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7)

<-- 누수 --> 

                                                

그는 이후에도 나를 꼬박꼬박 방에 불렀다. 나는 남자의 침대 안에서 같이 누웠다. 종종 남자는 베개를 베고 누운 내 뺨을 만지다 입술을 붙여왔다. 새벽에 깨서 돌아가는 건 말리지 않았지만, 그런 날은 어김없이 새벽까지 혹독하게 나를 굴렸다. 잠자던 남자를 깨워 숙제 검사를 받다 강제로 키스를 당하기도 했다. 체력이 떨어지니 점점 남자의 품에 안겨 아침을 맞이하는 날이 늘었다. 종내에는 내 침대에서 자는 시간보다 남자의 방에서 자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만큼 남자와의 키스도 익숙해졌다. 남자가 왜 입을 맞추는지 의도는 파악할 수 없었다. 미친놈의 변덕을 이해하려고 해봐야 소용없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는 건드리지 않는 걸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억지로 끌고 들어간 회의실에서 남들이 들어오기 직전에 키스를 하다 놓아줬을 때는 살심이 풀풀 솟았다. 남자는 아슬아슬한 그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의 변덕이 언제 끝까지 치솟을지 몰라 늘 몸을 사리고 다녔다. 고분고분하게 시키는 일을 하고, 손가락을 까딱거리면 말없이 남자의 곁으로 가 서서 눈을 감았다. 남자는 사무실에서 내게 키스할 때가 되면 희롱도 짙어졌다. 종종 허벅지 위에 앉아 키스할 때도 있었다.

위에서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했다. 남자는 법적으로 아들인 내게 노골적인 스킨쉽을 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전혀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종종 내 얼굴을 숙이게 해 이마를 맞대고, 딱 달라 붙어있는 조용한 그 순간을 오래 보내기도 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무도 우리가 키스를 하는지 모른다. 아무도 우리가 한 침대에서 잠이 드는지 몰랐다. 남자와 나 사이의 비밀은 끝도 없이 깊어지고 있었다. 강제성이 부과되었다고는 하지만, 내가 이렇게 폭력에 약한 인간이었을까.

문제는 나도 남자의 키스에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남자가 다가오면 자연스럽게 입술을 벌렸다. 혀가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면 입 안에 향수가 섞여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남자의 체향이 어떤 것인지 구별할 수 있어졌다.

달콤하고 점잖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남자는 생동감 있는 몸짓으로 내 입안을 짓밟고 입술을 깨물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내 입술 안쪽 점막을 눌렀을 때는 소름이 끼쳤다.

기분이 좋다고 생각한 건 완전히 겨울이 되었을 때였다.

남자는 볼일이 있다고 출장을 갔다. 돌아올 때쯤 연락을 한다기에 청소도 미루고 빈둥거리고 있었는데 방금 공항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비서나 남자나 전부 한통속이다. 속으로 욕을 퍼붓다가 허겁지겁 청소 도구를 들고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에는 이골이 났던 지라 금방 방 청소를 끝내버렸다. 공항에서 짐을 찾고 돌아오려면 시간이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뭘 해야 하나. 청소를 재점검할까, 망설이다 서재 문을 열었다.

왜 이곳으로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남자와의 관계가 멀어지거나 가까워졌던 일들이 전부 일어났던 서재는 병원에서 퇴원했던 이후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남자가 취미생활을 멈춘 지도 꽤 되었기 때문일 테다.

그는 최근 바빠 보였다. 내가 골탕을 먹여 미뤄버렸던 회의 말고도 남자가 참석해야 하는 회의는 많았다. 나는 포장마차에서나 쓰는 빨간 플라스틱 의자를 들고 남자 옆에 앉아 회의를 강제로 시청해야만 했다. 사람들은 이제 남자를 따라다니는 내 존재에 완전히 익숙해진 것처럼 굴었다.

정말 내게 회사를 맡길 생각일까. 키스는 그럼 왜 하는 걸까. 이게 벌이라고 생각하나. 종속이 된다고 보기에도 민망했다. 남자와 남자 사이에서, 섹스어필이 이루어지는 키스라.

문가에 서서 숨을 멈추고 방 안을 보았다. 오후를 막 넘기고 있는 햇살은 부드러운 빛을 끌어안고 있었고, 가구에서는 나무 냄새와 연한 풀잎 냄새가 났다.

서재 바닥은 남자가 부순 물건들로 엉망이었다. 그 뒤로 사용하지도 않았는지 비닐도 뜯지 않은 새 의자가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슬리퍼를 신지 않았으면 진작 발이 엉망이 됐을 것이다. 앞코에 툭 차이는 플라스틱 조각을 보았다. 뭔지 모를 부품의 일부 같았다.

잠깐 고민하다 방 정리를 시작했다. 남자가 깨트린 재떨이 조각을 집어 쓰레기통에 넣고, 함선의 파편도 모아 쓰레기통에 부었다. 장갑을 끼지는 않았지만 조심해서 잡으니 다치지는 않았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만큼 방은 차근차근 깨끗해졌다.

스팀 청소기로 한번 방을 밀고, 다시 마른걸레로 닦으니 서재 안은 반들반들 빛이 났다. 창을 가린 블라인드를 올렸다. 햇빛이 확 쏟아졌다. 잠깐 눈을 감고 빛을 맞이했다. 어디 있어도 해는 공평하게 얼굴을 따사롭게 만들었다. 겨울로 접어든 햇살은 불쾌하지도 않고 청량했다. 어딘지 차가운 느낌도 있었다.

“아들?”

햇빛에 지나치게 오래 빠져 있었나 보다. 듣기 싫은 목소리에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옆으로 비켜선 태양 빛에 눈이 따가웠다.

“오셨어요.”

남자는 방문에 비스듬하게 서 있었다. 커다란 그림자로 이루어진 것 같은 실루엣이었다. 가늘게 좁힌 눈 사이로 이상한 표정을 한 남자가 보였다.

“…아버지?”

“응?”

내 부름에 대답은 했지만, 남자는 여전히 얼빠진 놈처럼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엿 먹이려고 늦게 귀가를 알렸는데, 방이 깨끗해서 놀랐나. 꺼림칙한 느낌이 들어 다시 한 번 남자를 불렀다.

“왜 그러세요?”

“아니.”

“네?”

“어, 좀… 이상하네.”

이상한 건 남자였다. 성큼성큼 다가와 내 얼굴을 감싸 쥐며 남자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새로운 싸움법인가 싶어 남자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섬세한 탐구작업이라도 벌이는 것처럼 세세하게 나를 훑어대고 있었다. 햇빛이 직통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남자의 얼굴은 솜털까지 보일 정도로 선명했다. 꽉 다물린 입술이, 갈색 동공이 나를 관통이라도 시킬 것처럼 겨냥했다.

“…딱히 키스를 하고 싶진 않았는데.”

“뭐라고요?”

돌아오자마자 불쾌한 소리부터 서슴없이 하는 남자가 내 입술을 엄지로 눌렀다. 윗니와 아랫니에 입술이 눌려 아팠다. 고개를 도리질 치려고 했지만 남자는 내 얼굴을 단단하게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방금.”

눈썹을 위로 울리면서 눈으로 물었다. 또 뭘 잘못 먹어 이러나 싶다.

“네가 이렇게 예뻤나, 하는 생각을 했지.”

소름이 쫙 끼친다. 이런 변태 호모 자식. 눈으로 욕을 쏘아 붙고 있는데 남자가 픽 웃는다.

“맨날 불경한 눈으로 나를 봐서 아주 싫어하는데… 조금 전에는 그냥 네 눈이었거든.”

눌린 입술이 얼얼했다. 남자는 내 입술 안쪽을 이로 찢으려고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문질렀다.

“언제쯤 너는 그런 눈만 해 줄 거지?”

“몰라요!”

참을 수 없는 통증에 남자를 발로 차고 떨어져 나왔다. 욱신욱신 쑤시는 입술을 문지르며 소리를 질렀다. 남자는 아쉬운 듯 자신의 빈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기가 찰 만한 내용이었다.

“섹스할래?”

“변태예요?!”

“아니야. 정상이라고.”

“나보고 아들이라며!”

“대충 그렇긴 해.”

“뭐가 대충이야!”

어린아이처럼 탱탱 부어서 고집을 부리는 남자를 보며 소리를 박박 지르다가 목이 다 쉬었다. 변태 새끼. 아들이라고 부르는 남자한테 키스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소리 좀 빽빽 지르지 마. 분위기 안 나잖아.”

“미쳤어요?!”

기함할 만한 소리를 지껄이며 남자는 내 어깨에 매달렸다. 소름이 쭉 돋았다.

“아들, 눈 좀 감아봐.”

“그래, 나는 당신 아들이라고!”

가장 중요한 요점을 짚어주자 남자가 입술을 씰룩거렸다.

“예뻐해 줬더니, 배은망덕한 새끼.”

배은망덕한 새끼들은 다 나가 죽은 모양이었다. 예쁜 얼굴로 혜택받고 살아온 거로는 나보다 더할 것 같은 인간이 삐진 티를 낸다. 그래도 키스는 아니다. 나는 호모도 아니고 호적상 아버지와 섹스를 할 정도로 미친놈은 아니었다.

“너 같은 걸 예뻐해 봤자지.”

도대체 누가 할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화가 나서 혼자 씩씩 숨을 내쉬고 있는데 남자가 서재 문을 쾅 닫았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남자는 피곤함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표정으로 말끔하게 서 있었다. 남자가 내 가까이 걸어왔다. 검은색 코트 자락이 남자의 무릎 근처에서 흔들거렸다.

겨울 코트에는 바람이 묻어 있었다. 집은 늘 적정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깥이 얼마나 추운지도 몰랐다. 남자가 없는 동안에는 나도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 엄마를 돕고, 강아지와 종종 놀아주고, 여행을 떠난 노인이 언제 기습적으로 들이닥칠지 몰라 가슴을 졸여가며 있었을 뿐이다.

남자가 내게 다가올 때마다 한기가 들었다. 뼛속이 바짝바짝 마르게 춥다. 눈가와 입술 끝이 차갑게 얼어 있는 게 느껴졌다.

손가락은 여전히 차가웠다. 장갑도 잘 끼지 않는 남자의 손끝이 내 귓불을 매만졌다.

“아들, 눈 감아볼까?”

목소리가 낮게 깔릴 때마다 어둠이 찾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해가 넘어가며 순식간에 어두워질 때, 그 순간 같았다.

침을 삼키고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이다. 남자의 손바닥이 다가와 내 눈을 가렸다. 한숨을 쉬기 위해 입술을 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남자가 몸을 숙였다. 숨은 남자의 입 안으로 넘어갔다. 남자가 내쉬는 호흡이 내 기도 안에 밀려 들어왔다. 덥고 습한 공기로 몸이 가득 찬 기분이었다.

목구멍 안쪽이 간질거렸다. 남자가 혀에 힘을 주고 혀 밑부분을 긁었다. 침이 고였다. 정수리가 찌릿찌릿하고 간지러웠다. 키스만 하다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는지, 남자는 집요하게 내 입 안을 휘저었다. 달고, 쓰다. 맵고 거칠다.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심장이라도 쥐어 잡힌 것처럼 심장이 조여들었다. 혈관이 폭발할 것 같이 달아올랐을 때 남자가 그걸 알기라도 한 것처럼 내 등을 쓸었다. 차가운 손이 피부에 닿자 몸이 떨렸다. 손가락 끝이 살금살금 성대와 쇄골 윗쪽을 문질렀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혀가 끈적거리고 입안에 뜨거운 숨이 가득 찼다. 아, 입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뭉쳤다. 남자가 내 뒤통수를 힘껏 끌어안았다. 동조하는 것처럼 남자의 코트를 쥐어짰다.

한참 내 입술을 삼키고 탐욕스러운 괴물처럼 먹어치우던 남자가 입술을 떼고는 중얼거렸다.

“너 섰어.”

경악스러웠다. 나는 비명을 삼키며 몸을 주춤거렸다. 충격이 먼저 정신을 유린했다.

......뭐?

“꼴려?”

“미쳤어?”

“니가 너무 느끼는 얼굴을 하길래.”

“생리적인 현상이야!”

소리를 질렀다. 수치심에 몸이 부들거렸다. 남자가 자신의 턱을 쓸며 장난스러운 척 음란한 말을 내뱉었다.

“아버지랑 키스하고 세우는 아들이라.”

“닥쳐!”

급기야 고간 위로 손을 댄다. 남의 성기를 슬금슬금 쓰다듬는 손길에 남자를 확 밀쳤다. 남자가 슬쩍 밀려주며 씩 웃는다. 이건 너무 하잖아. 숨까지 헉헉거리며 바지춤을 손으로 가렸다. 얼굴이 뜨겁다 못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았을 리 없다. 입술을 깨물었다. 강압적으로 합의된 폭력이다. 내가 느낄 리가 없다. 하지만 남자의 혀가 뿌리 근처를 누를 때, 볼 안쪽을 문지를 때, 치아를 두드릴 때 기분이 좋았다. 머리에 쥐가 내리는 것처럼.

“…역시, 섹스 하고 싶은데.”

“제발 좀 닥쳐요.”

남자는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허리를 끌어안았다. 비닐도 벗기지 않은 의자 위에 앉았다. 엉겁결에 남자의 허벅지를 타고 마주 걸터앉았다. 불편하고 위험한 무게에 의자가 뒤로 기우뚱거렸다.

“이거 놔요.”

“조용히 해. 꼬리를 흔드는 것도 아니고, 이건 매번 시끄러워서…”

사람을 개 취급하며 남자가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고르게 숨을 내쉬며 남을 인형처럼 다룬다. 남자를 밀어내려고 했는데 마음 먹은 대로 손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망설이다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허리와 등을 꽉 끌어안긴 채 남자를 품에 가둔 채로 한참을 있었다. 단지 그러고 있었을 뿐인데 기분이 이상했다. 키스로 정말 정이 들었나. 나는 게이도 아닌데. 숨을 크게 쉬는 게 힘들었다. 턱턱 막힌다.

남자가 손가락으로 내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피곤해.”

“과로사하면 되겠네요.”

“말은 정말 잘하는군.”

남자가 내게 기댄 채로 웃는다. 정말 피곤한지 붙어서는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노인은 여행을 가고, 남자는 출장을 갔다. 계절이 겨울로 넘어오면서 야근을 해야 할 때도 잦아졌다. 회사 전체가 연말 스퍼트와 내년 매출을 위해 수군거리는 게 느껴졌다.

평소에는 같이 붙잡아 두다가도, 야근이 길어질 것 같으면 남자는 나를 먼저 집으로 돌려보냈다. 시킨 대로 남자의 방에서 누워있었다. 혹시 무슨 짓이라도 당할까 봐 뜬눈으로 기다렸지만, 새벽이 지나고, 아침 해가 밝아와도 남자가 돌아오지 않을 때가 많았다.

회사로 가보면 그곳에서 밤을 새운 남자가 서류를 집어 던지며 짜증을 내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한 회사의 사장이란 남자처럼 그렇게 죽으라고 일을 해야 하는 자리일까. 그렇다면 정말 사장 같은 건 되기 싫은데.

“부사장이란 새끼는 일을 지지리도 못해. 해외물을 처먹으면 뭐해, 머리가 병신인데…”

“네네. 알겠으니까 좀 떨어져요.”

“미국 지사장 새끼도 똑같아. 다 모가지를 분질러버려야 해.”

“직접 그렇게 하시고 감옥이나 가세요.”

“여기서 옷 벗고 시원하게 섹스하기 싫으면 입 닥쳐.”

“……”

나불나불 떠들던 입을 조용히 닥쳤다.

남자의, 아주, 그러니까 애써 장점을 끄집어내서 칭찬을 해보자면 매우 강제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키스 정도는 내 마음대로 하겠지만 섹스까지는 의사를 존중해줄게, 라는 개떡 같은 마인드에 나는 매우 순종적이었다. 괜히 반항하고 남자의 성미를 들쑤셔 게이 섹스를 하느니 비굴하게 숙이는 게 낫다.

그렇다고 내가 전부 포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슬슬 버틸 만큼 버텼다는 생각이 들자 남자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남자가 아쉬운 얼굴로 내 고간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미친놈.

“아버지랑 그렇고 그런 짓까지 하긴 싫거든요.”

“키스나 섹스나.”

“전혀 다릅니다.”

“고집부리긴.”

언제부터 남자와 자는 게 고집을 부리는 일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대화하는 것도 지쳐 방으로 돌아가려고 등을 돌렸다.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울렸다. 사람을 홀릴 때 쓰는 부드럽고 달콤한 소리였다. 남자가 매우 화가 나거나, 매우 즐겁거나, 살살 달래며 회유책을 쓸 때 내는 소리.

“나랑 자자, 아들.”

“미쳤으면 여기서 행패 부리지 말고 병원엘 가요.”

“자면 사람 취급해 줄게.”

“허, 사람 아닌 거랑 키스도 하시고. 비위가 좋으시네요.”

의자가 삐거덕거린다. 남자는 의자 위에 앉아 어린아이처럼 장난을 치며 느물느물 웃었다. 웃는 얼굴만 봐도 설탕이 녹아내릴 것 같이 달다. 겨울 햇살을 고스란히 받은 얼굴에 정신을 뺏길 것 같았다.

“욕구불만이면 여자를 만나요. 아니면 아들이 아니고 다른 남자를 만나거나.”

“난 네가 좋은데?”

말이 안 통한다. 입을 다물고 정말 방을 나가려는데, 남자가 재차 나를 불렀다.

“이소야.”

“……”

“정말 네가 좋다니까?”

“성격도 아주 좋으셔.”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남자가 등 뒤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안 속네.”

속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입 안에서 욕을 삼키며 서재를 빠져나왔다. 남자의 긴 탄식 소리가 꼬리를 물고 따라 나왔다.

그 날 이후로 남자는 집요하게 나를 괴롭혔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걸어오는 온갖 수작질은 이미 해탈한 지 오래되었다. 가끔 엉덩이나 허리로 손을 슬그머니 뻗어올 때면 손가락을 하나하나 다 부러트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문제는 언어였다. 행동은 참겠는데, 언어는 상상 이상으로 괴로웠다. 예쁘게 낳아줘 봐야 쓸모없다고, 입에서 나오는 말의 태반이 불경스럽기 그지없었다. 언어라고 붙어주기도 민망할 정도로 저질스러운 단어는 정신까지 득득 갉아먹었다. 점점 정신을 갉아먹는 남자와의 접촉에 체력까지 고갈되었다.

남자는 자신의 사무실에 누가 봐도 학생용 책상으로 보이는 걸 하나 가져다 놓고 나를 앉혔다. 책상에는 책들이 가득 찼다. 남자는 온갖 숙제를 잔뜩 시키고 제때 끝내지 않았다는 빌미로 마구잡이로 입을 맞췄다. 평범하게 키스만 해도 정신 한 구석이 피폐해질 마당에, 남자는 각종 방식으로 나와의 키스를 즐겼다. 손가락을 내 입 안에 집어넣고 침을 뚝뚝 떨어트리는 걸 구경시켜 줄 때도 있었다. 거울로 내 더러운 꼴을 보고 있을 때는 그냥 혀를 반 토막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들, 아들, 꼬박꼬박 그렇게 부르고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으면 성질은 있는 대로 내면서 하는 건 성희롱 이상이라니. 엄마가 매일 매일 내 안색을 걱정했지만 차마 이 일을 말할 수도 없었다.

강아지가 내 발밑에 와서 애교를 부린다고 핥으면 영혼이라도 바꾸지 않을래, 제의라도 하고 싶었다. 집과 회사, 회사와 집. 하루의 시작과 끝은 남자와의 키스. 이러다 한강 물에 달려가 자살을 해도 시원찮을 것 같았다.

초등학생용 어휘에서 발전해 중학생 영어 단어장을 붙잡고 넋을 놓고 있었다. 남자는 나는 한 줄도 해석하지 못할 영어 서류를 국어책 읽듯이 휙휙 넘기고 있었다. 초중고 영어 교육은 똑같이 했을 텐데. 이래서 사교육이 중요한가 보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멍하니 있는데 진동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휴대폰은 늘 바빴다. 또 업무 전화겠거니 하며 턱을 괴고 있는데 남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화 안 받아?”

“…네?”

“네 전화야.”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진동 소리를 내며 표면을 긁고 있었다. 턱을 괴고 있던 팔을 치우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이근영이었다.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과거를 탄생시킨 술 파티 이후 연락을 하고 있지 않았었는데. 잠깐 망설이다 통화를 눌렀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타박했다.

[죽었냐?]

“살아있는데.”

[그때 술 먹은 뒤로 아예 하직하신 줄 알았지.]

누가 보면 우리가 아주 자주 연락하는 친구 사이인 줄 알겠다. 코웃음을 치면서 같이 따졌다.

“연락 없는 건 너도 똑같았거든.”

[나는 한 달 전에도 연락했거든. 전화가 왜 이렇게 자주 꺼져있어?]

내 휴대폰이 남자의 손에 하직했을 때 연락한 모양이었다.

“니가 재수가 없었겠지. 왜?”

[…나 여자 친구랑 헤어졌어. 술 먹자…]

하여튼 이럴 줄 알았다. 서로 필요할 때 쓱 불러내서 술이나 진탕 퍼마시다 헤어지고. 또 일이 있으면 불러내 술을 퍼먹고 헤어지고. 근영이와는 이런 게 편해서 좋았다.

[형님이 풀코스로 쏠게. 제발 마셔주라.]

술이라. 안 마신 지 엄청나게 오래되었다. 술을 처먹고 비서에게 전화해 지랄한 뒤로 알코올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뜨끈한 탕에 소주. 한 번 생각하자 갑자기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어떻게 술 생각을 이때까지 못 했나 할 정도로 옛날의 거한 취기가 무럭무럭 커졌다. 문제는 이걸 남자가 허락해주냐는 말인데…

나는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 슬쩍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남자는 서류를 아예 내려놓은 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 지레 찔려서 시선을 피하자 남자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괜히 기분이 상했다.

“물어봐야 하는데.”

[열다섯 살이냐, 물어보게.]

“지금은 형님이 자유의 몸이 아니야.”

[미친놈, 제대하면 다 자유의 민간인이야.]

“…군대가 낫지.”

군대에서 구를 때는 이런 악몽을 꿀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우울하게 중얼거렸더니 이근영이 어? 하고 멍청하게 되묻는 소리를 냈다.

“아니야. 나갈 수 있으면 문자 보낼게.”

[어, 빨리해.]

"그래.”

통화를 끝내자마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었다.

“친구 보러 가.”

“네?”

친구랑 술을 먹으러 가는 걸 이렇게 곱게 보내 줄 인간이 아닌데. 내가 바라는 건 한 번도 그대로 들어주는 법이 없고, 싫어하는 건 골라서 시키는 성격 파탄자가 지금 와서 착한 척할 리가 없다. 의심의 눈으로 남자를 봤다. 남자는 천사처럼 다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름이 끼쳤다.

“아들이 약속이 있다는데, 당연히 보내줘야지.”

“……”

“표정이 불순한데?”

“…아닙니다.”

표정 관리가 안 된 모양이다. 일그러진 얼굴을 바로잡으려고 애쓰며 남자의 눈치를 봤다.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이 눈을 접고 방글방글 웃고 있는데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망설였다. 술이냐, 아니면 혹시 모를 위험한 상황의 예방이냐.

“…그럼, 오늘만.”

고민은 10초도 가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남자는 굳이 비서까지 시켜 나를 약속장소로 데려다주었다. 최근 남자의 과도한 스킨쉽 요구와 맞물린 것 같아 찝찝했다. 도움 안 되는 친구 새끼랑 술 먹는다고 내가 명줄을 팔아버린 건 아니겠지. 불편한 상황에 몸을 비틀면서 술집으로 달려갔다.

먼저 소주를 까고 있었는지 이근영이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채로 아는 체를 했다.

“여, 정이소.”

반갑게 인사를 해줘야 하는데 이근영의 말에 움찔했다. 정이소라니, 그 이름으로 안 불린지 몇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색했다. 정이소로 불린 날이 더 많은데, 왜 양이소가 이제 내 이름인 것 같을까. 어색하게 뒷목을 긁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다. 여자친구랑은 왜 헤어졌냐?”

“술 먹고 필름 끊겼다고…”

“잘하는 짓이다.”

“그래서 오늘도 끊길 거야.”

“제발 나는 빼주지 않을래.”

건네주는 술잔을 받으며 대꾸하자 이근영이 씩 웃으면서 소주를 가득 따랐다.

“마셔라, 친구를 위하여.”

“날 위해 니가 좀 마셔봐라.”

인생 말아먹은 거로 치면 양부 타이틀을 달고 있는 미친놈과 주둥이를 비비는 나만 할까. 우울한 생각이 들자 기운이 쭉 빠졌다. 크게 한숨을 푹 쉬며 소주잔을 부딪쳤다. 넘친 소주가 손가락을 적셨다.

한입에 소주를 털어 넣고 땅콩을 깠다.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 먹던 이근영이 나를 보더니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였다.

“너 돈 많은 애인이라도 생겼냐.”

“뭔 헛소리야.”

“역시, 저번에 봤을 때부터 신수가 훤해져서. 어디서 금수저 맛이라도 좀 빨다 온 것처럼 부티가…”

예리한 새끼. 오천 원 짜리 티셔츠에 바지를 입고 다니다 지금은 몇만 원에서 몇십만 원 짜리 옷을 걸치니 당연히 다르긴 할 것이다. 나는 둘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구별도 못 했지만.

그것 말고 머리카락이나, 피부 같은 외적인 부분도 끌려가 관리받고 있긴 했다. 여자 관리사들이나 여자 손님이 대부분인 곳에서 혼자 관리를 받고 있을 때면 아직도 부끄러워 미칠 것 같았다.

그래도 비싼 돈을 부었다고, 엄마는 종종 내 머리나 뺨을 쓰다듬으며 별 소용없고 우울해지는 칭찬을 하곤 했었다.

