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도 한여름은 예외가 없어서, 햇볕이 뜨거운 광장을 걷다 보면 목덜미가 따끔거렸다. 그렇다고 옷을 껴입자니 걸음을 옮기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트레비 분수에 동전 대신 나 자신을 던지고 싶던 하루의 끝에 숙소로 돌아온 나는 일정을 전부 뜯어고쳤다. 다행인 건 원래도 일정을 느슨하게 잡아 뒀기에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당장 현재 머무르고 있는 로마도 이 주일 조금 넘게 있기로 했으니 오후에만 돌아다닌다 하면 웬만한 곳들은 다닐 수 있을 거였다.
낮에만 갈 수 있는 곳 외에는 대부분의 일정을 오후 2시 이후로 잡았다. 낮에는 사람이 별로 없는 구석의 카페를 찾아 그림을 그렸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걸 느끼고서야 카메라를 쥐고 거리로 나섰다.
사진은 햇빛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인지라 가끔은 건질 사진이 없겠다는 걱정이 들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좋았다. 도피와도 같은 여행은 지난 삼 개월간 호흡조차 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다닌 마음을 잠깐이나마 쉴 수 있게 했다. 이로빈 생각이 안 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매 순간 나 자신을 깎아 나갈 필요는 없다는 사실은 위로가 됐다. 처음으로 여유로웠고,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됐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숨 쉴 구멍. 난 힘겹게나마 뚫어 놓은 그 구멍 사이로 과거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래, 그러고 보니 이로빈을 만나기 전의 난 늘 이 조금의 공기만으로도 살았다.
여행이 이 주일째로 접어들던 날, 나보나 광장에서 20분가량을 걸어 도착한 모퉁이 카페는 나와 같은 관광객이 없었다. 사람들은 외지에서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을 발견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에게 모든 걸 물어볼 권리가 생긴 것처럼 군다. 비행기에서 내리던 순간부터 시작해서 숙소로 가는 길 내내 질리도록 겪은 일을 생각하자 잘 찾아왔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관광객 대신 주민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인 듯, 주문하는 줄이 꽤 길었다. 앞에 선 편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주문하고, 주문이 아닌 것 같은 말을 한두 마디씩 더하며 웃었다. 언뜻 들어도 영어는 아니었기에 걱정했는데, 막상 내 차례가 돌아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 카운터 안 젊은 남자는 꽤 영어를 잘했다.
그런데도 숨길 수 없는 억센 악센트 사이로 이 골목에서는 흔치 않은 외국인을 배려하는 시원한 미소가 흘렀다. 라테. 내 주문을 한 번 더 확인한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았다. 커피 머신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등을 툭 치며 말을 붙이는 모양이 그들이 친숙한 사이임을 짐작하게 했다.
커피를 가져다줄 테니 앉으라는 손짓이 돌아오고 나는 미리 봐 둔 자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펄럭이는 천이 차양의 역할을 하는 구석의 자리는 운 좋게도 비어 있었다.
난 자리에 앉아 들고 온 노트북을 꺼냈다. 오늘쯤 김재경과 통화를 하기로 했던 게 기억나서였다. 그때쯤 되면 내가 준 용돈을 다 쓰지 않겠냐며 턱도 없는 소리를 하던 김재경이 떠올랐다.
화상 통화가 가능한 앱에 들어가자마자 김재경이 한 시간 전부터 접속하고 있었다는 알림이 떴다. 난 김재경의 이름을 더블 클릭 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여기에 둘까요?]
언제 다가온 건지 모를 남자가 날 바라보며 물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북 앞에 놓인 노트와 필기구 따위를 주워들었다. 동그란 탁자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펜 하나를 치운 것과 동시에 남자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놨다.
고맙다는 말을 하자, 남자가 웃었다.
[맛있게 먹어요.]
카운터로 돌아가는 등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 누구야. 누가 저렇게 달콤하게 작업을 걸어.
