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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7화 (7/130)

7화

태서가 황당한 시선으로 제 앞에 모인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언제 왔는지 아니, 애초 온 지도 몰랐던 서다래와 보기 싫은 강인혁, 그리고 이 사태를 만든 박한수의 얼굴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다 같이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듣고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는 건 한 조라는 걸 의미하고 있었다.

꼭 조 모임을 하면 이렇게 모이더라. 엮이기 싫다고 생각할수록 더 엮여. 그것도 눈치 없이 구는 한 놈의 농간으로.

태서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제 표정에 여실히 드러나는 불만에 각자의 반응이 달랐다. 강인혁도 싫었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고 서다래는 무표정한 얼굴로 제 책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박한수는 좋아했다가 난감해하며 온갖 부산한 짓은 다 하고 있었다.

“이런 거 너무 식상하지 않아?”

“뭐가 식상해. 친한… 아는 사람끼리 같은 조 하면 좋지.”

박한수가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그 생각이 참 식상해.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그러는 게 더 좋잖아.”

태서가 팔짱을 낀 채 이 상황을 만든 박한수를 흘겨보았다. 이 눈치 없는 놈 때문에 네 사람이 한 조가 되었다.

수업 중간에 조를 만들라고 하자마자 박한수가 곧장 태서를 돌아보았다. 같이 할 거지? 라는 물음에 태서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여기서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박한수의 이미지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박한수 이놈의 새끼가 강인혁을 한번 돌아보고는 자신만만하게 앞으로 나가더니 서다래, 강인혁 그리고 제 이름을 부르고 왔단다. 강인혁을 본 게 그런 거였냐. 서다래한테는 말도 안 건넨 것 같던데 어떻게 끌어들였는지 물어보니 메시지로 연락을 했단다.

그런데 참 웃긴 건 이 상황을 만든 건 박한수인데 강인혁의 언짢음과 서다래의 난처함이 고스란히 제게 쏟아진다는 거였다. 딱 나 하나만 빠졌어도 좋았을 눈치였다.

‘그래, 내가 빠지는 게 낫지.’

태서도 미련하게 그들 사이에 있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나는 빼 줘.”

태서가 직접 교수에게 가서 조를 바꿔 달라고 할 요량으로 일어날 때였다. 박한수가 대뜸 팔을 잡아 오더니 아예 제 얼굴까지 붙여 왔다.

“잠깐만 태서야, 내 말 좀 들어 봐.”

“듣긴 뭘 들어.”

태서는 박한수를 떼어 내려 거칠게 팔을 흔들었다. 애초에 이놈이 같이 하자고 할 때 거절했어야 했다. 이건 엄연히 제 탓도 있던지라 태서는 박한수가 다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정없이 그의 얼굴을 밀어 냈다.

“우리 넷이 해야 조 점수 잘 나올 거란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이거 교양이라 버스 타는 애들도 많을 거고 그렇다고 교수가 열심히 하는 애들 알아봐 주는 것도 아니란 말이야. 과제만 내면 상관없다는 분이야. 이런 상황에서 내가 성적 보장이 되는 너희들을 두고 왜 다른 사람이랑 하겠어.”

“네, 욕심 많은 자기소개 감사합니다.”

태서는 그럼 그렇지, 하는 마음에 박한수를 더욱 세게 밀어 냈다. 지금 자기 편하게 과제하고 점수 잘 받아 가겠다고 이렇게 조를 짰다는 거다. 강인혁과 서다래 사이에 낀 제 불편함 따윈 전혀 생각하지 않은 이기주의에 할 말이 없어졌다.

“이미 다 끝난 거 같은데.”

그런 실랑이를 지켜보던 강인혁이 마땅찮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태서가 급히 주변을 돌아보자 정말로 조를 다 정하고 정리하는 분위기였다. 박한수가 은근슬쩍 태서의 팔을 잡아당겼다.

“일단 앉을까?”

“아니. 다른 사람이랑 바꾸면 되지. 버스 안 탈 애로 데려오면 불만 없지?”

“야, 태서야.”

박한수는 끝까지 굽히지 않는 태서의 고집에 점점 목소리가 작아졌다. 이젠 박한수도 그를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윤태서, 그만 앉지?”

강인혁이 태서를 향해 나직이 경고했다. 대놓고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 그 때문에 저절로 모두가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 특히나 태서는 지금 나보고 앉으라는 건가? 하며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 해 봤다.

“지금 나보고 하는 소리냐?”

“처음부터 네가 조를 만들지 그랬어. 다 만들고 나서 마음에 안 든다고 땡깡 부릴 거라면 집에 가서 해.”

“하…….”

태서가 기막혀 코웃음을 쳤다. 원래라면 더 진저리 치고 싫어해야 할 놈이 누군데…… 태서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누르지 못하고 강인혁에게 쏘아붙였다.

“그래서 너는 가만히 있는 거냐? 나랑 조 하기 싫지 않냐?”

“몇 번 만나서 과제 하는 게 단데 이렇게 난리 치는 게 더 유난스러워.”

강인혁은 줄곧 태서의 태도를 지적하고 나섰다. 덕분에 조를 만든 박한수가 더 안절부절못하고 바라보았다.

“인혁아, 진정해.”

그때 서다래가 강인혁의 팔을 어루만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달래 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강인혁의 날카로웠던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졌다.

아, 진짜 개같아서.