“벌써 취했냐.”

이런 이야기를 이근영에게 늘어놓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냥 소주를 콸콸 따라주고 손짓으로 점원을 불렀다.

“여기 계란탕 하나요.”

소주에는 탕이 최고다. 남자가 풀어주긴 했으니 오늘 밤을 아주 제대로 즐기긴 해야겠다. 이근영이 도전적으로 내 잔에도 소주를 부었다. 거의 소주병을 거꾸로 들고 술을 콸콸 쏟아준다. 이젠 건배도 없이 소주를 시원하게 비웠다.

“인생은 혼자야, 너도 혼자 살아라.”

“안돼. 흑, 우리 예쁜 자기 없이 내가 어떻게…”

“내가 살아봤는데 시발, 애인은 다 아무 짝에 쓸모가 없어.”

이걸 우리 엄마에게 미리미리 강요를 해야 했는데. 우울하게 늘어져 소주병을 흔들었다. 바닥에 약간 고인 소주가 찰랑거렸다. 이근영이 땅콩을 입 안에 넣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줌마가 또 문제냐.”

“그냥 내 인생은 망했어.”

“회개라도 해.”

“무교 새끼가… 너나 회개해라.”

“우리 아버지가 난 포기했대.”

목사 아버지를 두고 무교를 외치는 이근영이 너스레를 떨면서 소주병을 새로 땄다. 작은 교회를 하나 가지고 계신 근영이의 아버지는 나를 처음 봤을 때 제발 교회에 오라고 손을 잡고 전도를 하셨었다. 이근영 몫까지 두 배를 다니라고 하셨던가. 간지러운 목을 긁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정말 내 인생은 이제 끝났어. 폭탄이야, 시한부 폭탄.”

“왜, 로또냐.”

“시발 너는 폭탄이 왜 로또냐.”

“몰라. 내가 뭐랬더라?”

이미 이근영은 맛이 간 것처럼 보였다. 대화를 포기하고 잔을 들었다. 이근영이 잽싸게 자신의 잔을 따라 들었다. 시원하게 잔을 부딪치며 한숨을 푹 쉬었다.

남자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한계가 짧아진다는 느낌을 간접적으로나마 받았다. 이젠 남자의 인내심이 얼마나 길지 고민하는 것보다 도피할 방법이나 생각하는 게 나았다. 인생 될 대로 되라지만, 적어도 엿 같은 새끼와 아버지 아들 하며 일을 치는 건 아니다.

알바생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계란탕을 중간에 내려놓고 사라졌다. 내 인생도 저렇게 계란탕처럼 다 풀어먹었어… 슬픈 생각을 했더니 눈물이 나왔다.

“우울한 내 인생.”

“우리 예쁜이 보고 싶어.”

이근영이 앞에서 코를 들이켰다. 나도 같이 훌쩍거렸다. 우리는 서로 다른 헛소리를 내뱉으며 소주를 쭉쭉 들이켰다.

계란탕을 다시 쳐다봤을 때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근영을 먼저 택시에 태워 보내고 겨우 귀가했다. 뒷좌석에 웅크리고 있는 내내 구토를 참는다고 힘을 다 썼다. 겨우겨우 집을 찾아 들어왔더니, 2층으로 올라가는 것도 일이었다. 사람답게 서서 올라가면 또 팔다리가 하나씩 부러질 것 같아 네발로 기어서 올라갔다. 복도에 욕실이 있는 게 다행이었다. 화장실로 우당탕 뛰어들어갔다.

몇 번 헛손질을 하고 겨우 변기 커버를 위로 올렸다. 속이 거하게 꿀렁거렸다. 숨을 쉴 때마다 소주냄새가 푹푹 올라왔다. 안주에는 손도 대지 않고 말없이 소주만 먹었더니 위장이 뒤틀려 죽을 것 같았다. 변기를 붙잡고 헛구역질을 하며 고통에 차 헐떡거리는데 불청객이 나타났다.

“가지가지 하는군.”

“시끄, 욱.”

구역질이 올라올 때마다 식도와 위장이 아파 죽을 것 같았다. 게워내는 게 없으니 고통스럽기만 하고, 답답한 속은 풀리지 않았다. 토하고 싶어. 변기를 붙잡고 몸서리쳤다. 남자가 혀를 차더니 내 등을 두드렸다. 이건 무슨 소름 끼치는 짓이야. 손을 휘휘 내저었다.

“손… 치워요…”

“올리기나 해.”

안 올라온다니까. 있는 힘껏 남자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술기운 탓인지 비틀거리기만 했다. 남자가 두 개로 보인다. 이런 인간이 세상에 두 명이나 있으면 난 진작 죽었을 거야. 몸에서 식은땀이 쭉쭉 흘렀다. 알코올의 맛이 역했다. 오랜만에 마신 탓인지 소주의 취기가 더 끔찍했다. 결국 남자의 가슴팍을 짚은 채 몸을 숙였다. 다시 헛구역질을 시작하자 남자가 짜증을 냈다.

“내 옷 위에 토하면 죽여버릴 줄 알아, 아들.”

“시끄… 꺼져…요.”

“꼬박꼬박 존대하는 척하긴. 그리고 니가 날 붙잡고 있는 거야.”

아, 정말 말하기도 짜증이 난다. 남자의 몸을 밀치고 다시 변기로 몸을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떨어져 나가기 전에 남자가 먼저 내 손목을 붙들었다. 가물가물 감기는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뱃속이 시큰거렸다.

“힘들어 보이는 아들을 위해 특별히 도와주지.”

“무…”

남자의 손가락이 입안을 파고들었다. 반항하기도 전에 길고 차가운 손가락이 혓바닥 안쪽을 깊숙하게 눌렀다. 등과 머리를 누르고 변기 쪽으로 강제로 몸이 틀렸다. 비틀거리다 변기를 겨우 짚고 몸을 지탱했다. 남자가 내 등을 뒤에서 눌렀다. 단단한 가슴팍과 셔츠 중간에 낀 넥타이의 촉감까지 생생했다. 남자의 손가락이 점점 더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싫어, 눈물이 확 고이자 참았던 구역질이 올라왔다. 말간 액체가 식도를 타고 쏟아졌다. 한 번 올리자마자 그 뒤는 쉬웠다. 연달아 몇 번 알코올 덩어리를 뱉어내고 나자 타액이 떨어졌다.

숨을 헐떡거리며 눈물을 떨어트렸다. 화끈거리던 속이 이제야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남자도 내 등에서 가슴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지친다.

“일어나서 씻어. 쓰레기통에 넣어 버리기 전에.”

남자가 세면대에 더러워진 자신의 손을 씻으며 말했다. 씻을 힘이 전혀 나지 않는다. 입에 고인 시고 쓴 침만 뱉어내며 죽은 듯이 늘어져 있자 남자가 혀를 찼다. 뒷덜미를 잡는 손길에 반항한다고 몸부림을 쳤다.

“쉬게 좀 놔둬요…”

“그건 안되지. 난 내 집에 토사물을 들인 기억은 없어.”

냉정하기 짝이 없는 남자가 샤워기를 내게 들이밀었다. 물이 갑자기 쏟아졌다. 얼굴이며 옷까지 흠뻑 젖었다. 인간적으로 더운물을 틀어줬다고 헛소리를 하는 남자를 향해 이를 북북 갈았다. 술 마신 사람에게 더운물이라니. 술기운에 빠져 죽으라는 말인가. 힘이 완전히 빠져 그냥 욕실 바닥에 누워버렸다.

얼굴 위로 새 찬 물줄기가 쏟아졌다. 샤워기를 든 남자가 위에서 나를 내려다봤다.

“정신 좀 차려.”

“알아서 할 테니까 제발 좀 가세요…”

이제 남자와 말할 기운도 없었다. 여차하면 욕실에서 자고 감기에 걸리지 뭐. 뜨거운 물이 쏟아지긴 하는데 손발이 저리고 코끝이 간질간질했다. 에취, 크게 재채기를 연달아 하자 남자가 혀를 찼다.

“아들 하나 생겼더니 귀찮기만 하네…”

아들로 삼아달라고 한 기억도 없는데 남자는 혼자서 매우 수고스럽다는 말투로 나를 잡아 일으켰다. 아직도 물을 뿜고 있는 샤워기를 끄고, 욕실장에서 커다란 수건을 꺼내 든다. 남자가 손바닥으로 얼굴에 흐르는 물기를 훔쳐주더니 내 티셔츠를 잡아당겼다. 이 변태 새끼. 몸을 비틀며 바둥거렸다.

“안 덮치니까 좀 가만히 있어.”

저 말을 믿으면 내가 병신이었다.

“안 믿어요.”

혐오스러운 걸 보는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남자가 수건을 든 채 후, 하고 신경 거슬리는 소리로 웃었다. 입술 한쪽이 비뚤게 올라간다.

“정말 못 믿게 만들어줄까?”

그냥 병신이 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얌전히 몸을 늘어트리자 남자가 내 옷을 마저 벗겼다. 더운물이 끊기니 한기가 바로 들었다. 연달아 다시 재채기가 터졌다. 쿨럭거리는 내 몸을 잡고 남자는 내 젖은 머리와 몸을 대충 닦아주었다. 물이 튀었는지 남자의 셔츠와 바지도 엉망으로 젖어 있었다.

덜덜 떨면서 남자가 덮어주는 수건을 받아 몸을 꽁꽁 감싸 안았다. 얼어 죽을 것 같았다. 코를 훌쩍거리자 남자가 내 머리를 꾹 누르고는 욕실 바깥으로 나갔다. 남자가 열고 나간 문에서 바람이 휙휙 들어왔다. 추워, 얼어 죽겠네. 욕실 바닥에 퍼질러 앉아 아직도 몽롱한 정신을 깨기 위해 열심히 뺨을 꼬집었다.

“옷 입어.”

남자가 내 머리 위로 옷을 던졌다. 살기 위해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얼른 티셔츠를 껴입었다. 이제 젖은 바지도 벗어야 했는데, 남자 앞에서 옷 갈아입는 게 거슬렸다. 바지춤을 잡고 내리려다 말고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코웃음을 쳤다.

“안 건드릴 테니 빨리 갈아입어. 아예 알몸으로 내쫓기 전에.”

저렇게 재수 없게 말하는 것도, 하는 말마다 신용이 가지 않는 것도 능력이다. 최대한 잽싸게 바지를 갈아입으려다 몇 번이나 헛발질을 했다. 욕실 바닥에 머리를 깨기 위해 환장한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는 나를 붙잡으며 남자가 혀를 찼다.

“이젠 술을 금지시켜야 하나…”

“금지를 시키든 뭘 하든…”

슬슬 술이 깨는지 두통이 찾아왔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남자를 보았다. 남자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머리 말려줄까?”

“네?”

“좋아, 파격적인 서비스를 해주지.”

그런 서비스 바라지도 않는데 남의 의사는 듣지도 않고 남자는 막무가내로 나를 잡아끌고 자신의 방에 들어왔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으니 졸렸다. 젖은 수건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대충 물이라도 발라 씻고 게워냈다고 몸이 피로를 호소했다. 빨리 남자가 인형 놀이를 끝내고 재워줬으면 좋겠다.

무거운 눈을 겨우 들어 올렸다. 남자는 젖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삼십 대 중반이면 배도 나오고, 어디 하나 뚱뚱한 구석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남자의 몸은 꽉 짜인 틀 같았다. 거의 매일 같이 있는데 도대체 운동은 언제 하는 거지…?

하루 이틀 운동을 해서 생긴 건 아닌 것 같은 등 근육을 보았다. 셔츠를 입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릴 때 날개 뼈가 있는 공간이 접히면서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게 보였다. 좋겠네, 돈 많은 놈은 뭐든 완벽하고… 몇 번 헬스를 다니다가 포기한 전작을 생각하며 하품을 길게 했다.

“졸려?”

말려 올라간 티셔츠 자락을 내리며 남자가 다가왔다. 졸리고, 아직 덜 깬 술 때문에 속도 아프고, 머리도 아팠다. 이제 다 됐으니 잠이나 자자.

고개를 끄덕거리며 눈을 감았다. 남자가 빠르게 내 뺨을 툭툭 두들겼다.

“일어나. 아직 자면 섭섭하잖니.”

“또 왜요…”

이 사람은 도대체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법이 없다. 남자가 입고 있는 흰색 티셔츠가 눈앞에서 핑글핑글 오르락내리락 했다. 이제 어지러워 미치겠다.

남자가 내 어깨를 잡은 채로 침대 위로 올라왔다. 머리 말려준다더니 왜 거기 기어들어 가는지 모르겠다. 남자를 마주 본 채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가물가물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고 있는데 남자가 내 머리 위에 마른 수건을 덮었다.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비벼오는 손길에 결국 눈을 감아버렸다.

졸린다, 졸려. 내일부터는 절대로 술은 마시지 말아야지. 근영이는 제대로 돌아갔으려나. 저 인간은 비위도 좋지. 토하는 사람 목구멍 안에 손가락 집어넣고 싶나.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카락을 만지는 남자의 손길에 거품처럼 터졌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거의 잠에 빠진 상태로 졸고 있었는데 남자가 나를 깨웠다. 두 번이나 수면이 방해당했더니 짜증이 밀려왔다. 비몽사몽인 상태로 눈을 겨우 떴다. 재수 없는 얼굴이 웃고 있었다. 왜 웃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들.”

“왜요.”

“잘래?”

어쩐지 대사가 불순하다. 꼬이는 혀를 풀어가며 겨우 대답했다.

“…섹스 안 해요.”

“아, 허들이 높네.”

남자가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거의 다 말랐는지 푸석푸석 붕 뜬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남자를 향해 손사래 치며 고개를 저었다.

“좀 잡시다…”

“이야기 좀 하고 자자니까.”

애새끼도 아니고 왜 이렇게 달라붙어 징징거리나 모르겠다. 미간에 주름을 잡고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여전히 재수 없게 웃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요.”

“부탁하고 싶은 건 없어? 귀여우니까 다 들어줄게.”

“음…”

부탁이라.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소원을 말했다.

“저랑 엄마 좀 놔주면…?”

“그건 절대 안 되지.”

시무룩해졌다. 다 들어준다더니. 순 뻥을 치는 건 남자의 특기인가 보다. 기분이 나빠져서 입술을 내밀고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더니 남자가 웃으면서 뺨을 꼬집었다.

“다른 건 없어? 섭섭했던 거 말해봐 봐.”

“섭섭했던 거…”

고민에 빠졌다. 최근에 생각나는 게 하나 있었다. 얼마 전 출장지에서 남자에게 갑자기 연락이 오더니, 중요한 회의가 있다고 나를 대신 보냈다. 처음으로 빨간색 플라스틱 의자 말고 중역급들이 앉는 푹신푹신하고 질 좋은 의자에 앉았다. 눈빛에 얼굴에 구멍이 뚫릴 것 같은 경험은 처음이었다. 까무러칠 것 같이 긴장을 해서 덜덜 떨고 있는데 부장 이상의 주요 직책자들은 하나둘 나를 공격했다. 아들이라더니, 나이가 어쩌고. 학벌이 어쩌고. 뻔뻔하고 저쩌고. 다들 내가 불쌍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이해도 못 하는 기업 이야기를 물어오는데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서 눈만 뜨고 있었더니 단체로 한숨까지 쉬었다. 실무 쪽에서 일하는 부장 한 명이 위로를 해줬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남자에게 말해봐야 똑같이 비웃음만 살 것 같아서 입 닥치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그게 서러웠다. 다들 내 팔자만 보고 굿이라도 하라고 말해줘야 할 판국에, 어떻게 그렇게 괴롭힐 수 있단 말인가. 나를 괴롭히는 사람은 남자로 정말 충분했다.

“회사 사람들이 저 싫대요.”

“누가 그래?”

남자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고는 짜증을 낸다.

“다요.”

“씨발, 다 잘라버려.”

격하다. 평소라면 뜯어말렸겠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같이 유치해지고 싶었다.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이면서 줄줄 일러바쳤다.

“나 혼자 있을 때면 능력도 없으면서 뻔뻔하다고 욕하거든요.”

“어느 새끼야?”

“최 이사요.”

“그 새끼는 자기도 능력 없으면서 지랄이야.”

남자가 맞장구를 쳐준다. 어쩐지 달래주는 기분이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기분이 좋았다. 혼자 히죽히죽 웃고 있으니까 남자고 같이 나를 보고 웃는다. 손을 까딱까딱 하길래 순순히 다가가 남자의 무릎 위에 앉았다. 남자의 어깨 위로 턱을 걸치고 푹 안겨 있으니 노곤노곤했다.

“술을 생각보다 적당히 먹은 모양이네.”

“으음, 인사 불성이 되면 큰일날 거 같아서…”

“왜?”

“아버지랑 끔찍한 관계를 달성한다거나…?”

철두철미도 하시군.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뭐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내가 나름 철두철미하긴 한다. 홀몸으로 사는 엄마를 지켜야하는데 나까지 나사 하나 빠져 있으면 큰일나니까.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노래를 흥얼거렸다.

남자가 내 귓불을 물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소름이 돋아야 하는데 몸이 무거운 탓인지 그냥 따뜻하단 느낌 말곤 없었다.

“아들, 엄청 음치네.”

“술 마셔서 그래요.”

울컥해서 대답했다. 자기는 노래 얼마나 잘 부른다고. 성질이 나서 얼굴을 구기고 있었더니 남자가 내 뺨을 쓰다듬었다. 볼이 만져질 때마다 눈 한쪽이 꿈틀거렸다.

어쩐지 같이 이렇게 있는 기분도 나쁘진 않았다. 아니,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 남자의 성격이 조금만 더 괜찮았다거나, 우리가 양부와 양자의 관계를 이루지 않았으면 뭐… 생각보다 좀 더. 아니지, 아니다. 술을 먹어서 그런가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이근영이 하도 사랑 사랑 연애연애 노래를 부를 때 무시하고 나왔어야 했는데. 주량을 아슬아슬하게 넘긴 술기운이 이성을 마비시키는 모양이었다.

남자가 등을 토닥거렸다. 가볍게 부딪치는 손가락과 느린 박자에 다시 눈이 가물가물 감겼다. 역시 졸리다.

“…졸려.”

“졸려?”

“응.”

“흠, 이대로 재우긴 아까운데.”

방금은 자기가 재울 것처럼 다독거려 놓고는 또 헛소리를 한다. 또 무슨 해코지를 하려는지 음흉하게 웃던 남자가 내 몸을 슬금슬금 쓰다듬는다. 이 변태 자식. 남자의 손등을 벌레처럼 털어내자 남자가 말간 얼굴로 나를 보았다. 눈가에 숨소리가 내려앉았다. 입술이 움츠러들었다 매끄럽게 펴진다. 황홀하게 곡선을 그리는 얼굴에 뺨이 슬금슬금, 간지러웠다.

턱 끝에 입술을 붙인 남자가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차가운 손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남자의 손목을 붙들었다.

“…하지 마.”

“싫은데?”

기름을 듬뿍 먹인 붓처럼 우아한 소리를 내며 남자가 소름 끼치는 말을 지껄였다.

“네 목구멍에 손가락 넣어 토도 받아줬는데, 정액도 한번 싸질러보지그래.”

그가 티와 바지만 가져다줬었기 때문에 속옷을 입지 않고 있었다. 헐렁한 바지춤을 비집고 남자가 손쉽게 약점을 틀어쥐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예민한 곳을 쥐자마자 구역질과 성욕이 한꺼번에 일었다. 남자의 어깨를 긁으며 헛구역질을 했다. 남자가 목을 울리며 웃으며 입술을 부딪쳤다.

립키스를 하는 것처럼 가볍게 입술을 문지르더니 손쉽게 입안에 혀를 밀어 넣었다. 또다. 눈을 반쯤 감은 채 남자의 체향을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남자가 쓰는 향수와 바다 샤워와, 샴푸와 담배. 모든 냄새가 섞여서 오감 중 절반을 짓누르고 있었다.

남자는 내 티셔츠를 밀어 올렸다. 호흡이 부족해 헐떡거리던 가슴이 찬 공기에 닿자 오그라들었다. 남자는 손톱으로 삐쭉 선 솜털을 살살 긁었다. 부드럽게 성기를 주무르며 남자가 혀를 내밀어 가슴팍에 있는 유두를 핥았다. 이게 무슨, 반응하기도 전에 유두를 빨렸다. 남자의 매끈한 입술이 젖은 타액과 숨을 불어 넣으며 맛있는 것을 먹는 사람처럼 유두를 핥았다. 혀가 가슴을 문지를 때마다 표면에 난 돌기가 낯선 자극을 알렸다.

점점 구역질이 잠잠해졌다. 남자가 전해주는 호흡을 받으며 가슴을 헐떡거렸다. 남자 데 구역질보다 쾌감이 먼저 생겼다. 술을 마셔서 그런 거라고, 아까 이미 구역질을 했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마음속으로 위안이 되지 않는 자기 합리화를 시도했다. 허벅지 안쪽에 부풀어 오른 남자의 성기가 느껴졌다. 남자가 허리를 움직였다. 딱딱해진 성기가 바지 천 아래에서 비벼졌다. 기분이 이상해. 남자의 셔츠를 구기며 등을 굽혔다.

“좋아? 되게 즐기네.”

“놓…아, 요!”

“싫어.”

양 유두를 번갈아 실컷 물고 빨던 남자가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싸이코 변태 새끼. 이런 놈 앞에서 술을 먹고 빌빌거리는 게 아니었다. 후회가 드디어 찾아왔다. 남자는 도덕성이 결여된 얼굴로 부드럽게 내 유두를 물었다. 입술로 아슬아슬하게 잡아 물었을 뿐인데 자극이 대단했다. 아아,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남자의 어깨 위에 얼굴을 묻었다.

“예민하네. 술을 마셔서 그런가, 원래 이런가.”

“아니니까 흐으, 이거 놔.”

“봉사해주는 거야.”

“봉사 필요 없, 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직도 내 성기를 붙들고 있던 남자가 가볍게 손목을 움직였다. 으, 몸을 경직시키고 숨을 참았다.

남자가 내 목을 잡아채더니 뒤로 밀었다. 침대 위로 얼굴을 묻은 채 쓰러졌다. 등 뒤로 몸을 짓누르고 허벅지 위에 올라탄 남자가 성기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언제 자위를 했지, 하는 단순한 생각이 머리를 지나쳐갔다. 고속열차보다는 빨랐다. 쾌감이 번들거리며 하반신을 지배했다.

“아!”

엄지가 귀두를 강하게 문지르는 순간 아랫배가 화끈거렸다. 등줄기를 수축시키며 부들부들 떨었다.

아래 춤에서 끈적거리는 소리가 났다. 단순히 성감대를 누르는 생리적인 현상인데 모멸감이 들었다. 남자의 손바닥이 마찰할 때마다 허벅지 안쪽이 당겼다. 손가락이 움직이며 건반을 누르는 것처럼 내 성기 주변을 훑는다. 고환을 치우고 음모가 있어야 할 표면을 훑는다.

“제모도 잘 받고 있고.”

남자의 강압적인 명령 탓에 한 달에 한 번씩 꾸준히 체모 관리를 받고 있었다. 이제 굴욕적인 자세로 누워 있는 것도 익숙해진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뻔뻔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남자가 손톱을 세워 피부 위를 긁었다. 시트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어린아이처럼 반들반들한 피부를 훑는 남자는 본격적으로 두 손을 다 바지 안에 집어넣었다. 고환과 깨끗해진 피부를 건드리며 귀두를 자극하고 기둥을 흔들었다. 남자의 손을 타고 체액이 흐르는 게 보이지 않아도 느껴졌다. 땀이 흘렀다. 입을 벌리자 생리적으로 떨어진 침이 시트 위에서 얼룩졌다.

허벅지에는 여전히 불쾌한 남자의 성기가 느껴졌다. 딱딱하고 뜨겁게 흥분했다. 평소 체온보다 훨씬 높아진 것도 알 수 있었다. 아, 여전히 손안에서 마찰하는 성기에 배와 손바닥이 근질거렸다. 허벅지도 종아리도, 무릎과 발가락까지 꿈틀거렸다.

“토할 거 같아.”

비굴하게 시트에 머리를 문지르며 울먹거렸다. 몸을 숙이고 있었더니 위장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남자에게 잡힌 아랫도리가 데일 것처럼 화끈거렸다. 더는 남자의 손이 차갑지 않았다. 덥고, 뜨거워.

“사정하고 싶은 거겠지.”

남자는 어림도 없다는 것처럼 하체를 밀착시키며 속삭였다. 허벅지 근처에서 은근히 문질러지는 성기가 천을 사이에 놓고 군림한다. 고환을 주무르고 세게 음모가 있었던 부위를 긁어대는 손가락에 미칠 것 같았다. 변태 새끼. 누구를 지목할 수도 없이 시트를 쥐어뜯을 것처럼 세게 잡았다.

“하, 싸봐. 응? 싸지르라니까.”

“읏, 흐. 아니… 거긴. 아!”

성기를 세게 흔들어댄다. 쩍쩍하며 체액과 피부가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남자가 손가락을 들어 잡아 쥐어짜는 것처럼 성기 전체를 잡아 눌렀다.

“흐, 아, 아아!”

끓어오르던 냄비가 일시에 흘러넘치며 불이 꺼지는 감각이 들었다. 왜 남자는 하반신의 노예일까. 쓸데없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깊은 쾌감이 척추를 관통했다, 어깨와 팔뚝의 근육이 일시적으로 굳었다 서서히 풀어졌다.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 하며 숨이 눈앞을 하얗게 가렸다 치워졌다.

천천히 바지춤에서 손을 빼낸 남자가 자신의 손을 전등에 비춰보았다. 하얀 점액질이 끈적끈적하게 묻어난 손가락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죽어버리고 싶었다.

