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7)

<-- 소실 --> 

                                                

생일이 1월 1일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 고민해보면, 엄마를 여러모로 고생시켰다는 느낌은 있다. 남들은 다 연말에 들떠 종종걸음으로 찬 거리를 걸으며 불꽃놀이를 즐길 때 엄마는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산통을 겪고 있었을 게 아닌가. 부모를 심하게 괴롭히고 태어나면 팔자가 사나운 걸지도 모른다.

좋게 이야기를 해보자면, 생일은 늘 다시 태어나는 날이었다. 1월 1일의 신선한 공기, 새해의 활력소. 기지개를 피는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물셋의 양이소로 꽉꽉 채웠다. 1년을 버틸 힘을 만들어 놓고 나니 또 생각이 여러 갈래로 흩어졌다.

연말의 기력은 최악이었고 올해는 끔찍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하며 차 안에서 발을 달랑거렸다. 남자는 새벽부터 회사로 나가버렸다. 한참을 기다리다 지겨워 미쳐갈 때쯤 슬그머니 차를 보내 나를 집에 실어줬다. 이렇게 혼자 들여보낼 거면 왜 호텔에서 계속 기다리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남자의 단명을 비는 욕을 비 맞은 중처럼 혼자 떠들어대다 익숙한 전원주택을 보고 차에서 뛰어내렸다. 카드로 집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신발을 벗어 던지고 거실로 달려 들어갔다.

“엄마, 나 왔어.”

오랜만에 볼 엄마의 얼굴에 가슴이 살랑거려 목소리를 높였다. 노인과 고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들지도 않았다. 엄마한테 미역을 넣고 떡국을 해달라고 조른 다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볼 참이었다. 생일 축하한다는 인사를 들으면 금상첨화 일 거고. 그런데 텅 빈 집이 나를 반긴다.

“엄마?”

부엌은 화기의 흔적이 없었다. 미묘하게 청소한 지 시간이 지난 것 같은 부엌과 거실을 살폈다. 엄마 방까지 찾아가 한참 두리번거렸지만, 사람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없었다.

순간 끔찍한 상상에 코트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두 차례나 걸었지만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초조하게 기다리며 엄마의 짐을 뒤졌다. 외투와 가방이 없다. 엄마, 애타게 이름을 부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때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급하게 통화 버튼을 누르고 소리를 질렀다.

“엄마, 어디야?!”

[어머, 놀래라. 갑자기… 너 집이니?]

“집이지. 엄마 어디야?”

[세상에… 엄마 너 늦게 돌아온다고, 친구랑 여행을 가도 된다길래 여행을 왔는데…]

맥이 탁 풀렸다. 그제야 뛰던 심장이 제대로 돌아오고 눈앞에 있는 사물이 구별되기 시작했다.

“친구, 친구랑 같이 있어? 이매 이모? 현숙이 이모?”

[말고, 다른 계중.]

“아… 그래. 어디 갔어?”

[강원도, 엄청 추워.]

“멀리 갔네. 언제와?]

[1월 4일.]

주말까지 꽉 채워 놀고 올 모양인가보다. 들뜬 엄마의 목소리가 괜히 서운했지만 티도 내지 못했다. 오늘 생일인데. 입술을 쭉 내밀고 있으니 엄마가 급하게 말을 걸었다.

[생일 축하해. 엄마가 오랜만에 놀러 나와서 깜박했어. 어쩌지, 미역국 못 끓여줘서 미안해. 선물 사갈게.]

“아니야, 미역국 먹어서 괜찮아. 새해 복 많이 받고.”

[응, 아들 일요일 밤에 봐.]

“그래. 재밌게 놀아요.”

전화를 끊고 나니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내게는 말도 없이 긴 여행을 위해 사라진 엄마와 죽은 듯 조용한 집안을 둘러보며 이를 북북 갈다 저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를 그냥 보내줬을 리는 없다. 집을 비우기 위해 이유를 만들었을 것이다. 전투 의지를 불사르며 노크도 없이 노인의 방문을 왈칵 열어젖혔다. 고모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던 노인이 앉은 채로 나를 노려보았다. 고모가 혀를 차며 첨잔을 했다.

“집에 오자마자 네 엄마는 찾아 전전긍긍하고 우리는 안중에도 없니?”

“누가 헤코지라도 했을까봐 걱정이 돼서요. 죄송합니다.”

“배은망덕한 것, 예의도 배우지 못했나 보구나.”

“할 말 하세요. 할 말 있어서 엄마 내보낸 거 아니에요?”

턱을 치켜들고 쏘아붙이듯 말했다. 고모가 찻잔에 입술을 붙인 채 눈짓으로 나를 불렀다. 방 안에 척척 걸어와 빈 테이블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탁탁 두들기던 노인이 손을 뻗어 내 턱을 잡았다. 주름지고 두꺼운 손바닥 거죽이 얼굴에 달라붙자 소름이 끼쳤다. 얼굴을 확 구기자 노인이 손을 털어냈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구나. 소식은 아주 잘 들었다. 면식도 없는 의사 양반에게 강간이니 어쩌니 운운을 해?”

“……”

다짜고짜 본론이다. 본론인데 노골적이고 지저분한 말이라 구역질이 나왔다. 어깨를 좁히고 숨을 골라냈다. 고모가 옆에서 작게 헛기침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 돈도 싫고, 집도 싫다 마다하며 도도한 척 굴더니 네가 선택한 것이 그 애에게 천박하게 몸을 굴리는 거야?”

“그럼 뭐 어쩌라고요?”

거르지 않고 툭 불경한 말투로 대꾸했다. 한참 나이 어린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것은 처음인지 노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져 있었다. 코웃음을 치면서 뒤집혀 있는 새 컵 하나를 똑바로 두고 물을 콸콸 따랐다.

찬물을 쭉 들이켜는 나를 보고 노인이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눈앞에 보이는 걸 발로 차고 손으로 치는 건 이 집안의 종족 특성인 모양이다.

“어디서 잘했다고 말대꾸야!”

“그럼 제가 잘못했어요, 하고 빌어야 하나요? 댁 귀한 아들 꼬셔서 미안합니다. 하고 짐 싸서 나가야 해요?”

코웃음을 팡 쳤다. 자기들도 누가 잘못을 시작했을지 알면서도 나를 잡고 닦달하는 꼴이 양심에 여전히 찔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병원에 올 정도로 신경을 쓰기에 좀 달라졌을 줄 알았다. 공항에서 사람이 그렇게 무너지는 꼴을 봤으면, 엄마만 보호해달라고 매달리는 광경을 보면 알 줄 알았는데, 기대는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산산이 무너지니 쌓아 올리는 것도 의욕이 없었다.

정확하게는 이제 땅을 파고 후회하고, 과거를 돌이켜보면 어땠을까 괴로워하기도 짜증이 났다. 내가 뭐를 위해서 요 한 달이 넘게 자괴감에 빠졌는지 모를 정도로 세상이 냉랭했다. 이 정도면 한 명은 불쌍해서라도 나를 위로해줄 줄 알았다. 한 명은 나를 동정하고, 측은하게 여겨보면 세상에서 가장 저열한 피해자가 되는 것도 할 만한 투자라 생각했다.

“돈을 주고, 떠나면. 그러면 모든 게 해결될 거 같아요? 그러면 저도 이 집도 자유로워지고 없었던 일이 될 것 같으세요?”

물을 한 잔 더 따라서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볼을 부풀리고 차가운 물을 조금씩 목 안에 넘기다 단숨에 꿀꺽 삼켰다. 식도 안이 얼얼하게 차가워졌다.

“죄송한데요, 가족은 내가 가진 최후의 방어선이었어요.”

“네가 지금 누굴 가르치려…”

“아무 관계도 없는 타인과, 내 아버지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건 전혀 다르니까. 그 사람이 내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어땠을 거 같아요? 그 인간은 정말 내 옷을 억지로 벗기고 강간을 했을 거예요.”

주먹에 힘을 꽉 쥐었다. 남자를 만난 뒤로 했던 수많은 생각이 일제히 정렬해서 나누어진다.

피해자가 원해서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있기는 했던가. 결국 피해자의 사고를 처박는 건 가해자의 순리에 따라 정해진 길인데, 씨발 다 내가 틀렸다고 말한다. 너 또한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왜 그러고 다녔어?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했어? 네 잘못이네. 수군거린다. 양비론에 소름이 끼쳤다. 지금 이런 말을 하며 울지 않는 것은 최근 너무 많이 울었기 때문이다. 나도 내가 미웠다.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

“원하지도 않은 사랑을 뱉고 지랄을 한 건 그쪽인데!”

돈을 원했으면 노인과 고모가 내게 돈을 건네기 전에 남자에게 달라붙어 무엇이든 받아냈을 것이다. 남자가 내게 호의를 보이는 그 순간에 엄마를 더러운 집안의 위치에서 건져 올리기 위해 자존심과 한을 팔아치웠을 것이다.

“가난해서, 힘이 없고 못 배워 먹어서. 아버지도 없는 집 자식이라서, 그래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나요?”

노인이 눈에 띄게 당황하는 얼굴을 했다. 그래, 결국 이 바닥의 심리는 그러했다. 그들이 말하는 예쁜 얼굴을 말고는 봐줄 게 하나도 없는 인간이니까, 전부 내가 밑져 더러운 일을 도모했다고 생각하겠지. 자신들이 키워낸 아들보다 굴러먹던 쥐새끼를 욕을 하고 비난하는 게 속이 시원하고 좋겠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고모와 노인의 얼굴을 쥐어뜯을 것처럼 노려보았다. 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쥐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유리가 와작와작 밟히는 소리로 들렸다.

“내가 교태를 부리고 그 인간을 유혹한 거라고 말을 해봐요. 못하죠? 못하겠죠. 그럴 거예요, 당신들도 생각이 있고 약점이 있으면 그렇겠지. 우리 엄마를 내보낸 집에서 나를 둘러싸고 비난을 하면 쾌감이 느껴집니까?”

고개를 뻣뻣하게 돌리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입술을 힘껏 물고 어떠한 말들을 참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고모가 노인의 손등을 가볍게 잡고 놓았다.

“그만하자, 너 어른에게 무슨 짓이야.”

“그럼 나한테는 왜 이러는데요.”

“네 말은 알겠어.”

“당신들은 나를 비난하고 내보내려 하기 전에 원인부터 먼저 탓해야 했어요.”

한번 물고 늘어지니 끝이 없었다. 둑이 터졌더니 물은 끝이 없이 쏟아졌다. 홍수가 나 내 세상이 전부 잠겨버렸으면 좋겠다. 그러면 분노도 차갑게 식어서 찾으려면 한도 끝도 없이 깊고 깊게 잠수를 할 텐데. 떠오르지 않도록.

눈을 몇 차례 깜박거리며 말린 뒤 방문을 바라보았다.

“그렇죠, 아버지.”

우두커니 선 남자가 내 눈을 노려본다. 정확하게 심장을 도려낸 시체를 보는 표정이었다.

“어머니, 제가 애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요.”

남자가 텅 빈 웃음을 지으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발끝이 티테이블을 툭 건드린다. 찻잔이 위험하게 달그락거렸다.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던 고모가 남자를 말렸다.

“양이태, 경박스럽게 발로 물건 차지 마.”

“누나, 그런 말이 나와? 이런 일이 있으면 재깍재깍 알려주는 센스는 없어?”

“없어.”

“진짜… 내가 이래서 집안일에서 눈과 귀를 못 떼잖아.”

너스레를 떨며 남자가 남은 의자를 빼서 걸터앉았다. 무릎을 세우고 의자 위에 다 큰 남자가 쪼그려 앉는데, 우스꽝스럽기보다는 저질스러운 건달과 비슷했다. 천연덕스럽게 남자가 얼굴을 문지른다.

“다 큰 아들은 1월 1일에도 회사에 처박혀서 일하는데, 어머니는 어린 손자를 들들 볶고 그러면 되나.”

“네가 제일 문제야, 더러운 것.”

노인이 입을 열고 날카로운 폭언을 던졌다. 남자가 헛웃음을 지으며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쓸어 넘겼다. 손을 덮은 검은 가죽 장갑이 불빛에 반들거렸다.

“더럽다니, 어머니. 이 집 사람 중 더럽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고 누가 있는데요?”

남자를 필두로 이 집에는 깊은 정신병이 있었다. 그건 타인인 내가 가장 잘 알았다. 전염되었으니까.

“당신들 때문에 나는 내 아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겠다는 선전 포고를 생생하게 주워들어야 했잖아.”

“양이태, 너 정말 미쳤어?”

“무너트리면 쌓고, 무너트리면 다시 막아버리고. 제기랄, 아무도 도움을 안 줘.”

당연한 일인데 남자는 일단 그의 가족을 비난했다. 등 뒤에 가려져 노인과 고모의 얼굴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내 손을 휙 잡아채 끌고 방을 나왔다. 옅은 크림색 코트를 입은 남자의 등이 꼿꼿한 열기에 어른거려 일그러졌다.

2층 계단을 거의 뛰어넘듯 성큼성큼 타고 올라와 남자의 방에 밀쳐 들어갔다. 휘청거리다 겨우 중심을 잡고 섰더니 남자가 문을 세게 닫고 내 앞에 썼다.

“왜 또 제정신으로 싸우고 있어?”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한 비딱한 문장에 탄식이 터졌다. 남자만큼 나의 무너짐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헛웃음이 나와 팔짱을 퍽 끼고 양아치처럼 짝다리를 짚었다. 남자는 내 자세를 지적하지 않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렸다.

“그냥 나한테 와.”

남자가 애절하게 빈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 심장이 냉랭해졌다.

“이런 일이 없도록 해줄게.”

“이런 일이라는 걸 만든 건 전부 아버지잖아요.”

“어쩔 수 없었잖아.”

“뭐가 어쩔 수 없는데요?”

남자의 언어는 부조리했다.

“내가 혼자 아버지 가족 앞에서 조리돌림 당하는 게?”

“위기의식을 길러주는 거지.”

삐딱하게 대답하는 남자를 보자 헛웃음이 나왔다.

“…대립과 대응이 나았다고 후회했는데, 그것도 아닌 거 같네요.”

말을 할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메마른 상처를 덮고 있던 딱지가 떨어져 내린다. 빳빳하게 굳어 저절로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미처 아물지 못한 보기 흉한 붉은 점이 꼭짓점을 찍고 있었다.

“당신 지금 자기 마음대로 안 될 것 같으니까 대충 지껄이는 거잖아.”

말을 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입술을 비틀어 웃으며 남자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툭 밀쳤다. 남자가 뒤로 밀릴 듯 휘청거리더니 곧게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 정말 저 뻔뻔한 얼굴을 죽여버리고 싶다.

“대단하시네요, 정말.”

“……”

“사람을 발끝까지 무너지게 해놓고 당신에게 오라고?”

개선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남자는 나의 동의를 구하는 척했지만 모든 것에는 남자의 강제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가 부자지간이 아니었으면 내 목을 일찌감치 목을 졸랐을 거라고 가시를 바짝 세워 감아 놓았으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스스로 하게 만들었는데.

“당신 진짜 미친놈이야.”

“조급해.”

“내가 알 바가 아니네요.”

“너 때문에 아무것도 안 돼.”

“그것도 내가 상관할 게 아니에요.”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거지?”

남자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시선이 나를 쫓는 것 같더니 드물게 비껴가 방 안의 아무 구석에 향했다. 그는 사고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만들어둔 장대한 계획과 사고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회상한다.

지적해주고 싶었다. 공항에 나를 홀로 보낼 때, 아프다고 나를 홀로 회사로 보낼 때. 은밀한 공간에 나를 아들이라고 소개하며 데려갔을 때. 그 모든 순간 나 혼자 감당하도록 내버려 두지만 않았어도 반쯤은 성공했을 것이다.

엄밀하게 인간은 신이 아니다. 내 세상을 그물처럼 짠 남자는 이곳에서는 신이었으나, 반쪽이라 신처럼 완전하지는 못하다.

“나는 당신이 만드는 배와 비행기가 아니에요. 조립할 수 없어요.”

그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다. 입술이 달싹거리고 움직일 때마다 상상 속 진한 단 냄새가 느껴졌다. 카펫 위에 아깝게 흘려버린 샴페인이 지금 다시 쏟아져 넘치는 것 같았다.

너는 쓰잖아, 라고 속삭이던 남자의 언어는 낯설게 다가와 형체가 산산이 부서졌다.

“그것도 어렵잖아요. 부품 하나만 없어져도 완성할 수 없는데, 인간의 조립은 얼마나 힘들겠어요.”

“……”

“아버지도 자기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죠?”

“……양이소.”

“나도 이해해요. 가해자한테 왜 그랬느냐고 물어보면 백중 팔구십은 그냥 그랬대요.”

가슴이 찢어진다.

“그냥 심심해서, 나를 사랑하고 심심해서 나를 괴롭히는 주제에.”

가해자에게도 이유를 바라지 않으면서, 왜 피해를 요구하는 사람은 이유를 가져야 하는가.

“나도 그냥 내가 상처받으면 안 되나요?”

남자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크게 한숨을 쉬더니 짤막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눌렀다. 위에서 아래로, 위압감을 주는 행동에 잠깐 숨을 멈췄다.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고 가볍게 문지른다. 남자의 속눈썹이 내 눈 바로 앞에서 팔랑거렸다. 선하고 아름다운 얼굴은 그늘 한 조각 없었다.

“왜?”

부서트리기라도 할 것처럼 내 턱을 세게 쥐고 남자가 가볍게 입을 맞춘다.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입술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뭔데 네 마음대로?”

“봐봐요.”

남자에게 속삭이며 내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남자의 차가운 손가락이 내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목을 조르는 걸 권유하는 것처럼 핏줄이 빳빳하게 선 그의 손등을 두드렸다.

“결국 아버지는 이런 식이잖아요.”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최대한 예쁘게 한 번 웃어주었다. 지긋지긋한 우리의 관계를 위하여.

“소리 지르고 다시 싸울까요?”

“……”

“우리 되게 오래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이젠 방법을 바꿀 때도 되었잖아요.

하얗고 차가운 손가락이 내 뺨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남자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처럼 닮았다.

“그래, 씨발. 다시 원점이라 이거지.”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핥은 남자가 나를 두고 자신의 방을 나섰다. 어디로 가는지,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긴장을 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위장이 쿡쿡 쓰라렸다. 목구멍에서 더운 단내가 났다. 마비가 오는 발목을 꾹꾹 주무르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아직도 모든 권한은 남자에게 있다. 최대한 얌전하고 조용히 이길 자리를 만들어가야겠다. 식은땀이 고였다. 차갑게 식어가는 발가락을 꽉 감싸 쥐었다.사방이 벽에 막혀 있는데도 바람이 부는 벌판처럼 허했다.

아직도 자신이 밉다. 그런데 어제보다는 조금 덜 했다. 다행이었다. 내일은 더 좋아지고, 모레에는 더 좋아져야 한다. 정이소가 안녕을 고했다. 툭, 남은 뼛조각을 입 밖으로 뱉어냈다.

제 입맛대로 안 된다고 깽판을 치는 초등학생처럼 남자가 집을 뛰쳐나간 지 삼 일째. 남자가 없으니 속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오늘 밤이면 엄마도 돌아올 거고, 나는 충분히 안정을 찾을 테였다. 이대로 남자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겠다. 회사도 가지 않고 온종일 내 방에 처박혀서 뒹굴뒹굴하며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시간을 때웠다.

배가 고프면 내려가 라면을 끓여 먹거나 치킨을 시켰다. 하루에 한 번씩 다른 브랜드의 치킨을 받는 나를 보고 노인과 고모가 번갈아가며 기가 찬단 표정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닭 뼈를 발라내 가며 열심히 먹었다. 맛도 안 느껴지는 치킨을 뜯고 있으려니 홀로 한심함이 찾아올 때도 있었지만, 원래 집에 놀 때는 배달음식인 법이다. 치킨무 한 조각까지 남기지 않고 먹어치우니 위경련이 왔던 시기가 언제였나 싶다.

결국, 사흘 동안 살이 2킬로가 쪘다. 진정한 백수의 삶이 인사를 하나 했더니 비서가 찾아왔다. 이유인즉슨 남자가 무단결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보고 대한민국 바닥 어디 처박힌 지 모를 아버지 찾아다니라고요?”

“아니요, 호텔에 계시긴 하는데… 일도 밀리고….”

자기도 민망한지 비서가 눈을 내리깔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한다. 지금 처박혀서 인생 초췌하게 살아야 할 사람이 누구인데.

“그 회사는 아버지 아니면 일 할 사람도 없대요?”

“없긴 합니다.”

코웃음을 팍 쳤다. 비서가 슬그머니 내 후드티를 붙잡고 매달렸다.

“부탁드립니다. 도련님, 연초에 회사가 얼마나 바쁜지 아시지 않습니까.”

“연초에는 안 다녀봐서 몰라요.”

내가 바쁜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인가. 뻔뻔하게 대꾸하자 비서의 얼굴이 점점 새파랗게 질렸다.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사장님이 좀 인간이 덜된 성격이시지만 회사에는 꼭 필요합니다.”

저런 말을 비서가 해도 되는 건가 싶다. 비서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막 지껄인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깨달았다.

“…왜 그 회사는 인간이 아닌 놈을 사장 자리에 앉혔대요.”

“전 회장님 아들이시니까요.”

“그놈의 아들 타령.”

대한민국의 가장 큰 문제가 가족 승계다. 일 잘하고 정신 똑 부러진 놈한테 냅다 기업을 던져주면 될 텐데 아들이라고 멍청하거나 인간 같지 않은 놈에게 일을 시키니 나 같은 피해자가 나오는 거라고.

얼굴을 뚱하게 부풀리고 있자 비서가 점점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내 티를 죽죽 잡아당겼다. 내가 아끼는 짝퉁 아디다스 티가 다 늘어나게 생겼다. 슬슬 손을 털어내자 비서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다 큰 성인 남자의 무게가 바지 밑단에 실리자 트레이닝 바지가 훌렁 벗겨질 지경이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허리춤을 붙들고 버텼다.

“도련님, 제발 가서 말이라도 붙여보세요.”

“싫다니까요! 이것 좀 놔요!”

“물론 사장님이 천하의 형편없는 쓰레기긴 하지만 업무 능력은 쓰레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비서님이 가서 말 시키세요!”

“저는 갔다가 재떨이에 얻어맞았어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질질 끌려 밑으로 내려가는 바지도, 다 늘어난 후드 티도, 제구실을 유지하는 게 하나도 없다. 결국 소리를 빽 질렀다.

“아, 알았어요! 간다고! 가면 되잖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도련님, 오늘도 신수가 훤칠하고 미모가 사람을 잡는군요.”

언제 짜면서 매달렸다는 듯 손을 털고 벌떡 일어난 비서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되먹지 못한 칭찬을 했다. 표정을 꿈틀거리고 있자 비서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건투를 빕니다.”

어디 경치 좋은 지옥에 처박혀 불구덩이의 감촉이라도 느껴보라는 말투였다.

옷만 겨우 갈아입고 허겁지겁 차로 호텔 앞까지 달려갔다. 저번에 가던 호텔과는 또 다르다. 생소한 장소로 들어가는 것은 싫다. 또 다른 추문이 생길 것 같아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고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 번 한숨, 따라 나온 비서가 쥐여주는 카드키를 보고 두 번 다시 한숨을 쉬었다.

용기를 내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모르겠다. 사람 한 명 구한다는 생각으로 억지로 남자를 불렀다.

“아버지.”

조용하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못 들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좀 더 크게 불렀다.

“직무유기 중이신 사장님.”

대꾸도 없다. 한숨을 쉬면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등 뒤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는 커다란 전면창유리가 사무실의 풍경과 비슷했다. 안경을 낀 채 왼손에는 담배를 끼우고 오른손에는 핀셋을 집어 들고 작은 부품을 날개 밑에 끼워 넣는다. 달칵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비행기 몸체 아래에 바퀴가 내려온다. 남자의 뺨에 옅은 홍조가 배어 나왔다.

호텔 방에 처박혀서 뭘 하고 있나 했더니 자기 취미 생활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손가락이 잽싸게 엔진 부분을 조립해 나간다. 이번에 만들고 있는 것은 생각보다 작고 간단한 모양을 한 전투기였다. 꼬리와 몸통에 그려진 빨간 별이 인상적이다.

웅크린 등, 여윈 손가락. 담배를 물고 있는 입술과 충혈된 눈이 고여서 한 대의 비행기를 뚝딱 만들어낸다. 머리에 달라붙은 프로펠러는 바람과 동력이 부족해 멈춰 있었다.

뻐끔뻐끔 입담배를 피던 남자가 손가락으로 비행기 날개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소비에트 야코블레프 야크-3”

전쟁광의 전쟁강의다. 등받이 없는 의자를 빼내 남자의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무릎을 올려 턱을 괸 채 작은 전투기기를 바라보았다.

“세계대전 당시 많은 국가가 피하던 소형 전투기지. 저공비행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어.”

“헤에.”

“도그파이트에 능해서 게릴라전에도 쓸모가 좋았고.”

“도그파이트?”

“공중전.”

“개싸움 아니었어요?”

“무식한 새끼.”

남자가 내 어휘력을 비웃는다. 기분이 상해서 무릎을 모은 채 남자가 만드는 비행기만 빤히 바라보았다. 남자가 전투기를 날려 보낼 것처럼 빙글빙글 프로펠러를 회전시킨다.

“왜 왔어?”

“출근하시라고요.”

“어련히 알아서 안 할까.”

주영이는 걱정이 많아. 남자가 비서의 노력을 뭉개며 고개를 저었다. 안경 너머 남자의 흰자위 위로 올라온 붉은 핏줄을 보며 혀를 찼다. 저 꼴을 보면 남자의 광팬인 비서가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손으로 턱을 받치고 남자가 만든 비행기를 만지작거렸다. 단단해 보이지만 꽤 연약해 보이는 플라스틱이다. 툭툭, 손가락으로 날개를 두들겼다.

“여튼 우리가 하고 있는 거네요. 도그파이트, 개싸움.”

“아닌데.”

“우리가 하는 게 개싸움이 아니면 뭔데요?”

“그걸 나도 모르겠어.”

남자가 핀셋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평범한 정밀 핀셋이었다. 옛날 남자의 손에 들려 아름답게 풍경을 관통하던 유리 핀셋을 생각했다. 티셔츠 주머니에 그대로 들어있는 핀셋을 가끔 꺼내 들어본다. 그러나 내 손가락 사이에 들린 핀셋은 그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종종 서재의 풍경과, 오래된 원목의 냄새가 섞여서 유리 조각이 우아하게 보이던 것은 아닐까 한다. 이질적인 유리는 조금만 힘을 주번 단번에 부서질 것 같았다.

유리와 나는 같다. 조금만 더 강한 힘을 받으면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그게 무서워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아슬아슬, 약점이 드러나고 나의 강도는 도태되었다.

“…잘 안되네”

“……”

남자가 핀셋으로 자신의 손끝을 쿡쿡 찌르며 중얼거린다. 피부 위로 날카로운 금속의 촉이 눌릴 때마다 위험하게 피가 몰렸다.

“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요?”

“응, 네가.”

“제가 성격이 좀 안 좋아요.”

“성격이랑은 달랐지, 결핍된 부분이 많으니까.”

옅은 색소를 가진 눈이 나를 본다. 남자가 말하는 결핍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갑자기 인생 전부가 텅 비어서 지하로 꺼져버린 기분이었다.

“알아요, 좀 많죠.”

손으로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겐 이렇게 넓고, 깊고, 큰 구덩이가 있어요.”

“……”

“뭐든 넣어서 채우고 싶어 했어요.”

슬픈 이야기를 부러 딱딱하게 하며 물기에 젖은 눈동자 밑을 꾹 눌렀다. 갈색 눈동자 한 쪽이 바다빛처럼 아른거린다. 한숨을 입 밖으로 뱉으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니에요. 아버지까진 못 넣는데요.”

“왜?”

“이미 아버지가 쓰레기 같은 것들을 그 안에 꽉 채워 버렸으니까.”

“말도 잘하지, 내 탓이라는 거네.”

“맞아요. 아버지가 정확하게 뭘 바라는진 모르겠지만, 그걸 알고 싶을 정도로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너무하잖아.”

“정말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어.”

첨예한 살인에 대한 충동이 방 안을 맴돌았다. 간격이 날카로워졌다. 남자의 호흡이 조금씩 짧아졌다. 눈 주변과 코끝이 전부 빨갛게 변해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걸 보고 예쁘다고 생각해버렸다. 아아, 외모는 이래서 중요하다. 순간적으로는 이 남자가 개 같은 인성이라는 것을 알아도 약해지고 마니까.

“울지 마세요.”

“싫어.”

“울면 진짜 죽여버리고 싶어요, 당신.”

휴지를 뽑아서 남자의 눈가에 대주었다. 남자가 속눈썹을 나풀거리며 남은 물기를 힘껏 짜낸다. 심장에 있는 피를 모조리 짜내버리고 싶었다. 눈물이 이렇게 형편없다. 정당하지 않아도 나를 보호하기 위해 흐른다. 내가 흘린 눈물 중 태반은 모욕적인 상황에서 분노를 이기지 못하는 눈물이다. 남자는 우위에서 미끄러져 울고 있다. 자존심이 상해서, 단지 그것 때문에 우는 남자를 달래주고 싶지 않았다.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마음이 아프거나 동정이 가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투정을 부리는 남자를 달래줄 마음은 없다. 손이 닿으면 목을 조를 것이다. 입을 맞추면 심장을 찌를 것이다.

아직 그러지 않는 것은 애달픈 남자의 얼굴 어느 한구석이 나와 엄마를 회유하던 친부를 닮았기 때문이다. 내가 혼자… 명절에도 홀로… 냉정하게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꿈에는 종종 친부가 나와 외롭다고 외롭다고 많이도 운다.

이혼 판결을 받고 나서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나를 안아보자고 했던 아버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너 같은 놈은 필요 없다고 욕을 뱉던 아버지. 둘 중 진실은 폭력적인 얼굴임을 안다. 그래도 애달프다, 애틋하다.

타인의 감정에 억지로 공감하려고 하는 나쁜 버릇이 고쳐지지 않는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마음 가는 대로 산다고 아버지도 진짜 힘들겠어요.”

“……”

“나만큼 힘들진 않겠지만.”

나에게 휘둘리는 척 구는 남자를 보면 은근한 감정이 샘솟는다. 그게 싫었고, 힘들었다. 남자의 어깨를 붙들고 일으켰다. 순순히 따라 일어난다. 어린아이처럼 풀이 죽은 얼굴과 젖은 눈동자가 깜박깜박 순한 빛으로 나를 본다.

“집에 가세요. 회사도 가고. 사람 귀찮게 하지 마시고.”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자 비틀린 속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내가 엄마 아들이라는 건 이럴 때 느껴진다. 냉정하고 가혹해져야 할 때 마지막에 내치지 못하고 순한 얼굴에 속아 넘어가는 것. 제 무덤을 파고 또 파는 잔혹한 시대를 스스로 만드는 것.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듯 여윈 뺨을 문지르던 남자가 내게 팔을 뻗었다. 도망가지 않고 순순히 안겼다. 부드럽고 따뜻한 품, 차갑고 해로운 정서.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악마 같은 행동을 천진하게 저지르는 사람이 또 있을까.

남자가 입술을 내 이마에 문질렀다. 젖은 속눈썹을 내 목덜미에 닦았다. 조용히 자존심에 타격일 입고 울던 호수의 표면같은 얼굴을 지워나갔다. 지워졌지만 종이는 얼룩이 남았다.

신이 단단히 실수를 한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남자 같은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을 텐데.

문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비서는 바깥에 나온 우리를 보고 얼굴색이 변해서는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며 일의 기쁨에 대해 떠들었다. 남자는 오늘까지는 쉬겠다고 했으나, 비서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남자가 해야 할 수많은 스케줄을 읊었다. 열 손가락을 다 꼽고 나서도 끝나지 않는 업무에 남자가 결국 항복을 외쳤다.

비서의 손에 이끌려 남자가 회사로 가는 것을 지켜보다 집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엄마는 강원도에서 저녁에 출발한다고 했으니 새벽이나 되어야 올 게 분명했다. 이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외롭겠지. 허전한 감성에 심장을 툭툭 쓰다듬었다.

문 앞에 우뚝 서 있으니 찬 바람이 매섭게 등어리를 내리쳤다. 춥다. 1월이 된 겨울은 신이 나서 바람을 뿜어내고 있었다. 패딩을 입고 있어도 구석구석 타들어오는 한기에 몸을 웅크리다 근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쩐 일이냐.]

무뚝뚝한 목소리는 자다 깬 기색이 강했다. 약속이 없는 모양이었다. 일요일 저녁인데 약속 없이 굴러다닌다니, 이 새끼도 인간관계는 참 협소하기 짝이 없었다.

“연초인데 술이나 한잔하자. 형이 쏠게.”

[돈도 없는 놈이 어쩐 일로?]

“그냥, 요즘 센티멘탈하다.”

[지랄은… 지금 보자고?]

“음, 잠시만.”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7시가 막 지나 있었다. 저녁을 먹는 겸 술을 마시면 될 것 같아서 약속 장소를 불렀다.

“종로에서 보자.”

[종로?]

“응, 사람 많고 좋겠네.”

[사람 많은 게 뭐 좋다고… 알았다. 지금 나간다.]

전화를 끊자 귀와 손가락이 얼얼했다. 기사와 비서가 기록적인 한파라고 웃던 때가 기억났다. 정말로 추위에 약해진 모양이다, 두꺼운 패딩을 입어도 다리와 몸이 덜덜 떨린다. 목도리라도 두르고 나가려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비체가 멀리 있는 거실에서 고개를 반짝 쳐들더니 달려와 끙끙 앓았다. 신발을 벗고 2층 계단으로 올라가는 나를 따라 폴짝거린다. 계단을 오르다가 혹시 구르기라도 할까 봐 바닥에 내려놓았다.

손이 닿자 조용하던 비체는 내려놓으니 다시 계단을 타고 오르려고 바둥거렸다. 내가 병원에서 매섭게 내친 것도 잊었는지 애정을 갈구하며 맑은 눈동자를 반짝거린다. 보고 있자니 또 속이 아플 것 같아 위장이 있는 부분을 벅벅 긁으며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남자의 방에 있는 아무 목도리나 하나 집어 들고 다시 뛰어 내려왔다. 그때까지도 비체는 앞발을 계단 위에 얹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작았던 비체가 많이 컸다. 배에 올리면 묵직할 것 같았다. 그 순수하고 맑은 표정을 이기지 못해 하얗고 예쁜 털 뭉치를 꼭 끌어안았다. 털을 품품 뿜어내는 복슬복슬한 감촉은 그대로였다. 비체가 꼬리를 연신 흔들어 재끼며 혀로 내 뺨을 할짝거리며 핥는다. 우리 예쁜 강아지. 고모가 왜 내 새끼, 하고 부르는지 알 것 같다.

“형아 나갔다 올게.”

알아들었다는 것처럼 왕왕 짖는다.

“기다리고 그러지 마.”

눈을 깜박이는 비체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속닥거렸다.

“가기 싫잖아.”

늘 나가고 싶던 집이지만 비체가 몸을 말고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따뜻하다. 집의 온기를 저렇게 작은 동물이 줄 수 있다니 신기하다. 나는 온기를 줄 수가 없는데. 머리를 톡톡 쓰다듬어주었다. 예전처럼 자주 만져주진 못하겠지만 가끔 쓰다듬는 것 정도는 이 다정한 동물이 허락해주겠지 싶었다.

털을 문질렀던 손바닥을 바지에 쓱쓱 문질러 닦고 골목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술이다, 술. 남자도 무단결근을 하고 거지 같은 전투기나 조립하는데 나라고 무단 외출을 하지 말란 법이 어딨는가. 카드도 용돈도 넉넉하다. 부자인 개새끼를 아버지로 둔 대가는 술을 쏘는 위엄을 가진다는 미묘하고 주정뱅이 같은 장점만 있었다.

소주가 급하다. 알코올로 떡이 돼서는 오늘 남자의 얼굴에서 겹쳐 본 친부의 동정심을 잊고 싶었다. 입김이 확 나온다.

그제야 겨울이다 싶었다.

잰걸음으로 버스를 잡아타고 종로로 몸을 옮겼다.

원래 사람이 많던 거리는 인사동까지 줄을 지어 가며 새해맞이에 한창이었다. 이근영이 목도리를 둘둘 말고 나타나 내 어깨와 등을 두들겼다. 화려한 장식과 북적거리는 고깃집 중 체인점 한 곳을 골라잡아 들어갔다. 언 손을 비벼 녹이며 이근영이 집게를 들었다.

“고기도 사고, 정말 로또라도 됐냐.”

“로또는 무슨.”

“그럼 없는 놈이 발망을 사서 입었냐.”

“그게 뭔데.”

달궈지는 불판 위에서 열기를 쬐던 이근영이 고개를 들고 나를 쏘아본다. 영 마땅찮은 눈길에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이거 봐라, 지가 입고 있는 옷 브랜드도 모르냐?”

“이게 발망이야?”

“…훔친 건가.”

남자가 간간이 사서 던져주는 옷이 무슨 브랜드인지 알 리가 없다. 돈이 많으니 비싼 옷이야 입겠지만, 옷에 태그가 걸려있던 적도 없다.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라쿤털을 떼고 그 자리를 벅벅 긁었다.

“백만 원도 아니고 이, 삼백 하는 점퍼를 입고 나타나면 놀라지, 인마.”

이근영이 무뚝뚝하게 타박을 한다. 어차피 사정 설명하려고 불러내긴 했지만 먼저 지목을 당했더니 머쓱하다. 씩 웃으면서 집게를 받아들고 대신 고기를 구웠다. 삼겹살이 칙 소리를 내며 불판에 달라붙었다. 이근영이 마늘을 불판에 쏟아 넣고 뒤적거렸다.

고기에서 흘러나온 기름에 마늘이 타닥타닥 타는 소리를 낸다. 고기를 뒤집자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살점이 보인다. 이근영이 샐러드를 씹으며 소주를 한잔 먼저 따랐다.

“그 사람이랑 관련 있냐?”

“으응?”

“뭐 나한테 너랑 놀지 말라고 한 사람.”

“아…”

그런 일이 있었지. 그 뒤로 사진에 회의에, 온갖 일이 다 있어서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집게로 삼겹살을 잘랐다. 이근영이 익은 고기를 옆으로 치웠다. 술자리에서는 손발이 척척 맞아서 좋았다.

땀으로 축축한 손바닥을 바지춤에 문지르고 소주잔을 잡았다.

“숨기는 거 있으면 그냥 이야기해라.”

이근영이 편한 이유는 무뚝뚝한 척 사람 속을 잘 달래주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 우리 집 사정을 알았을 때도 이근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나를 대했다. 공평하고 평등한 속을 한 놈이 술에 만취하면 진상짓을 한다는 것도 좋았다. 나한테 부르면 달려 나올 친구라고 해봐야 이근영이 전부였다. 오늘부로 그것도 없어지겠지만.

콧잔등을 꾹꾹 누르며 고기를 하나 집어 먹었다. 부드러운 고무를 씹는 질감이 났다. 이근영은 재촉하지 않았다. 처음 불판에 올린 고기가 없어질 때까지 야무지게 고기를 먹고 소주를 마셨다. 알코올 향이 느껴지지 않으니 소주가 오래간만에 좀 마실만했다.

소주 두 병을 비우고 새로 간 불판 위에 고기를 다시 올렸다. 한쪽 면이 새까맣게 탄 마늘을 버리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생겼어.”

“뭐?”

“그런데 좀, 친부보다 더한 새끼야.”

이근영이 바짝 익은 고기를 툭 떨어트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땅이 꺼질 기세다.

“너희 어머니는 왜 남자 보는 눈이 그렇게 없으시냐.”

그러게 말이다. 웃으면서 소주를 새로 한 병 땄다. 불 가에 있던 소주는 미적지근했다.

“이근영아.”

“뭐냐, 술친구.”

“나를 불쌍하게 여겨라.”

“미쳤냐.”

“나는 진짜 세상 제일 불쌍한 놈이야.”

시답잖은 말에 이근영이 어깨를 떨며 웃었다. 말없이 같이 키득키득 웃으면서 고기 쌈을 하나 싸서 먹었다. 머릿속으로는 기억하는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이상하다. 속이 거북하다. 플라스틱과 비닐봉지를 씹어 삼키는 기분이었다.

“내가 작년 같은 마인드로 세상을 살아서 인생을 말아먹은 거 같아. 그래서 올해부터는 내가 제일 불쌍하다는 마인드로 살아보려고.”

“너 군대 들어갈 때 그런 말하고 갔다가 입대하고 3일 만에 관심병사 됐잖아.”

“개새끼, 너는 5일 만에 찍혔잖아.”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자기소개 시간에 해학적인 종교 드립을 친 이근영과 저는 정말 불쌍한 놈입니다, 하면서 인생 자랑을 했던 나는 똑같이 관심병사로 2년간 부대를 살얼음판으로 만들어놓고 제대를 했다.

생각해보면 둘 다 웃기다. 낄낄 웃으면서 소주를 끝없이 마셨다. 이근영이 나를 말렸지만, 사실 술보다는 물을 마시는 감각이라 취했다는 느낌도 없었다.

“내가 꽤 열심히 살았잖아.”

“그야 그렇지.”

알바 인생 삼매경인 나를 기억하며 이근영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술이 오르긴 했는지 눈앞이 뿌옇게 변해있었다. 더운 목을 손톱으로 벅벅 긁자 이근영이 내 손등을 때렸다.

“이게 이상한 버릇이 생겼네. 그만 긁어라, 보는 내가 다 아프다.”

“어어, 간지러워…”

몸이 근질근질하다. 전부 벗겨내고 싶었다.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의 피부를 계속 긁어대며 고개를 저었다. 어질어질했다. 이근영이 물을 가득 따라 주었다. 한 모금 마시자마자 배가 터질 것 같아 어깨를 떨었다.

“이렇게만 살려고 태어난 건 아닌 거 같아서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그래, 그래.”

“죽고 싶어……”

이근영이 한숨을 푹 쉬면서 물수건을 건넸다. 한 번도 쓰지 않아 돌돌 말려있는 물수건을 펼쳐서 뜨끈뜨끈한 눈가를 푹 덮었다.

“계부 때문에 죽고 싶어.”

“왜 그런 말을 하냐.”

“근영아, 내가 예쁘냐.”

두서없는 말에 근영이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더니 픽 웃는다.

“그래, 까까머리 교복 입고 다닐 때는 별생각을 못 했는데 요즘 너 때깔 좋아진 거 보니까 새삼스럽더라.”

“계부도 나보고 예쁘다던데.”

“까만 거 뒤집어 입고 서 있으니 예뻐 보이긴 하네.”

옷이 문제였을까. 더운 줄도 모르고 등에 땀이 나도록 껴입고 있던 패딩 점퍼를 벗어 옆자리에 올려뒀다. 이근영이 상쾌한 얼굴로 웃었다.

“이야, 안에도 톰 브라운. 계부 씨 굉장히 잘 나가는 모양이네.”

“이것도 비싼 거야?”

“맨투맨 쪼가리치고는 비싼 거지.”

“씨발, 3만 8천 원이라더니.”

언젠가 던져주는 옷 가격을 물어봤더니 코웃음을 치면서 홈쇼핑 가격이라고 말했던 남자의 얼굴이 기억이 났다. 그걸 무식하게 믿으면 안 되는데. 브랜드 입을 일이 없어 관심도 안 두고 있었던 게 문제다. 집게를 손에 든 채 부들부들 떨었더니 이근영이 젓가락으로 불판을 탁탁 내리쳤다.

“고기 탄다.”

“……”

거칠게 삼겹살을 뒤집었다. 이근영이 익은 양파를 잘라 먹으며 혀를 찼다.

“계부가 너 이쁘다던.”

“응.”

“그래서 너한테 옷도 사주고 돈도 주고 그러냐.”

“응.”

“원조교제네.”

단어가 심장을 크게 후벼팠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텁텁하고 묵직한 기름 섞인 공기를 빨아들였다.

“그래, 그거지.”

“어쩌다 우리 이소가 원조교제를 하게 되었을까.”

“내 말이. 그냥 우리 엄마랑 연애를… 해도, 그것도 문제인데.”

중얼거리면서 집게로 눌어붙은 고기를 긁어서 뗐다. 이근영이 반쯤 탄 고기를 제 접시로 가져가 씹었다. 근영이의 눈이 오늘 본 남자의 충혈된 눈처럼 빨갛다.

