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동 -->
맛도 없는 흰 죽을 퍼먹고 소파에 드러누워 책을 펼쳤다. 며칠 쉬었다고 또 외웠던 내용을 다 잊어버렸다. 빌어먹을 영어단어. 짜증을 내면서 종이에 성의 없이 스펠링을 갈기고 있는데 비서가 들어왔다. 뻔뻔한 얼굴이 식사를 시작한 건 잘한 선택이라며 시끄럽게 떠들었다. 어젯밤 내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 알긴 하는 건가. 기가 막혀서 말도 못 하고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더니 선물이라며 갑자기 병원으로 데려갔다. 5일씩이나 굶었으니 건강에 문제가 생길까 봐 누구누구가 염려하셨단다. 누가 들으면 내가 자진해서 5일이나 굶은 줄 알겠네. 코웃음을 쳤다. 누굴 닮았는지 비서는 낯짝이 두꺼워서 내 코웃음을 듣고도 벙글벙글 웃었다.
단식이 링거나 한 대 맞으면 되지 CT 사진을 찍어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있는 사람들의 돈 지랄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자. 아무 말 없이 검진 결과를 기다리며 비서가 깎아준 사과를 씹었다. 한쪽 팔에는 영양제도 맞고, 잘나신 분이 손수 껍질 깎아 바치는 과일을 먹고. 아주 팔자 좋네.
입술을 닷 말로 내민 채로 있으려니 의사 선생님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인자해 보이는 사람이 변죽도 좋고 웃으면서 내 앞에 섰다. 비서가 일어나 눈인사를 하며 물었다.
“검진 결과는 어떤가요?”
“기력이 조금 떨어진 것 말고는 건강합니다. 혈압이 조금 낮군요.”
“원래 저혈압 있어요.”
사과를 씹으며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대꾸했다. 의사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내 얼굴을 훑었다. 얼굴에 뭐 묻었나. 의식적으로 입가를 닦았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많이 힘든가요?”
“아뇨, 그냥 패면 일어납니다.”
“…패요?”
의사 선생님이 못 들을 걸 들었다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남은 사과 조각을 씹어 삼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 방에 감금당한 뒤로 남자는 자기가 씻고 나올 때까지 내가 일어나지 않으면 사정없이 때렸다. 아침에 저혈압이 얼마나 위험한데. 자기 기분 나쁘다고 사정없이 사람을 괴롭히다니. 시정잡배도 그러진 않는다.
“개새끼도 주인 출근하면 나와 꼬리를 흔드는 거라고 누가 하도 그러셔서.”
빈정거렸는데 옆에서 비서 새끼가 눈물을 닦았다.
“명언이시군요.”
이런 씨발… 사과 맛이 뚝 떨어져 포크를 내려놓았다. 비서가 개소리하든, 내가 짜증을 내든 상관하지 않고 의사 선생님은 혼자 차트를 휙휙 넘기고 몇 가지를 비서에게 전달했다. 나와는 관련 없는 이야기라 하품이나 하면서 기다렸더니 의사 선생님이 인사를 건넸다.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 앞으로 꾸준히 운동도 하고, 몸 관리만 잘하면 될 거 같군요.”
“예에.”
“다음부터는 억지로 굶고 그러면 안 됩니다.”
의사 선생님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병실을 나섰다. 이상하게 정말 철없는 짓을 저지른 애가 된 기분이라 입이 썼다. 혼자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비서가 기다렸다는 듯 옆에 놓여 있던 큼직한 종이가방을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기대도 안 하고 건방지게 반쯤 누워서 종이가방을 쳐다봤다. 비서가 자연스럽게 책을 하나 꺼내 내 품에 안겨줬다. 그럼 그렇지. 얼굴을 구기고 책을 받아들었다.
기업 경영학.
소름 끼치는 제목에 표지라도 찢어버릴까, 고민하는데 두 번째 책이 넘어왔다.
우주에서 제일 쉬운 영어 회화.
이건 메모까지 붙어져 있었다.
[우주에서 제일 멍청한 인간이 내 아들이 아니었으면 좋겠구나.]
