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그러다 다들 오해해.
마우스를 클릭하던 태서는 화면에 띄운 강세헌의 얼굴을 보며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연락처를 주고받은 후 강세헌이 대뜸 내뱉은 말은 페로몬을 꽁꽁 감췄다는 소리였다.
당연히 페로몬이라는 걸 인지하고 살던 게 아니라서 허를 찔린 느낌이었다. 강세헌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오메가인데 페로몬을 갈무리하겠다거나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당황한 태서가 아무 말 못 하는 사이 강세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있을 때는 그나마 눈높이가 낮아서 괜찮았는데 그가 일어나자 무시하지 못할 위압감이 느껴졌다. 태서가 그대로 강세헌을 올려다보았다.
강세헌은 특유의 고압적인 눈빛으로 태서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귀엽다는 듯 그의 볼을 검지로 톡톡 건드렸다.
-아직 베타처럼 살고 싶은 모양인데 감춰도 다 티가 나는 법이거든.
태서가 일부러 페로몬을 감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고 말할까 하던 태서가 입술을 삐죽였다. 왠지 자신을 어리게 보는 말투 때문에 말하면 변명처럼 느껴질 거 같았다.
-뭐, 네 선택이니 내가 참견할 건 아니지만.
그렇게 말한 강세헌은 잘해 보라며 머리를 톡톡 건드리고 갔다. 손목에 향수를 뿌린 건지 그의 손이 지나간 머리에 향이 남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강세헌과 헤어지자마자 태서가 한 일이 바로 이거였다.
집에 오자마자 강세헌을 검색해 보기. 대체 그가 누구인지 살펴보기. 그리고 강인혁과 사촌인지 사실 여부 따져 보기.
꽤 많은 자료가 나오자 그것을 침착하게 훑어보던 태서가 돌연 제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이러니까 안 나오지.”
포털사이트에 안 나온다는 게 아니었다. 태서가 말하는 건 소설이었다. 그가 누군지 자세히 알고 나서야 원작에서 강세헌이 스치듯 나온 게 떠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원래 소설에서 메인공이 가장 멋있고 눈에 띄는 법이어야 했다. 그런데 서브공도 아닌 겨우 사촌이 메인공을 누를 만한 스펙을 가지고 있는데 자주 등장하겠냐 이 말이다.
강인혁이 대학교에서 아무리 잘나가고 그의 집안이 굴지의 그룹이라 할지라도 강세헌에 비하면 다 한 끗발씩 부족했다.
강인혁은 아직 사회 활동을 하지 않는 대학생인데 반해 강세헌은 KH그룹의 직계이면서 그 능력 또한 인정받아 주요 계열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국내가 좁다고 해외까지 손을 뻗치며 그가 손을 대는 프로젝트는 소위 대박길만 걸었다.
거기다 외모 역시 강인혁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같은 집안에 형질이 같으니 어느 정도 비슷할 순 있었다. 그러나 아직 나이가 차지 않아 풋풋한 강인혁에 비해 강세헌은 단단한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 체격도 더 컸지?”
강인혁이 180대 후반이라면 강세헌은 190이 넘을 거 같은데? 거기다 나신으로 봤던 그의 뒷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깨가 상당히 넓고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인물을 어떻게 옆에 두겠어. 그냥 지나가는 엑스트라로도 쓰지 못하지.”
원래 소설의 메인공이 최고 잘나야 하는 법이었다. 대신 작중에 한 번 언급된 적 있었다. 강인혁이 도망간 서다래를 찾을 때 도움을 청했던 사촌 형. 그 사촌 형은 갑작스러운 강인혁의 도움에 의아해하다가 결국 한번 도와주게 된다. 그가 아니었다면 강인혁은 공항에 도착한 서다래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나디잘난 남잔데 왜 의심을 안 했을까.”
태서가 답답한지 옷깃을 쭉 당기며 고개를 젖혔다. 그런다고 목이 졸린 듯한 기분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이 나라를 뜰까?”
정녕 그것만이 해결책일까?
***
문이 열리는 소리에 태서가 무심결에 눈동자를 굴리자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강인혁과 박한수가 들어오고 있었다. 태서는 딱히 고개를 돌릴 필요가 없어 계속해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캐주얼하게 입고 다니는 학생들에 비해 와인색의 니트가 그의 깔끔한 외모를 받쳐 주었다. 확실히 눈에 띄는 얼굴이었다.
그러니 대학교에서 강인혁을 모르는 이가 없겠지. 그래 봐야 뭐, 강인혁이 강인혁이지. 나중에 서다래랑 이어지고 서다래만을 사랑할 놈. 태서의 감상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를 보고 제 약혼자가 될 수 있었다거나 새삼 심장이 두근거린다거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몸은 윤태서일지언정 알맹이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거기다 소설의 내용까지 알기에 강인혁에게 전혀 끌리지 않았다. 태서는 굴러가는 돌멩이를 보듯 그를 보았다.
그러다 빈자리를 찾던 강인혁과 눈이 마주쳤다. 강인혁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지는가 싶더니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다. 눈 깜짝하는 순간 벌어진 반응이지만 자신과 눈이 마주친 게 마음에 안 든다는 티를 온전히 감추진 못했다.
그래, 너는 내가 싫겠지.