“왜 나를 좋아한다고 하는지 모르겠어.”

“그래서 죽고 싶냐.”

“응, 이근영.”

“왜.”

“근영아.”

“소름 끼치게 이름만 떡떡 부르지 마.”

“나 있잖아…”

눈앞이 흐릿하다. 이근영이 내 앞에 있던 소주를 들고 가 훌렁 마셔버렸다. 소란스러운 고깃집 안에서 우리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옆 테이블은 비어 있었고, 자리는 구석이다. 나는 거멓게 눌어붙은 불판처럼 더러워진 육체를 생각했다.

“아버지랑 잤어.”

“……”

“아니, 아니지.”

“……”

“아버지가 나를 강간했어.”

강간당했어. 얼이 빠진 채 중얼거리는 내 얼굴 위로 휴지 뭉치를 붙이며 이근영이 혀를 찼다. 눈을 깜박거릴 때마다 선명해졌다가 다시 흐려지길 반복했다. 시야가 구름이 많은 밤하늘 같았다.

“정이소 진짜 인생 박복하네.”

“어, 그렇지.”

“너희 어머니는 모르시냐.”

고개를 저었다. 이근영이 눈을 찌푸렸다.

“우리 엄마 알면 나 자살할 거야.”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진짜야. 엄마가 알면 엄마가 먼저 자살할 테니까 나도 죽어야지.”

“미친놈이.”

끝없이 나를 욕하는 걸쭉한 목소리를 들으며 힘없이 몸을 기댔다. 이근영은 내가 각오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손바닥에 고인 땀을 몇 번이나 수건에 닦아냈다.

“나 더럽지?”

“뭔 소리야, 취했냐.”

이근영이 나를 잡아 일으킨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비싸다는 외투를 다시 걸쳤다. 다 컸는데 부끄럽게 친구의 손을 잡고 쫄랑쫄랑 뒤따라 계산대로 나왔다. 이근영이 내겠다는 걸 기어코 말려 내가 카드를 긁었다. 남자는 부자니까, 고깃집에서 몇 푼 써봐야 재산에 흠집도 가지 않을 것이다.

바람이 차갑다. 고깃집 앞에서 몸을 한참 웅크리고 있자 이근영이 다시 내 팔을 잡아끌었다. 찬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걸었더니 술이 좀 깨는 것도 같았다. 편의점에서 숙취 해소 음료 두 병을 사서 하나씩 마시고 나란히 하수구에 토를 했다. 억지로 게워내지 말라고 그랬는데, 모르겠다. 맛이 없다. 맛이 없는 게 아니라 맛이 없다. 바닥에 남아있는 음료로 입을 헹궈내고 허리를 일으켰다.

“우리 2차 가자.”

“토하고 너는 2차 가고 싶냐.”

“가자, 나 집에 가기 싫어.”

“이 새끼는 불쌍하게 존나…”

“나랑 놀아줘.”

길바닥에서 팔을 붙들고 칭얼칭얼 진상을 부렸더니 이근영이 나를 잡고 바로 근처에 있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이자카야는 다른 가게랑은 달리 조용하고 한산했다. 종업원이 달려와 우리를 훑어보더니 방에 밀어 넣었다. 그래, 술에 취한 놈들은 가둬두는 게 상책이지. 멋진 생각에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신발을 벗고 무릎 걸음으로 방 안에 기어들어 갔다. 바닥이 뜨끈뜨끈했다.

“2인 세트로 주세요.”

“네, 술은 어떤 거로 드릴까요?”

“소주요.”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이근영이 방 안에 앉아 주변을 둘러다 보며 실없는 소리를 했다.

“정이소가 부자가 되니까 이런 곳도 막 들어와 지네.”

“나 정이소 아닌데…”

“응?”

“정이소 아니고 양이소…”

이근영이 아, 하는 짤막한 탄식 소리를 냈다. 죽어버린 정이소를 찾아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얼마 전 다 죽어버린 사람을 찾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배 위에 손을 올리고 숨을 쌕쌕 내쉬었다. 풋콩과 소주 한 병을 가져다주던 알바생은 누워있는 나를 보고는 나가서 컵에 얼음을 가득 담아 갖다 주었다. 괜찮은 친절이었다.

“이름도 바꿨구나.”

“응.”

“거 참, 너도 아버지 복은 유독 없다.”

“그렇지.”

얼음 컵에 물을 가득 채워 마시며 이근영이 풋콩을 하나 깠다. 우물거리며 콩을 씹는 얼굴을 보며 입술을 가만히 다물었다. 사방이 조용했다.

“양이소, 너 안 더러워.”

“진짜?”

“그래. 못된 건 계부라는 새끼 아니냐.”

“어어, 그렇지.”

맞아,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근영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쾅 내리쳤다. 지금 쟤 운다. 멍청하게 눈을 깜박거리다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가까이 바싹 붙어 앉았다.

“너 왜 울어.”

“야 이 씨발, 너 불쌍해서.”

“씨발… 울지 마. 위로는 니가 나한테 해줘야지.”

“이 하나도 멀쩡한 게 없는 새끼.”

이근영이 훌쩍거리면서 하는 말이 다 맞아서 고개를 떨어트렸다. 알바생은 우리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안주를 차려주고는 후다닥 방에서 나가버렸다. 고개를 처박고 어묵탕이 끓는데도 울기만 하는 이근영을 대신해서 다시 소주를 땄다.

“이근영, 문제는 그게 아니야.”

“뭐가 또 남았냐.”

지친 목소리로 내가 주는 술을 받는 이근영을 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가끔은 나도 동정이 가.”

“……”

“나만 동정해야 하는데 그 새끼한테 동정심이 들어.”

“미친놈.”

“어차피 세상은 다 제정신이 아니잖아.”

일부러 탕 안에 들어있는 청양고추를 건져 씹으면서 웃었다. 쓰라리게 매운 걸 먹으니 입안이 얼얼했다. 매운맛은 통각. 유일하게 내가 혀끝으로 느낄 수 있는 맛의 감각.

“친절이 진짜라고 착각할 때가 있어.”

남자가 내게 내보이는 감정이 모두 거짓은 아닐 거라고.

“그럼 막연히 기대를 하게 되는 거야…”

혹시나 원하는 답을 한 번쯤은 해주지 않을까. 나를, 더는 외롭게 만들지 않을까.

“오늘 그걸 딱 느꼈어.”

“……”

“그런 생각을 한 내가 너무 역겨워.”

목을 졸라버리고 싶었어. 그 남자가 나를 강간할 때의 감각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는데, 어떻게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얼음을 하나 입에 물고 씹었다. 까드득, 얼얼한 혓바닥이 차가운 얼음에 천천히 식기 시작했다. 따끔거리던 느낌이 점점 줄었다. 이근영은 반쯤 비운 소주잔을 바라보다 마저 술을 입에 털어 넣고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아… 소주가 쓰네.”

“술이 쓰지.”

당연한 말을 한다고 구박하자 이근영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풋콩을 다시 하나 깠다. 나도 덩달아 하나 까서 입에 넣고 씹었다. 꽤 씹을 만했다.

“야, 너도 술 마셔.”

이근영이 아직 차 있는 내 술잔을 지적한다. 더 마시면 필름 끊길 것 같은데. 망설이다 술잔을 잡아 입에 털어 넣었다.

“좋아, 사나이답다. 다시 한 잔 마셔라.”

또 소주를 채워준다. 박자에 맞추는 것처럼 연속으로 석 잔을 넘기자 정신이 얼떨떨했다. 또 올릴 것 같아 더듬더듬 얼음물을 찾아 들이켰다. 차가운 냉수를 쏟아부었는데도 구역질이 났다. 헛구역질하며 위를 잡고 헐떡거리자 이근영이 물었다.

“취했냐.”

“어? 응.”

“그래, 그럼 누워서 푹 좀 자고 있어라.”

“어?”

내 어깨를 슬슬 밀어 바닥에 눕힌 이근영이 외투를 위에 덮어주었다. 방석을 둘둘 말아 베개까지 만들어준다. 이상한 친절에 눈을 깜박거렸다.

“뜨끈뜨끈하니 좋지?”

“으응.”

“좋아, 형님은 혼자 술 좀 마셔야겠으니 너는 닥치고 자고 있어라.”

“……”

뭔지 모르겠지만 재워준다니 자야겠다. 등이 뜨끈뜨끈하니 일어나기 힘든 졸음이 한 번에 풍선처럼 터졌다. 쾅, 하고 둑이 무너지듯 와르르 돌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어휴, 등신 새끼.”

이근영이 욕을 한다. 너도 등신이라고 같이 욕을 해줘야 하는데 과음을 했는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도 뜨지 못하고 그대로 잠에 빨려 들어갔다.

         

꿈자리가 사납다. 좁은 방 안에 남자의 너른 등이 아른거렸다. 알코올이 묵직하게 올라온 몸이 두 다리와 몸을 꽉꽉 눌렀다. 춥다. 코를 훌쩍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몸 위로 뭔가가 덮였다. 좀 더 따뜻해지자 안락한 온기가 밀려왔다. 부드러운 손가락 끝이 가만가만 등을 토닥거린다. 흐트러지는 시야에 맞은 편에 앉은 근영이가 보였다.

이근영이 묵묵히 술잔을 비워낸다. 테이블 위에 소주병이 가득했다. 나랑 두 병을 마셨는데, 지금은 소주병이 테이블 구석을 빼곡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테이블 깊은 곳을 채워 넣는다. 재떨이에 담뱃재가 툭툭 떨어졌다.

“맹랑하네, 나를 부르고.”

“그럼 힘내라 하고 애를 그 집에 보낼까요?”

근영이가 무뚝뚝하게 말한다. 저렇게 딱딱한 목소리를 내는 놈이 아닌데,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그럼, 네가 뭘 하게?”

“마음같아서는 아저씨 죽여버리고 싶은데요.”

“어린놈이 맹랑하기도 하지. 이소 친구는 다 너 같니?”

“쟨 친구 없어요.”

“……”

이근영이 나를 욕한다. 개새끼야, 나 친구 많아. 따지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웅얼웅얼, 입 밖으로 소리도 나오지 못하고 무겁게 술기운이 나를 질질 수마의 늪으로 잡아끌었다. 해초 줄기가 내 목을 감고 졸랐다.

반쯤 수면에 발을 담근 상황에서도 대화 내용은 똑똑히 들려왔다. 아찔하게 추락하는 정신 속에서 이근영이 화난 말투로 남자를 공격했다.

“아저씨, 애 하나 병신 만들지 마세요.”

“무서워라, 미안하지만 싫어.”

“왜요? 쟤가 그렇게 예쁩니까?”

“그래, 예쁘지.”

갑자기 외모 평가도 한다. 예쁜 놈이 다 죽은 모양이다. 텔레비전만 봐도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이 나와 연기를 하고 춤추고 노래를 부르는데,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흔한 사내새끼인 나를 예쁘다고 하는 놈들은 다 참 신기하다.

군대 가기 전도 아니고 군대도 다녀오고 얼굴에 숯검정 바르고 매복 훈련도 다 받은 상남자인데.

“고3 때 아줌마 애인이 엉덩이 만졌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던 놈입니다.”

이런 씨발. 이근영 이 개새끼.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흑역사를 떠들고 있었다. 아니, 운 건 좀 민망하지만 그럴 만 한 일이었잖아. 되게 상처였던 일이니까 말 하지 마… 중얼중얼, 하는 말 모든 것에 타박하고 싶었는데 여전히 잠은 재갈이 되어 내 혀뿌리를 고정시켰다.

“…그런 일이 있었나.”

“아줌마도 없는 집에 술이 떡이 되 와서는 애 엉덩이를 만졌대요.”

“흐음.”

“걘 엉덩이 좀 만졌다고 밤거리 배회하면서 울던 놈이었어요.”

죽여버릴까. 남자가 중얼거린다. 멋대로 사람 죽이지 마. 눈을 감은 채 놈팡이 같은 생각을 혼자서 말렸다.

“근데 아저씨는 엉덩이 만진 것도 아니고 강간이라면서요.”

“그래.”

“뻔뻔하시네요. 강간범은 다 아저씨 같습니까?”

“아, 내가 성격이 좀 개차반이긴 한데… 이근영 군.”

술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액체를 삼키는 소리도 났다. 그 소리에 맞춰서 나도 숨을 내쉬었다. 두려운 감정이 나를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강간해달라고 말한 건 내 아들이야.”

“……”

“그리고 나는 내 아들을 강간했지.”

“……”

“알고 있나? 내 아들이 뒤로 남자를 받아먹을 때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하는지?”

그런 이야기 하지 마. 남자에게 화를 내고 싶었지만 여전히 혓바닥은 돌을 단 것처럼 무거웠다. 근영이가 슬슬 나를 욕할 거로 생각했다. 사내새끼가 엉덩이 좀 주물러졌다고 울고불고 난리 분탕을 치더니 이제 와서는 다리를 벌리느냐고 화를 낼 거라 믿었다.

우울하겠다. 많이 울고 많이 먹어야지. 그리고 남자가 아끼는 정장 위에 잔뜩 토를 할 것이다. 유치한 복수를 꿈꿨다.

“아저씨 진짜 미친놈이네. 인간 쓰레기새끼.”

그런데 근영이가 내 복수를 말린다.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남자는 살가운 목소리로 자신의 정신병을 긍정했다. 술 따르는 소리가 들린다. 라이터의 부싯돌 부딪치는 소리도 났다. 탁탁거리는 불꽃이 손톱 아래에 들어온 것처럼 화끈거렸다. 검지를 움찔거렸다.

“내가 미친놈이고, 쓰레기라서 네가 뭘 하려고?”

“이소 거기서 구할 겁니다.”

“아하, 구한다고.”

비웃는 목소리에 근영이가 화를 참는 숨소리를 냈다. 당장에라도 고성이 차오르고 비명이 난무할 거 같은 끔찍한 대처에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바닥이 따뜻한데, 공기가 차갑다. 꽁꽁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춥고 쓰리다.

“네가 지금 타인의 인생을 구한다고 표현했나?”

“그럼 안됩니까?”

“스물셋이 된 네게 구할 수 있는 능력과 재주가 무엇이 있는데?”

“그럼 아저씨는 양아들을 건드리는 재주가 있어서 자랑스러우십니까.”

“이봐, 아무 능력도 방법도 없는 와중에 나대는 건 좋은 행동이 아니야.”

“……”

“정혜 씨 빚이 얼마였는지도 모르겠지. 무능력한 정혜 씨 한 테는 어쩌면 평생을 갚아야 할 금액일 수도 있었어.”

부드럽고 온화한 음성이 나와 근영이를 난도질한다. 평범한 육체, 평범한 인생, 평범한 능력과 평범한 집안. 누구는 가질 수 없는 것이라 당연하고 소중하게 아끼던 것이, 불공평한 인간을 만나 자존심이 구겨진다. 상처를 받는다.

올겨울의 추위를 몰랐던 나처럼.

“그래서 돈으로 협박해서 성폭행을 하신다고요?”

“무슨 말이 듣고 싶은데?”

“……”

“내가 상황을 빌미로 아들을 강간했지만, 참회할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개새끼 씨발놈이지만 이대로 살 겁니다. 구제 불능 분리수거도 못 할 쓰레기라 아들을 묶어뒀습니다?”

“씨발 새끼”

“어른한테 욕을 하는 것부터 너는 졌어.”

남자의 언어는 오만하고 지저분했다.

“이소는 기업을 승계받을 거야. 나는 뒤로 물러나, 저 애의 뒷 모습에 숨어 쉴 거고.”

“이소의 의사는요.”

“필요 없어.”

“가축을 기르시죠. 사람 취급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그건 내가 정해.”

“아니요.”

“내가 하게 만들 거야.”

“아니요, 평생 한 번 노력해보세요. 불가능하실 테니까.”

뭐가? 남자가 풍선에서 바람이 새어 나오는 희미한 목소리를 내며 묻는다.

“당신에겐 욕도 아까워. 어른? 어른 같지 않은 행동을 하는 놈이 어디서 어른 행세야.”

“불만 있으면 네가 아빠 하든가.”

“정이소, 정신 똑바로 차려라. 이런 새끼한테 등신 같은 동정 가지지도 마.”

이근영은 남자의 말을 무시한 채 내게 경고를 던졌다. 거칠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심장 한가운데를 정확하게 노렸다. 무거운 눈꺼풀을 제대로 들어 올리고 일어나고 싶어 앓는 소리를 내자 차가운 손가락이 내 뺨에 닿았다.

“깨지 말고, 더 자.”

“……”

“조금 더 이러고 있자. 조금만.”

다정한 목소리… 사납고 다정해 언젠가 소리를 지르는 걸 듣고 싶은 남자의 음성.

방금 전 까지 나에게 그런 모욕을 주었으면서, 근영이와 나의 정신을 뭉게고 비참하게 만들어 놓은 주제에 나를 안는다. 따뜻한 사람인 척 구는 남자의 태도에 나는 좀 더 미쳐버리고 싶었다. 목 안까지 튀어나온 이성이 괴성을 지르며 남자의 목을 조르고 내리쳤다. 죽여버리라고. 당장 일어나 남자의 눈알을 파내라고.

“그래, 착하다. 눈 감고 계속 자.”

허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목소리만 다정한 남자의 손길이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흐트러트린다. 이마와 눈썹 위가 간질간질하다. 눈을 뜨고 싶었는데, 잠이 먼저였다.

“내가 너무해?”

소록소록 밀려오고, 몰려온다. 우울한 수면. 사각지대의 풍랑.

“아들, 일어나 대답해봐.”

아까는 자라고 해놓고, 이제는 일어나라고 말한다. 일어나기 싫어, 무서워. 근영이가 없는 방과 당신과 나만이 남아 있는 곳에서 정신을 차리기 싫어. 애써서 잠을 청했다. 눈물이 찔끔찔끔 고여나오는 것을 보았는지 남자가 말없이 뺨을 쓰다듬는다. 싫다. 만지지 마. 화를 내야 했는데 졸려서 뿌리칠 수가 없었다.

내가 잠들고 남자가 이곳에 찾아오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혀와 뼈를 눌렀던 술기운이 빠질 때도 되지 않았을까. 멍청한 몸에 화가 나자 사고가 마구 헝클어졌다.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도피할까. 유혹적인 수면으로 가는 과정에서 남자가 살금살금 내 손가락을 매만졌다.

“예쁘다.”

하나하나 입을 맞추며 남자가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로 속삭이며 내 뺨을 쓰다듬었다.

이 모습을 보면 뛰어나간 근영이가 엄청나게 후회할 것이다. 더러운 소굴에 나를 내던지고 나와 가슴을 쥐어뜯을지도 모른다. 이근영은 정말 괜찮은 새끼였다. 옷장을 잘 뒤져서 근영이가 입을 만한 사이즈의 비싼 옷을 가져다주면 좋아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오늘 일에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차피 남자가 하는 말들은 전부 가시였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언어만 내뱉는 그 입술에 혹시나 자괴감에 빠지지 않아야 할 텐데.

누구에게도 능력은 없다. 근영이에게는 나를 구해줄 능력은 없었고, 남자는 내게 사랑받을 능력이 없다.

가만가만, 내가 깰까 봐 조심스럽게 쓸어 넘기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이마 위에 입술을 연신 내리누른다.

“예쁘다, 이소야.”

그렇게 내가 예쁘면 다정하게 대해주지. 남자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분노를 넘어선 지는 오래되었기 때문에, 나도 내 감정을 통제할 수 없었다. 손끝을 매만지는 남자의 온도가 오래간만에 뜨거운 것처럼.

기다란 경적에 잠이 깼다. 나는 두 팔을 남자의 어깨 위로 걸친 채 업혀 있었다. 축 늘어진 팔에 힘을 주었다. 지금 당장 남자의 숨통을 졸라버릴 수 있도록.

지금은 몇 시일까. 동이 텄을까. 사람들은 다 잠을 잘까.

“…무겁지 않아요?”

남자의 등은 푸르고 넓었다. 따뜻한 등 위로 뺨을 기댔다. 푸른 새벽 기운이 코끝에 맡아졌다. 괜히, 속이 울렁거렸다.

“별로.”

얼굴을 파묻고 숨을 쉬었다. 속이 불편했지만 찬바람을 쐬는 탓인지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루가 기네요.”

“……”

“이렇게 긴데, 남은 삶은 얼마나 길까요.”

“있잖아, 아들.”

남자가 나를 부른다. 남자의 목을 팔로 꼭 감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나를 한번 고쳐 업은 남자가 새벽 어스름이 짙게 깔린 길을 따라 걸었다.

“우리 엄마가 나를 이 집에 보낼 때 많이 울었거든.”

태정 씨. 나는 아름답고 유쾌한 남자의 친모를 생각했다. 스킨쉽에 거부감이 없는 친근하고 산뜻한 행동, 애정어린 말투.

“나는 울진 않았어. 아버지가 생기고, 누나가 생긴다니 좋았지.”

“……”

“엄마는 늘 바빴고, 늘 혼자 있었으니까.”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자장가 같았다. 두터운 겨울바람을 막아주는 목소리에는 미지근한 열기가 남아 있었다.

걸을 때마다 몸이 흔들린다. 이렇게 들썩거린다면 내가 울어도 모르지 않을까, 비싼 남자의 코트에 눈물 자국 몇 방울쯤 찍어도 녹은 눈이 떨어진 거라고 믿지는 않을까 상상했다.

“외로워서 사람이 옆에 있으면 채워질 거라 믿었거든.”

“……”

“결국 이 집도 나를 아들이라기보단 일을 시키기 위한 인력으로 고용한 거였는데 말이야.”

“아직도…”

남자의 등에 매달려 짐처럼 달그락거리며 물었다. 술에 취한 사람들, 부서진 보도블록. 새벽이라고 과속을 하며 달려가는 차들.

“아직도, 외로워요?”

그런 것들이 당신도 쓸쓸하냐고.

“아니.”

“……”

“사람은 부족한 걸 알면 채우려고 애를 써.”

“……”

“네게 애정이 부족한 것처럼, 나도 내가 부족한 걸 채웠어.”

“신기하네요, 아버지가 그런 정상적인 노력도 하고.”

“비정상이니까.”

남자가 딱딱한 목소리를 냈다. 굳은 음성을 내면 무섭다. 화를 내기 전, 두들겨 맞기 전의 끔찍한 상황이 오버랩된다. 식은땀이 고여 축축한 손바닥을 남자의 코트 위에 문질러 닦았다. 남자가 오그라든 나를 다시 한번 고쳐 업었다.

“무서워하지 마.”

“……”

“잘 해주려고 하고 있잖아.”

“그러면 내게 그러면 안 되잖아요.”

“그게 뭔데?”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 거.”

지난 일 년간 내가 얼마나 망가졌는지는 아느냐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굽어살피기 전에, 여쭈고 물어보기 전에 남자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미안.”

남자의 사과만큼 가벼운 쓰레기는 없다.

“더 망가져.”

“여기서, 더?”

“그래.”

고개를 들고 푸른 점의 끝을 보았다. 관광버스 한 대가 때 이르게 차로를 달린다. 쌩하는 바퀴 소리에 상처가 씹혔다.

“얼마나 더 망가지면 풀어줄건데요?”

“……도망 못 갈 정도로.”

“왜 그래야 하는데요?”

“내 마음이지.”

“내 마음은 없고요?”

“응.”

울고 싶었다. 남자와의 싸움은 끝이 없을 거라는 절망이 눈꺼풀을 따끔따끔하게 눌렀다.

“네가 나가서 별 시답잖은 새끼랑 술 처먹는 걸 보니 딱 짜증이 나.”

“근영이는 내 하나뿐인 친구인데.”

“원래 우정이 시답잖고 대단해서 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서 더 꼴불견이야.”

“와…아버지 왕따죠?”

“아니.”

믿을 수 없는 남자의 주장을 뒷길로 넘기고 어깨를 두들겼다. 몇 걸음 더 걷던 남자는 말 없는 보챔을 들었는지 나를 내려주었다. 두 다리를 딛고 섰는데 어지러웠다. 파동이 아찔한 소음 같아 휘청거리자 남자가 팔을 잡았다.

붙들린 채로, 딱 한 걸음이 떨어진 채로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아주 멋있게 한 대 쳐주려고 했는데 어지러워서 빗겨 치고 말았다. 엇나가 손가락뼈가 욱신거렸다. 오른손을 감싸 쥐고 헛웃음을 짓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나는 망가지기 싫어요.”

“……”

“어떤 인간이 망가지는 걸 원해요?”

남자는 단숨에 한 걸음을 좁히고 들어와 내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왈칵 집어넣었다. 긴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 사이를 스며들어와 두피까지 찢어버릴 것처럼 꽉 잡아 오면 소름이 끼쳤다. 나를 갈라놓을 것 같다. 이 머리 아래 혈관 가득 명령어를 심고 기계로 만들어버릴까 가끔은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저 남자를 도로 중앙에 밀어 터트리고 싶었다. 남자가 잠깐 붉은 빛이 든 하늘 한쪽을 넘겨보았다.

“너를 죽일까.”

“죽여요.”

“…아, 진짜 사람 딱 환장하게 만들어.”

“……”

“내가 왜 이럴까.”

남자가 내 머리를 끌어 품에 안았다. 가슴이 뛰는 게 들린다. 혈관을 헤엄치는 피의 속력이 보이는 것 같았다. 예측도 측정도 하지 못한다.

“사랑해.”

“……”

“사랑한다.”

언어가 육체를 도축한다. 단도는 날카롭다. 날카롭게 벼려낸 칼끝이 내 가슴을 가르고 갈비뼈가 있는 곳을 헤집었다. 장기가 드러나면 아직 뜨거울 것이다. 피가 식지 않고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럼 위와 간과 폐와 심장을 볼 것이다. 독소에 부푼 장기들이 일제히 썩고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그것은 나일 리가 없다. 남자의 것이다.

“사랑한다고요?”

“그래.”

“누굴?”

“너를.”

“하하, 아버지 대단히 미치셨나 보네.”

내 뒷머리를 단단히 붙든 남자의 얼굴이 코앞이다. 길 위에서 서슴없이 남자의 뺨을 잡았다. 이번에도 누군가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러운 사생활을 캐내고 사진을 찍기 위해 하이에나처럼 군락을 이루고 렌즈를 들이대고 있다면, 나는 또 홀로 더러운 욕과 상황을 받아내야겠지.

“내가 그랬잖아요, 강간범이 사랑 따위를 떠들면 안 된다고.”

“그래, 그랬지.”남자가 덤덤하게 내 말을 긍정한다. 남자는 아주 약간만 입술을 열어 말했다. 인형이 노래하는 것처럼 조그맣고 가여웠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내가 아버지를 덩달아 사랑해 줄 것 같아요?”

“아니.”

이번에도 남자는 제대로 대답을 했다. 일자로 다물린 입술 안 구강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했다. 조금 망설였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정신이 아주 조금은 박혀있는 모양이네.”

칭찬 같은 욕설을 날렸다. 남자가 미세하게 입술을 움직여 웃은 남자가 내 머리를 잡은 손을 꾹 눌렀다. 마치 자신의 성기를 잡아 삼키라 권유할 때처럼. 점잖은 듯 무례한 손바닥이 내 얼굴을 그에게 바짝 붙였다.

“그렇다고, 내가 너를 괴롭히지 못할 것도 없지.”

“……”

“너를…안지 않을 이유도 없지.”

뜨거운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와 축축한 점막을 훑었다. 타인의 구강구조를 섬세하게 훑을 일이 흔할 리가 없다. 뜨겁다는 것은 알았다. 술을 마셨으니 알코올 냄새가 나지 않을까 하는 미적지근한 추측도 함께 했다. 남자는 가볍게 입안의 여린 살점을 핥았다. 부드러웠다. 모든 이의 약점은 이렇게 연한 살점으로 되어있을까.

내 머리카락을 쥔 남자의 손이 억세졌다. 머리카락을 확 잡아당기는 바람에 목이 뒤로 꺾이며 떨어져 나왔다. 두피가 후끈거렸다. 아파서 눈물이 핑 돌아 있는데 남자가 이를 드러내고 바짝 다가와 입술을 물어뜯었다. 입술이 단번에 축축해졌다. 피가 입술 전체를 적시기 시작했다는 게 느껴졌다. 남자가 바짝 붙어 내 입술을 핥아댔다. 전부 먹어 치울 것처럼 가득 입에 머금고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입 안을 열정적으로 파고들었다.

하아, 숨이 막혀 코로 겨우겨우 숨을 쉬었다. 헤드라이트를 켠 택시가 지나간다. 운전 중인 기사가 눈이 휘둥그렇게 변하는 걸 보았다. 남자는 내게서 모든 것을 빨아내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타액을 먹어치웠다. 세게 빨리는 혀뿌리가 얼얼했다. 뜨겁고 끈적거렸다. 혀와 혀가 맞닿고 비벼질 때마다 쾌감으로 신경 한구석이 흐물흐물해졌다. 남자의 성기가 부풀어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뜨겁고 딱딱한 성기의 살점. 지나치게 높은 체온.

입술을 마음대로 찢어버린 남자가 윗입술 중앙을 잘근잘근 물다가 떨어져 나왔다. 숨을 몰아쉬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이 초저녁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충혈된 눈동자도 그대로였다.

내 눈을 쏘아보던 남자가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두리번거리던 시선이 간판에 닿았다. 그쪽으로 따라 눈을 두었다. 호텔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모텔이었다.

남자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덜그럭거리는 보도블록을 디디고 휘청거리며 남자의 악력에 질질 끌려 그 안으로 들어갔다. 싫어. 미약한 반항은 침묵과 함께 묵살되었다.

“숙박. 두 명.”

모텔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남자와 나를 의심스럽게 보더니 손으로 전화하는 시늉을 했다.

“거 뭐 연락처라도 알려드리리?”

“필요 없습니다.”

“이상한 곳 부르지 말고 우리 아는 곳으로 하지.”

“아저씨.”

남자가 위험한 목소리로 주인을 불렀다. 아저씨가 남자의 목소리에 서린 짜증을 읽었는지 카드를 받아 긁으면서 눈치를 봤다.

“나는 얘한테 박고 쌀 거니까 신경 꺼.”

다짜고짜 모텔 아저씨에게 커밍아웃이라니 경악스러웠다. 남자는 모텔주인의 입이 쩍 벌어지든 말든 카드와 열쇠를 뺏어 들고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5층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의 숫자에 손을 떨었다.

“지금 들어가면 너한테 키스할 거야.”

남자가 CCTV를 흘끗 올려다보며 앞으로 생길 일을 예고했다.

“네 바지를 벗기고 그 안에 오일을 잔뜩 짜줄…없겠군.”

갑자기 들어온 모텔이니 윤활유가 있을 리가 없다. 오싹한 기색에 고개를 들고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흥분에 겨운 얼굴로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걱정 마, 찢어버리진 않을게. 제대로 풀어서, 정액을 싸질러서라도 그 구멍을 헐렁하게 만들고 넣어줄게.”

“…닥치세요.”

끔찍한 음담패설에 얼굴을 찡그리며 남자의 어깨를 밀어냈다. 꼿꼿하게 결백한 얼굴로 남자가 등을 돌려 문을 열었다. 흰 침구가 중앙에서 빛을 내는 방 안은 온도도 불빛도 침침했다.

“차가운 게 좋겠지, 곧 더워질 테니까.”

“놔요.”

옷을 벗겨내는 손길을 막으며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우리는 가족이에요.”

“그래서?”

도덕적 결점이라곤 없어 보이는 아름다운 얼굴로 남자는 눈을 접어 웃었다. 신을 믿는 사제 같았다.

“아들이라고 불러주길 바라?”

“……”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아도 너는 내 밑에서 다리를 벌려야 해. 그러길 네가 선택했잖아. 저번에도, 오늘도.”

“어째서?”

“너를 사랑하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네 의사는 상관없어.”

“그렇다면 이번에도 강간이네요.”

“그렇군.”

나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걸 알았다. 두피 뿌리를 구석구석 잡아 문지르고 귓불을 문지르며 남자가 티를 말아 올렸다. 차가운 공기가 닿자 소름이 파스스 올라왔다.

“젖꼭지 섰어.”

“추우니까요.”

“음란해.”

“아버지가 변태 성욕자라 그래요.”

“응, 그래.”

따뜻한 입김이 흉곽에 닿자 어깨가 떨렸다. 남자는 티를 마저 벗겨내며 유두를 입술로 물고 빨았다. 한기에 바짝 선 유두가 빨리는 순간 무릎이 뒤가 침대에 걸렸다.

몇 명이 누웠을지 모르는 침대에 쓰러진 채로 남자의 정욕을 받아냈다. 혀끝이 강하게 유두를 문지르고 유룬을 빨아댄다. 젖가슴이 있는 여자도 아닌데, 남자는 주변 살점까지 꽉꽉 그러모아 나를 주물렀다. 허리도, 배꼽도, 툭 튀어나온 날개뼈와 갈비뼈의 선을 손톱으로 그을 때는 입에서 저절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아파, 그만.”

왼쪽 유두만 집요하게 빠는 남자의 머리를 밀어내자 충혈된 눈이 힐끔 위로 올라와 나를 훑었다. 붉은 눈이 기이한 안광을 띄고 있는 것 같아 몸이 움츠려졌다.

“좋아. 그냥 빨리 본론으로 가야겠지.”

남자가 중얼거리며 유유히 내 바지를 벗겼다. 공기 중에 스스럼없이 성기가 드러난다. 남자는 치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자신의 바지춤을 열고 성기를 꺼내 들었다.

빨게 하려는 건가. 이미 단단하게 발기한 남자의 성기를 보며 망설이다 입을 반쯤 열었다. 하지만 그 성기가 내 입 안을 파고들고 목구멍에 처박히지는 않았다. 남자의 손등과 팔뚝에 핏줄이 선다. 성기에도 핏줄이 성성하게 서 있었다. 남자는 내 얼굴에 바짝 붙어 자신의 성기를 흔들었다.

“으음…”

손이 움직일 때마다 선단에서 찔끔거리며 프리컴이 새어 나왔다. 남자의 손가락을 적시는 체액이 성기를 반질반질하게 적셨다. 남자의 성기가 더 커지고 더 빳빳하게 설 때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크게 울렸다. 손바닥이 빠르게 움직이고, 남자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내 뺨과 유두를 수시로 문지르며 남자가 손아귀에 힘을 크게 주는 게 느껴졌다. 쩍쩍 들러붙었다 떨어지고, 찔꺽거리는 성기 휘젓는 소리와, 문질러지는 살점의 마찰 소리.

눈앞에서 남자는 자신의 성기를 쥐어짜는 것처럼 자위했다. 탄탄한 복부가 힘이 선명하게 들어간 게 보였다. 입술을 악물어 턱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정신없이 자신의 성기를 잡고 흔들던 남자가 고개를 바싹 쳐들었다. 위험한 눈동자가 드러난 내 하체를 훑었다.

“하, 아, 씨발!”

남자가 이를 드러내고 소리 지르는 것처럼 욕을 했다. 놀라서 멍한 사이 갑자기 몸이 뒤집혔다. 어깨가 뒤틀리며 베개 중앙으로 머리를 처박았다. 움푹 파인 골 사이에 코와 입이 끼우고 숨을 들이쉬는 순간 엉덩이와 구멍 위쪽으로 뜨거운 게 튀었다.

“하아, 후우…”

남자가 축축하게 젖은 엉덩이골 사이로 성기를 넣고 마찰시키며 헐떡거렸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음부에서 애액이 떨어지는 소리 같아 수치스러웠다.

자신이 싸지른 정액을 손가락으로 비빈 남자가 이내 몸 안쪽으로 하나를 깊숙하게 집어넣었다. 뱃속이 움푹 조여들었다.

“흐, …윽.”

정액을 윤활유로 삼고 몸 안쪽을 넓혔다. 내벽 구석구석에 정액을 덧바르며 남자는 내 하체에 바짝 숨을 내뱉으며 헐떡거렸다. 동물의 교접 같았다. 웅크린 채로 엉덩이만 들고 있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손가락 하나만 들어와 있던 곳으로 두 번째 손가락이 천천히 진입했다. 처음도 아닌데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남자는 정성스러운 척 입구를 엄지로 문지르더니 손가락에 힘을 줘 내부를 훅 벌렸다.

“아!”

“새빨갛네.”

이 안쪽. 남자가 중얼거리며 구멍의 바깥쪽을 슬슬 쓸었다. 강제로 찢듯이 벌려진 곳 사이로 서서히 다른 손가락이 진입했다. 손가락 몇 개를 꽉 물게 된 구멍이 찢어질 것처럼 쑤셨다.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으, 입술을 깨물고 통증을 참았다.

한참 구멍 안을 넓히던 남자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고개를 돌리고 침침한 눈을 떠 남자를 확인했다. 어느새 상체를 벗어 던진 남자가 콘돔을 물어뜯고 있었다. 하얗게 드러난 치아가 단단한 은박지를 벗겨낸다. 돌돌 말린 얇은 고무 피막을 풀어낸 남자가 손가락 위로 콘돔을 씌워 다시 내부로 넣었다.

“으… 흐으으.”

“쉬이, 조금만 참아. 흐물흐물 풀어져서 질질 싸게 해줄게.”

“닥ㅊ…아!”

남자의 손가락 끝이 어느 한구석을 거세게 긁자 정신이 탁해졌다. 안쪽에서 손가락을 세게 놀린 남자가 상체를 들어 올리더니 내 다리 한쪽을 들어 올렸다.

“…너 벌써 갔어?”

“미, 미, 미친. 이거. 뭐.”

다리 사이가 끈적거렸다. 남자가 헛웃음을 짓더니 젖은 손가락을 불쑥 내 뺨에 문질렀다. 끈적거리는 유백색 체액을 보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겨우 손가락 한 번에 쌌다고? 내가? 미친, 씨발 내가 게이야? 충격에 빠져 허우적거리는데 남자가 곧장 무릎 사이로 손을 넣어 다리를 벌렸다. 자연스럽게 가랑이 사이로 파고든 남자가 내 엉덩이를 잡아 올렸다. 버둥거리다 침대 시트 위로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처박혔다. 빳빳하게 들린 엉덩이를 주무르던 남자가 손에 힘을 줘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훅 드러난 부위에 수치심이 간질거리며 뼈를 갉아먹었다.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네… 이때까지 심심해서 어떻게 살았어, 뒤로 못 가서.”

“닥치… 악!”

좁아터진 안을 예고도 없이 굵은 성기가 쑤시고 들어온다. 입이 점점 더 크게 벌려졌다. 입가의 시트가 축축해졌다. 타액이 흐르는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밑으로 내린 허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아, 아파. 손가락으로 시트를 죽죽 긁었다. 정말 너무 아프다, 러브젤을 넉넉하게 쓴 것도 아니라 더 쓰라렸다.

무식하게 크고 뜨겁기만 한 성기가 안으로 꾸역꾸역 밀려 들어왔다. 소량의 정액과 콘돔 자체에 묻어져 있던 윤활유에 의지해서 내벽의 혈관을 북북 긁었다.

“흐…으으, 흑.”

“좁아, 터질 거 같아.”

남자가 손을 더듬어 아랫배를 눌렀다. 안 그래도 좁은 안이 아랫배가 눌리자 안에 들어온 성기의 모양이 생생하게 달라 붙었다. 숨통이 막혀 고통에 발버둥 쳐도 남자는 손속을 두지 않고 성기를 처박았다. 꽝 하고 징이 울리는 것 같다. 뱃속이 아니고 머릿속에 성기를 집어넣고 처박아 두들겨 부셔버리는 것 같았다.

엉덩이를 쥐어짜듯 벌린 남자가 허리를 뒤로 물렸다 다시 끝까지 쑤셔 넣었다. 볼기에 남자의 고환이 세차게 부딪쳤다. 철썩거리는 피부 찢어질 듯 마찰하는 소리가 나자 비명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아, 아프, 흣, 아! 악!”

“조금만, 참아봐… 아, 씨발.”

허벅지 사이로 손을 밀어 넣은 남자가 마구잡이로 허리를 흔들었다. 짧게 짧게 내벽을 때리던 성기가 재빠르게 한 지점을 긁어 내렸다.

“으응! 아!”

“아, 씨발 진짜 찾기 쉽네.”

아들, 전립선으로 자위해? 남자가 개 같은 소리를 뻔뻔하게 지껄이며 그 좆같은 부위를 미친 것처럼 쑤셨다. 눈앞이 번쩍거리는 정도가 아니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미친, 이 되먹지 못한 몸뚱어리. 자신을 욕하며 터질 것처럼 사정감이 밀려 들어오는 성기로 손을 뻗어 쥐었다. 잡기만 해도 정액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사정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어딜 만져.”

성기를 주무르기도 전에 남자가 손을 낚아채 머리 위로 올려버렸다. 어깨 위로 팔이 불편하게 뻗자 더 고통스러웠다. 허리가 저절로 들썩거렸다. 남자가 입술과 혀로 등줄기를 핥고 잘근잘근 씹었다. 어깨뼈가 씹혀질 때마다 사정감이 더 빨리 질주했다.

쩍쩍 거리며 땀에 젖은 피부가 들러붙었다. 남자의 성기가 들락날락하는 입구가 쓰라리단 생각이 더는 들지 않았다. 내벽을 밀고 들어간 성기가 선단에서 쿠퍼 액을 질질 흘리며 미끄럽게 안쪽 끝까지 길을 들였다. 마지막에 미끄러운 그곳으로 한 점을 내리찍으면 허리가 흔들렸다

“아. 흐, 읍! 하, 아아. 응!”

“흐, 뒤로 가, 응? 뒤로 가봐.”

“안, 안돼. 흣, 으, 아! 아읏!”

“쭉쭉 빨아먹고 씨발…”

남자와의 관계는 이게 싫었다. 성감대가 눌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쾌감을 느끼는 건데도 지나치다. 눈물에 흠뻑 젖은 얼굴을 들고 도리질 쳤다. 퉁퉁하게 발기한 성기가 시트에 비벼질 때마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입을 벌리고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못 참아, 못 참겠어. 거의 허리를 뒤틀듯이 흔들어대자 남자가 성기를 쑥 뽑아 다시 크게 밀어 넣었다. 아랫배가 바짝 조여진다. 식은땀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 아…! 흐, 으…!”

물풍선이 터지는 것처럼 꽉 차있던 성기의 끝에서 정액이 사출되었다. 시원할 정도로 흠뻑 싸질렀다는 게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만족스러운 쾌감, 향락의 극치. 멍해진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뒤로 쑤셔져서 갔는데도 한참이나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수치심 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양된 정신을 꿰뚫고 남자가 허리를 잡아당겼다. 뒤로 몸이 빠지며 밀고 들어오는 남자의 성기와 맞물렸다.

“흣! 아아! 응, 읏!”

“무슨 조루도 아니고, 후, 벌써 질질 싸.”

남자가 정신없이 뒤를 열고 안을 난폭하게 헤집었다. 절대로 내 손목을 놔주지도 않으면서 한 손으로 몸을 뒤로 잡아끌어 퍽퍽 쑤셔 넣는데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가장 굴복당하기 쉬운 자세로 당했다. 거세게 파고든 남자의 성기가 끝을 둥글게 비비면서 떨어져 나가다 다시 처박혀 한 지점을 세게 비볐다.

뒤로 남자를 받아내고 있는데도 입으로 빠는 것처럼 그 모양이 생생했다. 중간에 갈라진 끝에서 비척비척 흘러나와 뱃속을 적시고 있을 쿠퍼 액과 소량의 정액. 둥글고 축축한 선단의 모양, 빳빳하게 선 성기, 핏줄이 바짝 올라와 그게 내벽을 긁었다. 손가락을 쑤셔 넣고 손톱으로 긁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미칠 것 같았다.

술을 마신 뒤라 금방 목이 쉬어 비명이 나오지도 않았다. 한번 쏟아낸 성기가 다시 정액을 채워 넣기도 전에 다시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성기가 들어올 때마다 구멍이 스스로 좁혀지면서 남자의 성기를 빨아먹었다. 안에 있는 성기가 내벽과 전립선을 문지르면 저절로 허리가 들썩거리며 그 부분을 더 강하게 누르려고 애를 썼다. 두 다리는 움직이지도 않았다. 허리와 허벅지가 미친 듯이 떨렸다.

“으, 아음, 아, 흣, 아!”

내 뒤에서 허리를 들썩거리던 남자가 상체를 숙여 어깻죽지를 물어뜯었다. 날카로운 통증에 비명을 지르는 동시에 쾌감을 느꼈다.

