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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고백을 했다.
문장만 읽었을 때는 엄청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관계가 툭 하고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주고받는 대화는 비슷했고, 회사에 출근하면 나는 좀 더 날카롭게 굴었다. 비서가 봤을 때도 변함없어 보일 만큼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대했다. 어떨 때는, 남자가 했던 말이 그냥 툭 던지는 농담은 아니었을까 고민을 했을 정도로 남자는 똑같이 나를 대했고, 성희롱을 일삼았고, 가끔 다정한 척 사람을 구워삶았다.
둘 만 남았을 때는 어쩔 수 없는 미묘한 기류가 생겼다. 침대에 앉아 있으면, 남자는 샤워를 끝내고 나와 내게 팔을 뻗었다. 자연스럽게 입을 맞추고 목덜미나 빗장뼈가 있는 부위를 핥아대는 저녁 시간은 자연스러웠다. 나는 좀 더 무디게 남자의 애정 행각을 참아냈다.
불편한 기색을 읽은 것은 비체 혼자뿐이었다. 작고 귀엽고 눈치 빠른 강아지는 무거운 공기가 싫은지 늘 내 방으로 돌아가 홀로 잠을 청했다. 고모의 귀국은 늦어지고 있었다. 2주가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여자와 노인을 보며 거북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비체는 거실에 내려놓으면 망설임 없이 달려가 늘 앞발로 고모의 방문을 박박 긁었다.
혼자 커다란 방에서 잠이 드는 비체가 안쓰러워 내 침대로 돌아가 잠을 자기도 했다. 품 안에 똬리를 튼 비체의 등을 만져주며 잠을 자다, 눈을 뜨면 다시 남자의 방이었다.
아무리 깊게 잠이 들어도 몸을 들어 올리면 깰 만도 한데도 늘 느끼지 못했다. 내 신경이 이렇게 무딘가 새삼스럽게 고민도 했고 일부러 얕은 잠을 자려고 의식하기도 했었다.
그런 내 노력이 무색하게, 아침에 남자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넥타이를 메거나 셔츠 단추를 끼우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데에는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익숙하게 손을 더듬으면, 함께 싫어하는 장소로 끌려와 예민해진 비체가 내 손가락을 깨물었다.
남자는 자신의 방에 체모를 떨어트리는 건 용서할 수 없으면서, 강아지가 털을 뿜고 다니는 건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비체가 머물다 간 남자의 방은 곳곳에 강아지 털이 날렸고, 청소 검사는 더욱 깐깐해졌다. 덕분에 퇴근하고 돌아오면 가방과 외투만 던져놓고 남자 방으로 뛰어가 방 청소를 시작했다.
비체가 가끔 뛰어가 짖고, 남자의 발가락을 깨물거나 벗어놓은 수건을 물고 있는 것도 남자는 나무라지 않았다. 남자가 딱 한 번 비체를 무섭게 혼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예민해진 비체가 앙칼지게 내 손가락을 물어 피를 냈을 때였다.
구석에 한 줌밖에 되지 않는 강아지를 몰아넣고 무서운 목소리로 훈계하는 걸 보고 아픈 것도 잊었었다. 비체는 그 뒤로 남자를 무서워해서 품에 잘 안기지 않았다.
나도 남자의 품에 잘 안기지는 않았다.
남자가 만져올 때면 뻣뻣하게 굳는 몸을 개의치 않고 남자는 나를 끌어안았다. 다리를 얽고, 나를 침대 위에 밀어 놓고 아랫배와 엉덩이 아랫부분을 만져오는 남자를 한참 견디다 두 손으로 어깨를 밀어내면 남자는 아무 말도 없이 잘 준비를 시작했다. 그게 하루 일과의 마지막이 되었다.
“사장님 나가셨습니까?”
오후 늦게 차 부장이 찾아왔다. 비어있는 남자의 책상을 잠깐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차 부장이 들고 있던 서류를 내게 내밀었다. 어색하게 검은색 결재 파일을 받아들었다.
“읽어보시고 결재 좀 부탁드립니다.”
“어…저는 봐도 모르는데요.”
“사장님께서 본인이 계시지 않으면 도련님께 결재받으라고 하셨는데요.”
“……”
아주 막 나간다 이거군. 점심시간 내내 나를 괴롭히다 갑자기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 남자를 욕하며 서류를 펼쳤다. 신생아 보험… 무슨 무슨 마케팅을 통해 이윤 확대… 광고 배우는 누구…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드문드문 알고 있는 서류를 꾸역꾸역 읽다가 펜 뚜껑을 열어 사인을 했다.
차 부장이 안도의 숨을 푹 쉰다.
“앞으로도 도련님이 결재해주시면 좋겠네요.”
“……다시 해오라고 해야 하는 거였어요?”
사고를 친 건가 불안해 슬쩍 묻자 차 부장이 고개를 저으며 씩 웃었다.
“사장님은 의외로 결재도 잘 해주시는 편이긴 하신데, 물어보는 것도 많으셔서요.”
“그거야……”
말을 흐리며 눈을 돌렸다. 볼일이 끝나자 어색한 상황이 되었다. 회사 구석구석 퍼진 소문을 차 부장이라고 몰랐을 리가 없다. 차 부장은 미묘한 표정을 했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네.”
차 부장이 허겁지겁 결재받은 서류를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다시 혼자 남은 나는 멍하게 창문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기가 가득 깔린 도심은 늘 사람과 차로 복잡했다. 아찔한 밑바닥을 구경하다 다시 남자의 자리를 보았다. 남자는 전화를 받고 나가더니 세 시간째 감감무소식이었다.
점심때까지만 해도 다시 나를 왁싱샾으로 강제로 끌고 가 제모를 시켰다. 한마디도 자라지 못한 털들이 무참히 뽑히는 걸 참고 또 참다 울기 직전이 돼서 나왔더니, 쓸데없이 달기만 한 아이스크림을 사줬다. 초콜릿 볼이 박힌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을 한참 먹다가 내가 애새끼인가 싶어 또 한참 열을 내고 논쟁에 부딪혔다.
아직도 화끈거리는 사타구니와 다리, 팔뚝을 매만지며 책상에 엎어졌다.
회사에서 나는 왕따였다. 자리에 앉아만 있는 게 지겹고 지루해도 바깥에 혼자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회사 사람들은 남자와 같이 있으면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고, 남자가 없으면 나를 더러운 바이러스처럼 취급했다.
남자와 내 사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건 남자의 최측근에 속하는 극소수의 몇 명과 비서뿐이었다. 그 인간들은 다 남자와 똑같이 정신병이 있는지, 사귀게 된 걸 축하한다며 초콜릿을 선물로 줬다. 혐오스러워 망설임 없이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더니 아까운 걸 모른다며 심술이 난 남자에게 혼이 나기까지 했다.
“비체야.”
구석에서 꼬리를 말고 졸고 있는 강아지를 불렀다. 제 이름을 부르는 걸 느꼈는지 귀가 몇 번 쫑긋거리더니 다시 눈을 감고 꾸벅꾸벅 잔다.
억지로 깨울까 하다 참았다. 괜히 말 못하는 동물에게 심통을 부리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의자에 불량하게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내준 숙제도 도통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얼른 다 읽고 요약문도 써야 하고, 단어도 외워야 하는데 지겹게 피곤했다.
잠깐 나갔다 올까, 고민하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큰 진동 소리에 비체가 부스스 눈을 뜬다. 왕, 짜증스럽게 짖어오는 목소리에 몸을 일으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 화면에 뜬 연락처는 모르는 번호였다. 꽤 오래 울리는 신호음에 고민하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양이소 군 휴대폰 맞나요?]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언뜻 달콤하다, 하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애정이 어린 목소리가 나를 찾았다. 엄마 친구는 아니다. 엄마 친구들은 다 일반적인 아줌마 말투를 구사하니까. 나와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이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에 망설이다 긍정했다.
“어… 네. 맞는데요. 누구시죠?”
[아, 다행이다. 혹시 아니면 어쩌나 걱정했네.]
웃음을 머금고 말하는 목소리만 들었는데 꼭 눈 앞에서 보조개를 잡고 미소를 그리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누구를 닮았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나 양이태 친모 되는 사람인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회색 머플러를 풀면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눈 내려. 남자가 입 모양으로 속삭이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는 맑았던 하늘이 금세 흐려져 있었다. 남자의 머플러처럼 회색빛이었다.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만나주겠니?]
남자가 절반만 이 집안의 핏줄을 띄고 있다는 사실이 겨우 기억이 났다.
“…제가, 제가 다시 연락 드릴게요.”
황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내 뺨을 매만졌다. 꽁꽁 얼어 있는 손가락의 한기에 어깨를 굳혔다.
“얼굴이 붉네.”
“……”
“엄마한테 전화 왔어?”
충격적인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눈을 크게 뜨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가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으로 씩 웃었다.
“방금까지 엄마 보고 왔어. 그러니까 너한테 전화를 하지.”
“…내, 내 이야기를, 했다고요?”
너무 놀라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더듬거리면서 말하자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내 뺨을 세게 문질렀다. 후끈거리는 얼굴이 찬 냉기에 점점 식혀졌다.
“소문이 그렇게 났으니까 엄마 귀에도 들어갔겠지.”
“…어떻게.”
어디까지 소문이 퍼졌느냐도 문제였지만, 또 다른 의문점이 있었다. 남자의 손길을 피하고자 몸을 뒤로 빼며 물었다.
“친어머니랑 연락하고 있었어요?”
“응? 당연하지.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부터 했지만. 이 집에 입양될 때부터 원래 그러기로 한 거였어.”
남자는 인간의 도덕 범위를 벗어난 싸이코니까, 친모와 연락도 당연히 하지 않을 줄 알았다. 친부와 부정한 관계를 가졌던 인기 여배우. 남자가 알려준 가정사를 생각하며 눈을 굴렸다. 남자가 내 얼굴을 훑어보더니 소리 내서 웃었다.
“완전히 얼어있네. 귀여워라.”
“…이거 놔요.”
뺨을 꼬집고 눈가를 간지럽히는 손등을 다시 쳐냈다. 남의 충격은 생각도 하지 않고 뻔뻔하게 상황을 즐기는 모습을 보니 또 짜증이 났다.
남자는 내가 화가 나든 말든 상관도 안 한다는 얼굴로 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이 밝게 켜진다. 허락 없이 남의 휴대폰을 뒤지는 모습에 얼굴을 찌푸렸다.
“멋대로…”
“엄마 지금 1층이래. 내려오라는데?”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지나치게 우울해져 눈을 끔벅이자 비체가 멀리서 달려와 앞발로 내 종이를 토닥거렸다. 귀여운 놈. 비체를 끌어안고 얼굴을 묻자 남자가 어깨를 툭툭 쳤다.
“아들, 얼른 내려가야지?”
“싫어요. 제가 왜 아버지가 저지른 일을 책임져야 하는데요.”
“책임이라니, 손자를 보러 온 할머니인데 만나는 게 당연한 거지.”
“웃기시네.”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오글거린다. 코웃음을 쳐도 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비체를 뺏어 들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를 잡아 일으켜 옷매무시를 고쳐주는 남자를 보며 다시 또 얼굴이 울상이 되기 시작했다.
오늘 입고 온 옷도 커다란 회색 맨투맨티에 청바지였다. 이사들에게 옷차림으로 하도 지적을 당해서 반항을 위해 캐쥬얼로 입고 다니는 거였는데, 이럴 거면 제대로 셔츠라도 입고 올 걸 그랬다.
나 대신 코트와 소지품을 챙겨 든 남자가 고갯짓을 했다.
“나가야지?”
“…같이 가게요?”
“나는 방금까지 보고 왔다니까.”
이렇게 남자와 어딜 같이 가고 싶었던 적은 처음이다. 울고 싶은 심정으로 다리를 질질 끌고 남자의 곁에 섰다. 남자는 늘 사용하는 직통 엘리베이터가 아닌 일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타.”
“……”
“얼른.”
억지로 엘리베이터 위에 올라타자, 남자가 내 어깨 위로 코트를 걸쳐주고 주머니에 지갑과 휴대폰을 넣었다.
“전화하면 전화 받아.”
“네…”
“팔려가는 것도 아닌데 죽을상이네.”
픽 웃는 남자에게 욕도 못 하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엘리베이터는 수시로 멈춰 섰다. 직원들이 잡담을 나누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려다 남자와 나를 보고 사색이 된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기도 몇 번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이 찰수록 공기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사람이 많아지는 바람에 좁게 서 있다 어깨가 부딪치자 어떤 남자 직원 하나는 거의 군대식 차려자세로 몇 번이나 사과를 했다. 덕분에 벌써 속이 울렁거렸다.
1층 로비에 도착하자 직원들이 뛰쳐나갔다. 텅 빈 엘리베이터에서 남자가 열림 버튼을 누르고 내 등을 툭 쳤다. 느릿느릿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왼편에서 구둣발 소리가 크게 들렸다. 직감적으로 친모 되는 사람의 발소리라는 걸 알았다. 얼어붙어 땅바닥만 쳐다보고 있자 남자가 내 어깨를 감싸 쥐었다.
“되게 떠네.”
“…닥쳐봐요.”
“귀엽다.”
“좀 닥쳐요.”
혹시 소리가 들릴까 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욕을 했더니 남자가 소리 내서 웃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 몰래 하기에 그렇게 즐거워하니.”
전파가 섞이지 않은 깔끔한 목소리가 로비에 낭랑하게 울렸다.
“비밀이에요.”
“내 참. 너는 어디 멀리 보낸다고 배웅까지 나오니?”
친근한 말투였다. 남자는 내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잘해야죠.”
보지 않아도 남자가 눈을 접고 활짝 웃고 있을 거라는 게 느껴졌다.
“제가 먼저 반했으니까.”
듣기만 해도 끔찍한 소리였다.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서 대놓고 쌍욕을 할 수는 없어 이를 악물고 남자에게 슬쩍 떨어졌다.
“뭐… 그래서. 고개는 언제 들어주니?”
땅바닥에 있는 무늬를 계속해서 구경하고 싶었는데, 콕 집어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뻣뻣하게 굳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바로 코앞에 키가 큰 여자가 서 있었다. 긴장으로 터질 것 같은 심장에 숨을 멈추고 몸을 굳히자 여자가 끼고 있던 선글라스를 천천히 벗었다. 전시회장의 조명 같은 눈빛이 마주쳤다.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와 곱게 세월을 맞이한 얼굴이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백화점에서 겨울 신상 립스틱으로 전시해둔 색일 것 같은 입술을 움직이며 여자가 웃었다. 보조개가 움푹 팬다.
“이소 안녕?”
데자뷰가 느껴지는 인사였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억지로 피려고 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눈앞에 서 있는 중년 배우는 주말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얼굴이었다. 남자의 생모라면 분명 젊어도 50대 후반의 나이일 텐데, 사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솔직히 브라운관에서 볼 때보다도 어려 보이는 외모였다.
국민 배우로 불려도 손색없을 만큼 인기 있는 사람이 트레이드 마크인 짧게 친 숏커트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자연스럽게 잡힌 이맛살과 짙은 회색빛의 매니큐어가 그녀를 고혹적으로 보이게 해줬다.
“이소가 인사는 안 하는 걸까?”
섬뜩하니 놀라서 몸을 떨었다. 긴장된 몸이 파르르 떨리며 딸꾹질이 나왔다. 남자가 내 어깨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안으며 장난스럽게 여자를 타박했다.
“기죽이지 마세요. 놀랐잖아요.”
“감싸긴… 인사하는 것도 안 가르치니?”
“제 아들 교육은 제가 알아서 하는데.”
남자가 코웃음을 친다. 품에 안겨있는 게 싫어서 바르작거렸다. 언제 뭘 가르쳐줬다고 소름 끼치게 아버지 노릇을 하는 것도 싫다. 제 어머니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르겠고. 얼른 벗어나려고 끙끙거리는데 부드러운 손가락이 내 손목을 감싸 쥐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더니 브라운관을 서성이던 여배우가 성큼 다가와 내 팔을 잡고 있었다.
이질적인 풍경에 눈을 깜박거렸다. 여배우가 나를 잡아 당기며 투정을 부렸다.
“얼른 풀어. 엄마도 시간 없어.”
“…알았어요.”
순순히 나를 툭 놔주고 남자가 내 다른 한쪽 손목을 잡아 올렸다. 천천히 허리를 굽히더니 손목에 입술을 비비며 방긋 웃는다. 소름이 쫙 끼치면서 식은땀이 났다. 저쪽 구석에서 움찔거리던 경비원의 동공이 커진 게 보였다. 이런 씨발. 질색하며 손을 떨쳐내자 남자가 소리 내서 웃었다.
“잘 다녀와, 맛있는 거 사달라고 그래.”
“……”
전혀 즐겁지 못한 배웅을 받으며 질질 끌려나갔다. 건물 바로 앞에 주차된 차 조수석에 나를 태운 여자가 돌아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래, 뭘 좋아하니?”
“…그, 아무거나, 요….”
“그럼 차나 마시자. 내가 다이어트 중이거든.”
왜 물어봤는지 모르겠다. 뻣뻣하게 굳은 몸을 움직여 안전벨트를 메자마자 여자가 액셀을 밟았다. 차가 휙 나아간다. 여자는 콧노래를 쓰면서 다시 선글라스를 꼈다. 한겨울에 선글라스라니, 이상한 모습인데도 연예인이라 그런가 잘 어울렸다. 여자는 운전을 하면서 이따금 나를 돌아보며 의문스런 웃음소리를 냈다.
운전을 하는 폼이 광고같았다. 아직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배우인 탓일까, 우리 엄마보다도 젊어 보이는 얼굴로 핸들을 부드럽게 꺾는다. 몸에 익숙하게 배어있는 운전 실력을 구경하다 앞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말처럼 눈이 내리고 있었다. 차 보닛이 하얗게 물들어갔다.
“이소라고 불러도 되지?”
“네, 네.”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할머니라고 부를 생각하지 말렴.”
관계상으로는 할머니지만 너무 단호하게 하는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젊어 보이는데다 사회의 이목도 있으니 할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여자가 차를 돌리며 웃는다. 뺨에 피어난 보조개를 보며 남자와 많이 닮았다고 느꼈다.
“나 알아?”
“네…”
“내가 누군데?”
“…어…송태정 씨…”
“맞아. 이제부터 태정 씨, 하고 불러.”
전혀 달갑지 않은 호칭이었다. 그러나 너무 당당한 말투에 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태정 씨라니, 할머니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름을 부르는 것도 우울할 만큼 어색한 일이다.
커다란 하얀 건물 앞에 차를 세우고 여자가 내렸다. 안전벨트를 풀고 뒤따라 내리자 여자가 내 어깨에 팔을 올리고는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머, 왜 이렇게 움츠러들었어. 이태가 너 패면서 키우니?”
“……”
아니라는 말은 못 하겠다. 찬 바람과 눈이 좀 더 심해지자 여자는 말없이 나를 끌어당기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맞바람이 치자 여자의 머플러가 휘날린다. 익숙한 회색을 보며 남자와 똑같은 목도리라는 걸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머플러에 시선을 뺏겨있다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계산대에 서 있던 중년의 남자가 인사를 했다. 이곳의 주인인 것처럼 보였다.
“어서 오세요.”
“자기야, 나 왔어.”
여자가 두 팔을 벌리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주인이 카운터를 열고 나와 여자를 마주 끌어안았다.
“……”
결혼하지 않았다고 애인도 있지 말라는 법은 없지. 그래. 정신적은 충격을 이겨내려고 애를 쓰며 한 발짝 더 앞으로 걸어갔다.
“잘 생긴 총각이네. 태정 씨, 새로운 애인이에요?”
“어머, 애인이라니 기분 좋아라.”
배우답지 않은 소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여자가 내 등을 툭툭 쳤다. 나도 모르게 어깨를 폈다.
“이쪽은 이소. 양이소. 이태 아들.”
“아, 이태 씨 아들.”
주인이 전혀 아들로 안 보이는데, 하는 얼굴로 여자의 말을 따라 했다. 표정을 어색하게 지우자 주인의 표정도 따라서 어색해졌다. 여자가 재차 말했다.
“이태 주장으로는 애인.”
“…아하.”
“애인 아닙니다.”
일단 부정했다. 여자가, 태정 씨가 눈이 동그랗게 변해서는 애인 아니야? 아니라고? 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팔이 붙잡힌 채 얼굴을 푹 숙였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이런 추문을 부정하자니 매우 피로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아버지가 뭐라고 하신 건진 모르겠지만, 절대로…”
“이태는 니가 좋다던데?! 걔 지금 차인 거니?”
차였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여자는 내 안색을 보자마자 배를 잡고 박장대소를 했다. 깔깔거리면서 뒤로 넘어가라 웃어 재끼는데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상황을 관전하던 카페 주인이 여자를 진정시키고는 자리로 데려가 앉혔다. 푹신한 소파 위에 앉자마자 얼굴을 가려버렸다.
부끄러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차였대, 차였다고. 하는 말만 반복하는 여자 때문에 딱 미칠 지경이었다. 핏줄이 어디 가는 게 아니라더니, 남자와 미묘하게 비슷하게 돌아간 핀트가 보여 벌써부터 속이 쓰렸다.
“아, 세상에. 자기야. 이태가 차였다잖아. 우리 오늘 기념일로 삼을까? 응?”
“음, 태정 씨. 애기 얼어있는데 그만 놀리지.”
“어머, 내가 언제 놀렸다고 그래.”
눈웃음을 치며 태정 씨가 말끝을 돌렸다. 그나마 주인 남자만 정신이 멀쩡하게 박힌 모양이었다. 잠잠해진 소리게 크게 한숨을 쉬었더니 주인이 차가운 잔을 건네주었다. 빨대를 물고 한 모금 빨아당겼다. 차가운 파인애플 주스를 삼키고 나서야 불편하던 속이 진정이 되는 게 느껴졌다.
손가락을 꾸물거리면서 눈치를 봤다. 여자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편안한 목소리를 냈다.
“아, 하루에 한 잔씩 자기 커피를 마셔야 살 것 같다니까.”
“고마워요.”
연상연하 커플인 걸까. 존대를 하는 사장의 목소리가 간지러워 목을 긁적거렸다.
“뭐, 소문이 들리기에 이태부터 불러서 확인했지. 애가 갑자기 결혼을 하고 애까지 만들었다기에 뭔가 했거든… 애인이라니까 오히려 이해가 가더라고.”
“이태 씨 성격이라면 결혼도 이해가 가지 않아…?”
사장이 조심스럽게 말하며 여자가 테이블에 흘린 커피 자국을 휴지로 닦아주었다.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태정 씨가 입술을 오므려 웃었다. 샐쭉. 갈색 눈동자가 아름답다.
“사귀는 것도 아니라면 키스는 그럼 왜 한 거야?”
“……”
아까 마신 주스가 다시 넘어올 것 같았다. 위가 있는 부위를 손으로 누르면서 허리를 숙였다. 나무를 깎아 만든 테이블 표면이 반들거린다. 한참 침묵이 이어졌다.
솔직하게 말해야 하는 걸까. 또 무슨 보복이 이어진다거나, 어떤 경고를 받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다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아버지가 저랑.”
아버지래. 태정 씨가 토하는 시늉을 했다. 사장이 옆에서 말렸다.
“…잘 모르겠어요.”
말할 의욕과 생각할 의욕이 동시에 사라졌다. 태정 씨는 그게 뭐야, 하고 중얼거리면서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과격한 몸짓에 커피가 또 한 번 넘쳤다. 사장은 이번에도 말없이 휴지를 뽑아 커피잔과 테이블에 흐른 커피를 닦아냈다.
사이 좋은 연인의 모습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조금 부러운 광경이기도 했다. 여자는 연인의 어깨에 편하게 머리를 기대며 나를 훑어보았다. 연기가 몸에 밴 사람의 날카로운 눈빛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를 구석구석 훑었다. 불편한 기분에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되게 예쁘게 생겼네. 나는 평생 남자는 이태만 예쁜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나 봐.”
태정 씨가 말한다. 노골적인 외모 평가를 받으니 식었던 얼굴이 다시 화끈거렸다.
“이태도 예쁘지, 태정 씨 닮았잖아.”
“날 닮았으니 물론 예쁘긴 하지. 그런데 이소도 참 예쁘네. 예쁜 거 좋아하는 그 집안 습성이 어디 안 간다니까.”
예쁜 걸 좋아한다고 말하던 남자의 목소리와, 노인을 처음 봤을 때 내게 예쁘다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살면서 예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남자를 만나면서부터 예쁘다는 말을 지나치게 자주 듣는다. 민망해서 입가를 문질렀다.
“그래서, 이태랑 사귀는 것도 아니면 뭐니?”
본론을 치고 들어오는 목소리에 유리잔을 잡으려다 말고 움찔했다. 고개를 들자 편안하게 몸을 늘어트린 태정 씨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장이 태정 씨와 나를 번갈아 보며 미안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잘생긴 외모는 아니었지만 웃는 모습이 편안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보며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머리를 굴렸다. 내가 뜸을 들여도 태정 씨는 대답을 독촉하지는 않았다.
보면 볼수록 남자를 닮은 얼굴이다. 남자를 보면서 어떻게 배우 송태정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둘은 닮았다. 나란히 서 있으면 대단히 멋진 모자지간으로 보일 것 같았다. 남자도 연예인처럼 잘 생기긴 했지. 성격이 문제라서 그렇지.
“…변태랑 고통받는 피해자?”
태정 씨가 테이블을 내려치며 웃기 시작했다. 커피잔이 엎어져 갈색 액체가 바닥으로 줄줄 떨어졌다. 사장이 미간을 짚으며 걸레를 들고 와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숨도 쉬지 않고 깔깔거리며 웃던 태정 씨가 겨우 허리를 펴고 얼굴을 들어 올렸다. 정말 웃겼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아하하, 아, 세상에. 하하.”
눈물까지 고여 있다. 세상에. 머쓱한 기분이 눈길을 돌리며 바닥을 적신 커피를 내려다봤다. 태정 씨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들겼다.
“이태가 좀 변태 같지?”
“좀 아니고 많이요.”
손가락이 커피에 젖는대도 태정 씨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걸레를 들고 돌아온 사장이 휴지로 태정 씨의 손가락을 닦아주고 걸레질을 시작했다.
“어쩌나, 우리 아들이 점 찍었으면 너도 편하지는 않을 텐데.”
“죄송한데 이미 평탄하진 못한 인생이라…”
“키스는 그럼 이태가 강제로 한 건가?”
“잘 아시네요.”
한번 입을 나불대니 끝도 없이 진심이 툭툭 튀어나왔다.
“어린데 고생이 많겠어요.”
사장이 내 등을 두드리며 한숨을 쉬었다. 속에서 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솔직히 호적상 아버지만 아니었으면 이미 고소했어요.”