화면 속 김재경이 빙글거리며 웃었다. 모니터 앞 탁자에 팔을 올린 모양인지, 한쪽으로만 턱을 괴고 눈을 빛내는 그를 무시하고는 앞의 커피를 들이켰다.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아이스 라테를 시켰던 것 같은데, 앞에 놓인 라테에서는 김이 올라왔다. 하긴, 예전에 로마에서는 아이스커피를 먹기 참 힘들다는 글을 본 것도 같다. 난 별 불만 없이 가져다준 대로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사실 그냥 참고 마실 정도로 커피가 꽤 맛있었다.
- 왜 쓸데없어. 나 제이슨이랑 어떻게 만났는지 기억 안 나?
“형은 형이고.”
- 하여간, 로맨틱하지 못한 새끼.
나름대로 이 주 만에 처음 얼굴을 본 건데 첫마디부터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나 주고받다니. 새삼 김재경이랑 이야기하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그래도 다소 낮은 화질에도 불구하고 김재경의 얼굴이 꽤 좋아 보인다는 건 알겠다. 난 그 얼굴을 빤히 보다 물었다.
“좋아?”
- 뭐. 미국?
“어.”
- 미국이 좋은 게 아니라, 미국에 있는 사람이 좋은 거지.
진짜 가지가지 하네. 찌푸려진 내 얼굴을 확인한 김재경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 제이슨한테 넌 유럽 여행 가느라 미국에 같이 못 온 거라고 했더니 아쉬워하던데.
“안 그래도 연락 왔었어.”
- 헐, 메시지로?
“아니, 메일로. 여행 잘 다녀오라고.”
- …내 애인이지만 새삼 존나 클래식해. 하긴 나 그때 걔한테 한국 메신저 하나 깔게 하려고 소셜 미디어가 삶에 미치는 영향까지 토론했잖아. 진심 대단하지 않냐?
제이슨은 대학교수다. 그것도 갓 부임한.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나온 김재경이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미국행 비행기를 탔을 때였다. 한국에 대한 보고서를 마치고 돌아가던 대학원생 옆자리에 앉았던 게 사소한 계기가 되어 둘은 벌써 이 년째 사귀는 중이었다. 둘 다 자기 커리어를 포기 못 하겠다는 입장이 확실해서, 한때는 김재경조차도 헤어질 것 같다고 울고불고 지랄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도 삼 년 넘게 두 번씩 서로의 나라를 오가며 잘 지내는 게 신기했다.
- 그래도.
“뭐.”
- 클래식 이즈 더 베스트잖아.
가끔 이럴 땐 꼴도 보기 싫지만.
그 후로 김재경의 염장이 한참을 이어지고, 햇빛 때문에 일정을 미뤘다는 말에 잔소리도 듣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해가 서서히 기울었다. 방금 카페 옆 골목을 지나친 남자의 얼굴에 내려앉은 시원한 그늘을 바라보던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세 시. 나가 봐야 할 시간이었다. 오늘은 광장에서 봐 두었던 잡화점에 들르기로 했다. 가방 안의 카메라를 확인한 나는 김재경과의 대화를 슬슬 마무리했다.
어차피 제이슨이 곧 돌아올 예정이라며 얄밉게 손을 흔들던 김재경이 대화창을 끄려는 날 갑자기 불러 세웠다.
- 야, 야. 잠시만. 할 얘기 있었는데 깜빡했다.
“뭐.”
- 너 로빈훗이랑 연락은 했냐?
“…이로빈?”
걔 얘기가 왜 여기서 나와.
- 뭐야. 연락 안 왔어? 이상하다. 그땐 분명….
멈칫한 날 본 김재경이 고개를 갸웃대며 마저 말을 이었다.
- 미국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점검하러 카페 갔었는데, 그때 봤거든. 계절 학기 들은 것 같던데.
“…….”
- 보자마자 네 소식부터 묻길래.
“…….”