“…흐으…”

내부에서 사출을 끝내고 성기가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허리가 움찔거리며 떨렸다. 몸을 돌려 눕힌 남자가 눈물로 온통 엉망이 된 얼굴을 문질러 닦아주며 웃었다.

“하하. 엉망이네.”

가슴팍과 고간을 다시 더듬어 오는 남자의 손을 쳐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눈을 깜박거릴 때마다 잊히지 않는 쾌감에 눈물이 계속 떨어졌다.

“그…그만……”

다시 안쪽으로 손가락으로 넣어 오는 남자의 팔을 붙들고 울면서 한참을 빌고 나서야 남자는 미련이 남은 얼굴로 내게서 떨어져 나왔다. 몸을 씻어야 하는데 팔다리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눈을 빛내면서 입맛을 다시는 남자의 얼굴을 향해 팔을 허우적거리다 멍청하게 눈을 감아버렸다. 끔찍할 정도로 피곤했다.

결국 정액으로 범벅이 된 채 뻗었다 찝찝한 몰골 그대로 눈을 떴다. 보일러를 틀었는지 공기는 훈훈했지만 정액이 고스란히 말라붙은 이불을 덮고 있는 건 전혀 내키지 않았다. 내 쪽으로 몸을 돌린 채 자고 있는 남자는 입술까지 벌리고 쌕쌕 숨을 내쉬고 있었다.

손을 뻗어 어깨를 흔들어 보았다. 얼굴을 찌푸리거나 잠투정을 해야 할 텐데 미동도 없었다.

눈이 충혈될 만큼 밤을 새운 뒤 정사 판을 벌인 뒤라 남자는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거기다 술까지 마셨으니 깨어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게 분명했다. 침대에서 반쯤 기어나와 샤워를 했다. 배 속을 채우고 있는 정액을 긁어낸다고 눈물을 한참 쏟은 뒤에 나와봤지만 남자는 여전히 꿈나라 저편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잠도 안 자고 프라모델을 조립하다니. 싸이코 새끼. 속으로 남자를 욕하며 뻐근한 허리를 두들겼다. 사정없이 쑤셔대는 성기를 받은 뒤라 엉덩이는 불에 덴 것처럼 쓰라렸다.

발기불능이라도 걸렸으면 좋겠다고 저주하며 남자의 코트를 뒤졌다. 안쪽 주머니에서 굴러나오는 남자의 지갑을 열고 현금을 탈탈 털어 꺼냈다. 담배도 챙겼다. 마지막으로 부재중 전화가 몇 통 와 있는 휴대폰 전원을 꼼꼼히 꺼버리고 모텔 방을 나왔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거친 섹스였지만 버틸 만했다.

이를 악물고 걷고 걸어 뻔뻔하고 태연한 척 거리로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엄마가 지금쯤 집에 와 한참이나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란 걸 알았다. 종종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이 드는데 그게 오늘이었다.

택시비로 마지막 카드를 긁고 새벽 첫차를 탔다. 서울에서 여수까지는 4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차멀미가 심해서 중간에 휴게소에 내리자마자 멀미약을 샀다. 멀미약을 먹고 나서는 병든 닭처럼 졸았다. 혹사당한 하체 때문에 식은땀이 났지만 달리는 버스에서는 내릴 수도 없었다. 건너편 자리 사람이 괜찮냐 물어보며 찬물을 내밀었다. 물을 한 모금씩 겨우 삼키며 버텼다.

여수에 도착하자마자 뛰어내려 화장실에 들어가 구토를 했다. 저녁부터 먹은 음식을 전부 게워내고 났더니 탈수 증상이 왔다. 바보처럼 헉헉거리며 터미널 의자에 덩그러니 누워있다 일어나 포카리 스웨트를 한 캔 뽑아 마셨다. 어물쩍거렸더니 곧 점심시간이었다.

지금쯤 남자는 일어나 전원이 꺼진 휴대폰을 보고 불같이 화를 내고 있겠지. 중요한 회의가 있으면 금상첨화였다. 열이 푹푹 오른 표정을 즐겁게 상상하다 택시를 잡아타고 가장 가까운 바닷가로 가달라고 했다.

택시 기사는 모래사장과 아파트 전경이 같이 섞인 모래사장 앞에 나를 내려다 주었다. 내리자마자 맥주부터 사서 마셨다. 겨울 바다는 입 돌아가게 추웠다. 콧물을 훌쩍이며 바닷가에 오래 앉아 있었다. 쓸쓸하고 매운 짠 내가 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나는, 뚜렷한 목표가 없었다. 추상적인 생각을 시작하며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꺼냈다. 이제서야 슬슬 깨어난 남자일 줄 알았는데 이근영이었다.

“어, 근영아.”

[…미안하다.]

“뜬금없이 전화해서 무슨 사과야.”

그 순간의 현실에 급급해서 미친 사람처럼 불행에 빠져 살았다.

[위로해주고 네 편 들어주고 싶었는데 내가 너무 어린 애처럼 굴었어.]

눈 앞에 보이는 걸 얼른 치워내면 그게 사라지는 거라 믿었다.

[친구가 힘없고 못나서 할 말이 없다.]

“야, 그건 우리 엄마가 할 말인데.”

[좀 더 준비하고 불렀어야 했는데, 나도 취했었어. 상처받았으면 정말 미안하다.]

“나 정말 괜찮아.”

한 번도 남자의 감정이나 내 인생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 믿었다.

[말만 괜찮고 속 문드러지는 거 모를 거 같냐.]

“아니야, 나 이제 정말 아무 걱정 없이 살려고 그래.”

[그게 어떻게 가능해.]

“…근영아, 나는 그냥, 니가, 나 욕 안 하는 거로 충분해. 진짜야”

사실은 내가 가장 중요했다. 중요하다고 들고 엎고 질질 끌고 가던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모르는 척 보지 않는 것은 다가와 발등을 찍었고, 썩은 서까래를 이고 집을 만들려고 했다.

그래야 누군가 나를 불쌍하게 봐줄 것을 안다.

“술 많이 마셔서 속 안 좋겠다. 쉬어라, 내가 연락할게.”

[……그래. 너도.]

이성적인 척 애를 썼지만 펼쳐놓고 보니 충동이었다. 다시 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는 정말로 남자였다.

[엿 먹이고 내빼니 좋아?]

“네, 좋아요.”

[아… 정말 성격 좋네, 우리 아들.]

“아버지 닮았거든요.”

[정혜 씨가 어떻게 되든 상관 안 해?]

나의 약점은 늘 이런 식이다. 가족.

[싫으면 맹랑한 친구를 잡아 족쳐줄까?]

아니면 친구. 누구 말에 따르면 땡전 한 푼 쓸모도 없는데 괜히 협박한다.

“응, 맘대로 해.”

[뭐?]

“그냥, 콱 죽을 거야.”

유쾌하게 웃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구석구석 전국을 다니는 것은 잘할 자신이 있었다. 몸 상태는 최악이었지만 기분이 끝내줬다. 기지개를 쭉 켜고 모래를 털고 일어났다.

뒤편에 얼빠진 얼굴을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따라 내려올 거라고는 생각했다. 남자의 몰골도 말은 아니었다. 요 며칠 잠 못 자고 고생 좀 했다고 얼굴이 반쪽이다. 조금은 안쓰러웠다. 나를 끌어안던 팔과, 뜨거운 박동과, 나를 망쳐서라도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패악을 덤덤하게 외치던 남자는 늘 가깝고 잦게 있었으니까.

“끝까지 왔어요?”

어떻게 보면 이곳은 끝이다. 해발 고도 삼천 미터는 아니지만, 지구 위의 어디, 바다가 코앞인 지상의 끄트머리. 서울에서는 멀리 떨어져 버린 어느 자락.

“그래.”

쥘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진 남자가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에도 내가 이겼지?”

“……”

“이겼잖아.”

“……아, 진짜 성격 좀 봐.”

남자가 자신의 휴대폰을 모래사장 위에 집어 던졌다. 내 이름 세 글자가 적힌 통화 화면이 깜박거렸다. 남자가 지친 얼굴로 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바닷바람에 코트가 무릎 근처에서 펄럭거리는 게 우아한 화보 영상 같았다.

“그래, 이번에도 니가 이겼어. 씨발, 구구절절 사랑 고백을 해도 안 된다는 것도 알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 아들.”

“응. 사람 봐가면서 눈물 작전도 펼쳐야지.”

“아주 못돼 먹었어.”

자신에게 어울리는 욕을 내게 하는 남자를 보다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목청껏 소리 내서 웃자 또 남자의 표정이 멍청하게 변한다. 정말 사람 인생은 롤러코스터다. 버리고 포기하고 나니까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그냥, 다 가벼워졌다.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꾹꾹 눌리던 손바닥이 편안해진다. 길고 가느스름하게 남은 자국도 곧 없게 지겠지.

진작 다 던져버릴걸. 빨갛게 눌린 피부가 이렇게 아파했는데.

“아하하, 아… 정말.”

“웃지 마.”

“하하, 싫어요, 아하하.”

젠장, 남자가 화를 내면서 얼굴을 쓸었다.

“웃으면 더 반할 거 같아. 제발 그만 웃어.”

“마음대로 하시라지. 변태 강간범 인간쓰레기.”

계속해서 웃었다. 울고 싶었는데 그냥 상쾌한 웃음이 나왔다. 소리 내서 웃는 나를 한참이나 보던 남자가 갑자기 내 몸을 들쳐멨다. 다시 남자가 휙휙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야가 비틀거렸다. 모래사장은 멀어지는 대신 거친 파도 소리가 가까웠다.

“억울해 죽겠네. 아주 그냥 다친 자존심이 따끔거려.”

“따끔거리기만 해요? 아버지도 망가지면 좋을 텐데.”

“너무한 거 아니야?”

“아버지는 아버지 상처만 아픈 척 질질 짜더라. 씨발놈.”

“원래 내가 그래. 너 굶는 건 괜찮아도 나 굶는 건 안 괜찮고, 너 다치는 건 즐거워도 나 다치는 건 짜증 나.”

“……”

“계단보단 덜 아프겠네, 아까워라.”

그대로 몸이 휙 집어 던져졌다. 코와 입안으로 바닷물의 짠 내가 확 빨려 들어왔다. 한기가 전신을 강타했다. 물에서 빠져나오려고 허우적거리는데 뭔가가 내 몸을 콱 짓눌렀다. 정신없이 헤엄쳤다. 그래도 나를 누른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다리 한쪽도 차갑기 그지없을 텐데.

파도와 바람 소리에 묻혀 남자가 소리높여서 웃는다. 우는 소리 같기도 했다. 나도 바다에 잠겨 울었다. 다 버리니 허무해서 눈물이 푹 나왔다. 짠맛이 났다. 오랜만에 느껴본 감정의 고된 맛이었다.

                                                

하얗고 깨끗한 벽지는 병원의 상징이다. 병원은 환자의 집이기도 했다. 고로 병원에 있는 나는 환자다.

“38.6도. 콧물, 기침. 감기구나.”

의사 선생님이 다 아는 이야기를 굳이 하셨다. 얼얼한 머리로 링거 바늘이 손등을 파고드는 걸 보면서 콧물을 훌쩍거렸다.

옆으로 몇 걸음 걸어 바로 옆에 있는 침대로 다가간 의사 선생님이 다시 체온계를 확인했다.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뒤따라 나왔다.

“38.8도, 기침. 이쪽도 감기.”

둘 다 성치 않은 몸으로 술을 먹고 성관계를 하고 여수까지 왕복하는 기염을 선보였다. 거기다 나는 바닷물에 잠수, 남자는 이미 수면 부족. 둘 다 감기몸살 걸리기 딱 좋은 짓만 골라서 하고 있었으니 사이좋게 나란히 앓아눕는 것도 예정된 결과는 맞다.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만 제외하면.

열이 오른 몸과 뺨이 따끈따끈했다. 남자가 밀가루 반죽처럼 창백한 얼굴을 문지르며 짜증을 냈다.

“씨팔, 회의 있는…쿨럭쿨럭.”

“어허, 다 커서 그렇게 험한 말을 하면 어떡해.”

불건전한 말투를 지적하며 의사 선생님이 혀를 찼다.

“이소군도. 어린애도 아니고 겨울 바다에 뛰어들면 어쩌자는 거야.”

“제가 뛰어든 게 아니고…엣취!”

억울함에 변명을 시작하다 재채기를 연방 터트렸다. 코끝이 간질간질해서 죽을 것 같다. 휴지를 뽑아 콧물을 팽 풀었다. 옆에서 남자는 연달아 폐병 환자처럼 기침을 토해내고 있었다. 서류로 보이는 물건을 잔뜩 끌어안은 비서가 매우 석연찮은 표정으로 한마디 거들었다.

“두 분 다 부하 직원 피곤하게 하시는 데는 일가견이 있으시죠…”

“주영이가 고생이 많아.”

남자의 얼굴과 내 얼굴이 사이좋게 일그러졌다. 누가 봐도 병색이 완연해 보이는 몰골을 한 남자의 앞에 비서가 서류 더미를 차곡차곡 올려주었다. 친절하게 노트북도 켜준다. 하얗게 빛이 들어오는 화면을 구경했다.

“사장님, 불참하신 회의 결과와 계열사별 1/4분기 프로젝트 보고서, 광고 협찬 거래처 현황, 요청하셨던 해외 지사 전년도 실적 보고서입니다.”

“이걸 나보고 하라고? 지금?”

“정확하게는 사흘 전에 하셔야 했던 거죠.”

해맑게 웃으면서 서류를 남자의 코앞에 들이미는 비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웃겨 죽을 것 같았다. 입을 틀어막고 끅끅거리며 남자의 새파랗게 질린 안색을 구경했다. 남자가 씨발거리며 욕을 하더니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봤다. 지레 찔려서 눈을 피했더니 기어코 손가락으로 나를 지목했다.

“서주영.”

“네?”

비서가 긴장한 얼굴로 나를 흘끔 본다.

“쟤 공부시켜.”

“네?”

“공부시키라고. 못 알아들었니?”

가만히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비서가 심장을 움켜쥐고 원망스럽게 나를 쳐다봤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손을 마구 흔들었다.

“이번 달 안에 양이소 토익 900 못 찍으면 다 네 탓이야.”

충격적인 요구였다. 죽을 한 숟가락 뜨다가 그대로 주르륵 다시 그릇에 쏟아버렸다. 간장 종지가 찰랑거린다. 드디어 느낄 수 있게 된 짠맛을 축하하며 맛있게 처먹고 있었는데, 또 체한 것 같았다.

“사장님, 쇠귀에 경 읽기라는 속담을 모르시는 것 같은데…”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도 아니까 입 닥쳐.”

“네.”

사람을 지진아로 만드는 대담에 얼굴을 팍팍 구겼다. 남자는 서류철을 거칠게 펼치면서 입술을 비틀어서 기분 나쁘게 웃었다.

“아버지가 일하면 아들도 피땀 나게 공부를 하셔야지.”

남이 아프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 뚱한 얼굴이 오늘까지 해야 할 분량을 읊는다. 자기도 아픈데 일을 해야 하니 골이 나 있는 건 알겠지만 굉장히 사디스트적인 태도다. 저 나쁜 새끼.

말도 못 하고 토익 900, 만 연신 중얼거리던 비서가 문제집을 사러 간다고 달려나갔다. 남자는 그사이에 내 하루 스케줄을 종이에다가 휘갈기고 있었다. 몇 시에 자라는 거야. 종이에 적힌 빼곡한 하루에 해야 할 분량의 공부 목록을 보며 경악했다.

“이걸 어떻게 하루 만에 다 해요?”

“해.”

“못해요.”

“나랑 연애하기 싫으신 아드님은 공부라도 열심히 해.”

“……”

남자의 갈색 눈동자가 나를 고요히 바라본다. 모든 것을 버리고 끝을 냈다는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음식의 맛을 제대로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

짠 맛, 쓴 맛, 매운맛과 단맛. 다정하고 부드럽던 음성의 맛. 거칠고 굴욕적이던 폭력의 맛.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단숨에 거절당한 남자에게서 자존심의 상처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담백하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언어의 실체가 우리를 원래대로 되돌려놓았다.

봄에 남자를 처음 만났었나. 가득 찬 커피잔이 넘치도록 테이블을 차며 모욕과 함께 즐겁게 웃던 남자의 얼굴이 어제처럼 선명했다.

“열심히 할게요.”

“그래.”

가벼운 대답에서 더는 저 차가운 손가락이 나를 만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잠든 내 머리카락과 이마를 쓸며 더 자라고, 속삭이던 부드러운 저음을 듣지 못할 것이다.

서운하다던가 하는 감정은 없었다. 이 거리감과 안정감을 위해 나와 남자는 얼마나 미치광이처럼 행동했던가. 나는 얼마나 많이 울었고 화를 냈고, 결국은 엄마와 친구도 버렸다.

가벼워졌지만 무겁다. 나는 내가 무겁고, 아마 외롭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것 말고는 괜찮았다. 소금의 맛이 느껴지는 사탕을 빨면서 내 방 침대 위에서 아침을 시작했다.

생활은 쳇바퀴 같은 날들을 되찾았다. 여전히 우리는 나란히 회사에 출근했지만, 남자는 나를 핍박받는 곳에 던져놓지도 끌고 가지도 않았다. 여전히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만 제외하면 한결 나았다. 엄마는 아침에 허겁지겁 출근하는 나를 위해 주먹밥을 만들어주거나 아침 식사 용 도시락을 싸주었다. 엄마는 아직도 내가 음식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는 걸 몰랐다.

설날 여행을 기점으로 최근 외출을 허락받게 된 엄마의 표정은 한결 좋아 보였다. 대신 내 얼굴이 안 좋아졌다. 남자는 한 달 안에 내 영어 성적을 올리는 것 말고도 이런저런 숙제를 잔뜩 내줬다. 책이나 기사를 찾아 읽고 요약을 하다 보면 퇴근 시간도 훌쩍 넘어 있었다. 저녁을 거르면 비서가 들어와 사 온 도시락을 내려놓고 갔다.

남자는 같이 저녁을 먹고 남은 업무를 처리하다, 저녁 8시가 넘으면 겉옷을 들고 일어났다. 그 시간까지 내가 숙제를 끝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10시 전에 끝이 났다 싶으면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10시를 넘어버리면 회사에서 그냥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면 비서가 집에서 챙겨온 옷으로 갈아입고 숙제를 검사받았다. 남자는 종종 숙제를 검사하면서 머리를 쓰다듬거나 뒷목을 두들기긴 했지만 그건 정말 의례적 칭찬의 몸짓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잘했네.”

“새벽까지 했으니까요.”

“앞으로도 새벽까지 열심히 굴러.”

“……”

남자는 내게 더는 사랑을 말하지 않았다. 관계는 후퇴되었고, 우리는 처음의 관계를 표면상 유지했다.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종종 남자가 나를 보는 눈빛이 미묘해지기도 했다. 완전히 없어질 수 없는 직전의 감정이 남아서 내 뺨과 가슴팍을 핥았다.

그러면 남자는 말없이 일어나 담배를 들고 나갔다. 남자는 더는 내게 담배를 주지 않았다. 술도, 담배도 남자만 늘어 났다. 그가 아버지가 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고, 혼자 몸을 웅크리고 소파에 누워 생각했다.

잘못 걸려 내 공부를 책임지게 된 비서는 한탄을 섞어가며 나를 가르쳤다. 비서가 한마디 할 때마다 내가 지능이 부실한 인간이라는 걸 강제로 느끼게 된다. 남자는 비서가 나를 가르치는 게 재밌는지 자주 일을 멈추고 쪽지시험을 구경했다.

“도련님, against가 무슨 뜻입니까.”

“어…뭐라고요?”

“어-겐-스-트, 말입니다.”

어겐스트가 뭐더라. 어겐. 어겐?

“…다…다시?”

“다시 외우시죠.”

토익 빈출 단어 1000개가 적혀있는 종이가 책상 위에 떨어졌다. 그 옆에서 남자가 배를 잡고 웃으면서 키보드를 부술 기세로 내리치고 있었다. 저 개새끼. 이를 북북 갈면서 다시 종이를 집어 들었다. 사람이 아무리 그래도 단어 천 개를 어떻게 하루 만에 외울 수 있지. 남자의 눈치를 슬슬 보며 몰래 종이를 와작 구겼다.

“도련님, 이거 아까도 물어본 단어입니다만.”

“까먹었어요.”

“어떻게 이걸 까먹으실 수 있죠.”

“멍청해서요.”

우리가 하는 꼴을 전부 구경하고 있던 남자가 슬쩍 웃으면서 담배를 집어 들고 일어나 사무실을 나갔다. 나도 피우고 싶은데. 최근 또 담배를 멀리했더니 은근히 타르와 니코틴이 그리웠다. 남자의 꽁무니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목을 길게 빼고 슬그머니 주변을 살피던 비서가 속닥거렸다.

“두 분 사랑싸움이라도 하셨습니까?”

무슨 싸움? 정신적 충격을 크게 받아서 순간적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종이 위에 있던 연필이 튕겨 바닥에 떨어졌다. 우리가 사랑싸움을 할 건덕지가 어디 있단 말인가. 종이를 북북 쥐어뜯으며 소리 없이 경악하자 비서가 무안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니요, 음, 두 분 사이가 안 좋아 보이시길래.”

“아버지랑 제 사이가 좋았던 적 없거든요.”

“좋으신 거 아니었습니까.”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요?”

비서도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해도 해도 너무했다. 내가 이렇게 눈치가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요 몇 달 내가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새해를 맞이한 건 잊은 모양이다. 설마 배 좀 맞췄다고 사귄다고 믿은 건 아니겠지.

의심의 눈초리로 비서를 노려보았다. 뻔히 보이는 딴청을 피우며 의미 없는 낙서를 긁적이던 비서가 나를 불렀다.

“도련님.”

“네.”

불순한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집요한 눈빛에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어 따끔거리는 뺨을 슬금슬금 매만졌다.

“형이라고 불러주실래요?”

“네?”

환청을 들었나 싶어서 손가락으로 귀를 마구 쑤셨다.

“주영이 형, 하고 불러주세요.”

“……뭐요?”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있었는데도 목소리가 너무 잘 들렸다. 비서가 자기 혼자 좋아서 얼굴을 붉히고 오두방정을 떨면서 수줍어했다. 기가 막혔다. 이것도 변태 새끼라니… 그냥 짐 싸서 야반도주를 해야 하나. 슬금슬금 의자를 뒤로 밀고 내뺄 준비를 하는데 비서가 어깨를 덥석 잡았다.

“형이라고 해주시죠.”

“하고 싶지 않은데요.”

“해주세요.”

“이유가 뭔데요.”

“그럼 사장님이 절 부러, 아니. 질, 아니, 하하하. 뭐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편이 아닌데 사이가 쭉 불편한 것 같아서요.”

비서가 말을 더듬을 때마다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다 알겠다. 지금 비서는 나를 선동해서 토익의 수렁에 빠트린 남자를 엿먹이려고 하는 것이다. 뒷감당은 내가 해야 하고? 그런데 재밌을 것 같았다.

“뭐, 좋아요. 주영이 형? 흠, 주영이 형.”

“이소.”

비서에서 주영이 형으로 탈바꿈한 사람이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다. 이렇게 놓고 보니 또 참 유쾌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를 대충 엿 먹이기 위한 간이 연합이 형성된 순간이었다.

담배 한 대를 피우면서 누굴 족치기라도 했는지 후련한 얼굴로 들어온 남자가 실실 웃고 있는 형과 나를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둘 다 나란히 시치미를 떼고 뻔뻔한 얼굴로 돌아앉았다.

“뭐야. 둘이 내 욕이라도 했니?”

“……아니요.”

“그런데 분위기가 썰렁하네.”

남자를 지그시 쳐다보다 입술을 올려 찔끔 웃었다. 사람 변죽을 상하게 하는 표정에 같이 마주 웃어줬다.

“주영이 형이랑 공부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요.”

“뭐?”

“공부하고 있었다고요.”

“아니, 그 앞에.”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걸 구경하니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일주일 동안 집에 몇 번 들어갔더라. 이까지 드러내며 최대한 활짝 웃었다.

“주영이 형이 친절하고 다정하게 가르쳐줘서 너무 재밌다고요.”

“제기랄.”

남자가 앞에 보이는 탁자를 걷어찼다. 주영이 형이 손뼉을 치며 폭소했다. 유치찬란하고 속만 좁은 남자가 비서를 내쫓은 것은 바로 그 뒤의 일이었다.

불량스러운 얼굴을 한 남자가 사무실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결국 방 안에서 피울 거면서 왜 나갔는지 모르겠다.

“왜 주영이가 형이야?”

“그럼 누나예요?”

“그게 아니잖아!”

“그럼 아저씨?”

“아저씨지.”

“…주영이 형이랑 저랑 9살 차이에요.”

“제기랄, 사고를 그때 치면 너만 한 아들이 있어.”

남자가 미쳐도 단단히 미친 모양이다. 혀를 차면서 흐트러진 프린터 물을 주워 모았다.

“근데 난 아버지에 아저씨고 걘 형이라니, 씨발.”

“…진짜 유치하다.”

“내가 좀 유치해.”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남자가 허리를 숙였다. 방금까지 입술에 물고 있던 담배가 찰나만에 사라지고 없었다. 담배가 어디 갔지, 눈을 아래로 내려 흰 담뱃대를 찾는 순간 남자가 기습처럼 뺨에 입을 맞췄다.

“……”

“그런 눈으로 보지 마.”

“……”

“이 정도는 허락해 달라고.”

풀 죽은 목소리에도 전혀 미안하지 않아 속이 쓰렸다.

남자의 심리를 이해하는 건 어려웠다. 미친놈에 지랄 맞은 성격을 다정한 척 덮어둔 초반의 남자가 되었나 싶어도, 눈을 깜박이면 애정을 갈구하는 지독한 남자로 돌아오곤 했다.

나는 안다. 남자가 모두 다 잠든 새벽에 종종 내 방에 찾아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간다는 것을. 방안에 어둑하게 그림자가 드리워지면 깊은 잠에서도 깨어났다. 일부러 숙제를 느리게 하고 회사에서 잠을 자기도 했지만 엄마 때문이라도 아예 나와 살 수는 없었다.

새벽이면 다섯 손가락이 하나하나 꼼꼼하게 엉켜 깍지를 한참 동안 낀 채 멈춰 있었다. 그때면 남자의 손가락은 온기가 가득했다. 뜨거운 열감이 남은 손가락 사이를 입술로 물고 잠을 한참이나 설쳤다. 남자는 아침 느지막하게 나를 깨우며 아기냐고 비웃었다. 손가락을 빨고 자는 모습을 보고 그런다. 누구 때문에 그런 줄도 모르고 나를 괴롭히는 깔끔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보면 삼라만상의 번뇌를 느끼고 했다.

가장 깊은 마음속 의심과 의문은 하나뿐이다. 남자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확신. 그는 그저, 자신이 만들어둔 커다란 명제에 빠져있는 것이다.

슬프다. 사랑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사랑해야만 한다니. 자신이 얼마나 처절하게 나를 사랑하기 위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남자는 알까.

그런데 그 확신 사이로 묘한 불안감이 들 때가 있다. 남자가 정말로 나를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단호한 나의 번뇌를 뚫고 들어오는 감정의 접촉.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려고 노력을 열심히 하고는 있었지만, 나도 내 행동을 전부 정의할 수 있는데 남자의 감정 따위 전부 알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저, 남자가 나를 사랑한다. 행동하는 것만큼 나는 남자에게서 불필요한 선을 정리하고 싶었다. 얼룩진 천을 락스물에 풍덩 빠트리면 색이 많이 옅어지겠지.

하지만… 그래도 가끔 힘들다. 졌다고 말하던 남자의 모습과, 나를 계단에서 집어 던지고 혼자 더러운 모욕을 감당하게 하던 것 중 무엇이 더 진심에 가까운지 알아서 힘들었다. 외롭다, 응, 사랑 따윈 한철 노래조각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서.

“잠깐 쉬었다 하자.”

“좋아요.”

몇 가지 문법을 반복적으로 가르쳐주던 주영이 형이 뒷골이 당기는지 이마를 부여잡고 앓는 소리를 냈다. 내 멍청한 머리가 미안해서 문제집을 슬쩍 위로 밀쳤다. 형이 차가운 음료수병 뚜껑을 따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도 내 몫의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시고 단 맛을 기억하려 애쓰다 공허한 입맛을 쩍쩍 다시며 표면에 달라붙은 오렌지 과육 찌꺼기를 의미 없이 구경했다. 작은 병은 금방 비었다.

“형은 아버지 오래 봤죠?”

“그런 편이네.”

주영이 형이 내 손에 들린 빈 병을 가져가 치우며 씩 웃는다.

“뭐, 궁금한 거 있어?”

뭐든 알려주겠다는 은근한 제스쳐에 얇은 귀가 팔랑거렸다. 궁금한 건 엄청 많다. 일단 제일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아버지 성격이 원래 저렇게 개판에 변태 소아성애자예요?”

“……소아성애자는 너무 심하지 않니.”

“아버지 스무 살에 제가 7살이었다고 생각해보면.”

“으음.”

난처한 얼굴로 웃던 주영이 형이 내 머리를 슬슬 쓰다듬으며 연습장을 펼쳤다. 볼펜을 의미 없이 끄적거리는 건 형의 오래된 버릇인 것 같았다.

“천성도 있고 후천적 요인도 있으시다고 봐야지.”

“나한테 왜 이러는진 모르고요?”

“뭐… 사장님도 너만큼 주변에 사람이 없으신 편이긴 하셨으니까.”

외로운 인생.

“그러다 네가 생겼잖아. 어, 좀 사장님 취향으로 생기고 팔팔한 애. 괴롭히고 싶은 심리 아닐까.”

“…그게 뭐야, 두 번 괴롭히면 사람 아주 죽이겠네요.”

“지금도 죽을 수는 있지.”

형이 담담하게 사실을 이야기한다. 죽을 뻔한 순간들은 많았다. 감정적으로 내몰려 자살까지 바짝 내쫓겼던 세포들은 잠깐 휴전기에 접어들었다.

근거 없는 충고는 아니었다. 언제든 죽음에 접어들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의미 없이 문제집을 뒤적거렸다. 복잡한 영어 단어가 잔뜩 나열된 문장 중 절반은 오독이었고 절반은 난독이었다.

“죽으면 좋아할 수 있을 거 같긴 해요.”

“응?”

“아버지를.”

죽은 자의 사고는 쉽게 조작될 수 있으니까. 뒷 말은 숨겨버리고 가만히 넋을 놓고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형이 빨리 진도를 마치자며 테이블을 두들겼다. 뺨을 잠깐 부풀렸다 바람 빼는 소리를 내며 문제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때맞춰 남자가 회의를 끝내고 들어오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살짝 눈가를 접어가며 웃었다. 얼굴이 붉은게 이번 회의에서도 누구를 신명나게 갈군 모양이었다.

“공부는 많이 했어?”

“네, 사장님. 오늘 나간 분량입니다.”

주영이 형이 비서 모드로 돌변해서 남자에게 진도 과정과 시험 결과를 체크해둔 메모지를 내밀었다. 남자가 노란 포스트잇을 훑어보더니 내 뺨을 툭 건드렸다.

“잘했어, 오늘은 이까지 하고 집에 가자.”

오후 네 시였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갑자기 퇴근을 권유하니 찝찝했다.

“퇴근하시려고요?”

“그래. 회의 들어갔더니 속에서 천불이 나와. 이번 분기 실적 못 맞추면 다들 시말서가 아니라 사직서 준비할 각오 하라고 전해.”

“다 자르시면 일은 누가 합니까.”

“니가.”

“……”

형의 입을 닥치게 한 남자가 주섬주섬 소지품을 챙기며 내게 턱짓했다. 뭉그적거리며 하다 만 문제집을 챙겨 일어나자 남자가 내 어깨에 팔을 걸치며 유쾌한 척 말을 걸었다.

“퇴근하면 서재.”

“……”

“대답.”

“알았어요.”

꽃다운 사랑 노래를 하든 하지 않든, 남자의 변함없는 유일한 취미는 프라모델 조립과 더불어 양이소 괴롭히기인 모양이었다. 서재에 처박혀 얼마나 오래 그 병신같은 배를 조립할 예정인지 한숨이 나왔다. 남자는 운전을 직접 하겠다며 차키를 받아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점점 낮아지는 층수를 보며 몇 번이나 한숨을 푹푹 쉬었다. 남자는 그저 재밌다며 목을 울려 웃기만 했다. 누가 보면 즐거워 보이는 정경이라는 생각에 더 스트레스가 쌓였다.

“안전벨트 매.”

운전석에 앉은 남자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남자는 익숙하게 시동을 걸고 기어를 바꿔 넣었다. 턱을 조금 치켜들고 앞을 바라보는 모습은 생소했다.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려던 남자가 아, 하는 소리를 내면서 뒷좌석으로 팔을 뻗었다. 위태롭게 상체가 들썩거리더니 작은 사탕갑을 꺼내 들었다.

맛을 느끼게 하려는 남자의 노력도 꾸준하다면 꾸준한 행동 중 하나였다. 과일 모양 사탕 하나를 받아먹었다. 자연스럽게 입에 침이 고였지만 단맛은 나지 않았다. 소리 내서 사탕을 빨자 남자도 레몬 모양 사탕을 하나 꺼내 입에 넣었다. 나란히 사탕을 입 안에 물고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남자는 사탕갑을 돌려둔 후에야 차를 출발시켰다. 운전에 집중한 옆 모습을 짧게 구경했다. 내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남자는 말을 걸지는 않았다. 종종 사이드미러를 보기 위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긴 했지만 잠깐이었다. 코너를 돌기 위해 핸들을 꺾을 때 남자의 셔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도로 중간에 사고가 났는지 귀가가 더뎌졌다. 좁아진 차로와 불편한 수신호를 기다리며 휴대폰을 배터리를 30%나 소모한 뒤에야 집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남자와 단 둘이 같은 공간에 처박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정신에 구멍이 숭숭 나 있었다.

남자는 겉옷만 벗어 던지고는 바로 서재로 들어갔다. 좀 쉬고 하지. 작게 짜증을 내며 남자의 뒤를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 시끄러운 걸 싫어하니 문제집을 들고 들어가지도 못했다. 휴대폰과 물건을 내 방 침대 위에 던져놓고 남자를 찾아 서재로 들어섰다.

셔츠의 팔을 걷어 올리고 동그란 안경을 찾아 낀 남자가 기지개를 쭉 켰다.

“후, 오늘은 꼭 완성해야지.”

라텍스 장갑까지 끼고 핀셋을 집어 든다. 남자가 조립을 하고 있을 때 지켜야 할 규칙은 몇 개 없지만 까다로웠다. 숨을 크게 쉬어도 안 되고, 재채기나 기침을 하는 것도 안된다. 오랜만에 깍듯하게 지켜야 하는 규율을 잔뜩 정해놓고 남자는 자신의 세상을 유지해나갔다.

남자가 머리카락만큼 얇은 부품을 집어 들고 조심조심 배의 돛대 부분에 꽂아 넣었다. 은은한 조명에 남자의 얼굴이 가냘파 보였다.

“……”

몇 시간 동안 꼼짝없이 있겠군.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저녁 다섯 시였다. 저녁도 먹지 않을 생각인 모양이다. 나는 배고픈데. 오늘 반드시 결판을 내겠다며 굉장한 기세로 조립품에 달려 들어있는 남자를 보며 허리를 쭉 폈다. 남자는 내가 흐트러진 자세로 있는 것도 싫어했다. 소파 가죽이 뿌드득거리는 소리에 몇 번 남자가 행동을 나무랐다. 서 있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에 억지로 앉은 자세를 유지했다.

집중한 남자의 얼굴을 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엄마는 이미 저녁을 다 만들었을 것이고, 노인과 고모의 눈치를 보며 불안한 저녁 시간을 끝내기 위해 기도하겠지. 내일 아침에 만들 요리 걱정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남자가 풀어준 뒤에 방으로 돌아가 숙제를 다 해야 한다. 며칠 전에는 새벽 두 시에 사람을 풀어주는 바람에 세 시간도 자지 못했다. 자각하니 졸음이 쏟아졌다.

날카로운 핀셋으로 따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엔진을 조립하던 남자가 나를 흘끗 쳐다봤다.

“졸려?”

“……네.”

“눈 똑바로 뜨고 있어.”

씨발. 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남자가 작게 소리 내서 웃었다. 남자가 최근 취미 생활을 하면서 나한테 말을 건 적은 처음이었다.

“공부는 좀 늘었더라.”

“다행이네요, 모지리 지진아한테 투자하는 것 같다고 슬퍼하시더니.”

“너 모자라는 건 맞아.”

바보 취급할 거면 공부를 시키지 마.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그래도 노력하는 건 좀 보기 좋네.”

남자가 오랜만에 칭찬을 건넸다. 나는 귓가를 간지럽히는 남자의 목소리를 뿌리치기 위해 최대한 정신을 팔았다. 하지만 둘밖에 없는 공간에서, 그에게서 피해 도망치기란 힘든 일이었다.

“예뻐. 영리하고.”

“……”

“그래서 널 좋아하는 거고.”

잘해주는 척, 칭찬을 건넨다. 달콤한 환상에 빠지면 와장창 무너트리고. 또 쌓아주고, 사람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괴롭고 끔찍한 일련의 행동 뒤에 건네는 작은 사탕 조각.

나는 남자를 이기적인 행동을 밀어내고, 당기는 척 현혹하고 또 처박았다. 우리에게 감정은 진창 같은 것이었다.

“진짜야.”

“네에.”

“안 믿나 보네.”

남자는 핀셋으로 책상을 도닥도닥 두들겼다. 원목에 유리가 부딪칠 때마다 풍경처럼 맑은소리가 났다.

얼마 전 나는 유리 핀셋을 남자에게 돌려주었다. 이제 이것은 내 물건이 아니라고. 남자는 말없이 핀셋을 들고 갔고 우리는 서재에 갇혀 취미를 공유했다. 은밀한 행동이 될 수는 없었다.

“아들.”

“왜요.”

“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물어봐.”

이런 씨발. 나는 불행할 정도로 좋은 청력을 가진 남자와 치졸한 방음 성능을 가진 사무실을 욕했다. 흥분한 몸짓에 가죽 마찰음이 거칠게 일어난다. 핀셋 끝부분으로 부품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몇 번 쳐보던 남자가 안경을 벗고는 콧잔등을 꾹 눌렀다.

“…나를 꼭 사랑할 필요가 있어요?”

잔잔한 남자의 눈동자가 힐끗 내 뺨을 바라보다 만들다가 만 모형으로 돌아갔다. 먼 곳을 응시하는 것처럼 초점이 없다.

“너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나?”

“나는 아들이니까요.”

“그렇지만, 결국 그 말은 네가 가장 가깝다는 거잖아.”

“…나는,”

“사랑하다 보면, 사랑하겠지.”

살다 보면, 살아지겠지. 남자의 말은 그렇게 들렸다. 소파 위에 가로로 길게 누워 뺨을 기댔다. 남자가 들고 있는 핀셋 너머의 풍경은 공허했다.

“너는 사랑 할 수 있겠지.”

“……”

“그렇게 생각했어. 보통 소중한 건, 다 주입식 교육으로 배우는 게 많으니까.”

남자는 자신의 후천적 환경을 설명하고 있었다.

“기업은 소중하다, 실적과 이윤은 중요하다.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노력해서 기업을 승계해라.”

“……”

“노인네가 그랬지. 365일 내내 그런 말을 들으면 싫어도 열심히 하게 돼 있어.”

하기 싫은 걸 사랑해야 한다 강요받았다. 남자는 결국 하기 싫은 걸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사람 중 하나다.

“너는 중요하다, 집안의 대를 이어나가야 한다.”

미간을 조금 찡그린 남자가 눈을 가볍게 내리깔고, 자신이 만들던 배 돛대를 힘을 줘서 툭 쳐다. 형편없이 약한 내구도를 가진 범선의 돛이 푹 꺾였다.

그게 남자가 자신 역시 이 집안을 위해 희생당했다는 무언의 표시 같아 보기 싫었다. 눈을 질끈 감고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새털처럼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기업 승계를 위해서라면 꼭 결혼할 필요가 있을까.”

“……”

“그럼 아들만 있으면 되잖아.”

“…아버지 진짜,”

“진짜 뭐?”

“진짜 이상하게 자랐네요.”

내 말에 남자가 보조개를 패면서 빙긋 웃었다.

“뭐, 너한테 동정표를 사려고 하는 말이긴 해.”

의미 없는 말들만 잔뜩 늘어난다. 시간이 바싹 말라가고 있었다. 창 바깥의 노을이 블라인드를 뚫고 내려와 무너진 범선을 정확하게 겨냥했다. 타오를 것 처럼 붉었다. 그저 붉기만 한 곳에서 울컥 뭔가 터지는 것 같은 환시가 보였다. 흰 손이 불쑥 붉은 막을 뚫고 들어와 배를 밀어냈다. 배가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남자는 자신의 여가시간을 충분히 바쳐 만들어낸 군함을 치우고 기지개를 쭉 켰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오늘은 갈비찜이래.”

한없이 천진한 말이었다.

                

정말로 저녁은 갈비찜이었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따끈한 엄마표 갈비찜을 젓가락으로 찔렀다. 고기 표면은 부들부들하다. 남자가 오늘따라 저녁을 같이 먹길 권유했지만 엄마는 이미 먹었다는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며 더 뒤로 한걸음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동그랗게 썰은 당근을 옆으로 치우고 노인이 공간에 의미 없는 젓가락질을 했다. 쇳소리가 나면 숨이 막혔다. 고모는 그 옆에서 작은 고기조각만 골라 먹었다. 중간중간 식탁 위에서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날카롭게 목구멍을 후벼 파는 비난이 들리는 것 같았다. 반도 뜨지 못한 밥을 깨작거리며 짠맛만 느껴지는 고기를 천천히 씹었다. 치아에 갈려 잘게 쪼개지는 고기 육질은 연하고 부드러웠지만 소화에는 효과적이지 못하리라.

“요즘도 회사에 나간다지.”

“…네.”

목구멍에 커다란 것이 턱 걸린 것 같았다. 침묵을 깨는 노인의 대사에 식탁 위의 공기가 날카롭게 조각났다. 주방에 한걸음 떨어져 있던 엄마가 불안해 하는 것이 보이지 않아도 느껴졌다.

“둘이 언제까지 그러나 보자꾸나.”

“……”

“아주 뻔뻔해.”

노인이 위험한 말을 던졌다. 엄마가 당장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무언가 짐작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이었다. 단숨에 흘러넘친 수위와 날카로운 간격에 침을 삼켰다. 엄마를 버렸다고 남자에게 말했지만, 위협적인 더러운 관계를 까버릴 수 있을 만큼 내가 단단한 것은 아니었다.

말없이 한참 젓가락질을 하던 남자가 무김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입에 쏙 넣고 씹으니 와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우둑우둑 입 안에 있는 걸 씹어 넘긴 남자가 물을 마시며 한숨을 푹 쉬었다.

“지금은 아니에요.”

순간 날카로워진 분위기를 무너트릴 만큼 나긋한 어조로, 남자가 갈비찜이 가득 담긴 그릇을 노인의 앞에 밀어주었다.

“뭐?”

“지금은 아니고, 현재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말을 어머니가 하실 필요는 없죠.”

남자가 그릇으로 턱짓했다. 바닥으로 깔리는 시선에는 노인의 모습도 포함되어있었다.

“빨리 드시죠.”

단칼에 대화를 잘라내는 권유 끝에 남자가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늙으면 쓸데없는 말이 늘어난다더니.”

저녁 식사는 그걸로 끝이었다. 노인이 일어나자마자 고모가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만 마지막까지 남아 자신의 그릇에 남아있는 밥을 비워냈다. 나는 절반을 고스란히 남긴 체로 위장을 꾹꾹 눌렀다.

“들어가서 쉬어.”

남자가 내 등을 두드리며 먼저 2층으로 올라갔다. 엄마가 거실이 보이는 주방 근처에서 기웃거리며 사람들의 동태를 확인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남자가 올라가고 한참 지난 뒤에야 천천히 계단을 밟았다. 한 칸씩 밟고 남자와 나의 세계가 되어버린 곳에 진입할 때마다 몸이 무거워졌다.

저녁 시간에, 왜 노인을 막은 걸까. 단순히 엄마가 있기 때문에…? 남자는 늘 나를 버려두었으니까. 이런 상황이 낯설었다. 달려온 비체가 내 바짓단을 붙잡고 늘어졌지만 팔로 밀어내고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머리가 아팠다.

