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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3화 (3/130)

3화

“아, 머리 아파.”

일단 기사가 학교로 데려다주길래 태서는 학교 정문에서 내려 느릿하게 걸어 올라갔다. 당장 수업을 들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지만 뭐, 그거야 길 잃은 미아처럼 학교를 돌아다니다 보면 알게 되겠지.

“어? 윤태서.”

누군가 어깨동무를 하는 통에 태서가 더욱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뭐긴 뭐야. 네 가장 친한 친구인 한수지.”

“아.”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그는 소설에서 태서를 아무 편견 없이 대하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태서가 잘못을 할 때도 유일하게 그게 아니라고 말해 주던 친구다운 친구. 덕분에 태서의 죽음을 처음 발견한 것도 박한수였다.

잘됐다. 그가 어깨동무한 김에 태서가 그에게 몸을 기댔다.

“야야, 무거워.”

“네가 나한테 기대는 것보다 내가 너한테 기대는 게 그림 상 괜찮아.”

“그래?”

박한수는 곧이곧대로 태서의 말을 들으며 그를 부축해 주었다. 덕분에 굳이 힘을 들이지 않고도 슬슬 걸어갈 수 있게 된 태서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 저기 강인혁이다.”

박한수가 태서 들으란 듯 말하며 앞을 가리켰다. 그러나 태서가 박한수에게 기댄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강인혁이라면 미어캣처럼 머리를 빼며 보던 애가 오늘따라 왜 이래?”

“나 머리 아파.”

“어제 술 마셨냐?”

“응.”

태서는 강인혁이 지나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제 이마만 짚어 댔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뭐 하러…… 하긴, 어제 파티 갔었다 했지?”

박한수와 태서가 대화를 하는 사이 지나치던 강인혁이 중간에 걸음을 멈추고는 둘을 돌아보았다. 자신을 붙잡을 줄 알았는데…….

***

KH그룹의 회장이 사는 한옥은 높지는 않아도 거대한 몸체를 가지고 있었다. 고즈넉하지만 절대 소소하지 않았고 조용하지만 상주하는 자는 수십 명이 넘었다.

매달 한 번, 회장의 지시 아래 이루어지는 가족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먼저 도착한 건 강인혁과 그의 부모였다.

강인혁의 모친인 한미순은 가장 먼저 와서 기다리는 제 처지가 불만스러운지 연신 표정이 좋질 못했다.

“늘 이렇게 우리만 와서 기다리네요. 잘나가야 느지막이 올 텐데 언제쯤 이런 대우에서 벗어날지.”

한미순이 신세 한탄을 시작하면서 바로 제 남편을 끌고 들어왔다.

“그러려면 당신이 제대로 된 계열사를 받아야 하는데……. 언제까지 아주버님보다 못한 계열사만 전전할 거예요.”

“크흠.”

강인혁의 부친, 강수학이 불편한 헛기침을 해 보았지만, 한미순은 대놓고 실망한 투로 말했다. 얼마 전 계열사 간 이동이 있었는데 강수학은 식품 쪽을 맡았다. 이 나라에 KH의 이름을 딴 마트가 수백 개나 있다지만 한미순은 만족스러워하질 못했다.

“이번에 회장님께서 왜 그런지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차남인데 어쩜…….”

“그만해.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그 생각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기다려야 되는데요?”

한미순이 눈을 뾰족하게 세웠다.

“내가 지금 당신이 마트 맡은 것 때문에 이래요? 다 인혁이 때문이잖아요.”

자연스럽게 멱살 잡혀 온 인혁은 이제 제 차례라는 걸 깨달은 듯 눈을 내리깔았다.

“당신이 제대로 된 계열사를 맡아야 인혁이에게 좋은 자리가 갈 거잖아요. 이러다가는 세헌이 발끝에도 못 따라가겠어요.”

“그거야 능력에 따라 맞는 자리에 앉으면 되는 것이야.”

“때로는 자리가 능력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고요.”

한미순은 답답한 마음에 찬물을 들이켰다. 한미순이라고 제 남편을 깎아내리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자꾸 주요 계열사를 맡지 못하니 점점 조바심이 나고 있었다.

“이럴 때 차라리 인혁이 네가 약혼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어머니, 여기서 왜 약혼 이야기가 나와요.”

“그렇잖아. 우리가 아주버님보다 나은 계열사를 가져가려면 그 수밖에 없잖아. 너도 알다시피 회장님께선 세헌이만 끼고 도시는데 별 수 있니?”

“당신 말이 심하네.”

“내가 없는 말 했어요?”

한미순은 두 남자를 상대로 조금도 밀리지 않는 말솜씨를 뽐냈다. 그녀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답답한 속을 다 풀어낼 작정인지 쉬지 않고 말을 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 인혁이가 세헌이에 비해서 뭐가 부족해요. 머리 좋아 형질 좋아, 딸리는 게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세헌이가 지금 하는 게 얼만데…….”

강세헌이 그 자리에서 해내는 프로젝트마다 나라가 들썩이는 효과가 나고 있었다. 아무리 제 자식이 아니어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한미순은 코웃음을 쳐 댔다.

“우리 인혁이도 일선에 뛰어들면 그렇게 될 거예요. 막말로 지금 인혁이 경험이 부족한 거야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 거잖아요.”

인혁이 포기한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고슴도치라도 이건 너무 갔어요.”

인혁은 사촌 형인 강세헌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단순히 큰아버지가 KH의 노른자와 같은 계열사를 맡았다고 해서 세헌이 형이 잘하는 게 아니라는 것 역시. 자신이 그 형의 나이가 되었을 때 그만한 결과를 낼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글쎄,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저 다 똑같은 가시인 줄 알고 내 새끼 가시가 제일 뾰족하다고 외치고 있는 꼴이니 참 답답했다.

