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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5화 (5/130)

5화

차마 누군지 고개를 들어 확인할 용기가 없었다. 그날 아침, 남자와 헤어지고 지금껏 줄곧 잊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가끔 불쑥 떠오르긴 했었다. 그때마다 해프닝으로 여기고 말겠다며 억지로 털어 냈는데 왜 여기서 만났을까. 태서가 버튼에서 손을 떼며 한걸음 물러났다. 억지로 엘리베이터의 문을 닫지 않겠지만 남자가 타지 않으면 그대로 문이 닫히겠지. 어쨌든 그 역시도 자신을 피하고 싶을 테니까.

[문이 닫힙니다.]

안내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움직였다. 점점 좁아지는 시야를 보며 태서는 남자가 타지 않을 걸 알았다. 이대로 서로 가던 길을 간다면 아마 다음에 우연히 마주쳐도…….

닫히던 문이 다시 열리며 태서의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강세헌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계속 자신을 보고 있었음을 알았다.

강세헌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고는 태서를 조금 더 응시하다가 몸을 돌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서 좁은 공간에 둘만 남았다. 태서는 괜히 멋쩍음에 제 목뒤을 매만지다 문득 강세헌에게서 느껴지는 향에 신경이 닿았다.

청량한 향은 계속 맡다 보면 코로 들어가 가슴에서 머무는 것만 같았다. 향의 이동이 순수하리만치 솔직하게 드러났다.

‘좋네.’

그때도 제법 좋다고 생각했던 향이었다. 그래서 잊을 수 없었다고 여겼는데 오늘도 향으로 남자를 먼저 인식했다. 어떤 향수지? 싶다가 혹시 이게 페로몬은 아닐까 생각해 봤다. 이곳에서는 페로몬 자체도 냄새처럼 인식하고 받아들이니까.

태서가 슬그머니 제 팔을 들어 코를 킁킁거려 봤다. 자신도 오메가라고 했으니 냄새가 나지 않을까 싶어서 그랬다. 생각해 보면 왜 이전엔 제 몸에 나는 페로몬을 맡아 볼 생각을 못 했지.

‘음?’

태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게서는 섬유 유연제 말고 딱히 맡아지는 게 없었다. 그럼 난 오메가가 아닌가? 하지만 그날 분명히 히트가 왔다고…….

“윤태서.”

작지만 벼락같이 꽂힌 목소리에 태서의 몸이 움찔 떨렸다. 엘리베이터에 있는 게 둘뿐이니 강세헌이 자신을 부른 것이다.

“그냥 무시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강세헌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음성이 꽉 막힌 공간에 은은하게 울렸다. 딱히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라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모든 신경이 그에게 향해 있었다.

“찝찝한 게 있어.”

태서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오랜만에 만나서 모른 척 지나가는 건 그럴 수 있다 치자. 그때도 서로 그냥 우연히 엮인 거니까 다음은 없다는 식으로 입 맞추지 않았나. 그런데 찝찝은 뭐야. 꼭 제가 저 남자의 몸에 묻은 때처럼 느껴지게.

태서의 일그러졌던 미간이 펴지며 억지로 지어낸 미소가 자리했다. 웃는 얼굴 그대로 태서가 강세헌을 노려봤다. 어차피 자신을 볼 일 없으니 제가 째려보는 것도 모르겠지.

“저한테 할 말 있으세요?”

“들을 말이 있을 거 같아서.”

“제가 순순히 대답할 거라 생각하시고요?”

어림도 없지. 태서는 앞에 남자의 기분에 자신을 맞추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래야 할 필요도 없었다. 막말로 강인혁이나 서다래처럼 제 목숨이 달린 인물도 아닌데 강세헌이라는 사람까지 신경 쓰기엔 제 사정이 좋진 않았다.

“아, 그래. 맞아. 그랬지.”

태서의 까칠한 반응에 강세헌은 뭔가 떠올랐다는 듯 굴었다.

“네가 착한 애가 아니었지. 내가 그새 잊었네.”

“…지금 저랑 장난해요?”

“내가 하라는 대로 순순히 따를 애가 아니란 뜻이야. 어쨌든…….”

강세헌은 태서의 반박을 귀찮다는 듯 밀어 냈다.

“따라와.”

[문이 열립니다.]

때마침 안내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강세헌이 밖으로 손짓했다. 그에 태서가 층수를 확인했다. 자신이 가려고 하는 건 지하였다. 그러니까 1층에서 내릴 필요가 없었다.

“싫은데요.”

태서는 태연히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고는 어서 내리라고 눈짓했다. 강세헌이 내리면 바로 문을 닫아 버리려고 버튼에 슬그머니 손도 댔다.

그런 태서의 반응을 지켜보던 강세헌이 피식 웃더니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다신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태서가 막 버튼을 누를 때였다.

“어쩔 수 없네. 25살 윤태서를 아는 사람을 찾아다닐 수밖에. 그날 있었던 파티부터 집어 가면 한 명쯤은 걸릴 거야. 그런데 뭐부터 말해야 하지? 갑자기 히트가 왔다는 것부터 꺼내야 하나?”

굳이 당사자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는 듯한 가벼운 어투였지만 결국 태서를 향한 협박이었다. 윤태서는 베타니까 그렇게 말한다 한들 몇 명이나 믿어 주겠냐며 무시하면 좋겠지만.

“…어디로 갈 건데요.”

25살 윤태서이자 아직 제 악행을 전부 지우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태서는 손을 움직여 열림 버튼을 눌렀다.

***

‘내가 아는 인물이면 좀 좋아.’