최근 남자의 행동은 낯설었다. 제멋대로 구는건 여전했지만, 예전처럼 독하지 않았다. 오늘도 나를 곤경에 빠트릴 수 있었을텐데, 내가 쩔쩔매며 말을 돌리려고 애쓰는 걸 즐겼을텐데.

생일날 수줍게 웃던 남자와, 유치하게 형이라는 호칭을 부러워하던 남자가 눈에 걸렸다. 내 손을 몰래 잡고 있던 차갑고 큰 손바닥도 마음에 걸렸다. 그럴 리 없어. 애써 부정하며 방 안에 들어가 더듬더듬 불을 찾아 끄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웅크린 이불 속 공기는 차가웠다. 몸을 최대한 조그맣고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베게도 하나 꼭 끌어안았다. 푹신 거리는 솜뭉치가 안에 들어오지만 따뜻하지 않아 위로가 되어주진 않았다. 배 위에 여느 때처럼 작고 뜨거운 체온을 가진 동물을 올려두고 졸고 싶었다.

한숨을 푹푹 쉬며 잠이 들다 깨길 반복했다. 씻고 자야 하는데, 묵직한 몸과 정신이 따로 놀았다. 훙얼훙얼 헛소리 같은 잠꼬대를 하고 조는데 누가 방 앞에서 가볍게 노크한다. 묵직한 걸음 소리와 2층을 마음 대로 돌아다닐 사람은 남자뿐이었다. 슬금슬금 이불을 걷어내고 문을 바라보았다.

밝은 복도 불빛을 등지고 선 남자가 상체를 기울이고 어깨를 빼꼼 내민다. 어둑어둑하게 그림자 진 표면에서 옅은 눈이 반듯하게 깜박거렸다.

“엄마랑 술 마시러 갈 건데, 너도 갈래?”

엄마? 금방 그 단어가 태정 씨를 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쾌하고 예쁜 얼굴의 여배우를 만나는 것은 좋지만 남자랑 가는 건 싫다. 망설이는데 남자가 다시 권유한다.

“엄마가 너도 데려오랬어. 보고 싶대.”

보고 싶어 한다는 말에 저절로 몸이 일으켜졌다. 남자가 방 안에 들어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고 옷매무새를 고쳐주었다. 티셔츠 위로 후드티 하나를 집어 입혀준다. 고분고분하게 팔을 들어 옷을 껴입고 남자와 나란히 외투를 걸쳤다. 1층을 걸어 내려오는데 멀리서 비체가 파닥파닥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남자가 신발을 신으려다 말고 복도를 질주하는 힘찬 발걸음 소리를 기다렸다. 비체가 눈을 반짝거리며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남자가 오른발을 내밀어 비체를 막았다. 비체가 말릴 틈도 없이 주둥이를 벌리고 남자의 발가락을 와앙 깨문다. 세상에, 얘가 무좀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나는 비체의 구강을 걱정했는데 남자는 전혀 달랐던 모양이다. 남자가 험악하게 목울대를 떨었다.

“아, 이 한 그릇 새끼가.”

“…동물한테 그런 말 하시마세요.”

“아파, 봐봐. 엄청 세게 물었다고.”

남자가 징징거리면서 쪼그려 앉아 자신의 양말을 벗었다. 정말 세게 물었는지 하얀 살점 위에 조그맣게 피가 보일 정도였다. 머뭇거리자 남자가 계속 우는 소리를 냈다. 결국 거실에서 구급상자를 가져와 약을 발라주어야만 했다.

빨간 소독약에서 거품이 퐁퐁 올라온다. 대충 닦아내고 거즈를 붙여주었더니 남자가 금방 기분 좋은 얼굴을 했다. 작은 이빨 자국이 난 발가락을 치료해주는 내내 몇 달 전 일이 생각났다. 그때, 남자의 발에 양말을 신겨줬을 때는 뭔가 바뀔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부족한 부분이, 채워질지도 모른다고. 좋게 생각하면 끝없이 좋아지지 않을까, 잠을 설쳤다.

그러나 끝없이 나빠지기만 했다. 기대를 했던 내가 미워서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믿으면 안 된다고, 멍청한 양이소, 머리를 처박고 울부짖고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는 거대했다. 남자의 크기와 같았다.

남자는 치료를 마친 발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씩 웃으며 양말을 신었다. 사람 발 하나를 아작낸 비체는 죄책감도 없는 얼굴로 눈을 반짝거리면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어쩐지 사람의 거죽을 뒤집어쓴 개새끼 한 명과 진짜 개 한 마리에게 당해 괜한 수고를 한 기분이다.

신발장 위에 구급상자를 올려 밀어놓고 먼저 차고로 움직였다. 남자는 입구에서 여전히 남자를 물어뜯으려고 애를 쓰는 비체를 이리저리 약 올리다 뒤늦게 문밖으로 나왔다. 저녁을 먹을 때부터 눈이 내렸는지 세상에는 흰색 눈이 옅게 깔려 있었다. 하아, 입김이 하얗게 올라오는 걸 몇 번이나 반복해서 구경했다.

“차에 타.”

남자가 내 어깨를 툭 밀면서 운전석에 올라탔다. 찬 손과 언 뺨을 비비며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맸다. 차가 천천히 움직이자 차고의 문이 자동으로 올라갔다. 훅 끼치는 거대한 찬바람이 차 안을 뚫고 지나가는 것 같다.

차는 외곽 쪽으로 달리더니 유럽의 건축 형태를 딴 것처럼 생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차키를 직원에게 맡기고 내린 남자가 뒷좌석에서 뭔가 꺼내 내밀었다. 깔끔하게 포장된 술과 선물 상자였다.

“…뭐예요?”

“네가 드려.”

“태정 씨 생신이세요?”

“아니.”

부연 설명도 없이 남자가 직원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품에 가득 선물을 끌어안고 남자를 쫓아갔다. 정면에 서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남자는 디딤돌을 밟고 계속 안쪽으로 걸어갔다. 오래지 않아 아예 떨어진 별채 같은 건물이 보였다. 직원이 문을 열어주며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문 앞은 여자의 구두와 남자의 구두 한 켤레씩이 놓여 있었다.

천방지축처럼 굴던 태정 씨를 말 한마디 없이 챙겨주던 다정한 인상의 아저씨를 생각하며 남자의 뒤에 바짝 붙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방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태정 씨가 이미 빨갛게 변한 얼굴을 들고나와 남자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우리 아들, 그리고 우리 이소!”

가냘프지만 넉넉한 품에 안겨 버둥거리다 아저씨의 도움으로 겨우 풀려 나왔다.

“태정 씨, 그러다 사람 잡아.”

“어머, 미안해라. 내가 너무 반가워서 그랬어.”

“…아니에요……”

강제로 뽀뽀를 당한 뺨을 쓱쓱 닦으며 넋 나간 정신을 수습하고 있는데 남자가 내 등을 슬쩍 두들겼다. 손에 들린 묵직한 선물의 무게가 그제야 느껴졌다. 아차 싶어 허둥지둥 들고 있던 물건을 내밀었다. 와인 한 병과 선물 상자를 본 태정 씨가 눈을 접어 웃으면서 선물을 건네받았다. 와인 라벨을 읽는 폼이 익숙하다.

남자가 내 어깨를 잡으며 인사말을 꺼냈다.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

“별말씀을.”

태정 씨가 남자의 뺨에 가볍게 키스하고 어깨를 끌어안았다 놓았다. 깜짝 놀라서 남자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생일이세요?”

“응.”

남자가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대답하고 난 테이블 옆에 앉았다. 안주와 술병이 빼곡했다. 직접 자신의 잔에 술을 채워 넣으며 남자가 씩 웃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주민등록상의 생일이랑 본래 생일이 다른 것뿐이야.”

“왜요?”

“입양되던 날짜로 생일을 바꿔서 그래.”

타코 와사비를 집어먹으며 태정 씨가 남자 대신 대답했다. 아, 미처 몰랐던 사실에 불편한 기분을 숨기며 내 자리에 놓은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후후, 이태는 늘 등록된 생일로 생일잔치를 하거든. 그러니 이날은 우리끼리 축하하는 거지.”

“아….”

“생일 축하해요 아빠, 하면서 뽀뽀쯤은 해줘도 돼.”

남자가 헛소리를 한다. 미친 것 같은 입을 쳐다보다 고개를 픽 돌렸다. 내가 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아저씨가 쿡 웃었다.

“이소는 잘 지냈니?”

“네… 뭐, 들으셨다면 그만큼요.”

태정 씨의 애인인 아저씨가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얼마나 들었을까. 머쓱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적게 듣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씁쓸한 기분에 술을 한잔 따랐다. 태정 씨가 입맛을 다시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건배!”

“이태 생일인데 이태가 선창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머, 그런가. 네가 할래?”

“엄마가 하세요.”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태정 씨는 그렇다면야, 하고 중얼거리며 씩씩하게 잔을 부딪쳤다. 과격한 행동에 소주가 뚝뚝 흘러넘친다. 손가락을 빨면서 잔에 있는 술을 털어 넣었다. 맹물을 삼키는 것 같았다. 혀로 젖은 입술을 빨며 땅콩을 하나 깠다.

“휴우, 시간 빨리 간다. 네가 벌써 서른여섯이고.”

“뭐… 그러네요.”

태정 씨와 남자는 둘이서만 통하는 이야기 같은 것을 꾸준히 주고받으며 술잔을 비웠다. 두 사람의 잔이 채워지는 속도가 좀 빨라졌다. 아저씨가 내게 이런저런 음식을 권하며 계속해서 챙겼지만 어쩐지 식욕이 생기지 않는다. 저녁 식사 시간부터 체기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남자의 생일이라니, 불편한 마음에 계속 술잔만 홀짝홀짝 비워 나갔다.

“요즘은 안 바쁘니?”

“바쁘죠.”

“고생이 많겠네.”

“몇 년만 더 하면 아들이 해줄 건데요 뭐.”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나를 대체재로 지목한다. 과일을 갉작거리다 말고 고개를 들어 남자와 태정 씨의 얼굴을 보았다. 태정 씨가 조금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너 정말 그만두려고?’

“그만두는 건 아니고, 일선에서 물러나긴 할 거예요.”

“이소가 어떻게 너 대신 일을 해?”

“하겠죠. 한 세대 말아 먹는다고 회사 안 망해요.”

“……”

남의 회사도 아니고 자기 회사인데도 말하는 꼴이 태연하다. 남자 대신 사장이 되라는 이야기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어차피 뭐, 될 대로 되라는 인생인데 싶어 그쪽에서 눈을 돌려버렸다. 그러나 태정 씨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계속해서 남자를 설득했다.

“그러지 말고 10년이라도 더 해. 이소도 10년쯤은 공부해야지.”

“나도 대학 졸업하자마자 했는데요.”

“세상에… 독한 놈. 너 정말 여행 가려고?”

“네.”

“여행에 한 맺혔니?”

“남들 다 하는 거 나만 못하면 억울하잖아.”

애처럼 투덜거리며 남자가 샐러드를 뒤적거렸다. 태정 씨가 혀를 쯧쯧 차면서 남자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어머니 표 일장 연설이 시작되자 옆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대화를 경청하던 아저씨가 나를 보며 고개를 슬쩍 저었다. 못 말린다는 표정에 나도 킥 웃어버렸다.

“이태가 정말 회사 맡긴다니?”

소곤거리며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애 안 할 거면 일이라도 하라던데요.”

“……”

아저씨의 얼굴이 창백하다. 뭐라도 더 할만한 말이 없어 고개를 숙였다. 그쯤 말도 없이 끝도 없는 태정 씨의 잔소리를 들으며 휴대폰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의 눈이 남자를 따라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남자가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

“잠깐 회사 일로 전화 좀 하고 올게요.”

“회사가 애를 잡아먹네. 추우니까 외투 걸치고 나가.”

“알았어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은색 외투를 들고 나갔다. 닫힌 문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태정 씨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병목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아저씨가 태정 씨의 손을 잡으며 말렸다.

“그만 마셔. 취했잖아.”

“어…그래, 이것만 마실게.”

술을 한잔 꼴깍 넘긴 태정 씨가 눈을 감고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맡지 않아도 독하고 맛없는 알코올의 향이 느껴졌다.

“어휴, 어렵지.”

태정 씨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지내고는 있지만… 나도 쟤를 잘 몰라.”

“태정 씨, 이태 들으면 어쩌려고.”

아저씨가 태정 씨의 고해성사를 막으려고 들었지만, 취한 사람을 말릴 수 있는 건 졸음뿐이었다.

“아니야, 이태도 알 텐데 뭐. 쟤라고 커리어를 위해 자기를 포기한 엄마가 뭐가 좋겠어.”

후후, 태정 씨가 여미지 못한 입술을 열고 재잘재잘 떠들며 웃었다.

“내가 이태도 망치고, 우리 예쁜 이소도 힘들게 하고……”

“그런 말 하지 마.”

“이소, 내가 미안해.”

뜻을 알고 싶지 않은 사과를 해온다. 물병을 집어 들려다 말고 멈춰서 태정 씨를 보았다. 태정 씨가 팔을 뻗어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 집이 어떤 줄 알면서 나도 이태를 보내버렸거든. 애 딸린 미혼모인 게 들키면 안 되니까 데리고 외출도 안 해줬던 엄마였었는데…”

“……”

“걔들이 내 아들을 저렇게 망칠 줄 알았으면 그냥 낳지도 말걸. 그땐 내가 미쳤다고 불륜을 사랑이라 착각했어.”

“태정 씨.”

“아니면 아예 제대로 망쳐지지. 애가 좀 배우다 말아서 어설프게 사랑을 흉내 내고 그래.”

남자의 엄마인 태정 씨가 하는 말은 끔찍한 실화였다. 메마른 정서가 알코올 섞인 입김에 날아간다. 태정 씨가 자신의 얼굴을 문지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이소한테 미안해. 정말.”

“저한테 왜 미안해하세요. 미안해해야 할 건 아버지예요.”

혹시 태정 씨가 술에 취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까 봐 대신 아저씨에게 설명했다.

“아버지가 잘못된 애정 교육을 받고 자랐다고 해도, 내게 한 건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행동이에요.”

“……”

“저도 어떻게 보면 비슷하게 자랐으니까, 더 이해를 못 해요.”

“……”

“물론 아버지나 내가 어떤 부분에서 함께 외로워 한다는 것도 알고는 있지만요.”

그 외로움마저도 생긴 것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요구한 것을 받았으나 채워지지 않은 남자와, 요구조차 하지 못했던 나는 이렇게 떨어져 있다. 한 뼘, 두 뼘. 한 걸음, 세 걸음? 그냥 무수히 많이. 우리가 살았던 세월만큼.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담배를 물고 벽에 기대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태연하게 문을 닫고 남자의 옆에 가 섰다. 벽에 등을 기대자 차가운 한기가 부스럭거리며 몰려온다. 남자가 자신의 코트를 벗어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전화 받으러 가신다더니.”

“끊었어. 지금은 담배.”

“거짓말.”

남자를 나무라지는 않았다. 건네주는 담뱃갑을 받아 나란히 불을 피웠다. 입김처럼 하얗게 올라오는 연기를 보며 입술을 오므렸다.

“예쁘지.”

작은 전구가 켜진 나무를 가리키며 남자가 말한다. 작은 빛이 반짝거리는 나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일인데 선물 안 줘?”

“주민등록증 상의 생일에 드릴게요.”

“내 생일이 아니잖아.”

“남들도 다 그날 축하할 거잖아요.”

담배를 손가락에 끼워 넣으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하얀 얼굴 한쪽에 진 그늘을 따라 가늘게 핏줄기를 내보고 싶었다. 쉽게 말하면 그냥 찢어버리고 싶었다. 저 얼굴을 볼 수 없도록.

“…뭐가 가지고 싶으신데요.”

“키스하자.”

“싫어요. 변태 새끼야.”

“한 번만.”

“이전에 실컷 했잖아요.”

“지금 하면 느낌이 또 다를 것 같아.”

“뭐가요.”

“그냥, 새롭게?”

“아아, 새롭게 사람 정신 하나 또 부숴버리시겠다고.”

“아닌데.”

남자의 음성은 눈이 떨어지는 것처럼 소곤거렸다. 담배를 빨려다 말고 멈칫 남자의 눈을 보았다. 추위에 파랗게 선 목과 굳은 어깨에 떨어지는 하얀 셔츠가 금속판처럼 서늘했다.

“아니야.”

“……”

“아닐 수 있을까.”

희미한 음성이 귀에 닿는 순간 나무에 걸린 전구의 불이 탁 꺼졌다.

   

사랑은 폭력, 애정이란 이름을 가장한 슬프고 괴로운 강압적 애착.

불 꺼진 전구의 필라멘트에 금색을 띤 빛이 미세하게 남아 열기를 간직하고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나도 너 좋아하고 싶어.”

“……”

“사랑을 하고.”

“……”

“내가 사랑을 주면, 너도 네 생활에 안주하면 안 돼…?”

“네.”

왜? 남자가 속삭이며 물었다. 눈동자 가득 습하고 텁텁한 이물질이 보였다. 저것은, 사랑의 상처보단 애욕의 상처였다.

부족한 걸 채우기 위해 죽으라고 노력했던 나는 결국 얻지 못했다. 남자는 죽으라고 노력을 해보기도 전에 성의 없이 던져지는 것들에 갈증을 느꼈다. 우리는 등을 꼭 붙이고 서로 반대방향을 보고 선 것처럼 가깝고 다른 인간들이었다.

남자의 비뚤어진 점이 나에게 날을 세우고 재미있는 장난감을 받아 만지작거리는 것처럼 사용되었다. 알기 때문에 원한다면 동정은 줄 수 있었다.

“대가를 바라시잖아요.”

“……내가?”

“사랑을 주면, 내가 감동받아 보답을 할 거라 생각하지 마세요.”

“……”

“아버지, 나는 늘 사랑이 필요했지만 당신의 사랑이 필요하진 않았어요.”

운명적인 사랑을 꿈꿨다. 부모의 다정한 사랑을 꿈꿨다. 가져보지 않은 가정의 안락함 역시도 꿈꿔보았다. 절대로 가질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남자가 엄마와 결혼한다고 했을 땐 두려움이 먼저 들었다. 공포심은 거짓이 아니었다. 남자는 그냥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진 정신병자였고, 그 거대한 저택은 우울로 가득 차 있었다. 한주먹 짜리 작은 동물로는 온기가 채워질 리가 없다.

우울한 인간이 주는 사랑은 편파적인 사고를 제출했다.

남자가 자신의 심장 언저리를 짚으면서 눈을 깜박거렸다. 남자는 울지 않았지만 내가 울었다. 담배를 바닥에 집어 던지고 남자가 내 뺨을 닦아냈다.

“울지 마.”

“대가를 바라는 건 당연한 거야.”

“……”

“사랑을 주면, 너도 내게 뭔가를 주는 건 당연하잖아.”

“그건…사랑이 아니잖아요.”

“왜?”

“대가를 바라면, 순수한 게 아니니까.”

“아들이 몇 살이지?”

“스물…셋…”

“스물셋, 서른다섯. 우리가 순수한 걸 따질 나이인가?”

눈가를 쓰다듬는 서글서글한 온도에 고개를 저어 손가락을 떨어트렸다. 반걸음 정도 물러선 남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더니 친절하게 고개를 떨어트렸다. 조금 낮아진 얼굴을 보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남자의 언어가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주 조금 지면에서 떨어진 사고를 하는 남자의 입술이 천천히 다가왔다.

탁, 전구에 불빛이 다시 들어왔다. 나무 위에서 반짝거리는 것들은 유리 파편을 뿌려두고 빛을 비춘 것처럼 부산스럽게 뾰족거렸다.

전구의 알을 삼키는 것처럼 미적지근한 열감이 입술 위에 닿았다. 남자의 손이 뺨을 감싸 쥐었다. 한참 손바닥 안의 은은한 온기만 느꼈다.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 남자가 물고 있던 담배의 맛이 미세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혀가 섞이지 않은 담백한 립키스였는데도 속 한구석이 뜨거웠다.

결국 치아를 날카롭게 세우고 남자의 입술을 물었다. 남자가 통증에 입술을 떼고 상체를 바로 했다.

우울한 정염과 살의.

“생일 축하해요, 아버지.”

역시 태어나지 말 걸 그랬어. 남자가 우울하게 속삭였다.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추측은 대부분 옳았다.

한참 늦게 별채로 다시 돌아갔다. 태정 씨는 이미 만취해서 아저씨의 무릎에 머리를 얹은 채 잠들어 있었다. 애정어린 얼굴로 태정 씨를 내려다보던 아저씨가 나를 보더니 곤란한 얼굴을 했다.

“이태는?”

울었냐는 말 대신 완곡하게 돌려 말하는 목소리에 바깥을 가리키며 힘겹게 웃었다.

“대리 부르겠다고 나가셨어요.”

“그래, 그렇구나.”

“……아저씨는 많이 아세요?”

“응?”

“아버지랑 태정 씨에 관해서요.”

혹시 문이 열리지는 않을까 흘끗 등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앞쪽에서 아저씨가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찬 바람을 단단하게 막고 있는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다시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선한 인상을 보면 배가 아프다.

“태정 씨가 이태를 두고 배우 활동을 계속했지.”

“……”

“이태가 혼자 있는 경우가 많았고, 그쪽에서는 이제 아들을 요구한 거야. 필요하니까.”

“그건…대충 알아요.”

“그렇지. 그런데 거기서도 아들로 키우기보단 후계자로 키우려고 데려간 거니까, 제대로 애를 키워주진 않았나 봐. 이태도 그렇고 해인 이도 그렇고.”

“알 거 같긴 해요.”

자기 배로 낳은 자식도 아니고, 불륜으로 낳은 혼외 자식을 아껴줄 여자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꼿꼿하고 잔인한 노인의 성정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태가 뭘 하고 싶거나, 해달라고 하면 던져주면서 그거면 됐지? 이제 해. 이런 식으로 키웠다고 하더군.”

“……”

“뭘 주면 결과를 보여주거나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해.”

“……”

“이태가 말이야. 어린 애들은 쉽게 그렇게 크더구나.”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타이밍도 좋게 남자가 찬바람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잠잠한 방 안의 세 명을 둘러보며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바깥을 가리켰다.

“대리 도착했습니다. 먼저 들어가세요.”

“그래. 태정 씨, 일어나봐.”

여전히 곤한 잠을 자고 있던 태정 씨가 으응, 앓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구겼다. 아저씨가 남자의 도움을 받아 태정 씨를 업고 짐을 챙겨 일어났다. 먼저 신발을 신고 떠나가며, 아저씨가 무거운 어깨를 힘겹게 돌려 나를 보았다.

“하지만 이소야, 네 말은 전부 맞지.”

“……”

“네가 강요받아야 할 건 아니라고 생각한단다.”

정다운 것인지 단호한 것인지 모를 마지막 인사였다. 또 언제 볼 수 있을까.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 남자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어지러운 테이블 앞에 앉아 담뱃불을 붙이고 있었다. 남은 음식을 뒤적거리는 남자를 보며 나도 쫓아가 앞에 앉았다.

“대리 하나는 늦게 온다니 기다려.”

“정말 늦게 오는 거 맞아요?”

“너랑 섹스라도 할 거면 문부터 걸어 잠갔겠지.”

저질스러운 언어에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까이에 있는 생선구이 쪽으로 돌렸다. 짠맛이 나는 음식 위주로 골라 먹게 되는 게 최근 물든 식습관이었다.

술잔을 들다 말고 남자가 내가 헤집는 생선을 자기 앞으로 끌고 갔다. 깔끔하게 가지를 발라내는 젓가락질이 단정했다. 하얀 살점만 남기고 돌려준 남자는 내가 고등어 자반을 먹는 것을 보면서 술을 마셨다. 입 안에서 씹히는 고등어의 살점이 그저 짜기만 했다.

남자는 홀로 술을 마셨고, 나는 고등어 살점을 잘게 찢어 먹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직원이 대리기사가 도착했다고 우리를 부르러 올 때까지도 더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서 서로 다른 풍경을 보았다. 남자의 입은 여전히 무거웠고 나는 사고가 무거웠다.

차고에 도착한 기사는 남자에게 돈을 건네받고 차키를 돌려준 채 집 바깥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여전히 좌석에 앉아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시동이 꺼진 차 안에 겨울 한기가 스멀스멀 밀려온다. 틀어둔 히터 바람이 다 식어버렸을 때 일어나려 손잡이를 당겼다.

“……”

말이 없던 남자가 갑자기 손목을 휙 잡아당겼다. 그대로 끌려가 남자의 품에 머리를 박듯 엎어졌다. 남자가 내 등과 어깨를 꽉 눌러 잡았다. 팔과 손이 내 몸을 칭칭 감아 동여온다. 끙끙거리며 일어나려 애썼지만 한 번 제압당한 몸은 남자의 품 사이에 갇혀 나올 수가 없었다. 남자가 몸을 웅크려 내 상체를 꽉 붙들었다.

“너를…”

고통스러운 목소리였다. 체온이 뜨거웠다. 당장 40도, 50도, 100도까지 끓어올라 전신에 화상을 입힐 것처럼 위험한 남자가 눈앞에서 출렁거렸다.

“그저 너를 정말 운 좋게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거 놔요.”

예쁘고 눈치 빠른 너를 아들로 얻어서 운이 좋다고, 즐거워하며 빈정거리던 남자의 얼굴은 늘 충만해 보였다. 새파랗게 질리는 건 대부분 나였으니까, 관계가 이렇게 더러워질 거라곤 생각하지도 못했다. 남자가 폭력이 멈춘 순간에도 학대는 이어졌다.

“뭘 주면 웃지?”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뭘 더 줘야 유지가 되는 거야?”

“그런 건 없어요.”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남자는 꿋꿋하게 날을 끌어안은 채 자신의 얼굴을 내 머리카락 위에 묻었다. 바스락, 간지러운 소리가 났다.

“너는 언제 양이소가 되어 주지.”

“……”

“언제쯤?”

“아버지가…”

남자의 말이 잠깐 멎었을 때 대답했다. 늘 알고 있으면서도, 남자도 나도 실현 불가능할 거라 확신하는 대답을.

“아버지가, 진짜 내 아버지가 되었을 때요.”

새로운 주민등록증을 내밀면서 밝게 웃었지. 기대된다고 말하며 환하게, 환하게, 빛보다도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만은 좋았다. 기대로 붉어진 뺨을 보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내가 아들이 되어 기쁘다고 했을 때도. 바라는 게 있다는 걸 잘 알았다. 그래서 더 많이 반항하고, 화를 내고, 대들었다.

태정 씨를 만나는 날 1층까지 데려다줘서 기뻤다.

그 날 저녁 바로 나를 강간하듯 성적으로 학대했을 때 기쁜 감각은 무너졌다.

다음 날, 또 나를 공항으로 집어 넣고 화살 받이를 시켰을 때,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 아무렇지 않은 척 굴어봐야 금방 이렇게 허물어진다. 돌아갈 수 없어. 오히려 남자의 폭력에 전력으로 저항하던 그때가 더 생명력이 있었다. 돌이킬 수 없다. 돌아갈 수 없다. 전부 타버렸다. 나는 모든 것을 버렸지만 나는 버리지 못해서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남자의 인내심이 한계에 와 있다는 것은 내가 가장 잘 알았다.

주영이 형, 하던 것 처럼 쉽게 남자의 이름을 바꿔 부를 수 있는 날은 평생 가도 오지 않을 것을 안다.

정말로 잠든 남자의 방에 몰래 찾아가 섹스를 제의하며 칼을 찔러 넣는 날이 올 것인가. 스스로 질문했다.

이번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남자의 기분은 저조했다. 맨날 쥐어패던 놈한테 좀 차였다고 구질구질한 기분을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다. 집은 물론이고 회사, 거래처, 미팅까지 구석구석 더러운 성질을 뽐내는 바람에 주영이 형이 핼쑥해졌다. 남자가 없는 틈을 타 왜 저러냐고 달래보라고 애걸복걸을 할 정도로 온갖 트집을 다 잡고 다닐 정도였다.

집에서는 식사는커녕 밤 10시, 11시까지 청소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2층만 손가락으로 구석구석 눌러가며 먼지를 확인하면 말도 안 하겠는데, 1층까지 검사하며 사람을 쥐어짜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덕분에 2층 청소가 끝나자마자 헐레벌떡 1층으로 뛰어 내려가 남자가 엄마를 괴롭히기 전에 모자란 청소를 끝내야만 했다.

소독 약품을 하도 자주 만져 손가락 끝 지문이 찍힌 부분이 아리기까지 했다. 걸레를 집어 던지고 끙끙 앓고 있는데 1층 방의 문이 열렸다. 엄마가 나왔나, 걱정스러운 마음에 등 뒤로 걸레와 스프레이를 감추고 목을 뺐다. 다닥다닥 달려오는 작은 동물의 발소리가 들린다. 내 발목에 몸통을 처박고 뒹구는 사랑스러움에 넋을 한참 놓다 고개를 들었다. 고모였다.

“이 시간에 안 자고 뭐 하니?”

발목까지 내려오는 홈웨어를 입은 고모가 내 등 뒤에 숨긴 걸레를 확인하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민망해 붉어진 얼굴로 화장실 구석에 걸레를 집어 던지고 손을 씻었다. 꽃향기가 나는 비누에 손을 한참 문질렀다. 뒤에서 나를 기다리던 고모가 헛기침을 했다.

“커피 한잔하자.”

“이 시간에요?”

“그럼 차.”

“……”

싫은 표정을 숨기지 않고 물기를 털어냈다. 젖은 손으로 머그잔 두 개를 꺼내 뜨거운 물을 붓고 티백을 까서 넣었다. 고모가 하나를 받아 들며 소파 위에 걸터앉았다.

“언제까지 그럴 거니?”

머그잔에 담긴 뜨거운 물이 살짝 넘쳐 검지를 적셨다. 화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졌지만 그렇게 뜨겁지는 않았다. 부주의한 행동에 고모가 눈을 찌푸렸다. 나는 우리가 소파에 앉자마자 한참 내 종아리에 앞발을 얹고 긁어대던 비체를 끌어 올렸다. 비체가 허벅지를 꾹꾹 누르면서 내 아랫배로 파고들어 웅크렸다.

“너는 나 없는 동안 얘를 뭐라고 부른 거니.”

“네?”

“자기 이름을 못 알아들으니까.”

비체라고 몰래 불렀는데, 한 달을 넘게 불러서 비체도 그게 자기 이름인 줄 안 모양이다. 머뭇거리다 이실직고했다.

“그… 비체요.”

“비체?”

자기 이름이 나오니 비체가 벌떡 일어나 귀를 쫑긋거린다.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보며 고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게 불렀나 보네. 근데 왜 비체야?”

“……”

비인격체의 줄임말이라는 사실을 알면 정말 화를 낼 것 같았다. 대답을 못 하고 계속 우물쭈물하고 있자 고모가 손을 내저었다.

“됐어.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다시 본론으로 치고 들어오는 태도에 황급히 머그잔 안을 바라보았다. 얇은 티백 주머니 사이에서 노란 국화차가 뜨거운 물을 먹고 피어나 있었다.

“믿으실 진… 모르겠지만, 일방적인 관계에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는데 뜨거운 물을 흠뻑 뒤집어 쓴 것 처럼 입천정과 혀가 따끔거렸다.

“한 번도, 아버지와 그런 관계…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태는 아니니까 하는 말이지.”

고모가 가볍게 한숨을 쉬면서 자신의 차를 마셨다. 후루룩, 신중하게 뜨거운 차를 들이켜는 소리를 들으며 더운 머그잔의 몸을 손바닥으로 감싸 잡았다. 뜨거운 물에 덴 손가락이 아팠다.

“아들, 아버지, 그런 호칭으로 잘만 부르면서. 끝까지 갔니?”

“……”

“합의였든 강제였든 상관없이 물어보는 거야. 정말로 소문이 맞는지.”

강간. 나는 취약한 나의 정신이 놓아버린 것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생각하시는 그대로예요.”

“요즘도?”

“요즘도.”

남자의 감정이 물러서지 않았으니 똑같다. 내 말을 듣던 고모가 고개를 기울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태 말만 들었을 때는 소강상태 같은데.”

“휴전협정 중이라 보시면 돼요.”

“흐응… 걔 성격에 오래 못 갈걸.”

이미 그렇다. 쓴웃음을 짓자 고모가 무릎을 털면서 비체를 끌어안았다. 내 품에서 헥헥거리고 있던 비체가 바둥거리며 깡깡 울었다. 뺏겨버린 작은 위로를 보며 손바닥으로 비체의 턱을 가만가만 쓸어주었다. 앞발이 통통 내 손가락을 친다.

“너는 어쩌고 싶은데?”

“…네?”

“너는, 어쩔 거냐고. 이태랑 계속 그렇게 지낼 거야?”

그렇게. 그 말이 이렇게 부정적으로 들린 적은 처음이었다. 옅은 노란빛으로 물든 찻물을 보고 티백을 건져내고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날 정도로 우려진 찻물은 여전히 뜨거웠다. 입 안 전부를 너덜너덜하게 태운다.

“아니요. 아니에요.”

“……”

“고모, 나는 아버지를 저주해요.”

아무도 믿어주지 않겠지만.

“나는 그 사람을 정말로 원망하고 증오해요.”

“……”

“엄마와 나는 아무것도 없이 버텨낼 수 있었는데, 이젠 그럴 수 없어요.”

나약해요. 외롭고요. 그 뒷 말을 숨긴 채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손과 발이 미친 듯이 시렸다.

“아버지의 꿈을 이어받는 게 아들이라고 치면, 너도 여행을 가면 되겠네.”

갑작스러운 말에 고개를 들고 고모를 바라보았다. 고모의 얼굴은 무섭도록 아무 감정이 없었다. 그녀가 무심한 얼굴로 이해 가지 않는 말을 반복했다.

“여행, 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고모?”

“하나뿐인 조카 여행 못 보내줄 정도로 무능력하진 않으니까.”

저 끝에서 거대한 파장이 밀려와 꿀렁거렸다. 나는 엄마의 얼굴과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생각했다. 숨이 턱 막혀왔다.

“돌아가.”

“고모.”

“그냥 너도 돌아가.”

이 집에 남은 자식이 나와 이태뿐인 걸 보면 너도 알 수 있잖니.

고모의 말에서 느낄 수 있었다. 죽은 전 회장이 낳은 수많은 혼외 자식 중, 이 집의 공포를 버틴 것은 단 두 명일 것이다. 노인이 선택해서 들여온 사람이 전부는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결국 두 명이었다. 남자가 어릴 적 태정 씨의 품을 떠나오기 전에는 누가 이 자리에서 아들의 노릇을 했을까.

더 많은 사람이 포기하고 도망쳤겠지. 나와 같은 상황에서 권유받고. 그렇다면… 나에게도 그것이 옳은가.

고요한 간격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고모의 얼굴에 깔린 짙은 그림자가 거실 바닥을 습하게 적셨다.

“나도 너랑 네 엄마가 싫어.”

“……”

“네 엄마랑 결혼하겠다고 통보하고 걔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니?”

“…아뇨.”

“대폭소를 하면서 바닥을 뒹굴고 동네방네 전화해서 유부남이라고 소문을 냈지. 걔만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뒤틀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정신 한구석이 글러 먹었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심하게 떠들고 다녔을 줄이야. 그 유쾌한 얼굴로 많은 사람의 넋을 빼놨을 남자가 저절로 상상이 된다.

미간을 찌푸린 채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하얀 강아지와 어두컴컴한 고모를 반복해서 보았다. 긴 천 자락에 숨겨진 발등이 종종 모습을 드러냈다 가려지길 반복했다.

“이태도 이해할 수 없지만…순응한 너도 이해할 수 없어.”

누가 나를 이해할까. 손목에 족쇄가 차인 것처럼 무겁고 쓰라렸다. 시원하게 울어보고 싶었지만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사각거리는 천이 스치는 소리, 강아지가 앞발을 내디디며 타박타박 걷는 소리, 겨울바람이 창문을 때리고 한 걸음 물러서는 스산한 소리… 다친 마음에서 서서히 고인 피를 보여주는 소리.

나조차도 모르는 나의 상처… 나의 사랑, 나의 분노, 나의 과욕과 나의 흥망성쇠. 폐허도 남지 못한 성벽.

“…저는요.”

“……”

고모의 눈이 나를 본다. 그녀의 눈은 어두운 검은색이었다. 그걸 보면 남자와는 피가 반밖에 섞이지 않은 이복 혈육이라는 것을 느꼈다. 어차피 나와는 타인이고, 그녀는 남자를 이해하지 않지만 나도 이해해주지는 않으리라는 것도.

“저는…그 상황이 다시 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거예요.”

“왜?”

“모르겠어요. 최악은 아닌 선택이니까…?”

“최악이 아니라지만 결국은 최악이나 마찬가지인 것 아니니.”

남자의 품에 안기고, 그의 성기가 내 안을 뚫고 올라오고, 안에 정액을 싸지를 때 나의 이성 중 한 부분은 이미 죽어버린 게 분명하다.

이미 반쯤 이성을 상실한 상황이니, 나의 선택을 누가 옳다고 이야기하겠어. 내 입장이 된 것도 아닌데.

“나도 너랑 네 엄마가 이 집에서 신경 긁어대는 거 정말 싫어.”

“아버지가 내게 사랑을 이야기할 때마다 미칠 것 같았어요.”

“그럼 떠나지 그랬어? 내가 처음 떠나라고 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분명 그런 일이 있었다. 계단에 집어 던져져 병원에 입원했을 때 고모는 내게 후하고 매력적인 제의를 해왔다.

“너도 자초한 일이면서 이제 와 유난스럽게 청승 떨지 마. 너 때문에 엄마는 정신과 치료도 받고 있어.”

도도한 노인이 나와 남자의 더러운 추문으로 인해 정신과를 다닌다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집의 사람들은 대체로 매우 유약하다.

“제발 좀 돌아가, 너도 네 엄마도 이제 보기 짜증이 나. 이게 뭐니, 전부 들쑤시고 망쳐놓고. 나도 갑갑해.”

“돌아간다는 건… 뭘까요.”

“……”

“돌아간다고, 전부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데.”

꿈에서 남자는 처연한 표정과 악마의 표정을 반복해 지으면서 내 혼과 육을 갉아먹겠지. 엄마는 악몽을 꾸는 나를 안타깝고도 이상하게 보겠지. 계부에게 강간당했다는 딱지는 오래도록 내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즐겁게 뺨을 치겠지. 네 선택은 글렀어, 너는 이상해. 너는 미쳤어.

“그래도, 돌아가면 아무렇지도 않게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고는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 잊혀.”

“……”

“네 상황에 공감은 못 해주겠지만, 나도 마흔 넘어서야 느낀 거지만 다 제 앞길 찾는다고 바빠서 과거는 잊어.”

“……”

“너도 그렇게 되겠지.”

이태가 놓아준다면. 가장 중요한 조건을 읊는 고모의 가정은 까마득했다. 나는 이제 스물셋이니, 살아온 세월만큼은 더 살아야 멀쩡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남자를 알게 되고 이제 겨우 일 년 가까이 되었는데… 그 일 년이 나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감각. 피부를 헤집던 조각. 나를 사랑한다 말하며 황홀하게 반짝거리던 남자의 얼굴.

1월 1일, 나의 생일을 축하하며 장미 꽃다발을 내밀던 남자에게 해줄 말이 하나쯤은 더 남아 있을까.

고모는 더 할 말이 없는지 비체를 안아 들고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령처럼 슬리퍼를 끌고, 긴 옷자락이 꼬리를 빙그르르 말면서 방 안에 빨려 들어간다. 거실 소파 위에 우두커니 쪼그려 앉았다. 발이 차갑고, 손도 시렸다. 남자의 손가락이 늘 차갑게 식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

부드러운 손가락이 내 뺨과 눈꺼풀을 만진다. 익숙한 손길과 머리를 받치고 있는 단단한 허벅지의 감촉에 눈을 떴다.

“깼어?”

눈앞에 연기가 자욱하다. 남자가 턱을 들어 올리며 공중 위로 담배 연기를 뿜었다.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내게 무릎 베게 해주고 있던 남자가 낯선 담요를 내 어깨 위로 끌어 올렸다.

“거실에서 뻗어 자면 감기 걸려.”

말도 참 예쁘게 한다.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담요 안에서 몸을 좀 더 웅크렸다.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을게.”

“……”

“화도 내지 않고, 협박도 하지 않을 거야.”

등을 굽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남자가 맥락 없는 말을 했다. 하지만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너도 그만큼 굽혀.”

명령이나 마찬가지인 말을 듣고 헛웃음을 지었다. 고모의 제의와 남자의 제의 중 무엇이 더 강압적인지 비교할 필요도 없었다. 결국 남자의 말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관계의 연장선, 이 상황의 연장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알고 1년 내내 발을 동동 구르며 살았다.

“굽힐 만큼 굽혔어요, 나는.”

“……”

“뒷걸음질 친 거로 굽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남자는 이기적이다. 얼마나 더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어야 만족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나는 저 지하 밑으로 침식해있는데.

“졌다고 말했지만 잃어버린 건 없잖아, 당신.”

“…내가?”

“그래, 당신이.”

“잃어버린 게 없어?”

“뭘 잃어버렸는데요?”

시선은 거실의 시커먼 구석에 고정되었다. 빛 한점 들어오지 않은 거실 안이 마음처럼 어지러웠다. 남자가 나를 토닥이던 손을 멈추고 내가 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만큼 잃어버렸어요?”

인제 와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빌 사람도 아니었고, 받아줄 마음도 없었다. 노곤한 팔다리를 늘어트리고 머리를 좀 더 편하게 움직였다. 남자의 허벅지가 꿈틀거렸다.

“그런 것도 아니면서 동등과 평행을 주장하지 마세요.”

나는 남자로 인해 나 자신마저도 잃어버렸다.

“시작부터 평등한 관계는 아니었잖아.”

“알아요.”

“그런데 왜 같아지는 걸 원하는데?”

“화가 나니까요.”

“흐음.”

남자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내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바로 눈앞에서 불어온다.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내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시선이 얼기설기 얽히고 엮인다. 어디선가 시큼한 산성 냄새가 났다. 뼈와 살과 뇌가 녹아내리는 소리.

두 손을 단단히 맞잡은 채 한참을 소파 위에 엎드리듯 누워 앞을 보았다. 남자가 끝없이 담배를 피우며 중얼거렸다.

“내일 아침 회의 있는데.”

“……”

“글렀네.”

“……”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고 일어난 남자가 내 목과 등을 받쳐 들어 일으켰다. 소파에 비스듬하게 앉은 채로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남자는 담배를 입에 물고 웃었다.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반듯하게 그려지는 미소를 보며 희미하게 따라 웃었다. 웃는 얼굴을 그리고 있긴 할까.

“너는 내일부터, 아니 오늘부터 출근하지 마.”

“……”

“집에만 있어.”

“그럼, 공부도 하지 말까요?”

“주영이 보낼게.”

마음대로 안 되니 감금인가. 어차피 남자에게 반항할 마음은 없었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누그러진 얼굴로 내 몸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남자의 어깨를 단호하게 밀어냈다. 거부당한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맘대로 해봐요.”

“하고 있잖니.”

“나도 좀 맘대로 하고 삽시다.”

몸에 둘린 담요를 옆구리에 끼고 남자를 스쳐 지나갔다. 등 뒤에 남은 남자가 헛웃음을 지었지만 돌아보지 않은 채 꿋꿋이 걸어 2층으로 올라갔다. 가파른 계단, 모두가 잠들거나 잠든 척하는 밤. 계단을 날카롭고 가팔랐기 때문에 신중하게 발을 한칸 한칸 디뎠다. 복도의 가장 구석, 내 방으로 기어 들오자마자 담요를 바닥에 집어 던지고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오늘부터 잠이나 실컷 자 볼 계획이었다. 남자가 자신의 입으로 회사를 빼줬으니, 공부하는 둥 마는 둥 설렁설렁 시험이나 치고 돌아오지 뭐. 고개를 돌려 달력을 보았다. 1월도 완전히 끝이었다. 시간 참 빨리 지나간다. 한 달이 빠르니 두 달과 일 년, 이 년, 세월은 한없이 빨리 지나가겠지.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가슴팍이 부풀었다. 남자의 방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한 번에 토해낼 수 있었다.

남자의 외출금지 명령 덕에 한없이 편한 인간이 되었다. 9시가 넘어서 겨우 눈을 뜨고 침대 위를 뒹굴었다. 다리 사이에 이불을 말이 끼우고 모로 돌아누워 있는데 방문이 달칵 열렸다. 노크도 없이 들어온 불청객을 쳐다봤다.