“그래, 걔가 나한테 다짜고짜 애인이라고 말할 때 좀 의심스럽긴 했어. 이태 걔는 늘 인생 혼자 살거든.”
즐거워 죽겠다며 태정 씨가 손뼉을 쳤다.
“꼬시다. 이번에 이태 눈에서 이소가 눈물 좀 쪽쪽 뽑아내 봐. 그 자식은 스물 돼서 나 봤을 때도 울지도 않았던 놈이야. 나는 화장이 번지도록 엉엉 울었는데!”
“태정 씨, 그거 벌써 10년도 지난 이야기잖아…”
사장 남자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태정 씨를 달랬다. 스무 살에 남자를 만난 거면 10년도 아니고 15년은 된 이야기 아닌가. 나도 덩달아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태정 씨가 분기에 찬 표정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아니야! 나 그것 때문에 다음날 레드카펫 완전히 못생기게 나왔어. 이태도 엉엉 울어서 부어터진 꼴을 봐야겠어. 봐야겠다고!”
…태정 씨도 성격이 그렇게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남자의 꼬이고 치졸한 성격이 어디서 나온 건가 했더니. 불안한 기분에 몸을 슬금슬금 뒤로 뺐더니 기회라는 듯 태정 씨가 발을 들어 테이블을 걷어찼다. 딱 봐도 무거워보이는 원목 테이블이 단숨에 내 무릎 직전까지 밀려왔다. 분명히 하이힐을 신었는데 어디서 저런 슛이 나오는 걸까.
“태정 씨, 사람 앞에 두고 그렇게 아무거나 차면 안 된다니까.”
남자가 첫 만남부터 테이블을 차대던 걸 누구한테 배웠는지도 알 것 같았다. 분명히 태정 씨는, 남자를 처음 만났을 때도 테이블을 찼을 거다. 소소하게 새끼발톱 정도는 걸 수 있었다.
“몰라. 그나저나 이소야.”
“네?”
태정 씨가 방긋 웃는다.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얼굴이 내 앞에서 애정을 가지고 웃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우리 자주자주 볼까?”
“……어어.”
“태정 씨, 애기 괴롭히지 마라니까.”
“아니, 내가 언제 괴롭혔다고 그래. 알겠지? 내가 이태 이야기도 많이 해줄게.”
마지막 문장이 귀에 박혔다. 남자 이야기에 귀가 팔랑거린다.
“걔가 그래도 어릴 때는 나랑 헤어지기 싫다고 울었거든.”
“자주 봐요.”
“그렇지?”
“네.”
“아이, 예뻐라.”
태정 씨가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활짝 웃는다. 기분이 좋아지는 미소에 덩달아 나도 활짝 웃었다. 웃으니 더 예쁘네. 태정 씨가 다시 한 번 웃는다. 부끄러워서 입술을 올리며 눈을 접었다.
남자의 약점이 눈앞에서 반짝거린다. 뭔가 횡재한 기분이었다.
처음에만 조금 긴장했지, 그 뒤로 사장과 태정 씨와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편안했고 즐거웠다. 사장은 자신을 아저씨라고 부르면 된다고 이야기했다. 아무렴 사장님이라거나 할아버지…라는 끔찍한 호칭으로 부르는 것 보다는 나아 수락했다. 시종일관 장난스러운 얼굴과 말투의 태정 씨를 보고 있으니 유명한 배우를 만나게 되었다거나, 남자의 친모를 갑작스럽게 만나게 되었다는 부담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는 태정 씨의 얼굴에서 어느 정도 호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태정 씨가 짓궂은 질문을 던지면 아저씨가 나서서 중재했다. 정말 좋은 사람이야. 오랜만에 만난 정상인에 감격하는 사이 시간이 흘러갔다.
아저씨는 내게 새우 볶음밥을 만들어주었다. 직접 담갔다는 피클과 새우 볶음밥을 먹고 나니 일어날 시간이었다. 내가 밥을 먹는 동안 자기도 먹고 싶어져 안된다며 자리를 피해있던 태정 씨가 휴대폰을 손에 쥐고 돌아왔다. 얼굴에 띈 홍조에 입가에 잡힌 미미한 미소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무슨 일 있어요? 아저씨가 물었지만 태정 씨는 고개를 흔들었다. 상당히 기분파인 태정 씨를 건드릴 생각은 없어 둘 다 별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어깨에 편안하게 팔을 걸치고 태정 씨가 손을 흔들었다.
“자기, 내일 봐.”
“들어가요. 이소도 잘 가고.”
고개를 꾸벅 숙이고 태정 씨를 따라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벌써 하늘이 어둡다. 깜깜해진 거로 모자라 퇴근 시간이 코앞이었다.
태정 씨는 이런저런 잡담을 건네며 나를 회사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차 문을 열고 내리자, 조수석 쪽으로 몸을 빼며 인사를 건넨다.
“이소, 잘 들어가.”
“…태정 씨도요.”
온종일 불러 조금 익숙해진 호칭이 입에서 나온다. 태정 씨가 기분 좋은 얼굴을 했다.
“이름 불리니까 좋네. 안녕.”
“네.”
문을 닫자 지체없이 출발한다. 멀어지는 차 꽁무니를 바라보다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매우 불편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에 내렸다. 비서의 인사를 받으며 문을 열고 남자가 있을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볼펜을 끝없이 움직이며 서류를 보고 있었다.
“저 왔어요.”
혹시 인사를 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남자를 불렀다.
“…저 왔다니까요?”
남자는 미동도 없이 서류에 코를 박고 있었다. 이어폰을 끼고 있나 흘끗 고개를 들어 살폈다. 그것도 아니었다. 아버지? 여전히 어색한 호칭으로 작게 남자를 불렀다. 남자가 눈만 힐끔 들어 올렸다.
불쾌한 눈빛이었다. 왜 저렇게 짜증이 나 있는 걸까, 불안한 기분에 뒷걸음질을 쳤다. 등 뒤로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다. 여차하면 도망가기 위해 탈출구를 확보해놓고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일 있어요?”
“왜 웃었어?”
남자가 다짜고짜 짜증을 내며 묻는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서 멍하니 남자를 보았다. 왜 웃었냐니? 웃어? 내가? 내가 웃는 게 저렇게 짜증이 날 일인가.
쿵쿵 발걸음 소리부터 심술을 뿌리며 남자가 걸어왔다. 신경을 바짝 갉아먹는 기세에 잔뜩 졸아붙어 문 쪽에 찰싹 달라붙었다.
“왜 나한테는 안 웃어주고 엄마 앞에서는 웃는데?”
…어이가 없었다.
“저는 웃으면 안 돼요?”
“응.”
기가 막혀서 입을 벌리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남자가 내 턱을 누르며 허리춤을 만져왔다.
“뭐 마음대로 웃지도 못해요?”
“나한테도 웃어달라는 말이잖아.”
“허, 참.”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정색을 하며 남자를 보았다.
“자, 방금 웃었죠? 이제 놔주세요.”
“그게 아니잖니.”
남자가 이를 악물며 억지로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눈을 감고 소리만 듣는다면 감쪽같을 정도로 녹을 것 같은 음성이었다. 설탕을 뿌려 구운 자몽 같다. 꽉 깨물면 과즙이 터질 것 같은 목소리로 남자가 야트막한 숨을 쉬었다.
“웃어.”
하여튼 미친놈. 마음속으로 욕을 하며 천천히 뒤로 잡고 있던 문고리를 돌렸다. 철컥거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남자가 내 어깨를 잡아당기며 문을 당겨 닫았다. 꽝 하는 소리에 귀까지 얼얼했다. 덜컹거리며 진동하는 문을 보며 괴력에 질색하자 볼을 부풀리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내렸다.
“웃어봐.”
먹고 떨어지라는 심정으로 억지웃음을 지어주었다. 남자가 욕을 했다.
“씨발. 못생겼어.”
“……”
웃으라고 지랄을 해서 웃어줬다니 못생겼다니. 나 못 생긴 건 내가 제일 잘 안다. 기분이 나빠서 같이 표정을 구겼다.
남자의 예민하고 난폭한 성정은 마치 유리 같았다. 맞지 않는 틀에 끼워 넣으면 사방에서 오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이 터져버린다. 핀셋을 만들었다고 했을 때부터 고약한 성격을 알았지만, 해도 해도 심각하게 성격 파탄자였다.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것처럼 다닥다닥 문 위를 두드린다. 남자의 팔을 덮고 있는 셔츠가 내 뺨을 스쳤다.
“엄마가 마음에 들었어?”
“아버지보단 성격이 좋으니까요.”
“너도 성격이 그렇게 좋진 않지.”
못생겼다는 평가를 이어 성격이 좋지 않다는 평가까지 들었다. 갑자기 인격이 하락한 느낌에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댁 보다야, 대단히 인격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본인의 성격을 그렇게 평가하다니, 뻔뻔하잖아?”
웃으면서 남자가 내 코를 잡아 비트는 척 장난을 쳤다. 얼굴에 고스란히 화가 머리끝까지 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면서 남자의 태도는 우아하고 상냥해보였다.
겨우 웃었다는 명제 하나로 유치하고 치졸하게 패악을 부리는 남자를 보니 이쪽도 짜증이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남자의 어깨를 힘을 줘 밀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깨에 힘을 줘 밀어낼 수록 남자는 점점 몸을 내게 가까이 붙였다. 가슴팍이 바싹 닿았다. 남자가 위에서 압도적으로 나를 눌렀다. 느슨하게 목에 팔을 감고 다정해 미쳐버릴 것 같은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깨 위에 얹어진 두 팔이 무겁다. 남자는 보기보다 훨씬 몸무게가 많이 나갔다. 근육 덩어리가 안에 팽팽하게 조여들어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직적인 몸을 상상했다. 가끔 내 몸을 타고 올라와 누르면 쇳덩어리가 올라앉은 느낌이 들었다.
남자가 천진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태정 씨와 똑 닮은 갈색 눈동자 안에 분노가 켜졌다 사그라지기를 반복했다.
이마에 입술을 문지르는 걸 가만히 받아주다 평화를 갈랐다.
“나는 당신 못 좋아해.”
“왜?”
남자는 이마에 입술을 뭉갠 그대로 웅얼거리며 물었다. 발음이 젤리처럼 말랑거렸다. 칭얼거리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나오다가도 말에 섞인 비정상적 사고와 비뚤어진 애정에 붉은 선이 휙 그어졌다.
상처받은 척 눈을 찌푸리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야비할 만큼 자신의 외모를 잘 사용하는 남자는 어김없이 우울한 시늉을 하고 있었다. 놀랄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다. 저런 얼굴을 하고 흉악하게 사람을 내몰고 유치한 짓은 혼자 다 하는 대단한 사람이 양이태라는 남자였다.
태정 씨가 말해 줬다. 남자는 어릴 때부터 자신을 닮아 성격이 나빴지만, 이 집에 들어간 뒤로는 제대로 성격이 헝클어져 있었다고. 당시 그녀와 사귀던 남자의 친부는 아이들의 양육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 인간이었다고 했다.
“그럴 만한 관계도 상대도 아니니까.”
“네가 결국 내 아들이 된 것처럼, 사랑도 할 수 있겠지.”
“우리는 남자야. 아버지랑 아들이고.”
“동성연애를 거북하게 여기는 건 구시대적 사고방식이야.”
누가 지금 동성연애를 문제점으로 삼았나.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물러서지 않는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좋았던 기분이 단숨에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미안하지만 나는 게이도 아니고 바이도 아니야. 더불어 엄마의 재혼 상대랑 사귈 만큼 정신이 나가지도 않았어.”
“그런 것 치곤 우리가 진도를 꽤 많이 뺐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
얼굴이 코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남자가 힘을 줘 어깨를 눌렀다. 무거운 몸이 위에서 나를 덮치자 저절로 무릎이 후들거렸다. 남자가 코웃음을 치면서 발로 내 아킬레스건을 눌렀다. 무릎이 힘이 훅 빠지면서 휘청거렸다.
바닥으로 쓰러지는 몸을 남자가 손바닥을 펼쳐 받아냈다. 낙하 속도가 약해지자 남자가 팔에 힘을 천천히 뺐다. 입술을 깨물자 자신의 치아로 내 아랫입술을 빼내며 남자가 턱 끝을 핥았다. 날렵하고 뜨거운 혀는 금방 좀 더 밑으로 내려와 목울대를 가볍게 핥고 뜯었다. 성감대를 정확하게 자극하는 애무에 두통이 몰려왔다.
“익숙하잖아. 좀 더 말해줄까? 언젠가 너는 내게 아랫도리가 빨리는 것도, 내 아래를 빠는 것도 익숙해질 거야.”
저주 같은 소리에 손을 들어 남자의 뺨을 쳤다. 소리가 크게 났는데도 남자는 불쾌한 기색도 없지 자신의 하반신을 내 아랫배 위에 붙였다. 흥분한 남자의 성기가 느껴졌다. 저절로 배에 힘이 들어갔다.
남자가 손바닥으로 내 복부 위를 천천히 쓸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벌써 기대가 되는데. 내 정액을 삼키는 데 익숙해지면 이제는 이쪽으로… 먹고 싶어 할 네 얼굴이.”
엉덩이를 쥐고 벌리며 손가락이 골 사이를 쓸었다. 비명을 삼키며 턱을 치켜들었다. 좋은 광경을 보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얻어맞아 붉어진 뺨을 올리며 남자는 황홀하게 웃었다.
“네 다리를 벌리고 박을 거야. 나중에는 준비 없이도 언제든 벌어져 있을 만큼.”
안개처럼 짙어진 목소리가 내 고막을 더럽혔다. 남자가 엄지손가락으로 엉덩이 사이를 꾹 눌렀다. 청바지의 질기고 두꺼운 천을 찢어버리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하체를 장난스럽게 흔들면서 남자가 잇새로 고통과 쾌락에 한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아래가 내 정액을 삼키다 못해 질질 흐르고 짓무를 만큼 싸주고, 속옷을 직접 입혀줄게.”
“강간이에요.”
강간? 남자가 단어를 주워 삼키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강간이겠지. 하지만 우리 이제 서로를 많이 알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뭘……”
“섹스를 할 거야. 언젠가, 네가 스스로 원할 때.”
남자가 또박또박 입 모양을 움직였다. 섹스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 살짝 드러나는 가지런한 치아와 경직된 입술이 외설적이었다.
“…아버지랑 그런 거 안 해요.”
억지로 아버지란 호칭을 썼다. 목이 탁하게 갈라지고 쉬어 있었다. 아버지란 호칭에 잠시 몸짓을 멈추던 남자가 고개를 위로 올려 눈을 마주쳤다. 완전히 넥타이를 끌러 내린 남자가 내 손목을 쥐었다.
두 손목을 감싸는 부드러운 실크 조각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손목시계에서 나는 초침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조용했다. 심장이 뛰지도 않았다.
“아무도 아버지와 키스를 하진 않아, 아들.”
“……”
“왜, 형이라고 불러볼래?”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악몽을 꾸고 일어났을 때처럼 목덜미에 꿀렁거리는 한기가 느껴졌다.
“역겨운 새끼.”
“나쁘진 않잖아. 아, 나이 차이가 좀 나나? 그럼 이태 씨, 하고 부를래?”
“내가 미쳤어요?”
“그래, 입만 살아서 팔딱팔딱 움직이는 게 네 매력이긴 하지.”
손목 매듭을 확인한 남자가 팔을 위로 올려 한 손으로 꽉 눌렀다. 삼류 포르노의 장면 같았다. 강간당하기 직전의 시나리오를 고스란히 따라가는 것 같았다. 먹은 음식이 올라올 것 같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남자가 상체를 일으켜 담배를 찾아들었다. 찰칵, 라이터에 불이 올라오면서 담배 연기가 연하게 흘러나왔다.
“그럼, 너랑 못 자니까 정혜 씨랑 잘까?”
“뭐라고?”
“피가 반은 섞였을 거 아니야. 정혜 씨랑 자면 대충 너랑 자는 느낌이 들까?”
머리를 둔기로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남자는 타인을 손쉽게 불쾌하게 만들고, 소중한 약점을 휘두르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엄마가 남자 때문에 엮이고 힘들게 만들었던 일들과 나를 위해 희생했던 일 중 무엇이 크냐고 물어온다면 단연 후자였다. 희생은 크다. 엄마는 나를 이 세상에 두 다리로 버티고 설 수 있게 만들어준 사람이다. 오랜 시간 잉태하고 낳아 기른 사람이었다. 자신도 엄마가 있으면서, 업무를 보다가 전화를 받고 나가 세 시간씩 이야기할 만큼 가까운 사이인 엄마가 있는데 내게 똑같은 소재로 협박을 하다니.
더 무서운 건 남자는 정말로 자신의 말을 실행에 옮길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역겨웠다. 나와 키스를 하던 입술로 엄마와 키스를 하고, 나를 끌어안고 잠들던 더러운 침대에서 엄마를 눕힌다고? 엄마와 그런 짓을 한다고?
우리 엄마가, 이 사람과?
헛구역질했다. 남자의 팔에 갇힌 채 몸을 떨면서 위장을 뒤집고 괴롭히자 남자가 혀를 찼다.
“진정해. 아직 한다고는 안 했잖니.”
바지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손가락이 유연하게 달라붙은 브리프의 천을 들어내고 미끄러져 들어간다. 차가운 한기가 예민한 부위에 닿자 숨을 거칠게 말았다.
손가락이 매끈해진 부위를 문지른다. 차갑고 딱딱한 손톱이 피부 위를 긁을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발가락에 힘을 준 채 겨우 버텼다.
눈 끝에 입을 맞추며 남자가 웃음소리를 냈다. 공기는 적당히 따뜻하게 데워져 있는데 추워서 미칠 것 같았다. 띵한 머리를 깨우려고 애를 쓰며 욕을 했다.
“개새끼야, 엄마 건드리지 마.”
“이런.”
남자가 혀를 차며 웃었다.
“봐봐, 너는 건드리고, 흔들고, 협박을 해야지만 굴복하잖아.”
누구나 권력과 폭력 앞에서는 굴복한다. 그런 단순하고 절대적인 논리를 처음부터 가르쳐준 게 자신인 주제에, 남자는 내 태도를 비난했다.
“내가 다정하게 굴고, 네게 친절해지면 절대로 허락해주지 않으면서.”
내 바지를 벗겨내며 남자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왜 우리 아들은 내 행동만 지적하는 걸까?”
다리에서 바지가 완전히 벗겨졌다. 남자는 매끈한 다리와 허벅지를 만지며 허리 뒤로 무릎을 집어넣었다. 허공에서 하체가 반쯤 붕 떴다. 체모 하나 없이 밋밋한 아랫도리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낮에 왁싱을 받았던 터라 아직 피부가 아직도 붉어져 있었다.
남자가 내 눈을 바라보며 혀를 내밀어 핥더니 입을 벌리고 치골 부위를 소리 내서 빨았다. 요란한 소음이 울리자 수치스러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 떠.”
명령이었다. 남자가 화를 냈다.
“이대로 집 거실에 가서 하기 싫으면 눈 떠.”
“…개자식…”
끔찍한 협박에 겨우 눈을 떴다. 뿌옇게 변한 눈을 깜박이자 남자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더운 숨이 사타구니 사이에 닿자 본능적으로 성욕이 돋았다.
여전히 내 눈을 찢어놓을 것처럼 바라보며, 남자는 매끄럽고 예민해진 부위를 정신없이 빨았다. 성기는 삼키지도 않고 그 윗부분만 문지르고 빨리는데도 죽을 것 같았다. 아, 아. 소리 없는 신음을 뱉어냈다. 저절로 허리가 흔들렸다. 남자가 엉덩이를 터트릴 것처럼 꽉 쥐고 나를 끌어내렸다. 아랫도리에 완전히 얼굴을 묻은 남자가 치아를 세워 피부를 긁고 씹었다.
“하지,…마! 악!”
사람의 치아로 꽉 눌리자 얇은 피부가 고통을 호소했다. 눈물이 터졌다. 고스란히 약점을 드러내고 남자의 손아귀 안에서 휘둘러지자 바늘 같은 공포가 척추를 하나하나 찔러 들어왔다.
남자가 무릎 안쪽에 손을 넣어 다리를 들어 올렸다. 회의장에서와 비슷한 체위였다. 남자가 혀를 내밀어 사타구니 사이를 길게 따라 그었다. 고통스러울 정도의 쾌감이 턱 끝을 강타했다. 이를 질끈 악물었다.
“아아, 하, 으읏.”
허벅지 안쪽을 주무르며 남자는 사타구니와, 치골만 집중적으로 빨았다.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애무였다. 맨살이 같은 성별을 가진 남자에게 빨리는데도 흥분은 쉽게 나를 저격했다. 입을 막고 싶었는데 손이 묶여있어 내리기도 쉽지 않았다.
뜨거운 타액이 지나간 자리는 금방 식었다. 히터가 틀어져 있어 따뜻한데 남자의 혀가 스치고 지나간 부위만 차갑게 떨렸다. 그 외의 공간은 전부 땀이 맺기 시작했다. 들려진 허리를 타고 뒷목으로 땀방울이 흘렀다. 남자의 손이 잡힌 허벅지도 가슴팍과 배도 뜨거웠다. 숨이 막히는 더위와 고열이 이성을 지저분하게 찢었다.
“하, 너 벌써 섰어.”
남자가 손으로 내 성기를 쥐었다. 손이 뜨거웠다. 손바닥에 잡힌 성기가 타들어 갈 것 같았다. 고개를 도리질 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놔! 이 개새…”
“쉬이. 누가 들어오면 어쩌려고 소리를 질러?”
쿠퍼 액을 흘리는 성기 끝을 엄지로 꾹 누르며 남자가 속삭였다. 흉통을 강타한 쾌감과 공포에 입을 꽉 삼켰다.
“조용히 울어야지 오늘은.”
성기가 빨리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한번 당해봤다고 익숙해졌을 리가 없다. 쾌감은 오히려 더 빨랐다. 남자의 말처럼 가랑이를 활짝 벌리고 남자의 애무에 성기를 세웠다. 남자의 혓바닥은 체온보다 더 뜨거운 것 같았다. 덜 식은 커피를 삼켰을 때처럼 아팠다. 지나치게 높은 온도와 쾌락에 허리가 요동쳤다.
“아, 아아!”
“조용히.”
남자가 혼을 내야겠다고 중얼거리며 손을 뻗어 유두를 꼬집었다.
“으… 흣!”
여자도 아닌데 가슴 주변의 살을 그러모아 주무르며 남자가 머리를 흔들었다. 추삽질을 하는 것처럼 위아래로 왔다 갔다 하며 입안의 성기가 자극당했다. 남자가 손톱을 세워 유두를 간지럽게 슬슬 긁었다. 유룬 주변을 문지르기만 해도 죽을 것 같았다.
“으아, 하, 아, 우읏.”
입을 막고 싶었다. 목구멍에서 본능적으로 소리가 터져 나오는데 막을 길이 없었다.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어 봤지만 그때마다 남자는 목 안으로 깊숙하게 성기를 밀어 넣고 집요하게 빨아댔다. 아이스크림을 빨아먹는 것처럼 거침없는 소리가 남자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혀가 귀두 끝을 부드럽게 핥으며 흐르는 쿠퍼 액을 삼켰다.
“흡, 싫, 하으, 싫어.”
“좋아 죽으면서 싫다고 그러네… 얄밉게.”
남자가 성기를 천천히 흔들면서 나를 비웃었다. 커다란 손으로 성기를 말아 쥐고 사정을 돕는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고개를 돌린 채 이를 악물자 남자가 손가락을 튕겨 성기를 때렸다.
“아!”
“봐봐, 너 질질 싸고 있잖아.”
남자가 한 번 더 성기 끝을 때렸다.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남자가 웃으면서 입을 크게 벌리고 혀만 이용해서 성기 끝을 쪽쪽 빨았다. 빨린다는 게, 섹스라는 게, 이렇게 사람 이성을 망가트리는 거라면 정말로 하고 싶지 않았다. 입을 벌리고 헐떡거렸다. 죽을 것 같았다. 사정하고 싶었다. 참고 참아 잔뜩 조여든 아랫배가 결려왔다.
“내 입에 싸, 먹어 줄게.”
성욕으로 미친 것 같은 목소리를 내며 남자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단숨에 삼켜지자마자 입 안으로 비명이 터지지도 못하고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남자는 두 손을 티 안으로 밀어 넣고 힘껏 유두를 꼬집고 돌렸다. 동시에 목 안 깊숙한 곳까지 성기가 빨려 들어갔다. 이성을 잡아 뜯고 성기 전체를 꽉 조여오는 뜨거운 체온과 타액에 참고 참았던 정액이 터졌다.
“…읏…!”
손가락으로 유두를 문지르며 남자가 몇 번 더 세게 성기를 빨아댄다. 단숨에 정상까지 도달한 쾌감이 좀 더 자극당하며 허리가 떨렸다. 몇 번 더 남은 정액을 내보내게 만든 남자가 천천히 성기를 뱉어냈다.
열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남자가 입을 천천히 벌렸다. 남자의 입안을 적신 정액이 보였다. 미친놈. 나는 미친 새끼야. 어떻게, 또… 자괴감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남자는 보란 듯이 입 안에 있는 것을 혀로 훔쳐 꿀꺽 삼켰다. 같은 성별의 정액을 삼키는 게 역겹지도 않은지 맛있다는 것처럼 쩝쩝 소리를 내며 자신의 뺨에 튄 정액까지 모조리 닦아 핥아 먹었다.
“풋내.”
조롱을 하며 남자가 벨트를 풀어헤쳤다. 브리프의 중앙이 짙게 변해 있었다. 남자가 내 뒷목을 잡아 상체를 일으켰다. 하체와 허리에 힘이 빠져 부들거리면서 겨우 일어나 앉았다. 남자가 뒷머리를 누르며 아래쪽을 갖다 댔다.
“빨아줘.”
“……”
“빨다가 깨무는 것도 상관없긴 해. 네 의사를 존중해주지.”
존중하는 것 좋아하시네. 어디 가서 엿 바꿔먹은 존중을 이야기하며 남자가 내 입술을 엄지로 문질렀다. 삼키지 못한 침이 흘렀던 입술 주변은 축축했다. 남자가 손쉽게 내 입술을 열었다.
“핥고, 삼켜. 그게 네가 할 일이야.”
“……”
“날 사랑하지 못하겠다면 내 정액이라도 사랑해보는 게 좋겠군.”
최악인 대체품이었다.
남자가 먼저 브리프를 내렸다. 흉흉하게 커진 성기는 이미 잔뜩 젖어 있었다. 입에 들어가 지지도 않을 것처럼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성기에 겁에 질려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가 담배에 불을 붙이다 나를 내려다보았다.
“삼켜.”