종이를 박박 찢었다. 부들부들 떨면서 종이를 탁탁 털어 버렸더니 앞에 있던 비서가 혀를 찼다.
“그만 사장님이랑 친하게 지내세요. 이만큼 누구 챙기신 적도 없는 분입니다.”
“아주, 친하거든요.”
입술을 비틀면서 말대답을 했다. 나를 가만히 보던 비서가 종이봉투에서 뭔가 하나를 더 꺼냈다. 악몽으로도 꿀까 봐 몸서리쳤던 보온도시락통이었다.
“…사장님이 이것도 챙겨주셨는데요.”
“……”
“예비 사모님께 제가 직접 가서 받아온 겁니다.”
엄마 밥이다. 엄마 밥. 22년에서 20년은 먹고 살아온 엄마 밥. 나는 맛은 있었지만, 이상하게 느끼하고 물리던 호텔 요리와 오늘 아침 먹은 밍밍한 쌀죽의 맛을 생각했다. 자존심과 식욕이 갈등하기 시작했다. 지난 5일 신나게 굶었던 기억도 생각났다. 다 저 도시락이 원흉이었다. 곱게 밥을 주면 되지, 사람 눈앞에서 저걸 엎으니까 그 사달이 난 거 아니야. 매정한 새끼. 입술을 꾹꾹 깨물면서 고개를 돌리고 있자 비서가 달래듯 말을 걸었다.
“사장님이 이소 군을 정말 많이 아끼세요. 제가 놀랄 정도로요.”
아끼다가 사람 한 명 시체로 만들 계획이었나 보다. 나는 내 아사에 동참한 범죄자를 보고 억지로 웃었다.
”하하.”
로봇 같은 웃음에도 비서는 대쪽처럼 굴었다.
“이소 군도 느끼시죠? 사장님의 따뜻한 마음이요.”
따뜻한 폭력이겠지.
“…그…럼요.”
“이 도시락도 혹시 마음이 상했을까 봐 사장님께서 직접 제게…”
남자에게 반쯤 미친 광신도가 분명한 비서는 내가 받기 전까지 도시락의 유구한 역사라도 떠들 기세였다. 다른 건 다 참아도 남자 칭찬은 참을 수가 없었다.
“알겠어요, 알겠다고!”
비서의 손에서 도시락을 뺏어 들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사장님이랑.”
“잘 지낼게요.”
말을 뚝 끊고 대답하며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점심을 거르고 검진을 받았더니 배가 등가죽에 들러붙은 것 같았다. 익숙한 엄마의 김치 볶음과 계란말이를 한 번에 입에 밀어 넣고 씹었다.
“제발 그 성격도 좀 죽이시고…”
왜 내가 잘못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 잡곡밥을 푹푹 떠서 입안에 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에, 네.”
성의 없는 대답을 듣던 비서가 네 맘대로 해라, 라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병원에서 하루 쉬십시오. 내일 모시러 오겠습니다.”
“살펴가세요.”
도시락에 고개를 박고 인사했다. 비서가 내 병실 앞을 지키고 있는 사람한테 뭐라고 말을 하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나는 조용히 숨을 쉬었다. 아까운 계란말이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겨우 보름을 못 본 엄마의 얼굴에 애가 탔다.
자신이 내 앞에서 밟아버린 도시락의 내용물과 똑같은 음식을 가져다준 정성도 짜증이 났다. 남자는 완급조절에 능했다. 숙련된 재능과 경험으로 나를 바닥에 패대기치고는 위치를 상기시킨다. 그러는 주제에 언젠가 비슷하게 올라와도 좋다는 여지를 주고, 또 두들겨 패고.
내가 기업 경영이나 영어를 잘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 건 타고난 사람들, 선택받은 자들이나 할 수 있는 일들이다. 남자는 그냥 아주 쉽고 험악한 방법으로 나를 교육해 자신이 탈피할 방법만 찾고 있었다.
젓가락을 쥔 채 도시락을 뒤적거리며 책을 펼쳤다. 별로 즐겁지도 않은 내용을 아기자기하게 꾸며둔 책을 보며 우울한 표정을 했다.