“한 건 크게 하셨다면서.”

옆구리에 토익책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주영이 형이 아침 인사를 대신해서 묻는다. 내가 그렇게 큰 사고를 쳤나. 까치집인 머리를 손가락으로 정리하다 고개를 갸웃했다.

“사고 안 쳤는데.”

“근데 사장님 기분이 그렇게 나빠?”

“뭐… 아버지 입장에선 기분 나쁠 수도 있지만, 사고 안 쳤어요.”

“쳤단 말이군.”

주영이 형이 멋대로 판단하며 책상에 토익책을 주르륵 올렸다. 이불을 치우고 어슬렁거리며 걸어와 책상 앞에 앉았다. 아슬아슬하게 흘러내릴 것 같은 프린트물을 빼내 한쪽으로 모아두고 필통 지퍼를 열어 살폈다. 볼펜과 형광펜을 헤집고 샤프를 꺼내 들었다. 날카로운 촉 사이로 샤프심이 뾰족하게 나와 있다. 빈 여백에 심을 긁어보고는 태연하게 공책과 문제집을 펼치자 형이 의자 하나를 끌어다 앉았다.

“아침 회의에서 완전히 박살을 내셨다니까.”

“헤에… 그래서 형은요?”

“나는 보자마자 형은 아드님한테로 꺼지시지, 하면서 발길질하던데.”

“…성격 진짜 지랄 맞네.”

“괜찮아. 사장님이 나한테 질투하는 거 좀 재밌어.”

“그게 질투인가.”

한 번 더 질투하면 세상이 멸망하겠다고 중얼거리며 아무 답이나 찍었다. 주영이 형이 놀란 눈으로 나를 봤다.

“어, 어떻게 맞췄어?”

정답이었나보다. 떨리는 눈을 감추기 위해 쓱 눈을 내리깔며 대충 지껄였다.

“명사라서요.”

“…대박. 나 토익 강사로 전형할까. 사장님 비서로 사는 것보다 많이 벌지도 몰라…”

무지몽매한 인간의 되지도 않은 꿈을 응원해주며 영혼 없이 손뼉을 짝짝 쳤다. 형은 몽롱한 얼굴로 유명 토익 강사의 연봉이 몇천이더라, 이러면서 빈 종이에 이력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토익 300점에서 900점, 경이로운 결과! 라는 문장을 보고는 끅끅 소리 내서 웃었다. 찍어서 맞춘 걸 아는지 모르는지 형은 내게 계속 문제를 풀라고 다그쳤다.

느릿느릿 문제를 풀고, 오답 노트를 채워나가는 동안 시간이 느릿느릿하게 흘렀다. 형은 계속해서 내 공부를 봐주며 노트북으로는 꾸준히 일하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타자 치는 소리가 꾸준히 났고, 내 앞에서는 샤프심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꾸준히 났다. 한낮으로 올라간 기온을 코끝으로 느끼며 물었다.

“아버지는 지금 뭐 하고 계실까요?”

“응?”

내가 문제 푸는 모습을 턱을 괴고 지켜보던 형이 손목시계를 한번 들여다보곤 대답했다.

“오찬 미팅. 정부에서 지원하는 사업 때문에 직접 만나신다고 하셔서.”

“아… 중요하겠네요? 형이 없어도 괜찮아요?”

“사장님 수행 비서는 나지만, 실무 도와주는 비서도 여럿이라 그쪽에서 해결할 거야.”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고치고 샤프를 고쳐 잡았다. 이쪽저쪽으로 기울여 평범한 까만 제도 샤프를 확인했다. 무난하고 튼튼해 보였다. 형의 눈에 불안한 기색이 흘렀다. 남자의 비서로 오래 일을 해서 그런지, 형도 눈치는 빠른 편이었다. 사고 수습을 열심히 하고 다니면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만.

“또 사고 치려는 건 아니지?”

“형은 누구 편이에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형이 나를 보더니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내 편.”

“봐봐, 내 편도 아니면서.”

핀잔을 주며 손가락 위로 샤프를 가볍게 한 번 돌렸다. 고등학교 때 겉멋에 빠져 집게손가락 측면이 벌겋게 쓸리도록 연습했었다. 손가락 위에서 빙글빙글 팽이처럼 돌아가는 샤프가 얼마나 멋져 보였는가. 샤프의 축이 흔들거리며 회전하는 걸 보며 형이 다시 한번 물었다.

“…아무것도 안 할 거지?”

“글쎄요.”

“이소야?”

“일단 이 집에서 나가 볼까.”

손가락 위에서 돌고 있는 샤프를 바닥에 굴리고 다시 잡아챘다. 오른손이 힘껏 샤프를 움켜쥐었다. 이소야? 주영이 형이 불안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손을 뻗었다. 눈을 감지 않았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힘껏 뜨고 날카로운 샤프 끝을 왼쪽 손등 위에 그대로 찔러 넣었다. 처음 알았다. 둔한 금속이 피부와 손등뼈를 헤치고 들어가면 우두둑 거리는 소리가 난다는 것을.

바로 옆에서 목이 졸린 것 같은 경악이 터졌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피가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사장님 지금 오고 계신대.”

십 년은 늙어버린 것처럼 피곤해진 얼굴로 주영이 형이 말한다. 의사는 그 짧은 전언을 들으면서도 능숙하게 내 손등을 치료했다. 붉은 피가 바지를 흠뻑 적실 정도로 넘쳤었다. 붉은 얼룩이 가까이 다가온 순간에 자해라는 것이 무엇인가 짧게나마 생각했다.

고통을 얻는 순간 사고가 정지되자 편안했다. 복잡한 생각이 뒤섞이고 나를 찔러야겠다는 목표의식만 가졌을 때, 그 부유하는 마음, 풍선처럼 날아가던 감정. 왜 인간이 자살과 자해를 고민하는지 알아볼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약속 있다면서요?”

“연락받고는, 그 자리에서 탈주.”

“지원금 말아먹으셨네.”

시답잖게 툴툴거리는 대답에 주영이 형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상처가 아주 심하진 않아. 물에 안 닿게 조심하고.”

의료 도구를 정리하며 의사 선생님이 뻔한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샤프 안에 들어있던 샤프심이 부러져 들어가는 바람에 살을 헤집고 샤프심 조각을 꺼내고 소독하는 일련의 긴 치료를 보낸 직후였다. 마취로 통증도 없었다. 그냥, 인간의 살점은 저런 색이구나. 하는 뻔한 생각으로 지켜봤다.

자해를 시도한 순간부터 왼손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네가 필요 없어 도려낸 것이 아니냐는 것처럼, 냉정하게 행동을 묶었다.

침대에 가지런히 앉아 정면을 보았다. 주영이 형이 한숨을 쉬더니 주변을 전부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나 또 자해를 할까 물건이 몽땅 치워진 직후였는데도.

“나가 있을게.”

“…형.”

“응?”

“형은, 왜 아버지 옆에서 일해요?”

주영이 형이 눈을 굴리며 고민했다. 주영이 형은 능력이 있었고, 금전적 지원 몇 푼이 인생에서 충성을 바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형은 왜 아버지의 옆에 붙어 있을까. 내가 모르는, 그 사람의 인품과 인성이 훌륭한 부분이 있나.

“나도 처음에는 몰랐어. 그때는 어렸고, 10년도 더 넘어서 취직한 회사 사장님이 후원자일 줄도 몰랐지.”

“…아, 우연이구나.”

“응. 사장님 성함을 듣고도 몰랐는데, 나중에 후원내용 정리하다가 알게 된 거야.”

“그럼 그때부터 아버지 비서로 일했어요?”

“아니, 나는 원래 비서로 들어갔어.”

신기한 인연이다. 고개를 끄덕거리자 주영이 형이 덧붙였다.

“사장님은 그 사실 아시고, 좀 더 몸 바쳐 일하라고 주말에도 출근을 시키셨지.”

“하하, 아버지답네요.”

“그렇지? 은근히 평범하다니까. 그래서 나도 좀, 이소 네가 바라는 대답을 잘 해주진 못하겠네.”

의자를 밀어 넣고, 이불을 잘 정리해 덮어준 주영이 형이 마지막으로 피가 빠져나가 하얗게 질린 내 손등을 꼼꼼히 뜯어 보았다. 지혈제를 뿌렸지만 상처는 꽤 깊었고, 피가 많이 흘렀다.

“미안해.”

“괜찮아요, 형도 아버지 편에 가까운 건 어쩔 수 없죠.”

같이 지낸 세월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남자가 아무리 개 같은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주영이 형의 등을 밀어 내보냈다. 형은 불안한지 몇 번이나 내게 쓸데없는 말을 붙이며 방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혼자 쉬고 싶다는 말을 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방이 조용해졌다.

빛무리가 산란한다. 품에 떠맡기는 것처럼 내리 쬐는 늦은 오후 햇살로 몸을 무덤처럼 덮고 눈을 감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무래도 나는 지난 1년은 전부 회고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모양이다.

정확한 이유나 순간이 있었던가? 감이 오지 않는다. 지난봄 엄마의 재혼 소식을 알린 이후부터? 처음 남자를 만났을 때 그 사람이 내게 어떻게 했더라. 차가운 손가락이 나를 훑고 떨어져 나갔다. 겉껍데기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꼿꼿하게 하얀 얼굴, 검은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갈색 눈동자. 입에서 터져 나오는 시린 언어들.

그때는 아니야. 고개를 저었다. 단호하게 그때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처음 남자를 거역하고 호텔 방에 감금당했을 때. 그때도 아니다. 그 집에 들어가기 직전, 남자가 앞으로의 삶이 기대된다 말하며 웃었을 때. 그때도 아니었다. 남자가 나를 계단에서 집어 던졌을 때?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이 집을 나가려고 생각했었지. 아, 그때 팔다리가 몇 번 부러져도 나갈 걸 그랬다.

웃음이 나온다. 몇 번이나 탈출할 방법은 많았다. 남자가 나를 완전히 사랑한다 말하기 이전에도 여러 차례. 나를 사랑한다 말한 뒤로도 여러 차례.

끝은 나를 찾아 늦은 밤 택시를 타고 쫓아왔던 남자의 더러워진 차가운 발을 생각한다.

그 날 밤, 한강의 물은 어땠더라. 맥주의 맛은, 밍밍하고 차가웠지. 창백한 남자의 뺨이 나를 보며 안도할 때, 찬 발에 양말을 신겨주던 시간. 택시에 나란히 앉아 내 손바닥을 긁적이던 손가락의 온기.

문이 열린다. 시체처럼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 앉았다. 가지런하게 올라가 있는 두 손을 보며 남자가 입술을 인형처럼 달싹거린다.

“왜 그랬어?”

사람의 근육은 튼튼하고 질기다. 뼈는 단단하다. 그러나 의사는 흉은 남을 거라고 말했다. 파내진 살점을 전부 채울 수 없어서 붉고 하얀 흉이 오래 손등에 자리 잡을 거라고.

“…내 말 안 들려?”

핏물이 얼룩진 샤프는 버려진 지 오래되었다. 얇고 차가운 금속이 살점을 헤집을 때 나는 그것이 내 뇌를 관통하지 못한 것이 서러웠다.

다급하게 뛰어왔는지 남자의 얼굴이 붉게 변해 있었다. 흐트러진 옷차림 사이로 팽팽하게 와이셔츠가 당겨졌다가 반듯하게 펴지길 반복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게 육안으로도 보였다. 한 번쯤 더 보고 싶었다. 나 때문에 완전히 흐트러진 얼굴을. 겨울 강물을 따라 흘러갔던 시간처럼, 이번에도 그에게 내 양말을 신겨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중요한 미팅도 내팽개치고 뛰어올 만큼 남자는 예민하게 굴었지만, 내 상처와 행동을 걱정하기보다 붕대를 칭칭 동여맨 손등을 내려다보며 고함을 지르는 쪽을 택했다.

“물어보잖아!”

남자가 이 정도로 화를 내는 건 처음 봤다. 통증으로 움직여지지 않는 손등을 가볍게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 약속 있으시다더니, 왜 오셨대요.”

“정말 어쩌자는 거야!”

“집에 있기 갑갑해서 좀 찔러봤어요.”

무신경한 대답에 화로 남자의 눈이 붉게 타올랐다. 입술을 질끈 깨문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와 내 왼손을 잡아챘다. 꽁꽁 얼어 있었고,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눈을 내리깔고 남자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남자가 울컥 힘을 줘 손을 잡는다. 봉합한 상처가 다시 터지는 느낌에 이를 악물었다.

“아파?”

“……”

“아픈 짓을 왜 한 건데?”

감정에 찰나는 없었다. 순간도 없었다. 도망쳐야겠다고 뒤를 돌아봤을 때는 이미 갯벌을 들이키고 차오른 바닷물이 나를 삼킨 뒤였다. 남자의 차가운 손이 내 뺨을 만질 때, 웃을 때, 엉망이 된 내 손을 치료해 줄 때.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그런 것들이 전부 남아 버렸다.

이미 질식해 호흡과 사고가 막힌 뒤라 몰랐다. 그저 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분노하고 있는 힘껏 숨을 쉬려고 애쓰느라 바닷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알아버리면, 끝나니까.

남자를 정말로 싫어하고 증오한다. 단 한 번도 남자가 나를 사랑해주길 바라지도 않았고, 그가 내 엄마를 사랑하길 바라지도 않았다. 나의 아버지가 되었다거나, 그래서 강간을 당하고 싶었다. 강간범에게 감정을 가질 피해자는 세상에 없으니까. 그에게 어떤 감정도 가져서는 안 돼. 매몰차게 내 뺨을 후려친 차가운 공기.

굴욕적이다. 커다란 위경련이 나를 지배했을 때, 공기와 세상이 이미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하는 것은 상관이 없다 질타하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고집을 부렸다.

추악하고, 멍청했다. 그 뒤에도 나는 남자의 행동 모든 것에 상처를 받았다. 남자의 행동이 변하기를 바랐고…가정하고…상상했다. 그 일이 있었던 뒤에도, 일련의 행동으로 나를 사랑한다 주장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나는 무엇을 느꼈지.

과연 역겹기만 했던가.

“내가 노력했잖아. 네게 부족한 게 애정이라면, 그만큼 줬잖아!”

나는 오로지 피해자의 입장에서 남자를 대했던가. 남자가 부어주는 애정에 목이 말라 헐떡거리지는 않았나.

해가 바뀌던 신년의 생일, 쑥스럽게 웃으면서 생일을 축하한다고 말하던 남자를 보며 우월감을 느끼지는 않았어?

자아는 대답이 없었다. 정신은 연약하다. 그 누구도 강하지 않다. 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얻어낸 것도 없이 잃어버리기만 하며 보내왔다고 생각한 시간이 울부짖는다. 잃어버린 게 아니야, 버린 거지. 태우지도 못할 쓰레기에 억지로 불을 붙였다.

화마는 거셌다. 넓은 토지, 광활한 대지를 전부 태워 먹고 공기까지 오염시켰다. 혀끝에서 핥아지던 불타 누수 하던 감정의 맛이여.

“도대체 뭐가 문제야? 화를 내지 않아도, 사랑한다고 아껴줘도, 왜 너는 이러는 건데?”

“…나를 사랑하면, 내가 변할 것 같았어요?”

“사랑이라는 게 그런 거 아냐?”

비뚤어진 감정을 사랑이라 착각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남자의 장단에 발을 맞췄다. 영화처럼 그려지는 남자의 미소와 음성에, 다정하게 뺨과 귓불을 매만지는 손길을 종종 기다렸다. 숙제를 열심히 했을 때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것마저도.

“아버지는 변하지 않았잖아요.”

“내가 왜 변해야 하는데?”

순수하게 남자를 증오했다면 하지 않았을 선택들이었다. 불순물이 섞여 탁해진 분노는 불꽃 사이로 재를 한 줌 던져 넣은 것처럼 남자의 지독한 심리에 소실되었다.

결국 터져버린 상처에서 다시 붉은 피가 흘렀다. 고통으로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액체를 맛봤다. 지독하게 쓰고 짠 맛이 났다. 달고 습했다.

“사랑을 줘서, 나를 변화시키고 싶었어요?”

“……”

“아버지가 늘 만드는 배와 비행기처럼, 나도 만들어 내고 싶었어요?”

흐릿한 남자의 얼굴이 내 얼굴을 한참이나 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천천히, 가볍고 진중하게. 손끝이 나에게 닿을 듯 파르르 떨리면서.

“…그래. 쓸모 있게.”

“쓸모 있게?”

“네가 쓸모 있어져야 쓸 수 있으니까, 그게 뭐가 나빠?”

“그냥, 그러기 위해서 나를 좋아했어요?”

“응.”

“……정말로?”

“……아마도.”

남자는 그래. 변함없이 최악인 생명체였다.

눈물은 끝없이 흘렀다. 멍청하게 속아 넘어간 내가 병신이었다.

“…당신은. 정말.”

“정말, 뭐?”

“최악이에요.”

내 평가에 남자가 얼굴을 굳히고 있다가 픽 웃어버린다. 그에게는 내 터진 상처와 아물지 못한 감정의 아교가 보이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이 될 관계로 만나지 않았으면, 변했을까?

남자는 내게 가치를 따지지 않고 사랑을 줬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필요로 나를 사랑했다 말한 남자. 사랑하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는 남자. 정말로 나를 사랑했으면 그는 나를 외롭게 만들지 않았겠지. 오목조목 잘 짜인 남자의 눈과 코와 뺨을 건드리고, 쓰다듬어 보고 싶어 생각한 도려낸 나를 꺼내 들었다.

부스러기 같아 안타까웠다. 날려 보낼 때가 되었다. 내 노력은, 눈을 감고 발버둥 치던 과정들은 결국 끝이 나버렸어.

“…인정할게요.”

갈색 동공과, 까만 머리카락을. 큰 키와 독설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던 목소리를. 차갑기만 한 손가락이 뜨거워질 때. 조금이라도 그 마음을 생각한 내가 나쁘다. 잘못되었다.

“아버지를 사랑했어요.”

창백하게 질린 남자의 얼굴을 보고 한 번 웃었다. 내가 왜 당신을 사랑했을까?

후회한다.

나조차도 인정하지 못한 연민, 동정, 이름을 바꾼 사랑으로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인정하지 않았기에 몰랐다. 완벽하게 모르는 척 증오만으로 똘똘 뭉쳐 남자와 대립했으니 나조차도 내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제자리걸음을 걸으면서 전력질주를 하는 척 애썼던 지난 몇 달, 나는 얼마나 열정적으로 나를 갉아먹었던가.

닮아버렸을지도 모른다. 오직 아름답다는 가치만 추구해서, 정박하지 말아야 할 곳에 무언가를 남겼다.

“…사랑했었어요.”

“……”

“그랬습니다.”

“……나를?”

“나 때문에 하얗게 질려, 헐레벌떡 달려오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

“혹시나 이번에는 다정하게, 내 손을 치료해줄까… 싶어서.”

그의 아름다운 손에 들렸던 핀셋, 날카롭게 깨져버릴 수 있는 그 산산조각의 아름다움. 남자의 계획 속에서 흔들렸던 나와 엄마, 뿔뿔이 흩어진 나의 존엄성과 가치관.

화마를 참고 견디려던 나에게 건네졌던 그날 서재 안의 고요한 치료가 나를 이곳 까지 데려 왔다.

“미안해요.”

결국 모든 것을 버렸다.

나는 졌다.

그렇기에 이겼다.

아름다운 얼굴과 미친 성정을 한 남자를 조금이나마 사랑했다. 그것을 말했고, 이제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란 쌍방향이 되어서는 안 된다.

흩어지는 가을, 더러운 겨울. 따뜻하고 온화한 척 숨을 막았던 나의 마지막 봄날. 따뜻하다 생각한 순간 내 뺨과 목덜미를 훑는 꽃샘추위가 지겹게도 불어왔었지.

하지만 시간이 움직여 이제 다시 봄이다. 또 봄이 오셨다.

“나를 사랑한다고?”

“그랬었죠.”

한 10초 전부터 과거가 된 이야기를 남자가 물어온다. 부정도 긍정도 않았다.

“언제?”

“글쎄요.”

“말해줘.”

남자는 조급한 목소리로 나를 재촉했다. 긴장한 듯 바르르 떨리는 입술과 파리하게 질린 안색을 보며, 내 고백이 그렇게 놀라운 부분이 있었나 고민했다.

결국 내게서 사랑을 얻어 내고자 그렇게 열정적으로 굴었는데, 지금 와서 내가 남자가 보여줬던 단맛에 혼과 넋을 빼앗기지 않았을 거라 단정 지어 생각하다니. 지독하게 싸우기도 싸웠다. 순수하게 남자가 싫기만 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싫다는 생각이 너무 당연해서 하지도 않았다.

호감과 애정이 자라는 걸 느끼고는 그렇게 열심히 남자가 싫다고 혼자 곱씹고 되뇌어왔는데 쓸모없는 일이 되었다. 마음은 막을 수 없다. 속만 썩었다. 지금 내 배를 갈라보면 악취가 나지 않을까, 불안한 생각을 하며 고민하다 대답했다.

“…내 손을, 치료해 줬을 때?”

일주일 동안 열심히 만든 군함을 박살 냈는데도 화를 내지 않았다. 양이태라는 사람을 그때 처음 만났다고 생각했다.

“내게 예쁘다 웃어줬을 때?”

애정이 싫기만 할 수는 없다. 내게 예쁘다고 해준 사람은 이때까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안아줬을 때.”

외롭고, 아플 때 엄마도 아팠다. 모두가 외로워서, 다들 오도카니 홀로 있었다. 남자는 외롭다고 말하면서도 나를 안아 주었었다. 단순히, 성희롱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이마를 맞대고 가만히 있을 때.”

체온을 공유하던 그 순간이 고요하고 너무 좋아서.

“같은 공간에서 둘이 손을 잡을 때.”

감각이 채워지는 것 같아서, 풍요로워진다는 착각을 했다. 그렇지만… 나를 그렇게 하찮게 보던 사람이, 갑자기 내가 귀한 사람인 것처럼 다정하게 대해주니까. 설렜다. 미워서 기분이 좋았다. 매일매일 울고 싶었다.

“나를 사랑한다, 말했을 때.”

그 순간 헛된 망상을 꿈꿨을 정도로.

“아버지가! 나를 혼자 회사로, 공항으로 보냈을 때도.”

“…….”

“주영이 형을 시켜서 방관하며 나를 외롭게 버텨내게 했을 때도!”

점점 나를 갉아먹고, 상처받게 했을 때도 혹시 아니길 바랐다. 사회적으로 나를 지키는 걸 바라는 게 아니었다. 내몰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여겼다. 무언가 내게 먼저 말을 해주고, 같이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나를 강간하기 전에도, 나를 강간한 후에도.”

너를 강간하고 싶지 않았다고 해줬으면 좋았을 것이다. 입에 발린 사랑 노래가 아니라 나를 멈춰주기 바랐다. 직선밖에 없는 이 도로에서, 잠깐 갓길에라도 멈춰서 쉬자고. 숨 가쁘게 달리면 힘들지 않냐고.

“생일을 챙겨줬을 때, 근영이가 불렀다고 잠도 못 잔 상태로 왔을 때, 거리에서 내게 사랑한다고 해줬을 때. 나를 따라 바다에 왔을 때도…희망을 품었어요.”

“희망?”

“진짜 사랑인데 단지 서툰 것일지도 모른다는 희망.”

“……”

“나도, 서툴렀으니까… 당신도 그런 게 아닐까 싶었어.”

“사랑.”

내 말을 되풀이하는 남자의 언어는 시위를 떠난 화살이다.

“…사랑해서, 희망을 품었어요. 언젠가…내게…효용성 말고 다른 걸 찾아주겠지……싶어서.”

사랑을 주는데 뭐가 문제냐고 화를 내지 않았으면… 이게 이기고 지는 전쟁이 아니라 그냥, 강물이 합쳐지는 바다처럼 자연스레 있어 주었으면. 그냥 순수하게 내가 좋다고, 단 한 마디만. 내가 우연이 얻어걸린 아들이 아니라 이소라서 좋았다고만.

“달라질 거라고, 달라지면…”

말이 이어질 때마다 남자는 굳은 석상처럼 눈에 충격적인 기색을 담은 채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웃음이 픽 새어 나왔다.

“모든 걸 버리고 당신을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로맨틱한 생각도 했어요.”

그러나 모든 운명적 로맨스는 영화를 위해 준비된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인생은 얼마나 더 바닥으로 갈 수 있는지를 위해서만 운명을 논한다.

얼굴과 혓바닥을 적시는 축축한 눈물의 맛. 인생이란 쓸 정도로 짠맛.

“그렇지만 결국 내가 틀렸던 거예요. 대단해, 나라면 그렇게 열정적으로 사랑 흉내 못 내.”

“그럼 어쩔 건데?”

남자가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얼굴 가득 드러난 불쾌감과 혐오감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결국, 이렇다. 가볍게 시트를 밀어내고 주름진 허벅지의 바지를 손바닥으로 펴며 대꾸했다. 붕대를 가볍게 물들인 핏물이 흰색에 섞여 핑크빛이 되었다.

사랑은 핑크빛. 핏물 배인 색.

“도망갈 거야.”

“도망간다고?”

“그래.”

“왜?”

얼빠진 대화라 생각하면서도 나는 꾸준히 대답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날 사랑한다며?”

“이젠 아니야.”

“어째서?”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요.”

“사랑한다고 했잖아.”

몇 분 전 끝난 사랑을 되묻는 남자가 지겨웠다. 남자와의 다툼과 전쟁은 이런 식으로 끝이 없었다. 불쌍한 얼굴을 하고 자신이 한껏 피해를 본 것처럼 굴어온다. 초조한 듯 아랫입술을 질끈 깨무는 남자를 보았다. 분노가 뱃속에서 들끓고 일제히, 그리고 열렬히 일어나 고함으로 터졌다.

“나는!”

울먹이며 소리 지르는 나를 보고 남자가 충격받은 낯빛을 했다. 후련할 정도로 못난 그 얼굴에 몸을 뒤틀면서 재차 외쳤다.

“필요 때문에 하는 사랑은 원한 적 없어!”

그래서 당신이 하는 사랑을 거절했던 것이라고. 아버지의 사랑 따윈 바란 적 없다 그렇게 피를 올리며 몇 번이나. 수없이 많이 당신의 성욕을 채우기 위한 사랑 방식에 변기를 붙들고 토악질을 했다.

남자라서, 성감대를 자극해서, 어쩔 수 없이 성적으로 쾌감을 느끼고 사정하면 괴로웠다. 인간의 번식 본능은 대단하다고…생각했다.

넥타이를 풀어 손에 차곡차곡 접어들고,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남자가 걸어 왔다. 구둣발 소리는 크고 선명했다. 내 앞에 서서 허리를 굽히고 얼굴을 바짝 들이민다. 고집으로 앙 다물린 뺨이 볼록하다.

“얼굴이 부었네.”

정작 그 말은 남자가 했다. 긴 손가락이 내 뺨을 툭툭 두들긴다. 주먹 안에 들어있던 긴 넥타이 끝이 스르륵 풀려 바닥을 향해 흘러내렸다. 남자가 친절히 두 손으로 넥타이를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눈 감아.”

“…….”

“네 눈 지금 보면 엄청 화날 거 같거든.”

꿀을 가득 떠 삼킨 것 같은 목소리가 조곤조곤 귓가에 내려앉았다. 점잖은 분노가 서린 남자의 눈동자를 보다 순순히 눈을 감았다. 한 번쯤 예상했다. 눈꺼풀을 닫자마자 남자가 넥타이로 내 눈을 가렸다. 뒤쪽에서 매듭을 꼼꼼하게 묶은 남자가 몇 번 흘러내리지 않을지 확인하고는 내 상의를 벗겼다. 맨살에 손바닥이 닿자 몸이 츱츱했다.

"이거 강간이야."

나지막히 남자의 행동을 일렀다. 남자가 잠깐 멈칫 하더니 웃으면서 내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왜, 싫어?"

"싫어."

"이미 당했는데, 한번쯤 더 당해봐."

"하면."

"하면?"

"정말 용서 안 해."

"아, 무섭기 짝이 없군."

남자가 태연한 목소리로 맞받아쳤다. 침을 꿀꺽 삼켰다. 남자는 파르르 떨리는 내 팔과 가슴을 손가락으로 두들기듯 매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도망간다니.”

혓바닥이 허리를 가볍게 핥는다. 축축하고 뜨거운 해면체에 몸이 움찔 떨렸다.

“그건 안 돼.”

냉엄한 목소리를 잡기 위해 암흑 속 두 팔을 허공에 뻗어 더듬었다. 남자는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 냉정하게 내 팔을 내치고 바지를 벗겼다. 브리프 한 장만 걸치자 소름이 돋았다. 몸을 웅크리기 위해 허벅지를 움직이자마자 남자가 안으로 가볍게 파고들었다. 묵직한 체중이 움직이자 침대 매트리스가 휘청거렸다.

“야무지게 입 닫고 있어. 방음이 얼마나 좋을지 실험하기 싫으면.”

“뭐…읏!”

치아가 유두를 질끈 깨물었다. 아파서 눈물이 핑 돌았다. 시야를 가린 넥타이 천이 금방 축축해졌다. 심하게 따끔거리고 쓰라린 유두에서 혹시 피가 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까지 들었다. 남자는 여린 부위를 사정없이 깨문 뒤에 천천히 혀끝으로 그 주변을 핥았다.

쪽, 살과 살이 가볍게 마찰하는 키스 소리를 듣고 어깨를 떨었다. 가슴 주변을 샅샅이 핥던 남자의 손가락이 허벅지 안쪽을 더듬었다. 숨을 길게 들이마신 채로 호흡을 멈췄다. 남자가 부풀어 올랐을 내 가슴팍을 이로 질끈 깨물며 브리프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뜨겁네. 남자가 중얼거리며 성기를 주물렀다.

직접 주어지는 성적인 쾌감에 입술을 깨물며 애써 신음을 참았다. 병원이었다. 간호사가 언제 들어올지도 몰랐고, 병실이 아무리 넓다 해도 방음도 역시 신경 쓰였다. 여긴 호텔이 아니다. 어떤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방음이 형편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성대가 졸리는 기분이었다.

“하아…오늘 완전히 여기를 찢어버릴 거야.”

남자가 중얼거리며 엉덩이 안쪽을 쓰다듬었다. 손가락이 흉포하게 구멍 입구 부분을 긁어댔다. 준비된 건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안쪽이 찢어지는 고통은 얼마나 클까. 상상만 해도 끔찍한 통증에 저절로 땀이 배어 나왔다.

“완전히 풀어져서, 흐물흐물해서 좆을 빼기만 하면…정액을 질질 싸지르는 구멍으로 만들어줄게.”

“싫…!”

“그럼 이제, 너덜너덜해진 구멍을 내보이면서 자지 먹여달라고 허리를 흔드는 거지.”

내가 너 좀 봐주고 있었던 건 모르겠지. 남자가 내 머리를 잡아 누르며 회음부 안쪽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통증에 숨이 꽉 막혔다.

“아…아프…!”

“입 다물고 있어.”

남자가 협박하듯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내 몸을 짓누른 몸이 조금 앞으로 움직이더니 다시 돌아온다. 병뚜껑 열리는 소리가 나며 하체 위에 차가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침대 테이블에 올라가 있던 생수였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남자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고간을 드러낸 채 움찔거렸다. 차가운 액체를 뒤집어쓰자 저절로 몸이 떨려왔다.

“손가락만 넣어줘도 좋아 죽으니 다행이야, 이소야.”

이름을 부르며 남자가 다시 내 엉덩이를 쥐어짜듯 비틀어 벌렸다. 손가락이 머뭇거리는 기색도 없이 젖은 채로 찔려 들어왔다. 내벽을 사정없이 열고 들어오는지 눈물이 터졌다. 쉴 새 없이 눈물이 축축하게 흘러 눈을 가린 천을 흠뻑 적시기 시작했다.

목소리를 줄여 가며 꺽꺽 울어도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안을 들쑤셨다. 긴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끝까지 박혀 들어오면 성기에 꿰뚫리는 것처럼 속이 거북했다. 남자는 의도적으로 전립선을 빗겨 치고 있었다. 손가락 두 개가 제집인 것처럼 뱃속을 헤집고 넓혔다.

“으…흐으, 흑.”

통증뿐인 손짓에 울음이 새어 나왔다. 이를 악물어도 고통이 끝이 없었다. 점점 더 커지기만 하는 울음소리에 남자의 행동이 잠시 멈추더니 이내 몸이 돌려졌다. 얼굴을 침대 위에 누른 채 허겁지겁 베개를 쥐어뜯었다. 양손이 베갯잇을 꽉 쥐자마자 남자가 허벅지를 벌리고 엉덩이를 벌렸다. 허옇게 드러났을 부위에 대한 수치도 잠깐이었다. 다짜고짜 손가락이 꽉 구멍 안을 벌리고 들어왔다. 젤 대신 쓴다고 부었던 물은 메말라버린 지 오래였다. 뻑뻑하기만 할 곳을 눌리고 잡아 벌리던 남자가 짜증을 냈다.

“좁은데.”

“아프, 흑, 아파.”

“더한 것도 받아먹는 주제에 뭐가 아파.”

냉정하게 애원을 무시한 남자가 손을 뻗어 내 가슴을 훑었다. 손바닥에 유두가 스치자 금방 몸이 달아올랐다. 이 빌어먹을 몸뚱이. 욱욱 소리를 죽이며 베개를 꾹 쥐었다.

바지 버클이 풀리고 퍼스너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뜨거운 성기가 바짝 엉덩이 사이에 다가왔다. 설마 벌써. 불안한 느낌에 손을 뒤로 뻗으며 허우적거렸다. 남자가 내 손목을 붙잡으며 혀를 찼다.

“가만히 있어.”

“안돼, 못해. 지금 안, 안돼.”

“…징징 거리지 마.”

발기했는지 딱딱한 성기가 서서히 엉덩이골 사이에서 마찰했다. 쓱쓱 성기 전체가 문질러지더니 위협적으로 선단이 회음부 입구를 꾹꾹 누르다 다시 떨어져 나갔다. 입을 벌린 채 헐떡거리며 부들부들 떨었다. 남자가 등 뒤에서 웃음소리를 내며 다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제대로 힘 빼. 만져줄 테니까.”

“흐으…흣, 으으.”

허벅지를 부들거리며 호흡을 다잡으려고 애썼다. 입구를 벌리고 꾸역꾸역 밀고 들어온 손가락이 가볍게 안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더니 한 부위를 꽉 쑤셨다. 살점을 헤집는 손길에 숨이 턱 막혔다.

“아!”

통증 뒤에 찾아온 쾌감은 굉장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저절로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남자는 방금 자신이 찔러댄 부위를 힘을 줘 문질렀다.

“으, 흡. 아으으.”

“흐물흐물…”

조롱하며 남자의 손가락이 그 부위를 몇 번이나 콱콱 처박듯 들쑤셨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을 만큼 빠르고 위협적이었다. 엉덩이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이 빠져나갈 때조차도 쾌감이 고조되었다. 손가락을 끝까지 처박고 비틀듯 돌리자 저절로 허리가 떨렸다.

“아, 아아…”

“이거 봐, 손가락부터 꽉꽉 물고 빨아대는데…”

“흐읏. 읏, 아!”

“뭐가 아프고 뭘 못해. 아하, 좆 물려줄까? 먹을래?”

“싫, 으…흐읏, 웃.”

“싫긴.”

손가락이 빠져나가자마자 빠르게 성기 끝이 입구를 쑤시고 들어왔다. 손가락과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부피감에 기절할 것처럼 파도 같은 고통이 몸 전체를 덮쳤다. 어깨와 허리를 쓰다듬던 남자가 두 손으로 엉덩이를 쭉 벌렸다. 한계까지 벌어진 회음부를 더 헤치며 성기가 꾸역꾸역 들어왔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삽입에 엉엉 울었다.

비명 같은 소리를 낼 때마다 남자는 엉덩이를 때렸다. 손바닥이 볼기를 두들기자 짜악 하는 마찰 소리가 났다. 맞은 피부가 화끈거린다. 그만해, 애원하며 머리를 미친 듯이 가로저었다. 남자는 배려 없이 계속 엉덩이를 때렸다.

“힘 빼.”

“아악! 아, 읏!”

“빼라니까, 자지를 아주 뜯어 먹을 생각이야?”

“그…만, 아아! 아, 싫…!”

뿌리 끝까지 꾸역꾸역 파고든 성기가 뒤로 한 뼘이나 빠져나가더니 다시 길을 파헤치고 밀고 들어왔다. 처음 입구를 벌리는 귀두와 궁둥이에 부딪히는 고환의 모양까지 생생했다. 처음 했을 때도 이 정도로 아프진 않았다. 시트를 긁어대며 몸서리치다 순간 힘이 쭉 빠졌다.

“쌌어?”

“으…아으…흑, 흐윽.”

새카맣게 묶인 시야 뒤로 남자가 헛웃음을 지으며 축 늘어진 성기를 주물렀다. 정액을 터트린 성기는 축축했다. 남자가 손가락으로 성기를 동그랗게 말아 잡고 흔들었다.

“아프다고 지랄하면서 왜 싸?”

“흣, 아읍, 흑.”

“하여튼…”

엉덩이에 성기를 삽입한 채로 남자가 몇 번 더 내 성기를 잡아 흔들자 다시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남자의 선단이 정확하게 전립선을 꾹꾹 눌러댔다.

“혼자 가면 안 돼. 제대로 엉덩이로 빨아. 알았어?”

“흑, 으아, 그만, 웃,”

“맛있게 먹어야지, 이 구멍으로 좆도 정액도 쭉쭉 빨아 먹어.”

내 몸은 왜 이딴 식이야. 분명히 아팠는데. 눈물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남자는 내가 울어도 신경 쓰지 않고 단호한 손짓으로 다리를 벌리고 엉덩이를 쥐었다. 방금 손바닥으로 맞은 엉덩이가 쥐어 뜯기자 쓰라렸다. 훌쩍거리며 시트 위에 이마를 문질렀다. 남자가 허리를 뒤로 잠깐 물리더니 다시 안으로 쑥 들어왔다. 안에 경련이 나는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정확하게 느끼는 부분을 문질렀다 빠져나간 성기는 금방 간격을 짧게 해서 안으로, 안으로, 끝도 없이 다시 들어왔다. 귀두가 내벽을 툭툭 긁고 나갔다 쑥 들어와 처박히면 저절로 비명이 터졌다. 남자가 손바닥으로 다시 엉덩이를 때렸다. 살이 부딪치는 커다란 마찰음과 화끈한 통증에 저절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그렇게 조여.”

“으읏, 흑, 아프…아! 아!”

“쭉쭉 빨아 먹어, 오늘 네 구멍에 좆물을 아주 존나게 먹여줄게.”

남자가 음담패설을 지껄이며 구멍 틈새를 더 벌렸다. 이미 발기한 성기를 물고 있는 구멍을 더 벌리자 공포에 가까움 울음을 터트렸다.

“아프, 제발. 흐으으, 으아… 싫어어…”

“싫으면, 후우, 제대로 흔들어.”

뜨거운 손바닥이 고환을 주무르고 성기를 비튼다. 격통 같은 쾌감에 흐느끼며 억지로 허리를 움직였다. 남자가 박자를 맞추듯 천천히 허리를 같이 움직였다. 성기가 반쯤 빠져나갔다 다시 쑤셔박힐 때마다 몸 전체가 저렸다.

빌어먹게도, 쾌감이 너무 컸다. 점점 더 허리를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짐승처럼 엉덩이만 든 채 남자에게 박히고 있는데도, 안을 파고 들어와 마음대로 휘젓고 떨어지는 성기가 너무 좋았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남자의 하체에 궁둥이를 붙인 채로 마음껏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앞으로 조금 빠졌다 다시 뒤로 물리면 성기가 끝까지 들어오며 구멍 입구에 고환이 철썩거리며 부딪친다. 그것까지도 좋았다.

“응, 아아, 흑, 아! 하읏!”

“씨발…음란해서는.”

“하아, 아, 거기, 으응, 제발, 하…!”

남자가 성기를 넣은 채로 하체를 잡아당겼다.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질질 끌려가며 그대로 꽉 눌리듯 박혔다. 지나칠 정도로 쾌감이 거셌다. 보지 않아도 성기에서 정액이 줄줄 터지는 게 느껴졌다. 울면서 앞으로 기어갔다. 미칠 것 같았다. 아픈 것도 가장 아팠지만, 느끼는 것도 최대치였다. 처음 경험했을 때보다 더 심하게 하체가 아려왔다. 성기가 간지러워 벅벅 긁어버리고 싶었는데, 남자의 성기를 삼키고 있는 구멍 안쪽은 더 심했다.

몸 상태를 알아챘는지 남자가 더 난폭하게 구멍 안쪽을 후벼 팠다. 아무 곳도 만지지 않고 골반만 쥐어짜듯 잡고 들쑤시는데도 미칠 것 같았다. 온몸이 성기가 된 것 같았다. 그냥 남자의 성기가 들어와 안쪽을 긁어주면 좋아서 까무러칠 것 같았다. 퍽, 퍽, 하체를 밀어붙이는 남자를 따라 허리를 흔들며 울었다. 남자가 골반을 딱 붙인 채로 허리를 계속 흔들었다.

이미 끝까지 들어온 성기가 더 파고든다. 고환까지도 들어올 정도로 거세게 뚫고 들어온 성기가 전립선을 꽉 긁어댔다. 남자의 허리짓이 빨라졌다. 벅차오르는 사정감에 입을 벌리고 숨을 헐떡거리며 엉덩이를 조였다. 제발, 뭘 바라는지도 모르고 울며 애원했다.

“흑, 제발…아웃, 하, 으응!”

“싸줄, 테니까, 후, 잘 받아먹어. 알았어?”

“싫, 아, 그만! 그…아아아!”

철썩, 엉덩이를 때리고 안에 들어온 남자의 성기가 안쪽에서 터졌다. 축축하고 뜨거운 액체가 뱃속에 고였다. 입에서 타액이 뚝뚝 떨어졌다. 성기는 진작 정액을 줄줄 사출하고 있어 시원하게 쾌감이 터지지도 않았다. 뒤로 정액을 받아먹으며 오르가즘을 느꼈다. 내벽까지 부들부들 떨며 남자의 성기를 조였다. 미칠 것 같았다.

남자가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흐트러트리더니 눈을 가리고 있던 넥타이를 벗겨냈다. 들어오는 빛에 눈이 부셨다. 반쯤 눈을 뜨고 움찔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끝내주는데…”

입술을 혀로 적시며 남자가 내 몸을 돌렸다. 성기가 박힌 채로 몸이 돌아가자 죽을 것 같았다. 입술을 깨문 채 쾌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정자세로 누웠다. 활짝 열린 다리 사이에 정액으로 범벅이 된 고간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반쯤 서서 꺼떡거리고 있는 성기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남자가 웃음 지었다.

“아주 줄줄 싸더라고. 그렇게 좋았어?”

“흐…하아, 아…”

“뒤로 좆 받아먹는 기분은 어땠어…?”

발목을 잡아 들어 올린 남자가 자신의 허벅지 위에 내 허벅지를 겹쳐놓으며 물었다. 활짝 열린 다리와 엉덩이 사이를 꼼꼼하게 훑어보던 남자가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다 풀렸네.”

남자의 말대로 흐물흐물할 정도로 풀린 구멍은 손가락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어 치웠다. 손가락이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찌걱거리는 정액에 젖은 소리가 났다.

“그만, 힘들어…”

쉬어버린 목소리를 쥐어짜 냈지만 남자는 보란 듯이 좀 더 세게 손가락을 흔들어댔다. 여린 살점을 헤집을 때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남자가 손가락을 빼냈다. 흰 정액으로 젖어 있는 손가락을 보란 듯이 눈앞에서 흔든 남자가 허벅지를 꼼꼼하게 벌리고 선단 끝을 입구에 문질렀다. 어느새 다시 발기해 있는 성기의 열기로 후끈거렸다.

애원해도 들어줄 사람이 아니었다. 눈을 꽉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가 유두를 꼬집으며 성기를 다시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한 번 정액으로 젖은 안으로 삽입하는 건 훨씬 쉬웠다. 아릿한 둔통보다 쾌감이 더 빨리 찾아올 정도였다.

눈을 깜박이자 눈물이 떨어졌다. 남자가 허리를 숙여 내 눈가를 핥았다. 혀끝이 눈두덩이를 빨고 떨어져 나오자 시야가 깨끗해졌다.

