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정신을 앗아 가 버리는 열감에 기억이 드문드문 사라졌다. 누군가의 손길에 몸이 일으켜지고 입 안으로 차가운 물이 흘러들어 오는 것 같았는데 끝맛이 쓴 게 약 같기도 했다.
‘진정제를 놨으니…….’
‘이 얼굴로 오메가라니.’
‘그렇게 매달려도……’
‘하…… 왜 안 먹히는 거야.’
귓가에 끊임없이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전화하는 중인가? 아니면 내게 말하고 있는 걸까?
몸이 뜨거워서 더 생각할 수 없었다.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으니 옷이 벗겨지며 차가운 침구가 느껴졌다. 그게 잠시 제 몸의 열을 앗아 가는 거 같았지만 잠깐이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뜨거워진 몸 위로 차가운 무언가가 올라왔을 땐 무작정 그걸 잡은 것 같았다.
도와달라고,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서 말한 거 같았다. 그 한마디 말하는 게 너무도 힘들었다. 그런데 한번 말을 내뱉고 나니 둑이 터진 듯 말이 나왔다. 도와줘, 구해 줘. 제발 나를 봐 줘.
‘너 나중에 후회할 거야.’
후회? 무슨 후회? 지금은 이 뜨거운 몸부터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다. 다리 사이로 들어오는 손길이 잠시 제 갈증을 풀어 줬던 거 같은데 잘 모르겠다.
지금은 제가 소설 속에 들어왔다든가 악역이었다든가 그런 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막 질렀던 거 같다.
책임질 필요 없으니 하라고도 소리 지르고 이리 와서 안으라고도 하고.
‘나중에 책임지라고 하지 마라. 꼬맹아.’
***
잠에서 깨어난 태서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었다. 정신이 들었다는 걸 인지하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제가 지금껏 꿈을 꾼 걸까? 하는 것이었다.
“이상하잖아. 소설 속에 빙의했다는 게…….”
전혀 말이 안 되는 일이고 또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전부 꿈을 꾼 것이다. 세상에 악역에 빙의라니…….
“천장에 왜 구멍이 뚫렸지.”
흐릿하게 보이는 풍경에 태서는 제 눈을 비볐다. 그리고 눈을 깜박이자 아까보다 또렷하게 보였다. 그러니까 천장에 사각형으로 창문이 달린 게.
“선루프야?”
“하늘 좀 보고 정신 차리라고 열어 놨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태서가 벌떡 일어났다. 그제야 화려한 방의 모습은 물론 그보다 더 존재감이 확실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누구…… 아니 그보다 왜, 샤워 가운만 입고 있어요?”
이건 또 무슨 상황인 건지. 태서가 머리를 헝클며 주변을 돌아보다 문득 핸드폰이 보여 무작정 그것을 들었다. 검은색의 매끈한 핸드폰, 그립감이 제 것과 같아 무작정 화면을 켜려고 했다. 아니, 그러려고 한 순간…….
검은 화면에 비친 제 얼굴을 본 태서가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아직 꿈에서 깨어난 게 아닌가?’
어제 본 그 얼굴이 고스란히 비치고 있으니 태서가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하다가 다시 앞의 남자를 보았다.
“그거 내 거니까 내려놔.”
남자는 팔짱을 낀 채로 태서를 고깝게 내려다보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는 방금 태서가 한 말을 곱씹더니 기가 막힌 듯한 헛웃음을 쳤다.
“방금 나한테 누구라고 한 거야 지금? 어제 온갖 진상 짓은 다 해 놓고 전부 잊은 거야?”
“잊어요?”
“내가 누구야.”
“모르는데요.”
“여긴 어딜 거 같아?”
“…호텔?”
“너, 어제 어떻게 정신을 잃었는지 기억나?”
“샴페인을 마시고…….”
일단 아직 본인이 ‘태서’라는 인물이라면 샴페인을 마시고 나서 정신을 잃긴 했다. 정확하게는 그 안의 약이겠지만.
“그러고 보니 나 괜찮네?”
태서가 제 몸을 매만졌다. 어제 정신을 잃기 전만 해도 몸이 뜨겁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지금은 멀쩡했다. 몸은 가벼웠고 얼굴도 약간 달아올라 있긴 하지만 평소보다 조금 온도가 올라간 정도였다.
앉아 있지만 몸이 가볍다 못해 상쾌하기까지 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약…… 먹인 거죠? 뭐 먹은 기억이 나요.”
“그건 잘도 기억하면서 왜 나만 잊었을까?”
남자는 천천히 태서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보통 남자의 체격보다 더 커서인지 남자에게서 위압감이 상당히 느껴졌다. 거기다 짙은 눈썹 때문인지 아니면 날카로운 눈매 때문인지 아무튼 그의 얼굴도 만만치 않은 인상이라 태서가 저도 모르게 침대를 더듬었다.
마음 같아서는 남자가 다가오는 만큼 물러서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다 태서는 문득 이불의 감촉이 남다르단 생각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고 말았다.
‘옷이 다 어디로 갔지?’
왜 홀딱 벗고 있는 건지 도통 생각나는 게 없었다.
“고개 들어.”
남자의 단호한 어투에 태서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목소리에서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이름.”
“태서 …윤태서요.”
“나이.”
“스물… 다섯?”