강세헌을 흘겨보는 태서의 얼굴에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차라리 강인혁이었으면 이렇게 불만이 차오르지도 않았을 거다. 원작의 메인공은 아주 잘 알고 있으니 어떻게 다룰지 떠오르는데 앞의 남자는 그렇지 못했다.

하다못해 중요하지 않은 조연이었어도 몇 번 언급이 되었다면 어떻게 퍼즐을 맞춰 보겠는데 전혀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렇다는 건 지금 강세헌을 대하는 데 있어 제가 알고 있는 정보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의미였다.

그렇다고 무시하자니 남자의 성격이 왜 이렇게 만만치 않은지 자칫 잘못하다가는 그에게 코가 꿰일 지경이었다.

“책임 안 질 거라면서요.”

태서가 불쑥 건넨 말에 핸드폰을 보던 강세헌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니 다음에 봐도 알은척하지 말라면서요. 들러붙지 말라면서요. 그런데 왜 알은척하고 이렇게 커피까지 마셔야 해요?”

태서는 정말 억울하다는 듯 굴었다. 자신을 도와준 게 고마워서라도 강세헌의 말에 따라 줄 법하지만 엄연히 먼저 선을 그은 건 그였다. 괜히 오늘 일로 은혜 갚을 까치처럼 굴지 말라고 그랬다.

“핸드폰 번호 딸 생각도 말라고 하셨죠? 그래 놓고 왜 절 여기에 앉혀요? 저 지금 되게 바빠요.”

“바쁜 일이 뭔데?”

“집에 가서 저녁 먹어야 해요.”

태서의 당돌한 대답에 강세헌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렸다.

“그래, 끼니 잘 챙기는 아이야. 내가 할 말이 뭐였나면…….”

“몇 살 차이 난다고 아까부터 아이니 애니, 늙어서 좋으시겠다.”

“…너 혹시 강인혁 알아?”

“……누구요?”

태서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러나 강세헌이 친절하게 다시 말해 주면서 강인혁이 제대로 박혔다.

“내 사촌인데 강인혁의 친구 중에 윤태서가 있다고 해서. 혹시 너인가 싶어서.”

강인혁. 강세헌. 태서의 머릿속에서 톱니바퀴가 사정없이 돌아가며 인간관계를 맞춰 봤다.

‘나 지금 메인공을 좋아하는 악역수에 빙의해서 어떻게든 피해 보겠다고 발악하다가 그 사촌 형이랑 잔 거야?’

꼬여도 참…… 하필 도움을 받은 인간도 참…….

“…걔가 누군데요?”

태서의 고민은 짧았다. 지금 강인혁과 강세헌이 사촌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강인혁이 누군지 미주알고주알 밝힐 생각은 없었다.

“아니야? 그럼 말고. 내 할 말은 끝났으니 가 봐.”

강세헌이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커피 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태서에게 붙잡아서 미안하다는 듯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가서 밥 먹어야지.”

태서는 생각보다 싱겁게 자리가 파토 나는 것을 느끼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러고는 다시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다가 멈췄다.

‘뭐가 이렇게 꼬인거야.’

태서가 한껏 인상을 찡그리다가 제 이마를 신경질적으로 비볐다. 그러고는 도로 몸을 돌려 강세헌의 앞에 섰다.

“왜? 혹시 나한테 거짓말한 거라도 있어?”

강인혁과 모르는 사이라는 게 거짓이었냐는 물음이었다. 그러나 태서는 고개를 저었다.

“번호 알려 주세요.”

“갑자기?”

“다른 감정 있어서 그런 거 아니고요. 나중에도 25살 윤태서를 알아본다느니 뭐라고 하지 말고 저한테 물어보시라고요.”

“그렇게 말하니까 더 주기 싫어지잖아.”

강세헌이 웃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태서가 그를 흘겨보았다. 정말 몇 살 차이 안 날 거 같은데 처음부터 끝까지 여유로움이 배인 남자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 그의 향도 싫어질 거 같았다.

“그럴 일 절대 없어요. 막말로 오늘도 절 먼저 알은척하신 분이 할 말은 아니고요. 어쨌든 번호 주세요.”

태서는 짜증을 꾹꾹 누르며 그의 핸드폰을 눈으로 가리켰다. 강세헌은 잠시 태서를 올려다보다가 짧은 미소를 보이고는 제 핸드폰을 넘겼다. 태서가 그것을 받아 제 핸드폰 번호를 입력하는 동안 강세헌은 태서를 훑어보았다.

어린 티가 역력한 얼굴이지만 유한 인상은 아니었다. 제 사촌인 강인혁보다는 부드럽지만 윤태서 또한 잘생긴 얼굴이었다. 키도 훤칠하고 제법 어깨도 넓고. 그러나 그날 본 나신의 또 다른 매력은 꽤 감탄을 자아냈다. 밋밋할 것만 같았던 몸 선이 그렇게 예쁠 수 없었다.

거기다 맹랑하긴 하지만 자존심이 약해 보이지도 않았고, 장난은 적당한 장난으로 돌려줄 줄도 알고 무엇보다 눈치가 빠르다.

대화할 때 통통 튀어 오르는 재미까지 있으니 윤태서란 아이가 꽤 괜찮아 보였다. 물론, 거기까지.

“외롭다고 전화하면 혼난다.”

“나이 드셔서 그런가 옆구리 시릴 걱정부터 하시네요.”

태서가 코웃음 치며 받아쳤다.

윤태서에게 핸드폰을 건네받은 강세헌은 문득 이상한 걸 느꼈다. 그날 밤새 품으며 맡았던 향이 사라졌다.

“그런데 너, 페로몬을 꽁꽁 감췄네.”

강세헌의 말에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고 핸드폰을 만지던 태서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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