남자가 가볍게 입맛을 다시더니 허리를 움직였다. 성기 끝이 정액이 고여있는 배 안쪽으로 후벼 팠다. 아아, 몸을 떨며 신음하자 남자가 제대로 추 삽질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 쪽에 손을 단단하게 짚은 남자는 금방 섹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몸짓은 금방 빨라졌다. 남자의 어깨에 매달려 상체를 웅크렸다.

“아, 흣. 읏, 으으응. 하…”

빳빳하게 발기한 성기가 남자의 복부에 문질러진다. 앞뒤로 오는 쾌감에 머리 한쪽이 녹아내렸다. 성기를 삼키고 있는 구멍도, 얼굴도, 몸 전체가 죄다 풀어진 것 같았다. 울먹이며 신음을 내뱉었다. 여자도 아닌데 날카로운 교성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때마다 남자의 추삽질이 더 격렬해졌다.

“여기 찔러주면 좋아?”

“좋, 으…흡, 웃, 아읏!”

“진짜 좋은가 보네. 너 얼굴이 완전히 풀렸어.”

눈물을 후드득 떨어트리며 도리질을 쳤다. 남자가 허리를 좀 더 들어 올렸다. 반쯤 공중에 뜬 상태가 되자 저절로 다리가 벌려졌다. 양옆으로 늘어진 다리를 붙잡고 밀어 올리며 남자가 허리를 뒤로 물렸다. 눈에 반쯤 남자의 성기를 삼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울먹거리며 남자를 밀어내기 위해 손을 뻗었다. 남자가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허리를 조금 더 뒤로 물렸다. 성기가 서서히 빠져나온다.

내벽을 빠져나가는 감각이 선연해서 손바닥으로 입을 막은 채 부르르 떨었다. 남자가 고개를 약간 옆으로 꺾으며 내 모습을 구경하더니 다시 안으로 성기를 삽입했다. 정액과 쿠퍼 액으로 젖은 성기를 구멍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좋아, 쾌감이 이성을 무너트리고 헐떡거렸다.

“아으으, 흑, 싫, 흐윽…”

“울지마, 울면 마음이 아프잖아.”

“음, 으읏, 흡.”

남자가 성기를 받은 채로 입술을 겹쳐 왔다. 반항했지만 꼼짝없이 모자란 숨이 마저 빨렸다. 입술을 핥고 들어온 혀가 산소를 모조리 뺏어간다. 혀뿌리까지 강하게 빨아 당기며 입 안을 휘젓고 떨어진 남자가 목을 양옆으로 꺾었다. 근육이 우두둑 거리는 소리를 낸다. 불안함에 숨을 삼키고 어깨를 움츠렸다. 남자가 손바닥으로 내 뺨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떨지마. 그냥 좆 좀 구멍으로 빨고 삼키는 건데 왜 떨어.”

“힘들…하읏!”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성기가 빠르게 안쪽을 치고 빠졌다. 허리에 힘이 쭉 풀렸다. 무너질 듯 공중에서 휘청거리는 내 허리를 잡아챈 남자가 무릎을 쥐고는 정신없이 허리를 처박았다. 조금 멈춰 휴식을 취하던 쾌감이 목을 졸랐다.

“음, 아아, 하, 아! 아!”

“아주, 씨발, 좆을 먹으려고 난리가 났지.”

성기가 파고들 때마다 본능적으로 내벽 안이 조였다.성기가 파고들 때마다 안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너무 간지러웠다. 허리를 비틀며 다리를 버둥거렸다. 남자가 혀를 차면서 다리를 완전히 잡아 머리 뒤로 내리 눌렀다. 반으로 접혀진 상태에서 성기를 머금고 있는 구멍만 적나라하게 벌려져 바깥으로 노출되었다.

말리기도 전에 남자가 다시 시작이라는 것처럼 성기로 안을 퍽퍽 파고들었다. 구멍을 들쑤실 때마다 찾아오는 쾌감이 사라지기도 전에 계속해서 파고든다. 귀두가 전립선을 미친 듯이 때려 박았다. 남자의 어깨 위에 손톱을 세우고 긁었다. 내벽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제발 그만해. 호소할 때마다 남자의 입술 위에 희미한 빛을 띄던 미소가 점점 진해졌다.

“싸줄게, 싸줄게 또 먹어. 제대로, 으음, 빨아 먹어. 알았어?”

“흡, 아응! 아, 하아, 아아…!”

질척질척한 정액이 다시 안쪽에서 쏘아져 나왔다. 드르륵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흉포하게 안쪽을 때려 박은 뒤라 남자의 성기가 꿈틀거리며 사정하는 것까지 느낄 정도였다. 남자의 어깨를 붙잡은 채 몇 번이나 몸서리치듯 경련했다. 손가락만 닿아도 다시 쌀 것 같았다. 남자가 자신의 어깨에서 내 손을 잡아 떼 손목 안쪽에서 키스하며 허리를 슬쩍 움직였다.

“하읏!”

성기에서 정액이 터졌다.

“하하, 야해서.”

다시 한번 남자가 움직이며 안을 가볍게 긁었다. 성기에서 또 정액이 후드득 떨어졌다. 정액이라 보기도 힘들 정도로 멀건 체액이 줄줄 흘렀다.

“정액 먹었으니… 이제 임신하려나?”

“흐으, 무, 무슨…”

“좆을 빨았으면 임신을 해야지.”

태연하게 불가능한 일로 희롱하며 남자가 허리를 다시 퉁 쳤다. 내벽이 일제히 경련하게 남자의 성기를 물어뜯듯 조였다. 눈앞이 번쩍거리며 온몸이 풀어졌다. 그냥 안에 들어있는 성기의 감각이 너무 좋아서, 입술을 벌려 숨을 몰아쉬며 엉덩이에 힘을 줬다.

“왜, 또 할래?”

“아…읍, 으응…”

“아빠 좆질이 그렇게 좋아?”

남자가 역겨운 희롱을 하는 데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냥, 너무 좋았다. 지나치게 좋아서 아랫배가 아플 정도인데도, 안에 들어있는 성기가 움직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또 싸줘?”

“후, 웃…이상, 이상해…”

허리를 비틀며 울자 남자가 혀를 차면서 내 상체를 들어 일으켰다. 남자의 손바닥이 허리를 잡자마자 다시 성기에서 정액이 찔끔 터져 나왔다. 몸이 이상해. 울면서 남자의 등을 손톱으로 긁으며 매달렸다.

“완전히 맛이 갔군.”

남자가 내 성기를 매만지며 평가했다. 몰라. 화가 나는데 너무 좋았다. 잔경련이 일어나는 허벅지를 덜덜 떨며 움직여 남자의 성기를 삼켰다.

“흐으, 흑, 제발…”

“겨우 좇질 두 번 했다고 이 정도로 혼이 나가면 어떡해?”

“몰라, 몰라…”

“할 때마다 심해지네.”

아랫입술을 가볍게 빤 남자가 가슴팍을 훑어보더니 유두를 핥았다. 짜릿한 감각에 몸을 떨며 남자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첩첩 거리는 소리를 내며 유두를 빨아대던 남자가 웃으면서 허리를 움직였다. 남자의 위에 앉아 있는 탓에 깊게 들어온 성기가 움직이자 몸에 힘이 풀렸다. 팔을 힘없이 떨어트리며 허리를 무너트리자 남자가 유두를 한 번 더 세게 빨아 당기고 내 허리를 잡아챘다.

“임신해.”

“싫…못해, 못, 해.”

“그렇게 아들이 하기 싫다면 정혜 씨 대신 네가 애를 가지면 되겠지.”

음울한 목소리로 부정한 말을 중얼거리며 남자가 엉덩이를 가볍게 때렸다. 비명을 삼키며 남자의 목덜미에 눈물을 훔쳐냈다.

“매일 침대에, 하, 너를 묶어놓고, 넣어주기만 해도 질질 싸는 몸을 해서 구경할 거야.”

“으, 흐읍, 안…돼.”

“허전하지 않게 딜도를 먹여 줄게. 온종일 그걸 물고 있다가 밤이 되면 헐렁해진 구멍에 좆을 먹여주지.”

“흣, 우웃, 거기…힉!”

“벌름거리면서 자존심도 이성도 잃고 이렇게 남자 좆에 미쳐서 매달리면 볼 만 하겠네. 그렇지?”

“아니…흑! 아웃! 으, 아!”

“좋아 죽으면서 반항하지 마.”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남자가 성기를 삽입할 때마다 같이 허리를 흔들며 남자의 복부에 내 성기를 문질렀다. 이성을 잃고 반항하는 것처럼 날뛰는 몸을 잡고 남자가 자신의 성기를 쑤셔 박으며 소리 내서 웃었다.

“임신해서 배가 부풀면, 또 자지를 먹여줄게.”

“음, 흣, 아니…우웃.”

“무서워 덜덜 떨면서 또 좋아서 다리를 벌릴 텐데, 어쩌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긁고 지나갔다. 남자가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 한 번 더 성기를 집어넣자마자 오르가즘에 올랐다. 남자의 상체에 거미처럼 매달려 소리 내서 울었다.

“흐으, 흐어엉, 흑…흐윽……”

“울지마, 더 먹어야 하는데 그만 울어.”

못 한다고 매달려 빌었지만 남자는 가차 없었다. 뺨을 손으로 밀어 떨어트리고 남자가 다시 상체를 아래로 내렸다. 위에서 쳐올리고 아래에서 몸이 떨어지자 속절없이 성기가 가득 후벼 파였다. 깊고, 끔찍할 정도로 과한 쾌감에 몸이 계속 경련했다. 아랫배를 조이고 비틀며 따가울 정도로 혹사당한 구멍을 조였다. 남자는 끝없이 비속어를 섞어 희롱하며 내 엉덩이 사이를 파고들어 정액을 집어넣었다.

잠깐 정신을 잃었다 깨어냈을 때는 눈물에 듬뿍 젖었던 넥타이로 두 손이 묶인 채 박히고 있었다. 그 사이에도 정액을 계속 뱉어냈는지 성기 끝이 따가울 정도였다. 남자의 물건을 삼키고 있는 엉덩이 사이가 쓰라렸다. 남자는 정신을 차린 나를 보더니 샐쭉 웃으면서 허리를 위로 처 올렸다. 던져지지도 않는 비명을 소리 없이 내질렀다. 성기가 한 바퀴 휙 긁고 나갈 때마다 뒤에서 뭔가가 줄줄 샜다. 발뒤꿈치로 시트를 긁으며 애원했다.

“그만, 망, 망가져, 흑, 그만…”

“망가지긴, 아직도 쭉쭉 빠는데.”

“제발…아파, 정말 아파…”

위로 한껏 당겨 묶어진 팔도 아프고, 허벅지와 허리도 너무 아팠다. 가혹할 정도로 심한 성관계에 몸 상태가 한계를 외친지는 오래되었다. 남자가 거세게 추삽질을 할 때마다 수시로 정신을 잃었다 다시 깨어났다. 남자는 빠짐없이 뱃속 안에 사정했다. 꾸역꾸역 들이찬 정액이 성기가 들락날락할 때마다 질질 흘러내렸다.

“흐읍, 으, 아프…으으, 읏.”

팔을 풀어준 남자가 다시 상체를 들어 올렸다. 축 늘어진 채 부들부들 떨며 허벅지에 힘을 줬다. 방금 성기가 사정하고 빠져나간 후라 뒤가 여전히 열려 있었다. 아니, 이미 완전히 망가진 걸지도 모른다. 성교에 익숙하지 않은 몸인데, 남자의 손과 몸이 닿을 때마다 움찔움찔 떨릴 정도로 극한의 쾌감에 정신이 몽롱했다.

“아래 닫아.”

“못, 못하게…”

구멍 안에 손가락을 넣어 정액을 쏟아내게 하던 남자가, 헐렁하다고 화를 내며 엉덩이를 때렸다. 아파 죽을 것 같았다. 당장 고통에서 벗어나려 엉덩이와 아랫배에 힘을 줬지만 남자는 뒤가 열려있다며 힐난했다. 이대로 완전히 망가지면 어쩌지, 무서워 덜덜 떨어도 몸은 의지를 벗어나 열린 채였다. 흠뻑 젖은 안에서 정액이 줄줄 흘러 허벅지와 남자의 손가락을 타고 내렸다. 뭔가가 질척질척하게 쏟아졌다.

“완전히 벌어져서는, 정액을 먹여줘도 다 흘리면 어쩌자는 거야?”

“헉…잘못, 잘못 했…어요…제발, 흣.”

남자의 어깨에 얼굴을 문지르며 몇 번이나 빌었다. 남자가 허벅지를 문지르며 뒷구멍을 계속해서 처 올렸다. 교성을 지를 힘도 없어 늘어진 채로 움찔거리며 손가락과 성기를 차례대로 받아먹어야 했다. 남자가 턱을 깨물면서 엉덩이를 주물렀다. 손가락 모양으로 멍이 든 것처럼 욱신거렸지만 반항할 힘이 없었다.

한 차례 안에 다시 사정을 한 남자는 그제야 직성이 풀렸는지 나를 놓아 주었다. 정액과 땀으로 범벅이 된 시트를 그대로 끌어 덮었다. 몸을 완전히 가리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눈물을 그칠 수 있었다.

목구멍이 너무 따가웠다. 몸 전체가 콱콱 쑤셨다. 잔인할 정도로 멋대로 몸을 휘어잡고 괴롭힌 남자에게 원망과 저주가 동시에 쏟아졌다. 자기 혼자 태연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남자가 느슨하게 샤워 가운의 매듭을 여미며 수건을 들고 걸어왔다.

뜨겁게 젖은 수건을 들고 여러 번 바꿔 접어가며 몸을 닦아줄 때마다 간헐적으로 몸이 움찔거렸다. 부드러운 타올 면이 가슴과 엉덩이, 성기와 허벅지를 훑고 지나가면 더 그랬다. 남자가 한숨을 쉬면서 젖은 시트를 치우고 다른 방의 이불을 가져와 몸 위에 덮어 주었다. 깨끗해진 몸 위에 뽀송뽀송한 새 이불이 덮이자 긴장감이 조금 풀렸다.

눈물샘을 송두리째 들어낸 것처럼 따끔거리고 뻑뻑한 눈을 깜박거렸다. 마지막 남은 눈물이 찔끔 흘렀다. 남자가 찬물을 입에 대주며 내 눈물을 빨았다. 뜨거운 숨결에 눈가를 찡그리며 허겁지겁 물을 받아 마셨다.

물병을 반 넘게 비워내고 나서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 오늘 몇 번이나 기절했지, 오르가즘은 얼마나 느꼈지. 사정은 몇 번.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시작한 관계가 밤이 깊어진 이후에 끝이 났으니 아주 오래 혹사당했다는 것만 겨우 알 수 있었다.

“힘들어?”

다정하게 돌변한 남자가 내 어깨와 뺨을 매만지며 토닥거렸다. 열기가 남아 뜨거운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가볍게 숨을 핥았다.

“그러니까 도망간다든가, 하는 말 하지 마. 기분 안 좋잖아.”

살살 달래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곤조곤 한목소리로 속삭이며 남자가 내게 시선을 맞춰왔다. 가만히 고개를 들고 남자의 시선을 마주 봤다.

“착하게 굴면, 충분히 예뻐해 줄게.”

“……”

“정말이야, 섭섭한 거 다 말해. 사랑해줄게. 네가 했던 말들, 전부 기억하고 있어. 똑같이 그대로 다정하게 대해줄게.”

“필요…없어요.”

아직도 남자는 뭔가를 모르고 있었다. 몸을 좀 섞었다고 달라졌다면 진작 달라졌을 것이다. 너무 하다 싶을 정도로 변함없는 남자를 부정하는 것은 지나친 성관계보다 힘든 일이었다. 쉰 목소리로 남자를 밀어내자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당신의 사랑…그런 거, 필요 없어요.”

사랑을 느꼈던, 아니, 사랑이 아닌 애정, 온기, 설렘. 무엇이든 감정을 느꼈던 순간이 남자에게 필요 없는 행위였던 것처럼, 나도 남자의 사랑은 필요가 없었다. 반 틈의 욕망, 절반의 욕정. 남자가 느끼지 않았더라 하더라도, 사랑은 부패한 고깃덩어리였다.

“…즐겼잖아.”

“…….”

“너도 날 좋아하잖아!”

원망을 토로하는 남자의 얼굴이 창백하다. 피가 모조리 빨린 사람 같았다.

“그래요.”

“……”

“좋아했고, 섹스는 기분이 좋고, 그게 전부에요.”

“근데, 왜…?”

하나하나 꼽아 이야기할 때마다 남자의 표정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어린아이처럼 욕심과 고집으로 부풀어 오른 뺨과 금방이라도 울 듯 일렁이는 눈동자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잘못했어요.”

“……”

“아버지를 너무 오래 믿었어.”

남자가 계속해서 이 관계를 자존심 싸움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제자리걸음이었다.

한 번만 더 가만히 안아만 줬으면. 내 상처에 전전긍긍하며 빨리 나으라 한 마디 말만 해줬으면, 오늘의 역사도 변할 수 있었을까.

“아버지가 날 계단에서 집어 던질 때 어떤 기분일까 상상도 못 했는데.”

“뭐?”

수 천 번, 수 만 번, 다음에 대한 기대를 하고 수동적으로 웅크렸었다. 참고 참았던 인내심이 말끔하게 날아가자 남자를 응징하고자 하는 욕구가 불타올랐다.

“이젠 좀 느껴지네요.”

이런 기분이었겠지. 힘없던 팔을 뻗어 옆에 있는 스탠드 기둥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방금까지는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는데, 목표가 생기니 어떻게 바닥까지 남은 근력을 쭉쭉 빨아올릴 수 있었다. 무선 스탠드는 손쉽게 손에 잡혀 당겨져 나왔다. 상체를 일으켜 앉아, 남자를 향해 씩 웃었다. 남자가 멍한 표정을 한다.

“엿이나 처먹어, 덜 자란 애새끼만도 못한 인간아.”

있는 힘껏 손에 잡고 있는 물건을 휘둘렀다. 남자의 동공이 확장되는가 싶더니 나풀나풀 감겼다. 뭉쳐진 유리가 팍하고 터져나가는 것처럼 남자가 무너진다. 워낙 예쁜 얼굴이니 쓰러지는 것도 그림 같아 속으로 조금 감탄했다. 죄책감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냥, 마음은 남자가 나를 집어 던졌을 때 산뜻하게 짓던 표정을 닮아 있었다. 언젠가 한 번쯤은 남자의 뒤통수를 후려갈겨 주고 싶었으니, 이마를 깨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는데 정말로 꽤 괜찮았다.

저 예쁜 얼굴에 번번이 마음이 풀어지고 눈물 한 방울 좀 흘려줬다가 당한 기간이 몇 달인가 싶다. 잊을 만하면 희망을 주고, 정말로 사랑하는 척 애타게 굴다 또 내던지고. 수도 없이 뒤통수 친 사람은 따로 있으니, 그렇게 화를 많이 내진 않겠지. 찌그러진 스탠드를 바닥에 내던지고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이불 위에 곱게 누운 남자의 이마에서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서 떨어졌다. 수건을 상처 위에 대고 꾹 누르자 금방 핏물로 붉게 물들었다.

정신을 잃은 상황에서도 상처가 아픈지 남자의 눈가가 꿈틀거린다. 대충 지혈을 해주고는 침대에서 밑으로 내려왔다. 순간적으로 다리가 풀려 바닥에 엎어져 끙끙 앓다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식은땀이 쭉쭉 흘렀다. 한 걸음씩 움직일 때마다 배 속에 고여 있던 정액이 다시 조금씩 흘러내렸다. 손을 들어 흘러내린 체액을 대충 닦아냈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남자가 일어나 난장판을 치기 전에 할 일을 전부 끝내야 했다. 마지막 남은 힘을 비틀어 병원을 빠져나왔다. 목적지는 집이었다.

환자복을 입고 거리를 방황하자 시선이 흘끗거리며 내 몸을 훑는다. 겨울에 외투도 없이 다니니 정신병자로 보이겠지. 일단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남자의 성기가 들쑤시고 나간 직후라 배와 허리가 결리고 아파져 왔다. 몸에서 열이 후끈거렸다. 붉어지는 얼굴을 몇 차례 때려가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거대한 저택 앞에 멈춘 택시 기사에게 만 원짜리 두 장을 건네고 내렸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엄마가 거실에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불안한 목소리를 들으며 어지러운 머리를 휘저었다.

“이소야?”

환자복을 입은 채 서 있는 나를 본 엄마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엄마의 눈을 조금 보고 있다가 2층 계단을 향해 발을 디뎠다. 다리가 크게 벌어지자 뒤가 열리며 뭔가 울컥 새어 나왔다. 빌어 처먹을. 욱신거리는 아랫배를 문지르며 계단을 밟고 조금씩 올라갔다.

“이소야, 무슨 일이야?!”

계단 밑에 서서 엄마가 소리를 쳤다. 아무 일도 없어, 엄마. 대답 대신 손을 휘저으며 계단을 기어 올라갔다. 복도 깊숙이 처박힌 내 방안, 더 깊숙한 곳에는 가방이 하나 있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큰 가방 안에 옷이나 속옷, 소지품을 쑤셔 넣었다. 빵빵하게 찬 가방 지퍼를 잠그고 환자복을 벗어 던지고 내 옷으로 갈아입었다. 바지와 속옷을 적신 남자의 정액을 보다 환자복을 구겨서 그대로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서재에 들렸다. 남자가 만들던 프라모델이 올려진 책상을 내려보다 유리 조각을 집어 들었다. 조금은 충동적인 마음으로 그걸 가방 안에 집어넣고 걸음을 옮겼다. 온몸이 갈래갈래 찢어지는 것 같았다. 계단을 내려오는 것도 고역이었다.

엄마는 아직도 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내 어깨에 매달린 큰 가방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소야, 엄마는 눈동자를 떨며 내 손을 잡기 위에 허우적거렸다. 물에 빠진 사람 같았다. 그대로 엄마를 무시하고 고모의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작은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던 고모가 고개를 흘끗 들어 올린다. 다짜고짜 들이닥친 나를 보고도 놀라는 표정이 없었다.

“…이제 왔니?”

그녀는 우리의 거래가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알렸다.

떨리는 몸을 꾹 잡아 누르고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고모가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는 내 얼굴을 흘끗 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질펀하게 했나 보군.”

“……”

“몸정은 텄나 보네.”

“…별로. 반강제였는데요.”

“반항은 좀 제대로 했고?”

“……”

“너도 진짜 무르다. 그러니 이태가 잡고 흔들었지.”

가시 돋친 말이 손과 발을 날카롭게 찔렀다. 노출된 감정이 수치스러웠다.

“왜 걔를 동정하니?”

“…동정, 안 했어요.”

“숨기지 마. 걔가 애틋하게 매달리면 예뻐서라도 동정 안 해줄 사람이 어딨겠어.”

고모가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잡동사니가 잔뜩 올려진 테이블 앞으로 갔다. 뭔가 큼직한 갈색 서류 봉투를 빤히 쳐다봤다. 고모가 봉투를 내게 건넸다. 묵직했다. 받아들어 안에 있는 물건을 쏟아냈다. 여권과 신분증, 휴대폰이 나왔다. 카드와 현금도 있었다. 딱딱한 주민등록증을 집어 들었다. 다른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이젠 그 이름으로 살아.”

“……네.”

“보통, 어릴 때부터 학대에 시달린 사람들이 정신병에 많이 걸린다고 하던데.”

아무렇지도 않게 흉악한 말로 사람을 상처입히며 고모가 방 안을 어슬렁거렸다. 슬리퍼 소리가 자박자박 울렸다.

“너도 정말 이상한 애야.”

“……”

“그렇게 미친 듯이 싫어하는 사람, 그것도 같은 남자를. 섹스까지.”

모든 화살은 여전히 내게로 돌아와 있었다. 네가 이상해. 너를 이해 못 해. 너는 정신병자고, 피해망상과 과한 애정 결핍에 시달리고 있다고. 눈물을 참고 억지로 말을 돌렸다.

“해외로…가려고 해요.”

“마음대로 하렴.”

“어…엄마는, 혼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고모가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한 것일까. 파렴치한 인간이 된 것 같아 눈물이 찔끔 나왔다. 아랫입술을 질끈 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엄마와 같이 가지 않을 거예요.”

엄마를 버리겠단 말이었다. 종일 지나친 성교로 혹사당한 몸은 의자에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했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아픈 배를 잡았다. 온몸이 저렸다. 고모가 자신이 줬던 내 신분증을 집어 들고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좋아. 마지막까지 도와줄게.”

“…감사합니다.”

“별로. 나도 네가 이태랑 미쳐가는 거 별로 달갑지 않아.”

이제 나가렴. 고모가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며 손을 내저었다. 서류를 집어 가방 앞쪽 주머니에 집어넣고 몸을 일으켰다. 굳게 다물린 고집 세 보이는 입술을 보며 고모를 처음 만났던, 이 집에 처음 들어왔던 날을 생각했다. 여름이 훌쩍 다가온 날이었다. 일 년도 안되는 동안, 말도 안 되는 일만 일어났다.

“아버…아니, 그 사람이요.”

“왜?”

“병실 안에 쓰려져 있을 거예요. 치료…부탁드려요.”

혹시 그대로 피를 많이 흘려 죽어버리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희열과 공포가 뒤섞인 얼굴이 얼마나 추악해 보일까. 말없이 한숨을 쉬며 통화 버튼을 누르는 고모를 보며 방을 나섰다. 방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엄마가 나를 보자마자 왈칵 화를 냈다.

“엄마 말 안 들려? 너 왜 그래!”

“응, 미안. 나 갈게.”

성의 없는 사과를 하며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엄마가 내 옆에 매달린 커다란 가방을 붙잡고 매달렸다. 그래, 이번에도 물에 빠진 사람처럼.

“어디 가?”

“멀리.”

“어디로?”

“그냥 멀리.”

“엄마는?!”

엄마가 울부짖는다. 슬픈 괴성을 들으며 신발을 허겁지겁 신었다. 발에 딱 맞는 운동화였는데, 피가 안 통하는 것처럼 크게 조여왔다. 엄마가 계속 울면서 나를 붙잡는다. 주름지고 고생만 해왔던 두 손을 꽉 잡고 떨쳐냈다. 엄마, 미안해. 마음속으로 머리를 처박고 빌며 엄마를 버렸다.

“엄마 아들 죽었어.”

“……뭐?”

“되게 옛날에 죽었어, 사실.”

정이소가 아니라 양이소가 되었을 때까지도 나는 엄마의 아들이었고, 엄마의 불행한 삶을 나만큼이나 위로했다. 아마도… 그냥, 엄마가 내 발목을 잡는다는 것을 알았고, 남자가 엄마를 빌미로 나를 본격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하면서 점점 지쳤을 거다. 엄마가 없었으면. 세상에 아무것도 없이, 홀로였으면. 태어나지 않았으면, 왜 그런 남자를 골라 결혼을 했는지.

“엄마만 몰랐던 거야.”

“이소야, 아들. 이소야!”

“엄마를 사랑하고 엄마가 사랑하던 아들…없어.”

아래에서 강아지 짖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덜컥,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아 뒷걸음질 쳤다. 하얀 강아지가 달려 나와 내 신발 앞코를 꽉 물고 늘어졌다. 눈동자가 뿌옇게 변했다. 엄마는 수도꼭지를 틀어둔 것처럼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속이 여전히 아팠다. 토를 할 것 같았다.

비체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진다. 하염없이 가지 말라 짖어대며 우는 강아지를 두고 도망쳤다. 이제 무서울 건 아무것도 없는데 계속 몸이 떨렸다. 신경 세포를 파고드는 오한에 덜덜 떨며 가는 길 내내 울었다. 택시 기사가 무슨 일이 크게 났냐며 계속해서 걱정했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괴로웠다. 소리 내서 꺽꺽 한참을 울다 지쳤을 때는 이미 기진맥진한 상황이었다.

지친 몸에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종합감기약 하나를 입에 넣고 공항 쓰레기통에 휴대폰을 고모가 준 것까지 두 대 전부 버렸다. 추적이 가능할지도 모르는 휴대폰을 계속 들고 있을 수 없었다. 머리를 그렇게 빠르게 굴려보긴 생전 처음이었다. 고모도 찾을 수 없을 만큼 아예 없어져야 했다. 카드 뒤편에 적힌 비밀번호로 현금 서비스를 되는대로 받았다. 신용카드를 쓰면 계속 꼬리가 남는다. 일단 떠난 뒤에 나머지를 생각할 예정이었다.

카운터에서 예약된 항공권을 받았다. 외국으로 연고지도 없이 떨어진다는 불안감에 휩쓸려가면서도 티켓을 손에 쥐었다. 방금 환전한 돈 대부분을 그 나랏돈으로 환전했다. 공항 직원은 큰돈을 환전하는 나를 몇 번이나 흘끗거리며 미심쩍은 얼굴을 했다. 입술을 씹다 말고 손안에 있는 신용카드를 보란 듯이 내밀었다. 꽤 고객을 가려 받는다는 신용카드를 보자 직원이 그러려니 하는 표정을 지었다.

많은 현금을 가방에 넣고 등을 돌렸다. 공포감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도망을 가야 한다는 공포에 지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면세점에서 마지막으로 카드를 긁었다. 당장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생필품을 전부 사고 나니 어깨가 무거웠다. 느지막하게 걸음을 떼서 비행기에 올라탔다. 퍼스트 클래스는 조용하고 한적했다. 몇 명의 사람들이 이미 자신의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잡지 같은 것을 들춰보고 있었다. 내 자리를 찾아 더듬거리며 앉자마자 또 다니 눈물이 왈칵 터졌다. 이륙도 하기 전에, 눈물을 쏟아내는 나를 보고 스튜어디스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찬물과 휴지를 내밀었다.

다른 사람들한테 민폐라고 생각하면서도, 참을 수 없어 계속 울었다. 나를 마지막까지 보던 엄마의 허망한 표정과 세차게 짖어대던 비체의 울음소리와, 내 손에서 떨어져 나가 남자의 머리를 내리치던 스탠드의 무게가 복합적으로 심장을 꽉꽉 때렸다.

나는 나쁜 놈이야, 나는 정말 더러워.

“흐으으….”

정말로 바랐다. 남자가 어쨌든, 한 번쯤은 다른 답을 내놓을 거라고. 조용히 방에 들어와 내 손을 잡고 있었던 심야의 감각처럼 한 번이라도, 한 번이라도.

자신이 너무 미웠다. 심장과 뇌를 찢어버리고 싶었다. 몸을 웅크린 채 계속해서 울었다. 끝없이 눈물이 나왔다. 이미 오늘 일 년 치의 눈물은 다 흘려버리고 도망을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계속 생각이 나는 걸까. 나를 만지던 남자의 손가락, 상처받은 듯 흐려진 눈동자, 반짝거리며 기대를 하던, 관계 뒤의 질척한 집착이 섞인 어리광. 아니야, 제발…정신 차려, 제발.

스튜어디스가 몇 번이나 다가와 괜찮냐고, 두통약과 물을 건네며 발을 동동 굴렀다. 나 때문에 쾌적해야 할 비행이 무겁고 습하게 변했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탈진할 때까지 울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완전히 새벽이었다. 사람들의 낮은 숨소리를 들으며 입을 열었다. 목이 따끔거렸다.

손에 힘이 풀려 병뚜껑을 따지 못했다. 한참을 끙끙거리다 겨우 따서 물을 비웠다. 목 뒤로 넘어가는 찬물이 꿀물처럼 달았다. 젖은 입술을 닦으며 창문 바깥을 조용히 바라봤다. 새벽 허공의 비행은 고즈넉했다. 좌석에 달린 모니터에서 비행 거리를 보여주는 화면이 나오고 있었다. 반쯤 왔을까. 아직도 비행은 5시간이 더 걸린다고 나와 있었다. 얼얼한 뺨을 문지르고 좌석 위에 늘어져 있었다.

엄마는…혼자서 잘 살 수 있을까. 남은 것들을 생각하면 몸을 던지고 싶었다. 아아, 근영이. 근영이에게는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남자가 정신을 차리고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지. 울먹거리며 입술을 꽉 물었다. 고통스러운 첫 비행이었다. 스물셋이 되어 처음 타본 비행기는 목적지가 너무 멀었고, 너무 높았고, 너무 외로웠다.

어쩌다 이렇게 변질되었을까… 아예, 그냥, 아무것도 거부하지 말고 홀딱 빠진 사람처럼 남자를 사랑해버렸으면 편했을까. 그냥 조금만 상처받고, 괜히 싸우기 위해 애를 쓰지도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괴로웠다.

잊을 수 있을까. 잊힐 수 있을까. 한 살 먹은, 얼룩진 괴생명체가 된 내가.

새벽하늘을 헤집고 태양 빛이 점점 들어오고 있었다. 눈을 찌르는 따가운 햇빛을 보다 고개를 들었다. 트레이 끄는 소리가 나더니 아침 인사를 건네며 스튜어디스가 기내식을 준비해줬다. 울음을 그친 나를 보고 다행이라는 얼굴로 아침 식사로 죽을 추천해줬다.

먹을 수 있을까. 꺼끌꺼끌한 입안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도 승무원은 수시로 나를 챙겼다. 간식거리로 이것 저것을 챙겨주고 과일까지 듬뿍 챙겨주는 걸 보며 숟가락을 물고 얌전히 우물거렸다.

“필요하신 것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나긋나긋 상냥하게 웃으면서 사라지는 스튜어디스의 뒷모습을 보다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꼼짝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만 있던 몸이 찌뿌둥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넓은 화장실 벽에 붙은 거울을 멍청하게 쳐다봤다.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이 문제가 아니었다. 목덜미가 얼룩덜룩했다. 티셔츠를 들춰냈다. 상체가 멍과 붉은 자국으로 범벅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기절한 사람을 두고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런 꼴로 택시를 타고 비행기에서 울어 재끼다니, 정말 강간이라도 당해서 도망친 사람의 몰골이 아닌가. 남자에 대한 생각을 잊으려 애쓰며 찬물을 얼굴에 흠뻑 끼얹었다. 비행기가 구름을 가르면 윙 거리는 소리가 났다. 바람 소리를 신발 바닥을 통해 느끼며 뒷사람이 문을 두드릴 때까지 하염없이 거울을 보았다.

낯선 얼굴과 표정을 한 겁먹은 청년이 머뭇거리다 빠져나갔다. 온통 지옥이었다.

장시간 비행을 끝내자마자 공항을 빠져나왔다. 입국 심사대에 서자 뚱뚱한 체격을 한 남자가 나를 쏘아보더니 입을 열었다.

“What…Pur……visit?”

단어 몇 개만 겨우 알아들었다. 방문. 허둥거리다 이때까지 배웠던 영어로 어설프게 대답했다.

“Stay...work?”

“How long will you stay?”

이번에는 제대로 알아들었다. 손가락을 꼽았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적당하게 대답하는 게 좋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One year?”

다행히 직원은 더는 물어보지 않고 내 여권과 비자를 확인하고는 통과시켜주었다. 그제야 내 여권을 살펴보았다. 캐나다 체류용 비자가 붙어 있었다. 어떻게 손을 썼는지 3년짜리 취업 비자가 붙어 있었다. 고모는 최대한도로 노력을 해줬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 집에서 나갈 수 있도록. 작고 어린 동물과 엄마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거대한 외국의 공항에서 멈춰있다 컴퓨터 할 수 있는 곳을 물어물어 찾아 인터넷을 뒤졌다. 어느 정도 나라에 대한 정보가 모이자마자 공항을 왕복하는 버스를 탔다. 낯선 버스는 공항을 빠져나와 시내를 달렸다. 대충 가게가 많고 사람들이 많이 내리는 곳에 따라 내렸다. 당장 아무것도 없으니 휴대폰이라도 사야 했다. 다행히 근처에 애플 매장이 있었다. 현금으로 무식하게 휴대폰을 구매하는 나를 사람들이 이상한 눈빛을 했다. 휴대폰 부속품만 챙겨서 다시 매장을 빠져나왔다.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갔다.

더는 비행기를 타지 않을 예정이었다. 위조된 신분증으로 다니겠지만, 남자가 마음을 먹고 찾는다면 금방일지도 모른다. 꼭꼭 숨어야 했다. 최대한 오래, 시간을 두고 완벽하게.

도착까지 열다섯시간이 걸린다는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도시를 넘어갔다. 끝도 없이 뻗은 도로를 보며 좁은 좌석에 웅크린 채 계속 잠을 잤다. 제대로 먹지 못했지만 배가 고프지 않았다. 시간과 체력은 얼마든지 투자할 수 있다. 꾸준히 멀리 가야만 했다. 불안한 감정이 목을 졸랐다.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영어를 더듬더듬 사용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밤을 헤치고 달리던 버스에서 멀미와 두통에 번갈아가며 시달리면 중간에 한 번 정차했고, 또 죽을 것 같을 때면 다시 정차해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터미널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기도 했다.

멈추지 않을 것 같은 버스는 결국 마지막에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근처 마트에서 음료수와 과자를 사서 끼니를 해결하고 눈에 보이는 아무 호텔에 들어갔다. 가장 저렴한 방을 잡고 한 시간쯤 머물러있다 다시 한참 걸어 다른 호텔로 들어가 다른 방을 예약했다. 그렇게 한 번에 두 세 군데를 잡고 두 번째로 고른 호텔에 들어갔다.

하얀 침구가 준비된 방에 들어오자 다시 눈물이 났다.

너무 외로웠다. 나는 얼마나 오래 외로워야 할까. 이제 같이 대화해줄 사람은 한 명도 남지 않았다. 다 버려도, 남자는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을…했었는데…

“흐윽.”

입을 틀어막은 채 꾸역꾸역 울음을 삼켰다.

그게 사랑이어서는 안되는 거였다. 혼자 착각해서, 사랑한다 뜨겁게 말하던 남자의 고백에 뺨이 붉어지면 안 되는 거였다.

“욱…흑, 어, 엄마아.”

만리타향. 새로운 삶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는데, 아무도 새롭게 바뀐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을 것이다.

미약하게 남은 열기가 내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짖었다. 이소, 양이소.

한국을 떠났다고 모든 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삶을 정착하기 위해 나는 장기 투숙이 가능한 집을 알아봐야 했고, 어설픈 영어로는 어림도 없었다. 비싼 숙박료를 계속 낼 수는 없어서 발품을 팔고 팔아 한국인 교포가 영업한다는 부동산 알선 업체를 찾았다. 부동산 주인은 나를 덜떨어진 것 처럼 바라보다 몇 가지 집을 추천해주었다.

시세보다 비싸다는 걸 알면서도 다른 곳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아 그대로 계약을 했다. 건물은 조금 낡았지만 깨끗하고 교통이 편했다. 1년 치 방값을 미리 빼놓자 현금의 절반 가까이가 없어졌다. 그래도 호텔 숙박보다는 저렴하다 생각하며 위안으로 삼았다.

“세탁실은 1층에 있는 공용 세탁소를 사용해야 해요. 기본 유틸리티들은 집세에 포함되어 있고.”

“네…감사합니다.”

방 하나, 부엌과 화장실. 원룸 같은 방은 서 있기만 해도 좁았다. 전기나 수도가 집세에 전부 포함되어 있는 게 다행이었다. 그래도 비싸긴 마찬가지였다. 비싸게 받아먹은 돈 만큼 이리저리 편의를 봐준 부동산 주인은 선심 쓰듯 일자리까지 알아봐 줬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가게의 주방 보조였다. 보조라고 해봐야 영어가 부족해 설거지를 고정으로 맡았다.

계좌를 개설하는 게 무서워 월급은 조금 적어도 현금으로 받기로 했다. 접시가 많이 쌓이지 않을 때면 칼을 들고 야채를 썰거나 고기를 레시피대로 볶았다. 영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혼나기 일쑤였지만, 가끔은 제대로 잘했다며 칭찬을 듣기도 하면 시간이 훌쩍 갔다. 오후부터 저녁 9시까지 일을 하고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쓰러져 자다 다음 날 늦잠을 자 허둥지둥 일어나 뛰어나가기 바빴다.

매일 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자주 악몽을 꿨다. 남자가 찾아와 내 목을 졸라버리는 악몽이었다. 나는 꿈에서 공포를 늘 체험했다. 그는 나를 노려보며 자신의 찢어진 이마를 들이댔다. 피로 범벅이된 얼굴이 두려웠다. 일주일에 하루 있는 휴일에도 바깥에 나가본 적이 없었다. 혼자 있으면 열병을 크게 앓았다.

가게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나만 보면, 쉬는 날에 몰아서 아프면 어쩌냐 걱정을 늘어놓을 정도였다. 산책을 자주 하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바깥에 나가는 게 무서웠다. 넓은 대지와, 낯선 간판과 건물 사이 드문드문 보이는 한국 기업의 로고나 간판이 그리우면서도 숨이 막혔다.

-영은 외출 안 해?

위조 신분증의 이름은 김영환이었다. 부르기 힘든 이름 때문에 다들 나를 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본명과도 완전 딴판인 이름에 적응하는 것만 몇 개월이 넘게 걸렸다.

-안 해.

-공원도 안 가봤어?

-응.

-심한데, 완전 너드잖아.

직원들이 왁자지껄 웃더니 공원도 안 가본 사람은 처음 봤다고 웃었다. 그때 처음으로 쉬는 날 외출을 했다. 한 시간씩 걸어 출근 하던 길을 조금 돌았더니 금방이었다. 다운 타운에서도 가까웠구나. 커다란 강 중앙에 만들어진 공원은 사람들이 넘쳤다. 한가롭게 펼쳐진 커다란 공원 벤치에 앉아 산책하는 동물과 사람들을 구경했다.

나를 빼고 전부 자유로운 것 같았다. 사람들이 가득 찬 시티 트레인에서도, 벤치에서도, 돗자리를 깔고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 전부 웃고 있었다.

봄이 오고 난 뒤로 도시는 점점 더 활기가 넘쳤다. 벌써 민소매를 입고 조깅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멍하니 벤치에 앉아 해가 질 때까지 인파를 구경했다. 그날 저녁 돌아오는 길에 큰맘 먹고 자전거를 하나 샀다. 이곳에서 와서 처음으로 해본 과소비였다. 자전거 페달을 밟을 때, 친부가 뒤에서 자전거를 잡아주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늘 불행하기만 한 삶은 아니었다. 결코 아니었다. 행복은 조각나서 그렇지 드문드문 자리 잡은 상태였다.

내가 다 버렸다고 행복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외국에서의 생활에는 점점 더 익숙해졌다. 점점 미각이 돌아오면서 웃을 수도 있게 되었다. 어설프게 웃어 보이는 거울 속에 틀어박힌 나를 보고 또 한 번 울어버렸다. 인생은 짠맛, 쓴맛. 맵고 신 맛. 단맛은 언제 오려나.

일본인 사장이 가끔 내뱉는 일본어로 더듬더듬 대화하기도 했고, 설거지 당번을 벗어나 손님들의 주문에 어설프게나마 제대로 필기를 하게 되었을 때 사장이 월급을 올려준다고 말했다.

돈은 중요했다. 내년 집세를 낼 만큼의 돈은 있었지만, 언제 무슨 일로 바닥이 날지 몰랐다. 타지 생활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몰랐으니 최대한 돈을 아껴야 했다. 그런 와중에 월급이 오른다니. 신이 나서 그날 밤은 맥주를 잔뜩 마시고 취해서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그리운 땅의 꿈을 꾸었다.

주영이 형이 말을 걸었다.

‘이소야, 잘 지내?’

‘어… 그럭저럭요. 형은요?’

‘사장님 기분이 안 좋아서 매일 야근이야.’

‘그 사람이 그렇죠 뭐.’

‘그래도 잘 지내셔. 머리도 다 나으셨어.’

형이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자신의 이마를 가리킨다. 눈을 깜박거렸다. 맞아, 남자가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쉽다.’

‘뭐가?’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라, 사장님한테 배웠어? 못된 말을 하네.’

‘원래 그 사람한텐 이런 말 잘했어.’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나 생각보다 엄청 잘 지내.’

‘다행이다.’