이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일단 입에 붙는 대로 말해 보았다.
“직업?”
“대학생이요.”
“형질.”
“베타요.”
나이 빼고는 어려운 게 없는 질문들이었다. 그래서 쉽게 쉽게 대답하고 있었는데 돌연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태서의 얼굴을 보고 눈을 내려 이불 안에 숨겨진 몸을 훑었다. 그랬다가 다시 시선을 올리니 태서가 슬쩍 이불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베타라고?”
“네.”
“언제부터?”
“…언제부터요? 어제부터?”
원래 살던 세상에는 알파, 오메가 그런 형질이 없었다. 소설 속으로 들어와 제 형질이 베타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어제부터라고 했지만 남자의 표정은 여전히 불쾌한 듯 찡그려져 있었다.
“너랑 장난칠 기분 아니야.”
“저도 딱히 그럴 기분이 아닌데요. 실은 머리가 복잡해서 혼자 있고 싶어요.”
지금까지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부족했다. 태서가 지지 않고 받아치자 남자의 한쪽 눈썹이 실쭉 올라갔다.
“그래, 잘 생각해 봐라.”
남자는 더 이상 태서에게 할 말이 없다는 듯 돌아섰다. 그러고는 샤워 가운을 벗으며 한쪽에 놓여 있던 옷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태서는 난데없이 제 앞에서 나신을 드러내는 남자를 보고 놀랐다가 그의 잘 다져진 몸을 신기한 듯 들여다보았다. 같은 남자여도 잘 다져진 몸은 돌아보기 마련이니 태서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왜 내가 이름도 모르는 남자의 나신을 보고 있는 걸까 싶은 현타가 들었다.
“저, 죄송한데요.”
“강세헌.”
막 넥타이를 집어 든 강세헌이 태서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가 아니고 강세헌이라고.”
“네, 강세헌 님. 그러니까 어제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 주시면 좋겠는데…….”
태서는 용기 내어 강세헌에게 물었다. 딱히 친절하게 설명해 줄 거 같진 않지만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았을 때 자신을 도와준 게 앞의 남자인 건 분명했다. 그러니 진상 짓이니 뭐니 불만스럽게 굴고 있는 듯했고.
강세헌은 태서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어린 게 맹랑하게 어제의 일을 잊은 척 구는 건지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건지. 어느 정도 감이 잡히자 강세헌이 태서가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침대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강세헌은 여유롭게 넥타이를 손봤다. 옆으로 목을 기울이기도 하고 셔츠의 깃을 매만지던 강세헌이 넥타이에서 손을 떼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너 어제 히트 왔어.”
“…….”
히트라는 게 오메가에게만 온다는 그 발정기를 말하는 걸 텐데 말이 되지 않았다. 태서는 분명히 베타였고 그래서 강인혁과 이어지지 못해서…….
“진정제를 놔줬는데 가라앉지 않더라. 보통 진정제가 듣지 않는 경우가 몇 가지 있지. 억지로 사이클을 일으켰거나 아니면 첫 히트 사이클이 오거나…….”
만약 자신이 진짜 오메가로 발현하면서 히트 사이클이 온 거라면 강세헌의 말대로 진정제가 듣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여전히 다글다글 끓고 있는 너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네가 덥다고 온몸을 사정없이 긁어 대더라. 그래서 옷을 벗겨 줬더니 나한테 안아 달라 매달렸지.”
“제가요?”
“네가요.”
태연하게 내뱉는 강세헌의 대꾸에 태서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앞의 남자를 잘 아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상대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제 우리…….”
“끝까지 들어.”
강세헌이 일방적으로 말을 끊었다.
“너는 어려 보이고 누군지도 모르겠고. 그런데 자꾸 자자고 매달리고. 어떻게든 나를 물고 늘어져서 뭐 좀 얻어 보려는 애인가 싶고…….”
강세헌이 다시 앞을 보면서 말끝을 흐렸다.
“그래서 그냥 여기 버려 두고 나오려고 했는데 네 한마디에 돌아왔지.”
“제가 뭐라고 했는데요?”
“책임질 필요 없으니 빨리 안기나 하라고.”
“누가 누굴 안아요?”
“내가 너를요.”
“나는 남자인데요.”
“그리고 오메가지.”
말장난 같은 물음에도 강세헌은 친절하게 받아치며 태서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덕분에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알 거 같은데 그렇다고 답답한 마음이 속 시원하게 풀어지는 건 아니었다.
“이제 궁금한 건 다 풀렸어? 설마 우리가 잤냐는 질문 따위는 안 하겠지?”
“알아들었어요. 잤다는 거 아니에요.”
태서는 시종일관 빈정거리는 말투에 살짝 토라지듯 말했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아이 같아 강세헌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는 태서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태서가 상체를 뒤로 물리며 그를 경계했다.
“뭐 하는 거예요.”
“열은 내린 거 같고 정신도 돌아온 거 같으니까 다시 말할게. 어쩌다 우리의 형질이 맞아서 내가 네 히트 사이클을 가라앉혀 준 거야. 그것 밖에 없으니까 우리가 잔 걸 가지고 의미 부여하지 말고 나한테 얹을 생각하지도 마.”
강세헌이 웃으며 강조했다.
“나는 핏덩이한테 휘둘리고 싶은 생각 없다.”
무슨 말인지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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