연기를 쏟아내며 명령한다. 눈을 꽉 감고 성기를 입 안에 넣었다. 하, 남자가 교태 어린 한숨을 쉬었다. 처음 먹어본 동성 남자의 성기는 찝찝하고 구역질 나는 맛이 났다. 냄새가 고약하기보다는 입안을 꽉 채운 살덩어리에 구역질이 났다. 성기 끝이 목구멍 안을 위협적으로 찔러왔다. 헛구역질이 나서 성기를 문 채 기침을 하자 남자가 혀를 찼다.
“천천히, 끝에서부터 빨아봐. …그래.”
반쯤 성기를 삼키고 억지로 혀를 움직였다. 성기와 입 안 사이의 공간에 타액이 차올랐다. 입술을 좀 더 크게 벌리고 혀를 움직이자 입가로 침이 다시 흘러 마찰을 줄였다. 남자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타액을 윤활유로 삼아 매끄럽게 성기가 혓바닥을 할퀴고 빠져나갔다 다시 찔러 들어왔다. 불편하게 묶인 손을 꿈틀거렸다. 남자가 등 뒤로 돌아가 아프게 근육을 뒤트는 팔을 꽉 잡아 눌렀다.
“으, 음. 우읍.”
“좋아, …하, 잘하네.”
달가운 칭찬이 아니었다. 얼굴을 빼지 못하게 남자가 뒤통수를 다시 눌렀다. 목구멍까지 바짝 성기가 들어왔다. 숨이 부족해 헐떡거리며 코로 겨우겨우 숨을 뱉어냈다. 맛을 느낄 찰나도 없이 쿠퍼액이 바짝바짝 삼켜졌다. 가득 고인 타액에 성기 기둥이 질척거렸다. 우둘투둘한 표면과 생생한 샅내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목구멍까지 힘을 줘. 바짝 빨아. 네 것도 그렇게 빨아줬잖아.”
담배를 거칠게 빨아대며 남자가 허릿짓을 했다. 목젖을 위협하던 성기가 콱 찔러 들어오자 눈물이 터졌다. 머리를 흔들며 반항하자 남자가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뺨을 두들겼다.
“좀 더 노력해. 봐주고 있잖아.”
침소리와 살이 마찰되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떨어지는 타액을 삼키기 위해 혀와 뺨을 움직이면 남자가 낮은 탄식을 흘렸다.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다시 남자가 허릿짓을 천천히 시작했다. 고통스러워. 크게 벌려진 입가가 찢어진 것처럼 쓰라리고 아팠다. 성기 끝에 찔린 목구멍에서 피 맛이 나는 것 같았다.
“하, 그래. 그냥 그렇게 벌리고 있어.”
뒷머리를 잡고 허리를 들어 입 안을 콱콱 찔러 들어오며 남자가 담배 필터를 잇새로 꽉 깨물었다. 재가 떨어졌다. 남자의 하얀 셔츠가 얼룩지기 시작했다.
“계속, 그렇게, 나를, 보라고.”
입안으로 성기가 들어올 때마다 질퍽거리는 소리가 났다. 입에 가득 고인 타액을 헤치며 성기가 목구멍을 바짝 찌르고 다시 후퇴했다. 구역질이 나서 몸을 떨 때마다 남자는 더 세게 나를 결박했다.
“아, 웁, 으음!”
뒷머리를 가득 누르고 빠져나가지도 못하게 고정한 다음 미친 사람처럼 허리를 들썩거린다. 입안을 마구잡이로 헤집는 성기에 몸을 비틀었다. 남자가 안 돼. 라고 일갈하며 허리를 뒤로 물렸다 크게 박아 올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비가 오는 것처럼 흐르는 눈물을 보며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바짝 선 성기에서 정액이 터졌다. 쓰고 비린 맛이 입 안을 채우고 목구멍을 타고 들어갔다. 남자가 턱에 힘을 줬다 풀 때마다 남아 있던 정액이 조금씩 더 흘렀다.
하체를 물린 남자가 손바닥으로 내 입을 막았다. 입 안에 가득 고인 정액의 맛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남자를 보았다.
“삼켜.”
“……”
미칠 것 같았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구역질이 계속 올라왔다.
“삼켜.”
부들부들 떨면서 억지로 혓바닥에 힘을 줬다. 맛을 보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목구멍을 늘려서 입 안에 있는 정액을 넘겼다. 내가 전부 삼키는 것을 본 뒤에야 남자는 입에서 손바닥을 떼주었다.
“착하다.”
“…나쁜, 나쁜 놈. 씨발새끼.”
“내가 그런 소리를 듣긴 하지.”
“죽어버려.”
하루는 늘 비현실의 연속이었다. 예측 불가인 삶이라고 하지만 남자를 만나고 난 뒤로는 더 힘들었다.
“나는… 절대로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야.”
몇 번을 더 강제로 정액을 삼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남자의 엄마도, 노인도, 고모도 사랑할 수 있지만 남자를 사랑하지는 않을 것이다. 눈물을 그치기 위해 애를 쓰며 억지로 얼굴을 들어 올렸다. 남자는 담배를 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가 말 한 대로 끝까지 해보자.”
“……”
“그것도 너와 끝까지 있을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최악이었다.
늘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쉽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남자의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건 꽤 흔한 일이 되었다. 남자는 내가 잘 빨지도 못하는 성기를 흥분시키기 위해 끙끙거리는 걸 즐기며 담배를 피우거나 신문을 읽었다. 여러모로 엿 같은 일이었다.
종종 빠르게 사정을 시키려고 내 입에 미친 소처럼 하체를 들쑤셔 성기를 집어넣기도 했지만, 대부분 거사란 보통 밤에 이루어졌으니까, 남자도 나도 불행히 여유가 매우 많았다.
전화통화를 하면서 내 불룩해진 뺨과 팽팽해진 입술을 매만지고, 한 방울 남은 정액까지 삼키도록 친절하게 손가락을 집어넣는 것도 익숙해졌다. 남자는 자신의 말을 매우 철저하게 실행했다. 내가 남자의 사타구니에서 숨을 헐떡거리며 정액을 토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으면, 남자가 내 아래를 만져왔다. 가끔은 오럴을 하는 동안 내 성기를 손으로 애무해주기도 했고, 생각만 해도 남사스러운 체위로 같이 성기를 빨고 빨릴 때도 있었다.
뭐 하나도 달갑지는 않았지만, 파블로프의 개처럼 남자의 성기를 빠는 사이 내 성기가 부푸는 것도 의례상의 일이 되었다. 남자는 내가 정액을 빨아먹는 동안 반쯤 흥분한 내 아랫도리를 손바닥으로 비비거나 입으로 빨았다.
“하루에 한 번, 각자 한 번씩 싸는 거잖아. 얼마나 공평해?”
내 성기가 애무 당하는 것을 거부했더니 한다는 개소리가 이것이었다.
솔직히 남자의 성기를 빨고 정액을 삼키는 것이나 다리를 벌리고 후장이 뚫리는 것이나 뭔 차이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타구니와 입가에는 늘 정액 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비체는 가끔 남자의 성기를 빠는 나를 구석에서 빤히 쳐다보다가 침대 위로 뛰어 올라와 마구 짖어댔다. 순한 얼굴이 앙칼지게 변해서, 남자를 향해 털을 세우고 왕왕 짖으면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내 품에 안겨서는 남자를 향해 목청을 울린다. 남자는 그럴 때면 이제 몸집이 많이 커진 비체를 빤히 내려다보다, 내 입술에서 젖은 프리컴을 훔쳐내고는 욕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물론 이 사랑스러운 강아지가 늘 내 편을 들어주는 것만은 아니었다. 남자와의 관계를 지속할 수록 비체는 종종 나와 남자의 냄새를 혼동해서 내 발가락을 깨물었다.
남자는 내 엄지발가락에 드레싱을 해주며 저 개새끼를 언젠가 솥에 넣어 버려야지, 하는 끔찍한 소리를 했다.
나는 고모를 점점 더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이 집안에는 사람이 필요했다. 거북한 노인도, 제멋대로인 고모도 괜찮았다. 엄마와 나, 남자로만 구성된 세 명의 집은 부도덕한 공간이었다.
적어도 나는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사람의 정액을 삼키고 있었으니까.
“턱 끝에, 묻었어.”
쉐이빙을 하던 남자가 말했다. 아침부터 들이닥친 남자의 지랄 맞은 성기에 속이 뒤집어져 변기를 붙잡고 있었더니 태연하게 하는 말이 그거다. 신물을 뱉어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개새끼.
남자가 양치 컵에 구강청결제를 희석해 담아왔다. 건네주는 컵을 낚아채 입안을 대충 헹구고 물을 내렸다. 남자가 혀를 찼다.
“턱 끝에 묻었다니까.”
“…나가요, 씻을 거야.”
“미안하지만 여긴 내 방인데?”
다리 힘이 풀려서 복도에 나갈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땀에 축축하게 젖은 앞머리를 넘기며 숨을 몰아쉬었다. 남자가 웃으면서 세면대로 걸어가 제 할 세수를 마저 했다. 남자가 얼굴에 뭔가를 처바르고 머리를 정리할 때까지도 나는 샤워부스 칸막이에 기댄 채 뻗어 있었다.
“출근 안 할 거야?”
“……피곤해요…”
“턱에 묻었다니까.”
“시끄러워요…”
짜증을 내면서 대꾸했더니 남자가 빤히 나를 내려다본다. 시선이 내려꽂힌 뺨이 따끔거렸다. 한 대 패려나. 얌전히 입을 다문 채 있으니 남자가 자박자박 걸어왔다. 흰색 라운드 티셔츠를 입은 목이 먼저 들어온다. 남자가 엄지로 내 턱을 문질렀다.
“자, 깨끗해졌다.”
“……”
“씻겨줄게, 일어나.”
남자가 팔을 잡아 일으킨다. 비틀거리면서 반항했지만 남자는 가볍게 나를 욕조 안에 밀어 넣었다. 자동 센서가 달린 욕조라 저절로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엉덩이와 바지 끝단이 젖었다.
“내가 씻을 거예요.”
“아버지가 씻겨준다니까.”
아버지같은 소리 하네. 샤워기에서 더운물이 쏟아졌다. 바지를 걷고 욕조에 걸터앉은 남자가 내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머리 위로 흐르는 더운물을 받으며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욕조의 물은 허리까지 차올랐다. 몸이 따뜻해지자 아침부터 고생했던 몸이 벌써 피로를 호소했다.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남자가 샴푸를 짜서 거품을 냈다.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흰 거품이 차올랐다. 더운물에 데워진 공기가 청량한 민트 향을 먹어 치우고 무거워졌다. 거품을 머리카락에 문지르며 남자가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뗐다. 쪽, 하는 소리가 들린다. 한쪽 눈을 겨우 뜨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가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툭툭 쳤다. 거품이 묻어 미끈거렸다.
“눈 감아. 옳지.”
더워진 손바닥이 이마를 깔끔하게 쓸어 넘기며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손가락이 들어왔다. 소름이 끼쳐서 무릎에 가만히 얹고 있던 손을 꿈틀거렸다. 기습적으로 오므라들었던 손가락이 다시 천천히 펴진다. 남자는 그 후에야 팔을 움직였다. 꼼꼼하게 두피 구석구석을 문지르고 귀 뒷부분을 긁어낸다. 거품이 관자놀이 쪽으로 흘러내렸다. 간지러운 기분에 흐른 거품을 손바닥으로 닦아내며 욕조의 물에 헹궈냈다. 물이 조금 탁해졌다.
물 위로 거품이 뚝뚝 떨어진다. 남자는 한참 내 머리를 문질렀다. 앞머리를 뒤로 넘기면서 네 손가락이 일자로 길게 선을 그을 때 허벅지가 가늘게 떨려왔다.
욕조 물이 첨벙거렸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남자가 거품이 묻은 손을 물에 헹구고 있는 거 보였다. 깔끔해진 손의 물기를 털며 남자가 내 얼굴을 닦았다.
“…눈 계속 감아야지. 거품 들어가.”
낮아진 목소리가 열기를 품고 있었다. 뭘 할지 뻔히 알면서도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남자가 턱을 눌렀다.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 안으로 축축하게 젖은 혀가 밀려들어 왔다. 연한 살점이 가볍게 치아를 훑고 안쪽으로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들어 올려진 목이 꺾여 아팠다. 욱신거리는 뒷 목에 휘청거리자 남자가 다시 몸을 뒤로 뺐다.
찝찝한 기분에 얼굴을 찌푸리자 남자가 샤워기를 머리 위에 가져다대며 말했다.
“물 튼다.”
곧바로 더운물이 쏟아졌다. 허겁지겁 숨을 참고 고개를 숙였다. 거품이 씻겨져 내리며 옷이 죄다 젖었다. 눈을 꾹 감고 얼굴을 문질렀다. 남자가 구석구석 남은 거품을 전부 씻겨내고 티셔츠를 잡아당겼다. 맨살이 드러나자 본능적으로 몸이 뒤틀렸다.
“하지…”
“그냥 씻겨주는 거잖아. 아침부터 무슨 음란한 생각을 하는 거야?”
음란한 짓을 한 인간은 본인이면서. 억울해서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가 젖으니까 예쁘네, 하고 중얼거리며 입술을 다시 붙여왔다. 입 안을 파고드는 뜨거운 혓바닥은 치약이 닦여 나간 뒤라 청량하고 상쾌한 향을 품고 있었다. 혀끝으로 장난을 치는 것처럼 깔짝거리며 빨아대더니 이내 내 뺨과 뒤통수를 꾹 눌러 잡아당겼다. 남자의 왼손에 들린 샤워기에서는 아직도 더운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등과 뒤통수를 푹 적시며 쏟아지는 물줄기에 결국 남자의 바지도 전부 젖었다.
볼 안쪽과 혀뿌리 쪽을 쓸어낸 남자가 가볍게 입술을 빨고 떨어졌다.
“…레몬 맛.”
구강청결제가 레몬 향이었으니까 그런 것 뿐인데 민망함에 한쪽 눈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남자가 웃으면서 눈꺼풀을 가볍게 소리 내서 빨았다. 더운물에 잠겨 있는데도 오한이 돋았다. 남자가 손을 뻗어 동그란 샤워 볼을 집었다. 남자의 팔을 가볍게 붙잡았다.
“…이제 내가 씻을 거예요.”
“넌 너무 느려서 안 돼. 주영이는 벌써 와 있을걸.”
남자가 바지와 브리프까지 한꺼번에 벗겨내며 웃었다. 절대로 그냥 씻겨만 줄 얼굴이 아니었다. 갈색 눈동자가 온통 성욕으로 반짝거린다. 결국 바디 샤워액이 잔뜩 짜인 샤워 볼과 남자의 손길에 흥분해 몸서리치고 울면서 사정을 한 뒤에야 풀려났다.
욕조에 가득 찬 물에 둥둥 떠 있는 정액과 물을 잔뜩 먹고 가라앉은 옷가지를 보며 엄청나게 화를 냈다. 남자는 웃으면서 제대로 다시 씻겨준 뒤에야 나를 일으켜줬다.
아침부터 한참 난리를 친다고 남자의 옷도 전부 젖어있었다. 커다란 수건으로 내 몸을 덮어준 남자가 욕조의 마개를 빼고 다시 샤워기를 들고 앉았다.
가만히 문턱에 서서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 샤워기로 욕조 구석구석에 물을 뿌리던 남자가 뒤를 돌아봤다.
“안 나가? 그러고 있으면 감기 걸려.”
“…뭐 해요?”
“청소.”
경악스러웠다. 눈을 부릅뜨고 내가 매일 쥐고 문지르는 수세미와 욕조 세척제를 집어 드는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세척액을 뿌리고 수세미로 흉물스럽게 묻어있는 내 정액을 씻어냈다.
“…눈동자가 불순하잖아.”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가 등을 돌리고 내 태도를 지적했다. 불순한 태도에 응징이 뒤따른다는 걸 알았지만 쇼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청소도 해요?”
“너 오기 전까지는 내가 했으니까.”
“…가정부는요?”
“2층은 출입 금지야. 그런데 그년이 씨팔, 2층으로 자꾸 기어 올라오려고 그래서 잘랐잖아.”
남자가 짜증을 내면서 욕조를 문질렀다. 거짓말은 아니었던 듯 남자는 나보다도 익숙한 행동으로 욕조를 차곡차곡 씻었다. 일련의 행동이 물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서 이게 꿈은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도 했다.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거야?”
샤워기를 끄고 제자리에 돌려둔 남자가 걸어와 내가 쥐고 있는 수건을 뺏어 들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수건 끝으로 훔치고 비벼 닦아준다. 물이 튀어 비슷하게 젖은 남자의 티셔츠를 빤히 내려다 바라보았다.
역시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사장이고 이렇게 부유하면서 청소는 직접하고… 하여튼 결벽증. 남자의 밑도 끝도 없는 이상한 기준의 결벽증이 생각나 치를 떨면서 수건을 뺏어 들었다. 돌아서서 굴러다니는 옷을 뒤져 꺼내입는 나를 보더니 남자도 드레스룸으로 걸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1층으로 콩콩 내려갔더니 비서가 소파에서 일어나 남자를 향해 인사했다.
“사장님, 안 그래도 연락을 드릴까 했습니다.”
“아, 누가 좀 미적거려서.”
울컥했다. 미적거리게 한 사람이 누구인데.
“주영이 아침은?”
“사모님께서 주셨습니다.”
비서가 깔끔한 얼굴로 웃으면서 말했다. 주방 쪽을 보자 엄마가 달그락거리며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남자와 내가 늦어지자 비서에게 아침을 차려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 그럼 바로 나가자. 시간이 빠듯하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남자가 먼저 현관문 쪽으로 빠졌다. 남자와 비서를 번갈아 쳐다보다 얼른 주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고무장갑을 끼고 있는 엄마가 나를 돌아보며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엄마, 나갔다 올게!”
“이소야, 아침은?”
“바로 나간대. 미안해.”
엄마가 급하게 접시 위에 있던 전을 하나 집어 입에 넣어준다. 크게 턱을 움직여 씹으며 허리를 한 번 꽉 끌어안고 허둥지둥 현관으로 달려갔다. 남자는 구두를 신은 채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가 오는 휴대폰을 보고 있던 남자가 엄지로 내 입술을 닦았다.
“기름.”
“……”
“신어. 나가자.”
속이 얹힐 것 같았다. 입안에 든 고기 전을 꾸역꾸역 씹어 삼키고 남자의 뒤를 따라 나갔다. 중형 세단에 올라타자마자 비서는 남자에게 오늘 일과에 대해 줄줄 읊었다. 회의, 회의, 회의로 이어지는 일정표를 듣고 속으로 한숨을 푹 삼켰다.
“그런데 도련님.”
남자 앞에서는 도통 먼저 말을 붙이는 일이 없던 비서가 나를 부른다. 고개를 뒤로 돌린 비서가 나를 보며 눈을 반짝거린다.
“오늘따라 외모가 아주 빛이 나시네요. 뭐 하셨습니까?”
“…샤워를, 아침에, 했습니다.”
이를 꽉 깨물고 또박또박 말하자 남자가 큽, 하고 웃음 터지는 소리를 냈다. 비서가 다 알겠다는 얼굴로 싱글벙글 웃었다. 두 남자 사이에 고스란히 껴서 놀림을 받자 분노가 턱 끝까지 차올랐다. 턱과 이에 힘을 줘서 꽉 깨물고 있자 남자가 몸을 기대왔다.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나더니 내 턱 끝을 가볍게 깨문다.
운전기사도 있고 비서도 있는데.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남자가 소리 내서 웃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정말 샤워만 했어?”
정말로 조용하게 속삭인 건데, 주변에 쾅쾅 울리는 것 같아 손바닥에 땀이 찼다.
남자가 손가락을 들어 차창을 가리켰다. 유리에 옆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붉어진 뺨을 한 자라다 만 청년이 어깨를 움츠린 채 앉아 있었다.
“…겁에 질린 얼굴.”
귓가에 입술을 바싹 붙이고, 남자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파리한 안색의 청년이, 나를 본다.
“사정 하기 직전처럼….”
“……”
남자가 창문에 손가락을 대고 길게 그어 내렸다. 주욱, 살갗이 찢어져 내리는 감각이었다.
“그게 날 미치게 해.”
“…조용히 해요.”
“좋아해, 아들.”
“나는 아버지가 싫어요.”
“네 의사를 세상이 들어주기나 했어?”
거칠거칠하고 부드럽다. 살갗을 문지르며 억지로 쾌감을 유도하던 샤워볼의 표면처럼, 남자의 목소리가 고막을 자근자근 긁었다.
“어쩌지, 이소야.”
“……”
“나는 네가 좋은데.”
거울에 비친 남자가 웃는다. 황홀한 얼굴이었다. 고개를 떨어트렸다. 바지를 꽉 붙든 손등에 혈관이 올라와 있었다. 이미 끔찍한 일상을 평범한 척 견디고 있는 것 같은데, 일깨워주면 더 깊은 수렁이었다. 바닥이었다.
남자가 비서에게 명령했다. 이소는 공항으로 보내.
왜 나를 보내냐고 물어볼 틈도 없었다. 차는 남자를 내려주고 나서는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 남자는 내 목덜미를 가볍게 쥐는 걸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비서와 함께 사라졌다. 기사님은 가는 내내 말이 없었다. 유리창 바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낯선 풍경만 실컷 구경했다. 황금연휴를 목전에 둔 공항으로 가는 길은 차량이 많았다.
노인이나 고모가 귀국하는 걸까. 한 달이 지났으니 올 때도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웅을 갈 필요는 없을 텐데. 남자의 의도를 모르니 그저 막연히 인천 공항으로 가는 이정표를 찾으며 시간을 죽였다.
기사 아저씨는 나를 공항 게이트 입구에 내려주고는 곧장 차를 돌려 떠났다. 다행인 건 멍청하게 오래 서 있지 않아도 금방 아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연예인이라는 아우라를 풍기며 태정 씨가 내 이름을 불렀다. 깜짝 놀라 쳐다봤다. 큰 키에 잘 어울리는 카멜색 코트를 걸친 태정 씨가 한달음에 걸어와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친엄마마냥 다정한 몸짓이었다.
“이소, 안녕.”
처음과 비슷한 인사를 건네며 태정 씨가 선글라스 너머로 둥글게 웃는다. 갑자기 안도감이 들어 태정 씨의 허리를 끌어안고 매달렸다. 처음 만났던 날 이상한 쪽으로 성격이 비뚤어진 남자에게 잘못 걸려 혼쭐이 났었지… 우울하게 한숨을 삼키자 태정 씨가 내 어깨를 토닥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 날, 이태한테 혼났다며?”
“네?”
“흠, 기분 나빠서 혼냈으니 너한테 잘해줄 생각하지 말라던데.”
정말 유치하지 않니? 태정 씨가 소리 높여 깔깔 웃었다. 유명 연예인이 공항을 활보하자 카메라를 꺼내 들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흔한 경호원이나 매니저 하나 없이 걷고 있는 태정 씨가 불안해서 팔을 툭툭 쳤다.
“사람들이 봐요.”
“괜찮아, 이제 직원 올 거야.”
말이 떨어지자마자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멀리서 뛰어왔다. 태정 씨가 태연한 얼굴로 내 등에 손을 얹고 직원 뒤를 따라갔다. 엉거주춤 걸어서 한참 걸어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렸더니 직원이 카드키를 대고 문을 열어준다. 태정 씨의 뒤를 따라 쏙 들어가자 작은 라운지가 나왔다.
“뭐 좀 먹을래? 아침도 안 먹었다면서?”
접시를 집어 들고 태정 씨가 나를 쳐다본다.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태정 씨는 두 번 권유하지 않고 자신이 먹을 샐러드와 과일을 좀 담았다. 까만색 묽은 소스를 뿌리며 태정 씨가 자몽을 먼저 포크로 찍어 먹었다. 접시를 꽉 채우지도 않았는데, 새 모이처럼 조금씩 나눠 음식을 먹는다. 한 조각의 두부와 치커리를 동시에 입에 넣으며 태정 씨는 턱을 움직였다.
“휴… 살 거 같네.”
“아침 안 드셨어요?”
“만 하루 만에 먹는 거야. 어휴, 요즘 찍는 드라마 때문에…”
태정 씨는 말을 하다 말고 나를 보며 방긋 웃었다.
“이소한테 할 말은 아니지. 그래, 마음은 잘 먹고 왔어?”
갑자기 마음 타령이다. 분간이 가지 않아 멍청하게 대답도 안 하고 있었더니 태정 씨가 이상한 얼굴을 했다.
“이태가 말 안 해줘?”
“…뭘요?”
“오늘 새벽에 들은 이야기 없어?”
새벽잠도 없는지 귀신처럼 일어난 남자의 성기를 빨고 토한다고 허송세월하였습니다만. 이라고 말할 수 없어 또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이태가 뭐라고 안 해?”
“아니요…”
오늘 남자가 한 이야기는 끽해봐야 좀 더 잘 빨아봐. 맛있어? 눈도 못 뜨고 오물거리네. 따위의 엽기적인 소리였다. 야동에도 나오지 않을 대사를 읊을 수는 없어 얌전히 고개를 저었다. 태정 씨가 음, 하더니 휴대폰을 꺼내 들고 전화를 걸었다. 무딘 신호음이 길게 이어지더니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왜요.]
음성이 커서 휴대폰으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남자였다.
“너 이소한테 설명 안 했어?”
[아… 깜박했네.]
남자가 태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태정 씨가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 눈을 찌푸렸다.
“치매니? 애 심장마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오늘 새벽에 보니까 강심장이던데.]
조금도 죄책감이 없는 목소리로 남자가 떠들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혼자서 이해했다. 눈 떴는데 입 안에 성기가 들어와도 놀라지 않은 강심장이다, 라는 문장을 아주 축소해 말하는 재주를 가진 남자에게 화를 내야 하는지 미세한 프라이버시 존중에 고마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듣고 있지?]
남자가 주어를 빼고 나를 불렀다. 태정 씨가 음량을 좀 더 키워준다.
[내가 까먹었네. 미안해, 아들.]
미안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심드렁하게 남자가 하품까지 하며 말을 이었다.
[누나랑 노인네가 너한테 뭐라고 좀 할 건데, 대충 모르쇠로 넘겨.]
“그렇게 말하면 이소가 쫄잖니.”
[우리 아들은 안 쫄아요.]
남자는 마음대로 아들 운운하면서 남의 간덩어리를 뻥튀기하더니 회의에 참석해야겠다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상황 파악이 안 돼서 눈을 도르륵 굴리다 슬금슬금 태정 씨의 눈을 보았다. 아주 딱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남자에게 당했다는 사실에 분노가 울컥 차올랐다.
멋쩍은 침묵이 이어지더니 태정 씨가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 내가 말해 줄걸. 너한테 직접 연락하면 니가 두 다리로 못 걸어 다니게 될 거라고 그래서…”
“…뭐라고요?”