태서가 황당한 눈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둘의 사이가 좋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파티에서 태서가 그대로 서다래에게 약을 먹였다면 둘은 관계까지 가지며 더욱 깊은 사이가 됐을 거다. 알지만 짜증 나는 건 별개였다. 아무리 제가 이 둘 사이에 낀 이물질이래도 이런 취급받는 게 기분 좋을 리가 없었다. 이래서 안 부딪히겠다고 하는 건데.

“내가 죽을죄를 지었다.”

박한수의 중얼거림을 끝으로 태서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기만 조를 바꾸겠다고 그런 건데 다들 상관없으면 말라지. 이젠 제 얼굴이 보기 싫어도 절대 안 비켜 줄 거다.

결국 어정쩡한 공기가 흐르는 와중에 태서가 발로 박한수의 책상을 찼다.

“박한수, 조장이 뭐 해.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

“어? 어어. 일단 우리가 조사부터 해야 하니까 각자 나눠서 자료를 가져올까? 그런데 조사할 걸 조금 겹쳐서 해야 좋을 거 같으니까 두 명씩 나눠서 하자.”

“그래.”

“그리고 시간 될 때 만나서 자료를 다 모아 보자.”

박한수는 이 자리를 파할 수 있도록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태서는 박한수의 말을 대충 흘려들으며 서다래의 손을 보았다. 아직도 강인혁의 팔에 얹어져 있는 게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 번 마음 주면 누구보다 살가운 서다래의 성격상 저런 스킨십이 익숙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누구 보란 듯이 그럴 수 있었다.

만약 누구 보란 듯 그런 거라면 그 상대는 아마 윤태서, 자신이겠고.

‘설마 매번 볼 때마다 이러진 않겠지?’

둘이 지지고 볶는 거야 상관없는데 괜히 나를 아직도 옛날의 윤태서로 알고 그러는 건 너무도 찝찝한 일이었다. 그러다 문득 서다래에 관한 하나의 생각이 들었다.

‘얘는 아직도 내가 강인혁을 좋아하는 줄 알잖아.’

그동안 의도치 않게 그에게 강인혁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못 했다. 더욱이 파티에서 강인혁이 줬다는 샴페인마저 제가 마셨다.

‘그래서 그랬구나.’

어쩐지 강인혁한테 엄청 붙어 있더라.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태서는 조모임이 끝나자마자 곧장 서다래를 불렀다.

“서다래.”

태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을 보고 있는 서다래에게 밖을 눈짓했다.

“나 좀 보자.”

서다래는 강인혁을 한 번 일견하고는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먼저 나가는 태서의 뒤를 따랐다. 강인혁이 서다래를 가지 못하게 잡으려는데 박한수의 행동이 더 빨랐다.

“야야, 잠깐만.”

“이거 놔.”

“태서가 다래한테 할 말 있다잖아.”

“그래서 그냥 놔두라고?”

“그러면 같이 가서 듣게?”

“박한수.”

강인혁은 제 팔을 놓지 않는 박한수를 향해 위협적인 페로몬을 흘려 냈다. 그래 봐야 베타인 박한수가 그 페로몬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강인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왜 이렇게 조를 짰는지 모르겠냐?”

“쓸데없이 일 벌이는 게 네 취미지.”

“너는 사람을 뭐로 보고. 요즘 태서가 예전 같지 않아. 그래서 너도 태서가 달라진 걸 좀 알아줬으면 해서 그랬다.”

만약 이 자리에 태서가 있었다면 곧바로 코웃음 치며 받아쳤을 것이다. 오지랖 부리는 소리 하고 있다고. 그러나 태서가 없으니 강인혁은 박한수에게 불편한 기색만 드러낼 뿐이었다.

“사이좋게 지낼 건 기대도 안 해. 그렇지만 너 태서한테 가시 세우고 달려드는 것 좀 죽이라고 그랬다.”

“지금껏 윤태서가 어떤 짓을 벌였는지 알고도 이래?”

“누가 모른대? 제 마음에 안 든다고 애들 괴롭히던 거 다 알아. 그런데 그게 뭐, 애가 천성이 나빠서 그러냐? 사랑에 눈이 멀어서 그러지.”

태서와 사이좋게 어울려 다녀서 잘 모를 줄 알았던 박한수는 의외로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애초에 눈치 빠른 박한수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게 맞았다. 그게 아니더라고 학교에 은근하게 깔린 소문도 있고 또 서다래만 괴롭힌 게 아니라서 의외로 태서를 배척하는 애들이 많았다.

그러나 박한수는 태서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온전히 그를 미워하지 못했다.

“네가 그러면 그럴수록 태서는 더 다래한테 독해질 거다.”

“그래서 방관할까? 그냥 지켜보면 다 나아져?”

“음…… 내 생각이지만 네가 태서를 건들지만 않으면 달라질 거 같아. 걔 진짜 달라졌다니까.”

박한수가 어떻게든 강인혁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애썼다. 이번 조 모임을 통해 사이가 나아질 수 있다면 강인혁은 서다래와 얼마든지 연애하고 또 태서는 친구가 더 생길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미 태서에게 당한 게 많은 강인혁은 순순히 믿지 않았다.

“차라리 윤태서가 발현했다고 해. 그게 더 신빙성 있으니까.”

그 더러운 성격이 바뀌는 것보다 그의 형질이 바뀌는 게 더 믿을 만하겠다며 강인혁이 박한수의 팔을 뿌리쳤다. 강의실을 나가는 강인혁의 뒷모습을 보던 박한수가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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