‘형, 혹시, 우리 엄마…’

알람이 시끄러웠다. 더듬거리며 휴대폰을 찾아 끄고 일어났다. 여전히 개통하지 않은 채 공기계로 쓰고 있는 휴대폰은 어플만 내려받아 메신저만 쓰고 있었다. 사장에게서 온 메시지가 없는지 확인하고 눈물을 닦아 냈다. 외국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지고, 몸이 편안해지자 어김없이 한국의 꿈을 꾼다. 내 이름을 외치던 엄마, 그리고…

생각을 떨치려고 몇 번 머리를 흔든 후 일어나 벽장 사이와 바닥 아래를 확인했다. 현금을 분산해 숨겨두게 되면서, 자주 이렇게 돈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했다. 이 돈 마저 없으면 안 된다는 불안한 마음에 자다 말고 일어나 찾아볼 때도 있었다. 슬슬 계좌도 개설해야 하는데, 신상 정보가 퍼지면 어김없이 남자를 만날 것 같았다. 괜찮을 거라 생각을 하면서도.

화장실에 들어가 양치를 하고 나와 시계를 확인했다. 아침 아홉 시였다. 출근까지는 시간이 꽤 많이 남아 있었다. 청량한 하늘을 보다 빨래를 해둘까, 하며 빨래 바구니를 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어, 안녕.

같은 층에 사는 다니엘이 손바닥을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끄덕이며 무거운 빨래바구니를 질질 끌고 나와 문 옆에 두고 난간에 찰싹 달라붙었다. 지금 사는 스튜디오는 복도식이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이웃들과 안면을 트곤 했다.

-하나만.

헤비 스모커인 다니엘은 늘 담배를 피웠다. 뻔뻔하게 손바닥을 내밀자 씩 웃으면서 담배를 한 개비 꺼내준다. 고마워, 중얼거리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돈을 아낀다고 금연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게 가장 아쉬운 부분이었다.

-꼬맹이, 영어 많이 늘었어.

형편없는 내 영어 실력을 반년 넘게 비웃고 있는 다니엘이 뜬금없이 칭찬을 한다. 별로 달갑지는 않았다.

-나 꼬맹이 아냐.

-아직도 중학생으로 보이는데? 동양인은 정말 어려 보인다니까.

키득키득 웃으며 동양인 특유의 동안을 비웃는 다니엘을 흘겨보며 담배를 입술에 문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자전거와 행인과 차가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노곤한 여름이었다. 캐나다에 와서 좋은 점은, 여름이 별로 덥지 않다는 것이다. 겨울 끝 무렵을 보낼 때는 끔찍하게 추웠지만, 여름은 그늘에 있으면 서늘하다 못해 추울 정도였다.

예고 없이 내리는 소나기에도 익숙해졌다. 하아, 한숨을 쉬며 담배 연기를 푸 뱉어냈다.

-오늘도 일?

-응.

-할 만해?

-응.

-너는 응, 이란 말밖에 몰라?

-응.

-재미없어.

다니엘이 담배를 꺾으며 자리를 떴다. 늘어진 채 손을 흔들어주고는 다시 아래를 바라보았다. 높은 곳에 서 있으면 가끔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상체를 숙이고 힘을 주면 쑥, 아래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아…죽고 싶어. 느른하게 쳐져 머리 꼭대기에 뜬 태양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오늘도 하늘이 낮다. 낮이 긴 도시라 그런가, 하늘이 정수리 위에 바짝 붙어 있는 것 같았다. 한국의 하늘은 늘 널찍하고 높았는데.

“빨래나 해야지.”

플라스틱 바구니를 번쩍 집어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오늘도 똑같이 평범한 하루였다.

베란다에 빨래를 촘촘하게 걸어놓고 집 청소를 말끔하게 했다. 물건도 제대로 정리해놓고, 반소매 티셔츠에 바지를 입고 이르게 집을 나왔다. 찝찝한 기분에 공원을 몇 바퀴 돌다 출근을 할 생각이었다. 개꿈이야, 해몽할 만한 가치도 없어. 애써 그런 생각을 하며 자전거에 올라탔다.

종종 멍하니 앉아 생각할 때가 있었다. 버리고 온 많은 것들. 갑자기 근영이가 보고 싶었다. 많이 화가 났겠지. 한숨을 쉬면서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았다. 그런데 역시 그 꿈이, 불길했던 모양이었다.

공원의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유유자적 헤치고 길을 가다 중앙에 놓인 돌멩이를 못 보고 넘어졌다. 핸들이 흐물거리고 풀리더니 속절없이 몇 바퀴 굴렀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다가와 자전거를 바로 세우고 나를 일으켜줬다. 어질어질한 머리로 몇 번이나 인사를 하고 자전거 핸들을 잡아끌었다. 제대로 까졌는지 팔과 가슴팍이 욱신거렸다. 재수도 없지.

근처 벤치에 앉아 흙과 풀을 털어내며 괜찮다고 스스로 몇 번이나 곱씹었다. 어린아이도 아닌데 울 필요 없다고. 심하게 욱신거리는 가슴팍을 툭툭 몇 번 치는데 앞주머니에서 뭐가 걸렸다.

손가락을 집어넣고 물건을 빼냈다.

“……”

두 동강이 난 핀셋이 들어 있었다. 가지고 왔다는 것도 깜박 잊고 있었는데 굴러서 이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티셔츠도 처음 핀셋을 넣어줬던 옷이었다. 이 주머니 안에 핀셋을 툭 넣어주며 선물이라고 씩 웃었었지.

방금 넘어져서 그랬는지 깨끗하게 두 동강이 난 핀셋 조각을 보니 기분이 울렁거렸다. 몇 개월이나 지났지, 여기서. 반년도 지났는데…이상하게 눈물이 나왔다. 벤치에 쭈그리고 앉아 훌쩍거리는 나를 사람들이 쳐다봤다. 조금 후에 출근을 해야 하는데도 목 놓아 엉엉 울어 버렸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끔찍했다.

외로움은 지나고 나면 옅어질 거라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자주 먼 땅을 그리워했다. 애틋한 얼굴을 보고 나면 어김없이 남자가 무섭게 내 사지를 절단하는 꿈을 꿨고, 하루하루가 가시밭길이었다.

결국 1년을 채우고 난 뒤 이사를 했다. 다니엘이 아쉬운 티를 냈고, 영어도 못 하던 나를 고용해준 일본인 사장이 아쉽다는 투로 나를 잡았지만 같은 곳에 정박하기 힘들 것 같았다. 휴대폰 번호도 없었으니, 같은 도시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게 아니면 더는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짐은 박스에 싸서 자전거로 한두 개씩 꾸준히 실어 날랐다.

이젠 영어를 그럭저럭 구사했기 때문에, 소개받은 부동산 업체를 통해 괜찮은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처음 살았던 스튜디오와 비슷한 가격이었지만 집은 조금 더 넓었고 좋았다. 햇빛이 잘 들어오는 방은 아늑한 기분이었다. 부동산 주인은 또래보다도 많이 어려 보이는 나를 좋게 봤는지 이사 선물이라고 맥주를 한 박스나 사줬다. 떨떠름한 기분으로 친절을 고맙게 받았다.

보름 만에 새로운 가게에 취직했다. 핫도그를 파는 가게였다. 다운 타운에서 약간 떨어져 있었지만 강변이라 손님은 많은 편이었다. 수많은 소스 종류와 메뉴 이름을 외우는 것이 고역이었지만, 이번에는 첫 직장보다 더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핫도그 가게 주인은 동양인인 나를 신경 썼는지 가끔 소시지를 굽는 그릴에 밥을 볶아 주기도 했다. 브레이크 타임을 꼬박꼬박 지키는 나를 눈치 줄 때도 있었지만 일하기 나쁜 곳은 아니었다. 테이블이 적은 가게였지만 팁을 받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운이 좋았다.

-영은 가족이랑 연락 안 해?

어느 날, 손님이 없어 아주 한가롭던 날이었다. 같이 커피 한 잔을 뽑아 놓고 잡담을 하는데 주인이 뜬금없이 물었다.

-어…

-미안, 곤란하면 말 하지 마.

손사래 치는 주인을 보며 애써 웃었다. 많이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새로운 이름은 여전히 어색하기만 했다. 플라스틱 상자 안에 육체가 갇혀 자라고 있는 기분이었다. 머그잔을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가족 없어요.

-아, 이런.

주인이 뚱뚱한 배를 쓰다듬으며 곤란해 했다. 속없는 인간처럼 헤실헤실 웃으면서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가족을 버리고 온 건 나니까 안 괜찮을 것도 없었다. 주인은 신경이 쓰였는지 한 시간이나 일찍 나를 퇴근시켰다.

-친구라도 좀 만나! 미안해!

자전거를 끌고 걸어가는 내 등 뒤에 대로 쩌렁쩌렁 소리를 친다. 길 가던 사람들이 우리를 흘끗 쳐다봤다. 생긴 것과 다르게 엄청 소심한 태도에 킥킥 웃으며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자전거에 올라탔다. 연락하는 친구도 없었다. 이사를 하고 난 뒤 다니엘이 종종 연락이 왔지만 완전히 무시했다. 인연을 오래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오 년, 아니 십 년. 이십 년. 완벽하게 안심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이 지난 뒤에나 정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사는 곳은 옛날 집과 완전히 정반대였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옮기자 해가 더 빨리 뜨는 것 같았다. 집에 가면 해가 아직 머물러 있을 것이다. 뜨거운 물로 씻고, 술을 마시고 자야겠다.

귀에서 노래가 요란하게 울렸다. 흥얼흥얼 가사를 따라 불렀다.

“…You keep me wide awake and waiting for the sun……”

너 때문에 나는 잠을 못 이루고, 태양이 뜨기만을 기다리지.

“I'm desperate and confused.”

절망적이고 혼란스러워.

“So far away from you, I’m getting here.”

그래서 너를 떠나 이곳에 있어.

자전거가 시원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상쾌했지만, 무거운 열정은 해갈되지 않았다.

자기 전 술을 자주 마신다. 술을 마시고 잠을 자면 어김없이 꿈을 꿨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싫은데, 꿈에서라도 만나면 외롭지가 않았다.

부동산 주인이 이사 선물로 준 맥주 한 박스를 비우면서 알게 되었다. 꿈을 꾸면 누구든 찾아왔다. 주영이 형, 태정 씨와 아저씨. 엄마, 근영이. 때로는 고모와 노인이, 비체가… 찾아와 나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지만 그리운 한국어와 나의 이름을 들으면 적어도 그 순간은 외롭지 않았다.

"I am in misery…”

너무 비참해…

이 나라는 너무 크다. 한국은 늘 너무 좁았는데, 여긴 너무 넓었다. 안 가본 마트와 쇼핑몰이, 술집이 지천이었다. 커피숍 하나도 정박하고 싶지 않다는 심정과 어딘가 머물고 싶다는 감정이 늘 뒤섞였다. 늘 혼자였는데도 혼자인 게 싫었다.

-뭐야, 일찍 들어오잖아. 오늘 나랑 놀러 갈래?

안 그래도 우울한데 재수 없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자전거를 건물 밑에 묶어두며 못 들은 척 했다.

남자 덕분에 마가 낀 건지 이상하게 게이들에게서 추파를 받을 때가 있었다. 보통은 가게에 자주 들리는 손님이었는데, 이번에는 아래층에 사는 홍콩계 캐나다인이었다. 공용 세탁기에서 내 속옷을 훔치다 걸린 뒤로 저 새끼는 멱을 따버리고 싶은 놈 중 1순위였다.

-대답 안 해? 좋은 곳에 가서 술 한잔하자니까. 끝내주는 바가 있는데…

등 뒤에 바싹 붙어 은근슬쩍 엉덩이를 만진다. 알렉스를 밀치며 화를 냈다.

-난 게이 아니야.

-뭐?

알렉스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웃긴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것처럼 낄낄 웃었다.

-거짓말 하지 마. 남자애인 없었어?

-없었어.

어깨로 올라오는 손을 털어내며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이런 희롱을 받을 때면 아랫배가 쑤셨다. 변태자식은 계속 알아듣지도 못할 느끼한 말을 퍼부으며 허리를 은근슬쩍 더듬었다.

이번 집도 직장도 마음에 들었는데, 내년에 다시 이사해야 하나. 미간에 주름을 집고 알렉스를 세게 밀쳤다.

-한 번만 더 집적거리면 신고할 거야.

-신고?

계단까지 집요하게 쫓아 올라오며 알렉스가 팔을 잡아당겼다.

-너 아직 휴대폰 번호도 아는 사람도 없잖아. 무슨 문제 있는 거 내가 모를 것 같아?

취약점을 파고드는 말에 걸음을 멈췄다. 알렉스가 심술궂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신고도 못 할 주제에…내가 대신 신고해줘?

-나 범죄자 아니야.

-뭔가 찔리는 게 있겠지.

히죽히죽 웃으며 알렉스가 벽으로 나를 밀쳤다. 차가운 시멘트에 등을 대고 알렉스를 노려봤다. 구역질 나는 얼굴이 뻐드렁니를 드러낸다. 역겨웠다.

-…뭘 바라는 거야?

-나랑 한 번만 자자.

-미쳤어?

-왜? 한국인은 거기도 작다며. 나는 그래도 꽤 크거든…만족할 거야. 어때?

-닥쳐.

살다 살다 이런 성희롱은 처음 들어봤다. 아예 남자의 성희롱이 그나마 나을 정도였다. 역겨운 새끼. 뿌리치고 집으로 들어가려고 바둥거렸지만 나보다 몸집이 한 뼘은 더 큰 알렉스를 이기기는 힘들었다. 누구 안 나오다. 이를 득득 갈며 벽과 알렉스의 사이에 납작하게 끼어있자 놈이 하체를 불쑥 들이밀었다. 흥분해서 딱딱해진 성기가 느껴지자 비위가 상했다.

-비켜.

-부탁해야 할 사람이 누구지…

-알렉스, 제발.

-한 번만 빨아주면.

하체를 슬슬 사타구니에 비비기 시작한다. 죽여버릴까. 자기 혼자 흥분한 알렉스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영, 너 진짜 존나 예쁘다고.

예쁘다는 말은 특히 질색이다. 걷어 차고 도망가려고 하는데 알렉스가 더러운 주둥이를 붙였다. 억, 비명도 못 지르고 강제로 키스를 당했다. 담배 냄새에 절어 있는 혀가 입안을 휘젓는 기분이 끝내주게 역겨웠다. 숨도 못 쉬고 버둥거리다 못 참고 알렉스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광대를 세게 치자 알렉스가 내 혓바닥을 깨물면서 떨어져 나왔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입안에 끈적거리는 타액과 피 맛이 확 풍겼다. 얼굴을 부여잡고 억억거리는 변태 자식의 사타구니를 힘껏 걷어차고는 집으로 도망치듯 올라왔다. 씨발, 이게 뭐야.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치약을 짜서 이를 북북 닦았다. 여러모로 최악이었다.

세 번이나 이를 반복해서 닦고 샤워기에 물을 틀었다. 더운물을 맞으니 불쾌한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 남자에게 키스라니, 다시는 없을 줄 알았는데. 화장실 벽에 머리를 박은 채 가만히 숨을 쉬었다.

“……”

아, 씨발. 자괴감에 빠져 얼굴을 가렸다. 가끔 몽정을 했다. 남자의 성기가 들어오는 꿈이었다. 그런 꿈을 꾸고 나면 사타구니가 흥건했다. 한창때니까, 종종 자위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계속…

“흐…젠장.”

흥분한 아랫도리를 가렸다. 꿈에서 남자는 붉은 입술을 적시며 나를 괴롭혔다. 불규칙적인 호흡과 손가락이 마약이라도 한 것 처럼 정신을 망가트렸다. 꿈에서도 미칠 것 같았다. 몸이 이상하게 망가진 게 분명하다. 차가운 타일 벽에 얼굴을 붙인 채로 입술을 깨물고 인내했다.

“아, 흑.”

울음소리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소리에 반쯤 먹힌 채 욕실에 울렸다. 바닥에 정액이 후드득 떨어졌다. 손가락을 물고 있는 엉덩이 사이가 후끈거렸다. 손가락을 안에 넣은 채 휘젓자 짜릿한 감각이 척추를 때렸다. 남자가 왜 그렇게 나를 조롱했는지 알겠다. 자위로도 이렇게 느끼는데, 볼만했겠지.

더러워, 음란해 빠졌어. 남자면서 게이도 아닌데 뒤로 자위를 해야 한다니. 아무리 손가락을 넣고 흔들어도 남자가 주던 쾌감의 크기에는 도달할 수 없었다. 한참 물을 흘려가며 끙끙 앓고 나서야 제대로 오르가즘에 올랐다.

정액에 흠뻑 젖어 끈적끈적한 손바닥을 물에 씻어냈다. 얼굴에 더운물과 자위의 흔적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휘청거리며 몸을 씻어내고 욕실 바깥으로 나왔다. 차가운 공기에 닿으니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물기를 훔치고 맥주를 꺼내 들었다.

풀탑을 꽉 눌러 따고 한 번에 반을 비워냈다. 뱃속이 찰랑거리는 것 같아. 단번에 오른 취기에 후끈거리는 숨을 뱉으며 옷을 걸쳐 입고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먼 곳에서 이제야 석양이 지고 찬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춥다. 코를 훌쩍거리며 맥주를 한 캔 더 가져오는 김에 패딩을 끌어 입었다.

캐나다의 추위에는 적응하지 못했다. 맥주를 마시며 감자 칩을 뜯었다. 오늘 저녁은 술과 안주였다. 난간에 기대 발을 달랑거리며 한참이나 바깥을 내다보았다. 금세 까맣게 변한 하늘에서 뭔가가 서서히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어.”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조금씩 떨어지는 눈을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손가락질했다. 시월에 첫눈이라니. 작년보단 그래도 한 달이나 늦은 편이다. 올해는 겨울이 조금 늦게 지나가려나. 눈을 감고 차가운 난간 철봉에 뺨을 기댄 채 팔다리를 축 늘어트렸다.

몇 개월만 더 있으면 이곳에서 지낸 시간이 2년을 꽉 채운다. 또 이사를 가야할 것 같았다. 여전히 발끝은 낭떠러지였다. 자위하고 있으면, 남자가 찾아와 음란하다고 욕을 하며 강제로 나를 안을 것 같았다. 연약한 내 이성은 남자가 주는 쾌감에 또 넋을 놓고 울며 보채겠지.

정말 싫다. 2년이면 남자와 지냈던 시간보다도 훨씬 긴데, 아직도 잊지 못하다니. 그게 이렇게나 강렬한 쾌감이었을까. 엄마와 근영이는 그리웠지만, 남자는 다른 뜻으로 심장을 쥐어 뜯었다.

“엄마 보고 싶다.”

뭘 하고 지낼까. 잘 지낼까. 걱정을 많이 하지 말아야 할 텐데. 베란다에 기댄 채 추위에 억센 잠을 청했다. 찬 바람이 싸늘하게 몰아쳤다.

그날도 꿈에는 어김없이 고향이 나왔다. 근영이가 술을 권했으며 우리는 어깨동무를 하고 밤거리를 무자비하게 쏘다녔다.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집 근처 골목에 숨어있던 남자가 달려 나와 내 목을 졸랐다. 죽고 난 뒤에는 늘 집 안의 침대 위나 부엌, 계단 같은 곳에 쓰러진 채 강간을 당했다.

멍청하고 약하다. 겨우 그걸 잊지 못해서 다시 나를 유린하고 있는 거야… 몇 번이나 구토하면서도 지워질 줄 모르는 고통에 발버둥 쳤다. 아직도 전부 엉망이었다. 심장이 저렸다. 도망간다고, 멍한 표정으로 되묻던 남자의 고집 센 표정이 사납도록 생생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꽁꽁 가렸다. 아직도 버리지 못했다. 조각이 나버린 그 유리 파편을. 나약해. 다 깨져버렸는데도 버리지 않고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하늘이 눈으로 흐렸다. 뿌연 시야를 닦아내며 고통을 참았다. 희망은 중독적이었다. 외로움과 그리움이 사무쳤다. 아직도 머릿속에 깊이 남아있는 전화번호를 몇 개 외워보았다. 휴무가 언제였지, 달력을 뒤졌다.

어마어마하게 쌓인 눈에 가려 흰색 공중전화 부스를 찾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귀한 휴무일에 근교를 돌아다니며 인적이 뜸한 공중전화를 찾아냈지만 전화기를 잡는 것도 30분이 넘게 망설였어. 결국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5달러를 주고 구매한 국제전화 카드는 사용방법이 복잡했다. 몇 번이나 손가락을 더듬거리다 겨우 전화번호를 찍었다.

괜찮을까. 두려움과 그리움이 범벅이 되어 이까지 왔지만 여전히 확신은 없었다. 2년 간 남자는 나를 찾는 시늉도 없었다. 고모에게서도 연락은 없었다. 괜찮겠지. 그런데도 무섭다. 지금 당장 남자가 뒤에서 나타나 바닥에 나를 쓰러트리고 올라탈 것만 같았다. 식은땀이 흐른다. 꾸역꾸역 패딩 지퍼를 올리고 목도리로 얼굴을 꼭꼭 가렸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데도 무서웠다. 떨리는 마음으로 신호음을 한참이나 기다렸다.

[여보세요?]

그립고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뭐야? 웬 국제 전화?]

누가 옆에 같이 있는지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침을 몇 번이나 삼켰다.

“…이근영.”

[어? 누구세요?]

“근영아.”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한국어로 대답해본 게 얼마만의 일이었을까. 이곳에 살면서도 한국인이라면 의도적으로 피해 다녔다. 나를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안 될 것 같아 메신저 아이디도 알려주지 않았다. 다들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다. 분명히 뒤가 구릴 거라고, 알렉스의 말처럼 어딘가 켕기는 게 있을 거라고…

세금 문제와 비자 갱신 문제가 겹쳐 억지로 계좌를 만들었지만 여전히 내 명의를 사용하는 건 무서웠다. 남자가 집 문을 부수고 들어와 내 머리카락을 잡아채 끌고 나올까 봐 숨이 막혔다. 식칼을 들고 있다 무심코 손목을 절단하려고 한 적도 수도 없이 많았다.

하루하루 여전히 피가 마른다. 이 전화도 분명 잘못된 선택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참을 수 없었다. 이러다 그리워서, 향수병에 걸려 죽어버리면 어쩌나 싶어서…

“이근영.”

[야, 너 이소냐? 정이소?]

내 이름이 불렸다. 울음을 터트리자마자 이근영이 수화기 너머에서 무시무시한 욕을 쏟아내며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야, 너 어디야?! 너 찾는다고 난리 났었어. 미친놈아, 벌써 2년이 다 되어간다!]

“그, 근영아. 나 무서워…”

늘 불안해 주변을 살폈다. 하루라도 안심하고 잠이 든 적이 없다. 마트를 마음 놓고 돌아다닌 적이 없다. 돈을 함부로 써보지도 못했다. 살이 빠졌다는 평가에도 밥을 삼키지 못하는 날이 더 많다.

[너, 이 씨발. 어디야, 해외야?]

“흐…우윽. 근영아, 외로워. 여기 외롭…”

울음에 막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덜덜 떨면서 소매에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쳐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길고 적막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외로우면 돌아와야지, 아들.]

숨이 막혔다. 눈물이 한 번에 뚝 그쳤다. 입을 자그맣게 벌린 채 더운 숨을 쌕쌕 내쉬었다.

[1년 반이 넘도록 그렇게 외로워하면서…]

꿈속에서도 잊지 못했던 목소리에 몸을 떨었다. 수화기를 쥔 채 주변을 정신없이 돌아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교외를 걷는 사람들과 주차된 차, 눈이 전부였다. 오한에 이가 딱딱 부딪쳤다.

[어떻게 내 이름 한 번 부르지 않아.]

다정한 목소리, 꿈같은 남자의 음성에 정신이 아득했다. 무서워, 극한까지 차오른 공포감에 덜덜 떨었다. 귀에 바짝 붙인 수화기에서 소량의 기계음이 섞이다 쩌렁쩌렁한 외침이 터졌다.

[야, 정이소, 대답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근영이었다. 환청인가. 식은땀에 수화기를 몇 번이나 놓쳤다가 겨우 고쳐잡았다. 귓가를 저릿저릿하게 울리던 남자의 목소리는 깨끗하게 사라지고 없었다. 얼굴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으, 응. 나야.”

[너 도대체……. 잘 지내고 있는 거냐. 몸은 괜찮아?]

“……응. 나 잘 지내.”

[개새끼, 진짜 한 번이라도 연락을…]

“미안해.”

[아니다, 이제라도 했으면 됐어.]

근영이가 고통스러운 한숨을 쉰다. 콧물을 훌쩍이며 다정하고 퉁명스러운 친구의 걱정을 들었다.

“나 잘 지내고 있어.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너희 어머니는 잘 지내셔.]

역린을 건드리는 대꾸에 입을 다물었다.

[너는, 전화번호 보니까 해외 같은데… 걱정 말고 네 앞가림이나 잘해. 영어도 못 하는 자식이…]

“응, 또 나중에, 전화할 게.”

[살아있는 거 확인했으니 안 해도 괜찮아. 괜히 걸리지 말고, 이제 끊어.]

내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전화가 훅 끊겼다. 끊어진 전화음을 한참이나 듣고 있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제 쓸모가 없어진 국제전화카드를 뚝뚝 부러트려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눈길을 따라 한참 걸었다. 정신이 몽롱했다. 현실이 지척이었다. 흰 눈에 발자국을 내면서 똑바로 쭉 걸었다. 겨울은 추웠다. 한국보다 길고 온도가 낮았다. 눈이 한 뼘씩 쌓이는 도심에서, 또 한 번 포기를 상상했다.

다 놓아버리고 싶었다. 이런 결말을 원해서 쭉 버틴 것은 아니었으니까.

양이태. 아버지.

남자의 이름을 머릿속으로 불러보았다. 다정하고 은근한 환청이 울린다. 아들, 하던 그 말투가. 혹시 환청이 아니었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불안감에 배를 감싸 안고 웅크렸다. 식도를 타고 위액이 올라왔다. 흰 눈이 금방 더러워졌다.

-영, 무슨 생각하는 거야?

-아, 미안.

드니즈가 손뼉을 짝짝 치며 나를 불렀다. 한창 바빴던 런치 타임을 끝내고 늦게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지겨운 핫도그 위에 칠리소스를 듬뿍 뿌리며 사과했다.

-그래서, 오늘 같이 갈래?

-어딜?

-BBQ 파티. 일 인당 30불만 내면 돼.

-안 가.

-너 진짜 사교성 없다.

두 달 전부터 같이 일하기 시작한 드니즈는 생각하는 건 전부 말하고 봐야 하는 인간이었다. 정곡이 찔린 기분에 입술을 삐죽거리며 핫도그를 한 입 씹었다.

-가자, 재밌어.

-재미없어.

-젠장. 너 친구 없지?

-응.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드니즈가 투덜거리며 히터의 세기를 올렸다. 이틀 내내 내리던 눈이 어제 아침에 겨우 그쳤다. 제설 작업이 끝나기 전이라 자전거도 끌고 나오지 못했다.

-그럼 리멤버런스데이에 뭐 할 건데?

-방콕.

-뭐?

-방-콕. 한국어로 방에 처박혀 있겠다고.

-그거 지금 유머라고 한 거야?

-진담인데.

우리의 잡담을 듣던 사장이 배를 잡고 웃었다. 어쩐지 무안해져 목덜미를 긁으며 콜라를 쭉 빨아당겼다.

-여행을 가려고.

-어디로?

-밴프.

-안 가봤어?

-응.

사장과 드니즈가 둘 다 나를 귀신 보듯 쳐다봤다. 가까운 거리라지만 관심 없으면 안 가볼 수도 있는 거지 뭐. 속으로 변명하며 컵을 비웠다. 빨대에서 공기와 콜라가 같이 빨려 올라오며 드르륵거리는 소리를 냈다.

짧게 휴가를 다녀온 후에 다시 이사할 계획이었다. 이곳에 너무 오래 있었다. 이제는 도시를 옮겨야 할 것 같았다. 미리 집을 알아보고, 이사 센터를 알아본 다음에 다시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오래 달려 떠나자. 남자는 내 꿈에서 떠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몽롱한 망상에 젖어 얼음처럼 뭉쳐 굳어있는 눈 뭉치들을 바라보았다. 드니즈가 내 허리를 쿡쿡 찌르더니 맛이 갔군, 하고 비난했다. 될 대로 되라지. 망한 인생.

마지막까지 같이 파티에 가자고 붙잡고 늘어지는 드니즈를 버리고 시티 트레인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골목에서부터 몇 번이나 건물을 살피며 알렉스가 없는지 확인했다. 저번에 걷어찬 사타구니로 고생을 좀 했는지, 이번에 만나면 강간을 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놈을 생각하며 후다닥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방이 보였다.

패딩을 벗어 던지고 이불 안으로 뛰어들어가 몸을 콱 웅크렸다. 추워 죽을 것 같았다. 한기에 덜덜 떨면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아무 메시지도 없는 화면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코를 훌쩍이며 어느 도시로 가야 하나 고민하는데 누가 대문을 두들겼다. 쾅쾅, 주먹으로 세차게 두들기는 소리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렉스 아냐? 불안함에 살금살금 발뒤꿈치를 들고 걸어가 현관문 중앙에 있는 스코프 너머를 내다보았다.

옆집에 사는 노파였다. 노파는 성난 얼굴로 계속해서 내 현관문을 두들겼다. 무슨 일이지, 급하게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열었다.

-왜 이렇게 굼떠?

다짜고짜 화를 낸다. 민망한 마음에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무슨 일로…

-전화 받아!

노파가 소리를 지르며 벌컥 휴대폰을 가슴팍에 밀쳤다. 얼떨결에 전화를 받았다.

[이소, 안녕.]

작은 휴대폰 너머에서 차라리 죽어버리길 바랐던 목소리가 선명하게, 심장 한복판을 내리그었다.

            

[알렉스 같은 잡놈과 놀아나? 죽고 싶어?]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내 뺨을 툭 건드리는 것 같다. 남자가 심술 궂게 웃으며 폭언을 날리던 모습이 생생했다.

[…충분히 놀다 오라고 내버려 두는데, 그러면 섭섭하잖아.]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춥다고!

환각일 수가 없었다. 뺨을 치는 찬바람과 성난 노파의 표정이 너무 생생했다. 휴대폰을 고쳐잡았다. 땀으로 작은 전자기기의 몸체가 미끄러웠다. 감각이 저 멀리서 풍랑에 날아가는 소리가 났다.

[돌아와.]

남자가 칭얼거린다. 어울리지 않게 풀 죽은 목소리로 감언이설을 갉작거린다.

[나도 외롭단 말이야.]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공중전화? 아니면, 그보다 더 옛날…?

[화 안 내. 정혜 씨도 잘 지내고 있단 말이야. 돌아와 줘, 이소야.]

내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비현실적이었다. 노파가 내 얼굴이 심상찮아 보였는지 재촉하던 걸 멈추고 뭐야, 하고 묻는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도망쳐야 했다. 멀리 저 지구 반대편으로. 남자가 찾기 전에 빙하의 사이에 빠져 죽어 시체가 되어버릴까. 무서워. 또 남자의 밑에 눌려 나를 잃어버리고 살기 싫었다.

[찾아가서, 무릎 꿇고 빌면 와줄래?]

부드럽고, 상냥한 척 나를 달래던 남자가 한숨을 쉰다.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강제로 데려오기 싫어.]

“…안 가.”

눈물이 떨어졌다. 죽어도 가기 싫었다.

“강제로 데려가 봐, 죽을 거야. 지금 당장, 죽어버릴 거야.”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울기 시작하는 나를 보고 노파가 앞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준다. 성격 안 좋은 노파가 이럴 정도면 나는 어떻게 울고 있는 거지, 입술을 깨물어도 끅끅거리며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뜨거워진 휴대폰을 다시 노파에게 내밀었다. 전화가 끊어지지 않았지만, 더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수 없었다.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자 노파는 석연찮은 표정으로 대신 통화를 끊고는 자신의 집에 들어갔다.

덜덜 떨며 손잡이를 열고 들어가 문을 닫았다. 잠금장치를 모조리 채우고, 처음 캐나다에 올 때 들고 왔던 가방을 꺼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담고 구석구석 숨겨준 현금 뭉치를 채웠다.

이제 어디로 가지.

떠날 곳이 없었다. 당장 그레이하운드나 공항으로 가 비행기를 탄다고 해도, 다른 도시에 대해 아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세금이 낮은 곳, 집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도시. 일자리가 구하기 쉽고… 내년에는 비자도 갱신해야 하는데. 답답한 마음이 진흙탕에 처박혔다.

동료나 이웃이라고는 해도 친구는 아니었다. 도움을 달라고 한다고 선뜻 나서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지난 2년간 누구와도 술을 마신 적이 없었다. 살기 위해 영어 공부를 했고, 살기 위해 일을 했다. 동료나 사장과 잡담을 하는 것도 생존수단의 일종일 뿐이었다.

어디로 가야 벗어날 수 있는 걸까. 옆집에 전화를 걸어 내게 접근할 정도로 남자는 가까이에 달라붙어 있었는데, 이제 와서 도망치는 게 의미는 있을까. 내 다른 신분도 전부 알고 있겠지. 무섭다.

“…무서워.”

내뱉고 나니 지옥의 화마에 휩싸여 있다는 게 이제서야 느껴졌다.

“아, 빌어먹을, 엄청 춥네.”

콧물을 훌쩍거리며 히터를 틀었다. 얼어 죽을 것 같았다. 벗어뒀던 외투를 다시 주워 입고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추위에 곱아든 손가락을 겨우겨우 움직여 병가를 내겠다고 메시지를 보내고는 몸을 웅크렸다. 사장과 드니즈가 같이 있는 그룹 채팅에서 둘이 번갈아가며 뭐라고 답을 보내온다. 읽을 정신이 없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눈물과 기침을 반복해서 쏟아내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혼미한 정신을 몇 번이나 차렸다가 물만 마시고 다시 잠드는 걸 온종일 반복했다. 밤늦게부터 열이 점점 오르더니 나중에는 숨 쉬는 것도 힘들어졌다. 이곳의 진료비는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해열제 하나만 뜯어 먹었다 빈속에 약이 받혀 그대로 게워냈다. 아까운 비상약 하나를 공으로 떠내려 보내고 나서도 밥을 먹을 기운은 없었다. 열로 띵한 머리를 시트에 문지르며 꼬박 몇 시간을 끙끙 앓았다.

도망가야 하는데, 멀리 남자가 오기 전에 떠나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물을 쥐어짜 내며 잠에 빠져 있으면 남자가 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꿨다. 퍼니스 탓에 텁텁하고 더운 공기로 채워진 좁은 공간을 짜증스럽게 둘러보다, 내가 앓고 있는 걸 보고는 조심조심 이마에 손을 올려주는 꿈이었다. 그렇게 추웠는데, 남자의 찬 손이 더운 이마에 올라가니 살 것 같았었다.

조심스럽게 손깍지를 껴오고, 남자는 황홀한 표정과 분노를 뒤섞은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남자의 뺨이 홀쭉하다.

‘아프지 마.’

아프다, 꿈에서도 자유롭지 못해서 아팠다.

‘죽어도 내 앞에서 죽어.’

꿈에서 남자가 속닥거린다. 내가 평생 외롭게 내버려 두라고, 화를 내고 싶었지만 꿈이라 남자는 심한 말을 듣기 전에 거품처럼 꺼져버렸다.

열병을 털고 일어났을 때는 이틀이 지나가 있었다. 이틀 중 하루가 공휴일이었으니 다행이었다. 눈에 보이는 음식을 아무렇게나 집어 먹고 싸다 만 가방을 다시 열었다. 물건은 전부 그대로 있었다. 꿈이겠지. 평범한 일상을 깨트리고 찾아온 남자의 목소리에 정말로 죽어버리는 게 낫지는 않을까 아픈 와중에도 한참을 고민했었다.

귀중품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옷을 최대한 껴입고 중요한 생필품을 마저 다른 가방에 마저 담아 자전거 뒤에 묶었다. 어디론가 가버리자. 집은 사용하지 않아도 계좌에 남은 잔액으로 자동이체가 될 테니 상관없었다. 1년이 지나고 재계약을 해야 할 때는 잔액도 없겠지. 떠나자. 페달을 밟고 아무도 없는 곳만 골라다니다 보면 또 남은 시간이 지날지도 몰랐다.

그 뒤엔 어쩌지.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다.

자전거 자물쇠를 풀어 안장 밑에 묶어놓고 핸들을 잡았다. 막 자전거에 올라타려고 한쪽 발을 들었는데 거구가 등 뒤를 확 덮쳤다.

-야! 너 이 자식, 잘 만났어.

어디 숨어 있었는지 갑자기 알렉스가 휙 하니 나타났다. 자전거에 매달린 채 휘청거리다 겨우 중심을 잡았다. 이 개자식. 이를 갈며 옆을 돌아보았다. 낮부터 술을 퍼먹었는지 거나하게 취한 알렉스가 눈에 핏줄을 세운 채로 비틀대고 있었다. 왼손에 든 술병까지 제대로 된 노숙자였다. 더러운 새끼.

이 건물에는 알렉스의 더러운 소문이 파다했다. 범죄자라든가, 마약 브로커 꽁무니를 따라 다닌다는 소문. 내가 사는 건물은 대부분 그런 사람들이었다. 예술인, 유학생, 연고앖는 노파, 위조 신분을 가진 나.

-니가 내 거시기를 차는 바람에 이틀이나 계집애들한테 얼마나 무시를 당했는지 알아?

-나 바쁘니까 꺼져.

-하, 이게 진짜…

알렉스가 이를 뿌드득 갈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거친 행동에 다리가 꼬여 페달 부분에 정강이가 부딪쳤다. 얼굴을 찡그리고 알렉스를 향해 주먹을 던졌다. 남자의 조롱이 가시처럼 꿰여 고슴도치가 된 기분이었다.

놀아나다니, 내가 이놈이랑? 개새끼.

술이 아니라 약까지 했는지, 알렉스는 얻어맞고도 아픈 줄 모르고 낄낄 웃었다. 배를 잡고 거품을 물고 웃는 모습이 소름 끼쳤다.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자 알렉스가 육중한 몸집을 휘날렸다. 순식간에 바닥에 쓰러져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알렉스가 두 팔을 뻗어 목을 졸랐다. 기도와 성대가 동시에 눌리자 꺽꺽거리는 소리가 났다.

-제기랄, 좀…벌리라고…!

뻐드렁니를 들이밀며 으르렁거리는 놈의 명치를 있는 힘껏 쳤다. 알렉스가 뒤로 넘어가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헉, 헉, 숨을 몰아쉬며 허겁지겁 자전거에 올라탔다. 짐이 요란한 상황에도 안 떨어지고 매달려 있다는 것만 확인하고는 페달을 있는 힘껏 밟았다. 앞쪽 골목에 있던 사람을 칠 뻔했다. 등 뒤에서 욕이 터지는데도 멈추지 않고 페달을 밟았다.

알렉스의 폭력에 상처 입을 만큼 순해 빠지진 않았다. 이 나라는 기본적으로는 차별이 없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이런 성희롱을 받아왔다. 겨우 3.3달러짜리 핫도그 세트를 시키면서 엉덩이를 주무르며 성기를 빨아달라고 한 새끼도 잊지 않고 핫도그 안에 할라피뇨소스를 때려 넣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찬바람에 얼어가는 뺨을 손등으로 있는 힘껏 훔쳐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흔한 도피자의 생활이었다.

남쪽으로 가자. 조금이라도 따뜻해지게. 이제 겨울은 시작이었지만 아마도… 괜찮을 거다. 이때까지도 잘 버텼으니까.

도시와 도시 사이는 지나치게 넓었다. 중심지에서 외곽으로 빠져도 다른 도시로 이동하려면 버스를 타야 했다. 겨울이 다가온 날씨에 바깥에서 노숙하는 건 자살 행위였다. 자전거를 싣고 10시간 남짓 버스를 타다 중간 터미널에 두서없이 내려 꼬박 열다섯 시간씩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따라 움직이는 미친 짓을 감행했다.

도로가 끝나고 마을이 보이면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숙박업소에 들려서 잠을 잤다. 손과 발이 온통 얼어 터졌다. 고글과 마스크로 중무장을 했지만 자전거는 몇 시간만 타도 칼바람에 움직이기조차 힘들었다. 땀을 내기 위해 힘껏 자전거를 끌고 앞으로 가다 보면 또 눈이 내렸다. 외곽 도로를 타다 눈밭에 미끄러져 구르다 정신을 잠깐 잃어버리기도 했다. 체인이 빠져서 맨손으로 자전거를 고치다 기름투성이인 체인에 긁혀 손마디 마디에서 피가 나오기도 했다.

핫도그 집은 나 대신 새로운 직원을 구했을까. 막 보름이 지났던가, 버스로 하루를 움직이고 자전거로 8시간쯤 달렸다. 이틀 만에 제대로 잡은 숙소를 보자마자 감격해서 정신없이 곯아 떨어졌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꿈도 꾸지 않았다. 꼬질꼬질 더러운 옷을 그대로 이불 위에 묻은 채 잠든 지 네 시간쯤 지났을까, 갑자기 프런트 직원이 방에 찾아왔다.

탈색한 머리를 한 직원의 가슴팍에는 애너벨이라는 이름표가 붙어져 있었다. 애너벨은 작은 소포를 내밀었다. 빨간 머리에 콧잔등에 점이 하나 있는 직원은 까딱 묵례를 하며 헛기침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머니를 뒤져 5달러를 내밀었다. 팁을 받은 뒤에야 등을 돌리고 사라진다. 복도 저 멀리 가는 걸 보고 문을 받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작은 소포 상자는 꼼꼼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누가 보낸 건지는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잠깐 고민하다 상자를 뜯어봤다. 휴대폰이 들어 있었다. 까만색 신형 휴대폰을 집어 들자 서서히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복잡한 국제전화 표시는 한참이나 액정 위에 떠 있다 사라지고, 다시 울리길 반복했다.

여덟 번쯤 진동이 울렸을까, 30%쯤 남은 배터리 잔량을 보다 손을 뻗어 통화를 수락했다.

[…전화는 받아.]

이 곳까지 추적을 해올 정도면서, 할 말이 결국 저것뿐인 모양이다. 어깨와 뺨 사이에 휴대폰을 끼운 채 침대에서 일어나 미니바 문을 열었다. 무료로 제공되는 생수 한 병을 꺼내 뚜껑을 땄다.

[그렇게 다니면 몸 다 상해.]

“……”

[네 속이 풀릴 때까지 있어도 되니까, 돌아…]

“그럼 평생이겠네요.”

쉰 목으로 대꾸하고 물을 삼켰다. 찬물이 속에 들어서자 씻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땀도 많이 흘렸으니 분명 냄새가 날 거다. 세탁 서비스에 쓰이는 봉투에 옷을 벗어 던져 넣고 욕실에 들어갔다. 온수와 수압을 조절하며 다른 손으로 전화를 고쳐 잡았다. 물이 쏟아진다. 발끝을 슬그머니 적시는 샤워기의 물줄기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나도 생각을 많이 했어. 떠난 뒤에 화도 많이 났지만…이젠 정말 괜찮아.]

뻔한 레퍼토리를 들으며 샴푸가 뭔지 뒤졌다. 욕조를 채우며 이제 발목과 종아리에 닿는 물을 보았다.

“뭐가 괜찮은데요?”

피곤함에 젖었는데도 할 말은 해보고 싶었다. 이 정도로 동선이 따라잡히면 남자가 찾으러 오는 건 금방일 게 뻔했다. 그전에 전부 끝을 낼까. 욕조를 가득 채우고 나도 여기 그냥 채워버릴까. 위험한 생각을 하며 재차 물었다.

“왜 당신이 괜찮아요?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 건 나인데.”

[……]

“한 번도 내게 정말로 괜찮냐는 말 한마디 없었잖아!”

가장 필요했을 때, 중요한 순간에는 그런 말 없었으면서 괜찮다고. 자기는 괜찮다고? 나는 한 번도 내가 괜찮아졌다고 한 적이 없는데.

고함이 쩌렁쩌렁 막힌 욕실 벽을 부딪쳤다 떨어져 나왔다. 파편 같았다.

“평생…돌아가지 않을 거야.”

[어째서.]

“당신과 다시 사느니 죽는 게 나으니까.”

[사랑한다며.]

“과거에는 외로웠으니까. 이젠 아니야.”

2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도 남자는 변한 게 없었다. 그게 나를 더 미치게 만들었다. 다정한 척 포악하게 머리를 뒤흔드는 괴물처럼 남자가 울부짖는다.

[기다리잖아, 네가, 그 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도록!]

전화 너머였지만 목소리에 가득 낀 눈물을 모조리 읽을 수 있었다. 단순히 욕실에 낀 습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온통 울적했다.

울어…? 운다고? 어째서?

[원하는 건 다 들어 줄게. 이제 그만해.]

“원하는 거…?”