“어머, 침대 사정을 너무 대놓고 이야기했나. 이해하렴, 원래 늙으면 좀 이렇게 부끄러움을 몰라.”
태정 씨가 호호 웃는다. 침대 사정이라니. 도대체 어디서부터 사고를 고쳐야 할지 몰라 머리를 쥐어뜯으려 손을 바짝 올리는데 등 뒤 문이 벌컥 열리면서 불쾌한 감정을 담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래, 늙으면 부끄러움을 모른다더니 뻔뻔하기도 하지.”
노인이었다.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두툼한 패딩 코트를 두른 노인이 태정 씨를 노려보며 라운지 안으로 들어왔다. 노인의 뒤를 따라 고모가 걸어 들어왔다. 노인과 비슷하게 생긴 패딩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래, 안 나간다 버티던 게 이런 이유였니? 천하기 짝이 없지, 상상을 초월하는구나.”
노인이 하는 말이 날카롭게 살점을 난도질했다. 위장이 콕콕 쑤셔오기 시작했다. 등을 구부정하게 숙인 채로 위장을 움켜잡았다.
간과하고 있던 게 있었다. 소문이 퍼졌다면, 그것도 남자와 그가 들인 양자에 관한 끔찍한 추문이라면 노인과 고모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리 없었다.
나는 집에 돌아온 고모가 비체를 끌어안고 그간 내가 비체를 잘 돌봤는지 날카롭게 추궁할 거라 물었다. 추문을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간만의 귀가를 기념할 것이라고 상상했다. 낯선 공항의 VIP 라운지에서 얼굴을 후려치는 모욕감과 배신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
남자는 새벽에 두 사람의 귀가 소식을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 숨겼다. 나를 덜컥 맨몸으로 보내놓고 태정 씨를 옆에 붙이면 내가 안심할 거로 생각했나? 설마, 그 남자가 나를 위했다면 이 자리에는 나를 숨기고 남자 홀로 왔어야 한다.
“어머, 내 친손자한테 무슨 그런 말씀을.”
“친손자라니, 뻔뻔하긴.”
“호호호. 그럼 이태가 내 친아들이니 친손자 아니고 뭐람?”
“누구 피도 섞이지 않은 건 저 애도 마찬가지야.”
“뭐 어때요. 우리 애가 이소가 자기 아들이라는데.”
태정 씨가 마녀처럼 깔깔 웃는다. 유치찬란하기 그지없는 말다툼이다. 이런 꼴을 구경하라고 나를 공항으로 보낸 건가… 지쳐서 축 늘어져 있었더니 고모가 상황을 보고 있다 두 사람을 저지시켰다.
“두 분 그 정도만 하세요. 송태정 씨 나오신 거 보니까 소문이 진짜는 맞나 보네요.”
“해인이 많이 예뻐졌네.”
“감사해요. 그런데 이소야, 너 정말 이태랑 사귀니?”
냉정하게 대화를 끊어낸 고모가 묻는다. 날카로운 시선이 콧잔등을 긁었다. 노인도 고모도 내게 돈을 제시했다. 집에서 나가라고, 나오라고. 전부 이런 상황을 우려했던 것은 아닐까.
“안 사귀고, 좋아하지도 않고, 사귈 마음도 없습니다.”
“사귀지 않으면 어찌 그런 일을 해? 이태가 품에 끼고 내치지 않을 때 알아봤어!”
누군가가 말릴 틈도 없이 노인이 먼저 내 뺨을 내리쳤다.
“네 엄마는 아내라고 허세를 부리고 오지랖 떠는 일은 없더니, 네가 어딜 쥐새끼처럼 더럽게 굴어.”
“이봐, 애 때리지 마.”
내 뺨을 감싸 쥐고 태정 씨가 눈을 부라렸다. 노인이 기가 찬다는 듯 탄식했다.
“저기요, 송태정 씨. 당신은 내놓은 자식이니 어떻게 살든 즐겁고 재밌겠지. 하지만 나한테도 아들이고 손자야. 사회적인 지위, 신분, 전부 오물을 투척하는 소문에 멀쩡할 수 있을 거 같아?”
노인이 흉측한 분홍색 입술을 쪼그렸다 피며 언성을 높였다. 태정 씨가 바로 맞받아쳤다.
“때리지 않고 말로 해결해. 우아한 척 굴더니 그쪽이 제일 고상하지 못하잖아.”
“당신이야말로 남의 남편이랑 놀아난 주제에 어디서 같잖게 우아한 짓이야.”
더럽다. 난장판이 된 싸움에 태정 씨의 팔을 잡았다.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태정 씨를 말렸다. 화를 참는 듯 몸이 살짝 떨렸다.
“어디 붙어먹질 못해서 남자랑 제 아빠랑 붙어먹어.”
“……”
“남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짓을 한 게 퍼지지 않을 거로 생각하니?”
시선이 따끔따끔했다. 내려간 고개를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네 엄마는 그 사실을 알아서 그리 뻔뻔하게 고개를 드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엄마는 모른다. 숨 가쁘게 집에서 집안일만 해도 바쁜 사람이 엄마였다. 불편한 양부를 따라 출근하는 아들이 안쓰러워 입에 반찬 하나라도 넣어주려 발을 구르던 사람이다.
“…안 돼요.”
“뭐?”
약자에게도 최후의 가시는 있다. 제 살을 깎아 먹는 무기라도 손에 들어야 한다.
“엄마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해주세요. 그럼 저 제 인생 포기하고 전부 퍼트릴 거예요.”
“세상에, 해인아. 저 물건 하는 말 좀 들어보렴. 기가 막히는구나.”
“무슨 말을 하셔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대충 아실 거 아니에요. 강제력을 가진 쪽도 시작한 쪽도 아버지예요. 저는 전부 말할 자신 있어요. 명예 훼손? 고소? 어차피 언론 한 번이면 끝날 텐데요. 아버지가 무슨 짓을 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입이 혼자서 움직였다. 통제를 잃은 언어와 시선이 지저분하게 땅바닥에 처박혔다. 노인과 고모의 표정은 짜증에서 혐오로 변했다. 벌레 같은 것이 수치를 모르고 끝까지 매달린다고 생각하겠지.
“엄마만 모르면 저는 순종적인… 아들이 될 수 있어요.”
나는 안다. 엄마가 어떤 것에 버티고 살았는지 안다. 본인의 가치는 바닥에 떨어트리고 살아도 그게 나쁜 줄 모르고, 하나뿐인 아들은 끼고 안색을 살펴야 구원받는다고 생각한 저의 삶에서, 아들 마저 목이 졸리고 있었다면.
엄마랑 같이 그만할까, 말할 때 고개를 끄덕일걸. 남자의 성기를 빨기 전에 조금 더 일찍 도망가버릴걸. 아차 하는 사이에 물이 목을 넘겼다. 짠 바닷물이 입에 밀려온다. 삼킬수록 해갈은 어렵고 갈증이 더해졌다.
타오르는, 타오르는 기갈에 땀방울이 염분을 짜내 인생의 길에 응축되었다. 곳곳에 소금 기둥이 솟아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방 안을 나왔다. 공기는 오히려 복도가 더 텁텁했는데, 숨이 쉬어졌다. 입을 크게 벌리고 식은땀을 식혔다.
“안색이 안 좋네.”
뒤따라 나왔는지 태정 씨가 나를 끌어안는다. 등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고는 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돌아가는 길은 직원 없이 둘이서만 걸었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길 말고 다른 길이 있는지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고 공항 바깥까지 순식간에 빠져나갈 수 있었다. 보안 직원들은 태정 씨의 얼굴만 보고 길을 내주었다. 부유층의 삶이 부러워 내가 남자를 유혹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뻔한 레퍼토리라 웃음이 나왔다.
태정 씨가 내 어깨를 잡은 손에 꾹 힘을 주었다.
“지금은 네게 져주는 척하겠지만 금방 다시 네 약점을 잡을 거야.”
한참 뜸을 들이고 머뭇거리더니 결심을 한 듯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태정 씨가 눈을 곧게 떴다.
“이태의 권력에 업혀. 네가 당장 이태의 아들로 살 거라면 그 정도는 해야지.”
“내가 아버지 아들로 살기 싫으면요?”
유리창 너머에 있는 익숙한 검은 세단을 바라보며 물었다.
“엿 먹이겠다는 패기는 어디로 갔어?”
“다 좋아요. 아버지 얼굴이 구겨지는 걸 보고 싶기도 해요.”
“오늘 속이 많이 상했니? 이태가 이야기를 안 해줬을 줄은 나도 몰랐어.”
“그런 건 필요 없어요. 그냥, 나는 왜 이 자리에 그 사람이 없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괴로운 말이었다. 남자의 부재를 지적하는 것이 모욕적이었다.
“이건 결국 아버지랑 나의 문제잖아요.”
“이태한테 부탁을 받은 거야. 노인네, 나를 아주 싫어하거든.”
달랜다고 해준 말에 더 속이 쓰렸다.
“태정 씨는…”
품에 끌어안긴 채 겨우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태정 씨가 응? 하고 묻는다.
“태정 씨는… 누구 편이에요?”
울고 싶지 않은데 요즘에는 눈물이 참 많아졌다. 엄마를 닮아간다.
남자를 잘못 만나 팔자를 꼬는 부분에서 특히 그렇다.
“내 편은 엄마뿐이라 엄마를 지키겠다는 건데.”
“이소야, 나는.”
“그렇게 아버지의 아들이 된 건데, 왜 그게 내 약점이 되어야 해요…?”
잃어버리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단단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닌가. 막연한 공포에 질려 태정 씨를 쳐다봤다. 내가 대단히 냉정하게 주제를 찔렀다는 것을 알았다. 태정 씨는 배우의 미소를 지으며 내 눈가를 쓰다듬었다. 매끈하게 올린 입가를 보면 확실히 남자의 친모라는 걸 느낀다.
편안하고 유쾌한 사람이라 마음을 놓았다. 애인과 다정하고, 애틋해 보여 나에게도 그렇게 다정하게 굴어줄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남자도 내게 다정한 척 구는 건 맞았으니까 착각은 나 혼자 한 것이다.
“…글쎄.”
“태정 씨도 몰라요?”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응, 태정 씨가 쓴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잖아요, 그런데 왜 몰라요?”
“나는 걔를 완전히 키우진 못했잖니.”
양육은 중요하다. 태정 씨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너랑 대화하다 보면 왜 이태가 너를 골랐는지는 알 거 같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어깨를 늘어트리고 한숨을 쉬었다. 차를 앞에 댄 기사 아저씨가 나를 부른다. 태정 씨에게 손을 가볍게 흔들어주고는 뒷좌석에 올라탔다. 위장이 꼬여서 허리를 펴고 있을 수도 없었다. 뒤에서 몸을 웅크리고 눕는 나를 보고 기사 아저씨가 안부를 물었다. 대꾸하기도 짜증이나 고개만 저었다.
“회사로 가주세요.”
“병원에 안 가도 되겠습니까?”
“그냥 회사로 가요.”
기사 아저씨는 더는 묻지 않았다. 부드럽게 출발하는 차를 보며 엄마를 생각했다. 하늘이 온통 밝고 깨끗했다. 말하지 못했다. 나도 피해자예요, 나는 불합리한 일을 당하고 있어요. 도와주세요. 나를 욕하기 전에 남자를 먼저 욕해보세요.
세간의 시선은 남자가 아닌 내가 부정하고 잘못을 저지른 것이라 말했다. 고모도 노인도 남자를 욕하기 전에 나를 비난했고 엄마를 두고 협박을 했다.
치마를 입고 걸어갔기 때문에 강간을 유도한 거라고 말하는 성폭행범들의 말과 다를 바가 뭐지.
…약자이기 때문에?
태정 씨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이태의 권력에 업혀. 그 남자야말로 가장 큰 가해자인데 가해자의 품 안에 기어들어가란 말인가.
편안하지만 의미 없는 삶이 될 수는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회사 건물이 숨이 막혔다. 도저히 정문으로는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아 지하로 내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지하 주차장 엘리베이터 앞에 차를 바짝 대고 나서도 내리지는 못했다. 한참이나 배를 끌어안고 쓰라린 위장을 진정시켰다. 식은땀으로 옷이 축축했다. 남자와 다시 논쟁해야 한다는 생각이 장기를 갉아먹었다.
통증은 가시지 않았다. 따끔거리는 윗배가 익숙해졌을 뿐이다. 허리를 펼 수 있을 만큼 익숙해진 뒤에야 차에서 내렸다. 기사가 걱정의 말을 건넸지만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괜찮지 않으면 또 어쩔 것인가. 그냥 뻔한 결론뿐일 텐데. 도망갈 수도 없는 나약한 나와 엄마… 둘 다 남자의 흉계에 유리처럼 깨져버린 지 오래되었다.
갑갑한 공기가 흉통을 조여왔다. 비틀거리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걸어가 사장실 문을 열었다. 남자는 빠른 속도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앞에서 비서의 말을 계속해서 받아 적던 남자가 나를 보더니 손을 멈췄다.
“…해서, 지금 상황에서는 신설보다는 분할 합병으로 가는 것이 주가 면에서나… 사장님?”
“그래.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이소도 왔으니 너는 나가봐.”
“아.”
비서가 뒤를 돌아본다. 소리소문없이 문을 반쯤 열고 서 있는 나를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앞에 놓은 서류를 갈무리해 한쪽에 올려놓고는 내가 잡고 있는 문을 대신 잡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
입술이 바짝 말랐다. 비서도 알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남자에게 주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모든 추문과 내 불행한 하루에 흥미로운 입맛을 다셨겠지. 다들 죄책감은 없을까. 넓고 큰 시나리오에서 나는 남자에게 감정의 여부를 추궁당하는 존재일까. 아주 잠깐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전부 오래되지 않아 새것 같은 기억을 상자 안에 밀어 넣었다. 무거운 문에서 손을 놓고 남자 쪽으로 걸어갔다. 남자는 업무용 안경을 콧잔등 위에 올리고 있었다. 동그란 은색 안경테가 반짝거린다. 모가 나지 않은 흉기 같았다.
“잘 다녀왔어? 멀쩡해 보이지는 않네.”
안색을 훑어본 남자가 툭 말을 던진다. 문장 속에서 불쾌함이 느껴졌다. 나를 향한 불쾌감인지, 노인이나 고모를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마 나라고 생각했다.
“왜 저를 보내셨어요?”
책상을 짚은 채 겨우 버티고 서서 물었다. 회사에서 무난한 시간을 보내며 일을 하는 동안 내가 그의 가족들에게 어떤 모욕을 당할지 걱정은 했을까.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이렇게까지 할 수는 있었을까. 좋아한다고 말해 놓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보다 못하게 나를 바닥에 떨어트려 놓는 게 이 남자의 사랑법인가? 우습다. 애정은 거절하고 분노는 그에 맞춰 하는 내가.
남자가 앉은 채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어른의 손이 내 턱을 가볍게 쥐었다.
“입술이 떨리네.”
“……”
“화가 많이 났나 보다.”
그래, 분노로 정신이 몽롱해졌다. 뜻밖에 살인 충동보단 자살 충동이 더 가볍게 들었다. 나를 죽이거나 해쳐서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은 아닐까. 지금 강물은 차갑고 무겁겠지. 코트가 한기를 시커멓게 먹어치우고 무거워져 나를 강물 바닥으로 내려놓겠지. 내려놓고 나면 가벼워지는 것이다. 추락도 고통도 한순간일지도 몰라. 아무도 모르게 죽고, 봄날 꽃잎과 함께 융화되어 떠오른 시체를 구경시켜 주면 처음 보는 표정을 지어줄지도 모른다.
이게 자신이 바라는 결말이라고 좋아할까. 엄마는 울까. 비명을 지를 엄마를 상상했다. 내 등을 두드리고 어깨를 잡고 울부짖으며 죽고 싶다고 울던 어릴 적 모습이 가슴을 찢었다. 엄마, 엄마…. 내 사랑하는 정혜 씨.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게 집중해.”
턱 끝을 긁고 떨어진 손이 뺨을 가볍게 두들겼다. 폭력보단 정신을 차리라고 하는 행동에 가까웠다.
희미한 시야를 진정시키고 겨우 입술을 움직였다.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왜 나를 혼자 보냈어요?”
“애도 아니잖아.”
“미성년자는 아니지만, 나는 스물둘이에요. 군대도 다녀오고, 술과 담배를 살 수 있는 나이지만 나는 겨우 스물둘이야!”
고함에는 울분이 있다. 남들은 다 가지지 못한 평범함을 모조리 빼앗긴 울분이다.
“그 소문을 내가 냈어? 당신이 냈잖아, 당신 탓이잖아요. 그렇다면 적어도 같이 모욕을 당해야 하잖아…”
“외로워?”
외롭냐니. 나는 웃었다.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 애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 혼자 감당하면 끝일 문제가 아니잖아요. 왜 태정 씨를 보냈어요…?”
좋아한다고 말했잖아. 뒷말을 삼켰다. 그것을 말하는 것조차 굴욕적이었다. 모욕감에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았다.
“너 엄마 좋아하잖아.”
“뭐라고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남자가 안경을 벗고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을 빙 둘러 내게로 다가왔다. 쪼그리고 마주 앉아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길을 잃은 아이처럼 달랜다. 사탕을 당장 꺼내 줄 만큼 부드러워 남자는 잔인한 사람이었다.
“엄마가 있으면 나보다 훨씬 안심할 줄 알았지. 왜 내가 필요해?”
남자는 지독하게 속이 좁다. 나는 얼굴을 가린 손을 치우고 남자의 소매를 잡았다. 남자는 자신의 셔츠를 움켜쥔 나를 보며 미세하게 만족스러운 표정을 그리다 지웠다.
“그건… 2주도 더 지난 일이에요.”
“없었던 일은 아니잖니.”
“태정 씨는, 엄마잖아요.”
“엄마면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
내 가슴을 손으로 더듬어 쓸어내리며, 남자가 검지로 심장이 있는 부위를 긁었다.
“나 역시 아버지잖아.”
“…그 사람은 당신 친엄마야.”
“그래, 네 친엄마는 아니지.”
“당신은 미쳤어.”
정말로 쥐새끼가 된 것처럼 볼품없이 찍찍거리는 소리가 목구멍 안에서 나왔다. 남자가 멈칫하면서 나를 보더니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톡톡 두들겼다. 매끄럽게 타액을 바르고 입 안 혓바닥 중앙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남자의 지문이 장면 장면 혓바닥의 빨판 같은 돌기에 찍혔다.
손을 거둔다. 나는 남자의 지문을 신중하게 삼켰다. 언젠가 쓰일 증거를 모으는 것처럼. 목 뒤편으로 지문을 넘기는 나를 지켜보던 남자가 다시 손가락으로 내 입안을 애무했다. 키스할 때처럼 구석구석 치아 뒤와 혀뿌리를 긁고, 볼 위로 날렵하게 미끄러트리고, 다시 입술을 적시며 남자가 말했다.
“나는 진작 좀 미쳤지. 원래 이만한 규모의 회사는 미치지 않고는 운영을 못 해.”
“그럼, 우리나라는 망했네….”
경제를 대표하는 굴지의 대기업들을 몇 개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침이 입 안에 고이면서 목소리는 다시 정상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남자가 자신의 가슴팍을 더듬거리다 손바닥으로 가만히 박동을 죽였다. 고요하고 평온해 보이는 장면이었다. 나란히 쭈그려 앉은 채, 아이처럼 눈을 감고 자신의 심장 박동을 느리게 만들고 있는 장면이 웃겨야 하는데. 남자의 속눈썹 사이 여백을 헤치고 빛이 물그림자를 만들었다. 집중해서 보고 있으니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가 보였다. 일렁거리며 작은 불빛이 꼬리를 흔들며 공기 중을 헤엄치다 터지는 걸 보았다.
수없이 많은 빛의 분자가 파열하고 경쟁하며 시간을 잡아먹는다.
“너는 신기해.”
한참을 침묵하던 남자가 두 손을 뻗어 내 뺨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언어가 이산화탄소를 머금고 공기와 팽팽하게 부딪친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계에 부딪혀 이성을 잃어버렸을 텐데, 너는 그 와중에도 이성적으로 정확하게 사건을 파악하려고 들지.”
“……”
“그건 대단한 거야. 잘 배우고 자란 대단한 집 자식들도 수두룩하게 이성을 잃거든. 고조된 쾌감, 저하된 의욕. 흥분, 분노, 그런 것 안에서 얼마든지.”
늘 부족하던 칭찬을 받았는데 달갑지 않았다. 손안에 갇힌 얼굴은 숙일 수 없어 눈을 내리깔았다. 내 무릎과 허벅지 사이에서도 빛은 요란하게 터지고 있었다. 어느 곳에서도, 공간만 있으면 틈새를 비집고 와 긴 꼬리를 자른다.
“무엇이 너를 냉정하게 만들었을까?”
남자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스스로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강요받은 부양.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효도에 대한 강박관념. 감정적이고 쉽게 휩쓸리는 엄마를 대신해서 네가 어른스러워야 한다는 신념.”
나를 잘 알아서, 남자가 내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끔찍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버텨내야 했던 이성.”
조금 더 남자가 다정하고, 진심으로 상냥했다면 이 말에 울었을 것이다. 내 상처가 절대 작지는 않을 것이라고, 되물으며 울었을 텐데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손을 올려 남자의 손등을 더듬었다. 차갑고 시렸다. 내 손이 더운지 남자의 손이 지나치게 차가운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말이야, 아들…”
조곤조곤 남자가 나를 부른다. 손을 겹친 채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희고 반듯한 얼굴.
“감성만 남은 네가 보고 싶은 거야.”
“왜?”
정말로 궁금했다. 곤란한 얼굴로 남자가 웃는다. 저 얼굴은 심보가 나쁜 진실을 목전에 둔 것이라는 뜻이다. 재차 물었다.
“왜 하필 그런 게 궁금해?”
칭얼거리는 말투가 귀여운지 남자가 웃음소리를 내며 이마를 비볐다. 손은 지독하게 차가운데, 이마는 따뜻했다. 매끈한 살결이 비벼지고, 뺨을 감싸 쥔 남자의 손바닥이 내 뺨의 체온에 조금 데워져 미지근해졌을 때 남자는 대답했다.
“웃는 너도, 우는 너도 궁금해. 그런데 나한테 웃어줄 것 같진 않으니까.”
절망은 단조로운 곡조를 띄고 있었다. 빗소리와 같았다.
“그러니 화내는 걸 보려고. 그게 우리 관계에는 더 어울리잖아.”
분노하고 소리 지르고 절망하렴.
신이 나에게 최선의 행동을 하라 명령한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 나의 비명을 들어준 적은 있었는가. 인간의 재해는 신에게 귓가가 간질간질한 재채기일 것이다. 세상도 듣지 않는 한 인간의 외로운 목소리를 신은 결코 들으려 하지 않았다. 신도 인간도 혼자다.
“싫어.”
비겁하다. 그러면서 신이라니.
“그런 너를 사랑할 거야.”
“나는 싫어!”
“봐봐, 지금도 결국 내 말대로 하고 있잖니.”
소리 지르고, 분노하고, 절망한다. 남자의 말대로 이성을 한 터럭도 남기지 않기 위해 애쓰다 몸에 힘을 쭉 뺐다. 힘없이 앞으로 내려가는 내 몸을 남자가 바닥에 앉은 채로 끌어안았다.
“나를 아들이라고 부르지 마.”
“너는 내 아들이야. 양이소.”
이 남자가 내 세상의 신이라니, 비겁하다.
“나는 당신 아들 아니야. 당신도 내 아버지 아니야…”
“그럼 네 친부에게 돌아갈래?”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친부의 기억과 계부인 남자가 위협적으로 번갈아가며 어깨를 잡아 눌렀다. 땅, 아니 지하에 내리박혔다.
의자를 바짝 당겨 앉은 남자가 핀셋을 집어 들고 작은 부품을 집어 든다. 접착제를 끝부분에 바르고 거대한 함선 위에 꽂아넣는다. 조각과 조각이 엉겨 붙어 살인 무기를 묘사한다.
“너는 내 아들이야. 피가 섞이지 않은 건 상관없어, 우린 이미 그런 관계니까.”
남자의 언어가 죽창이 되어 나를 내리꽂고 정복된 성을 기념하기 위한 시체처럼 내걸었다. 전시된 나의 몸 위로 빼빼 마른 까마귀가 내려앉았다. 갈고리 같은 발톱을 쑤셔 넣고.
“하지 마……”
끝이 날카롭게 비벼진 핀셋이 갈라진 피부 끝을 잡고 서서히 들어 올렸다. 상처를 겨냥한다. 퉁퉁 부어 있던 심장이 왈칵 진물을 토한다. 피가 아니고 썩은 물이 혈관에 들이찬다. 숨이 막힌다.
토할 거 같아. 남자의 어깨를 밀고 일어나 화장실로 걸어갔다. 몇 번이나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넘어졌다. 남자는 나를 일으켜주거나 부축해서 데려가주지 않았다. 단지 등 뒤에서 나의 분노를 고요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딱딱한 바닥 위에 부딪혀 욱신거리는 무릎을 쓰다듬고, 자력으로 걸었다. 문을 열고 변기를 부여잡고 상처만큼 쓰라린 신물을 뱉어냈다. 아프다, 너무 아팠다.
아침에 엄마가 입에 넣어준 고기 전을 모조리 토했다. 손가락 두 마디도 되지 않을 것 같은 고깃덩어리를 뱉고, 조금 마셨던 물을 토했다. 나머지는 전부 신물이었다. 식도와 기도를 태워버릴 것처럼 고농도의 염산이 거슬러 올라와 나를 괴롭혔다. 아, 나는 뚜껑에 머리를 처박으며 괴로워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쪼개진 기분이었다. 반으로 몸을 갈라내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곪은 냄새가 났다. 악취였다. 찝찝하고 구역질 나는 냄새가 나에게서 피어났다.
스트레스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갑갑해. 누가 날 좀… 구원해줘.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오랫동안 화장실에서 미적거렸던 모양이다. 남자가 짜증을 내면서 따라 들어왔다.
말없이 남자를 돌아보았다. 내가 올린 걸 보고 눈을 찌푸리더니 세면대에서 구강청결제를 따른다. 아침과 똑같이 내미는 희석된 물을 입에 넣고 헹궜다. 목젖을 물줄기가 때리자 다시 구역질이 나왔다. 물을 모조리 변기 안에 뱉어내고 레버를 당겼다.
“목이 아파.”
이게 구원받을 일인가.
스스로 되물어보며 남자를 보았다. 황폐한 시야에서 신형은 선을 따라 그려둔 것처럼 빛이 나고 있었다.
계부와 양자 사이에 더러운 육체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 구원을 빌만한 일일까.
