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어느 소설이나 매운 소스가 들어 있기 마련이었다. 그게 잠깐 혀끝을 스쳐 갈 정도로 약하냐 아니면 하루 종일 얼얼하냐의 차이였다. 그런 소스가 있어야 소설의 맛이 사니까 들어가는 건 충분히 알겠다.
어디까지나 내가 그 소스가 되지 않는 한에서야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소스…… 소스.
“왜 하필 악역이야?”
태서가 분한 마음에 두 주먹을 그러쥐었다. 제가 소설 속에 들어온 것도 황당할 지경인데 그냥저냥한 인물도 아닌 악역에 빙의했다.
태서가 끓어오르는 속을 억지로 눌렀다. 지금은 제 신세를 탓할 시간도 없었다. 가뜩이나 태서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원래라면 오늘 그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메인수인 서다래를 방해하고자 파티에 참석한다. 주인공이자 메인공인 강인혁의 파트너로 온 오메가 서다래에게 몰래 약을 먹여 다른 알파와 히트 사이클을 보내게 하려고 말이다.
전부 베타인 태서의 질투에서 비롯된 악행이었다. 어릴 때부터 오메가가 될 줄 알았고 당연히 제 상대는 강인혁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태서는 오메가로 발현하지 않았고 그사이 강인혁의 눈에 서다래가 들어온 것이다.
제 것이라고 생각했던 강인혁을 서다래에게 빼앗긴 기분이 들면서 태서는 소설의 악역으로 똑똑히 자리 잡게 되었다. 거기다 소설의 내용대로라면 태서가 먹인 약으로 인해 히트가 온 서다래를 강인혁이 구해 주면서 둘이 더욱 공고해지는 계기가 된다.
둘 사이를 가깝게 해 줘서 고맙다는 소리라도 들으면 좋겠지만 태서는 약을 탄 것을 들켜서 온갖 시달림을 당한다. 거기다 강인혁이 완전히 서다래에게 빠진 걸 본 태서는 제대로 눈이 돌아가 더 큰 악행을 저지르고…… 악역의 결말답게 주인공을 괴롭힌 대가를 받는다.
그러니까 지금 이 악역의 몸에 빙의한 시점부터가 돌이킬 수 없는 시작이 되겠다.
“약…… 샴페인이 어디 갔지?”
태서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약을 탄 술을 어떻게든 치워 버려야 했다. 어떻게든 치워 놓고 나가면 자신은 더는 악역의 길로 들어서지 않을 수 있었다. 아, 아니. 실은 이전에도 몇 개가 더 있긴 하지만 어쨌든.
바쁘게 주변을 둘러보면서 파티장을 누비던 태서의 시야에 서다래가 잡혔다. 조막만 한 흰 얼굴에 커다란 눈, 동그랗고 귀여운 코에 도톰한 입술과 가느다란 체형. 굳이 네가 서다래냐고 물어보지 않아도 딱 눈에 띄는 외모였다.
같은 대학 동기인 그는 부드러운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인상적인 얼굴이었다. 거기다 결 좋은 갈색의 곱슬 머리카락이 서다래를 사랑스러운 인물로 묘사했었다.
“저런 얼굴이니 강인혁이 관심을 주지.”
그에 비해 태서 자신은…….
태서가 유리창에 비친 제 얼굴을 보았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적당히 그을린 피부, 외꺼풀의 긴 눈매는 심술궂어 보였고 그나마 봐 줄 만한 건 높은 콧대와 단정한 입술이었다. 전체적으로 잘생긴 베타의 얼굴이었다.
조금도 오메가의 느낌이 들지 않는 베타의 모습에다가 심술까지 잔뜩 달고 있으니 서다래와 참으로 비교되는 얼굴이었다. 거기다 170이 간신히 넘는 서다래와 다르게 180에 가까운 키는 절대 누군가에게 안기기 좋은 체형이 아니었다. 뭐, 벗겨 보지 않아 잘 모르지만 이 키만 해도 불호겠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야?’
윤태서라는 인물 자체가 그런 걸 당연히 여기는 탓인지 남자에게 안기는 상상 따위가 어색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는 자연스러운 거니까 오메가가 될 거라 여기고 강인혁에게 안기길 바라는 거겠지.
“아, 지금 이런 생각할 때가 아니지.”
당장 제 생각이 어떻든 그건 나중 일이었다. 태서는 여기서 서다래가 약을 탄 샴페인을 마시지 못하게 치워 버려야 했다.
잔뜩 인파가 많은 사이를 걸어가면서 태서는 서다래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강인혁은 어디 갔는지 그는 혼자서 잔뜩 어색해하고 있었다. 그나마 손에 쥔 샴페인 잔이 유일한 구명줄이라도 되는 듯 꼭 붙잡고 말이다.
‘저거다.’
태서의 눈이 반짝 빛나며 샴페인을 노려보았다. 그와 동시에 서다래가 들고 있던 샴페인을 천천히 제 입으로 가져갔다.
“안 돼!”
태서의 외침에 서다래가 멈칫했다. 그사이 서다래에게 다가간 태서가 그의 손을 감싸듯 샴페인 잔을 잡았다.
“후우.”
마시기 전에 발견해서 다행이다. 태서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심장이 쫄깃쫄깃 다져져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너…….”
자신을 알아본 서다래의 눈이 단숨에 매섭게 변했다. 지금껏 그를 괴롭혔던 일들이 쌓여서 경계심을 띄고 있는 것이다.
“네가 여긴 왜 왔어?”