“네가 지금 할 거는 하나야. 태서 잘 붙잡고 있어. 네가 태서랑 결혼하기만 한다면 세헌이도 널 무시하지 못할 거야. 우리가 전자를 가져가지 못할 이유가 없단 말이야.”

인혁은 제 목을 죄는 또 다른 주제에 억지로 침을 삼켜 봤다. 침이 잘 넘어가지 않고 목구멍 근처를 맴도는 것만 같았다.

“하아, 제힘으로 올라갈게요.”

인혁은 돌고 돌아 제 결혼으로 끝맺어지는 대화에 한숨을 쉬고 말았다. 슬쩍 아버지를 보자 어머니의 잔소리에서 벗어났다고 모른 척 물만 마시고 있었다.

“내 말을 잔소리로만 생각하지 말고 잘 생각해. 내가 태서랑 너 이어 주려고 그 집에 얼마나 들락거린 줄 알아? 거기 이번에 또 해외에 대 부지 사들이고 있단 말이야. 얼마나 으리으리한 호텔을 지으려는 건지 아주 난리가 났어.”

호텔 업계에서 탑이나 다름없는 태서네 집안은 이 나라가 좁다는 듯 해외에 부지런히 호텔을 세우고 있었다.

“그렇다고 거기 사람들이 돈만 밝히면 내가 이런 말도 안 해. 얼마나 바르고 강직한 분들이니. 그 부모 밑에서 태어났으니 태서의 인성도 다 보장되었단 말이야. 나도 가끔 태서를 보지만 얼마나 얌전하고 착하던지.”

인혁은 물잔을 들며 은근슬쩍 시선을 피했다. 인성은 무슨, 태서의 괴롭힘에 눈물 바람인 애들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그런 소문을 제 어머니라고 못 들을 리 없었을 텐데.

“물론 태서가 가끔 예민하게 군다고는 하지만 다 답답해서 그런 거 아니니.”

오메가로 발현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직 베타인 게 답답해서. 고작 그런 이유가 다른 이를 괴롭힐 면죄부가 되지는 못한다.

“어쨌든 넌 태서만 신경 써. 태서가 당장은 베타래도 언제까지 그러겠니. 곧 발현하면 곧장 결혼 준비해.”

“엄마.”

어머니라고 부르던 것도 결국 엄마로 돌아가고 나서야 한미순이 입을 다물었다. 그건 인혁이 버틸 수 없는 한계에 왔다는 증거였다.

“다 널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세헌이보다 잘나가려면 태서를 꼭 잡아야 한다는…….”

한미순이 제 아들을 달래면서도 어떻게든 알겠다는 대답을 듣고 싶어 말을 잇는 순간, 드륵 미닫이문이 열렸다. 인혁을 보고 있었기에 그대로 눈만 올렸던 한미순이 살짝 놀라더니 금세 표정을 바꿨다. 그녀는 언제 강세헌을 걸고넘어졌냐는 듯 세상 다정한 작은 어머니를 흉내 냈다.

“세헌이 왔니?”

“늦었습니다.”

“아, 아니야. 우리도 온 지 얼마 안 됐어.”

강세헌이 안으로 들어오자 인혁이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형 왔어?”

“오랜만이다.”

강세헌은 인혁의 살가운 인사에도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마저도 제 아들이 밀리는 기분인지 한미순이 속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작 인혁은 아무렇지 않은 데 비해.

“이번에 나온 핸드폰 제대로 성공했더라. 외국에서 먼저 출시한 게 신의 한 수던데?”

한국을 기반으로 하는 그룹인데 신제품을 미국에서 먼저 출시했다. 지금껏 나왔던 계열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라인을 런칭하는 것과 동시에 미국에서 제대로 인정받고 난 후 한국에 이어 출시되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강세헌은 단 하나, 한국 땅에서 파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대적인 할인과 다름없는 프로모션을 진행했다. 이미 해외에서 입증된 기기를 그 반값에 가깝게 살 수 있다는 게 국민의 자부심을 제대로 건드렸다.

“나는 그냥 계획서에 사인한 것뿐이야.”

“그게 아닌 거 다 아는데.”

인혁이 강세헌에게 더 말해 달라는 듯 굴었지만 그는 무겁게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어색한 분위기로 흐르면서 한미순은 더욱 태서와 결혼해야 한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한편 강세헌은 들어오기 전에 들었던 작은 어머니와 인혁의 대화를 곱씹었다.

‘태서라…….’

자신도 태서라고 말하던 남자아이를 만났다. 나이도 얼추 인혁이와 비슷해 보이고 만난 장소도 호텔이었다. 그러나 이름이 같다고 해서 같은 인물로 단정 짓기엔 걸리는 게 많았다.

기본적으로 자신이 만난 태서는 작은 어머님이 말한 얌전함과 거리가 있었다. 애가 맹랑했다. 그리고 인혁과 아는 사이라면 그 아이가 자신을 모를 리 없었다. 만약 모른 척했다 할지라도 그걸 자신이 못 알아챌 것도 아니고.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약혼한다고?”

“응? 아, 그냥 엄마가 하는 소리야. 어릴 때부터 친구인데 마음에 드셨나 봐.”

인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굴었지만 강세헌은 제가 원하는 정보만 취합했다.

“베타인가 봐?”

“응. 베타.”

“혹시 최근에 발현하진 않았고?”

“오늘도 만나고 왔는데? 특히나 태서 성격에 발현했으면 바로 말할 애이기도 하고…….”

강세헌은 인혁과의 약혼을 거론하는 상대가 자신이 만난 태서인가 싶었던 가설을 눌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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