영어는 왜 하는 걸까. 한국어로 된 책도 못 외울 판국에. 그러면서도 정해준 페이지를 다 읽으려고 연필을 들고 공책을 펼쳤다. 남자는 매일 책을 읽고 요약문을 작성하도록 만들었다. 그것도 자필로. 언제 다 읽나. 영혼 없는 표정으로 종이를 긁었다. 반쯤 먹다 남긴 도시락에서 풋풋한 김치 냄새가 났다.
세 끼가 해결되는 일상이 되돌아왔더니 어쩐지 병실에서도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졸음에 못 이겨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도 아직 오후 4시였다. 길게 하품을 하면서 남은 숙제를 마저 해치웠다. 이제는 눈치라도 보면서 좀 기어야겠다. 물론 열심히 숙제를 해도 남자는 비웃으면서 분쇄를 할 위인이었지만.
대충 휘갈긴 요약집을 투명한 파일 안에 넣어놓고 영어책을 끼고 앉았다. 프라하로 여행을 가요. 따위의 영작문을 읽고 있으니 병실 안에 느릿느릿 석양이 지기 시작했다. 저녁밥 생각이 없는데. 위장이 작아졌는지 아직 불쾌한 위장의 잔해가 느껴져 눈을 찌푸렸다.
일어나 블라인드라도 칠까. 눈꺼풀을 찌르는 넘어가는 햇살을 보고 망설이는데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짙은 남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보였다. 좀 호텔이나 자기 집에 기어가서 자지, 왜 자꾸 내가 있는 곳으로 오는지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무서워서가 아니고, 비서가 오후에 한 말도 있었기 때문에 착한 척 먼저 인사했다. 남자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눈 한쪽을 찌푸리면서 웃었다.
“안녕, 예쁜 아들.”
천천히 문을 닫고 들어온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와 블라인드를 내렸다. 줄을 잡아당겨 햇빛을 차단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미남이 커다란 창문 앞에 햇빛을 받으며 서 있으니 상당히 봐줄 만했다. 껍데기도 저렇고, 돈도 많은데 왜 성격은 유치찬란하고 괴팍한 걸까. 신은 공평하다 못해 냉정하다. 성격이 나쁘면 돈도 주지 말아야 저렇게 기세등등하게 살진 못할 텐데.
속으로 남자가 누리는 재력을 아쉬워하는 동안 남자는 당당하게 담배를 꺼내 물고 내 앞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신성한 병원에서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난다. 화재경보기도 없나. 불만스러운 얼굴로 앉아있는데 남자가 나를 보면서 갑자기 뭐가 웃긴지 입을 가리고 킥킥 웃는다.
뚱한 표정으로 보는 척 들고 있던 영어 회화책을 집어 던지고 물었다.
“왜 웃어요.”
“어, 돌머리가 공부하다가 과부하 와서 실려 온 그림이라.”
“……”
이 씨발 새끼. 살짝 열이 받았다.
“입.”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입술이 튀어나와 있었나 보다. 남자는 손가락을 튕겨 내 입술을 때렸다. 아파, 따끔함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손바닥으로 입술을 가리고 갖은 욕을 최대한 온전한 마음으로만 하기 위해 애썼다. 사람이 노력을 하는지 인내를 하는지 관심도 없는 남자가 정장 상의를 벗으며 말했다.
“조만간 혼인 신고를 넣을 거야.”
뜻밖의 소식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남자가 기분이 안 좋은지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링거 바늘을 꽂아 넣은 내 팔뚝을 위협적으로 더듬었다. 기분 틀어지면 사람 팔로 고문을 할 기세라 슬쩍 몸을 빼내며 물었다.
“벌써요?”
“음, 너도 아직 머저리고 좀 더 천천히 하려고 했는데… 노인네가 하도 난리를 쳐서 좀 앞당겨졌단다.”
“노인?”
“우리 엄마.”
나이가 70이 되었다는, 남자 집의 최고령자를 기억했다. 심미안이 뛰어나 예술적인 교류를 하며 지낸다는 내용이 대충 쓰여 있었던 것 같다.
“결혼을 하면 하는 거지, 여기까지 와서 할 이야기예요?”