남자는 자신의 코끝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냄새를 맡았다. 전형적인 변태 같은 행동에 소름이 쭉 끼쳤는데, 그거로 모자란다는 듯 남자가 혀끝으로 내가 파정한 정액을 핥았다. 미친놈. 입안에서 차마 터져 나오지도 못하는 욕설을 담고 뻐끔거렸다. 남자가 젖은 손으로 내 뺨을 툭 치며 웃었다.

“풋내나네.”

개새끼. 이를 갈며 남자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저 뻔뻔한 얼굴에 한 방 먹여줄 생각이었는데 몸이 엉망으로 지친 상황이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상체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비틀거리더니 재수도 없게 남자의 고간위로 얼굴을 박았다. 같은 사내자식 거기로 코를 박은 것도 짜증이 나는 마당에 남자의 성기가 부풀어 있는 것까지 느껴졌다.

남자가 내 뒤통수를 눌렀다. 뺨과 코에 남자의 성기가 비벼졌다. 남자가 기분 좋은 숨소리를 내며 허리를 움직였다. 얼굴을 내주고 자위를 하는 것 같은 행동에 팔다리를 바둥거렸다. 점점 힘이 빠진다. 당장에라도 자신의 바지를 벗기고 내 입 안에 성기를 집어처넣을 것처럼 굴던 남자가 나를 끌어안았다.

“진짜 귀엽긴.”

비웃는 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잃었다. 인생 최악의 굴욕이었다. 밤새도록 추위와 더위에 번갈아가며 몸을 떨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었다. 빌어먹을 남자는 출근을 했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 누운 채로 이불을 퍽퍽 차다 겨우 마음을 굳히고 하체를 확인했다. 속옷까지 아주 깔끔하게 입혀져 있었다. 정액으로 더러워졌을 바지는 보이지도 않았다. 이를 우드득 갈다가 비틀거리며 1층으로 내려갔다. 엄마가 부엌에서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어났어? 술을 많이 마셨다며. 적당히 해야지, 다 큰 애가 그러면 어쩌니.”

엄마가 익숙한 잔소리를 시작했다. 엄마의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공황상태였다.

필름이라도 끊기면 좋았을 텐데 아슬아슬하게 만취 직전이었는지 전날 밤 있었던 내용이 모조리 기억이 났다. 남자의 품에 매달려 유치하게 일러바쳤다. 그러고 나서는 유두가 빨리고, 성기가 잡히고, 남자의 손안에 사정했다. 남자는 내가 싼 정액을 핥았다. 조롱당했다.

…씨발.

머리를 쥐어뜯었다. 으아아, 울부짖기 시작하자 엄마가 깜짝 놀라 내 등을 두들겼다. 겨울 햇볕을 받으며 잘 자고 있던 강아지도 폴짝폴짝 뛰어와 내 발등을 미친 듯이 핥았다. 왕왕 짖어대는 목소리와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는데 정말 죽어버리고 싶었다. 나 자신이 너무 싫어서 견딜 수가 없다.

눈물을 가득 매달고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가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내 얼굴 이곳저곳을 들여다보며 발을 동동거렸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따뜻하고 포근한 품에 안겨서 위로를 구해봤지만 희롱 된 정신은 복구시킬 수 없었다. 조용히 코를 훌쩍거리자 엄마가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젯밤에 꿈자리가 이상하게 뒤숭숭해서, 네 방에 올라가 보려다 참았어.”

아줌마들의 쓸데없는 촉에 식은땀이 쭉 흘렀다. 엄마가 어젯밤 광경을 봤으면 뭐라고 했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도대체 이 관계를 남들은 뭐라고 평가할까.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끔찍한 단어 몇 개가 떠올랐다. 역겨웠다. 남자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취급하는지도 알고 싶지 않았다. 남자와 하는 키스에 익숙해진 내가 더러웠다. 불결하고, 비이성적이야. 나는 남자 말대로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이렇게 단순하게 도덕성을 버릴 수 있었던가. 내가 지키고 배우려고 했던 것들은 다 뭐였지.

손으로 입을 막고 구역질을 하자 엄마가 황급히 부엌으로 가 찬물을 떠다 주었다.

“역시 올라가 볼걸 그랬네. 어제 많이 힘들었어? 토는 했고?”

“어, …응. 아니야, 아니야 엄마.”

억지로 엄마에게 웃어주고 거실 소파에 주저앉았다. 당분간은 2층으로 올라가기도 싫었다. 어쩌다 이 꼴이 된 거지. 머리를 감싸 쥐고 끙끙 앓는데 강아지가 폴짝 뛰어와 무릎에 앞발을 얹었다. 학학거리는 얼굴을 보다 손으로 목덜미를 문지르고 쓰다듬었다.

킁킁거리며 꿉꿉하고 비린내 나는 동물 특유의 냄새를 맡고 있는데 여자가 방에서 나왔다. 오늘 웬일로 집에 있었던 모양이다. 약속이 그렇게 많더니 왜 지금 집에 있나 싶었는데, 곧바로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들고 바깥에 내놨다. 푸른색 커다란 캐리어에 잠금장치를 채우던 여자가 나를 보더니 눈썹을 힐끗 올렸다.

단단하게 굳은 입매와 눈빛을 보고 여자가 내게 주었던 서류를 기억했다. 그 좋은 조건을 때려치우고 복수를 결심했는데 어젯밤에는 사고를 치고… 자괴감이 미친 듯이 밀려왔다. 망연자실한 상태로 강아지를 허벅지 위에 올리고 있었다. 강아지는 작은 앞발로 내 다리를 꾹꾹 눌렀다.

“회사 안 갔어?”

“병가요.”

“웃기고 있네.”

여자가 코웃음을 치면서 내 옆에 앉았다. 소파 옆에 묵직해지는 경험이 오랜만이라 낯설었다.

고모는, 양해인은 생각보다 악인은 아니었다. 마흔 줄이 넘어서도 시집을 가지 않은 이유가 제 어머니의 성미를 이길 사람이 없으므로 가지 않는 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누가 봐도 키우는 강아지와 결혼을 한 것 같지만.

여자는 직업이 없었다. 집에 쌓여있는 부유한 자산을 야금야금 깎아 먹으며 사는 게 전부인 모양이었다. 가끔 일을 한다고 나갔지만, 그녀가 하는 일은 예술과 관련한 일이라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냥 늘 나와 관련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하며 넘겼었다.

노인도 여자도 내가 이 집에서 나가기를 바란다. 엄마와 함께 좋은 뒷배를 봐주며 떠나고, 새로운 아들이 들어오길 기대했다. 반 토막 낸 카드와 서류가 쓰레기통에 처박힌 걸 알았을 때는 화를 냈을까.

이미 새롭게 여행을 떠나버린 노인과 대화할 방법은 없었다. 대신 고모가 입을 열었다.

“왜 안 나갔니?”

이미 지난 일을 묻는다. 나는 제 엄마에게 가기 위해 바삐 다리를 움직이다 내 허벅지 사이로 푹푹 빠지기만 하는 강아지를 안아 들었다. 깡깡 울며 할딱거린다. 귀여운 꼬리, 부드러운 털.

“직접 물어보세요.”

“뭐, 이태가 쉽게 포기할 거 같진 않았어.”

여자가 강아지를 넘겨받으며 코끝을 마주 비볐다. 친근한 몸짓이었다.

“내 새끼, 잘 있어야 해?”

사람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강아지는 힘차게 앙앙 짖었다. 꼬리를 살랑거리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 한참 귀애해주던 고모가 나를 불렀다.

“야.”

“네?”

“나 출장 가거든. 당분간 얘는 니가 돌봐줘.”

1층과 2층으로 나누어져 있다뿐이지 같은 집 안에서 강아지를 애써 맡겨야 할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다. 거실에는 강아지 전용 자동 급식 장치가 있었고, 배변훈련이 잘된 지라 늘 깔아둔 배변 시트에서만 용변을 보는 애인데.

거실에 풀어둘게요. 하고 대답하려는데 고모의 날 서린 목소리가 내 의견을 막았다.

“괜히 다른 사람 손 태우지 말고 네 방에서 키워. 알았어?”

“…알았어요.”

내 대답을 들은 여자는 안심하는 얼굴을 하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안에서 외쳤다. 밥 먹어!

이 집 식구들과 밥을 먹는 건 처음이었다. 여자는 엉거주춤 식탁 끝에 앉는 내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말없이 엄마를 불렀다.

“그쪽도 앉아서 먹어요.”

“…어, 저는…”

엄마가 난처한 얼굴을 한다. 나는 젓가락을 치아 끝으로 세게 물었다.

“아들은 앉혀두고 엄마는 서 있게 하는 것도 그러니까 그냥 앉아요.”

고모였다, 여자였다. 이중인격처럼 바뀌는 사람이다. 고모인 것처럼 구는 여자의 강요에 엄마가 내 앞에 앉았다. 우리는 얼금설금 엮인 털실처럼 뚝뚝 떨어져 앉아 식사했다.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다. 기분은 여전히 바닥에 떨어져 있었지만 말이다.

점심을 끝내자마자 여자는 캐리어를 잡고 집을 떠났다. 강아지는 주인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앙앙 울어댄다. 제 주인이 조금 오래 자리를 비울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지, 눈동자가 축축하니 반질반질했다. 살랑거리는 꼬리를 만지다 강아지 털 위로 얼굴을 묻었다. 예상외로 좀 위로가 되는 기분이었다.

혼자 놀게 잠깐 거실에 내려놓고 엄마를 도와 설거지를 했다. 엄마는 영 개운치 않은 표정을 하고 그릇 위를 수세미로 문질렀다. 나는 엄마가 건네주는 접시를 헹궈 마른행주로 닦았다.

뒷정리를 하던 엄마가 컵에 한가득 꿀물을 타서 내밀었다. 적당한 온도로 데워진 잔을 받아 크게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하고 달콤한 액체가 속 안으로 들어가자 조금 살 것 같았다.

“오늘은 안 나가도 되니?”

“부르는 거 아니면.”

“그럼 올라가서 눈 좀 붙여. 어제 얼마나 고생했으면, 아직도 얼굴이 반쪽이다.”

엄마가 내 엉덩이를 두드렸다. 숙취 때문에 속이 쓰려 음식을 깨작거리는 걸 보고 걱정한 모양이었다. 얼른 남은 꿀물을 비우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도, 대충 하고 쉬어. 집에 아무도 없잖아.”

“사장님은 오시잖니.”

결혼을 했지만 호칭은 딱딱하기 그지없다. 오히려 나와 남자만 서로를 가족다운 호칭으로 부르는 것 같아 속이 울렁거렸다. 엄마는, 내가 남자와 키스를 하는 사이라는 걸 알면 뭐라고 말할까. 뺨을 때릴까, 아니면 엄마 탓이라고 울까.

“…그 사람은 1층에 오지도 않으니까, 청소하지 마. 괜히 힘들게.”

“알았어. 오늘은 엄마도 좀 쉴 테니 너도 올라가서 쉬어.”

거실로 나란히 나왔다. 내 발소리를 들었는지 강아지가 물을 마시다 말고 폴짝폴짝 올라왔다. 자동급식기와 배변 시트 몇 장을 함께 옆구리에 끼고 강아지를 안아 들었다. 짠한 콧방울을 꾹 눌러줬다.

엄마는 계단 밑에까지 나와 나를 올려보냈다. 혹시 내가 또 떨어져 구르기라도 할 것처럼 위태로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들어가라고 손짓으로 엄마를 보내고 방문을 열었다. 급식기와 배변 시트를 구석에 깔아 놓고 강아지를 풀었다. 거실처럼 폴짝거리고 뛰어다닐 줄 알았는데 낯선 곳이라 불편한지 주춤거리며 내 다리 밑에 붙는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같이 다니려고 끙끙거리기에 결국 강아지를 끌어안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킁킁거리며 내 목덜미 근처에서 혼자 발장난을 친다.

누운 채로 휴대폰을 켰다. 어제 이근영을 만난 뒤로 한 번도 쓰지 않았더니 배터리도 간당간당했다. 무슨 일은 없나 쭉 살피다 멍하니 인터넷을 뒤졌다. 찌라시 연예계 가십이나 읽고 있으려니 점점 졸리긴 했다. 조금 있다 일어나서 남자 방도 청소해야 하는데. 여전히 조금만 더러워도 사람을 잡아먹을 듯 괴롭히는 남자 때문에 청소의 달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억지로 잠을 깨우려고 고개를 흔들면서 하품을 참는데 진동이 울렸다. 이근영이었다. 이번에는 왜 이렇게 빨리 연락이 오지. 어제 뭐 잃어버린 거라도 있나, 싶어 전화를 받았다.

“어, 왜.”

[혼자 있냐?]

뜬금없는 질문에 상체를 슬쩍 일으키며 수화음을 올렸다.

“혼자 있는데. 무슨 일 있어?”

[너 무슨 사채라도 끌어다 썼냐?]

“무슨 헛소리야?”

이 새끼가 뭘 잘못 먹었나. 왈칵 짜증을 내자 이근영이 반대편에서 우물쭈물하다 또 이상한 질문을 했다.

[아니, 니 성격에 그럴 리가 없지. 너희 어머니 요즘 젊은 사람 만나셔?]

“…무슨 소리야?”

[오늘 아침에 전화가 왔거든. 너랑 연락할 생각하지 말라고 하고 끊어버리던데.]

“전화?”

[젊은 남자였어. 목소리 엄청 좋고, 되게 사근사근하던데.]

이근영의 설명에 바로 한 명이 떠올랐다. 남자다. 이맛살을 왕창 구겼다.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고 있자 불편한 기색을 읽었는지 근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정이소, 진짜 무슨 일 있는 거면 얘기해라.]

“…아니, 아니야. 우리 엄마 애인 맞아.”

[너무 젊은 목소리던데.]

젊긴 젊지. 삼십 대니까. 구구절절 이야기할 수도 없어 어쭙잖은 변명을 했다.

“목소리만 좀 그래. 성격이 나빠서 나한테도 좀 예민하게 굴어.”

[니가 그렇게 말한다면 다행이겠지만.]

쉬어라. 이근영이 인사를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골이 울려와 이마를 부여잡고 통화가 끊긴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하다못해 친구한테까지 전화해서 행패를 부리다니. 성격이 나쁜 게 아니고 그냥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하긴, 정상적으로 성격이 나쁜 인간이었으면 양아들과 키스를 한다거나 강제로 성기를 만진다거나 하진 않겠지. 어젯밤의 기억이 다시 떠올라 숨을 참았다. 아무도 없는 방인데 남자의 체향과, 내가 사출한 정액의 비린내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나도 제정신이 아니겠지. 누운 채로 헛구역질하고 있으니 침대 위를 아장아장 걷던 강아지가 돌아와 앞발로 내 가슴팍을 꾹꾹 눌렀다. 따듯한 몸뚱어리를 손으로 꼭 잡았다.

배 위에 올려놓자 제 집 처럼 좁은 곳을 돌아다닌다. 아슬아슬하게 걷다가 떨어질까 싶어 몸을 번쩍 끌어다 제대로 올려놓길 반복했다. 반항이라도 하는 것인지 몇 번 탈출을 시도하더니 이내 내 배 위에서 천하태평으로 하품을 쩍 하더니 엎드려 눈을 감아버린다. 요즘 개들은 다 이렇게 낮잠을 아무 데서나 자나.

어릴 적 친구 집에서 키웠던 개는 예민하고 신경질적이었고 우리가 놀러 가면 종일 사람을 향해 짖어댔었다. 바짝 곤두세운 털과 드러낸 이를 볼 때는 주먹 두 개만 한 애완견인데도 무섭다는 생각을 했었다.

저런 게 물리면 아프다고, 친구가 괜히 겁을 주곤 했었지. 부드럽고 푹신한 털을 쓰다듬다 나도 눈을 감았다.

이성이 조용해진 머릿속 내부는 어지럽고 잔인했다. 남자는 자신의 차가운 두 손을 내밀며 내 정액을 직접 핥아 먹으라 강요했다. 울면서 입에 넣은 정액은 메케한 탄 후추 같은 맛이 났다. 오십번 구역질을 하면 남자는 끝없이 구역질을 그칠 때까지 등을 쓰다듬으며 자상한 척 달래주고는 다시 내 성기를 희롱했다.

입술이 내 가슴을 훑는다. 손가락이 내 엉덩이와 복부,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는다. 하체가 죽어 있었다. 남자는 내 죽은 하체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일어나라고 명령했다.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일어나.”

못 일어나겠다고. 사지가 결박당한 것처럼 무거웠다. 이대로 몸의 결정권을 포기해버리면 어떨까. 마음 한구석에 있던 방만한 생각이 이성을 눌렀다.

“일어나.”

엄마의 눈과 귀를 막고, 세간의 이목을 피해서 남자의 욕정을 풀어주는 도구가 되는 게 나을 수도 있지. 그게 더 편한 삶일지도 몰라. 남자는 다정해질 거고, 나는 순종적이게 변하며 폭력에서 벗어나겠지. 몰랐던 음탕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도 몰라. 음욕이 들끓었다. 풋내가 난다고 조롱하던 남자의 언사가 귀가로 다가와 매섭게 따귀를 날렸다.

“일어나라니까.”

귀가 따끔거린다. 어둠 속에서 눈을 번쩍 떴다. 방문을 활짝 열어젖힌 채 남자가 문틀에 기댄 채 서 있었다.

방금 귀가했는지 남자는 아직 외출복 차림이었다. 검은 코트와 목에 걸린 회색 머플러. 남자의 머리카락과 옷 위에 묻은 흰색 싸라기눈이 눈에 띄었다. 바깥에는 눈이 내리는 모양이었다. 맞아, 겨울이었지. 자주 외출을 하는 편인데도 가끔 계절 감각이 없었다.

“…방에는 왜 들어오셨어요?”

“아버지가 돼서 아들 방에 들어오는 것도 안 되니?”

아버지 좋아하시네. 변태 새끼. 속으로 빈정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같이 곤히 자고 있던 강아지가 깜짝 놀라 일어나더니 침대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킁킁, 아무것도 없는 바닥 냄새를 맡더니 이내 남자의 발치에 가 할짝거린다. 남자가 강아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배에 무슨 솜뭉치를 올려놓고 자고 있나 했더니.”

“…고모가 맡겼어요.”

“알아. 집에서 키우는 개 정도는.”

남자는 발등을 핥아대는 강아지를 들어 올렸다. 강아지가 혀를 내밀어 남자의 콧잔등을 핥았다. 남자가 강아지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미친놈답지 않게 애완동물에게는 다정한 몸짓이었다.

“귀여워라. 딱 한 그릇이네.”

“……뭐라고요?”

고모가 들었으면 기함할 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남자가 낄낄 웃는다. 아무것도 모르는지 강아지는 여전히 눈을 반들반들 빛내면서 꼬리를 흔들었다. 도, 돌아와. 저건 너 벗겨 먹을 놈이야. 돌려받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남자는 품에 강아지를 껴안은 채 돌려주지 않았다. 강아지는 남자의 코트에 묻은 눈을 핥아 먹었다.

“누나는 왜 너한테 얘를 맡기고 갔을까. 나도 있는데.”

“한 그릇으로 만들까 봐 그러셨나 보죠.”

“쳇.”

바닥에 내려온 강아지를 무사히 내 품 안으로 끌어안고 남자를 노려봤다. 강아지가 낑낑거리며 앓는다. 불쌍한 새끼. 저런 남자도 좋다고 쫓아가 꼬리 흔든 대가가 한 그릇짜리 식량이라는 평가라니. 남자가 내 반항적인 얼굴을 보더니 한숨을 또 푹 내쉬었다.

“왜 또 그런 눈이야? 내가 너 한 그릇으로 만든다고 그랬니.”

“똑같아요. 비인격체.”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처받아.”

“아무렴, 받으시던가.”

“……준비하고 서재로 와.”

서재라니. 잊고 있었던 남자의 취미에 질린 얼굴을 했다. 남자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을 명령하고는 기분 좋게 웃으며 방을 나갔다. 여전히 눈치 없는 강아지가 앙앙 짖으면서 내 품을 파고들었다. 나는 흰 털이 보송보송한 강아지를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이름, 이름을 짓자.”

강아지가 헥헥거린다.

“…이제부터 너는 비체다. 비체.”

비인격체의 줄임말이다. 내가 몰래 불러주지. 이를 우두둑 갈았다. 사람이 빡친 것도 모르고 비체가 왕왕거리며 밥을 요구한다. 자동 급식기에서 밥을 다 줬을 텐데 관찰력이 영 떨어지는지 사람 손가락을 잘근잘근 물어온다.

“니 밥은 알아서 먹어.”

“왕.”

“너는 손도 발도 없냐.”

“왕왕.”

“이런 젠장.”

서러워서 비체를 끌어안았다. 신파를 떨면서 시간을 끌었더니 개만도 못한 남자가 다시 내 방에 찾아와 히스테리를 부렸다. 결국 비체를 빈방에 내버려 놓고 질질 끌려갔다.

복도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긴지 모르겠다. 폭력적으로 걸어가는 남자의 등을 보았다. 바깥에 내리던 눈은 아직 어깨 등치에서 녹지 않은 채 앉혀 있었다. 피부에 닿아 있는 손가락도 정확히 눈 만큼 차가웠다.

서재 앞에 서서 남자에게 잡힌 손목을 털어냈다. 남자는 품 안에서 안경을 꺼내다 말고 나를 돌아보았다.

“아주 불쾌해 보이는 얼굴이네.”

“짜증 나니까요.”

“뭐가? 술 먹고 토해, 깨끗하게 씻어, 시원하게 자위까지 다 했으면서.”

기가 막혔다.

“죄책감도 없어요? 술 취한 사람 아랫도리를 떡 주무르듯 주무른 게?”

“그게 죄책감이 필요한 일인가?”

이 남자에게 무슨 기대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맥이 풀리자 전투력도 상실되었다. 남자의 눈을 노려보다 고개를 돌렸다.

“…내 친구들에게는 신경 꺼요.”

“할 말이 그거야?”

신경을 날카롭게 긁어오는 반문에 속에서 북받치는 분노를 참았다. 길게 숨을 들이쉴 때마다 정신이 아찔했다.

“너는 내 아들이고, 그렇게 음란해 빠져서야 사적인 술자리를 제한하는 건 아버지로서 당연한 일이지.”

“아버지라고?”

“그럼, 내가 아들인가?”

남자는 아주 재밌는 유머라도 말 한 것처럼 혼자 낄낄거렸다.

“최소한 아들은 아니겠지. 아버지도 아니지만.”

“아버지가 아니면 뭐라고 생각하는데?”

“강간범?”

대답을 듣자마자 남자가 입가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내 앞에 바짝 붙어 섰다. 위압감에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목도리를 풀며 남자가 한 발짝 다시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뒷걸음치고, 남자는 바짝 다가오는 대치가 이어지더니 방문이 등 뒤에 닿았다. 남자가 내 허리춤으로 손을 뻗어 방문을 열었다. 휘청거리며 방 안에 밀려 들어갔다. 어제 사고를 쳤던 방이 나를 반겼다. 청소를 하지 않아 침대 위가 엉망이었다. 구겨진 이불 위로 나를 밀친 남자가 코트를 벗어 방 안에 있는 소파 위에 집어 던졌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 시트에 쓸린 무릎을 감싸 쥐었다. 남자는 공처럼 말고 있는 나를 자애롭게 내려다보며 살의가 드는 말만 골라서 내뱉었다.

“술을 마시고, 앞에서 뻗은 네 잘못이지.”

“아들에게 손댄 아버지는 잘못이 없고?”

“우리가 그렇게 대단히 애착 깊은 부자지간이었던가?”

아들이라고 부를 때는 언제고 남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나를 공격한다. 무릎을 감싸고 있던 팔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늘 당당하고 뻔뻔스러웠다. 솔직히 웃는 얼굴보다 무표정이 잘 어울렸다. 그게 남자다웠다.

“나랑 뭘 하고 싶은 건데요?”

내 질문에 남자는 잠깐 말이 없었다.

“내가 당신에게 도대체 뭔데요?”

남자는 이번에도 말이 없었다.

한참 침묵이 지속됐다. 바깥에 눈이 온다더니 창문도 고요했다. 눈이 소리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남자가 긴 숨을 뱉어냈다. 긴장으로 부풀어 올랐던 심장이 단숨에 쪼그라들었다.

“아버지라고 불러.”

맥이 풀렸다.

“그게 끝이에요?”

“그럼, 무슨 말이 듣고 싶은데?”

여전히 무표정인 남자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칼로 벼려낸 것 같았다.

“…아들, 아버지. 그런 호칭에 집착하면서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네가 신경 쓸 게 아니지.”

“내가 당사자인데도요?”

“언제 본인의 인생이라고 마음대로 흘러가던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인생의 지론을 이야기하며 남자가 어깨를 으쓱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희롱하고, 그걸 네 탓이라고 넘겨버리는 뻔뻔한 행동에 몸 안에 들어있는 피가 요동쳤다.

“사랑한다고 말해줄까?”

벼락을 맞아도 시원찮을 소리를 하며 남자가 웃는다.

“연인인 척 굴어줘?”

왜 사람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소리만 하는 걸까. 나이 차이가 역겨워도, 엄마를 그런 식으로 대해도, 어떻게든 남자에게 아들로 인정받아 보려고 결심했던 과거가 우스워졌다. 좋아할 수가 없다.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가 없다. 남자가 그런 인간이었으니까.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리는 내 얼굴을 붙잡고 남자가 눈을 감은 채 다정하게 입을 맞춰온다. 익숙하게 남자의 키스를 받으며 어떤 한 부분을 포기했다.

잠잠해진 나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명령조로 이야기했다.

“그렇게 우울한 척 있지 마.”

“……”

“정말로 너를 좋아할 거 같으니까.”

“그걸…바라는 게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나는 남자와 내가 정상적인 부자 관계에 들어서면 좋겠다고 바랬었다. 남자가 내 성기를 주무르는 손짓에 흥분해 사정한 순간은 나조차도 포기했다. 노력할 기분도 들지 않았다. 남자부터 글러 먹었으니까.