- 뭐, 나도 그때는 너랑 연락하진 않았었으니까. 그래서 아직 연락 안 해 봤다 했더니 좀 실망하는 것 같더라.
“…….”
- 야, 말이 나와서 말인데. 걔….
김재경은 할 말이 많아 보였다. 문득 그 이야기를 다 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별일 아닐 건데, 들은 나만 별일처럼 생각할 게 뻔했다.
난 김재경의 입에서 이로빈의 이야기가 더 나오기 전에 말을 가로막았다.
“형.”
- 어?
“나 여기 온 후부터 메시지 확인 하나도 안 하고 있어.”
빙빙 돌아가는 척을 했지만 결국은 직설적인 이야기였다. 일부를 보지 않기 위해 전체를 무시한다는 이야기는 낯설지 않을 것이다. 예상했던 것처럼 김재경이 입을 다물었다. 바로 앞에 있는 것이 아닌데도 마치 그 말 없는 시선의 의미가 읽히는 듯했다.
난 김재경의 시선을 피해 괜히 노트북 앞 패드를 문질렀다.
“연락했겠지, 걔라면.”
- …….
“답장할 거야. 근데 지금은 아니고.”
그 말을 하면서 결국 눈은 옆에 놓인 핸드폰을 훑고 말았다. 아마 걔의 연락이 와 있을 것이다. 첫날부터 확인해 보고 싶었는데, 결국 확인하진 않았다. 한 번 확인하면 두 번 확인하게 될 테고, 나중엔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것 같아서.
알림을 꺼 놓은 앱은 내가 들어가 보지 않는 한 걔의 연락을 띄우지 않을 것이다. 새삼 그 사실에 감사하며 난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제이슨이랑 잘 놀고. 나중에 연락할게.”
- 남한결.
“어.”
- 나도 마음 정리하고 오겠다는 놈한테 이런 얘기 해 봐야 괜한 짓인 거 아는데, 그날 내가 보기엔 걔 얼굴이….
“…….”
- …아니다. 됐다. 말하다 보니 정말 오버한 것 같네.
“아냐.”
- 그래. 오늘 미술관 구경 잘 하고. 또 연락해.
찝찝한 표정을 지운 김재경이 곧 아무렇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 마지막 인사까지 하고서는 대화를 종료했다. 누군가가 사라진 노트북의 화면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난 그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노트북을 챙겼다.
문을 나서기 전 눈이 마주친 카운터의 남자가 눈인사하며 웃었다.
난 그에게만 보일 정도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뗐다. 손에는 핸드폰 대신 카메라를 쥐었다. 잔에 남은 커피 찌꺼기 같은 끈적한 햇빛이 거리 곳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
결국 봐 두었던 잡화점은 가지 못했다. 숙소로 돌아온 난 허탈한 웃음을 삼키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한참 전에 찾아 손에 쥔 핸드폰은 내 손의 온기가 옮아서인지 뜨거웠다.
“…아, 김재경 진짜.”
괜히 김재경을 원망했지만 따지고 보면 김재경을 탓할 문제는 아니었다. 김재경이 아니었대도 여행 중 언젠가 한 번은 마주할 문제였다.
나는 지문 인식이 끝난 핸드폰을 멀거니 내려다봤다. 가끔 시간을 확인하는 용도 외에는 꺼내 보지 않았던 핸드폰이 낯설게 느껴졌다
메신저 앱을 켜자 빨간 숫자들이 사방에서 끼어들었다. 아래위로 엄지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다가, 이로빈의 이름을 찾아냈다.
이로빈의 이름 옆에 마지막 메시지를 보낸 날짜가 적혀 있었다. 7월 8일. 오늘이 7월 10일이니 이틀 전에 메시지를 보냈다는 말이기도 했다.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그래도 대화방을 클릭했다. 슬쩍 봐도 메시지 수가 꽤 됐다. 난 커서를 가장 위로 올렸다.
이로빈: 비행기 탔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