“아파요…”
남자가 허리를 숙이고 내 눈을 꼼꼼하게 쳐다보았다. 젖은 입술을 움직여 재차 말했다.
“아파…”
깨어나고 싶지 않은 잠을 자고 싶었다.
“많이 아파?”
다정하게 변한 목소리가 팔을 뻗어 나를 끌어안는다. 품에 안겨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완벽하면 좋을 텐데. 완벽하게 나를 보호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 집착과 정성에 힘입어 노력이라도 했을텐데.
치졸한 감정도 동정도 움직이지 않는다. 남자는 그게 자신의 사랑이라고 말해온다.
“병원에 가자.”
몸이 들어올려진다. 정말로 싫어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이 끔찍하지만 탈출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혀를 살짝 내밀어 공기를 핥았다. 먼지의 맛이 났다. 악취, 매연, 곰팡이, 담배, 오래된 가구의 냄새가 났다.
내가 피해자거나 가해자라거나 하는 건 상관없는 구분이라고,
질타하는 맛이 났다.
차로 병원에 옮겨지는 동안 한 차례 더 토했다. 비싼 가죽 시트에 토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장이 배배꼬이는 통증에 위를 부여잡고 울었다. 남자는 그제야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기사를 독촉했다.
병원에서 난리를 치며 정밀 검사를 받은 것 치고 진단은 간단했다. 위경련. 스트레스와 불규칙한 식습관, 습관적 구토가 원인이었다. 만성 위염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말과 함께 약을 처방받았다. 의사는 내게 상습적으로 토하는 버릇을 고치라고 말했다. 최근 조금만 속이 불편해도 억지로 올려버리긴 했다. 아마 성기를 핥으면서 생긴 버릇일 것이다. 위염이 역류하면 식도까지 전부 상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고치진 못할 거로 생각했다.
진료실 벽에 붙어있는 거울에 하얗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 퀭한 얼굴을 들여다본 의사는 며칠 입원해서 쉬는 것을 권유했다. 노인과 고모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느니 병원에 처박혀 있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반항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가지 입원 처리를 대신 진행한 남자는 나를 병실로 보내놓고 업무 전화를 받는다고 잠깐 자리를 비웠다.
병원에서 준비해준 죽을 억지로 삼킬 때까지도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낯익은 익숙한 병실에서 혼자 바깥 풍경을 보다 약봉지를 뜯었다.
알약을 입에 넣고 나서야 물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팔에 꽂힌 링거가 거치적거린다. 입 안에 고인 약의 쓴맛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쓰며 얼굴을 찌푸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입 안에 약을 머금은 채 남자를 맞이했다.
“표정이 왜 그래?”
들어온 남자가 묻더니 침대 테이블에 굴러다니는 약을 보곤 알 것 같은 표정을 했다. 냉장고를 열고 물병을 꺼내 내민다. 받아 들다 말고 무의식중에 입 안에 녹은 알약을 꿀꺽 삼켰다. 물 없이도 생각 외로 먹을 만했다. 요즘 약은 쓰지 않은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귀한 놈들이 먹는 약은 맛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모양이었다. 뚜껑도 따지 않고 남은 알약을 입에 털어놓고 씹었다. 쓰진 않았다. 단단한 알약이 으스러지며 알알이 가루가 되는 감촉만 느껴졌다.
남자가 눈을 찌푸리며 물병을 뺏어 들고 대신 뚜껑을 따 내밀었다.
“마셔. 안 써?”
“안 써요.”
입 안에 남은 알약의 잔해를 혀로 쓸어 삼키며 대꾸했다.
“그럴 리가.”
“진짜 안 쓴데…”
내 주장에 남자가 약 봉투에 남은 가루를 손가락으로 쓸어 핥았다. 남자가 미간을 확 구겼다.
“쓰잖아. 혼날래?”
“…안 쓰다니까요.”
“입맛도 이상하긴.”
타박하며 남자는 말없이 옆쪽에 있는 책상으로 가 노트북을 켰다. 일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바쁘면 회사로 돌아가면 될 텐데, 괜히 남아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입 안에 까끌까끌하게 남은 약의 거친 감촉을 느끼며 침대에 누웠다. 남자는 눈앞 쪽을 지그시 누르며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잠잠해진 시간이 이상했다. 감정이 격렬하게 요동치고, 바닥까지 생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원래대로 돌아왔다. 멀쩡하게 복구된 것 같은 세상에서 난파된 건 가라앉은 지 오래된 것처럼 색이 바랬다.
모로 돌아누워서 바늘이 꽂혀 들어간 손등을 조심스럽게 내려두고는 남자를 불렀다.
“있잖아요.”
“왜.”
“어릴 때 뭐 하고 살았어요?”
“아직 대낮인데.”
베갯머리 송사라도 하냐는 남자의 대꾸에 화를 내기보단 픽 웃었다.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났더니 또 속이 잠잠해졌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남자는 다시 모니터 안의 내용에 몰두했다. 끝없이 타자를 치다 전화를 들어 사람을 깎아 내리는 말을 사정없이 퍼붓고는 또 타자를 친다. 마우스가 딸각거리고,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깜박거렸다.
평범한 대화를 시도하려 해봤던 게 바보 같다. 그냥 회사로 가버리지. 결국 아픈 것의 원인도 남자인데 뭐가 좋다고 말을 걸었을까. 나는 머저리였고, 남자는 좀 더 똑똑한 미저리였다.
“왜 골이 난 표정이야.”
끝도 없이 모니터를 보고 있으면서 언제 내 표정은 봤는지 모르겠다. 말없이 이불자락을 쥐고 있자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구둣발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웅크렸다.
남자가 가슴 쪽에 있는 이북을 끌어올려 목까지 덮어준다. 침대에 걸터앉은 남자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간지럽힌다.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건데?”
“……”
“한 번 이야기했잖아, 어릴 때부터 공부만 했다고.”
“뭘 했길래…”
좁은 속이 이제는 좀 풀렸는지 다정한 척 구는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사람이 비뚤어졌나 싶어서요.”
“천성은 무시 못 하는 거야.”
자신이 비뚤어진 걸 인정하는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남자는 집요하게 다시 내 머리카락을 한올 한올 비비듯 문질렀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나는 어릴 때를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생각했는데요, 의외로 기억 못하는 게 많더라고요.”
“뭘?”
“아버지가… 그러니까, 친아버지가 나한테 씨발놈이라고 했나, 걸레 새끼라고 했나. 그런 말을 했대요.”
“흠.”
“지금 생각하니 틀린 말은 아니네.”
말하고 나니 어이가 없어서 웃었더니 남자가 혼이라도 내는 것처럼 가볍게 뺨을 쳤다. 손등으로 내리쳐 아프지도 않았다. 그냥 툭 하는 느낌만 있었다.
실제로 나는 노인이나, 회사 사람들에게 어디서 굴러먹던 건지 모를 인간이었으니까. 친아버지는 매일 엄마와 나에게 왜 태어났느냐고 구박을 했다. 자신이 골라 결혼한 여자와 그 여자의 아이인데도. 이상한 사람이다.
가정폭력이라는 건 정말 이상한 폭력이다. 일생일대의 신중한 선택과 피가 반이 섞인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고 깔아뭉갠다.
“엄마는 그때 진짜로 걸레를 빨고 있었는데, 남편이 초등학생인 아들한테 그런 말을 하니까 못 참고 튀어나와 걸레 빨던 물을 뒤집어 씌웠대요.”
“응.”
남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감성이 폭발하는 새벽도 아니고,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슬픔이 터져 나오지 않고 옹글옹글 맺혀있어 굳어버린 것 같다. 딱딱하게 굳은 화석을 보며 이건 고대의 생명체야, 라고 말하며 삼켜진 생명의 비운을 호기심 넘치게 구경하는 것이다. 내 이야기고 내 아픔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아야만 한다고, 그렇게 살았다. 또래보다 어른스럽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조금 더 다채로운 일들이 많았을 뿐이다. 그래서 내 성격이 조금 다르다면, 남자도 비슷하겠지 하는 생각은 했다. 그의 이상한 가족사처럼.
“아버지는 그러자 그 자리에서 엄마를 끌고 가 때렸다는 거예요.”
“그렇군.”
“나는 그 기억이 없어요.”
“사람은 정말 끔찍한 건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엄마가 나중에 말했어요. 너는 그때, 네 방으로 돌아가 문을 잠가버렸다고. 나는 진짜 기억이 안 난단 말이에요…”
“어릴 때니 충격이 컸을 수도 있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 남자가 이불을 들어 올리고 내 옆으로 들어왔다. 침대가 워낙 커서 불편하지는 않았다. 갑자기 셔츠에 양복바지 차림으로 들어오는 게 의아했을 뿐이다.
링거 바늘이 꽂힌 손등을 조심스럽게 옮긴 남자가 팔베개를 해주는 것처럼 나를 끌어안았다. 누가 들어와 보면 어쩌나 싶다가도 이미 다 펴진 소문인데 무슨 상관인가 싶어 고개를 괬다.
남자의 행동에 위로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동정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단지 그뿐이다. 남자의 생각처럼 단지 내가 불행한 환경 탓에 냉정해진 것이라면, 조금 다르지 않겠냐고.
불같은 감정도 분노도 억울함도 소멸이 될 만큼 가혹했다고, 돌려 돌려 말을 하는 것이었다.
“서운하다고 했어요. 다른 집은 그렇게 되면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데 나는 그러지 않아서, 엄마는 너무 아프고 무서웠대요.”
“그렇군.”
나를 가볍게 품 안에 끌어안은 남자가 이마를 가만히 마주 대고 숨을 쉬었다. 맞물리지 않았던 호흡이 점점 더 같아졌다. 동일하게 들이쉬고 내뱉는 호흡을 공유하고, 이산화탄소와 산소를 일정하게 섞었다.
“네가 만약 내 입장에서, 노인네 아들로 살았으면 달라졌을 거 같아?”
인생이나 운명이 쉬워 보이냐고 남자가 나의 말을 꼬집었다. 마음이 아픈데 입술이 세게 비틀린 통증이 왔다.
“천성이라고 그랬잖아, 아들. 내가 만약 네 친부의 아들이었다면 나는 그 새끼를 이미 찔러 죽였어.”
“끔찍한 소리 하지 마세요.”
“정말이야. 그렇지만 감옥에 가진 않았겠지. 치밀하게 준비해서 죽였을 테니까.”
거짓이 없다는 것처럼 남자가 시선을 맞춰온다. 이마를 맞대고 있어 시선의 거리는 끈이 바짝 조여진 운동화처럼 갑갑했다.
“엄마를 외롭게 한 벌을 받는 걸까요?”
“벌이라…뭐, 나는 네가 내 아들이라는 게 벌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데.”
“충분히 벌이에요. 천벌.”
“그런 말 하면 상처받아.”
“받으라지, 어차피 이러고 있는 것도 천벌인데…”
힘없이 중얼거리며 남자의 몸에서 떨어졌다.
“가끔 되게, 내가 엄마나 아빠의 자식이 아니었으면 정말 어떻게 살았을까 싶어서…”
남자가 손을 들어내 눈가를 닦아냈다. 차가운 엄지손가락이 닿자 얼굴이 후끈거린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당신을 만날 일도 없었잖아요.”
“과거는 돌이킬 수 없어.”
“돌이키면 안 되나요?”
“미안하지만, 나는 너를 버려줄 생각이 없어.”
“나는 싫은데.”
“네 멍청한 아버지랑 다르거든. 아… 어떤 부분에선 똑같나.”
“나 때렸잖아요. 똑같아요.”
초반에 남자가 나를 아주 신명 나게 두들겨 패던 시기를 지적하자 남자가 씩 웃는다. 눈을 감았다 떴다. 남자는 다시 무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그땐 너랑 이럴 생각까진 없었는데.”
“진짜로요?”
“좀 예뻐서 뽀뽀는 하고 싶어했지.”
“이거나 그거나.”
비정상적인 남자의 사고를 지적하자 남자가 다시 힘껏 힘을 줘 눈가를 문질렀다. 눈물이 풍선처럼 터졌다.
“당신이 정말 싫어요.”
“왜?”
“돈은 좀 없고 아빠 없이 살아도 행복했는데, 당신 때문에 이제 그것조차도 없으니까.”
“죄책감이 들진 않는데, 어쩌지.”
“그런 게 있기는 해요?”
내가 아플 때는 많이 봐주는 남자의 태도를 이용해서 나는 실컷 지껄였다. 개새끼, 죽어. 나쁜 놈. 나를 그렇게 걷어찼잖아. 당신 구두코가 내 명치를 찍었을 때는 진짜 죽는 줄 알았어. 악담과 과거의 맺힌 응어리가 줄줄이 링거액처럼 떨어졌다.
무수히 많은 상처와 새로 생긴 상처가 결합하고 짜여 거미줄이 되었다. 나는 거미다. 거미줄에 매달려 살아야 하는 거미였다. 다른 곳으로 떠나도, 거미줄을 길게 엮어 낙하산처럼 매달고 떠난다.
짜진 거미줄에서만 먹이를 구하고, 집으로 삼고, 함께해야 한다. 상처를 방관하고 방치하며 안일하게 살 수는 없다. 남자가 나의 상처에 시선을 두고 흥미를 느꼈던 것처럼.
“엄마가 밉다.”
투정을 부렸다. 아파서 그런 거라고, 힘들고 지쳐서 남자에게나마 이런 말을 하는 거라고 위안하며 눈을 깜박거렸다. 커피 맛 사탕처럼 동그란 남자의 눈동자가 보였다, 보이지 않았다 했다.
“엄마만 아니었어도 나는 행복했을 텐데…”
“정혜 씨 알면 슬퍼하겠네.”
“말하지 마요. 말하면 안 돼요. 엄마는, 우리가 이러는 거 몰라야 해요.”
울기 시작하는 나를 토닥거리며 남자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아파서 그런가, 어리광이 심하네.”
모진 말과 끔찍한 행동과 다르게 남자의 손길은 다정했다. 목소리도 그랬다. 녹아버릴 듯 다정한 분위기로 날카롭게 상처를 주면서 어리광을 부리는 걸 사랑스럽다는 듯 받아준다. 엄마가 밉다, 남자는 증오스럽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미워서 코를 훌쩍거렸다.
남자의 손가락이 입술을 문지른다. 아랫니를 슬쩍 건드리는 손끝을 물어 당겼다. 딱딱한 손톱이 입천장을 툭 친다. 증오를 담아 남자의 손가락을 꽉 깨물었다. 세게 물었으니 아플 텐데 남자는 화를 내지 않았다. 잇자국이 진하게 남을 때까지 자신의 손가락을 물려주곤 한참을 기다렸다.
정상적으로 다정하고, 정상적인 애정을 주었으면 나이 차이가 적어도 애틋한 부자지간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스물둘이 아니라, 열둘, 아니 그 이전으로 돌아가 애처럼 아버지, 하고 허리를 끌어안았을지도 모른다. 남자가 내게 이성적인 감정을 말하지 않았어도.
아버지가 가지고 싶었지, 정상적으로 엄마가 의지할 수 있는 남편을 찾는 것을 기다렸지, 이런 최악인 남자가 등장할 줄은 몰랐다. 예측할 수 없는 삶이었지만 너무하다. 다들 당연하게 손에 쥐는 것도 없어 애를 쓰고 있었으면 한 번쯤은 좋은 일이 있어야 사람이 열심히 살 것 아닌가.
노력도 해보고, 즐겁다고도 생각해보고. 달고 짜고 쓴 맛을 전부 배웠으면 원초적인 감정만 남아버리지는 않을 텐데.
“배고파.”
“배고파?”
남자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되묻는다. 대충 몇 숟갈 뜨다 울었더니 위가 텅 빈 기분이었다. 될 대로 되라는 기분으로 한껏 성질을 냈다. 되는대로 감정을 소모하는 게 나았다. 채워봐야 쓰레기가 되어 엎어지니까 담아둘 기력이 없었다.
“아프고, 배도 고파.”
“배고프면 뭘 먹어야지.”
내 마음 같은 건 조금도 모를 남자가 몸을 일으켜 벽에 달린 너스콜을 눌렀다. 한달음에 달려온 간호사는 식사를 준비해달라는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쟁반 위에 죽이 차려졌다. 좀 전에 먹다 말았던 죽과 달리 채소가 썰려 들어갔다는 절 제외하면 똑같은 죽이다. 돈까스 먹고 싶은데. 퉁퉁 부은 얼굴로 죽을 휘휘 저었다. 덩달아 내 앞에서 죽을 뜨던 남자가 눈썹을 힐끗 들어 올렸다.
“음식으로 장난치지 말고 먹어.”
“죽 싫은데…”
“먹어.”
말없이 숟가락으로 크게 떠서 입 안에 넣었다. 묽은 죽을 떠넘기자마자 눈이 확 찌푸려졌다. 으, 몸서리치자 같이 죽을 한 숟갈 삼키던 남자가 또 미간을 찌푸린다.
“왜 그래?”
“간이 안 돼 있잖아요. 맛없어…”
남자가 내 그릇에 담긴 죽을 조금 떠서 맛을 봤다.
“충분한데. 짜게 먹어도 안 좋아.”
“진짜 밍밍하단 말이에요. 야채죽이면 소금이라도 넣어주지.”
“간 되어 있다니까.”
짜증을 내는 나를 달래던 남자가 손을 멈칫하더니 나를 본다. 먹다 말고 왜 그러나 싶어어 멀뚱히 남자를 마주 보았다. 남자는 잠깐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들기더니 반찬으로 나온 젓갈을 집어 내 입에 넣었다. 본능적으로 젓갈을 꿀꺽 삼켰다.
“……”
순간적으로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 말 없이 침을 삼키는 나를 보고 남자가 수저를 쟁반에 내려놓았다.
“너, 맛 느껴져?”
“……”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빨간 양념에 절인 젓갈은 누가 봐도 짠맛이 날 음식이었다.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남자는 지체없이 일어나 병실에 딸린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최 선생님. 접니다.”
이번에는 의사 선생님이 달려왔다.
미각을 잃었다. 지극히 단순한 명제였다. 소금과 설탕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다. 쓴맛과 신맛도 마찬가지였다. 조미료를 입에 털어 넣어도 혀에서는 아무 자극도 없었다. 이비인후과를 담당하는 다른 의사가 달려와 이런저런 검사를 거쳤지만 아무 증상도 없었다.
남자가 그렇게 당황한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통각으로 매운맛을 구분하는 것 말고는 그 어떤 음식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 입 안에 물질이 들어오고, 감촉이 느껴지는 것은 있었다. 가시와 음식을 구별해서 거를 수도 있었지만, 맛은 없었다. 무색무취를 씹는다는 게 어떤 건지를 처음 알았다. 후각에도 문제가 생긴 것은 당연했다. 이 상태로 군대에 갔다면 화생방 훈련에서 나는 살아남았을 텐데. 뭔가 억울해지는 순간이었다.
의사는 오직 정신적인 문제라고만 이야기했다. 스트레스. 급작스럽게 찾아온 상실에 남자는 크게 화를 냈지만, 분노가 미각을 돌려주지는 않았다. 어차피 남자로 인한 문제가 아닌가. 우왕좌왕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혼자 태연했다.
놀랐던 것은 미각을 잃을 만큼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혓바닥을 자극하는 미뢰의 존재 가치가 사라지면서 남자는 다정하던 모습을 벗어 던지고 온종일 짜증을 냈다.
“스트레스로 아가리가 병신이 되면 이 세상 직장인들은 다 미맹입니까.”
“저희도 드릴 말씀이….”
“제가 이런 말이나 듣자고 여기에서 몇천을 쓰는 게 아닙니다.”
남자의 지랄에 병실 구석에 있는 접객용 테이블은 뒤집어진지 오래였다. 남자가 의자에 앉아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링거 바늘을 제거해서 자유로워진 손등을 꾹꾹 눌렀다. 링거액이 혈관 바깥으로 빠져나와 손등이 미묘하게 부어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남자 앞에서 최선을 다해서 치료하겠다는 말만 반복했고, 남자는 계속 꾸역꾸역 유치한 짜증을 부렸다. 미맹의 원인이 남자에게 있는 것 같은데 의사를 욕해서 무슨 소용인지 모를 일이다. 자신이 깔끔하게 내 인생에서 꺼져주면 될 일인데 미련하고 무식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일주일쯤 입원하기로 했던 일정은 무기한으로 미뤄졌다. 남자는 내 꼴을 보기만 해도 짜증 나는지 입원 기한을 늘리자마자 코트를 들고는 사라졌다. 싸늘한 그림자가 길게 꼬리를 물고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솔직히 안도했다. 이제는 남자의 좆을 빨 때마다 정액의 맛을 참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음식의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보다 그게 더 나은 일이었다. 정액의 질감쯤이야 참을 수 있었다. 억지로 변기를 붙잡고 속을 게워내며 끔찍한 역류를 반복하지 않아도 되겠지. 고개를 늘어트리고 의미 없이 뒷목을 긁었다. 서늘했다.
집에는 어떻게 이야기를 했는지 엄마는 열심히 공부하라는 문자를 보냈다. 대충 장단을 맞춰서 외워야 할 게 너무 많다고 징징거리는 답장을 보냈다. 엄마는 내가 집을 떠나 있는 것에 오히려 안도하는 눈치였다. 엄마도 그 집에 답답한 건 마찬가지겠지.
다시 노인과 고모가 돌아왔으니 집안일은 많아질 것이고, 혹여나 돌려가며 남자와 내 사이에 대해 언질을 주지는 않을까 신경이 곤두섰다. 위염 치료나 받으며 하루를 보내는 사이 맥없이 크리스마스가 지나갔다. 기대한 건 아니지만 올해 크리스마스도 엄마에게 케이크 한 조각 사주지 못했다는 게 흉통으로 다가왔다.
병원에서는 딸기가 올려진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선물이라고 사탕과 함께 주었다. 맛도 느껴지지 않는 걸 왜 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고맙게 받는 척했다.
긴 겨울 연휴는 엄마에게 하루에 한 번 전화하는 거로 집안 분위기를 살피는 것을 대신했다. 엄마는 여전히 순하기만 한 목소리로 내 끼니를 걱정했다.
식사는 늘 완벽했다. 영양소가 균형을 이룬 식사가 끼니에 맞춰서 준비되었고 간식도 나왔다.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만 제외하면 100만 원 가까이 하는 입원비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호사스러웠다.
남자는 저녁이 아닌 아침마다 병실에 들렀다. 무슨 수를 쓰는 건지 잠에서 깨기도 전에 완벽한 정장 차림으로 코트까지 걸치고 앉아 있다, 깨어난 내 입에 유리병 안에 들어있는 사탕을 물렸다. 병원에서 주었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자동적으로 침이 고이는 사탕을 빠는 나를 지켜보며 무슨 맛이 나는지 물어보는 거로 아침 인사를 대신할 정도였다.
“안 나?”
“네.”
“씨발, 뱉어.”
“왜 뱉어요. 더럽게.”
볼 한쪽에 사탕을 밀어 넣고 우물거리며 대답하자 남자가 미간을 확 구겼다. 무거운 사탕 병을 테이블에 거칠게 내려둔 남자가 내 턱을 붙잡고 다짜고짜 입을 맞췄다.
날렵하게 파고든 손이 침이 고인 입 안을 휘젓는다. 두 손으로 남자의 어깨를 퍽퍽 내리쳤다. 사람이 반항을 하거나 말거나 남자는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와 내 입술을 삼켰다. 목에 걸린 회색 머플러가 내려와 내 목덜미를 가렸다. 간질간질하다, 남자에게 혀를 빨리며 침을 겨우 삼켰다. 한쪽 뺨에 꽉 물고 있던 사탕을 남자가 문질렀다. 얼얼한 뺨의 피부를 혀끝이 살살 녹인다. 달라 붙어있을 단맛을 지워내려고 애를 쓴다.
“으…”
그 집요한 입 안의 애무가 지겹도록 익숙했다.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한 난폭한 인간이 사탕을 뺏어 가버리는 것이다. 줬던 사탕을 빼앗다니, 하여튼 성격도 더럽다. 저 성격으로 어떻게 다정한 말투를 구사했지.
입 안에 있던 사탕을 가져간 남자가 어금니로 사탕을 와작와작 깨 먹었다. 남이 빨던 걸 먹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결벽증이 있으면서 이상하게 비위가 좋았다.
목을 덮은 머플러를 치우고 힐끗 남자를 올려보며 말했다.
“성격도 나쁘긴.”
“뭐?”
“아버지 성격 나쁘다고요.”
남자가 어깨를 누르며 웃었다. 오랜만에 보조개가 패었다. 욕을 들었는데도 기분이 좋아 보인다.
“출근해야겠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 위에서 일어나 침대 밑으로 가볍게 내려갔다. 구둣발 소리가 경쾌하다. 구겨진 이불을 바로 펴고 침대에 기대앉아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왜?”
“담배나 주고 가세요.”
왜 병원에 입원을 하면 담배가 피우고 싶은지 모르겠다. 남자는 나를 나무라거나 혼을 내지 않았다. 코트 안주머니에 있는 담뱃갑과 라이터를 통째로 꺼내주며 남자가 손톱을 세워 내 뺨을 가볍게 긁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적당히 펴. 어린 나이에 많이 피우면 안 좋아.”
“진짜 아버지 같은 대사네.”
“아버지니까.”
묵직한 은색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 뚜껑을 열면 자동으로 불이 켜진다. 담배를 하나 빼 물고 불을 피웠다. 연기가 올라가고 묵직한 기체가 입을 채우는 게 느껴졌다. 여전히 맛은 없었다.
입 안에서 연기를 우물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입원은 했지만 나는 자유로웠다. 외출을 할 수도 있었고, 남자는 아무런 숙제도 주지 않았다. 읽어야 하는 책도 없었고 원하면 인터넷을 실컷 할 수도 있었다.
담배를 물고 며칠 전 깔았던 온라인 게임에 접속했지만, 한 시간도 하지 않고 껐다. 옛날에는 피시방에서 밤도 새 봤는데, 게임이 이렇게 재미없어지다니 이상하다. 머리를 긁적이며 담배만 뻑뻑 피웠다. 남자가 주고 간 담뱃갑에서 반을 넘게 비웠다. 갑자기 너무 많이 피웠는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온몸에 담배 냄새가 절어 있을 것 같아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 다음 샤워실로 들어갔다. 욕조에 물을 가득 받고 옷을 훌렁 벗어 던졌다. 욕조 선반에는 이런저런 용품이 잔뜩 갖춰져 있었다. 킁킁 냄새를 맡아봤지만 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통에 쓰인 글자를 읽고 상쾌한 허브향, 이라고 적혀있는 입욕제를 물에 집어넣었다.
물이 연한 녹색으로 물들었다. 어떻게 보면 녹차에 몸을 담근 기분이다. 욕조 가득 물을 꽉 채우고 몸을 기댔다. 향과 맛이 없는 세상이 아직 적응되지 않는다. 어느 순간 갑자기 진한 꽃향기가, 매운 냄새가, 몸을 먹은 담배 연기가 느껴질 것 같았다.