하지만 정말로, 가족에 대한 희망이 손톱만큼도 남김없기 긁혔을 때 절망감을 남자는 알까. 그에게는 가족이 전혀 소중한게 아니었으니까 모르겠지. 뺏겨버린 가족과, 단란한 가족을 보고 엄마와 내가 가지던 희망을 모르겠지.

“미안해.”

애틋한 얼굴과 목소리로 남자가 나를 달랬다.

정말로 그 음절만 들으면 남자가 내게 용서를 구하는 것 같아 눈물이 틈을 비집고 나왔다.

“하지만 싫어.”

남자가 정말로 싫었다.

남자와 나의 정서는 비틀려 있었다. 나와 제대로 된 가족도 그렇다고 다른 관계도 가지기 싫다고 말하며 남자는 태연하게 나를 휘둘렀다. 회사에서도, 집 안에서도 폭군처럼 행동하는 남자를 막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늘 함께 출근하고, 남자의 일정을 따라다녔으며 회사와 관련된 일을 배운다. 일은 배우면 배울수록 남자가 얼마나 대규모의 사업을 거느리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남자가 매우 바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발밑에 수많은 실무진을 거느리면서도 남자는 더 나은 성과를 가져오라고 냉혹하게 서류를 집어 던지는 일상을 보냈다.

그런 주제에 나에게는 다정하다. 여전히 엉망으로 과제를 제출해도, 오타가 가득 섞인 보고서를 내밀어도, 문법이 엉망인 유치한 영어 작문을 내밀어도.

남자는 기꺼이 내 숙제들을 손수 검사하고,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으면 입술을 핥아왔다. 목덜미와 가슴까지 내려가는 입술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장 최초의 선은 이미 깨어진 지 오래되었다. 마지막 방어선을 남자가 건드리지 않는 이상 나는 반항을 할 생각도 없었다.

멍청하게 종이에 글자를 적다 바깥 풍경을 구경하길 반복했다. 한껏 추워진 날씨는 툭하면 눈을 뿌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싸락눈을 바라보며 발가락으로 발등을 긁었다.

멍. 발치에 엎드려 자고 있던 비체가 깼는지 짖어댄다. 허리를 숙여 비체를 안아 올렸다. 내 방에 놔두자니 자유롭게 거실을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방에 갇혀 있을게 불쌍해서 데리고 나왔더니, 손이 은근히 많이 간다.

타자를 치고 있던 남자가 강아지 짖는 소리에 시선을 보내온다. 설마 조금 울었다고 또 한 그릇 운운하진 않겠지. 안 보이게 비체를 잘 가려서 품에 안았다.

“밥 먹을래?”

“왕.”

사람 말을 알아듣긴 하는 건지 찰떡같이 대답을 해온다. 살랑거리는 꼬리를 만지고 털을 쓰다듬어주며 바닥에 내려주자 열심히 뛰어가 밥그릇에 고개를 박는다.

그 꼴을 보고 있던 옆에서 같이 업무를 보던 비서가 말했다.

“도련님이랑 매우 닮았네요.”

“제가 개를 닮았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때맞춰 밥만 잘 찾아 처먹는다는 말일까요.”

“제가 설마 그런 경박한 생각을 했겠습니까.”

모르는 척 듣고 있던 남자가 웃기 시작하는 거 보니 분명히 후자였다. 아니라고 잡아떼는 사람을 다그칠 수도 없어서 그냥 화를 삼켰다. 대화의 시발점이 된 비체는 밥을 먹는다고 엉덩이만 씰룩거리고 있었다. 흰 털이 꼼지락거리는 걸 보다가 대충 쓴 과제를 잡아 채 남자에게 걸어갔다.

“벌써 다 했어?”

“네.”

“속도만 보면 영재인데.”

남자가 사람 속을 슬슬 긁으며 내민 과제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1분도 지나지 않아 종이를 세로로 쭉쭉 찢었다.

“한심하네. 다시 써오렴.”

“…아, 진짜. 내가 기업 위기관리 전략을 어떻게 써요!”

“난 네 나이에 논문 두 편 썼어.”

“내가 같아?!”

안면에 수첩이 날아왔다. 두꺼운 노트로 얼굴을 제대로 두들기는 바람에 강제로 입이 다물어졌다.

“입버릇이 점점 험해지는군.”

정작 입이 가장 험한 사람이 누군데. 시큰거리는 코를 붙잡고 남자를 노려봤다. 뒤에서 비서가 낄낄 웃고 있었다. 다 똑같다. 인성 불량자들.

남자가 의자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나도 따라서 시선을 돌렸다. 과제를 하던 사이에 희끗희끗 내리던 눈이 어느새 그쳤다.

“목욕이나 하러 갈까.”

매일 집에 가서 한 시간 가까이 욕실에 처박혀 있는 주제에 목욕탕은 왜 또 간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것도 이런 이른 시간에. 비체를 잡아 올리려다 말고 남자를 보았다.

“재벌도 목욕탕에 가요?”

“내가 그런 사람 바글바글하고 비위생적인 곳에 갈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지?”

“……목욕탕이 다 그렇죠.”

남자가 코에 걸쳐둔 안경을 벗으며 기지개를 켰다.

“같이 갈까.”

“싫습니다.”

“하, 단숨에 거절하니 꼭 같이 가고 싶어졌는데.”

“그냥 혼자 가세요.”

“일어나.”

그러면 그렇지. 얼굴을 구긴 채 비체를 비서의 품에 떠넘겼다. 비서는 남자의 말에 이미 휴대폰을 꺼내 들고 기사를 호출하고 있었다.

“지금 지하에 바로 차 대기시켰습니다.”

“수고해.”

“네, 다녀오시죠.”

비서가 매끈매끈 잘 단련된 표정으로 웃는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으로 비체를 보았다. 혀를 내밀고 헥헥 거리던 강아지가 슬픈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아, 그냥 개로 태어날걸. 남자의 아들이 되는 것보단 애완견이 돼서 꼬리나 흔드는 게 나은 삶인 것 같았다. 눈물을 속으로 삼키고 강제로 남자의 손에 끌려갔다.

뒷좌석에 나를 밀어 넣고 앉은 남자가 기사에게 명령했다.

“목욕.”

“네, 늘 가시던 곳으로 가면 될까요?”

“그래요.”

나이 지긋한 기사가 액셀을 밟았다. 회사보다 호텔이 많은 거리로 나온 차가 이내 커다란 입구 앞에서 멈췄다. 억지로 차에서 내렸다. 남자가 말하는 바글바글하고 비위생적이지 않은 재벌들의 목욕탕에서 남자들 나체를 구경을 하는 게 죽는 것보단 낫겠지.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남자가 프런트로 갔다. 서 있던 직원이 달려와 남자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의례적인 안부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어딜 가든 호화 VIP는 다르네, 하면서 비딱하게 서서 내부를 구경했다.

“좀 쉬려고 왔습니다. 두 명.”

“두 분이요?”

직원이 인원수를 확인한다. 남자 근처로 다가가서 얼굴을 슬쩍 비췄다. 남자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팔을 뻗어 내 어깨를 잡아 세웠다.

“이쪽은 내 아들.”

직원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하긴, 남자 나이가 몇인데 나만 한 아들이 있겠는가. 아무리 일찍 사고를 쳐도 그렇지. 제대로 웃지도 못하고 미묘하게 입술 끝만 겨우 올려서 눈인사했다. 직원이 같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맞절했다. 그렇다고 해도 찝찝한 기분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삐딱하게 한쪽 다리를 내밀고 서 있었더니 남자가 여전히 어깨를 감싼 채 나를 안으로 떠밀었다. 왜 친한 척하고 지랄이야.

직원이 안내해주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에도 불쾌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어깨에 올라간 남자의 손을 하나하나 포를 뜨고 싶은 심정이었다. 직원이 건네는 카드를 받아 문을 열며 남자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어쩐지 인사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깨끗하게 박박 씻으라는 말을 하란 말이야. 직원을 흘끗 보다 남자의 성화에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욕실은 의외의 공간이었다. 널찍하긴 했지만 3개가 전부인 라커룸과 불투명한 문을 통해 보이는 욕탕은 아무리 봐도 좁아 보였다.

“개인 목욕탕이야.”

“…아버지 거예요?”

“설마, 예약하고 쓸 수 있어.”

그 말에서 이미 오늘 오려고 했다는 걸 깨달았다. 다 준비해놓고 사람을 곤란하게 하기 위해 방금 생각이 난 척 호들갑을 떨었다 이거지… 아무 말 없이 남자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외투를 벗고 넥타이를 끄르던 남자가 손수 내가 입고 있는 코트를 벗겨냈다.

“눈을 파버리기 전에 옷이나 벗어. 끝까지 홀딱 손수 벗겨줘야 하니?”

“내가 벗을 거예요.”

어디서 배웠으면 한국어를 저렇게 괴팍하게 쓸 수 있지. 설마 외국어도 저런 식으로 구사하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외투를 라커룸 안에 처박았다.

옷을 벗는 내내 남자는 불쾌한 시선으로 내 아랫도리를 바라보았다. 테이블 위에 구비되어있는 일회용 속옷을 얼른 뜯어 걸쳤다. 가장 중요한 치부를 가리자 남자가 들으라는 듯 짧게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여자들은 이런 시선 폭행을 어떻게 견디는 거지. 당장 한 명한테만 받아도 기분이 이렇게 불쾌한데. 소름이 돋아난 팔을 긁으며 잽싸게 탕 안으로 들어갔다.

목욕탕은 좁았지만 호화로웠다. 온탕과 냉탕, 작은 사우나까지 있었다. 일반적인 목욕탕의 풍경보다는 일본식 온천탕이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재벌들은 돈이 썩어나는구나. 아무 목욕탕이나 가면 되지 이딴 프라이빗 사우나를 만들 필요가 있나… 곳곳에 갖춰진 뜯지도 않은 비누와 샴푸를 하나씩 구경하다 샤워기 물을 틀었다.

따뜻한 물이 쏟아진다. 눈을 찌푸리며 머리를 적시고 있는데 뒤따라 들어온 남자가 갑자기 샤워기 안으로 난입했다.

“뭐…!”

나체인 남자의 몸에 눈이 돌아가자마자 입이 다물렸다. 잘 짜인 몸을 하고 선 남자는, 사용하라고 구비해준 속옷도 걸치지 않은 채 태연하게 내 어깨너머로 손을 뻗어 바디샴푸를 짰다. 향긋한 향이 퍼졌다.

남자가 능청스럽게 거품을 낸 샤워 볼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등이라도 밀어줄까?”

“…뭐라도 좀 입어요.”

“목욕은 원래 벗고 하는 거야. 그것도 몰라?”

알긴 알지만 나는 네놈의 성기 따위 보고 싶지 않아. 대놓고 말하면 또 무슨 성희롱을 할지 몰라 완곡하게 표현했다.

“제발 주책 좀 부리지 마세요.”

“아빠한테 너무하네.”

말할 가치가 없다. 남자의 팔 아래로 허리를 굽혀 샤워 부스 안을 빠져나갔다. 옆자리에서 다시 물을 틀고 스트레스로 경직된 목덜미를 주물렀다. 남자는 더 이상은 수작질 없이 샤워를 시작했다. 나도 그 옆에서 머리를 감았다. 남자와 나란히 나체로 있는 것이 아주, 매우 거슬리고 있었다.

남자는 정말로 목욕을 하러 온 사람처럼 냉탕과 온탕을 반복해서 나를 끌고 다녔다. 피곤하니 나가겠다고 했다가 다리와 팔을 붙잡아 뜨거운 물 안에 처박는 개 같은 짓도 서슴없이 했다.

“이제 땀 빼러 갈까?”

이때까지는 찬물에서 오리라도 가지고 놀았다는 것처럼 남자가 권유했다. 더위에 숨이 막혀 늘어져 있다가 남자의 말에 몸서리쳤다. 남자의 성기를 보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입고 있는 일회용 속옷이 젖어 살이 비쳐 보이는 게 거슬려 애쓰다가 벌써 진이 다 빠져 있었다.

“난 싫어요.”

“좋아, 들어가자.”

“안 간다고요.”

“부자지간 목욕은 로망이지.”

로망이 씨발, 다 자살을 한 건 아닐까. 사람이 우울하면 내버려 두면 좋을 텐데, 늘 멋대로인 남자가 무시무시한 악력으로 내 팔을 잡아끌었다. 찬물 한 바가지 뒤집어쓰지도 못하고 억지로 더운 한증막에 처박혔다.

한증막은 건식도 아니고 습식이었다. 수증기가 가득 차 있어 몸이 가려진다는 걸 제외하면 좋은 점이 하나도 없었다. 공기를 들이마실 때마다 몸 안의 장기까지 습기로 젖는 느낌이었다.

남자는 열탕에 있다 들어왔는데도 멀쩡한 얼굴이었다. 더위를 저렇게 잘 참을 수 있나. 어떻게 얼굴이 빨갛게 변하지도 않지. 기가 막힌 표정 관리에 속으로 온갖 쌍욕을 퍼부었다.

“힘들면 나갈래?”

“…됐어요.”

“그럼 끝까지 버텨.”

한 번쯤은 더 권유해라. 자존심 때문에 한마디 했다가 죽을 지경이었다.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천천히 숨을 쉬었다. 보통은 10분 정도 하니까, 조금만 참았다 냉탕에 처박힐 계획이었다.

그런데 남자는 모래시계를 뒤집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아직도 얼굴은 멀쩡했다. 정신이 미쳤더니 체력도 같이 미쳤나. 참다못해 물었다.

“…안 나가요?”

“들어왔으면 30분은 있어야지.”

미쳤다. 이건 고문이야. 푹푹 찌니까 숨을 쉬는 것도 힘들다. 뭔가 남자보다 먼저 나가면 지는 것 같아 오기로 버티고 있었다. 더위에 찌든 뇌가 녹아내릴 것 같았다. 땀이 끈적끈적하게 흘렀다. 남자는 아주 멀쩡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괴물 같은 놈.

땀이 뚝뚝 떨어졌다. 피부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기분이었다. 다시는 훈제 요리는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허리를 숙여 최대한 땅으로 몸을 내린 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억지로 버티는데 남자가 갑자기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이 미친놈. 피하려고 몸을 꿈틀거렸지만, 남자가 훨씬 빨랐다.

“귀도, 목덜미도, 뺨도, 전부 빨갛게 익었네.”

남자가 지친 몸을 누르며 속삭였다.

“입술도 잘 익었으려나?”

“제발 좀…”

성기를 노골적으로 더듬거리는 손을 잡고 남자의 행동을 막았다.

“이런 곳에서까지 이러지 마세요.”

터지는 숨을 참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런데 오히려 남자는 나를 비웃었다.

“이런 곳? 이런 곳이 뭔데?”

좁은 공간 안에 웃음소리가 갇혀서 울렸다. 쟁쟁하게 내 귀를 괴롭히는 소리에 한껏 인상을 썼다.

남자가 고개를 저으면서 나를 보았다.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이마와 귓불, 턱과 입술은 유난히 매끄럽고 반짝거리는 빛을 내고 있었다. 자신의 맨몸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보이며 남자가 이를 드러냈다.

잔인하다는 생각을 무심코 했을 때 이성이 돌아왔다.

“이런 개인적인 공간을 아들과 온다고? 그것도 양아들?”

남자의 목소리에는 웃음이 가득 머금어져 있었다. 희롱이었다.

“여긴 기본적으로 정말 혼자 있고 싶어서 오거나, 아니면 즐기려고 오는 거지. 아무도 없는 좁은 욕탕에서, 꼴리는 대로 섹스하고 씻고 나가는 거야. 가끔 같은 시간에 이용하는 사람이 있으면 미묘하게 들린단 말이지, 떡 치는 소리.”

“…미쳤어요? 여길 나를 데려왔다고요?”

경악스러웠다. 어쩐지 프런트에 있는 직원의 시선이 불쾌하다 싶었더니, 나를 그런 인간으로 보고 있었을 것 아닌가. 이런 곳에 처박혀 나 홀로 남자와 자존심 싸움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듣고 나니 더 불쾌했다. 애인과 섹스를 하러 오는 공간에 나를 데리고 왔다니. 형식적인 부자 관계를 유지하며 괴롭히더니. 이곳이 모텔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똑같은 주제로 말다툼을 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또 순진하게 남자를 따라온 나는 쓰레기나 마찬가지였다. 당장 나가 변기를 붙잡고 속을 게워내고 싶었다.

구역질이 나오려는 입을 막고 말했다.

“나갈래요.”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쓰여 있는 얼굴과 어조는 정확하게 동정이었다.

“나가? 나가서 뭐라고 할 건데. 나는 진짜 아들입니다. 아버지랑은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

“너는 이미 그 사람들 머릿속에서 정부나 애인, 굴러먹던 호스트로 여겨져 있을 게 뻔한데.”

듣고 있기 힘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쪽에 머물러있는 덥고 습기 찬 공기와 부딪히는 순간 정신이 막혔다. 너무 오래 더위를 참고 있었던 모양인지, 현기증이 나면서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나무 바닥과 부딪치기 위해 달리는 몸을 남자가 밑에서 안아 들며 소리 내서 웃었다.

괜한 자존심 싸움을 해봐야 나만 억울하고 나만 다친다. 여러 차례 남자와의 싸움을 통해 알았는데 이번에도 실수했다.

눈을 떴을 때는 탈의실 중앙에 있는 평상이었다. 남자는 가운을 입은 채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땀을 씻겼는지 몸은 깨끗하고 부드러웠다. 몸을 감싸고 있는 커다란 수건을 당겨 목까지 끌어올리며 남자를 돌아보았다. 병에 든 과일 음료를 마시고 있던 남자가 입술을 떼며 나를 돌아보았다.

“정신이 좀 들었어?”

“……”

“그러게 오기는 작작 부려야지. 별로 좋은 거 아니야.”

팔에서는 아까 맡았던 바디 샴푸의 향기가 나고 있었다. 남자의 말에 대꾸하지 않은 채 젖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비볐다. 남자는 옆에 있던 생수병을 내밀었다.

마른 목에 급하게 물을 넘겼다.

“천천히 마셔, 천천히.”

그 말을 듣자마자 사레에 들렸다. 기도로 잘못 들어간 물을 토해내며 쿨럭거리자 남자가 혀를 차며 수건을 내 얼굴에 붙였다. 건조된 수건으로 입을 막으며 한참 따가운 목을 긁으며 기침했다.

“가지가지 하는군.”

“…닥쳐요. 누구 때문인데.”

“본인의 한계도 모르고 기세 좋게 버티던 아들 탓이지.”

“아들이라고 하지 마세요.”

“싫은데?”

이 정신병자 새끼. 물병을 남자에게 던지고 다시 누웠다. 아직 현기증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당분간 찜질방은 글자도 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남자가 차가운 물병을 내 이마에 갖다 댔다. 시원한 것이 닿으니 좀 살 것 같았다. 정신은 죽을 것 같았지만.

어지러운 머리를 털어내기 위해 애를 썼다. 남자는 내 노력을 우스꽝스러운 재롱을 보는 것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씻고 나온 남자의 목덜미와 가슴팍이 가운 사이로 드러났다. 조금 붉어진 피부를 보니 다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애인이라니, 정부라니. 시발. 그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상황에 화도 나지 않았다. 뻔뻔한 얼굴로 사람 발목을 잡아 진창에 처박는 남자의 재주를 까먹고 있었던 내 탓이었다.

“나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거예요?”

숨 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호흡을 하면 습기 찬 공기가 목 안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수증기를 폐가 가득 머금은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말했잖아, 나는 네 아버지로서 네가 가진 사회적 지위를 말살할 거야. 정이소로는 살아갈 수 없도록.”

눈을 깜박거렸는데, 아무 전조 증상도 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남자는 아이처럼 말간 얼굴로 내 젖은 머리카락과 뺨을 매만졌다.

“친구도 없이 외톨이로?”

근영이의 전화를 생각하며 물었다. 남자가 내 눈 밑을 손톱으로 긁는 것 처럼 문질렀다.

“그래, 친구도 주변인도 없이 혼자가 되도록 할 계획이야.”

부드러운 수건과 가운이 몸에 닿았다. 뜨거운 물에 한참 들어가 있었던 남자의 체온은 평소보다 한 뼘쯤 높아져 있었다. 따뜻한 품 안에 안겨 있으니 남자가 부드럽게 등을 쓸었다. 등을 남자가 손바닥으로 도닥거렸다. 오늘따라 남자의 손가락이 차갑지 않다.

“…내가 혼자가 되면, 그럼 다음은 뭘 할 거예요?”

남자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거대한 계획이라도 알고 싶었다. 나는 감도 잡을 수 없으니까, 듣고 미리 마음의 준비라도 하면 덜 지치지 않겠는가.

“글쎄, 다음엔 뭘 하지.”

손을 들어 남자의 뺨을 툭 건드렸다. 남자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남자치고는 긴 속눈썹이 나풀거린다. 앞머리가 내려와 이마를 덮고 있어서 그런가, 오늘따라 남자는 더 앳돼 보였다.

“엄마도 건드릴 거예요?”

목을 긁으며 물었다. 남자가 가볍게 내 코를 잡아 비틀며 웃었다.

“정혜 씨? 정혜 씨를 건드리지 않는 이유는 네가 제일 잘 알잖니, 아들.”

가슴을 들썩이며 한숨을 쉬었다. 길게 토해내는 숨소리를 들으며 남자가 어깨를 떨었다.

남자는 정확했다. 엄마는 내 마지노선이었다. 남자는 엄마를 인질로 잡고 선 것이다. 네가 인간으로, 아들로 존재하는 유일한 대상을 내가 유린할 수 있다고.

“이제 어떡할래?”

되지도 않는 의사를 물어오는 남자를 보았다. 여전히 남자의 눈동자는 물결처럼 고요하고 잔잔했다. 인간으로서, 내가 가질 수 있는 존엄성은 전부 앗아갈 계획인 주제에, 어둠도 고약함도 없이 시선이 하염없이 부드럽게 나를 훑었다.

머뭇거리다 손을 뻗어 남자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기분 좋은지 남자가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고 숨을 쉬었다. 늘 독한 말과 다정한 언어를 번갈아가면서 내뱉는 입술 위로 조용히 내 입을 붙였다. 내 의사로 먼저 하는 키스는 처음이었다. 남자가 입 안에서 기분 좋은 호흡을 내뱉었다. 둥글게 휜 눈을 보다 눈을 감았다. 남자가 내 어깨를 뒤로 밀었다. 딱딱한 대리석 바닥 위에 등을 댔지만, 수건이 깔려있어 아프진 않았다.

입천장을 문지르고 핥을 때마다 흘러들어오는 타액이 달콤했다. 이성을 마비시키고, 이대로 남자가 바라는 인생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매일 땍땍거리더니 순종적인 것도 나쁘진 않네.”

물론 내 자존심은 다치겠지. 남자가 내게서 흥미와 미련이 떨어지면 끈 떨어진 뒤웅박이 될 거고, 더럽고 비참하게 손가락질을 받겠지. 하지만… 늘 사람이 현실에 대립해 싸워야 할 필요도, 순응해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맨 어깨와 가슴팍을 만져오는 남자의 손가락 끝이 입술을 문지른다. 자연스럽게 입술을 벌리고 남자의 손가락 끝을 핥으면서 머리 한쪽을 뭉갰다.

남자가 젖은 손가락으로 성기를 잡았다. 의붓아버지라는 새끼 앞에서 맨몸을 흉하게 드러낸 채로 성기가 잡히자 미칠 것 같았다.

“섰어.”

열이 오른 손바닥에 잡힌 성기가 서서히 반응했다. 남자가 재밌다는 듯 내 성기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하지 마 이 개새끼야. 치욕적인 감정에 눈물이 뚝뚝 흘렀다. 여전히 현기증이 남아있는 몸이 산소 결핍을 호소했다. 숨을 억지로 들이마시며 훌쩍거렸다. 남자가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왜 그래, 귀엽게 울고.”

“……”

“아들, 대딸 해줄까?”

그 입 닥쳐. 손 놔, 꺼져. 눈으로 대답했다. 남자는 휘파람을 불면서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수건을 잡아당겼다. 맨몸 위에 간질간질한 입김이 닿자 성기가 더 예민해졌다. 남자는 얼굴을 내 사타구니 가까이 바짝 붙인 채로 입술을 핥았다.

“내 얼굴에 싸볼래?”

남자가 미친 소리를 지껄인다. 기겁을 하자 남자가 웃으면서 손바닥 안쪽으로 성기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하체가 떨렸다. 허벅지 안쪽과 성기가 가려웠다. 남자의 손바닥에서 귀두가 마찰할 때마다 축축한 소리가 났다.

내 몸을 올라타고 앉아 남자는 양껏 성기를 비볐다. 성기를 집어삼킬 것처럼 얼굴을 바짝 붙이더니, 혓바닥을 내밀어 음모가 제거된 부위를 핥았다. 질척하고 뜨거운 타액이 문질러지자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허리를 뒤틀며 사정을 참았다. 남자는 성기 주변을 정신없이 핥았다. 손바닥에 성기가 쓸릴 때마다 등 뒤에 깔린 수건이 습해졌다.

약점을 짓누르고 올라탄 남자가 끝없이 성기를 흔들고 주물러댔다. 밋밋한 살점 위를 빨고 핥았다.

“아, 흐으… 아아.”

눈앞이 번쩍거린다. 남자의 손이 옷 안으로 파고들더니 유두를 꼬집었다. 미칠 것 같았다. 소리를 막을 수 없을 것 같아 입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고 깨물었다. 네 손가락을 치아로 씹자 남자가 혀를 차면서 강제로 손을 빼냈다.

시야가 보이지 않았다. 참혹한 성욕으로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팽팽하게 힘을 준 허벅지 안쪽과 엉덩이를 매만지며 남자가 유두를 가볍게 핥았다.

“기분 좋아?”

“아으, 으응. 흣.”

