 줄까 싶다가 귀찮아서 놔뒀다.
“그러니까 그걸 왜 네 마음대로 결정하냐고.”
태서가 테이블 아래 박한수의 다리를 툭 쳤다. 나를 생각하니 뭐 하니 그런 것도 미리 언질을 줬으면 이렇게까지 몰아세울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같은 조를 짜지 못하게 막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덜 당황했을 테니까.
“진짜 잘못했다.”
“짖으면서 말해라.”
“잘못했습니다. 컹. 저는 정말로 우리 태서 군이 행복한 라이프를 즐겼으면 했습니다. 깨갱. 강인혁한테 색다른 모습도 보여 주고 친구도 많이 사귀었으면 했고요. 크릉.”
“지랄.”
진짜 개소리의 나열이었다. 태서가 코웃음 치자 박한수가 기죽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 내가 지금이라도 조원을 바꿔 볼까? 내가 저지른 거니까…….”
“잠깐만.”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태서의 상체가 튕기듯 앞으로 기울였다. 태서가 제 이마를 긁적이며 잠시 이리저리 눈동자를 돌리더니 나중엔 박한수를 향해 눈을 번쩍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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