[그래, 공부하기 싫으면 하지 마. 집에만 있어도 괜찮아. 말하면, 다 이해하려고 내가 노력한다잖아.]

“그럼…”

수면 위는 탁해서 내 얼굴은 보이지도 않았다.

“나를 죽이면 되겠네…”

건너편에서 남자가 욕을 한다. 썅. 말 그대로 상스러운 욕이었다. 성격 정말 변하기 힘들군. 어깨를 떨면서 짧게 웃었다.

[그래. 내가 널 죽일 거야. 아니야, 제발, 죽지 마…]

수십초에 한 번씩 변하는 남자의 애절한 목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목을 졸랐다. 화면에서 허연빛을 내는 전화기를 욕실 바깥에 집어 던지고 물속으로 잠수했다. 내 낡은 자전거가 계속해서 페달을 밟고 돌아간다. 어딘가에는 빛이 있겠지. 빛이 보이겠지.

그러나 현실은, 침몰하는 배였다. 깊은 해저 속으로 가라앉는다. 이대로 웅크린 채 다시 엄마 뱃속의 양수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때는 탯줄로 스스로 목을 감겠다. 엄마의 발목을 잡지 않기 위해서,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지 않기 위해서.

현실이 버겁다. 결국 이게 현실이었다. 지난 약 2년 간의 삶은 전부 현실에서의 도피였다. 남자에게서의 도피가 아니라.

그런저런 수준의 숙소였지만 침대와 더운물이 나온다는 점에서는 최고였다. 까끌까끌한 목을 울리며 일어나 전기 포트에 생수 한 병을 따서 넣었다. 피곤이 쌓이며 입술이 텄는지 조금 움직이자마자 핏물이 올라왔다. 찢어질 듯 건조한 얼굴과 몸 위에 어메니티로 놓인 싸구려 로션을 털어 바르고 차를 한 잔 끓여 마시자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

어제 방 복도로 집어 던진 휴대폰을 꺼냈다. 배터리 잔량에 빨간 불이 들어와 있었다.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와 문자 몇 건을 훑어보다 휴대폰을 미련 없이 변기 안으로 던져넣고 물을 내렸다. 긁는 소리를 내며 전자기기가 빨려들 듯 어정거린다. 까맣게 죽어가는 액정을 보며 내 휴대폰을 켰다. 느린 와이파이를 잡자 진동이 끝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몇 안 되는 아는 사람들에게서 대화가 잔뜩 와 있었다. 무단결근 중인 아르바이트생을 찾는 사람들을 보다 한 사람이 보낸 메시지에서 우뚝 멈췄다.

[영, 알렉스가 마약으로 구속된 거 들었어?]

1층에서 알렉스가 내는 소음으로 고생하던 흑인 한 명의 메시지였다. 어쩐지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겠지, 애써 부정을 하면서도 남자가 관계되어 있을 거란 생각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언제부터 내 인생에서 남자가 손을 대고 있는지는 모른다. 부동산 주인도, 일하던 가게에도 남자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뒤돌아보면 어설플 정도로 멍청했다. 의심이 꺾이지 않았다. 내가 하는 정처 없는 도피가 남자의 손아귀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장난 놀음이라면, 지금 당장 시체로 뻗어버리는 게 낫지는 않을까.

죽기 싫어서 이곳까지 왔는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온몸이 쑤셨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샤워만 급하게 하고 나와 다시 옷을 껴입었다. 비싼 돈을 주고 세탁 서비스를 잔뜩 요청했는데 옷감에서 독한 약품 냄새가 진동했다. 찬 바람에 몇 번 털어버리고 스웨터를 머리 위에서 끼워 넣었다. 섬유와 석유, 화학의 냄새. 악질적인 삶의 냄새.

체크아웃하고 다시 자전거 위에 올라탔다. 매달린 짐이 묵직했다.

다시 자전거를 달리기 시작했다. 중간에 있는 낡은 슈퍼에서 말도 안 되게 비싼 가격을 주고 체인에 기름을 먹였지만 혹사당한 자전거는 예전만큼 잘 굴러가지도 않았다. 종종 빈 창고에서 자거나 집이 보이면 양해를 구하고 차고를 빌려 쪽잠을 잤다. 겨울에 인심껏 내준 스토브 하나만 끼고 잠을 잤더니 몸이 망가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열이 나고 어질어질했지만 다시 길을 따라 걸었다. 도저히 중심을 잡고 있기 힘들면 자전거를 끌고 걸었다. 눈물인지 땀인지 모르는 것을 열심히 흘리며, 쌓이는 눈밭에 엎어졌다 또 일어나 걷기를 반복했다. 발가락 사이사이마다 물집이 전부 잡혔다 터지길 반복했다. 동상에 걸려 얼어 죽는 건 아닐까. 막연한 생각을 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12시간 이상을 달렸더니 몸이 후들거렸다. 새까맣게 어두워진 시야에 가로등만 점점이 늘어져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표지판을 보고 제대로 달리고 있다 생각했는데 인가나 흔한 창고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런 길을 달렸던 적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길가로 빠지면 그래도 잘만한 공간을 찾을 곳이 드물게 있었다.

지금은 오직 도로와 가로수뿐이다. 이 정도면 노숙을 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노숙을 위한 준비는 하나도 되어있지 않았고, 이곳에서는 겨울에 노숙을 하면 젊은 사람도 동사할 가능성이 높았다. 길 가장자리에 우두커니 멈춰서 먼 어둠의 꼭짓점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경적이 크고 길게 울렸다. 저기 멀리서 커다란 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천천히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려오던 차가 천천히 내 앞에서 멈췄다.

-학생, 길 중간에서 뭐해요?

커다란 캠핑카와 노부부였다. 나는 자전거를 손에 쥔 채 창문을 내리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는 나이 지긋한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운전대를 쥐고 있던 노인이 거든다.

-이쪽으로 가면 마을까지 차로도 두시간 반이 더 걸려.

-그러게, 방해가 아니라면 우리가 태워줄까요?

선뜻 감사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남자에게 쫓기듯 달려왔는데, 이 부부조차 남자의 돈과 말을 듣는 사람들이면 어쩌지. 답이 정해져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선뜻 올라타지 못하고 망설이는 나를 보더니 할머니가 재차 말했다.

-사양 말고 타요. 손자 같아 그래.

-……정말, 감사합니다.

장갑 안에 숨어 주먹을 꽉 쥐며 대답했다. 얼어붙은 손등이 갈라져 터지는 느낌이 났다. 쓰라린 핏물을 땀에 젖은 장갑 안의 천이 모조리 빨아 먹는다. 고통과 공포를 아는지 모르는지 할머니가 활짝 웃으며 조수석에서 내린다.

-잠도 못 잔 것 같은데 이 안에서 좀 쉬어요.

손수 캠핑카 안의 문을 열어준다. 자전거를 지붕 위에 올려 묶어놓고 캠핑카 안으로 들어갔다. 돈이 많은 부부인 모양인지 캠핑카는 시설이 엄청나게 좋았다. 트럭만큼 큰 캠핑카 안에는 부엌, 샤워시설은 기본에 침실도 두개나 있었다. 손님 방으로 쓴다는 방을 내주며 주춤거리는 내 등을 할머니가 떠밀어 샤워실 안에 넣었다. 씻는 내내 현실감이 떨어졌다.

죽을 거로 생각했는데, 갑자기 강제로 히치하이크를 당했다. 머리가 하얀 백발인 할머니는 내가 씻는 동안 먹을 것을 만들어주었다. 오늘부로 여행이 끝이 나 식료품을 채우지 않았다며 스크럼블 에그와 토스트를 만들어주었는데 그것만으로도 꿀맛이었다. 정신없이 토스트를 네 조각이나 먹어치우고 나자 정신이 들면서 얼굴이 붉어졌다.

말없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앉아 있자 할머니는 웃으면서 이불과 잠자리를 준비해주고 조수석으로 돌아갔다.

그제야 차가 다시 출발했다. 부른 배와 상쾌한 몸을 괜히 쓰다듬다 이불 안에 들어갔다. 히터가 틀어진 캠핑카 내부는 따뜻했다. 벽에 붙어있는 히터 밑 전자시계를 보다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깼을 때는 이미 차가 멈춰있었다. 허겁지겁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짐을 확인했다. 전부 건드린 것 하나 없이 무사했다. 무안한 기분에 뺨을 문지르고는 캠핑카에서 내려 정원 앞에 섰다. 뜰 한쪽에서 세워진 바비큐 기계와 차고, 겨울이라 바싹 마른 잔디와 푸른 지붕을 가진 예쁜 집. 눈이 덜 녹았는지 지붕 한쪽의 눈이 얼어 햇빛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어머, 일어났네.

노부부는 티타임을 가지는 중이었는지 한쪽 손에 머그잔을 쥔 채 테라스에서 나와 함박웃음을 지었다.

-너무 곤히 자서 깨우기 그랬어요. 몸은 좀 괜찮아요?

-…네…

실례했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인사를 하고 떠나야 하는데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온화한 두 사람의 얼굴을 보다 우두커니 서서 펑펑 울어버렸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나를 보고 두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둥지둥 나를 달랬다. 넓고 고요한 아침을 깨트리고 내 울음소리가 타운에 널리 널리 퍼졌다. 돌아가고 싶었다. 누군가가 보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집이라고 할 것은 한국에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고향 땅을 밟고 싶었다.

외롭게 울어버리는 나를 보고 곤란 해하던 두 사람이 내 등을 토닥였다. 낯선 동양인을 구해준 노부부가 다정한 손짓으로 내 뺨을 닦아주고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달랬다.

-여행이 많이 힘들면 좀 쉬었다 가요.

-맞아, 좀 쉴 때도 있어야지. 여긴 우리 부부만 살아서 집도 조용하고.

-손자가 생겼네, 멋져라.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당황해서 노부부를 번갈아 쳐다보자 노파 쪽이 웃음을 활짝 터트린다.

-토끼 같네. 우리랑 조금만 지내다 떠나는 게 어때요.

정착이 얼마나 무섭고 불안한 일인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내 발목을 잡고 있는 시커먼 그림자가 보였지만 친절한 낯을 한 노부부를 등지고 떠날 각오가 생기지 않았다.

집이 눈앞에 있다. 지붕이 있고, 다정한 사람들이 있고.

이게 남자의 사람이면 어쩌지, 하는 불안한 생각은 그걸로 끝이었다. 어차피 도망칠 수 없는 거라면 안주하면 안 될까. 머뭇거리다 손을 살짝 뻗었다. 노부부가 내 손을 하나씩 잡아 온다. 따뜻하고 주름진 손을 가진 두 사람이 활짝 웃는데, 생각이 하얗게 변했다. 그만큼 지쳤으니까.

힘들면 쉬어가라, 그 말을 실천하는 건 힘든 일이었지만 홀린 듯 정지를 원했다. 남자가 울먹거리던 목소리가 바람에 휙 말려 넘어가는 것 같았다. 죽지 마, 기다리고 있어. 죽지만 마…

-영, 소포 왔어.

같이 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내 앞으로 택배가 왔다.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정원 벤치에 걸터앉아 택배를 뜯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휴대폰이 들어 있었다. 그 옆에는 담배가 한 갑 있었다. 남자에게 얻어 자주 피우던 담배였다. 담뱃값 껍질을 벗기며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왜요.”

[…전화 받네.]

“받으라고 보낸 거 아니에요?”

[버릴 줄 알았지.]

“그럼 왜 보냈어요?”

[계속 보내려고.]

“돈 많아서 좋겠네요.”

라이터가 없어 불을 붙이지 못했다. 담배 필터를 축축해지도록 빨며 휴대폰을 꾹 잡았다. 뺨 근처가 살랑거렸다. 잔디밭 사이사이 깔린 서리 자국을 보며 발장난을 쳤다.

“어쩌려는 거예요?”

[……]

“2년이 지나도록 지켜보고, 바라는 게 뭐에요?”

햇살이 눈이 부시게 좋았다. 바람을 잡는 것처럼 부질없다 생각하면서도 입을 열고 지껄였다.

“다시 다리를 벌려주면 되나요.”

[……]

“내가 당신 발밑에 처박혀 개처럼 기어 다니고 거기라도 핥아주면 되나요.”

[…나는,]

“아버지는 내가 비참하게 당신에게 복종하길 바라잖아요.”

[아니야.]

겨울 치고도 햇볕이 따스했다. 날씨가 단숨에 좋아져 무심결에 정박했을지도 모른다. 남자의 태도가 어느 순간 상냥한 척 굴어 나를 흔들었던 그 찰나의 순간처럼.

[나는… 나는, 너를 사랑하고 싶어.]

무거운 언어였다. 몸을 웅크리고 담뱃갑을 만지작거렸다.

[너를 사랑할 거야.]

어찌 보면 변했을지도 모르고, 어떻게 보면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헤어진다는 것이 지워진다는 것이 아니듯.

[…끊을게.]

남자와의 국제 전화 말고는 아무 기록도 남지 않은 휴대폰을 던져놓고 얼굴을 감쌌다. 소포를 받은 뒤 내 상태가 이상해 보였는지 노부부는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화했던 사람은 누구냐고. 진하고 달콤한 코코아를 마시며 입을 뗐다.

말하기 힘들면 말하지 마, 라고 하는 사람을 애써 붙잡고 내 속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근영이에게 했던 이후로 처음 해보는 고해성사였다. 내 이름은 여전히 영이었으니까. 이소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남의 일처럼 덤덤하게 말할 수 있었다.

-계부를 사랑했어요.

-계부는 나를 강간했고, 필요 때문에 사랑했고요.

-…그게 괴롭고, 아파서 도망쳤는데 아직도 제자리에요. 2년도 넘었는데 잊히지 않아요. 생생해요.

게이라는 것도 꺼려질 수 있었다. 그것도 어머니의 재혼 상대와 비역질을 해 먹은 더러운 이야기였다. 그래도 노부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던 이유가 있었다. 나를 받아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훌쩍거리는 나를 보더니 할아버지가 한 마디만 했다.

-이런 날은 술이지.

그렇게 그 날 술을 잔뜩 마셨다. 위스키와 레드 와인을 마셨고, 얼큰하게 취하고 쓴 입맛을 아이스 와인으로 채웠다. 달고 상큼하다는 술을 입 안에 잔뜩 머금었다. 여전히 단맛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단 향과 달다는 것이 기억이 날 것처럼 코앞에서 아른거려 좋았다. 오랜만에 많이 웃었고, 울기도 했고, 화를 내며 지겹고 화나는 남자를 욕하기도 했다.

그들은 나를 아들처럼, 손자처럼 아껴주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집세를 드릴게요. 비자가 끝나기 전에 돌아갈게요. 저랑 있으면 위험하실지도 몰라요.

내가 무슨 말을 하며 떠날 사람처럼 굴어도 노부부는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아 괜찮다며 재미있게 웃었다. 그들은 내 모든 말이 어리광이나 농담으로 들리는 것처럼 행동했다.

노부부의 집은 외곽의 타운이었다. 아마도 캘거리 주 안에서도 가장 외곽. 걸어서 40분 거리에 스타벅스가 있다는 게 더 놀라웠던. 타운 하우스에 살아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차가 없으면 불편하긴 해도 오래 뭔가를 느긋하게 기다리고 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서울에서 종종 버스를 타고 복잡한 기분을 날리기 위해 종점까지 달리던 때처럼, 그렇게 살았다.

집 앞마당에서 화단을 가꾸다 불러 가면 과일 셔벗에 곁들인 파이를 구워주었고, 저녁에는 맛있는 식사와 함께 주제를 정해 이야기하며 내 영어 공부를 도와주었다.

눈이 침침해 글 읽기가 힘들다면서 어떻게 배웠는지 한식을 만들어주었다. 외출하고 오라고 하기에 억지로 두 바퀴쯤 마을을 돌아다니다 왔는데 온 집 안에 진동하는 김치 냄새에 코와 눈을 붉게 물들이고 울어보았다. 그날 먹은 김치찌개는 정말 맛있었다. 시큼 텁텁한 맛이 났지만, 수십번 눈물을 삼키면서 잊지 못할 맛이라고 되풀이해서 이야기하며 눈물을 훌쩍거리는 나를 보고 노부부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휴식은 이런 거구나.

이 땅에서 내가 흘려보냈던 2년은 결코 쉬는 것이 아니었다. 커다란 타운하우스의 집 안에서 벽난로를 틀어놓고 쿠션을 끌고 웅크려 자고 있으면 담요를 덮어주는 노파의 다정한 손길을 느끼며 처음으로 휴식을 배웠다. 온화한 공간 속에서 지내자 굳었던 마음과 혹사당한 정신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그런 와중에도 자주 전화를 했다. 내가 전화를 받는다는 자체로 안심하는 모양이었다. 노부부에게 민폐를 더는 끼칠 수 없었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연락을 받았다.

연락하는 텀은 의외로 뜸했다. 잦아봐야 일주일에 한 번, 길면 한 달 만에 연락이 오기도 했다. 덕분에 생각보다 스트레스는 많이 받지 않았다.

[아직도 거기가 좋아?]

“네.”

[너무하다 정말…]

건너편에서 힘없이 웃는 남자를 그리며 베이글을 베어 먹었다. 안에 듬뿍 발린 크림치즈와 연어가 잔뜩 씹혔다. 우물우물 쫀득한 빵을 열심히 먹고 있으며 할머니가 웃으면서 접시 위에 올리브와 토마토를 썰어 넣은 샐러드를 잔뜩 얹어 주었다.

노부부는 남자와 내가 어떤 관계인지 대충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단어나, 간단한 내 설명에서 눈치를 많이 챘는지 전화를 받고 있으면 종종 앞에 앉아 시시각각 변하는 내 얼굴을 한참 구경하곤 했다.

[보고 싶어.]

“저는 전혀.”

[안 찾아가고 기다리고 있으니 칭찬이라도 해주면 어때.]

“누구 때문에 내가 여기서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나.]

“알면 영원히 반성이라도 하고 살아주세요.”

[어차피 비자 끝나면 돌아와야 하면서.]

“그땐 또 도망쳐야겠네요.”

[못 참아.]

“뭘요.”

[너를]

내 표정이 이상했던 모양이다. 할머니가 자상하게 웃더니 나를 그녀의 품 안에 끌어안아 주었다. 따뜻한 품에 꽉 안겨서 전화기를 고쳐 잡았다.

[이젠 정말 갈증이 나.]

“…아버지,”

[……]

“아버지, 다들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하는 게 더 많아요.”

[너랑 철학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 없어.]

“알아요, 그냥 그렇다는 말이에요.”

전화가 뚝 끊겼다. 성격 안 좋은 티를 푹푹 내는 남자를 생각하며 이를 갈다 휴대폰을 옆 의자 위에 얌전히 올려놓았다. 어느새 블루베리까지 올라간 샐러드를 크게 찍어 먹으면서 할머니 눈치를 슬슬 보았다. 자상한 표정으로 할머니는 내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그 남자?

-맞아요.

-아직도 연락이 오네. 그쯤 되면 사랑 아닐까.

사랑. LOVE. 아름다운 단어를 듣고 포크 질을 우뚝 멈췄다. 사랑… 나를 사랑하고 싶다 말하던 남자.

-그럴 리가 없죠. 아직도 일 대신 해줄 아들을 구하지 못한 거 아닐까요. 그 사람은 사업가니까요.

-그 정도로 능력 있으면 경영인을 제대로 구할 수도 있지.

-한국은 대부분 가족 경영이니까, 그냥 아들을 구하려고 했을…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언젠가 남자가 나를 포기하고 새로운 아들을 구해 기업을 승계시키지 않을까. 사용 목적을 잃었으니 무리하게 나를 끌어내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유리는 물질이다. 혼도 영도 없었다. 그런 물질은 마음대로 개조해 사용할 수 있었지만 나는 아니었으니까, 길고 지겨운 투자 비용을 잊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겠다.

-영?

-아니에요, 음, 블루베리 맛있네요.

통통한 블루베리 하나를 콕 찍어 먹으며 볼을 부풀리고 웃었다. 애써 웃는 나를 뜯어보던 할머니가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잊자. 전화가 왔으니 또 한주 정도는 연락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점점 뜸해지고, 나도 남자도 서로에게 지쳐서 문득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영원히 단맛은 느끼지 않아도 좋았다. 단 것을 좋아하지도 않으니까. 내가 영원히 하나를 잃어버리고 남자도 나를 잃어버리면, 우리는 둘 다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삶을 잘 살 수 있을 텐데. 다리가 부러져 휴식하게 된 유리 핀셋처럼.

노부부의 손자 시늉을 하며 사는 것은 점점 안정되기 시작했다. 원래 살던 곳에 쌓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캘거리로 돌아갔다. 누군가를 만날 용기는 생기지 않아 조용히 집만 정리하고 되돌아왔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게 그저 좋았다. 내 낡은 짐을 택배로 받아도 노부부는 화를 내지도, 얼굴을 찡그리지도 않을 거였다.

사랑을 받았다. 붉고 화려한 사랑은 아니었지만, 연두색과 노란색 사랑은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내 방이 생겼고, 아침에 눈을 떠서 거실로 나가면 인사를 할 사람이 있었다. 남자에게 걸려오는 전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참아낼 수 있었다. 물론 그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외롭고 힘들어서, 한국에 돌아오길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으니까.

새벽 세 시쯤 갑자기 울리는 전화에 잠이 깼다. 잔뜩 찡그린 채로 억지로 눈을 뜨고 액정을 보았다. 지금이 몇 시인지 뻔히 알면서 이때 전화를 하다니. 하여튼 고약했다. 통화를 수락하자 목소리가 들린다.

[자?]

“…자는데 왜 전화에요?”

[목소리 듣고 싶어서.]

“아주 웃기시네…”

잠이 덜 깨서 웅얼거리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무리하게 잠에서 깨어났더니 혀가 꼬였다.

[나랑 놀아줘.]

“일이나 해요, 일이나.”

[일은 다 끝났는걸]

“내일 일도 미리 하고…”

[그럴까.]

“마음대로 하세요. 나는…잘…거…”

졸음이 거세져 눈이 감겼다. 꾸벅꾸벅 졸면서 잡았던 휴대폰을 서서히 놓았다. 아득하니 멀기만 한 곳에서 남자가 속삭인다.

[이소야.]

다정한 음성. 전혀 인간적이지 않은 주제에 사람을 홀리던 저 목소리.

[아들.]

가장 싫어하는 호칭으로 꼿꼿하게 나를 부르는 남자.

[너는 나 안 보고 싶어?]

꿈에서라도 볼까 두려운데 무슨 헛소리야. 어이없는 말에 픽 웃었다. 그게 들렸는지 남자가 또 투덜거렸다.

[나는 술도 잔뜩 먹고, 피곤한데.]

“그럼 주무세요.”

[아직 일이 남았어.]

“그럼 일을 하시던가…”

말다툼이 끝나지 않는다. 요즘 들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남자의 말투에 짜증을 냈다. 졸음기가 가득 말린 짜증을 듣고 남자가 말을 하려다 말고 멈춘다.

“빨리…끊어요.”

[너를 사랑하고 싶다고 말 했었지.]

“……갑자기 왜…”

[이젠 그런 말 하지 않을 거야.]

“……”

주어가 빠졌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있었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한숨을 쉬며 돌아누웠다.

남자와 관계를 가졌던 것도, 소리 지르고 악을 쓰며 싸우고, 마지막은 울었던 것도 아득하게 먼 이야기 같았다. 잊히진 않겠지만 옅어지긴 하는구나. 삶의 진리를 깨달으며 눈을 감았다. 정말 졸렸다. 내가 조용해지자 남자가 다시 뭐라고 말한다.

[……]

멀어서 잘 들리지 않았다. 새벽에 전화하는 나쁜 새끼. 하품을 크게 하고 다시 잠에 빠졌다. 노곤했다.

늦잠을 잤더니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기지개를 쭉 펴며 내려가자 할머니가 겨울잠을 잔다며 농담을 했다. 민망한 마음에 볼을 붉히고 옆자리에 붙어 안자 커피잔을 들었다.

이틀 전 눈이 그치더니 꽤 따뜻해졌다. 이러다가 새싹이 돋을지도 모르겠다고 호들갑을 떨며 토스트를 먹었다. 바삭바삭한 계란물 입힌 빵을 씹었다.

-이렇게 게을러져서, 정말 곰이라도 된 것 같네요.

농담을 하며 휴대폰을 켜고 구직 사이트를 열었다. 비자 만료 기간이 코앞이었다.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지거나, 결혼하지 않으면 갱신이 힘들 가능성이 컸다. 노부부는 입양을 제의했지만 서류상에서나마 나는 고아가 아니었다. 부모가 있는 멀쩡한 인간을 입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사정을 설명하고 거절했지만 쓰린 마음을 참을 수는 없었다.

-오늘은 어쩌다 늦잠을 잤어, 악몽 꿨니?

자주 악몽을 꾸고 일어나 거실을 서성거렸다. 걱정하는 얼굴에 웃으며 어깨를 주물렀다.

-아니에요. 그냥 새벽에 전화가 와서 쓸데없는 소릴 하기에.

-꾸준히 오는구나.

-…그렇죠 뭐.

-아직 사랑하니?

Do you still love him? 짧은 한 문장에 몸이 굳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명제였다. 아직 남자를 사랑하냐고? 그럴 리가 없다. 외롭고 사랑이 부족해 남자가 주는 사랑에 홀딱 넘어갔었던 것뿐이다. 그런 게 진짜 사랑일 리는 없다. 증오와 두려움은 당시 느꼈던 조각 같은 사랑보다 크고 거대했다.

그냥, 남자를 떠나게 되며 전부 다 버렸으니 상실감이 컸을 뿐이다. 사랑이 끝났다는 비극 조의 노래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고…

-우리는 늘 힘들고 어려운 싸움 같은 인생을 살잖니.

-Megan.

-그러니 단순해질 수 있는 일은 단순하게 해결하렴.

네가 너무 괜찮다고만 생각하는 것 같아서. 할머니는 말을 끝내고 다시 머그잔에 입술을 붙였다. 물끄러미 주름진 노인의 옆얼굴을 바라보다 손에 들고 있던 토스트를 허겁지겁 입에 넣었다. 속이 텅 비어서 뭐라도 채워 넣어야 할 것 같았다.

마지막 한 조각을 마저 입에 밀어 넣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가니?

-네, 면접 보고 올게요.

오후에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기로 했다. 큰 쇼핑몰 건물 안에 있는 식당가였는데, 오리엔탈 요릿집이라 동양인을 자주 쓰는 듯했다. 이번에는 꼭 붙어야 하는데. 작은 가방에 지갑이며 장갑을 챙겨 넣고 바깥으로 나왔다.

간만에 자전거 열쇠를 풀었다. 무리한 여행을 동반했던 자전거는 동네 산책할 때 아니면 끌고 나갈 일이 없었다. 체인과 페달 상태를 확인하고는 훌쩍 자전거 위에 올라탔다. 걱정이 반쯤 앞선다. 작은 마을일수록 인종차별은 오히려 노골적이었다. 저번 주에도 똑같이 무시당하고 앞에서 퇴짜를 맞았던 걸 기억하니 우울하다.

다른 방법도 있겠지만, 정당하게 비자를 연장하고 싶었는데. 이쯤 되면 남자가 뒤에서 조종해 비자를 만료시키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덕분에 최근 모든 생활은 오로지 비자를 새로 갱신해야 한다는 압박에 빠져 있었다. 내 생활에 남자의 공포가 차지하는 틈은 정말로 적었다. 전화가 꾸준히 오기는 했지만, 그 텀은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오늘 새벽 왔던 전화를 제외하면 최근은 전화로 부쩍 싸우기도 했다. 남자는 날카로워져 있었고, 날 선 반응이나 목소리를 들으면 나도 똑같이 가시가 돋아났다. 남자는 내가 돌아오도록 재촉했고, 나는 일관되게 무시했다. 멀리 떨어져 있기에 이 정도나마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뿐이다. 정신은 언제 무너질지 몰라 바짝 긴장해 나를 쪼았다.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거나, 엄마를 걱정하는 것 모두 포기하라고 사정없이 나를 찌르는데 견딜 수 없었다. 당장 내가 받고 곪게 버려둔 상처를 관리하는 것도 힘들었으니까.

점점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다. 손에 온통 상처를 입어가며 만든 내 두꺼비집이 한 번에 푹 밟혔을 때. 그때 나는 이런 건 원래 마지막에 밟는 거라며 몇 번이고 남은 잔해를 꾹꾹 밟아버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괜찮다고.

시내는 사람들이 북적북적했다. 자전거를 타고 가기 힘들어 중간에 내렸다. 쇼핑몰을 향해 쭉 걸어가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겨울인데도 날씨가 지나치게 따뜻하더니 비로 변한 모양이었다. 소나기가 내리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 생각 없이 태연하게 계속 자전거를 끌었다.

점점 빗줄기가 길어지는 기분에 골목으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 아슬아슬하게 머리만 가릴 정도로 턱이 뻗은 건물의 상가에서는 대형 텔레비전이 틀어져 있었다. 생각 없이 몸을 돌려 앞에 달린 티비를 습관처럼 보았다. 벼락이 온몸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티비 안에 남자가 있었다. 높은 단상 앞에서 셔터와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졌다. 번쩍거리는 불빛을 받으면서 남자는 깔끔하고 환한 표정으로 뭔가를 발표하고 있었다.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생방송인가…? 화면을 다시 확인했다. 자막은 온통 난리 법석이었다. Y 기업, 젊은 사장과 젊은 후계자. 양복을 차려입은 꼰대들이 가득 찬 회장에서 앞에서 후계자는 유창한 영어로 소감을 발표했다. 나는 말을 잃었다.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증명사진으로만 봤지만 알아볼 수 있다. 단상에 서 있는 젊은 사람은 노인이 내민 양아들 후보 중 한 명이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더는 남자의 아들이 아니다. 쓸모도, 필요도 없어졌다. 불안함과 안도가 동시에 섞여들었다.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마구잡이로 녹아내렸다. 쏟아지는 빗물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주 먼 옛날에 있었던 일이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남자의 얼굴을 보자 심장이 뛰었다. 불안과 초조함으로. 겨우 묻어둔 것이 떠오를 것처럼 출렁거렸다. 아직 사랑하니, 그 말이 눈을 찔러댔다. 떨어지는 빗줄기에 사람들이 거센 욕을 하며 길을 뛰어간다. 달리는 신발 소리가 지진과 같았다.

내가 아직, 그 단어를 들어가며 마음을 떼놓고 버티는 동안 남자는 시간과 돈을 들여 나의 자리를 지웠다. 바라 마지않던 일이었는데. 어째서.

이제는 나를 사랑하려 하지 않겠다고 말하던 새벽의 음성에 숨이 헐떡거렸다. 이제 끝났어. 다 끝난 거야.

양이소는, 정이소가 되었나.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했던 유리 조각을 드디어 휴지통에 밀어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참하고, 약한 충격에도 힘없이 부서지는 그 유리를.

그렇게 유리가 되지 않는 것이다. 힘없이 깨진 뒤에는 날이 서 누군가를 상처입히지 않게 될 것이다.

눈물이 가득 고였다 금방 말라버렸다. 깨끗한 화면 위를 비추는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이 카메라를 흘끗 바라본다. 단지 티비 화면인데도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뒷걸음질 치며 거리에서 도망가려, 그 전자파의 덩어리에서 사라지려 황급히 발을 뒤로 빼다 보도블록을 잘못 밟고 휘청거렸다. 뒤에 사람이 있었는지 낯선 손이 팔을 잡아준다.

“감사합…”

무의식적으로 한국어로 중얼거리다 입을 닫았다. 여기가 한국도 아닌데, 순간적으로 모국어를 써버렸다. 남자의 얼굴에 심장이 멈춰버릴 것 같다. 여전히 얼굴까지는 익숙해지지 못했다. 고개를 휘저으며 다시 영어로 감사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친절한 행인이 점잖고 부드러운 언어로 내 말을 가로막았다.

“감사할 게 뭐 있어.”

내 팔과 어깨를 단단하게 잡은 손은, 꿈에서조차 잊지 못한 서늘한 온도로 고정되어 있었다.

“너 잡으러 온 건데.”

“…무, 뭐……”

비가 좀 더 거세게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한기에 몸이 떨렸다. 눈이 내려야 하는데, 유난히 날이 따뜻하다 하더니 전부 녹아버렸나 보다. 내 세상처럼 흔적도 없이 흘러내린 모양이다.

지금 티비 화면을 보고서는 안심하기까지 했다. 남자가 새로운 아들을 구했구나, 다른 빠질 상대를 찾았구나 하고. 더는 나를 찾지 않을 거라고, 남자는 나를… 저 자리에 세우기 위해 사랑하려 노력했다고. 나를 사랑했다고… 그렇게, 늘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눈물이 떨어졌다. 흑, 입 바깥으로 새어나간 소리에 남자의 손이 내 뺨을 더듬었다. 눈물이 계속 흘렀다. 본능적인 공포감에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이거, 이거 놔. 놔!”

“놓으라니, 내가 대가리에 총 맞았어? 놓게.”

남자가 화를 내며 나를 돌아 세웠다. 여전히 하얗고 아름다운 얼굴을 한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왜 이곳에 있는 거야. 눈을 깜박일 때마다 빗물이 얼굴을 세차게 때렸다. 남자가 입고 있는 좋은 옷도 전부 젖어가고 있었다. 온몸이 시릴 듯 추웠다.

급격하게 낮아진 온도에 비가 서서히 얼어붙었다. 눈과 섞여 진눈깨비로 변해가는 빗줄기를 손바닥으로 훔쳐내며 남자가 나를 끌어안았다.

“너를 만나러 왔어, 아들.”

새로운 아들을 매스컴에 온종일 소개하고는 뻔뻔하게 나를 부른다. 더는 엄마와 살지도 않으면서, 정말로 엄마를 사랑해 결혼한 것도 아닌 주제에.

왜, 나를 찾아왔지.

또다시 시간은 흘렀고 세월을 넘기고 있었다. 이제 전부 끝이라고, 티비에 뜨는 뉴스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희고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을 봐도 두려워지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나 좀 살게 내버려 둬.”

잡힌 팔을 흔들며 부탁했지만 남자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남자는 고집불통이었고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내 말은 단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으니.

“놓으라고!”

“어떻게 놓아, 이소야.”

남자가 헛웃음을 지으며 나를 달래는 척 지독하게 울었다.

“네가 죽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또 네가 어디론가 위험한 여행을 해버리진 않을까 걱정하고. 나를 잊을까 걱정하고.”

“……”

“하루하루 나는 피가 마르도록 힘들었어.”

팔을 풀어준 남자의 손이 더듬더듬 가슴을 기어 올라왔다. 섹스할 때처럼 움직이던 손가락이 내 목을 감싸 쥐었다. 은근히 기도를 압박하는 손아귀에 갇혀 끔찍한 기분을 느꼈다.

“너는 이기적이니까, 정혜 씨를 버리고 도망갈 줄 알았지.”

시야가 까맣게 변해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의 목소리는 거센 빗줄기를 뚫고도 단정하게 내 안을 파고들었다. 남자가 다정하고도 편안하게 내 뺨을 훑고 떨어져 나갔다.

“네가 엄마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

“그냥, 단순히 부모이기 때문에 놓지 못하고 견디고 있다는 걸 나는 알아. 네 엄마도 알 거고.”

재수도 좋지. 남자가 속삭인다.

“그냥 만만한 아줌마 하나를 붙들었는데 너 같은 애가 딸려왔어.”

“…다른 아들도, 생겼잖아. 근데 왜…”

“아들이라서 널 좋아한 게 아니니까.”

전혀 설득력 없는 이야기를 한다. 웃음이 나왔다.

“그럼, 날 데리러 올 이유도 없네. 아들이 아니잖아.”

“그건 아니야.”

“왜 아닌데?”

“…그건,”

“나 좀 놔줘. 당신의 빌어먹을 감정 내가 알 바 아니야.”

“양이소!”

“부르지 마!”

고함이 골목 바깥으로 세어나간다. 낯선 언어에 골목을 기웃거리다 나가는 사람들이 생겼다. 면접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빨리 가야 하는데 남자는 여전히 내 목을 감싸 쥐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나를 죽일 것처럼 손가락이 예민하게 꿈틀거린다.

“너를 위해 다 참았어. 기다렸고, 새롭게 기업 승계할 사람도 찾았잖아. 아들, 네가 보고 싶어 날아오려는 걸 참으려고 내내 수면제까지 복용했어.”

“그럼 나는? 당신이 언제 나를 찾고 강간할까 두려워 새벽에 집을 뛰쳐나오던 나는?”

“……”

“봐봐, 가련한 척 청승을 떨더니 결국 이렇잖아. 당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마지막 힘을 짜내 남자를 비웃었다. 남자는 내 목을 조를 것처럼 힘을 주다 팔을 떨면서 천천히 힘을 빼냈다.

“양이소.”

목이 아프고 코가 시큰거렸다. 말없이 울기 시작하는 나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눈꺼풀 위로 입을 맞춰왔다. 안타깝다는 것처럼 애틋하게.

“그냥 나 죽여주면 안 돼?”

더 이상 나를 혹사하기 싫었다. 엄마가 엄마라는 의무감에 혹사하던 것을 보고 자랐다. 나는 그렇게 살기는 싫었다. 혹사당하고, 괴롭고, 남자의 그늘에서 몇 번이나 도덕적인 반란에 자살을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돌아가자, 아들.”

“그 거대한 저택으로?”

내가 흐느끼듯 물었다. 남자가 난처하게 웃으면서 자신의 젖은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희고 반듯하던 이마에는 꿰맸던 흔적이 빗금처럼 그려져 있었다. 내가 만들었던 상처였다. 저 하얀 얼굴이 피로 덮였을 때 도망쳤다. 그래야만 그 집에서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당신을 진심으로 죽여버리려 하였다.

“거긴 싫어. 당신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 싫어.”

“널 잡으려고 이까지 쫓아왔는데, 너무한 거 아니야?”

“제발 나 좀 놔줘.”

팔뚝을 잡고 있는 남자의 악력이 점점 강해졌다. 남자는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놓을 수 없어.”

“왜?”

숨을 헐떡거리며 물었다. 남자가 싸늘하게 대답한다. 낙숫물처럼 오염된 목소리였다.

“널 사랑하니까.”

여전히 끔찍한 고백이었다. 몸서리치는 나를 놓지 않은 채 남자가 언뜻 절절하기까지 한목소리로 내 발목을 왈칵 잡았다.

“도망친 너를 죽이는 상상을 수천 번 했지.”

“……”

“결과적으로 죽은 너를 상상할 수가 없었어.”

“……”

“몇 번이고 새로운 아들을 골랐지만.”

“……”

“아들이라 부르고 싶지도, 키스하고 싶지도 않았어.”

“…예쁘지 않아서?”

농담 같지도 않은 농담을 하자 남자가 입술을 꾹 깨물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에서 그림처럼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너를 잃어버린 뒤에야 알았던 것뿐이야.”

“…뭘? 당신이 인간말종의 병신이라는 거?”

“네 가치도, 효용성도 아무 필요가 없었어.”

“원래 난 그런 거 없었어.”

“그래, 없어. 너는 아무것도 없이 너였는데.”

남자의 손가락이 뺨과 입술을 스치고 문질렀다. 붉어진 남자의 눈에서는 일직선으로 곧은 눈물방울이 뺨을 적시고 있었다. 저번에도 이렇게 울었었지. 그때는 미웠고, 증오스러웠다. 내게 휘둘리는 척 나를 휘두르는 남자를 보며 희망을 품었지만, 금세 꺾였다.

이번에는 꺾여 피가 흐르지 않게 희망에 차지 않을 것이다. 그 마음으로 떠나왔고, 3년 가까이 무작정 버텨냈다.

그런데,

“사랑한다.”

“……”

“양이소, 사랑한다.”

어째서 이제 와 사랑을 말하는 남자의 말에 눈물이 나오려는 지 모르겠다.

...그렇게 사정없이 나를 상처 주고 괴롭히며 즐겼던 인간이다. 타인에게 나를 내세우고 모욕을 온몸으로 받는 것을 즐겼다. 이번에도 아낌없이 시간을 투자해 나를 최대한 상처 주려고 애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남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를 힘껏 끌어안은 남자의 품이 지나치게 따듯했다. 단맛, 단맛이 느껴지나. 혀끝을 내밀어 공기를 핥았다. 여전히 무색무취, 악취 같은 향만 났다. 그걸 알면서도 착각하고 싶어질 때가 왔다. 늘 힘들 때. 피곤하고 외로울 때. 잃어버린 모든 시간을 보상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없어요.”

“내가 사랑하니 괜찮아.”

“……”

나도 남자처럼 미쳤을까? 어떤 부분이 이미 물들어 사고와 이성이 마비된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끔찍한 남자가 사랑스럽게 느껴질 리가 없다. 남자를 사랑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 리가 없다. 이 남자가 나를 만지는 손길에 눈물이 나오려고 할 리가 없다. 그의 손이 따뜻하다고 느낄 수가 없다.

억눌린 자존심이 눈물을 허용하지 않았다. 남자는 그래도 만족한다고 말했다.

“네가 좋아.”

“……”

“네가 악을 쓰고, 나를 미워해도,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상관없어.”

“……”

당신은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았고, 우리는 사랑을 해서는 안 되는 존재인데. 이제 와서 그는 나를 사랑한다 말하고 있었다.

왜 하필 이제 와서.

“…엄마도 버렸어.”

“응, 나 때문에.”

“친구도, 사람도 다 버렸어.”

“그래, 나 때문에.”

“당신 때문에 외로워졌어.”

“좋네.”

“……”

“너를 독점해보고 싶었어.”

속삭이며 나를 끌어안는 남자의 품에서 독 같은 한숨을 토해냈다.

우리는 언젠가 목이 졸려 죽겠지. 그러고 나면 더럽고 썩은 시체가 되겠지.

그때쯤엔, 당신을 증오하지 않고 사랑한다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응?”

“우리, 죽으면 화장을 하자.”

“왜?”

“불태워 없어지면 악취는 나지 않을 테니까.”

오염을 처음 느꼈고 맛을 잃어버렸던 끔찍한 순간을 회상하며 말했다. 남자가 나지막하게 웃으며 물었다.

“역겨워?”

“당신이 내 아버지인 이상.”

“하하.”

“엄마의 남편인 이상.”

“쓸데없는 결벽증이야.”

“알아.”

그러니까, 죽어서도 당신을 사랑한다 말하지 않으리라. 시체가 오염되어, 내 영혼과 입이 썩어 문드러지기 전에 다 태워 없애리라. 쓸데없는 감정도, 불꽃 같은 사념도.

“하지만 다들 이렇게 쓸데없이 살아.”

“그래.”

남자가 나를 끌어안은 채 다정하게 말한다. 이렇게 다정한 남자가 아니었는데. 내 유치한 바람을 들어줄 것처럼 남자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소나기에 흠뻑 젖었는데 불씨가 사그라지지 못했다. 눈이 녹아 버릴 만큼 뜨겁기만 했다. 이런 게 살아 있었나, 이렇게 쉽게 타오를 수 있었나.

“불살라버리자. 더럽고 비참하면 다 태워주지. 죄를 지었으니, 같이 죽어줄게.”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뱉어내며 웃는 남자의 뺨을 잡았다. 담배 연기가 지독하게 입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남자의 혀와 입술을 빨았다. 독은 달다. 누가 독이 쓰다 말했는가. 독이야말로 달다, 사랑은 쓰다. 추악하다. 파열된 이성의 틈새로 괴로운 감정이 누수 한다.

깨진 틈 사이로 바람이 불어온다. 어깨너머 피처럼 붉은 태양 사이로 푸른 해안이 보인다. 옛날 내 피로 물들었던 그 작은 유리 조각처럼.

가냘프게 세공된 그 핀셋처럼.

사용되지 않아야 할 곳에 사용된 감정이 정박한다. 깨질 것을 알면서도 조용히, 그래 조용히.

서서히 차오르는 수억 개의 전파가 뒤섞인 유리창에서 시선을 떼고, 파편 같은 눈과 붉은빛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결국 우리는 유리였다. 깨져도, 부서져도. 사용되지 말아야 할 곳에 사용되어도 본질은 유리. 연약하고 날카로운, 부질없는 물질.

금 간 유리병 안으로 다시 감정이 차올랐다. 꽉 채우면 이번에도 산산조각 날 것을 알면서도.

소리도 없이 차오른다. 고요하게, 그러나 빨리.

사랑이다.

미친 사랑이다.

다시는 말하지 못할 이것은 희미하고 괴로운 질식. 목까지 차오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다.

FIN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