“되게 좋아하네.”

“하지, 으, 아아!”

남자의 손동작이 빨리질 때마다 아래에서 찌걱거리는 젖은 소리가 울렸다. 남자는 손가락을 뻗어 자신이 핥았던 아랫도리 주변을 문질렀다. 마르지 않은 타액으로 피부와 손가락이 매끄럽게 마찰했다. 타액을 흘리는 것처럼 남자는 손가락 틈 사이로 고환을 넣고 비볐다. 남자의 두 손 가득 성기가 잡혀서 주물러졌다. 하체 전부가 지배당한 느낌이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미친 사람처럼 내 유두를 핥았다. 방금까지 내 성기 근처를 애무했던 혓바닥이 가슴팍을 힘껏 눌렀다.

타인의 손에 의해 사정을 당할 때, 쾌감이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성대를 울리는 대신 기도와 아랫배를 힘껏 조였다.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남자가 힘껏 내 성기를 잡은 손을 밀어 올렸다. 뼛속까지 사출한 기분에 몸 전체가 떨렸다. 입가에 통제하지 못한 타액이 흘러 축축했다.

“하아, 아…”

“엄청 진하다. 으음, 여전히 풋내.”

끈적끈적한 정액으로 젖은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남자가 씩 웃는다. 수건 위에 얼굴을 묻고 숨을 헐떡거렸다. 전력질주를 한 것처럼 몸이 피로했다.

“이, 변태… 새끼야.”

“음, 아버지 손에 싼 아들이 더 변태가 아닐까.”

“마음대로…!”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일어나기도 전에 남자의 손바닥에 다시 얼굴이 평상 위로 처박혔다. 남자가 달콤한 목소리를 내며 하체를 비볐다.

“그러니까 같이 변태하자.”

“무…”

남자가 입고 있던 가운을 들췄다. 딱딱하게 선 성기가 곁눈질로도 확실하게 보였다. 흉흉하게 서 있는 성기를 천천히 주무르며 남자가 허리를 가볍게 떨었다. 무례한 변태는, 내 정액이 묻은 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훑을 때마다 얼굴을 점점 힘을 줘 짓눌렀다. 기분 좋다는 듯 웃으면서 자위를 시작하는 남자가 쾌감에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후… 박아도 돼?”

“미친…!”

기겁을 하며 몸을 펄쩍 뛰자 남자가 입술을 뚱하니 내밀었다. 저걸 때려죽이겠다는 일념으로 상체를 비틀자마자 남자가 허벅지를 벌리고 하체를 붙여왔다. 비좁은 틈을 누르며 딱딱하게 발기한 성기가 밀려 들어왔다.

“이 개새끼, 미친놈아!”

“말버릇하곤.”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로 남자의 성기가 마찰했다. 무릎 안쪽에 힘을 주고 다리를 구부리게 하더니 다시 서서히 남자의 성기가 마찰하며 밀려 들어왔다. 무릎을 단단하게 두 손으로 잡은 남자가 뒤쪽에서 서서히 허리를 움직였다. 정액으로 젖은 허벅지 안쪽 살을 천천히 비비던 성기 끝이 내 음낭과 성기 뿌리 부분을 찔렀다. 이게 뭐야.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남자가 등 뒤에서 내 허벅지로 자위를 하고 있었다. 하아, 흥분한 숨소리가 다시 귓가로 쏟아졌다. 남자가 허리를 흔들었다. 허벅지 사이가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살점과 살점이 마찰한다. 뜨겁고 딱딱한 건 젖어 있었고 내 몸에 비벼질 때마다 점점 더 축축해졌다. 남자가 허리 짓을 할 때마다 철썩거리며 엉덩이 아랫부분에 고환이 닿았다.

“으, 하아. 기분 좋아.”

남자가 다시 내 성기를 잡아 문지르며 지껄였다. 듣도 보도 못한 유사 강간 행위에 정신이 돌아버릴 것 같았다.

“부드럽고, 후…”

내 허벅지 안쪽 살을 품평하며 남자가 숨을 헐떡거린다. 쓱쓱 문질러지는 성기가 깊게 치고 들어올 때마다 성기 기둥이 자극에 떨렸다. 남자가 치대는 허벅지 전체가 아렸다. 내 성기가 발기한 게 느껴졌다. 남자는 내 무릎을 잡은 손에 힘을 줘 나를 바짝 당겼다. 자주 쓰지 않는 허벅지 근육이 거세게 땅기며 성욕이 호흡을 먹어 치웠다. 미친, 이게 뭐야.

“…아들.”

불러서는 안 되는 호칭으로 나를 불러오는 남자의 음성에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이를 악물고 참았지만 정액이 그대로 터졌다. 아, 두 번째 사정에 몸을 늘어트리고 헐떡거렸다. 그 순간 허벅지 안이 축축하게 젖었다. 남자가 귓가로 한숨을 흘렸다.

“하아… 갔어?”

“……”

“너 아까 허벅지 엄청 딱딱해졌었어. 꽉 조여서, 으음.”

후희를 즐기는 것처럼 남자가 허벅지 안쪽 피부에 대고 귀두를 문질렀다. 남자가 사정한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흘렀다. 수건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조용히 욕을 했다.

“…비켜요. 개자식아.”

“아버지, 비켜주세요. 라고 하면.”

재밌다는 듯 목울대를 울리며 웃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기가 막혔다. 아버지 호칭에 집착하는 주제에 지금 이런 짓을 했다는 건가. 내가 자위 도구야? 욕이라도 내지르려고 했더니 남자가 다시 성기를 엉덩이골 사이에 문질렀다. 흥건하고 뜨거운 감촉에 몸을 떨었다.

“빨리 부탁 안 하면 그대로 박는다.”

“씨발.”

“하나.”

“개새끼.”

“둘.”

“씨발놈.”

남자의 손가락이 위협적으로 엉덩이 밑부분을 쓸어 올렸다. 셋을 세기 위해 숨을 들이켜는 남자의 호흡을 듣고 눈을 질끈 감았다.

“…비켜주세요, 아버지.”

그제야 남자가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일으켰다. 크리넥스를 뽑아 젖은 성기를 닦아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운을 다듬는 모습을 보자 또 눈물이 났다. 왜 눈물이 또 나는 거야. 쪽팔리게. 팔로 눈을 쓱쓱 닦았다. 그런데도 눈물이 계속 터졌다. 휴지 몇 장을 새로 뽑아 들던 남자가 내 울음소리에 응?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왜 울어?”

“흐윽. 씨발. 이 개새끼야.”

“서럽게도 우네. 그렇게 싫었어?”

말이라고 지껄이냐. 정말 뻔뻔한 얼굴의 남자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분노와 수치가 뒤섞여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었다. 점점 울음소리를 크게 내자 남자가 난처하게 나를 불렀다.

“아들, 울지마.”

“미친, 썅놈아.”

“울지 마라니까.”

남자가 휴지로 젖은 내 하체를 닦아주고 수건을 다시 몸에 둘러주었다. 다리로 턱을 걷어차고 싶었는데 몸에 힘이 빠져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젖은 휴지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남자가 강제로 내 손을 얼굴에서 뗐다. 눈물로 번들번들한 시야에 매끈하게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상쾌해 보이기까지 한 표정이었다.

“하하, 되게 청승맞네.”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지도 모르는 것 같은, 깨끗하기만 한 얼굴이었다. 우리가 한 행위에 죄책감이 없다는 게 더 싫었다.

“울지마. 음, 또 괴롭히고 싶잖아.”

내 눈물을 닦아주며 남자는 다정한 척 나를 달랬다. 남자의 손을 치워내고 얼굴을 가린 채 물었다. 대답은 진작 포기했지만, 이렇게라도 묻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몇 번이고, 몇십번이고 되묻고 또 물어야 했다. 원망을 남자가 자각이라도 할 수 있게끔.

“왜 자꾸 나한테 이러는 거예요…”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는 게 느껴졌다. 손가락을 벌리고 틈새로 남자를 훔쳐보며 훌쩍거렸다. 눈물이 쉴 새도 없이 흘러내렸다. 울고 있는 나를 보던 남자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이게 다 네가 맨날 놔달라느니, 이런 말을 해서 그렇잖아.”

다 내 탓이라고 말한다. 정말로 내 탓일까 궁금했다. 싫은 티를 전력으로 내고, 몸서리치며 맞붙은 내가 문제라고 남자가 눈으로 설명한다.

“그러니 내 울타리 안에서, 내 보호와 권능 없이는 양이소로도 존재하기 힘들게 만들 거야.”

“정이소로도 모자라서, 양이소도?”

젖은 얼굴이 따가웠다. 남자의 손가락이 닿자 눈과 뺨이 예민하게 움찔거렸다.

“그래.”

“…왜? 내가 그렇게 잘못 했어?”

“글쎄… 너는 잘못 한 게 없지만.”

티슈를 뽑아 든 남자가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닦아주며 웃었다.

“알다시피,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란다, 아들.”

한쪽에 묻어둔 인간적인 감정이 길게 신음하며 고통을 토로했다. 훌쩍, 눈물을 집어넣으려고 애쓰는 나를 보고 남자가 이마에 입을 맞췄다. 좋을 리가 없었는데 발가락이 간질거렸다.

평상에서 엎드린 채 뻗어 있었더니 남자가 다시 씻으라고 성화를 부렸다. 인간 말종보다 못한 새끼. 결국 다시 샤워를 했다. 남자는 친히 씻겨 주겠다며 나를 끌고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발버둥을 치다 더 힘이 빠졌다. 두 번이나 강제로 사정했더니 다리가 떨렸다. 겨우겨우 옷을 입고 나왔다. 말끔하고 해맑은 남자와 창백해진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며 프런트의 직원들은 그러면 그렇지, 라는 얼굴을 했다.

로비에서 커피, 같은 태연한 소리를 지껄이는 남자를 잡아끌고 호텔을 허겁지겁 빠져나왔다. 얄미운 비서가 차를 대기시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비체가 우리 쪽을 향해 명랑하게 뛰어오다 갑자기 멈칫 섰다.

“비체야?”

비체가 코를 킁킁거리더니 갑자기 남자 쪽으로 폴짝 뛰어간다. 또 신발에 코를 가져다 대고 냄새를 킁킁 맡더니 사방팔방 폴짝거리며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남자가 입을 막고 터지는 웃음을 참았다.

“풉.”

“…뭐에요? 쟤 왜 저래요?”

못 본 사이에 비서가 약이라도 먹였나? 애가 왜 저래? 남자와 나를 왔다 갔다 뱅글거리며 혼란스러워하는 비체를 안아 들었다. 비체가 혀를 내밀어 내 목과 뺨을 핥았다.

“냄새가 똑같아서 적응 못한 거겠지. 개는 냄새로 많이 구분하니까.”

“…끔찍한 소리 하지 마세요.”

정액을 닦아낸 수건에, 냄새부터 진동할 탈의실을 치우며 직원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정말로 남자가 원하던 관계를 못 박고 떠나버린 좁은 공간에 아까부터 머리가 핑글핑글 돌고 있었다. 개는 인간보다 후각이 더 뛰어나니까 아마… 하체에 튀었던 남자의 정액과, 다시 샤워를 하며 사용했던 향이 진한 바디샴푸를 생각하다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호텔 쓰레기 같은 놈들. 저런 걸 만들어두다니. 천하의 개새끼들이었다. 아무 말 없이 과격하게 차에 올라탔다.

“훈제 오리를 먹으러 가려고.”

“정력에 좋죠.”

비서가 한마디 더 보탠다. 식욕이 뚝 떨어졌다.

“훈제 싫어요.”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마자 남자가 대답했다.

“꼭 훈제로.”

“알겠습니다.”

“씨발…”

욕을 참을 수도 없었다.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비체가 무릎에서 버둥거리면서 짖었다. 왕왕 울어대는 비체를 남자 쪽에 떠넘기고 차에 몸을 기댔다. 피곤하고 지친다. 정신을 너무 많이 갉아먹어서 우울증이 급작스럽게 찾아와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다.

다리를 시트 위에 올리고 눈을 감아버리는 나를 보며 남자가 웃는다. 비체가 남자의 허벅지 쪽에 매달려서 애교를 떤다.

“오늘도 고생했어, 아들.”

아들한테 지랄하지 마. 형편없는 아버지야. 마음속으로 대답하며 꾸역꾸역 고개를 끄덕였다. 창가에 머리를 툭 기대고 눈을 감았다.

남자의 말대로 나는 사회적 지위도 발판도 없었다. 남자는 나를 이기고 지배하길 원한다면 참아내자. 그 과정이 성적인 학대와 사회적 탄압이라도 아직은 참을 수 있었다. 좀 더 맹렬하게 확신을 두고, 안도할 때까지만 기다리자.

젖어버릴 것 같은 눈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짙은 선팅을 한 유리창을 남자의 시선이 관통했다. 하얀 강아지를 비싼 정장 위에 올리고 문지르며, 남자는 나를 노리고 있었다. 정확하게 반사된 감정을 읽으려 애쓰다 다시 눈을 감았다.

수치도 이성도 잠깐만 잊어두자, 잠깐만.

찰나가 될지도 모른다. 내가 어느 순간 스물이 되었던 것처럼.

오리 훈제의 기름이 야들야들 올라오는 돌판에서 남자는 젓가락을 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부추겉절이를 싸서 내 입에 허구한 날 쳐넣는 남자를 보고 비서는 그 옆에서 비체를 끌어안고 역시 사이좋은 부자지간이라 역겨운 칭찬을 했다.

비서도 분명히 알 텐데. 우리가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 곳에 가서 목욕을 했는지, 어쩌면 거기 싸질러둔 정액을 보고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을지도 모르지. 뒤에서 소문이 돌고 돌아 남자는 첩을 양아들로 들였다는 말을 할지도 모른다.

입을 벌리고 음식을 받아먹을 때마다 남자는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웃었다. 결국 빌어먹을 훈제 때문에 소화불량에 걸렸다. 단단히 체해서 밤새도록 변기를 붙잡고 속을 게워내는 나를 보고 남자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병가를 허락했다. 내 다리에 바짝 매달려 비체가 발로 종아리를 긁으며 같이 끙끙 앓았다.

위장에 있는 걸 전부 게워 냈는데도 도무지 속이 편안해지지 않았다. 비체를 발로 밀어 욕실 바깥에 내놓고 샤워기를 틀었다. 온몸이 한기에 덜덜 떨렸다. 이렇게 심하게 체한 적은 처음이었다.

샤워기로 몸을 뜨겁게 데우며 훌쩍거렸다. 바깥에서 비체가 문을 박박 긁으며 울었다. 속이 아파 죽을 것 같았다.

뼈마디가 욱신거린다고 고통을 호소하는 걸 보다 못한 엄마가 나를 1층으로 불렀다. 계단을 기어 겨우 거실로 나갔다. 겨울이라고 꺼내둔 커다란 러그 위에 등을 대고 누웠다. 엄마는 명주실을 가져와 내 검지를 칭칭 동여맸다. 피가 통하지 않는 검지가 금방 푸르게 변했다.

날카로운 바늘 끝을 검지에 가져다 대는 걸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소리도 나지 않는데 쿡, 하고 피가 빠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검지에서 송골송골 솟아나는 피를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아야야.”

“엄살은, 어쩌다 이렇게 체했어.”

“엄마 두고 맛있는 거 혼자 먹어서 벌 받았나 봐…”

죽은 피를 짜내고 소독약을 발라주는 엄마의 품을 비비적거리며 껴안았다.

“얘는, 똑바로 앉아. 아직 안 끝났잖아.”

“또 찌르게?”

“너 속 안 좋으면 조금 있다 한 번 더 하고.”

“아니야, 이러고 있으니 조금 나은 거 같은데…”

엄마에게서는 늘 따뜻한 냄새가 났다. 가끔 속상하게 하고, 미운 말을 할 때도 있었지만 내게 정말 가족이라고 말할 사람은 엄마뿐이었다. 친부는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가끔 내게도 정상적인, 다정한 아버지가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다른 집이 부럽다. 생활은 빠듯해도 아버지가 아들의 뒤통수를 때리며 술을 한 잔 하는 부자 관계가 부러울 수 없었다. 자신은 술을 하지 않으셔도 근영이가 술을 마실 때면 은근히 옆에 계신다는 근영이네 아버지가 내 아버지였으면 어땠을까 괜히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남은 건 엄마뿐이었다. 어릴 적부터 엄마가 우는 걸 보면서 아빠를 닮지 않기 위해 애썼다.

아직도 내 안에서 친부의 자취를 발견하면 역겨웠다. 폭력은 답습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에게서 탄생하는 것 같았다.

엄마도 나도 폭력의 피해자였지만, 서로가 폭력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다들 화와 분노를 배출시키지 못한다. 약자에게 어처구니없는 폭력을 행하게 되는 삶이었다.

바늘에 찔린 불쌍한 검지에 엄마가 밴드를 붙여주었다. 한결 체기가 내려간 것 같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슬금슬금 몸을 일으켰다.

“엄마, 엄마는 어때?”

두서없는 질문에 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낼만해? 요즘은 괜찮아?”

이렇게 엄마와 둘이 있는 것도 처음이었다. 남자가 어디선가 또 듣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남자의 앞에 대고 욕을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신파를 떠는 것쯤은 가볍게 넘길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다고 엄마가 말한다. 엄마는 늘 가정주부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운전을 해보고 싶지는 않을까? 골프는? 유럽으로 여행을 가는 건? 친구들을 자주 만나서 커피 한잔 하고 싶지 않을까. 이 커다란 저택의 삶에 매달린다고 산책도 잘 못 하면서 괜찮다고 말한다. 왜 우리는 괜찮아, 라고 말하며 위로를 구할까.

“집안일도 이제는 익숙하고, 요즘은 잠깐 나갔다 와도 뭐라고 하지도 않어. 네 이야기를 할 때도 있고…”

등을 다독거리며 엄마가 웃는다. 갑자기 아들이 거대한 회사의 사장이라는 사람을 따라 회사로 가게 되었을 때 엄마 기분은 어땠을까. 남자의 말처럼, 특별대우를 받는 아들을 보며 거리감을 느꼈을까.

“사실 나는… 안 괜찮아. 가끔 힘들고, 그럴 때도 있어.”

엄마에게 이런 말을 해보는 건 처음이다. 엄마가 나를 빤히 바라보다 얼굴을 쓰다듬는다.

“얼굴이 반쪽이네, 우리 아들.”

나를 아들이라고 부르는 남자와 성적인 관계가 있어. 남자의 손에 사정하고, 남자는 내 허벅지 사이에 성기를 마찰시키며 자위를 해. 우리는 키스를 하고, 남자는 미쳐있어. 나는 더 미쳤고. 죽어도 할 수 없는 말을 억지로 지우고 엄마 품에 파고들어 어리광을 부렸다. 커피 향이 가득한 거실에서, 어린아이처럼 엄마에게 귀를 파달라고 떼를 썼다. 엄마는 기꺼이 면봉을 들고 왔다. 나는 소파에 자리 잡고 엄마 무릎을 베고 누웠다.

사근사근 엄마가 어릴 적처럼 귀를 파준다. 간질간질하고 따뜻한 기분을 느끼며 엄마의 허리와 배를 만지작거렸다.

“예쁜 내 아들. 벌써 이렇게 다 크고.”

엄마가 나를 예쁘다고 해준다. 이 집안의 사람들이 예쁘다고 해주는 것보다 백만 배 기분이 좋았다. 유치한 동요를 모음 속으로 흥얼거렸다. 엄마가 불러주는 아들과 남자가 부르는 아들이란 단어는 어조부터 차이가 컸다. 나는 엄마처럼 누군가 나를 아들이라고 예쁘게 불러주길 바랐다.

예쁘니 너와 섹스를 하고, 네 입술에 입을 맞추는 관계가 되고 싶다고 듣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사람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말했다.

면봉이 귀 안쪽을 잘못 긁었다. 아야, 칭얼거리며 찔끔 나온 눈물을 얼른 엄마의 옷자락에 닦았다.

“힘들면 우리 그만할까?”

엄마가 말한다. 말없이 얼굴을 묻었다.

“엄마랑 아들이랑, 우리 다시 둘이 같이 살까?”

빚은 다 누가 갚아. 남자는 이제 어떻게 떨쳐내. 지옥까지도 해사한 얼굴로 웃으며 쫓아올 것 같은 남자를 생각하다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마가 미안해. 엄마한테는 정말 아들밖에 없는데… 늘 마음 아프게 하고.”

어리광을 부린 걸 후회했다. 마음이 아픈 말을 듣고 싶진 않았는데. 엄마의 우울하게 쳐진 목소리를 듣고 싶은 것도 아니었는데. 엄마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우울했다.

오후 시간이 느리게 갔다. 비체와 함께 낮잠을 자고, 일어나 엄마가 갈아준 과일을 조금 떠먹었다. 아직도 체기가 조금 남아 있어 음식을 먹는 게 불편했다.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틀어 엄마와 차를 마시며 영화를 한 편 보기도 했다. 처음으로 엄마와 제대로 된 여가를 보낸 기분이었다. 몸이 조금만 더 좋았으면 같이 나갔을 텐데. 또 언제 쉬게 해줄지 몰라 한숨이 나왔다. 입술을 꾹꾹 누르며 속에 있는 감정을 참는 내 머리를 엄마가 토닥거렸다.

“이소야, 눈 오네.”

거실에 난 베란다 창 너머로 흰 눈이 내리는 게 보였다.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영화에 집중하는 사이에 꽤 내렸는지 나무와 마른 잔디가 하얀색이었다. 엄마가 베란다를 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어머, 많이 온다. 쌓이겠네.”

엄마를 따라 바깥을 내다보았다. 뿌연 눈이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올겨울 들어 제대로 내리는 눈에 고개를 끄덕였다. 창문에 붙은 손가락에 한기가 다닥다닥 붙었다. 곧 올해도 끝이었다.

남자는 늦은 시간 죽을 들고 돌아왔다.

종이 가방을 내밀고는 말이 없다. 망설이다 포장된 죽을 받아 들었다. 밤 열 시가 넘은 집은 이미 어두컴컴했다. 복도에 서서 계단 밑을 내려다보았다. 보조 등만 아직 켜져 있었다.

“……”

“왜, 죽 벌써 먹었어?”

정혜 씨가 해줬나. 남자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남자를 따라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설명했다.

“오늘 엄마 몸이 안 좋아서요.”

“그래? 정혜 씨가?”

엄마는 저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오후 내내 잡아 두지 말걸, 하고 잠깐 후회했다.

“조금 피곤하시대요.”

“영양제라도 챙겨야 하나.”

갑자기 남편인 것 마냥 신경을 쓴다. 재수 없는 인간. 입술을 안으로 말아 핥았다. 온종일 토해서 입술이 거칠거칠했다. 앞니로 일어난 입술 각질을 물어뜯으며 혓바닥으로 입안에 들어온 각질을 뱉어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남자가 나를 보더니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입술 뜯는 거 아니야.”

여전히 건조하고 차가운 손가락이었다. 찬 물체가 입가에 닿으니 속이 좀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남자는 손가락으로 내 입술 안쪽을 쓸면서 한 손으로는 계속 휴대폰 문자를 쳤다.

“내일 아침 일찍 의사 선생님 오실 거야. 너도 같이 진찰받아.”

“의사…?”

“왕진. 드라마 안 봤어?”

재벌들이 나오는 흔한 드라마를 못 봤냐고, 남자가 코웃음을 치며 놀렸다. 재벌다운 삶을 살아봐야 왕진도 경험해보지.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문 채 고개를 뒤로 뺐다. 남자는 손가락에서 떨어져 나간 내 입술을 아쉽다는 듯 바라봤다.

“빨리 옷이나 벗으세요.”

“왜, 할래?”

“정상적인 범주로 사람의 언어를 이해해주시면 안 될까요.”

“사람의 언어는 무슨.”

남자가 코웃음을 치면서 코트를 벗었다. 검은색 긴 코트를 받아들고 한숨을 쉬었다. 코트에서는 양주를 쏟아낸 냄새가 나고 있었다. 행동이 살짝 다정하다 했더니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 이렇게 독한 술 냄새를 느끼지 못한 내가 바보 같을 지경이다. 탁자 위에 있는 섬유탈취제를 코트에 쏟아낼 기세로 뿌렸다. 드라이를 맡겨야 할 것 같았다.

남자는 넥타이를 풀어 바닥에 던지더니 그대로 침대에 기어들어 갔다. 양말이라도 벗어라. 혀를 차면서 침대 근처로 다가갔다. 남자가 두 팔을 뻗어 내 목을 덥석 끌어안았다.

“놔요.”

“냉정하긴.”

“술을 마셨으면 곱게 주무세요.”

“너는 언제 곱게 잤고?”

사람 기분 망치는 부분에서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목을 감싸 안고 있는 남자의 팔을 살살 풀어냈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남자는 내가 떨어져 나가도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워 있으니 취기가 점점 더 오르는지 얼굴이 붉다.

“아들.”

“왜요.”

“아들.”

“왜 불러요.”

“하하.”

말없이 남자의 근처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이마를 짚었다. 열이 나는 것 같지는 않다. 아픈 건 아닌 거 같은데 사람이 왜 오늘따라 더 미친 것 같지.

“너를 어쩌면 좋지.”

“사회적으로 매장할 거라면서요.”

장대한 인생 말살 계획을 상기시켜줬더니 대답을 들은 남자가 씩 웃는다.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하얀 얼굴이 붉어진 게 꽃이 핀 것 같았다. 이렇게 예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인성도 멀쩡한 게 좋지 않을까. 신은 공평한 게 아니고 비뚤어진 것 같았다. 천사처럼 웃는 악마를 만들어냈으니까.

남자가 내 손을 끌어 가볍게 입을 맞췄다.

“부족한걸.”

“……뭐가요?”

“그냥, 부족해.”

의뭉스러운 얼굴로 남자가 눈을 감았다. 손가락을 움직여 남자의 입술을 만졌다. 각질이 일어난 내 입술과 달리 부드러웠다.