남자의 몸에 들려서 핥았던 죄책감의 맛처럼.
눈을 감고 느슨하게 기대 있는데 욕실의 문이 열렸다. 회진시간인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는데 남자가 서 있었다. 달려왔는지 얼굴이 발갛게 익어 있었다. 가쁜 숨을 내쉬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놀라서 눈을 깜박거렸다.
나를 가만히 살피던 남자가 입고 있던 코트와 정장 재킷을 벗어 던지고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욕실에 들어오기 전에 확인한 시간이 오후 한 시였다. 몇 시간 만에 들이닥친 남자를 보고 머뭇거리다 물었다.
“뭐에요, 갑자기.”
“니가 목욕을 한다길래.”
“…진짜 변태예요?”
경악했다. 남이 목욕을 한다고 회사에서 이까지 찾아오다니. 남자의 이해 불가능한 행동에 넋을 놓고 있으니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났다. 남자가 손을 욕조 안에 넣고 있었다. 몸을 빼기도 전에 발목이 잡혔다. 와이셔츠 소매를 깔끔하게 걷어 올린 남자가 내 발을 쭉 잡아당겼다.
“이거 놔요!”
“물 튀기지 마. 젖잖아. 머리만 감겨줄 거야.”
믿을 수가 없다. 젖은 머리에 사이로 다시 물을 뿌리며 남자가 샴푸를 짜냈다. 결국 강제로 등을 돌리고 앉았다. 남자는 불편하게 허리를 숙이고 내 머리카락 사이 구석구석 샴푸 거품을 문질렀다.
“담배 냄새 나.”
“…음.”
나긴 나는구나. 민망해서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적당히 피랬더니.”
“뭐…”
깔끔하게 이마를 쓸어 올리며 머리를 넘긴 남자가 정수리를 꼼꼼하게 문지르며 다시 선을 따라 머리를 감겨준다. 단단한 손마디가 간지러운 부분에 닿을 때마다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눈이 가물가물 감겼다.
남자는 오래도록 내 머리를 문질렀다. 샴푸 거품이 한창 터질 때까지, 흰 거품이 남자의 팔에 가득 묻을 때까지.
그 꼼꼼한 손길을 가만히 느끼다 먼저 샤워기를 들었다. 뜨거운 물이 남자의 손을 씻기며 조금 식은 욕조 안을 다시 데웠다.
“왜 갑자기 잘 해줘요?”
“아들이니까.”
“거짓말.”
나는 단정 지었다. 남자의 손이 조금 느려졌다. 이마선을 따라 그리는 손가락을 느끼며 조용히 설명했다.
“내가 목욕 같은 거 한다고 올 사람 아니잖아요.”
“뭐…”
“왜 왔어요?”
“사람은 갑자기 상실감을 느끼면 자살 충동을 쉽게 느껴.”
성실한 답변이다.
“내가 자살이라도 할 거 같았어요?”
녹색이 점점 연해지는 걸 보며 물었다. 남자가 내 귓불에 묻은 거품을 닦아내며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죄책감은 없다면서요?”
남자는 샤워기를 뺏어 들고 내 머리 위에 물을 뿌렸다. 거품이 흘러내려 눈을 감았다. 얼굴 가득 흐르는 샴푸 거품에 손을 들어 눈과 코를 막았다. 푸우, 물 사이로 숨을 쉬었다. 남자는 머리카락 사이에 남아있을 샴푸의 잔여물을 헹궈내며 마지막으로 내 목덜미를 문질렀다.
“없지. 하지만 네겐 애정이 필요하니까.”
“……”
“그래서.”
“그러면…진작 잘 해줬어야죠.”
간단한 결론을 언급했다. 남자는 자애로운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잘하려고 도시락 가져왔어.”
“…밥 먹었는데.”
“먹어.”
잘한다는 기준이 뭔지 모르는 사람은 확실하다. 맥없는 웃음을 지었다. 남자는 내 머리를 한번 문지르고는 욕실을 먼저 빠져나갔다. 거품이 희석돼 뿌옇게 변한 욕조 속에 좀 더 앉아있다 일어났다.
몸을 헹구고 옷을 걸치고 나갔다. 남자는 테이블 위에 도시락을 꺼내놓고 있었다. 보온 도시락통이 어쩐지 익숙하다. 저것 때문에 쫄쫄 굶은 게 한 반년 전 일이었나. 머리카락에 남은 물기를 탈탈 털고 다가갔다. 남자는 내가 피우고 남은 담배를 하나 빼며 턱짓으로 도시락을 가리켰다.
“엄마한테 말 안 했다면서요?”
“내가 먹고 싶다고 했어.”
“헤에.”
“반응이 이상하네.”
남자가 볼우물을 패며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냥, 엄마가 좀 좋아했겠다 싶어서요.”
부부의 대화 같잖아요. 날카롭게 남자를 저격하고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학생 때 자주 싸주던 도시락 구성과 별 변함은 없었다. 노란색 계란말이를 먼저 집어 들었다. 남자의 눈빛이 젓가락을 유유히 따라가며 동선을 그렸다. 아무 말 없이 계란의 푹신푹신한 식감만 느껴졌다. 턱을 움직여 푹푹 씹었다.
“무슨 맛?”
이게 감동적인 동화도 아니고 엄마 음식 좀 먹었다고 맛이 느껴질 리가 없다.
“무슨 맛이냐니까.”
“뭐… 계란 맛이겠죠.”
불성실한 대답에 남자는 도시락을 뺏어 들고 자기가 먹어 치웠다. 유치찬란한 횡포에도 느낌이 없었다. 남자가 피우는 담배의 냄새도, 음식의 냄새도 맡아지지 않는다. 남자의 기묘한 다정함을 받고 있으니 정말 고장 난 환자가 된 거 같았다.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장애일까. 아직도 위기감이 들지는 않았다.
도시락을 먹어치운 남자는 바쁜지 지체없이 겉옷을 들고 사라졌다. 나는 남자가 먹어치우고 가버린 도시락통을 깨끗하게 씻어 싱크대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매끄러운 금속 통에서 젓가락이 긁히던 소리가 생생하다. 맛이 없어진 세상은 소리가 강력해졌다. 시력과 청력에 의존해 세상을 보았다.
불안정한 세상이었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와, 창문 유리를 섬세하게 두들기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때웠다.
흡연량이 늘었다. 나도 느꼈고 남자는 좀 더 빨리 느꼈다. 아침에 사탕을 빼앗고 일어나는 남자에게 손을 벌리는 텀이 짧아지고 며칠 지나지 않아 일정이 추가되었다. 하루 두 시간.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이었다.
입원한 뒤에 타인과의 대화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남자와의 시간이 전부였다. 누군가와 말을 하게 된다는 것은 머릿속을 정리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된다. 냉정하게 다시 판단할 기회가 생겼다는 말이다.
남자가 주는 애정은 손끝이 저릴 정도로 불쾌했다. 오로지 순수하게 불쾌하기만 할 신체적 접촉이나 언어에 정서적인 안정을 느끼고 있었다. 나의 가장 큰 문제였다. 왜, 남자의 품 안에서, 언어에서 안정을 느끼는 가. 대답을 찾지 않으려고 애썼다. 단어만 튀어 나와도 참을 수 없이 슬퍼질게 분명했다.
애정은 완벽한 게 아니야. 나는 몇 번이고 외웠다. 자살과 자해를 걱정하고, 엄마의 도시락을 받아 오고, 사탕을 물려주는 모든 행동은 남자 자신을 위해서였다. 아들이 병신이면 곤란하니까. 이기적인 마음에서 시작된 다정함은 다정한 것이 아니다.
동화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과제였다. 음식의 맛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신체가 스트레스를 과도하게 받는 것은 나중에 생각할 문제였다. 남자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이성으로 생각해야 했다. 물었다. 남자의 애정이 폭력이라면, 대응하는 방법은 무엇이냐고.
“이소군, 오늘은 뭘 좀 먹었나?”
“네.”
“음식 맛을 못 느끼니 힘들진 않고?”
“음, 여자친구가 엉터리 요리를 해도 맛있게 먹어줄 수 있을 건 같네요.”
의자를 당겨 앉으며 능청을 떨었다. 씩 웃자 의사 선생님도 따라 웃었다. 담당 의사가 새로 소개해준 정신과 의사는 그럭저럭 괜찮은 성격이었다. 상담 시간 내내 볼펜 심이 닳도록 메모를 갈기지만 않았어도 좀 더 의사를 신뢰하였을 것이다.
나는 남자의 귀에 들어갈 말을 전부 고려해야 했다. 바쁜 와중에도 욕실에서 내 자살을 우려하며 달려올 정도로 이지가 흐트러진 남자의 기세를 한 번이라도 후려칠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망설이다 먼저 운을 띄웠다. 회사는 물론이고 사회 저명인사들에게도 어느 정도 남자와 나의 관계가 퍼졌을 것이라는 예상 하의 이야기였다.
“선생님, 선생님도 소문 들으셨어요?”
“뭘?”
“아버지랑 제가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거요.”
먼저 입 밖에 내미니 그렇게 편안할 수 없었다. 적막한 병실 안에서 의사 선생님이 곤란하게 웃는 소리만 들렸다. 뻔했다. 다들 얼굴을 숨기는 게 익숙해서 그렇지, 내가 아버지와 관계를 맺는 더러운 인간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문장을 연결했다. 남자에게 배운 것이란 이 정도다. 어조 없이 이야기하는 것. 평범하고, 다정하게 사람의 정신을 찢어 놓는 것.
“선생님, 제가 고민을 해봤거든요.”
“……”
“아버지랑 아들이 사귀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순진한 척 눈을 깜박거리며 선생님의 얼굴을 보았다. 날카로운 눈동자 끝이 내 뺨을 흘끗 찌르다 내려간다.
“저는 아들인데.”
“……”
“아버지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
“그래서 저는 아버지에게 강간당하기로 결심했어요.”
나는 피해자로만 남으면 된다. 곧고 정확하게, 우아하고 난폭하게 남자의 성정을 닮아버리자. 자식이란 본디 부모를 닮는 것이니까.
남자가 오직 자신의 이기심과, 이익만을 위해 나를 사랑하고 무참히 내던진 것처럼.
내던지면 그게 다일 거라고.
당장에라도 달려올 줄 알았던 남자는 3일째 오지 않았다. 뜻밖에 시간을 주는 모습이 웃겼다. 첫날은 손끝까지 바짝 긴장해서는 남자만 기다렸는데, 이틀째부터는 멍청하게 있기도 싫어서 인터넷 창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어제부터 내내 남자들끼리 하는 섹스를 검색했다. 하는 방법, 체위, 뭐든 닥치는 대로 찾아 읽었고 동영상을 돌려봤다. 엄청나게 큰 성기를 가진 흑인이 손바닥만 한 동양인 남자를 박는 것도 봤고, 이것저것 하드코어한 영상까지 모조리 섭렵했다.
중간에 역한 기분에 한 번 토악질을 한 것 빼고는 무던했다. 욕정이 생기지도 않았다. 그냥 충격적인 부위에 성기를 집어넣고 박으면서 쌀 수 있다는 게 조금 놀라웠다.
오후 늦게까지 식사도 하지 않고 쪼그려 앉아 노트북을 열중해서 보고 있으니 비서가 찾아왔다.
상냥한 목소리, 건강을 묻는 안부 인사. 옷가지 몇 개가 예의상 챙겨 들려있는 봉투.
남자가 내게 준 시간이 다 되었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흘끗 섹스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영상을 보았다. 이어폰을 꽂아두지 않아 병실 안에 게이 포르노 배우의 신음이 쟁쟁하게 들리고 있었다.
표정의 변화 없이 카드를 내밀었다.
“뭡니까?”
비서는 노트북에서 울리는 포르노 영상은 신경도 쓰지 않고 물었다.
“콘돔, 러브젤. 사다 주세요.”
비서는 조금 이상한 표정이었다. 남자의 편이니까, 이런 부탁은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줄 줄 알았는데. 표정을 숨긴 채 가만히 눈을 깜박거렸다.
“궁금하시진 않겠지만, 저는 고아입니다. 어릴 때는 고아원에서 자랐어요.”
뜬금없는 고해성사였다. 건네주려던 카드를 손에 든 채 멀뚱멀뚱 비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비서는 속옷과 물건이 든 종이봉투를 소파 위에 올려두고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고아원이 병폐가 좀 많았어요. 아동 학대도 있었고… 그러다 어느 날 불이 나 건물이 다 타버렸죠. 원장은 그때 화재로 사망했습니다.”
“슬픈 이야기네요.”
“그런데 다들 좀 기뻐했어요. 원장이 소아성애자 변태였거든요.”
한 놈만 조져서 저는 무사했지만. 비서가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며 어깨를 으쓱한다.
“남은 떨거지들의 후원을 자처하신 사장님의 은혜로 좋은 곳에 입양되었죠.”
“그때는 아버지가 좀 정상이었나 봐요.”
“참고로 당시 사장님은 열다섯 살이셨고 애미애비 없어도 얼마든지 자기처럼 인생역전 가능하니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하셨는데요.”
“…정정할게요.”
질풍노도 청소년기의 남자는 더 거침없는 미친놈이었다.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젓자 비서가 킥 웃었다.
“저는 은혜를 갚겠다고 사장님 옆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고, 또 절대복종하는 사람입니다.”
안다. 비서만큼 남자를 똑 닮은 최측근도 없을 것이다. 나를 놀리고 속을 긁는 것까지도 같았으니까. 그래서 비서가 갑자기 과거사를 줄줄 늘어놓는 이유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사장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죠.”
모든 것. 비서가 한 번 더 그 단어를 강조했다. 최근의 그것에 내가 포함 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도련님, 저도 사장님께서 도련님께 유독 집착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
“육체적 관계를 맺으셔도 사장님의 태도가 변하시진 않을 겁니다.”
“……”
“이번은 물리시는 게 좋습니다.”
남자와 잔다는 게 쉬운 건 아니에요. 비서가 처음으로 정신 박힌 충고를 한다. 노트북에서 게이 섹스 동영상은 끝없이 나오고 있었다. 금발 머리 서양인 남자가 신음을 지르며 박아달라고 떠들었다. 더, 더. 위에 올라탄 남자가 허릿짓을 크게 하며 뭐라고 속삭인다. 아래에 깔린 남자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애인인가, 아니야. 연기겠지.
“싫어요.”
“……”
“후회하겠지만, 싫어요.”
“도련님.”
“나도, 내 뇌를 쪼개보고 싶어요. 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고.”
“……”
“그게 강간보다 더 심해요.”
나도 스스로 후회해보고 싶어요. 늘 타인 때문에 강제로 후회해야만 했잖아요. 초조하고 정적인 대답에 비서는 더 나를 말리지 않고 카드를 받아서 나갔다.
차가운 손과 발을 꾹꾹 주무르며 포르노 영상을 묵묵히 바라봤다. 정확하게 20분 뒤 비서는 두 통의 러브젤과 콘돔 두 상자가 든 편의점 봉투를 내밀었다.
“호텔을 잡아 두겠습니다.”
“여기는요?”
“호텔이 나으실 겁니다.”
“……”
“사장님께는 제가 전달하죠. 쉬십시오.”
쓸데없는 친절을 베풀며 비서가 자리를 떠났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봉투 안을 다시 열어보았다. 비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런 걸 사달라고 말하게 될 상황이 올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아직도 물릴 수 있다면 물려야 하는 게 맞다고도 생각한다. 비서의 말처럼,
모니터 안에서 여전히 키가 큰 남자 두 명이 엉겨 붙고 있었지만, 아무런 욕정이 들지 않았다. 살색으로 가득 찬 화면을 꺼버리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더운물을 욕조 안에 가득 받으며 욕실의 불도 꺼버렸다. 어두침침한 공간 속에서 조심스럽고 오랫동안 몸을 씻었다. 구석구석 몸을 닦고 말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휴대폰을 켜자 호텔 이름과 방 호수를 적어둔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물에 오래 담겨 있어 쪼글쪼글해진 손가락을 까딱 움직여보다 망설임 없이 1층으로 내려갔다. 손에 들린 비닐봉지는 괜히 무거웠다.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로 들어갔다. 남자의 이름을 말하자 로비에서는 카드키를 건네주고 방을 안내해줬다. 직원을 돌려보내고 난 뒤에 카드 키를 문 쪽에 갖다 댔다. 삑, 간단한 기계음과 함께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
남자가 셔츠에 바지만 입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어폰을 끼고 태블릿 PC를 보고 있던 남자가 어깨너머로 나를 돌아본다.
“안녕.”
간단한 인사에 지독하게 오랜만에 남자를 만난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흘을 보지 못 했는데, 석 달이 지난 기분이다.
머뭇거리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비닐봉지를 침대 위에 던져두고 남자의 맞은편에 가 앉았다. 비닐봉지가 부스럭거리며 동그란 젤 통이 삐져나온다. 남자가 튀어나온 물건을 잠깐 바라보더니 나를 불렀다.
“이소야.”
“…네.”
“왜 그랬어?”
“뭘요?”
“좋아한다고 말했잖아.”
여전히 끔찍한 언어였다. 사랑 고백이 이렇게 괴상하고 꺼림칙할 수 있을까. 남자가 태블릿 PC를 뒤집어 올려두고는 눈가를 짚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는 아들이잖아요.”
일어나 남자의 앞으로 다가가 뺨을 쓰다듬었다. 신체적 접촉을 먼저 한 것은 최초라고 봐도 무방했다. 지독한 단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왜 머리 안 말리고 나왔어? 감기 걸리잖아.”
“당신은 내 아버지고요.”
우리는 서로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했다.
“그렇게 나랑 자고 싶으면,”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바닥에 떨어지는 천을 보고 남자가 하, 기운 빠진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좋아한다는 말 하지 마세요.”
바지 버클을 마저 풀고 지퍼를 내리며 남자의 무릎 위를 타고 올라가 걸터앉았다. 남자는 아슬아슬하게 무릎 끝에 앉은 내 허리를 잡아당겨 제대로 앉혔다.
“왜?”
“그래야 강간이니까.”
“이런…”
유쾌하진 않네. 남자가 속삭이면서 내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섹스 자체가 처음이다. 같은 성별을 가진 남자와, 그것도 양부 되는 사람과 하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사실 이런 상황 자체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죄악도 죄책도 무기질 같은 분노에 사그라들었다.
몸이 뜨거워. 남자가 속삭였다. 용암 같을 테니까요.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분노의 온도를 아는 것인지 남자는 차가운 손가락으로 나를 식혔다. 바지를 내리고 브리프 위를 더듬으며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이걸 원해?”
“네.”
“……”
“나를 안으세요, 아버지.”
마음마저 식을 수는 없었지만, 울적한 기분조차도 사라졌다. 어차피 남자에게 받아낼 건 단지 하나였다. 나는 머저리였다. 병신처럼 분노하는 인간이다. 괜찮다. 썩어 없어지면 되니까.
전부 없어졌으면. 추억은 미화 될 수 없으니, 교합으로 얼룩져 지워졌으면 좋겠다. 남자의 품안에서는 아직 바람 냄새가 났다. 셔츠가 사각거리는 소리에서 한강의 물빛을 그리워했다. 남자의 발을 조용히 녹여 줄 때의 내가 욕을 하며 울었다. 왜 그랬어, 왜.
남자는 나를 들쳐 안고 걸어가 침대 위에 집어 던졌다. 흰색 침구 위에 올라온 남자가 내 다리에서 바지를 마저 벗겨냈다. 엄지손가락으로 발바닥의 오목하게 패인 부분을 눌러오며 남자가 무릎 뒤를 가볍게 깨물었다.
“좋아, 해보자고.”
경고성 멘트를 끝으로 남자가 브리프 위를 혀로 빨았다. 허벅지에 성기를 미끄러트리며 했던 자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노골적인 손짓이었다. 남자는 성기를 그냥 빨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을 빠는 아이처럼 쭉쭉 거리며 귀두 끝만 물고 빨았다. 혀가 끝없이 움직이며 성감대를 자극했다.
“흐읍… 읏, 하아, 아.”
남자의 입에서 타액이 흘러 성기를 축축하게 적셨다. 남자의 관자놀이에 땀이 맺혀 있었다. 손을 들어 땀을 닦았다. 성기가 살짝 물렸다. 수치스러운 부위가 단단한 치아에 바짝 조여지자 전율이 흘렀다.
“아, 아프, 으응…”
볼우물을 패며 쪽쪽 끝을 물고 빨던 남자가 손을 들어 성기 기둥을 흔들었다. 얼굴과 함께 천천히 흔들리며 자위를 돕는다. 아, 흐으. 세워 올린 무릎이 떨리기 시작했다. 남자가 허벅지 살과 엉덩이를 주무르며 목 안쪽 깊숙이 성기를 쑤셔 넣었다. 축축하고 뜨겁고 좁은 곳에서 성기가 꽉 조여졌다.
“흐. 아아, 안, 잠깐, 아!”
성기를 요령 있게 뱉어낸 남자가 손바닥으로 정액을 받아냈다. 숨을 헐떡거리며 붉게 변한 쾌감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눈물이 조금 고였다가 메말랐다.
“하아… 후…”
호흡이 진정되면서 남아있던 정액이 찔끔찔끔 흘러나왔다. 남자는 손가락으로 죽은 성기를 한 번 튕기고 입맛을 다시더니 침대에 굴러다니는 봉지를 잡아당겼다. 젤 두 통과 콘돔이 같이 끌려와 떨어졌다.
초록색으로 된 젤 뚜껑을 따다 말고 남자가 뺨을 훔쳤다. 내 성기에서 튄 정액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상체를 일으켜 남자가 쥐고 있는 젤을 뺏어 들었다. 눈으로 빠르게 사용설명서를 읽었다.
수박 향이라니, 이건 뭐람. 비서도 하여튼 이상한 취향이라며 투덜거리면서 젤을 거꾸로 들어 몸 위로 조금 흘렸다. 시원한 촉감과 함께 오묘한 질감이 느껴졌다. 손바닥 위에 가득 고인 젤이 미끄러져 배출하고 사그라든 성기를 가득 적셨다. 갈색 눈과 마주칠 때마다 안광이 일렁거렸다.
아랫배를 적시는 젤과 성기를 천천히 문지르며 성대를 열었다.
“…남자들은, 뒤로 한다면서요?”
“……”
“좀 봤는데.”
많이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무서웠다. 남자의 발기한 성기를 엉덩이 사이로 집어넣고 흔들어야 한다니. 웃음이 나온다.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남자와 자야 한다니. 내가 선택했지만 나 스스로가 역겨웠다.
남자는 여전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침을 가볍게 삼키고 손가락 사이사이 꼼꼼하게 젤을 떠 펴 발랐다.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천천히 손가락을 엉덩이골 사이에 있는 안쪽으로 가져갔다. 미끄럽게 융화된 젤을 엉덩이 사이에 잔뜩 펴 발랐다. 꽉 닫혀있는 곳을 억지로 비집고 검지 한 마디를 꾹 집어넣었다. 젤에 젖어 있어 수월하게 빨려 들어갔다. 으, 입에서 참지 못한 미세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남자가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이름을 불렀다.
“양이소.”
“말 시키지 말아요.”
어차피 저 이름은 반쯤은 내 이름도 아니잖아. 손가락을 꾸역꾸역 밀어 넣으며 숨을 깊게 내쉬었다. 몸의 뼈와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입 안이 바짝 말라갔다. 억지로 입술에 침을 바르며 고통을 참았다.
“아들.”
“…뭐에요.”
여전히 손가락을 넣은 채로, 아래를 넓히다 말고 급작스러운 호칭에 고개를 들었다. 새카맣게 죽은 눈동자를 보면 안타깝다. 결국 웃으면서 남자의 뺨을 매만졌다. 결국 고통받는 것도 나고, 피해자도 나고, 범죄의 트라우마에 빠져 악몽을 꿀 사람도 나인데 왜 이런 표정일까.
손가락에 묻은 러브젤 특유의 단내와 미묘한 향이 싫은지 남자가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왜요, 아빠…라고 해줄까?”
속삭이는 말을 들자마자 남자가 욕을 했다. 젤 통이 쓰러지면서 하반신을 온통 적셨다. 다리 벌려. 남자가 중얼거리며 발목을 잡았다. 아래쪽을 더듬던 손가락을 미련 없이 빼버리고 허벅지에 힘을 줘 다리를 벌렸다. 치부가 훤하게 드러났지만 수치심은 없었다.
“닥치고 박아요.”
“…너 정말….”
“어차피 언젠가는 이럴 거였잖아, 개새끼야.”
남자의 손가락이 음모가 있어야 할 부위를 쓸었다. 움푹 파인 아랫배와 배꼽을 쓸던 검지가 성기를 부드럽게 두들겼다. 죽어있는 성기를 부드럽게 마찰시킨다. 체온에 녹아내린 젤 때문에 끈적거리고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쩍쩍 들러붙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손길이 좀 더 빨라졌다. 퉁퉁 부어서 당장에라도 정액을 뱉어낼 것 같아,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래, 사실 섹스라는 건 참 쉽지.”
남자가 긁힌 목소리를 내며 유두를 핥았다.
“성감대를 누르고 자극하면 쉽게 흥분하거든.”
“그냥, 박으라고…”
“처음이지? 끝까지 가게 해줄게.”
“필요 없…!”
폭력적인 섹스나 하란 말이야. 남자를 걷어차기 위해 발을 들어 올리자마자 가슴이 빨렸다. 경박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유두를 빨아온다. 동그랗게 만 입술이 유두와 유룬을 전부 덮고 빨았다. 더운 숨이 피부를 데우고 축축한 혀끝이 비벼올 때마다 발뒤꿈치가 들렸다.
하아, 남자가 손가락으로 다른 쪽 유두를 세게 주무르며 지껄였다.
“내가 너 때문에 사흘 내내 게이 섹스만 공부했어.”
아랫구멍을 벌리고 찔러 들어오는 손가락에 턱을 치켜들고 숨을 삼켰다. 단숨에 안까지 밀려 들어온 손가락이 안에서 가위처럼 펼쳐지며 면적을 넓혔다. 아…생전 처음 겪는 둔통에 오금이 저렸다.
“사흘 내내 강간을 해달라고 말한 너를 질질 싸게 만들 생각에 미쳐 날뛰었어. 알아?”
알 리가 없다. 눈물이 떨어졌다. 남자가 배 위에 고여있던 녹아 뭉그러진 윤활유를 비벼 열을 냈다. 하반신이 전부 화끈거렸다. 남자의 손이 닿았다 떨어진 가슴팍도 뜨겁게 체온이 달아 있었다. 남자가 무릎 뒤로 손을 넣어 허리를 들어 올렸다. 활짝 벌려진 다리의 무릎이 어깨 위에 고정되었다.