남자의 성격을 생각하면 오늘 야밤에 혼인신고를 마쳤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남자가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면서 웃었다.
“너한테 준 자료 중에 빠진 게 있어서 직접 얘기도 해줄 겸 온 거지.”
남자가 다리를 외로 꼬며 몸을 쭉 피고 비스듬하게 앉았다. 권태로운 표정에 나도 자세를 느긋하게 풀고 남자의 말을 기다렸다. 남자가 하는 이야기라고 해봐야 쓸데없고 유익하지도 않은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남자는 새로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들며 말했다.
“우리 집안이 예쁜 걸 좋아해.”
대충 그런 말을 성희롱당하면서 들었던 것 같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군. 손톱 주변의 거스러미를 정리하며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유서 깊은 이유가 있거든.”
성격만 보면 백정이 땅 팔아 족보라도 샀을 인간이 유서 운운하니 은근히 웃겼다. 네에 네에. 대답만 해주며 베개 하나를 끌어다 옆구리에 끼웠다. 남자가 쓰레기 같은 인성을 보여주듯 담배꽁초를 병원 이불 위에 비벼 껐다. 이 이불은 누가 책임지라는거지. 흘러내린 이불을 휙 끌어당겨 옆으로 치우자 남자가 소리내서 웃었다.
“귀엽긴.”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하세요.”
“…흠, 그래. 여튼 노인네가 젊었을 적 예쁜 얼굴이 아니라 그 양반, 아, 양반은 내 아버지야. 하여튼 아버지가 바람을 신혼 시절부터 폈다 이거지.”
남자가 픽 웃었다. 어쩐지 남의 가정사를 캐묻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미묘한 표정을 짓자 남자가 웃으면서 내 뺨을 꼬집었다. 덕분에 다시 기분이 더러워졌다.
“덕분에 노인네가… 그 양반 닮은꼴은 더럽고 못생겨서 못 끼고 살겠다고 뒷공작을 좀 심하게 했거든. 실제로 아버지도 못생긴 편이었고. 그래서 아버지가 낳은 자식 중 제일 예쁜 애만 골라 데려오셨지.”
“……혼외자식이란 말이에요?”
내 질문에 남자가 픽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웃기지? 혼외자식을 데려다 자식이라고 키우고, 경영권도 물려주고. 참고로 내 누나랑 나도 피가 반만 섞였어. 참고로 알려주자면 둘 다 친모가 유명한 배우란다. 아직도 활동 중이지.”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집안의 더러운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네 어머니와 네 대우도 차이가 생길 테니 미리 상처받지 말라고 조언해주는 거란다. …믿기 힘들겠지만 난 널 정말 조금은 좋아하거든.”
“그것참, 감사하네요.”
“우리가 어제 꽤 진한 관계를 가졌다 보니 정이 가서 그래.”
저 입은 언제쯤 조신하게 다물릴 수 있는 걸까. 이성을 이기지 못하고 짐승처럼 남자의 손가락을 핥고 빨았던 밤이 생각나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게 무슨 음란 코미디도 아니고.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남자가 먼저 선수를 쳤다.
“조만간 집에 들어가게 될 거야. 서류 준비도 거의 끝났고.”
바늘을 찔러넣은 부위를 위험하게 훑으며, 남자가 속삭인다. 희열에 달뜬 목소리가 날카로운 바늘을 당장에라도 뽑아낼 것처럼 약한 피부 주변을 건드렸다.
“정말로 내 아들이 되겠네.”
“그것참….”
새삼스럽지 않은 투로, 최대한 멀쩡한 목소리로 말하기 위해 한참 목 안에서 숨을 골랐다. 남자가 내 대답을 기다리며 눈을 반짝거렸다. 얼굴에 달아오른 홍조에서 남자의 흥분이 느껴진다. 변태. 나는 눈을 위로 치뜨며 가느다랗게 목소리를 내밀었다.
“참, 기대되네요.”
내 대답에 남자가 보조개를 패며 활짝 웃었다. 외관만 보면 꽃이라도 당장 피어날 것처럼 화려했다.
“응. 나도, 너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