“한 번 하면 나아질까?”

쓸데없는 개소리를 하는 남자의 입술을 꼬집었다. 남자가 엄살을 피운다. 정말로 손톱에 힘을 줘 찢어내 피라도 봐버릴까, 고민하다 눈물과 말을 삼키던 엄마의 얼굴이 생각나 손에 힘을 풀었다.

“두 번 하면 더 좋아질까.”

“자라니까요.”

“아빠라고 불러줘.”

“싫어요.”

“너무해.”

“칭얼거리지 마세요. 술을 처먹었으면 화장실에 박히던가.”

기회다 싶어 느긋하게 빈정거렸다. 남자가 입술을 비틀면서 웃었다. 바보처럼 웃는다. 깔끔하던 머리카락이 부산스럽게 흐트러졌다. 남자의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해주고 일어났다.

“수천 번씩 생각해.”

술을 마시면 말이 늘어난다더니. 방문을 나서려다 말고 남자를 돌아보았다.

“아니다, 수만 번…?”

“안녕히 주무세요, 변태 아버지.”

남자가 좋아하는 호칭을 내뱉으며 문을 쾅 닫았다. 방음이 워낙 좋았던지라 남자가 웃는지 화를 내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계단을 달리듯 내려갔다. 발소리를 들었는지 비체가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달려왔다. 작은 몸을 끌어안고 화를 참았다.

어설픈 관계는 빨리 부서지는 게 나은데, 남자도 나도 서로를 가족 간의 호칭으로 부르는데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었다. 타인의 언어를 기억한다. 결국 남만 못해. 남보다 못해. 나는 피해자야. 약자는 약자답게 세상을 살아…

뺨과 턱을 핥아오는 비체를 가슴에 얹고 거실 등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집은 늘 텅 비어있다. 엄마는 아무도 먹지 않는 요리를 하고, 아무도 오지 않는 집을 청소한다.

노인도 여자도 자주 집을 비웠다. 남자는 밤에만 집에 돌아왔다. 귀소본능이 남자에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족이랑 장단에 발을 맞춰주고 있는 것은 남자가 유일했다. 이 집에서, 엄마도 나도 하지 않는 가족 놀이에 가장 열성적인 것은 남자였다.

남자가 가족을 포기하려고 하면 그때 엄마와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엄마의 말처럼 다시 우리 둘이서 살 수 있을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공포를 끌어안고도 잘 버틸 수 있을까.

물론 이때까지 잘 버텨왔다. 다시 하라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초조했다. 남자가 내밀었던 죽의 고소한 향기가 1층까지 내려오는 것 같았다. 체기가 다시 찾아왔다.

해맑게 내 품을 파고드는 비체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깊게 한 것은 아니었다. 위층으로 다시 올라가 패딩을 껴입고 지갑을 챙겨 들었다. 남자의 아들이 되고 나서 유일하게 좋은 점은 용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무작정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문을 닫기 전 비체가 불안한 눈빛으로 짖어댔다. 쉿,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만히 누르며 비체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형 조금만 나갔다 올게. 조금만. 다 잠들었으니까, 깨어나기 전까지만.

겨울바람이 차가웠다. 눈은 가득 쌓이고 있었다. 조만간 세상을 뒤덮을 기세였다.

고급 주택이 깔린 조용한 거리를 빠져나오면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이 몇 개 나왔다. 그것도 지나서 걸어가면 코앞이 큰 길가였다. 매섭게 눈이 내리쬐는 밤거리는 그래도 사람들이 많았다. 목도리와 장갑으로 온몸을 무장하고, 몸을 숙인 채 바람을 피해 종종걸음으로 도망친다. 하얗게 입김을 불어 넣으며 길을 따라 쭉 걸었다. 마침 버스정류장으로 버스가 한 대 오고 있었다. 무작정 버스에 올라탔다. 2천 원을 꺼내서 넣고 잔돈을 꺼내는데 손이 벌써 꽁꽁 얼어 제대로 굽어지지 않았다.

차가워진 손등과 손가락을 문지르며 자리에 앉았다. 창밖은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기사님 안전 운전해주세요, 뒷좌석에서 나이 지긋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휴대폰을 의미 없이 만지작거리며 거리를 구경했다. 불이 환하게 켜진 도시의 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30분 가까이 시간이 흘렀을까. 창가에 손가락을 문지르다 왼편에 한강의 물줄기가 보였다. 본능적으로 하차 벨을 눌렀다. 버스가 정류장에 섰다. 한걸음에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강가는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춥다. 콧물을 훌쩍거리며 근처 편의점에 들어갔다. 라면과 어묵에 맥주를 잔뜩 사서 나왔다. 겨울바람이 부는 한강은 담요를 끌어안고 있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긴 했다. 다들 이런 한파에도 나오는구나. 국물이 흘러넘칠까 봐 조심조심 걸어서 한강이 잘 보이는 인적 드문 곳에 앉았다.

풀탑을 따서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보리 맛이 강하게 났다. 흐으,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떨었다. 찬 냉기가 몸 안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언 손을 억지로 움직여 어묵을 하나 건져 먹었다. 이런 날은 포장마차가 최곤데, 편의점 어묵도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맥주 한 모금, 어묵 한 입을 반복하다 컵라면 뚜껑을 열었다. 오늘 하루 종을 체해있던게 웃기다. 찬바람 좀 맞았다고 뜨거운 음식이 술술 넘어갔다.

얼큰한 입술을 빨며 맥주캔을 하나 더 땄다. 풀탑이 꺾이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마음이 후련해지는 기분에 크게 숨을 뱉어냈다.

혼자 청승을 떨고 있는 게 민망하기도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옛날에는 자주 산책도 하고, 날씨가 풀리면 신문지를 깔고 앉아 오징어에 맥주를 먹기도 했었다. 이제는 그런 것 따윈 꿈도 꾸기 힘든 인생으로 변해버렸지만.

나는 망쳐졌나, 하는 생각을 해봤다. 전부 끔찍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어쩌면 내게도 엄마에게도 조금은 좋은 부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악화하기만 한다면 좋은 것은 생각도 하기 싫어지겠지…?

술에 취해 부족하다고 칭얼거리던 남자의 얼굴을 기억했다.

“춥네.”

눈발이 거세졌다. 주변에 몇 명 있던 사람들이 추워서 못 견디겠다고 하나둘 자리를 떴다.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다 마신 맥주 캔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몸을 말고 다리 사이로 손을 끼워 넣었다. 꽁꽁 얼어 터진 손을 녹이며 어두운 불빛이 반짝거리는 강물을 보았다.

강물은 검푸르고 지하 같은 빛을 내고 있었다. 똑같은 풍경이고, 자주 보고 외우던 날씨가 어색하다. 유독 춥고 외롭다고 느꼈다.

비체가 혹시 외로워할까. 잠은 늘 사람의 품에서 자던 애 같았는데. 문을 나서는 나를 슬픈 눈으로 지켜보던 작은 강아지를 떠올렸다. 바닥에 내려놔도 기어이 올라와 품을 파고들고 잠을 자던 강아지가 늘 신경 쓰였다. 어릴 적 엄마와 아빠 사이에 끼어서 잠을 자던 때도 있었다. 주말에 늦게 라면을 끓여 먹던 좋았던 추억도 있었다.

마지막이 엉망으로 구겨져서 그렇지, 늘 최악이기만 한 건 아니었는데. 이런저런 딴생각을 하면서 등을 굽혔다. 찬바람을 한참 쐤더니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덜덜 떨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남은 쓰레기를 비닐봉지 안에 밀어 넣어 깨끗하게 치웠다. 이미 던져버린 맥주 캔을 찾을 마음은 도저히 들지 않아, 한참 쌓인 눈길을 밟고 다시 길가로 움직였다. 문을 닫은 포장마차와 전원이 꺼진 솜사탕 기계가 가로수 대신 우뚝 서 있었다.

흑백 사진 같다. 차들이 한참 헤엄치는 도로를 강물 근처에서 올려다보며 미련섞인 신음을 앓았다.

마음이 복잡했다. 엄마만, 남자만 아니었어도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걸 잘 알아서 미련이 넘쳤다.

머뭇머뭇, 좋아했던 강변을 계속 돌아보며 택시를 찾기 위해 거리를 기웃거렸다. 저쪽에서 오렌지 색 택시가 빨간 불을 켜고 걸어온다. 택시를 부르려고 손을 들자마자 옆에서 검은 물체가 튀어나오더니 내 팔을 잡아당겼다. 얼어있던 몸이 비틀거렸다.

“양이소!”

목소리가 나를 멈췄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마자 품에 끌어안겼다. 차갑게 식은 몸이 나를 세게 쥐었다. 뺨과 눈을 쓸어내리는 단단한 손가락을 느끼며 입을 벌렸다. 너무 놀라서 정신이 멍했다.

남자는 셔츠에 바지 차림이었다. 단추조차도 다 채우지 않아 하얀 목이 그대로 드러났다. 새빨갛게 변했을 정도로 찬 바람에 얼어있는 뺨 위로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눈꽃이 그대로 굳어져 있는 걸 보다 목도리를 허겁지겁 풀었다. 남자는 딱딱한 얼굴을 한 채로 목을 내주었다. 목도리를 둘러주며 언성을 높였다.

“미쳤어요? 날씨가 어떤데 이런 차림으로 나와요?”

“니가 없잖아.”

뭐라도 말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하얗게 얼어붙은 얼굴로 나를 보았다. 아무 말 없이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목에 목도리를 좀 더 제대로 감아주었다.

“어떻게 찾았어요?”

“휴대폰.”

그놈의 도청에 위치추적. 속으로 투덜거렸다. 남자가 나를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패딩이 바스락거렸다.

“이 시간에 왜 나온 거야?”

날카롭게 생성된 감정을 느끼며 말없이 남자의 손을 잡아끌었다.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남자는 잠깐 손을 내려다보더니 자신의 손을 빼냈다. 그러고는 다시 손을 고쳐 잡았다. 차가운 손바닥이 내 손을 덮었다. 한 발짝 앞서서 걸어가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옆얼굴을 지나 스니커즈를 구겨 신은 발은 발목이 고스란히 드러난 게 보였다. 하얗다. 잡힌 손을 살짝 당겼다. 남자가 걸음을 멈춘다.

“잠깐만요, 저기 앉아봐요.”

변두리에 있는 벤치를 가리켰다. 남자는 눈이 쌓인 벤치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뛰어가 손으로 눈을 쓸어냈다. 그래도 벤치는 젖어 있었다. 신문지를 구해올까, 머뭇거리는데 남자가 한 번 더 손으로 물기를 훔치더니 무작정 앉아버렸다.

순한 양처럼 눈을 깜박거리는 남자를 보다 이마를 짚었다. 이마도 몸도 얼음장처럼 차갑기만 했다. 아직 술이 덜 깬 걸까. 웃기지도 않은 생각을 하다 신고 있던 니트 양말을 벗었다. 겨울에 양말에 니트 양말을 겹쳐서 신고 다니는 버릇이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는데.

쪼그려 앉아 남자의 신발을 벗겼다. 시선이 콧잔등을 따끔따끔하게 만들었다. 말없이 남자의 발을 손으로 잠깐 녹였다. 얼음으로 만든 덩어리 같았다. 귀하신 몸이면서 동상이라도 걸리면 어쩌자고 이런 옷차림으로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놓고 감기라도 걸리면 또 나를 쥐 잡듯 잡겠지.

속으로 투덜거리며 남자의 발에 내 양말을 신겨주었다. 파란색과 흰색 실이 섞인 니트 양말이 신겨진 발가락이 꼼지락거린다.

“이제 신발 신어요.”

“……”

“뭐해요?”

어린아이처럼 발장난을 치던 남자가 신발을 구겨 신었다. 똑바로 신어라, 라고 잔소리를 하려고 했는데 목덜미가 잡혔다. 허리를 숙이고 나를 끌어안은 남자를 내려보다 뺨과 귀를 손바닥으로 덮어 녹여주었다.

“집에 가요.”

“…그래.”

남자의 목소리가 어쩐지 울 것처럼 들렸다.

택시를 잡아타고 가는 내내 남자도 나도 말이 없었다. 택시 기사는 이상한 차림을 한 남자와 나를 보며 이상한 얼굴을 했고, 호화 주택가의 주소를 듣고는 더 이상한 표정을 했다.

미친놈과 미친놈 잡으러 나온 사람으로 보이나 보지 뭐. 생각하니 우스워 픽 웃는 소리를 냈다. 남자가 턱을 괸 채 물끄러미 나를 돌아보았다. 눈짓으로 남자의 시선을 닫고는 무릎에 가지런히 손을 올렸다. 택시 안의 히터 열기로 얼었던 손이 천천히 녹고 있었다.

남자가 손을 뻗었다. 아래에서 천천히 건너오는 손을 보다 손바닥을 착하게 펼쳤다. 가지런한 손끝이 손바닥에 난 골을 긁었다. 저렸다.

“그냥 산책을 나온 거예요. 잠이 안 와서.”

“……”

“…도망치려거나 한 건 아니에요.”

“알아.”

손끝이 닿을 때마다 피부가 후끈거렸다.

“알고 있어.”

찰나였지만 승리가 보였다. 불쾌한 감정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는 보란 듯이 남자가 감기에 걸렸다. 눈 오는 겨울 날씨에 그 꼴로 움직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아침에 왕진을 온 의사 선생님은 나 대신 남자가 아프다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다 해열제와 링거를 처방해주었다. 침대에 꼼짝없이 붙들린 남자를 두고 나만 회사로 출근했다. 비서는 겨울철 건강관리의 중요성에 대해 출근하는 내내 떠들었다.

아침부터 아픈 남자 때문에 난리를 쳤는데 잔소리까지 들으니 회사에 올라가기도 전에 진이 죄다 빨려 있었다. 남자도 없는 회사를 꼭 혼자 올 필요가 있을까… 우울하게 신발을 질질 끌면서 걷는데 비서가 나를 불렀다.

“도련님.”

괜히 무거운 척 내리깐 목소리에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다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도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또 무슨 저주를 하시려고?”

“저주라니요, 저는 늘 사실만 이야기합니다.”

매끄럽게 입에 발린 말투에 진저리를 치면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비서는 일이 있어서 외근을 나가야 한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며 나만 올려보냈다.

단숨에 최상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며 내리자마자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 나를 반겼다.

“…최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나이 지긋한 목소리가 인사를 하는데 받아주지 않을 수도 없어 고개를 꾸벅했다. 나를 유독 싫어하는 꼰대가 매서운 눈초리로 내가 입고 있는 옷을 구석구석 들쑤셨다. 네이비색 야상을 가릴 수도 없어 그냥 뻔뻔하게 서 있었다.

“여전히 정장을 착용하지 않으시네요.”

“음, 제가 정장을 입고 일 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서요.”

느긋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최 이사의 목소리가 경멸스럽게 변했다. 안에 운동복 트랙 탑을 입은 것을 보면 죽여버리기라도 할 기세였다.

“옷차림은 회사 생활의 기본입니다.”

“아… 아시다시피 저희 아버지가 기본이 좀 독특하신 분이라.”

내가 운동복이나 걸치고 다니는 건 남자가 묵인한 일이었다. 남자는 아침에 늘 칼같인 정장을 차려입으면서 내게는 후드티나 던져주는 이상한 패션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본인이 직접 던져주는 옷을 거절할 수도, 거절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 잘 입고 다니고 있었는데. 왜 나한테 옷차림을 따지고 드느냐는 말이다. 남자에게 직접 말을 하진 않고 내게만 공격적으로 나오는 게 특히 재수 없었다.

회사는 대부분 다 재수 없는 사람들뿐이었지만. 들고 있던 가방을 내 책상 위에 내려다 놓았다.

“아버지라니, 뻔뻔스럽기 그지없는 호칭이군.”

호적상 아버지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무슨 문제라고. 남자가 출근하지 않는 건 어떻게 알고 아침부터 찾아와 시비를 거는지 모르겠다. 야상 지퍼를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세요? 사장님도 안 계시니까 용건만 이야기해주시면 좋겠는데.”

안에 입은 옷을 찢어버릴 기세로 노려보던 최 이사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입을 꿈틀거렸다. 저렇게 대놓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처음이라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전투본능이 샘솟았다. 흘끗 최 이사의 표정을 확인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곧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들을 끼고 논다는 소문이 다 퍼졌어! 어쩔 셈이야!”

외투를 벗다 순간 비틀거렸다. 다리 힘이 훅 풀렸다. 고개를 떨어트린 채 무릎과 허벅지를 잡고 있다 천천히 일어났다.

“뭐라고요?”

“그런 곳을 같이 가다니! 양 사장도 생각이 있어야지!”

최 이사가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지른다. 비서가 나를 배웅하며 했던 안부가 갑자기 거슬렸다. 답답해지는 심장을 훅 긁으며 사장실 문을 차고 들어갔다. 다른 임원 몇 명이 바깥에 서 있었다. 다들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뒤따라 나온 최 이사가 어깨를 잡아 돌리며 삿대질을 한다.

“아버지? 아버지라고! 양 사장이 미친 게 분명하지. 이런 더러운 관계를 아들이라고?”

남자의 발에 양말을 신겨주던 사진이 내 얼굴을 때리지도 못하고 팔랑거리며 발치에 떨어졌다. 반나절도 지나지 않는 일이었다. 남자가 내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것도 내 근처에 닿지 못하고는 떨어졌다.

“소문이 의심스러워 당장 사람을 붙였지. 그랬더니 이런 사진이 나와?”

“……저는,”

“기가 막히는군, 이게 후계자라고?”

멱살이 잡혔다.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나와 남자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은 전부 사장실로 올라온 것 같았다. 오늘 해야 할 숙제를 몇 가지 일러주던 남자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쿨럭거리며 기침을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제 옷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나를 찾아 밤거리를 달렸던 남자가…

비서는 이미 보고를 받았을 것이다. 그래놓고도 남자라는 방패 없이 나를 우리 안에 던졌다.

방패?

아니야, 나는 중얼거렸다. 눈을 부릅뜨고 있던 최 이사가 나를 잡고 흔들었다.

“뭐라고 말 좀 해!”

고함이 아침부터 난무하는데, 충격은 더러운 소문보다 다른 것이 더 강했다.

“…아니야.”

최 이사의 손을 털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남자의 악언을 들은 것이 얼마 되지도 않았다. 분노가 이렇게 빨리 지워질 수 있었나? 동정도 연민도 이렇게 차오를 만한 공간이 남아 있었나? 스스로 생각해낸 단어가 뺨을 세차게 갈겼다.

방패라니.

남자는 폭언과 폭행을 만들어낸 장본인인데.

“……나도 피해자예요.”

최 이사도, 옆에 서 있던 다른 임원들도 그럴 리 없다고 눈을 홉떴다. 우두커니 서서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저었다.

“나도, 피해자라고요.”

“이게 어딜 봐서 피해자야…!”

구둣발이 사진을 왈칵 밟았다. 남자의 흰 발을, 발목을, 얼음장 같던 발가락을 만졌던 기억은 아직 녹지도 않은 눈 속에 사로잡혀 있었다.

“동정해주세요.”

“뭐?”

“연민에 빠져보세요.”

“이게 정신이 나갔…”

그들의 말대로 나는 미쳤을지도 모른다. 아주 일찍.

“저는 정말 지금 그게 필요해요.”

가냘픈 차림에 연민을 줘서는 안 되었다. 나는 최 이사의 발을 밀치고 내 운동화로 사진을 가렸다. 내 옆얼굴이 보이지 못하도록.

오후 늦게 이사회가 열렸다. 걷잡을 수 없이 번진 사태에 내가 한 일은 고작 사진을 주워두는 것뿐이었다. 손바닥으로 가려둔 내 얼굴이 꼴도 보기 싫었다. 내 머리를 감싸 안고 입을 맞추는 남자의 행위는 떠올리는 것조차 싫었다. 자괴감과 우울증이 번갈아가며 밀려들어 왔다. 내가 사용하는 작은 책상 앞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점심도 거른 채 눈만 깜박거렸다.

남자는 아픈 기색도 없이 멀쩡한 얼굴로 출근했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며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 이것저것 명령을 내린 남자가 내 앞으로 왔다. 어깨에 한가득 묻은 한기에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사진을 가져간다. 뺏기지 않기 위해 손에 힘을 줬지만, 남자가 내 손목을 잡아 떨어트렸다. 허무하게 사진을 넘겨주었다. 남자는 발자국이 진하게 남은 사진을 들여다보며 말없이 웃었다. 시선은 그의 발목과 발등을 덮은 내 손을 거칠게 문지르고 위로 올라와 얼굴에 닿았다. 입술을 힘없이 물었다.

“주영아.”

남자가 비서의 이름을 불렀다. 아니꼽기 그지없는 비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장님.”

“그 호텔 직원 좀 잡아다 대령해둬.”

“오늘 오전에 이미 신변 확보해뒀습니다.”

잘했다는 듯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생각보다 입이 너무 싸잖아.”

사진을 뒤집어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둔 남자가 내 품 안에 무언가를 넘겨주었다. 따끈하고 부드러운 것이 가슴팍을 간지럽혔다. 비체였다. 코트 품 안에 가려져 있어서 몰랐다. 강아지를 데려온 모양이었다. 코트 안쪽에 비체의 하얀 털이 묻어 있었다. 손을 뻗어 긴 털을 떼주었다.

남자는 내 뺨과 턱과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턱턱 문지르는 거친 손길에 저절로 눈 한쪽이 찡그려졌다.

“걱정하지 마.”

“……”

“별일 아니야.”

별일이 아니라고. 별일을 만들어낸 주제에 하는 행동에 말이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비서가 다가오더니 하얀색 납작하고 큰 상자를 하나 건넸다. 별일 아니라네요. 속닥거리는 얄미운 목소리에 명치를 몰래 힘껏 치고는 상자를 넘겨받았다, 등을 굽히고 끙끙거리는 꼴을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

“열어봐. 방금 산 거야.”

남자의 말에 홀린 듯 상자를 열었다. 상자에는 세트로 갖춰진 정장이 들어있었다. 넥타이, 흰색 셔츠와 까만색 정장.

“입어.”

코트를 벗으며 남자가 명령한다. 남자도 스리피스 정장을 갖춰 입고 있었다. 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복장치고는 유난히 화려했다. 손목에서 푸른색 보석이 세공된 커프스 핀이 번쩍거렸다. 입고 있던 츄리닝을 벗고 바지와 셔츠를 걸쳤다. 비서가 옆에서 벨트 매는 것을 도와주었다.

접힌 카라 깃을 빼내 정리하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새하얗게 질린 안색을 남자가 훔쳐보더니 상자 안에 들어있는 넥타이를 집어 들고 내 뒤로 왔다. 목덜미를 간지럽히던 손가락이 긴 넥타이로 목을 조를 것처럼 날렵하게 움직였다. 성인 남자의 가슴팍이 등 뒤를 간지럽힌다.

나이로는 나도 성인이었지만, 남자가 나보다 키가 크기 때문일까, 가끔 어른의 위압감을 느낄 때가 있다. 눈을 내리깔고 내 넥타이 매듭을 짓는데 열중하는 남자를 보니 그랬다. 입안이 바싹 메말랐다.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는 사이 남자가 손을 뗐다.

“다 됐다.”

어깨를 잡고 몸을 돌리게 한다. 순순히 몸을 돌려 남자를 마주 봤다.

“주영아, 왁스.”

“여기 있습니다.”

남자가 머리를 고정할 때 쓰는 왁스를 손가락으로 덜어냈다. 체온으로 매끈하게 녹인 왁스를 꼼꼼하게 손가락에 펴 바르고 내 앞머리를 잡아 올린다. 이마가 드러나자 기분이 이상했다. 남자는 내 머리를 매만지며 조금 인상을 썼다.

“어렵네. 드라이를 하는 게 좋은데…”

기분이 이상했다. 대충 앞머리를 깔끔하게 넘겨지자 남자가 스프레이를 위에 뿌렸다. 독한 냄새에 눈을 꽉 감고 콧잔등을 찡그렸다.

“눈 떠봐.”

다정한 목소리가 눈꺼풀을 간지럽혔다. 슬며시 눈을 떴다. 남자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모습을 샅샅이 내려다보더니 방긋 웃었다.

“예쁘네.”

남자가 거울을 보내 만들었다. 매끈하게 손질된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비싼 옷을 입고 어색한 표정을 한 내가 거울에 보였다. 물티슈에 손을 닦아낸 남자가 내 뺨을 매만졌다.

“이렇게 보니 좀 닮았나?”

유전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소리를 하며 남자가 태연하게 웃는다. 소리 내서 웃는 얼굴은 쾌활했다. 아침의 열병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내 어깨를 두드린 남자가 담배를 입에 물고 한 모금 빨아들이더니 그대로 긴 담배를 꺾어 재떨이 안에 힘차게 구겨 넣었다. 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남자가 사장실 바깥을 바람처럼 나갔다. 품에 있는 비체를 내려놓고 허겁지겁 남자를 따라나섰다.

회의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벌써 다들 들어와 앉아 있는 건지 시끌벅적한 소리가 바깥까지 들렸다. 남자가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주춤주춤 가까이 다가가자 남자가 내 팔뚝을 잡고는 소맷귀를 매만졌다. 금방 떨어져 온 손이 있던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커프스 핀이 매달려 있었다.

남자가 한쪽에만 매달린 자신의 커프스를 흔들어 보여주며 씩 웃었다. 장난스러운 얼굴에 이게 다 연극은 아닐까, 하는 어이없는 상상을 했다. 뭘 이야기해야 하는지, 남자가 뭐라고 할 계획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남자는 회의장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사람이 수치를 알아야…!”

소리를 막지르던 이 상무의 입이 다물어졌다. 남자 쪽 진영의 사람들과 최 이사 쪽 사람들의 표정이 극명했다. 남자는 손깍지를 끼고 몸을 풀며 끝에 있는 상석에 걸어가 앉았다.