“아, 아파…”
“겨우 허리 좀 든 거잖아. 박아줄 구멍 좀 보여달라고 하는 건데 울지 마.”
남자의 손가락이 입술을 깨물면서 통증을 참았다. 젤 한 통을 다 덮어쓴 몸은 엄청나게 미끈거렸다. 내벽을 빠르고 폭력적으로 넓힌 남자가 손가락을 단번에 빼냈다. 텅 비어버린 안쪽을 좁히려고 애를 썼다. 입을 벌리고 헐떡거리는 내 가슴팍을 문지르며 남자가 허벅지 안쪽에 입을 맞췄다.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의 끝이 엉덩이 안쪽을 느슨하게 문질렀다. 벌써 새어 나온 쿠퍼 액으로 귀두 끝이 회음부 안쪽에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쩍쩍 거리며 점액질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콘돔 껴.”
남자의 어깨를 밀어내며 말했다.
“일단 한 번 하고.”
“그럼 소용이 없잔… 아, 흣!”
코웃음을 친 남자가 말리기도 전에 안쪽으로 다짜고짜 성기를 밀어 넣었다. 고약한 고통에 비명까지도 뇌 신경을 마비시켰다. 아악! 비명을 지르는 내 턱 끝을 깨물며 남자가 다리를 점점 더 크게 밀어 올렸다. 쭉 올라간 다리의 근육이 비틀거리며 구멍이 팽팽하게 늘려졌다.
“아…아악!”
성기가 꾸역꾸역 안으로, 점점 더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젤을 그렇게 많이 썼는데, 남자의 손가락이 그렇게 오래 머물다 빠져나갔는데도 성기를 받아내는 건 무리였다. 끝도 없이 성기가 내벽을 헤치고 들어와 부피를 키워갔다. 어금니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이제 시작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눈물이 쉴 틈 없이 흘러나왔다.
“박으라며, 박아줄 테니까 더 벌려, 더 힘 빼. 후, 더 집어삼켜.”
남자가 으르렁거리며 허리를 콱 밀어붙였다. 안으로 콱하고 들어온 성기에 하반신이 쪼개지는 것 같았다.
“찢, 안돼. 그만. 못 넣어.”
어깨를 밀어내며 헐떡거렸다. 상상 이상의 고통이었다. 손가락을 넣었을 때는 참을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렇게 점점 들어오다 아랫도리가 전부 산산이 찢어발겨 지면 어떡해. 공포가 엄습해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제대로 때렸는지 얼굴이 돌아간 남자가 금세 부어오른 뺨을 움직이며 이를 드러냈다.
“안 찢어져. 내가 잘 먹여줄 테니까, 벌려.”
“싫어, 안돼. 찢어져. 찢어…흡!”
허리를 뒤로 물렸던 남자가 거센 속도로 치고 올라왔다. 남자의 음모가 엉덩이골에 비벼졌다. 살과 살이 부딪치며 짝짝거리는 음탕한 소리가 커다란 방 안을 힘차게 채웠다.
“아! 아프, 아! 흐, 싫어. 싫어.”
“참아, 버텨. 정신 놓으면 진짜 찢어버릴 줄 알아.”
“아아, 흑, 으읔. 제발… 아웃!”
“뒤로 흐물흐물 풀어져서 남자 좆 없이는 못 살게 해줄게.”
음담패설을 뱉으며 남자가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구멍 안을 꾸역꾸역 파고든 성기가 윤활유의 힘을 입어 몇 번 더 안을 빠르게 채우고 빠져나갔다. 질척거리며 성기가 나갈 때마다 안에 들어 있던 젤이 줄줄 흘러내렸다.
눈앞에서 들어 올려진 하체가 흔들거리며 남자의 붉고 흉흉하게 달아오른 성기가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였다. 아아, 저런 게 어떻게, 내 몸 안에. 육체는 정신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시신경은 느리게 느리게 뇌를 파고들었다. 뒤늦게 진짜 남자와 섹스를 한다는 자각이 왔다.
한쪽 다리를 길게 빼 든 남자가 다시 뿌리 끝까지 성기를 쳐넣었다. 거대한 통증과 함께 이성이 뭉개졌다.
“아, 으… 흐으으!”
온몸이 경련했다. 신체 안쪽 깊숙한 곳을 찍은 귀두가 그 자리를 마구 문질렀다. 쩍쩍 정액이 뭉게지는 소리가 안에서 요동쳤다. 눈알 안쪽까지 마비되는 것 같았다.
“여기가 좋아? 진짜 찾기 쉽네… 그냥 찔러주면 되고. 씨발.”
야해 빠졌어. 남자는 내 몸을 비난하며 발목을 잡아 다시 머리 옆으로 처박았다. 엉덩이와 허리가 치켜 올라갔다. 공중에 뜬 엉덩이 사이를 발기한 성기로 세게 문지르더니 이내 다시 안을 파고 들어왔다. 남자가 박아올 때마다 믿을 수 없는 곳 까지 쾌감이 전달되었다. 손톱, 발톱, 머리카락. 고막. 목덜미. 성대와 꼬리뼈. 뭐든 좋았다. 미칠 것 같았다.
혼탁한 망상이 일어날 것 같은 행위였다. 역으로 안을 파고 들어와 장기를 밀어 올리는 성기를 느끼며 아랫배를 조였다. 온몸이 벌써 정액에 젖어 든 것처럼 질척거렸다.
피부가 붙었다가 떨어지고 성기가 내벽을 긁고 나갔다 다시 세게 들어오면 숨이 턱턱 막혔다. 온몸의 장기가 비틀렸다.
“아, 흠. 아아!”
“흐, 아들. 내 좆이 그렇게 맛있어? 이소, 양이소. 대답해.”
“하아. 웃, 거기, 싫, 싫어.”
내벽을 짓누르고 뭉개고 괴롭히는 귀두의 끝이 쾌감을 줄 거라고 누가 알았을까. 원하지 않은 감각에 남자의 뺨을 미친 것처럼 몇 대나 때렸다. 남자는 두들겨 맞으면서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철썩거리며 살이 맞부딪치는 게 빨라질 때마다 남자와 내 입에서 번갈아가며 거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아. 목구멍 바깥으로 소리를 지를 때마다 남자가 내 성기를 붙잡고 미친 사람처럼 흔들었다. 성기가 빠르게 흔들릴 때마다 남자가 허리를 처박는 속도도 빨라졌다. 미친놈처럼 성기 끝이 엉덩이 사이를 가르고 들어와 깊숙하게 처박혀 있는 부분을 찔러댔다.
“아아! 아! 흐윽, 흐, 하으, 읍!”
손바닥에서 정액이 튀며 찔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겨울인데도 피부 표면으로 땀이 세어 나왔다. 남자가 퍽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힘차게 성기를 밀어 넣었다. 저절로 소리를 튀어나왔다. 남자는 내가 울부짖으면 허리와 엉덩이를 붙들고 몸을 떠는 것처럼 흔들었다. 짧고 강력하게 안이 문질러질 때마다 기절하기 직전처럼 울음이 터졌다.
“흣! 싫, 싫어. 제발. 하아, 아, 그마…아아!”
“여기, 이러는 거 좋지? 질질 싸지?”
“안, 아니. 아, 흐. 웃. 아. 싫, 그만,”
“처음이라면서 이렇게 자지러져? 뒤로 박아주는데… 그렇게, 좋아?”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할 수 있어. 신이 왜 이렇게 나를 미워할 수 있어. 당겨오는 갈비뼈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헐떡거렸다. 손에서 미끄러진 성기는 이미 터지기 직전처럼 부풀어 있었다. 남자가 어깨를 잡아 당겼다. 몸을 뒤집혀 침대 위에 코를 박고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남자가 뒤에서 다시 성기를 삽입했다. 고통은 순식간에 풍랑처럼 침몰하였다. 이미 부드럽게 풀어진 아래가 성기를 가볍게 받아 먹는 게 느껴졌다.
허리를 뒤로 물렸다 앞으로 처박을 때마다 소리를 질렀다. 남자가 손바닥으로 귀두 앞을 비비기 시작했다. 표피가 문질러지자 몸이 자연스럽게 요동쳤다.
지나친 자극에 성기에서 울컥 정액이 터졌다. 비명이 커지자 남자가 이를 악무는 소리가 들렸다. 줄줄 정액을 흘리고 있는 성기의 끝을 계속해서 손바닥으로 비벼주며 구멍을 들쑤셔진다. 남자가 안쪽에 그대로 사정했다. 쾌감에 중독된 몸이 남자의 정액에 비척거리며 구멍을 좁혔다. 남자는 사정을 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마음대로 좁고 뜨겁고 축축한 공간을 쑤시며 귀두를 자극했다. 오그라들었다고 생각한 성기는 단숨에 부풀었다.
한 번 사정을 끝낸 몸에 한계는 더 일찍 찾아왔다. 남자의 성기가 쑤셔 박을 때마다 온몸이 떨렸다. 남자에게 앞뒤로 성감대를 자극당하며 문질러지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손가락으로 시트를 마구 긁으며 몸을 떨었다. 안 돼. 불가능할 만큼 거대한 성욕이 초점을 어긋나 질주를 하고 있었다.
“그마, 아, 아. 하지! 하지 마!”
턱까지 차오르는 두려운 쾌감에 침대 위를 기었지만 그래 봐야 남자의 품 안이었다. 남자는 무자비하게 다리를 잡아끌어 내렸다. 꾸역꾸역 성기가 다시 파고들었다. 비좁은 곳으로 흉물스러운 남자의 성기를 받으며 울었다. 비명이 목구멍에서 끝없이 터졌다. 다 쉬어버린 목이 한계를 넘어서 높은 교성을 내질렀다.
“구멍 벌름거려, 느껴져? 너도 느껴? 나도 씨발… 존나 느끼는데.”
남자가 사정하면서 허리를 움직였다. 이건, 정말 최악의 섹스였다. 구멍이 벌려졌다 오므라들며 남자의 성기를 탐욕스럽게 꾸역꾸역 먹어 삼켰다. 자의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아랫배가 꿈틀거리며 내벽 안쪽이 성기를 쭉쭉 집어삼켰다. 이게, 이게…
“입으로 빨 때도, 후, 이렇게 정신없이 빨아줘. 응?”
전립선에 성기 끝을 두고 힘차게 밀어 넣으며 귀두 끝을 손톱으로 긁어주자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허리를 뒤틀었다. 남자의 귀두가 후벼 파고 있는 안쪽 내벽과 손가락으로 문지르는 성기가 전부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목을 졸라버리고 싶을 정도로 강력한 쾌감에 허리가 저절로 공중에 떴다. 손톱을 세워 남자의 팔뚝과 어깨를 할퀴며 비명을 질렀다.
“아, 그만, 흐아아…!”
몸이 부서질 것처럼, 자신의 성기로 내 내장을 전부 파헤치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남자가 크게 허릿짓을 했다. 바깥까지 성기가 쭉 빠져나갈 때마다 사이사이로 녹아내린 젤이 줄줄 애액처럼 새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처음 하는 게이 섹스다. 이런 게 좋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남자의 성기가 혹사당하는 아래를 벌리고 찢어버릴 듯 처박아 들어오면 그저 기꺼웠다.
“그만…아! 아!!”
“좋아? 흣, 좋냐고. 후. 봐봐. 강간당하면서 너 지금 표정. 보라고.”
남자의 말이 가시처럼 혈관을 파고들었다. 줄줄이 꿰뚫려 피를 줄줄 흘리는 사람처럼 경련을 일으키며 상체를 미친 듯이 뒤틀었다. 하체에 마비가 온 것 같았다. 이미 끝까지 갔다고 생각했는데 끝이 아니었다. 남자는 나를 죽여버리겠다고 으르렁거리며 성기를 쳐넣었다. 빠져나갔다 쩍쩍 거리는 덩어리를 내뱉고 나면 어김없이 다시 파고 들어왔다. 내 성기를 잡아 쥔 손이 넓게 펼쳐져 그물처럼 귀두를 꽉 조였다. 배뇨감에 목이 자동으로 졸렸다.
성기 끝에서 투명한 물이 줄줄 흘렀다. 정액이 아니었다. 배뇨감은 해갈이 되었는데 소변과는 다른 액체가 수돗물처럼 떨어져 정액과 젤로 젖은 시트를 더럽혔다. 배출되는 체액을 보며 목울대를 떨었다. 지나친 쾌감에 시야가 흐려지다 돌아오길 반복했다. 전신을 찢어내는 쾌락이었다. 입에서 침이 흐르고, 생리적인 눈물이 뚝뚝 흘렀다. 분명히 오르가즘을 느꼈다. 앞으로도 뭔가를 싸질렀다. 침대 시트가 흠뻑 젖어 있었다.
“갔어?”
“…아아…”
"으음, 나도, 쌀 거야."
남자가 중얼거리며 내 목덜미를 깨물고 안을 성기 전체로 문질렀다. 반사적으로 엉덩이에 힘이 꽉 들어갔다. 남자는 내 유두를 긁으며 사정했다. 안쪽의 간지러움이 한 번에 긁혀진 기분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눈물이 계속 떨어졌다. 심장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비명을 내지른 목이 따가웠다. 눈물 때문에 뺨이 쓰라렸고 틈만 나면 꼬집어댄 유두도 따가웠다. 아직도 뒤에 들어 있는 성기가 갑자기 안을 문지르며 자극을 해왔다.
“그만, 해, 악…!”
유두를 매만지는 손가락에 몸을 파드득 떨었다. 이제는 가볍게 건드리기만 해도 아팠다. 확인하지 않아도 퉁퉁 부어 살갗이 까져 있을 게 분명했다. 눈을 빠르게 깜박거려 시야를 씻어내고 무례하고 자극적인 손을 떼려고 했다. 남자의 성기에 꼬챙이처럼 꿰인 몸이 멀쩡할 리 없었다. 푹 하고 살을 파고드는 뜨거운 성기에 그대로 허리가 무너졌다.
“갈 때까지 한다고 했잖아.”
“아흐, 으, 갔, 갔어. 흐읏. 갔잖아.”
“좀 더 해야지.”
남자가 슬슬 허리를 움직이며 태연한 목소리로 내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양쪽으로 세게 당겨진 엉덩이 사이로 치부가 넓게 벌려졌다. 남자가 성기를 빼냈다. 천천히 살덩어리가 빠져나갔는데도 닫히지 않았다. 헐떡거리며 찬 바람과 공기가 밀려 들어오는 걸 느꼈다. 안에서 바깥으로 천천히 무언가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남자가 입구 주변을 손가락으로 비벼대듯 만지다 쑥 밀어 넣었다.
“으…흐으으.”
이마를 시트 위에 비비적거리며 도리질 쳤다. 구멍을 넓게 벌리고 안에 있는 정액을 긁어내는 손가락에도 등이 저렸다. 꼽추처럼 등을 휜 채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는 구멍 안쪽을 난폭하게 헤집었다. 남자의 손가락이 왔다 갔다 할 때마다 허벅지를 타고 축축한 게 계속 떨어졌다.
“질질 싸네. 그렇게 좋아?”
“제발, 그만…”
“너 지금 손가락도 꽉꽉 물어. 봐봐, 여기가… 간질간질하지?”
손가락이 안쪽을 파고들어 한쪽 구석을 꾹 문질렀다. 이를 깨물고 몸서리쳤다. 성기가 흥분하는 게 느껴졌다. 남자가 쾌감을 이기지 못해 홀로 시트 위를 긁는 발바닥을 잡아채 아킬레스건을 꽉 깨물었다.
구멍 안쪽을 들락날락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안에 있는 부분을 꽉 짓눌렀다 빠져나갈 때마다 내 성기에서 정액이 뚝뚝 떨어졌다. 녹은 젤과 남자의 정액이 물을 튼 샤워기처럼 질질 흘렀다.
“제기랄, 이렇게 좋아하면서 강간? 강간이라고?”
“하지 마, 아…아!”
“강간해줘? 정말? 강간이 뭔지 알아?”
남자가 손가락을 빼내고 내 어깨를 잡아 올렸다. 남자의 가슴팍 위에 얼굴을 박고 무너졌다. 나를 끌어안은 남자가 엉덩이를 잡고 들어 올렸다. 눈물로 범벅이 된 시야에서 남자가 다정하게 웃는 얼굴이 지워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그만, 그만해.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남자의 뺨에서 보조개가 피어났다.
흉흉하게 발기한 남자의 성기가 다시 안을 파고들었다. 아아, 혀를 깨물고 싶은 끔찍한 쾌감에 다리를 활짝 펼쳤다. 허벅지 바깥쪽이 파들거리며 팽팽하게 당겨졌다. 남자는 내 허리를 잡아 눌렀다. 서서히 구멍을 벌리고 남자의 귀두 끝이 서서히 내벽을 긁어나갔다. 꺼떡거리며 선 핏줄이, 단단한 살과 뜨거운 체온, 점막, 피부. 입을 억지로 벌리고 커다란 것을 강제로 삼키는 것 같았다.
남자의 어깨를 잡고 매달려 헛구역질을 했다. 내장을 밀고 올라온 성기에 아랫배까지 꽉 찬 기분이었다.
“아들.”
“하지 마…”
“아들, 나 봐.”
“싫어.”
“보라니까.”
내 얼굴을 강제로 잡아 들고 남자가 키스했다. 뜨겁다. 전부 뜨거웠다. 입 안을 휘젓는 혀도, 아래를 파고든 성기도 뜨거웠고 체온도 뜨거웠다. 터져버릴 것 같다. 죄악의 온도가 이렇게 끓어오른다.
나를 끌어안은 남자가 힘껏 허리를 쳐올렸다. 밑에서 위로 성기가 파고 올라올 때마다 비명이 나왔다.
“아! 아악!”
“좋아, 죽으면서, 강간?”
“하, 아아! 읍, 흐 읏!”
“강간이 뭔데, 너랑 나랑 지금 이러는 게 강간이야?”
강간인가?
강간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이것을 강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스스로 옷을 벗었으므로.
남자의 성기에 꿰뚫린 채로 아래에서 위로 쳐올려 질 때마다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남자가 내 뺨과 얼굴을 붙잡고 허겁지겁 키스했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 혀를 빨고 울면서 발기한 성기를 남자의 복부에 문질렀다. 길고 거대한 쾌감이 모조리 뜯겨 나왔다. 붉고 검게 달아오른 쾌감은 내쳐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 좀 살려줘. 남자의 팔을 붙들고 애원했다.
“너를 어떻게 살려줘.”
“제발, 아, 힘들. 힘들어… 제발…”
한 번 더 정액을 토해내며 남자의 어깨를 그러잡고 매달렸다. 아직도 남자의 성기는 내 안을 사정없이 쑤셔 박고 있었다. 쩍쩍 거리며 살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힘들어. 한 번 더 애원했다.
“힘들다고 어떻게 그만해.”
단단한 손아귀가 엉덩이를 잡아 벌리며 성기를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몸을 들어 올렸다 다시 내려 앉힐 때마다 목구멍 끝까지 남자에게 산채로 관통당하는 기분이었다. 미친 것처럼 고개를 도리질 치며 비명을 질렀다.
“이건 섹스가 아닌데, 어떻게 그만해. 이소야.”
악독한 그의 감정이 사랑을 노래하며 내 여린 살점을 발라낸다. 책상에 앉아 거대한 배를 조립하며, 탈출을 꿈꾸던 광인의 모습이 기억에 스며들어 아교처럼 붙었다.
신이여, 이것은 사랑입니까.
피로 물든 유리 너머 남자의 맑은 갈색 눈동자가 내 발목을 잡았다.
이것도 사랑입니까…?
“울지마.”
“……”
“울어도 놔주지 않을 거야.”
“……왜…?”
“…너를 사랑하니까.”
지독하게 뜨거운 음성이 내 뺨을 내리쳤다. 온몸이 아팠다. 몇 번째인지 모를 사정을 끝낸 남자가 안에서 성기를 비틀어 빼내며 나를 조롱했다.
벌려진 곳은 닫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완전히 풀어진 곳으로 알고 싶지 않은 액체가 줄줄 흘러 남자의 고간 주변을 온통 더럽히고 있었다.
떨리는 손을 들어 남자의 뺨을 잡았다. 남자가 고개를 반듯하게 들어 올리고 나를 본다. 피 냄새가 나는 성대를 열었다.
“나를 강간했잖아요.”
“너를 안았지.”
한 마디, 한 마디, 이야기할 때마다 목이 따가웠다. 성대가 찢어진 것처럼 아파져 왔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니… 아니요… 아버지는, 나를 강간했어요.”
“……”
“나를…”
“그래. 너를 강간했어.”
남자의 언어는 죄악을 서슴없이 이야기했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싶은데.”
“강간범은… 그런 거, 하면 안 돼요…”
쉰 목소리를 겨우 짜내 대답했다. 남자의 갈색 눈동자를 남김없이 밀어내며, 단호하게, 다 찢어진 음성을 주워 모아 말했다. 나를 사랑하면 안 돼요.
“…내가 졌어.”
하하. 온몸을 내던지고 진창에 굴려 받아낸 항복에 헛웃음을 지었다. 패배나 마찬가지인 승리였다.
인생을 신이 돌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신 대신 남자가 나의 눈물을 핥아왔다.
눈꺼풀을 두들긴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이 온통 긁어대고 괴롭히는 기분이었다. 뻑뻑한 눈을 밀어 올렸다. 커튼의 벌려진 틈 사이로 희미한 빛이 들어와 눈동자를 정확하게 찔러대고 있었다. 입을 살짝 벌려봤다. 목이 심하게 부어서 공기 새어나는 소리만 나왔다. 얼마나 오래 자고 있었는지 웅크린 몸은 펴지지도 않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무릎을 매만졌다. 몸은 깨끗했다. 대신 하반신 아래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비는 아닐 테니, 혹사당한 하체가 운동을 거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손에 힘을 줘 무릎을 천천히 주물렀다. 조금만 움직여도 식은땀이 나올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이를 악물고 몸을 움직이려고 노력하는데 등 뒤에서 뜨거운 손이 내 다리를 잡아챘다.
“아…!”
쇳소리가 터졌다. 갑자기 몸이 끌어당겨 지는 바람에 근육이 찢어질 것 같았다.
“가만히 있어 봐.”
남자가 시트를 젖히고 다리를 조심스럽게 폈다. 상체를 벗은 채로 바지만 걸치고 있던 남자는 담배를 입에 문 채로 수건을 내 다리 위에 덮었다. 수건은 뜨겁게 데워져 있었다. 남자는 커다란 수건으로 내 몸을 전부 덮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입술이 가끔 움직일 때마다 재가 조금씩 떨어졌다.
“아, 아파…”
“아프겠지.”
이렇게 만든 인간이 누구인데, 남자는 뻔뻔스럽게 나를 타박하면서 계속 몸을 주물렀다. 뜨거운 수건의 온도와 손길에 근육이 조금 풀어졌다. 허리를 꾹꾹 누르던 남자가 손바닥으로 무릎을 덮어 쥐었다. 쓰라릴 정도로 아프던 무릎이 더운 열이게 통증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안마를 받고 있으니 다시 졸음이 쏟아졌다. 햇빛에 억지로 떠야 했던 눈을 감아버리려고 했더니 남자가 담배를 끄며 나를 말렸다.
“뭐라도 좀 먹고 자.”
피곤한데. 속으로만 중얼거리고 있었더니 남자가 몸을 일으키고 테이블을 잡아당겼다.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베게 위에 뺨을 댄 채로 눈을 깜박거렸다.
남자가 허리 밑에 베개를 받쳐주고 몸을 일으켰다. 이를 악물고 근근이 버티고 일어나자 입가에 물컵을 대준다. 군소리 없이 달게 물을 받아 마셨다.
물 다음에는 초콜릿 잼에 절인 빵조각이었다. 남자의 손에 들린 초콜릿 잼 통이 익숙했다. 끈적거리는 잼이 빵 표면 사이사이로 스며든다. 말없이 빵을 받아먹고 씹었다. 그때는 지독하게 달았는데 지금은 전혀 달지 않았다. 몇 조각을 더 씹었다. 위장으로 물과 음식이 들어가자 정신이 조금 들었다.
“강간범에게 잘 받아먹네.”
남자가 담배에 불을 피우며 말했다. 움찔해서 음식을 턱을 움직이다 말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상체 위에 내가 긁어댄 상처를 고스란히 남긴 채 나태한 차림으로 담배를 피웠다. 상반신에 있는 근육은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촘촘하게 변화했다. 어제 저곳에 정액을 몇 번이나 뱉어냈다.
“움찔거리고, 겁먹고, 피해야 해요?”
대답 없이 남자는 담배만 피웠다. 흰 연기가 육안으로 보이지만 싸하고 목 따가운 연기의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입 안이 무거웠지만 단맛이 나지 않는 것과 비슷했다.
“그럼…내가 너무 비참하잖아요.”
입술로 담배를 질끈 물고 남자가 내 입가를 손가락으로 닦았다. 손가락에 묻은 초콜릿을 혀로 핥으며 남자가 물고 있던 담배를 내 입에 대신 물려줬다. 눈을 내리깔고 힘껏 한 모금을 빨아당겼다. 남자의 손가락 사이에 걸친 담배가 호흡과 함께 부르르 떨렸다. 타액에 이미 축축하게 젖은 필터를 헤치고 유해물질이 구강을 침범한다.
하아, 입 바깥으로 연기를 내뿜어내며 숨을 크게 쉬었다. 정신은 신체의 통증보다 허탈감에 더 주목하고 있었다.
“나는 피해자예요.”
“내가 널 안았으니까?”
정답과 비슷한 말을 이야기하는 남자에게 천천히 고개를 저어주었다.
“아무도 나를 동정해주지 않았어요. 누구도, 아버지 당신마저도.”
당신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고는 고통을 주었지. 그 말을 삼키고 다시 남자를 불렀다. 아버지.
“내가 선택했어요.”
남자의 입에 물린 담배를 뺏어가 천천히 내 입에 넣으며 눈을 감았다.
가장 버틸 수 없었던 것은 우리가 사귀냐는 물음이었다. 최 이사가, 수많은 회사의 인간들이 나에게 똑같이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이었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친구가 양부와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을 들으면 찾아가 멱살을 잡고 더러운 새끼라고 욕을 했을 것이다. 다들 편견에 사로잡혀 추문을 공평하게 나눈다.
받고 싶지 않았다. 죄는 남자가 이루어 낸 것이다.
“후회도 나만 해요.”
겨우 그것뿐이다. 남자의 입에서 더는 우리가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묶어버렸다. 나를 가지기 위해 범죄를 저지른 저열하고 비열한 인간이 되기를 바랐다. 그걸 위해서 몸을 내던졌다. 나는 멍청한 걸까.
“나만.”