태서가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파티 이후로 스치듯 한 번 본 게 다였다. 그다음엔 마주한 적이 없으니 제가 달라진 것도 모를 것이다.
“저기로 하자.”
강인혁이 다른 곳으로 향하려는 거 같은데 그것을 막아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눈치 없는 박한수.”
박한수가 강인혁을 끌고 오자 태서가 혀를 찼다. 누가 봐도 제 근처로 오는 게 뻔했다. 거기다 강인혁은 정말 싫은데 그런 티를 대놓고 내지도 못하고 있는 거고.
“여기 앉자. 윤태서, 오늘 일찍 왔네?”
박한수가 태서의 가방이 올려진 자리를 눈으로 가리키며 인사했다. 그러나 태서는 박한수에게 맞인사는커녕 턱을 괴던 손가락을 세워 다른 곳을 가리켰다.
“자리 많아. 다른 데 가라.”
“왜? 같이 앉아서 수업 들으면 좋잖아.”
“응, 난 싫어. 덩치들이 나란히 앉는 거 별로야.”
태서의 눈이 차례대로 박한수와 강인혁에게 닿았다.
“그런 재미로 앉는 거지.”
그러나 넉살 좋은 박한수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는 태서의 가방을 치우고 그 자리에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제 옆에 앉으라고 강인혁을 향해 책상을 두드려 주기까지 했다.
“하아, 답답해.”
덩치들과 어깨 닿아 가며 앉는 게 답답한지 아니면 제 말귀를 못 알아듣는 박한수가 답답한지 모르겠다. 태서는 그냥 박한수를 외면하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어제 부모님은 잘 만나고 왔어?”
박한수는 제 가방을 내려놓는 동시에 팔꿈치로 태서의 팔을 찔렀다. 태서가 그런 걸 왜 물어보냐는 듯 바라보자 박한수가 제 핸드폰을 살살 흔들었다. 어제 연락이 와서 호텔에 가는 중이라고 했더니 그걸 물어보는 건가 보다.
“호텔 간다고 그래서 좋은 거 하러 가는 줄 알았더니 부모님 만났다며. 그러니까 묻잖아.”
“바쁘셔서 얼굴 잠깐 본 게 다야.”
“그래? 널 왜 부르신 거래?”
박한수는 태서의 집안이 어딘지 알고 있었다. 거기다 태서의 형질과 나이, 성격까지 다 꿰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다 오지랖에서 비롯되었지만 어쨌든 태서에게는 굳이 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는 상대인 것이다. 딱 하나, 강인혁과의 사이만 빼고 알았다. 그러니까 태서가 강인혁을 좋아하는 건 알지만 집안끼리 약혼 이야기가 오간 건 모르고 있었다.
“그냥 오래 못 봤다고 부르신 거지.”
“다른 이유로 부른 건 아니고?”
“다른 이유?”
태서가 궁금해서 묻자 박한수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어깨에 팔을 걸쳐 왔다.
“네 미래를 위해 선 자리를 봐주려 하신다거나 그런 거 있잖아.”
“…소개팅도 아니고 선이 뭐야, 선이.”
“어른들은 결혼을 전제로 소개시켜 주잖아. 그러니까 선이 맞잖아.”
“그런 거 아니야.”
하여간 박한수와의 대화는 반이 쓸모없는 내용이었다. 태서가 그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쳐 내다 문득 제게 닿은 시선을 느꼈다.
강인혁이 묘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자기 이름이 언급되기라도 할까 봐 그러나?
태서가 속으로 코웃음 치며 강인혁으로 외면했다가 생각을 바꿨다. 태서는 강인혁을 향한 시선 그대로 박한수에게 말했다.
“나는 말이야. 집에서 정해 준 상대랑 절대 결혼 안 할 거야.”
“어? 왜? 너희 부모님이라면 어지간히 좋은 상대를 물어 오실 텐데?”
박한수가 의아하다는 듯 물어왔다.
“나 이제 조건 안 보거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결혼할 거야. 이제 뭐, 집안이니 어릴 때부터 봐 왔다거나 그런 거 다 별로야.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서로 끌리지도 않는데.”
그거 때문에 강인혁한테 매달렸다가 내 목숨이 왔다 갔다 할 거라면 절대 사절이다. 어차피 지금 쟤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껏 제가, 아니 이 몸이 친 사고만 적당히 마무리되면 완전히 다른 삶을 살 거다.
“하긴 네가 굳이 상대방 집안을 볼 필요도 없지. 그런 의미로 내가 소개팅 주선해 줄까? 안 그래도 너 마음에 든다는 애가 몇 명 있는데. 여기 봐 봐, 무용과 3학년인데 베타야. 네가 베타니까 같은 베타가 낫겠지?”
박한수가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을 들이대며 누군가의 사진을 띄웠다. 태서는 그 사진을 보는 척하며 강인혁의 눈길을 무시했다.
태서가 박한수의 폰을 아예 가져가서 가까이 들여다보는 동안 강인혁의 시선이 태서의 옆얼굴을 훑었다. 평소의 윤태서였다. 이목구비가 반듯한 미남인 윤태서인데 오늘따라 어딘가 다른 것 같았다.
어디가 달라진 건지 살펴보는데 문득 하나가 눈에 띄었다. 원래 입술이 저렇게 붉었던가? 태서의 얼굴을 보는 강인혁은 문득 형용할 수 없는 갈증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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