“제가 좀 늦었나 봅니다.”

불량스럽게 의자에 눕다시피 앉은 남자가 심드렁하고 권태로운 목소리로 첫인사를 내뱉으며 다리를 회의용 탁자 위에 올렸다. 검은색 구둣발이 까딱거렸다. 기가 막힌 태도에 입구에 선 채로 입을 벌리고 있었더니 비서가 등을 두들기며 귓속말을 했다.

“들어가세요. 문 닫겠습니다.”

등을 떠밀려 억지로 남자의 옆으로 걸어갔다. 남자가 팔을 휘저어 빨간 플라스틱 의자를 꺼내주었다. 오늘따라 이 촌스러운 싸구려 의자가 더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인 채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시선이 바늘처럼 따끔거렸다. 어깨를 푹 움츠렸다. 뻔뻔하긴. 누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흘렸다.

“양 사장. 해명을 해보세요, 최 이사 말이 사실입니까?”

고 전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금방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서로 제 할 말을 하니 시장 한복판이 따로 없었다. 그 사우나가 어쩌니저쩌니, 호텔직원이 한 말이니, 사기니 협박이니. 삿대질이 시작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도 있었다. 가장 목소리가 높은 사람은 최 이사였다. 최 이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남자를 향해 큰 소리를 냈다.

“근본도 없는 나이든 여자랑 결혼한다고 하더니, 아들이라고 데려온 사람과 염문설을 뿌려? 회사 이미지가 뭐가 되겠소!”

“맞습니다. 사장님, 해명을 부탁드립니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이상하게 결혼을 하고 다 큰 애를 아들이라고 들이밀 때부터 이상하댔잖아.”

엄마는 꼬리표처럼 따라왔다. 바지를 꽉 쥐었다. 남자가 눈을 흘낏 옆으로 돌리더니 내 손등을 툭툭 쳤다. 태연한 몸짓에 저절로 힘이 빠졌다.

“이상한 말씀 꺼내지 마세요. 아직 정확한 증거가 나온 것도 없는데 이런 식으로 루머를 만들면…”

“증거? 아버지와 아들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곳이 조선 천지 어디 있어?”

사진을 들이대며 이 상무가 침을 튀겨가며 주장했다. 이마에 바짝 오른 핏줄에 남자 쪽 사람들이 목울대를 꿀렁거렸다. 그래, 어떤 미친 아들이 아버지 발에 양말을 신겨주고… 어느 미친 아버지가 한 겨울날 아들 찾으러 옷도 안 입고 쫓아 나오겠는가. 나만 억울하지, 정황상 증거는 충분했다.

“엄한 놈 데려오는 것도 모자라서, 정부라니!”

“아니, 일단 말을 들어봐야 할 거 아닙니까.”

“말은 무슨 말, 여기서 무슨 말을 더 들어요?”

난리가 났다.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 때문에 고막이 나갈 지경이었다.

“사내자식을 데려와 후계자로 세운 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제 말이요. 여기 수십 명 제대로 키운 자식은 인간도 아니고, 어디서 굴러먹던 창부에…”

가만히 듣고만 있던 남자가 발을 들어 테이블을 걷어찼다. 쾅, 날벼락 같은 행동에 다들 할 말을 잃은 표정이 되었다.

“최 이사님.”

“양 사장.”

“여기 회사 주인은 나인데.”

최 이사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남자는 자신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고 갸웃거렸다. 천진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걸 아직도 모르나?”

누군가 침을 삼켰다. 창백하게 질린 공기에 팔을 쓰다듬었다. 몸에 꽉 맞는 슈트가 답답했다. 넥타이는 길게 늘어진 목줄 같았다. 남자가 손을 들어내 턱을 잡아 추어올렸다. 턱이 들린 채 사람들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야 했다.

“여긴 법적으로 아주 정확하게 내 아들이고, 내가 내 아들과 섹스를 하든 연애를 하든, 평범한 부자 관계를 유지하든 당신들은 알 바가 아니야.”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린다. 전혀 상황 해결이 안 되는 협박성 발언에 얼굴을 찡그렸다. 걱정하지 말라더니, 남자 때문에 걱정이 태산처럼 불어났다. 정말로 남자는 내가 숨겨둔 애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아니라고,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이런저런 오해가 겹친 거라고 허황한 변명이라도 하면 되는 건데.

…남자가 그럴 리가 없었지만, 회의장에 오기 전까지 조금이나마 믿었던 내가 병신이었다.

“양 사장,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런 더러운 소문이 바깥에 새나가지 않을 것 같아?”

“새어 나가면 뭐 어떻죠?”

남자가 이를 드러내고 욕정이 들끓는 표정으로 웃었다.

“내가 괜찮다는데 왜 다들 이렇게 난리야? 어디, 누가 나 대신 사장이 하고 싶어 미치는 사람들이 있나?”

회의장 안의 사람들 면면을 뜯어보는 남자의 시선에 다들 눈을 돌렸다. 수군덕거리는 시선이 혐오스럽게 내 따귀를 때리고는 혀를 찼다.

쯧쯧, 세상이 말세야. 더러운… 뻔뻔하기도 하지… 모욕적인 언사가 들렸다. 눈이라도 감고 싶었는데 남자는 내 턱을 고정한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다 한 번 물갈이가 되고 싶은가 보지? 내가 사장 자리에 앉아 실무나 갈기니까 만만해 보였나?”

실질적인 회사 운영은 전부 남자가 하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회장은 노인이 직함을 맡고 있었지만, 이름을 제외한 모든 것은 남자가 통제했다. 남자는 시시때때로 서류를 찢어버렸으며, 악담을 퍼붓고 사람을 서슴없이 잘라버리는 인간이었다. 회사 건물 최상층에 똬리를 틀고 앉은 자신들보다 젊은 남자를 요절내지 못해 안달 난 사람들은 차고 넘쳤다.

이번이 기회라고 달려든 거겠지. 이 회사를 조각조각 내서 가지고 싶을까. 욕심이 주렁주렁 매달린 벌건 얼굴들을 보다 침을 가만히 삼켰다. 목 안쪽이 쓰라렸다.

“양 사장, 지금 우리가 회사 운영을 이야기하자는 게 아니고…”

최 이사가 말을 돌렸다. 저 비열한 새끼. 안쪽 볼살을 지긋하게 깨물었다. 남자 없이는 어떤 모욕적인 소리도 받아칠 수 없다는 걸 확인하자 얼얼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 뭔가요? 내가 정한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며.”

남자가 다리를 꼬며 대꾸했다. 우습게도 거만한 태도를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들이면! 그런 추문이 나서는 안되는 게 맞잖소.”

“추문? 추문이 뭡니까.”

이제는 손톱 손질을 할 것처럼 자신의 왼손을 뜯어보던 남자가 고개를 까딱했다.

“아, 그 프라이빗 사우나.”

“그래! 거기에 갔다고 난리가…!”

“거긴 내가 추문이 나라고 간 거고.”

뻔뻔한 남자의 말에 최 이사가 입을 떡 벌렸다. 다들 경악한 얼굴이었다. 인간 이하의 도덕성과 양심을 가진 남자는 계속해서 지껄였다.

“최 이사님. 나는 당신이 나보다 한발 빠르게 애 목을 졸라서 기분이 상한 거야.”

이런 씨발놈. 분노에 차 남자의 손을 떼고 떨어지려 했다. 손등을 잡자마자 세찬 헛기침이 들렸다. 아니, 시발. 사귀는 거 아니라고. 대놓고 스킨쉽을 한 것 같은 찝찝한 기분에 얼른 남자의 손가락을 잡아 뗐다. 남자는 물러서지 않은 채 내 턱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뼈가 눌리자 통증이 퍼졌다.

“공들이고 있는 애 기분을 잡치게 하면 내 기분도 나쁩니다.”

남자의 말이 고요하게 귓전을 때렸다. 정통으로 시선이 충돌했다. 남자가 보조개를 움푹 패며 웃었다. 비쭉, 그 아름다운 얼굴에 소름이 돋았다. 남자가 내 턱을 잡아당겼다. 지탱할 곳 없어 휘청거리는 몸을 남자가 받아 잡았다. 순식간에 입술이 닿았다.

“미친…!”

내가 할 말을 누군가 대신 하고 있었다. 소리 없는 비명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눈을 부릅뜬 채 남자의 입술을 받았다. 자연스럽게 아랫입술을 깨물고 남자가 혀를 밀어 넣었다. 아랫니를 핥으며 남자가 속삭였다. 혀 내밀어. 그 소리를 들은 고 전무가 심장을 잡았다. 이 미친 새끼. 손을 들어 한 대 치려고 했지만 눈치 빠른 남자에게 팔이 잡혔다. 남자가 바짝 몸을 붙이고 내 혀를 잡아챘다. 턱을 쥔 손이 점점 더 강해졌다.

통증과 아픔에 본능적으로 입을 벌렸다. 남자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관전하기 좋게 자세를 틀고 마음껏 입안을 훑었다. 입술을 빨아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다.

타액이 섞이는 소리 끝에 남자가 입천장을 강하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건드리는 남자의 행위에 저절로 소리가 났다.

“으…으응.”

약한 신음을 들은 남자가 눈을 번뜩였다. 강하게 입천장을 문지르던 남자가 아슬아슬하게 혀뿌리 안쪽을 쓸고 나왔다. 쪽, 쪽. 소리 나게 립키스를 날리며 혀만 내밀어 내 입술을 핥고 침이 고인 혓바닥 중앙을 쓸었다. 몸이 떨렸다. 입술을 먹어버릴 것처럼 삼킨 채 마음껏 점령지를 넓혀간다. 숨이 가빴다. 계속 잡혀있던 턱관절에 힘이 풀려 입가로 타액이 흘렀다. 앞에서 숨 들이켜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만족했는지 남자가 가느다랗게 힘 빠진 소리를 내며 얼굴을 풀어줬다. 입 주변이 침으로 범벅이었다. 얼굴이 붉어져 얼른 손바닥을 들어 입을 가렸다. 남자가 재킷 안에서 손수건을 찾아 입가를 닦아주는 체했다. 가지가지 하는 행동에 남자의 손을 치고 손수건을 뺏어 들었다.

“이… 이 미친.”

손수건 안에 고였던 타액을 뱉어내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기분이 좋은지 뺨이 붉어져서는 실실 웃고 있었다. 정신병자 새끼. 분노로 몸이 떨렸다. 즐기는 거다. 분명히 제대로 즐기기 위해 사고를 친 게 확실했다.

호모 키스 쇼를 강제로 관람한 임원진 중 한 명이 몽롱해진 얼굴을 겨우 굳히며 입을 열었다.

“도…도대체, 왜, 왜 저런.”

“양 사장, 정말 자네 미친 건가? 어떻게 아들, 아들과.”

다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도저히 정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죽고 싶었다. 쪽팔리고 화가 나서 남자 목을 졸라버리고 싶었다. 지금 시행한다면 분명히 박수갈채를 받을 것이다. 그냥 죽여버릴까. 고민하는데 남자가 희한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걸 몰라서 물어?”

경박한 놈. 최 이사의 목소리였다.

“너네 노땅들 못생긴 얼굴보다 이런 예쁜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잖아.”

노땅. 남자의 언어는 기가 막힐 정도로 불량했다. 평범하게 욕을 섞어 대화를 나누던 대한민국 고등학생인 나도 저 정도로 분별없이 욕을 하지는 않는다. 컥, 최 이사가 혈압 오르는 소리를 내며 뒷목을 잡았다. 최 이사와 친한 쪽 사람들이 다시 언성을 높였다.

“차라리 계집을 끼고 놀아! 어떻게 남자야, 남자가!”

누구 한 명이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질렀다. 남자가 무슨 소리야, 하는 얼굴로 일갈했다.

“병신들, 너네나 여자 붙잡고 헐떡거릴 시간에 외모나 가꾸든가 실무에 뛰어들어. 뱃살만 늘어서는.”

남자가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 돼지 새끼들이 집단으로 바글바글 모인 회의실 안에서 저 혼자 세상에서 제일 통쾌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최 이사가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라졌다.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끝에서부터 하나둘 자리에서 주춤주춤 일어나 꽁지를 내빼고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속도는 탄력이 붙었고 이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는 조용했다. 고작 남자의 손가락 욕설과 막말에 전투 의지를 상실하고 물러나는 걸 보니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인원이 저렇게 많은데 그중 남자를 엿먹이는 사람이 하나 없단 말인가.

남은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러 들어온 비서에게 남자가 손짓했다. 비서는 회의장 문을 닫고는 다시 나갔다. 문이 닫히면서 싸늘한 바람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텅 빈 회의장에서 망연자실해 앉아있다 물었다.

“진짜 미쳤어요?”

“아니.”

대답이 너무 빨리 돌아왔다. 당당한 어조에 크게 의심이 생겨 말을 돌려 물어봤다.

“정신병 있어요?”

“그건 있을지도 몰라.”

조금 양심적인 대답이다. 안도 대신 우울증이 밀려왔다. 역시 남자는 정신병자가 맞았다. 나는 벌떡 일어나 남자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남자는 내게 멱살이 잡힌 채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진한 척 눈을 굴리는 꼴을 보니 죽여버리고 싶었다.

“걱정하지 말라며!”

“내가 질까 봐 걱정하는 거 같길래.”

“안 했어!”

이게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한 게임인 줄 이제 알았다. 남자는 정말, 조금도 이번 아웃팅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하긴, 아까도 소문이 나라고 갔다고 그랬지. 사회적으로 매장을 할 거라더니 가지가지로 사람 무덤을 파주고 있었다. 길길이 날뛰는 복장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쓰니 저절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남자가 내 손등을 툭툭 두들기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이거 놔. 거칠게 손을 놓고 내 의자에 주저앉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열이 펄펄 끓더니, 아주 건강하시네요.”

“아, 점심때 피로회복을 좀 했거든.”

구겨졌던 넥타이와 셔츠를 정리하며 남자가 즐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마나 좋은 피로회복을 하는 건지. 코웃음을 치며 남자를 노려봤다.

“뭐 산삼이라도 씹어 드셨나 보죠.”

“궁금해?”

떠보는 말투에 호기심보다 찝찝한 기분이 먼저 들었다. 물어봐야 할까, 괜히 무덤을 파는 건 아닐까 고민이 되었다. 슬쩍 시선을 피하려고 했다가 딱 눈이 마주쳤다. 초롱초롱한 남자의 눈에 어쩐지 못 이기는 기분이 들어 망설이다 물었다.

“…뭐 하셨는데요?”

기다렸다는 듯 남자가 냉큼 대답했다. 정말 말하고 싶었는지 어깨가 들썩인다. 발랄하게 붉어진 뺨이 좀 어린애 같다, 하는 순간 고어한 말을 남자가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네가 신겨준 양말로 자위했어. 엄청 짜릿하더라.”

“……뭐?”

할 말을 잊었다.

내가 들은 말이 인간의 언어는 맞을까. 한국어는 맞을까. 사실 엄청 어려운 외국어는 아닐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들었다. 사고가 엉망으로 엉켜서 가만히 눈만 깜박거렸더니 남자가 불쑥 다가와 아랫입술을 빨았다. 뜨거운 입술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벌떡 일어나 남자의 어깨를 밀쳤다.

“꺼져, 이 변태 새끼야!”

제 의자로 처박힌 남자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우울한 얼굴은 사진으로 찍으면 청초한 미인의 우수 젖은 표정. 이런 타이틀을 달 것처럼 생겨서는 입을 열고 다시 성희롱을 지껄였다.

“너랑 키스하다 사실 섰어. …빨아주라.”

“정신 나갔어?”

남자가 아쉬워하며 자신의 고간을 더듬었다. 정장을 입고 때깔 나게 앉아있으면 뭘 하겠는가. 하는 짓은 저런 대가리에 총 맞은 변태 짓인데. 팔뚝을 쓸어내리며 슬금슬금 몸을 뒤로 뺐다. 주춤주춤 뒷걸음질하는 나를 구경하며 남자가 씩 웃었다.

“그럼 내가 빨아줄까?”

“아가리 닥쳐.”

사람이 호랑이 굴에 들어가면 오히려 용감해진다고. 신성한 회의실에서 괴팍한 일을 당할 지경에 놓이니 말이 함부로 튀어나왔다.

“진짜 당신 미쳤어? 그 많은 사람 있는 곳에서 강제로 키스하고, 도대체 나는 어떻게 얼굴 들고 살라는 거야?”

말하다 보니 진심으로 울분이 터졌다.

“해도 해도 너무 한 거 아니야? 나랑 엄마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잘못한 건 없지.”

“근데 왜 나한테 이러는데요!”

“그냥 네가 좀 예쁘고, 성격도 참…맘에 들고.”

“씨발 새끼야!”

욕을 섞어가며 화를 내는 나를 보는 남자의 얼굴이 점점 희열을 띠기 시작했다.

철컥. 벨트 풀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목이 뻣뻣하게 굳었다. 남자가 벨트를 느슨하게 만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 목을 주무르며 나른하게 고개를 들어 올리는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지, 진짜 할 거 아니죠?”

“아니긴 왜 아니야.”

소름 끼치게 다정한 목소리를 내며 남자가 자신의 손가락을 빨았다. 손가락 끝과 손톱을 스스로 애무하며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괴물처럼 다가오는 남자를 보다 흘끗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대한 회의실 문이 가까운 듯 멀어 보였다. 도망치자. 결심하자마자 뒷덜미가 잡혔다.

“놔! 고소할 거야! 놔!”

“고소는 무슨, 내가 빨아준다는 데 니가 고소할 입장은 돼?”

“필요 없다고 했잖아!”

“난 필요해.”

브리프 위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남자가 나를 엎어 회의실 책상 위에 던졌다. 딱딱한 책상에 수평으로 엎어졌더니 죽을 것처럼 아팠다. 얼얼한 얼굴과 코를 문지르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남자가 발목을 잡아당겼다. 매끄러운 책상은 마찰도 없어 몸이 그대로 질질 끌렸다. 두 발에서 구두를 벗겨내며 남자가 드러난 발목과 종아리에 입을 맞췄다.

“귀여워라.”

“하지 말…!”

말릴 새도 없이 바지가 벗겨졌다. 브리프 위쪽을 매만지는 남자의 손길에 몸을 떨면서 고개를 젖혔다. 커다란 숨소리와 함께 뜨거운 공기가 표면 위에 그대로 닿았다. 얇은 속옷을 한 장 사이에 놓고, 남자가 바지를 완전히 벗겨냈다. 아아, 목구멍 안을 간질거리는 수치심에 고개를 꺾었다. 코너에 달린 CCTV가 보였다.

“저, 저기 카메라.”

본격적으로 브리프 위를 혀로 핥아대는 남자의 머리를 밀어내며 헐떡거렸다.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말했다.

“저거 꺼져있어.”

“거짓말하지 말고…!”

화를 내기도 전에 남자가 입술에 힘을 줘 사타구니를 빨았다. 눈앞이 시뻘겋게 변했다. 입고 있는 브리프가 축축하게 침으로 젖어갔다. 남자는 혀를 내밀어 속옷 안에 갇혀있는 성기의 모양을 더듬었다. 남자가 잡고 벌린 허벅지가 떨려왔다. 매끄러운 손가락이 허벅지와 사타구니 사이의 연약한 살점을 쓸었다.

“흐…아아!”

누군가의 입에 성기가 빨린 적은 처음이었다. 작은 천 조각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도 입안의 점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남자가 입술에 힘을 줄 때마다 허리가 떨렸다. 사정할 것 같다. 흥분으로 신경이 고조되자 몸이 뒤틀렸다.

“되게 좋은가 보네. 벌써 울고.”

고개를 든 남자가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분해서 욕을 하기도 전에 남자가 엉덩이를 세게 주무르며 허벅지 안쪽을 깨물었다. 단숨에 힘이 풀렸다. 손바닥으로 입을 막고 훌쩍거리는 나를 보며 남자가 작게 웃었다.

“울지마. 귀엽잖아.”

입맛을 다시던 남자가 치아를 드러냈다. 하얀 앞니가 브리프 밴드를 물었다. 선정적인 장면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눈을 감지도 않았는데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깨끗해진 시야에서 남자가 고개를 숙여 입으로 내 속옷을 벗겨내고 있었다.

완전히 흥분한 성기가 튕기듯 빠져나왔다. 남자는 끈적끈적해진 팬티를 다리에서 완전히 벗겨냈다. 남색이 조금 더 어둡게 변해있는 게 내 눈에도 보였다. 쿠퍼액이 잔뜩 새어 나온 속옷이 얼굴 바로 옆에 떨어졌다. 남자가 무릎을 탁자 위에 올리고 타고 올라왔다.

왼 다리를 남자의 어깨에 올리고 무릎 안쪽에 힘을 준다. 저절로 다리가 접혔다. 한쪽 다리만 벌려지자 사타구니가 훤하게 드러났다. 밝은 천장과 천장에서 우리를 보고 있을 CCTV와, 믿을 수 없을 만큼 뜨거운 남자의 입 안 열기가 나를 괴롭혔다.

“하, 으응! 하지…마!”

귀여워, 남자가 성기를 문 채 웅얼거렸다. 매끄러운 혀와 움푹 파인 입천장이 언어의 선을 따라 움직이는 게 전부 느껴졌다. 똑같은 성별을 가진 사람의 입으로 성기가 빨린 채 울고 있는 상황이 지옥인지 구별되지도 않았다. 내가 허리를 크게 움직일 때마다 남자는 같은 곳을 집중적으로 핥고 문질렀다. 혀끝이 귀두를 자극하고 성기 전체를 입안이 집어삼켜 크게 빨아댄다.

츱츱한 마음이었다. 축축한 습기였다. 남자는 차가운 손가락을 한 주제에 뜨거운 입안 체온으로 내 성기를 마음대로 빨았다. 내게 키스를 할 때처럼 정신없이 핥아오는 혓바닥은 곧 성기 밑부분을 세게 빨아올렸다. 입 안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런데도 허리가 휘면서 뒤틀렸다. 손가락을 치아가 강하게 누르면 누를수록 통증이 들어야 하는데, 쾌감이 전신과 이성을 갉아먹었다. 신경이 채찍으로 두들겨 맞는 기분이었다.

남자의 손가락이 엉덩이를 벌리고 골 안쪽을 향해 기어들어 왔다. 안 돼.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남자의 뺨을 내려쳤다. 내 성기를 입에 담고 있던 남자는 뺨을 얻어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눈을 휘며 웃었다. 호흡이 짧게 변하면서 성기가 또다시 쾌감을 호소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눈물이 끝없이 새어 나왔다.

귀두 끝을 쪼듯이 짧게 끊어 빨던 남자가 고개를 옆으로 꺾어 성기 기둥을 혀로 핥으며 문질렀다. 다른 손가락은 계속해서 엉덩이골 사이의 회음부를 문지르고 있었다. 강하게 비비고 마찰해온다. 다시 입 안에 넣고 세차게 빨아오는 입안 점막에 아랫배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남자의 어깨에 걸치고 있던 다리를 굽히고 남자의 등 위로 발뒤꿈치를 강하게 눌렀다.

점점 끝이 보인다. 끝이, 좀 더. 더. 안 돼. 온갖 생각과 희롱과 성적인 소리와 타액과 피부가 마찰하고 빨아대는 첩첩 거리는 소리가 방 안에서 분수처럼 솟아났다. 싫어, 하지 마. 거부감과 욕설보다 성욕은 더 빠르고 강력했다. 혓바닥의 우둘투둘한 혓바늘이. 입천장 앞부분에 있는 굴곡진 부분이, 움푹 파인 뒷부분과, 거기서 조금 더 빨려 들어가면 나오는 연약하고 여린 점막이 성기를 갉아먹을 것처럼 간지럽혔다.

남자가 목울대에 힘을 줬다. 바짝 조여든다. 볼이 움푹 파인다. 빨려 들어가는 감각에 상체를 반쯤 일으킨 채 남자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 아, 흐아아!”

전신이 경직되었다가 서서히 풀렸다. 끔찍한 쾌감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잔경련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허벅지를 잡고 남자가 부드럽게 성기를 몇 번 더 빨았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고 황홀한 후희에 고여있는 것 같았다.

벌린 입가를 스치고 내 손이 떨어졌다. 치아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통증이 없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는 눈을 접으며 활짝 웃더니 입을 크게 벌리고 내 성기를 뱉어냈다. 입 안에 정액이 고여있는 게 보였다. 남자는 입을 우물거리더니 자신의 손가락 위에 정액을 뱉어냈다.

“하아….”

자신의 브리프를 벗겨내고 남자가 완전히 흥분한 성기 위에 자신의 손가락을 갖다 댔다. 부드럽게 검지와 중지, 약지와 새끼가 차례대로 흐르듯 성기를 완전히 잡아챘다. 남자는 내 정액을 자신의 성기에 펴 발라 윤활유로 삼은 채 자위했다. 천천히 팔을 흔들며 허리를 숙여 내 가슴 위로 바짝 타고 올라왔다. 턱과 입술 근처에서 남자의 성기가 꿈틀거렸다.

“후. 으음.”

찌걱거리는 마찰음이 점점 빨라졌다. 한쪽 팔을 내밀어 얼굴 옆을 더듬던 남자가 천 조각을 집어 올렸다. 젖어있는 속옷을 보자마자 얼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남자는 내 속옷으로 자신의 성기를 감쌌다. 두 손이 성기를 감싸듯 붙들고 움직인다. 쿠퍼액이 흘러 그의 손가락을 적시고 있었다. 바짝 몸을 붙들고 움직일 때마다 남자의 가슴과 팔에 근육이 팽팽하게 올라왔다. 상체는 여전히 정장을 반듯하게 걸친 채로 단단하게 고정시킨 넥타이조차 움직이지 않는데, 하체는 팽팽하게 발기한 성기를 흔들며 사정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충격으로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고개를 흔들며 남자의 밑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남자가 잡고 있던 내 속옷을 집어 던지며 얼굴을 손바닥으로 꽉 눌렀다. 안쪽 뺨이 치아에 닿아 찢어질 것처럼 문질러졌다. 남자가 흘린 쿠퍼액과 내가 흘렸던 쿠퍼액이 뒤섞여 얼굴에 묻었다. 남자가 내 얼굴 구석구석 손바닥을 문질러오며 자신의 성기를 점점 세게 문질렀다.