내걸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멍청한 짓을 했다. 가진 게 많아지면 그때야 후회를 하려고 한다.
“…나만……”
떨리는 목소리를 가리기 위해 담배 연기를 함께 뱉어냈다. 남자가 내 손에 들린 담배를 그대로 당겨 한 모금 빨았다. 담배 한 개비를 나눠 피며 우리는 연기를 산소 대신 호흡했다.
허리를 받치고 있던 베개를 빼내고 몸 위로 올라타는 남자의 등 뒤로 새벽달이 지는 것이 보였다, 오늘따라 유독 투명했다. 옆자리 해에 자리를 지배당해 새파랗게 질린 하늘빛도, 창백한 유리 같은 달도.
“아버지.”
“……”
“왜 나를 좋아하죠?”
“……”
“나는, 아버지 때문에 내가 정하지 않은 모든 부조리에 분노하게 되었어요.”
빈부격차. 사회적 지위. 편견. 오해. 모든 것.
내가 선택해서 누리는 것도 아닌데 가지게 된 더러운 언어들, 나의 정박아.
시트를 열여 젖히고 남자가 내 허벅지 안쪽을 잡아 벌렸다. 축 늘어진 성기의 끝을 혀로 핥으며 남자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수많은 여자들.”
선단 끝이 축축해지자 목 뒤로 침이 넘어갔다. 눈을 꾹 감았다. 아랫도리에서 남자의 간질간질한 숨소리가 차갑게 식은 피부를 덥혔다.
“술과 약에 취해 안아봤던 남자들.”
남자의 목소리는 갈라진 내 목소리와는 달리 부드럽고 평온했다. 더운 숨소리를 섞어 밀어를 속삭인다.
“나는 연인끼리 하는 섹스는 관심이 없어.”
“……”
“근데 너를 보면 그게 하고 싶어.”
“안됐네요.”
남자를 조롱했다.
“강간범과 친하게 지내줄 피해자는 없을 테니까.”
다리를 들어 남자의 허리를 감아 당기며 유쾌하게 웃었다.
연달아 기절하고 일어났을 때는 익숙한 간호사의 얼굴이 보였다. 간호사는 솜씨 좋게 링거 관에 바늘을 꽂아넣고 비타민제를 주사하고 있었다.
“일어나셨네요, 아침 식사 준비해 드릴까요?”
“…아……네.”
뻑뻑한 목을 움직여 시계를 보았다. 정확하게 아침 8시였다. 얼마나 오래 잔 거지. 칼칼한 목을 헤집으며 물을 겨우 한잔 따라 마셨다. 메마른 식도를 적시고 헛기침을 하며 어젯밤 기억을 헤집었다.
남자는 난폭하고 절제 없이 나를 안았다. 수십번 오르가즘에 올랐고 제어하지 못한 쾌감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아 비명만 질렀다. 내가 겨우 두 번 째라는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남자는 짐승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성감대를 기억한 남자의 손과 성기는 나를 좀 더 쉽게 요리했다. 덜떨어진 반응을 보이며 울다 지쳐서 까무러치기도 여러 번, 매달려 빌었지만 남자는 자비가 없었다. 한 차례 더 진통 같은 관계를 맺고 기진맥진해서 잠이 들었다. 그때가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새벽부터 오후까지 질주하는 말처럼 처박는데 혼자 감당하는 건 불가능이다.
“…여긴 왜 또 처박아둔 거야.”
잠자리 매너도 형편없는 인간. 입술을 비틀며 침대 등받이를 천천히 세웠다. 상체가 들리자마자 허리가 반으로 쪼개지는 고통이 느껴졌다. 아, 아아. 입을 뻐끔거리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허리와 어깨는 물론이고 힘을 줬던 팔과 말 못한 부위까지 전부 쓰라렸다. 정말 찢어진 거 아닐까. 잡아 찢을 것처럼 벌리고 쑤셔 넣으며 으름장을 놓던 남자를 기억하며 이를 북북 갈았다. 그래도 몸을 아주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양심이 있다면 뭔가 좀 풀어놨겠지. 씨발, 개새끼. 시트를 쥐어뜯으며 욕을 삼키기 위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식사 나왔습니다.”
트레이를 끌고 들어온 간호사가 익숙하게 침대에 연결된 테이블을 올리고 음식이 담긴 쟁반을 내밀었다. 인사를 하고는 팔뚝을 내밀었다.
링거를 빼달라는 요구에 간호사는 별 만류 없이 바늘을 빼내고 알코올 솜으로 바늘 자국을 닦고 작은 밴드를 붙여주었다. 손톱만 한 살색 밴드를 붙인 곳이 간지러워 손톱으로 주변을 슬슬 문지르며 식판을 내려다보았다.
맛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서 죽이 아니라 씹고 삼킬 수 있는 식감 위주의 음식이 대부분이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오믈렛을 잘라 입 안에 넣었다. 뭔가가 입안에서 으깨지는 느낌이 났다. 그게 전부였다.
겨울에 구하기 힘든 때 이른 딸기도, 신선한 야채도 씹어지는 느낌만 있었고 아무것도 없었다.
따뜻한 빵과 함께 딸려 나온 딸기잼을 손가락으로 찍어 핥았다. 초콜릿을 발라 먹여주던 남자의 손가락 끝을 치아로 끊어내 뱃속에 넣어버리고 싶었다.
“…아, 식사 중이었니?”
노크도 없이 무례하게 들어온 사람을 보았다. 길고 무거워 보이는 코트를 휘날리며 들어온 고모가 품에 안고 있던 비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비체가 사정없이 달려와 발톱으로 침대 다리를 할퀴며 뒹굴기 시작했다. 익숙하고 정겨운 하얀 털 뭉치를 보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기다릴까?”
고모가 소파에 앉으며 묻는다. 비체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다 먹었어요.”
미련 없이 남은 쟁반을 치워 테이블을 밀어두고 일어났다. 침대 밑바닥에 있는 슬리퍼를 꺼내 신다 익숙한 물건을 발견하고 흠칫했다. 침대 옆 탁자 위에 담배 한 갑이 올려져 있었다. 씰도 뜯지 않은 새 담배였다.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 단단하고 묵직한 라이터는 손때가 묻어 있다. 남자의 것이다.
불쾌한 친절이 엿보이는 담뱃갑 투명 비닐을 북북 뜯으며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루밍을 하면서 그르렁거리던 비체가 달려와 내 무릎에 앞발을 얹었다. 꼬리가 살랑거리는데 안아줄 수가 없었다.
하얗고 맑은 눈을 내려보다 담배를 들어 올렸다.
“피워도 돼요?”
“마음대로 하렴.”
긍정에 망설임 없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게 한 모금 쭉 잡아 땅겼다. 묘한 맛이 났다. 분명히 맛이 없는데, 형체 없는 기체가 식도를 매우며 타들어 간다.
“네가 담배를 피우니까 좀 이상하다, 얘.”
고모가 나를 보며 웃는다. 나긋하게 변한 목소리와 공항에서 재회하던 순간의 이미지는 이질적이었다. 이 집 사람들은 다 이렇게 이중인격이 심한가.
담배를 입에 물고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벌려진 입술 틈새로 흰 연기가 뿜어져 올라왔다. 겨울철 핀 안개꽃 같았다.
“예쁘고 어린애가 세상에 닳아버린 거 같아.”
웃긴 말이었다. 담배를 빨다 말고 풋 웃어버렸다. 비체가 내 종아리를 긁으며 왕왕 짖었다. 일부러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아버지 때문에 그래요.”
“……”
“고모, 이번에도 나한테 돈을 주러 왔어요?”
재떨이를 끌어다 담배꽁초를 비벼 끄고 다시 새 장초를 하나 뽑아 들었다. 하얀 종이로 말아둔 담배를 왜 피우는지, 꼭 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찾지 못해 몇 번 손을 대다 말았었다. 이제는 막연하게나마 알 거 같았다.
“그 돈은 아버지에게 주세요.”
“양이소.”
“나를 강간한 합의금으로 주라고.”
비체가 외롭게 짖었다. 하얗고 사랑스러운 강아지를 안아줄 수 없어 미안했다.
“돈 주러 온 거 아니야.”
“……”
“오래 입원해 있길래 죽은 건 아닌가 싶어서 와본 거지.”
고모는 가방을 집어 들고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지 그랬니. 날카로운 목소리가 빈정거리며 마지막을 장식했다.
가슴이 저려와 조심스럽게 고모의 뒷모습을 보았다. 큰 키에 늘씬한 몸을 한 여자는 알 수 없는 문병 대신 슬픈 언어를 주고 있었다. 나도 고모의 말이 바르다고는 생각해요.
돌아가는 고모의 뒤를 따라가지 않고, 비체가 계속 방안에서 끙끙거렸다. 외롭고 슬프게 울어댄다. 바짓가랑이를 물고 놔주지 않을 것처럼 짖는다. 고모의 눈치를 몇 번이나 보다 하는 수 없이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식은땀이 뚝뚝 흘렀지만, 이 작은 동물에게 닿기 위해서는 고통도 인내할 만한 것이었다.
비체의 목덜미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금방 기분 좋아진 얼굴로 비체가 혀를 내밀고 헥헥거렸다. 고모의 귀에는 들리지 않게 조용히 입을 가리고, 비체의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비체야.”
까맣고 반들반들, 남자를 나 대신 미워해 주던 이 단호하고 멋진 성정.
“내 가랑이에서 그 새끼의 냄새가 나진 않니.”
너, 나와 남자의 냄새가 섞이면 손가락을 자주 깨물었잖아.
비체는 사람이 아니라 대답을 해줄 수가 없어서, 내 손가락을 사탕처럼 마구 핥았다. 친근하게 어리광을 부려오는 그 작은 애정에 쪼그려 앉은 채로 울어버렸다. 고모는 말없이 비체를 안아 들고 병실을 나갔다.
“흐으…”
더러워.
구역질이 나온다. 유일하게 그 집에서 애정을 주었던 대상을 예쁘게 얼러주지도 못하고, 사람 말을 듣지도 못한다고 죄책감을 흩뿌리고.
내가 영원히 맛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도 당연한 거야. 그럴지도 몰라.
생각해보면 괜찮지 않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프다거나 통각이라거나, 힘들다거나 철이 안 든 소리를 늘어놓기에는 어릴 적부터 문제가 많은 인생이었으니까.
결점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결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게 결점이 될 거라는 생각도 못 했다. 알고 나니 지독하게 괴로웠다. 떫은 감을 씹은 것 같이 입맛이 썼다.
남자의 큰 죄 중 하나는 내게 상처를 자각시켰다는 것이었다. 내가 남자의 눈에 들게 된 계기도, 더 이전에 엄마와 그가 결혼하게 된 것도, 사랑 따위를 운운하며 사람을 농락하는 모든 과정에서 나는 내 인생과 주어지지 못한 모든 것을 뼈저리게 통감했다.
보통 이런 가정에서 살게 되면, 두 가지 경우를 가진다. 아예 삐뚤어지거나, 착한 척 노력하는 인간이 되거나.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렇게 살 거야, 하는 마음과 내가 이렇게 노력하잖아. 얼마나 착해. 나를 알아봐, 이해해. 하는 철딱서니 없는 분노.
눈물이 나오다가 메말랐다. 쪼그리고 앉은 채 오래도록 비체의 발자국이 찍힌 것 같은 옷자락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강아지, 남자를 향해 힘차게 짖어주던 나의 편.
손을 더듬어 담배에 다시 불을 붙였다. 담배 필터가 눅눅하게 젖었다. 남자와 담배를 나눠 피던 순간이 생각났다. 갑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를 더는 혼자 내버려 둘 수도 없었고, 남자와 공간에 갇혀 있는 것도 싫었다.
남자와 한 침대에 누워 있으면 정신이 엉망이 된다. 몸을 엉망으로 굴리는 것보다 뇌가 으깨지는 시간은 습자지로 빨아든 잉크 얼룩이었다. 남자가 말하는 호칭과 다정한 척 구는 언어에 중독이 될까 나는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혹독하게 남자에게 상처를 받고도 혹시 수렁에 빠질까 자신을 몰아붙여야 한다니. 이래서 폭력은 길들수록 잔인하다.
사랑이 부족하다는 걸 알아서 남자가 밉다. 연애라도 많이 해서 사랑이 배가 터질 정도로 먹어 치웠어야 힘이 생길 텐데. 엄마가 보고 싶다. 엄마 품에 안겨서 특유의 조금 퍼진 라면을 나눠 먹고 이런저런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애정을 채우고 나면 허기가 가시고 세상이 말끔하게 보일 텐데.
본능이 편안하게 몸을 늘어트리고 나를 부른다. 남자가 주는 모든 것을 가감 없이 섭취하면 편해질 것이라고. 좀 더 이렇게 살다 남자의 뜻대로 사장 직함을 꿰차고 앉아 주는 서류에 멍청하게 결재 도장을 찍으면 무서울 것이 없지 않으냐 달랬다. 사카린처럼 달고 쓴 회유책이다. 남자와 있으면 더 심해질 게 분명했다.
휴대폰을 집어 들어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래알을 떠넘긴 것처럼 목 안이 까끌까끌했다.
[무슨 일이야?]
전화 안쪽이 시끌벅적하다. 한둘이 아닌 것 같은 소음에 잠깐 눈을 찡그렸다가 얼른 대답했다.
“…집으로 돌아갈래요.”
[…집?]
전화 너머의 남자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그래, 하고 대답했다.
[하루만 더 있다가. 내일 가자.]
가자,라는 말이 싫었다.
“혼자 갈 수 있어요.”
[내가 내일 오전까진 일이 있어. …음, 내일 오후에 가자.]
“혼자 간다니까요.”
[오늘은 너도 일이 있어. 저녁에 주영이 보낼게.]
나도 모르는 내 스케줄을 잘 짜둔 남자는 지체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1분도 되지 않은 통화 시간을 깜박거리며 보여주던 휴대폰 액정이 까맣게 변한다.
몇 가지 검진을 마치고 짐을 정리했다. 병원에서의 생활이 끝났다는 것만 알았다. 옷을 내어주지 않아 환자복을 입은 채 어색하게 소파에 앉아 있는데 문이 열렸다. 커다란 상자를 품에 안은 비서가 인사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차가 많이 막히더군요.”
“아니에요.”
“여기, 갈아입으실 옷 입니다.”
포장된 상자를 열었다. 니트와 바지, 코트와 머플러에 장갑까지 전부 들어 있었다. 옷을 벗고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는 동안 비서는 내가 챙겨둔 물건 중 버려야 할 것과 가져가야 할 것을 다시 정리했다. 목이 어느 정도 올라오는 니트를 입고 코트를 걸쳤다. 옷을 제대로 차려입은 것은 또 오랜만이라 어색했다.
병원에 있으면 시간이 두서없이 지나간다. 시간을 쓸모없이 죽이는 경우가 많으니 겨우 이렇게밖에 지나지 않았어, 싶다가도 막상 나가보면 세상이 나만 빼고 변해버린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오래 아팠던 사람은 사회 적응 기간이 많이 필요하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싶다.
다시 이 병실에 오지 않길 바라며 좋아하는 창문에 마지막으로 가 손바닥을 눌렀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희뿌연 하늘, 서울의 야경을 덮어버리는 눈.
“집으로 가나요?”
“아니요, 호텔로 가셔야 합니다.”
“……”
집에 들어가기 전에 떡이라도 치자는 건가. 맹렬한 비난이 튀어나올 것 같아 뺨을 실룩거리다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가요.”
상자에서 마지막으로 장갑 한 켤레를 꺼내 손에 끼자 상자 안이 텅 비었다. 비서가 문을 열어 주었다.
끝나지 않은 크리스마스의 열기와 신년을 맞이하는 들뜬 기색이 거리에 가득했다. 크리스마스트리와, 불이 밝은 앵두 전구와 붉고 초록색 리본으로 장식된 간판을 보며 작년 이맘때 뭘 했었나 고민했다.
그냥 몹시 추웠던 기억만 있다. 보일러를 켜두자니 기름값이 무서워 전기장판을 내내 틀어놓고 누워 살았다. 엄마는 연말이라고 식당이 불티나게 바빠 매일 늦었고, 나는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돌아와 컵라면을 먹었다. 조각 케이크 하나를 사서 나눠 먹었다. 연말 시상식 챙겨봤고 카운트다운을 기다리다 졸려서 잠이 들었지.
차 안의 히터가 맹렬하게 돌아가는 소리를 냈다. 올겨울은 바람이 없는지 눈은 바닥으로 곧게 떨어졌고, 사람들은 얼굴을 들고 손을 잡은 채 걷고 있었다.
“올겨울은 따듯하네요.”
홀린 것처럼 중얼거리자, 앞에 앉아 있던 비서가 웃음을 짓는다.
“왜요?”
민망함에 투덜거리자 비서가 고개를 저었다. 전면 유리창에 기사 아저씨도 뭉근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 게 반사되어 보였다.
“올 겨울 한파가 대단했습니다. 그렇죠, 기사님?”
“맞아요. 이것 참… 영 외출을 안한다고 봐야하나요.”
너털웃음을 짓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눈을 깜박거렸다. 한파가 대단했다고? 정말? 얼빠진 얼굴을 하다 창문을 내려보았다. 세찬 칼바람이 얼굴을 때려 황급히 창문을 다시 올렸다. 냉기에 얼굴이 얼얼했다.
“매일 차로 출근하시고, 바깥바람 쐴 틈도 없이 엘리베이터로 지하까지 내려가시니까 날씨 감각이 없을 수도 있죠.”
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에 조금 울컥했다. 괜히 거대한 저택에 살게 된 뒤로 곱게 지냈다는 기분이었다. 전혀 곱게 지내지 않았는데도 추위에 몸을 싸매고 걸어가는 거리의 인파를 보면 진짜 도련님이 된 건가 싶다.
어쨌든 거죽 좋고 인물 좋아 보이는 도련님. 내가 지금 걸치고 있는 니트와 바지는 얼마일까. 갈색 코트는 얼마고, 손에 끼고 있는 양가죽 장갑과 브랜드 로고가 선명하게 찍힌 신발의 가격은 얼마인가. 나는 얼마짜리 값어치를 인생에 지불하고 있었나.
옆자리가 텅 비어 허전했다. 빈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가만히 가렸다. 송곳에 찔릴 준비가 된 내장기관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바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비서는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카드키만 내게 건네주었다. 카드를 받아 들고 코트 깃을 정리했다. 내릴 낌새를 보던 벨보이가 차 문을 먼저 열어준다. 새 신발에 눈먼지가 가득 묻었다. 하얀 밑창이 대번에 검게 변한다.
“짐을 들어드릴까요?”
“없어요. 괜찮습니다.”
대꾸하고는 호텔 로비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스리피스 정장에 보타이를 매고 있는 남자와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들이 많았다. 파티가 있나. 어깨를 드러낸 여자들과 흰색 드레스 셔츠를 받쳐 입고 있는 남자들의 무리에 한기를 느끼고 엘리베이터를 잡아탔다. 가장 끝에 위치한 호텔 엘리베이터를 빠져 나올 때는 멀미로 구역질을 하며 비틀거렸다.
두 팔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 방문 안에 갇히고 나서야 숨이 쉬어졌다. 방 안은 적당한 온도로 데워져 있었다. 으리으리한 복도와 거실을 지나 눈앞에 보이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었다. 코트를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이리저리 남자를 찾아 헤맸다. 그래도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연락이 텅 비어있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소파에 앉아 남자를 기다렸다. 한 시간이 얼어붙어도 남자는 오지 않았다. 9시가 다 되어가자 배가 고팠다. 테이블 위에 있는 샌드위치를 마음대로 먹어치워 버렸다. 맛이 느껴지지 않아서 그런가 포만감은 없었다. 비어버린 손가락을 빨다 맥주를 한 캔 땄다. 굳이 술을 마실 필요는 없었지만, 한 캔을 물 대신 깨끗하게 비우고 나니 몸이 좀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온도가 풀린 손가락을 만지며 연말 무대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광고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지켜보다 깜박 잠이 들었다.
“이소야, 양이소.”
남자가 나를 부른다. 지끈거리며 머리가 아팠다.
“아들, 여행을 가자.”
미쳤는지 뜬금없이 여행 타령이다. 저렇게 기쁜 얼굴로 지옥으로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 좀 내버려 두라고 짜증을 왈칵 냈다. 성질이 난 시야로 남자가 등을 돌렸다.
째깍거리는 시계와, 시끌벅적한 티비소리가 요란했다. 어질어질한 머리를 털며 리모컨을 찾아 전원을 꺼버렸다.
조용해진 거실에서 가만히 눈치를 살폈다. 여전히 인기척은 없었다. 남자의 환청을 들었다는 생각에 입맛이 썼다. 불편한 바지와 니트를 그대로 입고 잤더니 몸이 뻐근했다. 무릎을 접어 올려 양말부터 벗었다. 베이지색 양말이 쭉 늘어나 구석에 처박혔다. 옷을 마저 벗고 가운을 입고 잘까, 남자가 들어올 텐데 어쩔까 고민하다 일단 니트를 잡아당겼다. 팔꿈치가 으슬으슬했다.
갑자기 문이 꽝 하고 열리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서 한쪽 팔만 뺀 채로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문 앞에 카드키가 떨어져 있었다. 남자가 자동으로 닫히는 문을 발로 걷어차면서 건달처럼 어슬렁거리며 걸어 들어왔다.
“이소 안녕.”
니트를 벗으려다 말고 도로 입었다. 남자는 니트를 다시 내리는 나를 보며 혀를 차더니 발로 문을 차서 닫았다. 완전히 깡패가 따로 없는 행색이었다.
“아… 개새끼들이 술을 존나 처먹이고…”
한 걸음씩 걸어오며 남자는 중얼중얼 욕이 대부분인 헛소리를 마구 늘어놓았다. 입고 있는 정장과 드레스 셔츠가 아까울 만큼 천박하고 저열한 어휘들이었다.
“인생이 도움이 안 되면 이런 날이라도 도움을 주던가. 하여튼 시팔, 사지육신이 장식인 깡통 같은 새끼들.”
“그만 투덜거려요.”
“아들.”
남자가 왼손을 들어 올렸다. 목이 긴 술병이 들려 있었다. 등 뒤에 손을 가리고 뭘 숨기고 있나 했더니, 기함할만한 물건이었다. 주정뱅이와 똑같은 자세로 남자가 비틀거리며 입구에 입술을 대고 술을 들이켰다. 남자가 입술을 핥으면서 몸을 떨었다.
“으, 너무 달아.”
“그럼 마시지 마세요.”
“레드 와인으로 들고 올 걸 그랬나.”
“가서 바꿔 오시던가요.”
“네가 좀 쓰지.”
거친 목소리가 남자의 성대에서 긁혀 나왔다. 남자가 입으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씩 웃었다.
“내 아들.”
술에 취했는지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황금색 샴페인이 병에서 줄줄 흘러나와 카펫을 적셨다. 한숨을 쉬면서 일어나 남자의 손에 들린 술을 뺏고 재킷을 벗기려고 했다. 남자가 고개를 저으면서 몸을 뒤로 뺐다. 텅 빈 손 안을 쥐어보며 한숨을 쉬었다. 술주정뱅이는 이래서 힘들다.
“벗겨줄게요. 빨리 자요.”
“안돼….”
“뭐가 안 돼요. 빨리 누우라니까요.”
“아아, 재킷을 벗으면 예쁘지 않잖아.”
만취한 것처럼 보이는데 남자는 느리지만 또렷한 발음으로 풀어진 재킷의 단추를 다시 채웠다. 행거치프는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남자의 양복 상의 주머니에 장식되어 있었다. 붉고 푸른 천 조각을 보다 남자가 들고 있던 샴페인을 내 입술에 붙였다. 단맛이 나는 술인지 병 입구가 끈적거린다. 입술을 열고 한 모금 마셨다. 입 안에서 탄산이 타닥타닥 터졌다.
비쌀 게 분명하지만 한탄스럽게 아무 향도 느껴지지 않는 샴페인을 꿀꺽 삼키자 남자가 다른 물건을 내밀었다. 눈앞이 온통 붉었다. 영글차게 피어난 꽃잎이 몇 장 공중에 부산스럽게 흩날렸다. 남자가 바보처럼 수줍게 웃는다. 첫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소년처럼.
…장미꽃.
붉어진 남자의 얼굴이 얼룩 한 점 없는 백지 같다. 감쪽같은 사랑의 연극에 눈이 멀어버릴 듯 아득했다.
“명색이 연말인데…”
“……”
“선물이야.”
남자가 술에 취해 붉어진 뺨을 움직이며 웃었다. 매끄럽게 웃는 입술이, 붉은 꽃과 지나치게 잘 어울렸다.
개새끼.
정말로 미친 놈이었다. 천성이 악해 이게 누군가를 미치게 만든다는 것을 몰랐다.
수없이 많은 장미꽃이 눈앞에서 흐트러진다. 흰 눈이 내려앉아도 꽃잎은 생생하다. 남자가 장미꽃잎을 한 장 뜯어 내밀었다. 망설이다 이로 그것을 받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하고 풍부한 장미향 대신 남자의 손가락에서 찬 내음이 나는 것만 같다.
붉은 장미꽃을 입에 문 채로 남자의 혀를 받았다. 부드러운 꽃잎이 혀 안에서 잘게 짓이겨진다. 목덜미를 잡아 오는 남자의 손길에 헐떡거렸다. 짧고 농밀하게 입을 맞춘 남자가 속삭인다.
“생일 축하해.”
혼돈으로 가는 아름다운 길을 축복하며, 남자가 느리고 부드럽게 내 손을 잡았다.
“Happy New Year.”
해가 변했다. 겨우 스물둘에서 겨우 스물셋이 되었다. 남자가 내게 안겨준 흐드러지게 핀 붉은 장미꽃과, 날카로울 만큼 차가운 손가락의 온도가 영원히 나를 찌를 것 처럼 뾰족하게 날을 세웠다.
아니야, 생각하지 마. 아픈 것도 지나가면 한 때였다. 불확실한 가정도 가정하지 않으면 없던 것이라 생각할 수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는 강물처럼 막을 수는 없었다. 기대를 하게 된다.
바깥은 여전히 흰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 사이를 헤치고 거대한 함성과 함께 하늘에 불꽃이 피었다. 흩날리는 눈발을 뚫고 올라와 붉은 절경이 하늘에 가득 피어났다. 호텔 아래 파티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도, 추위를 이기며 신년의 처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지금은 똑같이 저 불꽃을 보고 있겠지.
굴욕적인 절망과 파괴적인 분노에 크리스마스를 이르게 보내고 남자와 잤다.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니 연말이었고, 새롭게 한 해를 집어삼켰다.
피가 흐른다. 정제되지 않은 피가 일제히 흘렀다.
입을 벌려 공기를 빨아들였다. 갓 따낸 산소였다.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