서다래의 따지듯이 묻는 말에 태서는 당장 기분 나쁘다기보다 안도의 마음이 컸다. 그가 샴페인을 마시기 전에 붙잡았다는 사실에 이제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이 느껴졌다.
“당연히 널 보러 왔지.”
태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하필 파티장에서 악역의 몸에 빙의한 것도 억울하지만 당장 급한 일부터 돌이켜야 한다고 잔뜩 긴장했었다. 튀어나올 듯 뛰는 심장을 침을 삼키며 억지로 누르고 있는데 서다래의 기가 막힌 반응이 돌아왔다.
“왜? 내거는 다 뺏어 가게?”
“네 거? 아…….”
태서는 서다래가 샴페인을 마시지 못하게 잡은 제 손을 보았다. 덕분에 샴페인 잔을 두 사람이 쥐고 있는 거지만 반응은 달랐다.
“이건 인혁이가 나한테 준 거야.”
“어. 알아.”
그 강인혁이 서다래에게 주도록 손을 쓴 게 태서였다. 정확히는 이 몸에 빙의하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고.
“내가 인혁이에게 받는 건 다 싫은 거야?”
“그건 아닌데…… 아닌데 이상하게 목이 마르고 이 샴페인이 탐나네?”
샴페인을 가져가서 버리려고 했다. 히트 사이클을 일으키는 약이니 조용히 처리할 생각인데 서다래가 손에 힘을 주고 놓질 않았다.
“절대 안 줄 거야.”
“아니, 내가 더 좋은 거로 줄게. 샴페인 병으로 줄 테니까 이거는 나한테 줘. 응?”
“너는 다 돈이면 되는 줄, 어쨌든 싫어.”
서다래가 손에 힘을 주며 뺏기지 않으려고 버텼다. 그의 고집에 태서는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약한 잔을 그대로 쥐어서 깨트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제 부모님이 개최한 파티인 데다가 더는 서다래를 괴롭혀서는 안 되었다.
“그러지 말고. 딱 한 번만 나 줘라. 내가 진짜 다 줄게, 응?”
“아직도 내가 돈이면 다 줄 것처럼 생각해? 미안하지만 난 돈에 아무것도 안 팔아.”
“누가 팔래? 아…… 내가 그랬지.”
서다래의 집이 가난하니 그에게 몸이나 팔라고 욕했었다.
“그런데 그건 내가 그런 게 아니라, 아 미치겠네.”
태서가 답답한 마음에 제 가슴을 팡팡 쳐 댔다. 서다래의 집이 가난하다는 것과 그런 주제에 감히 강인혁을 노린다는 말 따위를 왜 했을까 얘는.
“나는 이제 너한테 하나도 빼앗기지 않을 거야.”
서다래는 처음으로 이빨을 드러내며 나름 무섭게 압박했다. 그래 봐야 토끼가 풀 뜯어 먹는 이빨을 들이미는 꼴이지만 어쨌든 무시하면 그 뒤에 버티고 있을 호랑이가 어금니를 드러낼 것이다.
그렇다고 이 샴페인을 마시라고 줄 수도 없고.
이래저래 난처한 상황에 처한 태서는 결국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 의외의 행동에 서다래가 당황한 사이 태서는 샴페인 잔에 입을 대고 그대로 잔을 기울였다.
히트 사이클을 일으키는 약.
‘어차피 난 베타니까 약발 안 받겠지.’
잔을 기울여 다 마신 태서가 굽혔던 다리를 펴며 입가로 흐른 샴페인을 손등으로 훔쳤다.
“너…… 이렇게까지.”
“따로 말해 둘 테니까 내가 샴페인 마신 거로 너무 서운해하지 마. 알았지?”
태서는 그대로 서다래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버릴 기회를 찾지 못해 제 몸속으로 버렸지만 뭐, 증거 인멸도 되니까 나쁜 선택도 아니었다. 빈 잔을 들고 황당한 감정을 감추지 못한 서다래를 뒤로 한 채 태서는 곧장 파티장을 나왔다.
“후우, 좆될 뻔했네.”
아까의 일을 떠올리며 태서가 손부채질로 얼굴의 열을 식혔다. 샴페인을 그대로 서다래가 먹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끔찍한 상상 때문인지 심장이 크게 뛰었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해야 해.”
당장 원래 몸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으면 좋겠는데 그건 이 몸에 빙의한 것만큼이나 막연한 일이었다. 제 의지로 빙의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까.
“당장 앞으로 벌어질 일에만…… 하아.”
샴페인을 마시고 다급히 움직여서 그런지 몸에 계속 열이 올랐다. 심장도 계속 크게 뛰고 있으니 열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태서는 손등으로 턱에 맺힌 땀을 훔쳐 냈다.
“이상하네.”
이제는 좀 진정될 만한데 아직도 심장이 뛰고 열이 올랐다. 거기다 이젠 슬슬 앞이 가물가물해졌다. 샴페인의 도수가 높았나? 술에 취해 버린 걸까.
앞이 빙글빙글 돌아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숨결에도 열기가 느껴지니 조금이라도 바깥으로 빼고 싶은 마음에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열기는 더욱 강해졌고 이제는…….
“이건 또 뭐야.”
신체 한 부분이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태서는 가물가물한 눈에 힘을 줬다. 그래 봐야 앞에 선 남자가 잘 보이진 않았지만.
“여기서 히트 사이클을 일으키다니 간도 크네. 아니면 아무한테나 주워 달라고 하는 건가?”
태서는 머리가 웅웅거려 남자의 말이 띄엄띄엄 들렸다. 제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 되자 태서가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나…… 나 좀, 주워 줘.”
……아니 주워 줘가 아니고 도와줘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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