“아, 후으. 하. 입, 입 벌려.”

미친놈.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미친 듯이 저었다. 남자가 눈썹을 찌푸린 채로 씨발, 하고 쌍욕을 내뱉었다. 바짝 허리를 세운 남자가 손을 뻗어 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아까 머리를 쥐어뜯은 복수라도 된다는 것처럼 머리채를 아래로 바짝 잡아당기는 바람에 저절로 턱이 꺾여 올라갔다. 고통으로 멈췄던 눈물이 다시 터졌다.

아, 통증으로 벌려진 입술을 놓치지 않고 남자가 성기 끝을 내 입술 안쪽에 밀어넣었다. 굵은 귀두 끝이 치아에 긁혔다. 남자가 손등에 핏줄을 세웠다. 쥐어짜듯 자신의 성기를 비틀더니 결국 남자의 성기에서 정액이 터졌다. 입안을 정액이 채운다. 비린 맛과 끈적거리는 정액의 질감이 구토를 불러왔다. 입술 위에 대고 성기를 비비던 남자가 머리카락을 풀어주며 만족스럽게 긴 숨을 뱉어냈다.

“후우… 짜릿했어.”

“……”

입안에 담긴 정액을 삼키지도 못하고 머금은 채 남자를 노려봤다.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더니 내 위에서 내려와 옷매무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브리프를 올리고 깔끔하게 셔츠를 집어넣고 바지를 입은 남자는 벨트까지 완벽하게 채우고 난 뒤에야 내 바지를 주웠다.

그때까지도 난 누운 채로 입 안에 있는 정액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패닉 상태였다. 더러워서 당장 뱉어내고 싶은데, 혀를 움직이면 맛이 느껴질 것 같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뻣뻣하게 굳어있는 나를 보던 남자가 바지를 먼저 꿰어 입혀줬다. 인형이 된 기분보다 다리가 움직이고 몸을 추켜 올릴 때마다 입 안에 있는 정액이 출렁거려 미칠 것 같았다.

“자, 뱉어.”

상체를 일으켜준 남자가 자신의 손바닥을 내밀었다. 입 안에 있는 걸 어떻게 뱉어야 할지 모르겠다. 뱉으라는 공간이 생겼는데, 타액과 정액이 가득 고인 입 안을 굳히고 떨고만 있자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정말 어리잖아.”

나 댁이랑 띠동갑 이상 차이 나거든. 개새끼. 나는 이십 대 초반 팔팔한 애란 말이야. 억울해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남자가 엄지손가락으로 눈물을 문질러 닦아주며 입술을 비틀어 열었다. 찝찝한 정액 맛이 나는 입 안에 짠맛이 더해졌다. 고개를 아래로 숙이자 남자가 검지를 넣어 혓바닥을 긁어냈다. 몽글몽글 고여있던 정액이 남자의 손바닥 안에 떨어졌다.

“흐. 우윽.”

입안에 있는 게 없어지자 눈물이 나왔다. 오늘 하루 종일, 남자에게 가졌던 감정은 최악에 최악을 갱신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키스하는 걸로도 모자라, 내, 내 입에 싸지르다니. 나쁜 새끼.

손바닥에 있는 걸 털어낸 남자가 울기 시작하는 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왜 울고 그래. 진짜 귀여워 미치겠네.”

“씨발놈. 나가 죽어. 자살해.”

엉엉 울면서 욕설을 쏟아냈다.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밀고 웃는 남자를 보니 화가 머리끝까지 나 손을 들어 남자 뺨을 내리쳤다. 남자는 두 번이나 나한테 얻어맞고도 전혀 상관이 없다는 얼굴로 계속해서 웃기만 했다. 보조개를 패어가며 활짝 웃는 남자를 보고 계속해서 울었다. 엉엉 통곡하는 나를 끌어안고 남자가 얼굴을 가득 묻었다.

“미안, 미안하다니까?”

미안하면 하지 마. 제발 나 좀 놔줘. 진력이 빠진 채로 빌었다. 남자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그것도 참 미안해.”

하여튼 천하의 개새끼였다. 앞으로 다닐 회사 생활에 눈앞이 캄캄했다.

정신을 차리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눈물을 겨우 그치고는 남자를 밀쳐냈다. 남자는 아쉽다는 얼굴로 떨어졌다. 세 발짝쯤 떨어져 나를 보는 남자의 시선을 피하며 구비된 티슈로 정액을 제대로 닦아내고 엉망이 된 브리프를 휴지에 싸서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치울 필요 없는데.”

“닥치세요.”

“너무하네. 못 믿어?”

“당신이 여기 주인이 아니라 신이라도 못 믿어요.”

“당신이라니, 아버지한테.”

뻔뻔한 소리를 지껄이는 남자를 노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정말이야. 카메라도 그렇고, 믿으라니까.”

“어떻게 믿어요.”

“저 CCTV 회로는 내가 관리하니까.”

“……”

“회의실을 모텔로 아는 사람이 종종 있거든.”

그건 당신이겠지. 안면을 때려버릴까 고민하다 정장 재킷의 단추를 풀고 회의실 바깥으로 나갔다. 비서는 바깥에 서 있었다. 소리를 들었을까. 우울한 생각이 다시 뇌를 침범했다. 두 손에 강아지를 들고 선 비서가 나를 봤다. 정확하게는 옷차림을 훑었다. 탱글탱글한 남자의 얼굴도 한번 봤다가, 나와 똑같이 조금 구겨진 남자의 상의도 보았다. 표정이 미묘하게 변한다. 말없이 눈을 피했다.

“…회사 안에서는 되도록 자제하세요.”

기함할만한 발언이었다. 앓는 소리를 내며 터지기 직전이 된 얼굴을 가려버렸다. 자는 사이에 남자의 멱을 따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수치심으로 떨리는 손을 꽉 잡았다. 남자가 비서에게서 비체를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볼게.”

생각을 왜 해. 분노에 찼지만 무슨 말을 더 할 수가 없었다. 지친다. 오늘 아침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례대로 생각해봤다. 출근하자마자 최 이사에게 욕을 들어먹고, 회의실에서 키스를 당하고, 성기가 빨리고 정액을 입으로…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죄다 하루 만에 일어났다. 비체가 내 품으로 넘어오려고 버둥거리는 게 보였지만 받아줄 힘이 없었다. 팔다리가 전부 부들거리는데 강아지라도 끌어 안으면 당장 같이 바닥에 엎어질 것 같았다.

내 체력이 이렇게 가난했다니. 의욕마저 상실 돼서 비틀거리자 남자가 혀를 차며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기분 전환이나 하러 가자.”

기분 전환 혼자서 실컷 한 것 같더니 왜 다시 기분 전환을 해야 하는 걸까. 나부터 집에 보내주면 좋겠다. 졸음이 쏟아져 반항도 못 하고 그대로 끌려갔다.

비서는 나와 남자를 차에 태우고는 조수석에 앉아 어제부터 오늘까지 있었던 일에 대해 자세하게 보고 했다.

“처음에는 그 직원이 최 이사 쪽에 바로 말을 흘린 것 같더군요.”

“흐음. 하필 최 이사에게 할 게 뭐야.”

“저도 이사님이 그렇게 빨리 움직일 거라곤 생각 못 했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척을 크게 지신 모양이군요.”

“걔는 내가 처음 입사할 때부터 싫어했잖아.”

최 이사가 왜 그렇게 남자의 약점에 기세등등해서 설쳤는지 알 것 같았다. 얼마나 성격이 안 좋으면, 아직도 인간관리를 그렇게 못하는 걸까. 남자의 옆얼굴을 흘낏 쳐다보았다. 남자는 휴대폰을 꺼내 빠르게 메시지를 치면서 비서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건 그렇지만… 새벽에 사진을 전송받았는데 사장님께서 연락도 안 되시고, 저도 고생했습니다.”

“사람이 가끔은 위기감도 느껴봐야 인생에 탄력이 생기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쟤도 봐봐, 위기를 좀 느껴야 는다니까.”

“사실 어떻게 상황을 타파하실까 기대를 했는데 말입니다.”

“어린데 뭘 하겠어.”

“사장님은 도련님과 같은 나이이실 때도 잘하셨는데요.”

“나는 나니까.”

두 놈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사람을 옆에 두고 태연히 농담 따먹기를 하며 하하 웃기까지 한다. 비서는 남자와 일말의 혈연관계도 아니던데 어쩜 저렇게 성격이 똑같지. 부들부들 떨다가 손에 힘을 너무 많이 줬는지, 비체가 찢어져라 큰 목청으로 짖어댔다. 너까지 왜 이래. 골 아픈 머리를 감싸 쥐며 한숨을 크게 쉬었다.

하얀색과 갈색으로 된 공간에는 적당히 어두운 불빛이 켜져 있었다. 종아리 중간까지 차오른 따뜻한 물을 바라보다 다리를 움직였다. 물이 찰랑거리며 향기가 났다. 물 안에서 공기 방울이 보글보글 올라와 피부를 간지럽혔다.

스피커에서는 잔잔한 클래식이 나온다. 느린 바이올린과 피아노 소리. 팔락, 남자가 잡지 넘기는 소리.

가운을 꼼꼼하게 닫아 허벅지를 숨기며 남자를 불렀다.

“아버지.”

옆에 서 있는 직원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남자가 이것 보라는 얼굴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왜, 아들.”

“이게 기분전환이에요?”

“아니라고 생각할 건 뭔데?”

남자가 나와 똑같이 생긴 족욕 기계에 발을 담근 채로 잡지를 한 장 더 넘겼다. 피로를 풀어준다는 차를 얄밉게 호로록 마시며 잡지에 시선을 박은 채로 남자가 기계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보글거리는 소리가 좀 더 강해졌다.

“기분전환, 피로회복. 아로마, 족욕, 마사지. 뭐가 더 필요해?”

니가 없는 세상이요. 바른대로 말은 못하고 내 몫의 차를 벌컥 들이켜다 생각보다 뜨거운 온도에 차를 그대로 뱉어내며 쿨럭거렸다. 남자가 혀를 찼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어설프게 웃으며 찬 물을 가져다주었다.

“마사지는 건식으로.”

“아로마는 빼 드릴까요?”

“음, 쟤는 해.”

나를 턱짓으로 가리키는 남자의 말에 직원이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로마? 건식? 악몽 같은 사우나의 기억에 괜히 불안감이 샘솟았다.

“가자.”

“…꼭 나도 해야 해요?”

남자가 내 어깨를 꽉 눌렀다. 아귀힘이 어찌나 좋은지 멍이 들 것 같았다. 비명도 못 지르고 몸을 물고기처럼 파닥파닥 떨었더니 웃으면서 풀어줬다.

“이쪽에 누우시면 됩니다.”

나이 지긋한 남자 마사지사가 침대를 가리켰다. 쭈뼛거리다 남자처럼 엎드려 누웠다. 마사지사가 편하게 자세를 교정해주고는 발바닥을 만졌다. 꾹꾹 지압을 해오며 뭉친 근육이 있는 곳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해주기 시작한다. 남자 쪽 마사지사는 아무 말 없이 마사지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자주 와서 그런가. 허리와 날개뼈가 있는 곳을 누르며 장기가 어떻고, 어디가 안 좋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인 쿠폰을 받아 가봤던 마사지 가게는 아프기만 했는데, 이곳은 아픈가 싶다가도 시원한 느낌이 먼저 들었다. 용케 가장 뭉친 곳만 골라서 꾹꾹 눌러주니 사람을 부려먹는 것 같다는 죄책감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좀 더 오래 계속 눌러주면 좋겠다, 하는 생각만 들었다.

한참 마사지를 받으니 몸이 노곤노곤하게 풀려왔다. 가습기가 한 번씩 물소리를 낼 때마다 뭉쳤던 근육이 느슨해진다. 요즘 너무 힘들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살 충동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남자에게 해야 할 이야기도 잔뜩 있었다. 피로로 엉망이 된 머리에서 말을 하나하나 잡아다 정리했다.

편안하게 엎드려 눈을 감고 있던 남자가 작게 콧노래를 불렀다. 하얗고 맑은 얼굴을 보며 입에 담았던 정액의 맛을 기억했다.

역겹고, 원초적인 맛에는 숨길 수 없는 의문점이 들어있었다. 눈을 천천히 깜박거렸다. 어깨와 등 위로 미끈한 액체가 흘렀다. 미지근한 온도 위에 뜨거운 마사지사의 손바닥이 닿았다. 서서히 마찰이 되자 미끈거리는 감각과 함께 진한 허브 향이 풍겼다.

“심신안정에 좋은 캐모마일 오일입니다.”

아, 이게 캐모마일이구나. 익숙한 라벤더나 로즈마리와 다른 독특한 향에 코를 킁킁거렸다. 남자인 데다 엄마도 차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캐모마일은 이름만 들었다. 문구점에 있던 싸구려 향수는 캐모마일이라는 이름을 달고 이상한 방향제 향이 났는데.

눈이 계속 감겼다. 턱을 괸 채 하품을 했다. 부드럽게 내 등을 밀어오는 손길이 기분 좋았다. 끈적거리고 변태적인 남자의 손길과는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이번 만큼은 피로회복과 기분전환이라는 남자의 유흥을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꾸벅꾸벅 졸다 억지로 정신을 잡길 반복했다.

“주무셔도 됩니다.”

마사지사가 손의 힘을 빼며 이야기했다. 앞으로 한 시간쯤 더 해야 합니다. 생각보다 오래 남은 시간에 망설이지 않고 눈을 감았다.

음악 소리는 간지러운 솜털 같았다. 물이 보글거리고 가습기의 증기가 올라오는 소리도, 몸을 문지르는 손길도, 따뜻하게 데워진 아로마 오일의 향기와 적당히 데워진 공기. 오래된 잠을 몰아 자는 기분이었다.

“내가 하지.”

“그래도…”

멀리서 말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깨를 움츠렸다. 괜찮아. 속삭이는 목소리도 들린다. 따뜻한 손가락이 눈과 뺨을 쓸고 귓가를 간지럽혔다. 귓불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기분이 좋아졌다. 숨을 가느다랗게 내쉬자 코앞에서 웃음소리가 떨렸다.

일어나야 하는데, 상황을 확인해야 하는데 그것보다 수면욕이 먼저였다. 졸리다. 비체를 끌어안고 자고 싶었다. 부드러운 털에 입술을 비비고 몸을 따뜻하게 데우고 싶었다. 온기를 찾기 위해 눈꺼풀을 떠는데 따뜻한 체온이 닿았다. 부드러운 천이 몸 위를 덮었다. 꽉 끌어안긴 품 안에서 평온함이 채워졌다.

나는 다섯 살쯤 된 어린아이였다. 남자는 내 아버지였다. 친부였는데 여자가 생겨 나를 버리게 되었다. 길거리를 방황하다 새로운 아버지를 찾았다. 꿈에서는 친부가 양아버지로 나왔다. 양아버지는 어김없이 나를 학대했다. 개새끼라 나를 욕하며 덜떨어진 인간 취급을 했다. 남자보다 좀 더 잔혹했고 망설임 없는 폭력이었다.

외롭고 괴로워 무릎을 말고 얌전히 밤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으면 남자가 몰래 찾아와 내 방 창문을 두들겼다. 집은 반지하라 남자가 나를 손쉽게 만날 수 있었다. 작은 의자를 밟고 올라가 창문을 열면 남자가 큰 손을 불쑥 내밀었다. 겨울 공기에 얼어 있는 손가락이 펴지며 내 손 가득 사탕과 초콜릿을 쏟아주었다.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달콤한 것들에 어린 나는 그를 산타 할아버지라 불렀다. 아마 어린 나는 남자가 내 친부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시간이 빠르게 지났다. 나는 좀 더 자랐고 양부에게 두들겨 맞은 몸을 녹이고 쉬다 어김없이 남자를 맞이했다. 남자는 몸소 창문을 열고 의자를 밟고 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남자의 옆으로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엄마였다. 거기서 엄마는 남자의 공식적인 연인이었고 아내였다.

남자는 초콜릿과 사탕을 잔뜩 주었다. 버려두곤 왜 찾아와 희망을 줄까. 몇 명 나오지도 않는 작은 꿈에서 왜 나만 불행할까. 깨어나기도 전에 그런 생각을 했다. 남자가 종종 챙겨주던 사탕과 초콜릿이 결코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건 그냥, 순간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도피에 불과했다. 남자가 주던 도피. 달콤한 다정함. 아들을 버린 아버지인 주제에.

눈을 비비면서 일어났다. 남자의 방이었다. 이불을 걷어냈더니 남자의 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말려 올라간 바지자락을 내리고 침대 바깥을 빠져나갔다. 창문 너머를 내다보았다. 깜깜한 밤이었고 꽤 추운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남자는 방에 없었다. 더듬더듬 방 스위치를 켜고 복도로 나갔다.

서재에 켜진 불빛이 새어 나와 복도 바닥에 길게 선을 만들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자 작은 소음이 들렸다. 타닥거리는 소리. 어떤 목소리.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남자가 노트북을 보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영어가 쏟아진다. 유창한 영어로 대화하던 남자는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던 담배를 입에 물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동그란 안경을 끼고 있었다.

문을 조용히 닫고 들어왔다. 고요한 적막을 꿀꺽 삼켰다. 남자는 수화기 너머로 뭐라고 몇 마디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잘 잤어?”

평범한 인사였지만 불쾌했다. 가만히 인상을 쓰고 있자 남자가 안경을 벗으면서 의자에 등을 기댔다. 깍지 낀 채 팔걸이에 걸쳐진 손이 단단했다.

“뭐가 문제라서 그래?”

“이상하니까요.”

“뭐가?”

“우리가요.”

내 대답에 남자가 즐거운 기색을 띠었다.

“잘 자고 일어나서는 꿈같은 소리를 하네.”

“…그냥요. 오늘 아니면 못 할 거 같아서요.”

정신이 맑지는 않았다. 몸도 아직은 피곤했다. 하지만 평소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오히려 맑은 편이었다. 결벽하지 않기 때문에 흐려진 이야기도 할 만큼의 여유가 있었다.

“나를 왜 아들로 삼았어요?”

꾸준히 남자에게 제기해왔던 문제가 던져졌다. 남자가 깍지 낀 손을 풀었다.

“정말로 당신의 유흥을 위해서예요?”

“물론, 너네는 내 인생을 재밌게 만들기 위한 장치는 맞지.”

순진해 보이는 눈망울이 깜박거린다. 저걸 볼 때마다 나는 무엇이든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예상외로 네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고. 예쁜 것도 좋았어. 이 이야기는 수도 없이 했잖아?”

피곤한 듯 어깨를 주무르며 남자가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대화를 거부하는 친절하고 단호한 얼굴에 입술을 깨물었다. 적막을 깨고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액정을 흘끗 들여다보더니 진동을 끄고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해주길 바라는 거니, 아들.”

이소야. 남자가 이름을 불렀다. 손을 등 뒤로 숨겨 허리 부근을 긁었다. 등줄기가 간지러웠다.

“간단히 사람의 인권을 죽인다느니, 당신 없이 살지 못하게 하겠다느니. 그런 말로 납득할 수 없어요.”

키보드에 손을 가져다 대던 남자가 안경 너머로 나를 보다 담배를 비벼 껐다. 짧은 꽁초는 금방 불씨가 꺼졌다.

“계속 이야기해봐.”

“처음에는 미친 놈이라 그렇겠지, 이해해버리려고 했어요.”

남자는 말없이 묵묵히 담배를 피웠다. 다가가 남자의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한 개비를 뽑아 들자 남자가 흘끗 나를 올려다본다. 저지하지는 않았다. 묵인된 허락을 읽고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릴 때 이후로는 군대에서도 피우지 않았던 담배였다.

다시 피우고 싶다고 언제부터 생각하게 된 걸까. 매일 악몽을 꾸던 나를 자각도 못 하고 있었다. 체력과 정신을 갉아먹는 지나치게 긴 하루가 끝나기 전에서야 나는 미뤄두던 문제에 다시 직면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내가 정신이 무너지고, 한계까지 몰려가 이성을 잃었을 때 한 모든 행동은 형체 없는 벽에 질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퇴로와 이성을 확보하고 남자와 싸워야 했었다.

익숙하기 때문에 남자는 잘 알고 있는 사실을 나 홀로 놓쳤다. 나 홀로 고통받았다. 남자에게는 이미 확실한 답이 있을 것이다.

“그런 단순한 부분 때문은 아니라는 것도 알겠어요. 나랑 섹스를 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다리를 벌리고 안기면 그걸로 끝나요?”

“아니.”

그런 원초적인 문제는 아니지. 남자가 부드럽게 말한다.

“섹스 상대가 궁한 거라면 네가 아니라 사람을 샀을 걸.”

“그러면 왜 나를 자위 기구처럼 대하는 건데요?”

담배는 매캐하고 오입질 같은 맛이 났다. 혀뿌리를 쓰다듬는 연기를 내뿜어냈다. 내가 쥔 담배와, 내가 뱉어낸 담배 연기를 차례대로 훑어보며 남자는 입술에 미미한 호선을 그렸다.

“섹스와 다름 없는 행동을 하잖아요.”

“네가 예쁘니까.”

“잘해주는 척, 괴롭히고. 엄마를 쥐고 나를 휘두르고, 사회적으로 억누르고 폭력을 행사하고.”

“……”

아들로서 의사도 주권도 챙겨줄 것처럼 굴다가 손바닥 뒤집듯 가볍게 구겨버리고.

“…듣고 싶어?”

다시 남자의 휴대폰이 울렸다. 남자는 이번에는 전원을 꺼버렸다. 죽어버린 휴대폰을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남자는 보고 있던 노트북마저 덮어버렸다. 윙윙 거리던 기계 모터 소리가 죽었다. 키보드를 오래 쳐 후끈거리는지 손가락 끝을 핥듯이 숨을 불어넣은 남자가 나를 보았다.

남자의 눈동자는 연한 갈색이라, 서재의 뭉근한 조명 아래에서는 호박색을 띠었다.

“듣고 싶어요.”

긍정했다. 남자는 뒤를 돌려 잠깐 서재를 장식한 수많은 함선과 비행기를 구경했다. 서늘한 옷자락이 얇게 열린 문틈 사이로 들어온 바람에 펄럭거렸다.

“내게 무슨 말을 들어도 네 입장도, 내 태도도 같아.”

“알아요.”

“그런데도 듣겠다고? 기어코?”

“그래요.”

남자는 이번에도 난처한 얼굴을 했다. 나를 고립시키고 싶다고 말했을 때와 똑같은 얼굴과 표정으로.

머뭇거리던 남자가, 엄지와 검지 마디로 자신의 중지 손가락을 꾹 눌렀다. 타자를 오래 치면 따가운 부위였다. 오랫동안 자신의 손톱을 감싸고 있던 남자가 고저 없는 어조로 말했다.

“나도 추측이지만…”

“……”

“아마도, 내가 널 좋아하니까.”

눈물이 핑그르르 고이다 메말랐다. 바닥에 담배가 떨어졌다. 힘없이 타들어 갔다. 고인 눈물을 힘껏 쥐어 짜내며 남자를 불렀다.

“…뭐라고요?”

남자는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과, 애정을 속삭이기 보단 끔찍한 살인 충동을 담은 얼굴로 남자가 재차 말했다.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말도…안 돼.”

고개를 저었다. 나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와 아들로 우리를 정의하고 있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성립될 수 없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자신의 흥미와 이익을 위해 만든 관계에 불과해도, 남자는 나를 끝없이 아들이라고 불렀으니까.

“어째서?”

모멸감이 가장 먼저 들었다. 남자의 그 고백에 어째서, 왜. 승리감보다는 절망과 비참함이 먼저 찾아왔다. 서늘하게 충동이 견갑골을 내리눌렀다.

“이건 말도…안 되는 일이야.”

뇌와 혈관과. 안구의 압력이 움직인다.

우리는,

“우리는… 가족이잖아요.”

우리는…가족인데.

“그게 중요해?”

아버지와 아들인데.

허탈한 표정으로 웃던 남자가 가지런한 자세로 일어났다. 꼿꼿하게 핀 허리와 자연스럽게 늘어트린 시선이 잠깐 나를 보다 창문으로 향했다. 남자는 창가로 다가가 문을 닫았다. 불어온 겨울바람이 멈췄는데도 돌풍이 거셌다. 세찼다. 남자가 바람이 헝클고 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내게로 다가왔다. 비틀린 벽 사이를 헤집고 물이 스며들어 가득 고인다. 누수된 감정이 나를 서서히 빠트리고 있었다.

“…중요, 해요.”

남자가 내 손을 들어 올려 입을 맞췄다. 이전 남자의 프라모델 파편이 박혔던 자리였다. 피가 나오던 자리를 핀셋으로 빼고, 치료해주며, 남자는 나 말고 다른 아들은 필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아들이라 좋은 거라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자신의 소박한 꿈을 말하며.

그때부터? 아니면 훨씬 이전? 아니면 그 후? 하지만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현재는 과거를 바꿀 수 없었다. 이제는 흉도 남지 않은 자리에 남자는 한참 입술을 묻고 서 있었다. 내리깔린 속눈썹과 따뜻한 온기가 손 마디마디를 자극했다. 나를 쥔 남자의 손은 따뜻했다. 여느 때와 같이 차가워야 하는데, 인간적인 것처럼 뜨거운 열기를 불어 넣으며 식은 내 몸을 부드럽게 만졌다.

“나는 중요하지 않은데, 아들.”

절망이 승점을 앞에 두고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남자가 말하는 어설프고 덜 씹은 사랑이라는 언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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