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직 -->
엄마는 매달리듯 내 결심을 바꾸기 위해 애를 썼다. 엄마가 숨기면 숨길수록 내 의심과 불안은 점점 더 커져갔다. 결국 소리를 지르며 싸웠고, 결국 전화번호를 받은 것 까지는 좋았다. 고달픈 인생, 인생은 실전. 헛소리 같은 생각으로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전화를 걸었다.
[네, 서주영입니다.]
나는 엄마가 적어준 메모를 다시 펼쳤다. 전화번호 옆에는 양이태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적어도 서주영은 아니다.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그, 거기…”
[말씀하세요.]
“양, 양이태 씨 전화번호…”
[음, 죄송하지만 저는 비서 되는 사람입니다. 혹시 전화를 잘못 거셨습니까?]
엄마가 알고 있는 연락처의 주인은 비서라는 사람이었다. 결혼할 남자가 아니라, 그의 비서. 도대체 이게 뭐야? 눈앞이 어지러웠다. 식은땀이 축축하게 베인 손바닥을 엉덩이에 문질러 닦았다.
“비서요?”
[네, 그렇습니다. 누구시죠?]?
단정한 목소리가 상냥하게 물어온다. 나는 떨리는 눈동자로 11자리 번호를 바라봤다. 엄마는 거짓말을 못 한다. 나한테 이 숫자를 써 줄 때도 몇 번이고 주기 싫어 몸짓했다. 이 전화번호의 상대가 결혼 상대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만나보긴 한 건가? 우리 엄마가 지금 엄청난 사기극에 휘말린 건 아닐까. 나는 각종 리얼 다큐멘터리나 모큐멘터리에 나오는 스토리를 상상하며 침을 삼켰다. 어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웠더니 목이 따가워 죽을 것 같았다.?
“정이소라고 합니다. 이정혜 씨 아들입니다.”
[아… 이소, 이소 군. 성이 다르군요?]?
전화 너머의 남자가 아주 반가운 목소리를 냈다. 나를 알고 있는 건가. 표정이 괴상하게 꿈틀거렸다. 거울을 쳐다봤다. 앞머리가 많이 길어 있었다. 눈썹을 찌르는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치우며 나는 겨우 대답했다.
“그… 이이소는 이상하니까요.”
이런 헛소리를 왜 하는 지도 모른다. 정신 빠진 내 대답에 비서라는 사람이 하하하 웃는다. 상황만 봐서는 서주영이라는 남자가 엄마의 재혼 상대인 수준이었다.
[재밌네요. 아, 그래서 어쩐 일로 전화를 주셨죠?]
“…만, 만나보려고 하는데요.”
[만난다면, 누구를요?]
“어머니 재혼 상대 되시는 분이요.”
[사장님은… 조금 바쁘신데요.]
사장. 낯선 직함에 눈 한쪽이 꿈틀거렸다. 이 아줌마가, 지금 돈에 눈이 멀어서 결혼을 하겠다는 건 아니지. 비서의 전화번호를 남편이 될 남자의 번호라고 적어 주고, 좋은 사람이라고 떠든 것을 보니 단단히 뭔가 잘못 걸린 모양이었다. 뿌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내가 침묵하자 상대는 머뭇거리더니 한마디 더 했다.
[이소 군이면 만나주시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 이제 도련님이 되실 테니까요.]?
도련님이라니, 나는 실소했다. 곧 아들이 될 사람이 만나자고 해도 고려를 해볼 사항이라 이거지. 인간이 쓰레기인데, 엄마는 도대체 뭘 본 거야? 이 남자 이름은 이게 맞나? 제대로 알고 있나? 갑자기 배가 아파졌다. 전등이 다 돼가는지 혼자 파스스한 소리를 내며 깜박거렸다. 어릴 적 인생을 좀먹었던 큰 불행의 예감이 둔기로 삶을 갈기고 있다.
“꼭… 만나야 한다고, 전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네, 그럼요. 이 번호로 다시 연락 드리면 될까요?]
“되도록 빨리, 빨리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보내세요.]
예의상 하는 덕담이 이렇게 듣기 싫을지는 몰랐다. 전화를 확 끊어내고 엄마가 써 준 메모지를 세면대 안에 던져놓고 물을 틀었다. 어디서 받은 싸구려 메모지는 물기를 머금자마자 찢어지기 시작했다. 최악이었다. 최악이다. 이것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다. 이 결혼을 무슨 일이 있어도 말려야 한다는 절망적인 각오 말고는 들지 않았다.?
불안해지자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좁아서 더 어지러운 집을 청소하고 이불 위에 누웠다. 밥을 먹지 않았지만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의식의 한쪽은 헝클어진 채였다. 편두통이 심해지자 타이레놀을 찾아서 두 알을 삼켰다. 알약이 목에 걸린 것처럼 텁텁한 맛이 났다. 서쪽으로 창이 뜬 집은 저녁이 다가올 수록 태양 빛이 강렬해졌다. 짜증스럽게 커튼을 치고 몸을 웅크렸다. 연락도 없는 휴대폰이 이유도 없이 뜨거웠다.?
고물 같은 휴대폰. 짜증스럽게 휴대폰을 내팽개치고 눈을 감았다. 갑자기 집을 떠나던 날 아버지한테 맞았던 무릎 시큰거렸다. 무릎 대신 복부를 감싸고 욕을 내뱉었다.
잠깐 잠이 든 모양이었다. 어두워진 집을 살피다 몸을 일으켜 앉아 습관처럼 휴대폰을 집어 들고 액정을 켰다. 쓸모없는 광고문자를 쳐내는데 낯선 연락처로 문자가 연달아 세 통이 와 있었다. 불안함에 침을 삼키며 메시지 함을 눌렀다.
[오늘 저녁 여덟 시에 사장님께서 만나자고 하시는군요.]
[약속 시각에 늦으시는 걸 싫어하시니 꼭 제시간에 도착하시길 바랍니다.]
[장소는…]
어디 이상한 곳에 처박힌 호텔 이름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벌써 7시였다. 손에서 쓸모라곤 없는 휴대폰이 날아가 구석에 처박혔다. 자다 일어난 몰골로 쫓겨나가도 늦을 판이었다. 머리와 얼굴에 대충 물을 적시고 알바 할 때 입는 흰색 셔츠를 입고 뛰어갔다. 날씨가 따듯한 오월인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것 말고는 좋은 게 하나도 없었다.
?
아무리 내 인생에서 상관없는 곳이라지만, 호텔 이름조차도 처음 들어봐 택시를 타야만 했다. 미터기에 찍혀 끝도 없이 올라가는 금액을 보고 나는 속으로 쌍욕을 미친 듯이 퍼부었다. 개새끼들. 따지고 보면 문자로 약속 장소와 시간을 통보한 게 꼭 죄는 아니었지만 화가 나는 건 화가 나는 거였다. 덕분에 다시 머리가 아파왔다. 한 손으로는 연신 뻗친 머리를 정리하며 앓기 시작하자 택시 기사가 계속 흘끔흘끔 나를 훑었다.?
호텔 문턱에 도착하니 약속 시각까지 10분이 남아 있었다. 바깥에서 숨을 고르고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했다. 차 안에서 다듬는다고 다듬었지만 그래도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유리문에 멍청한 얼굴이 비친다. 최소한 호텔과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긴 했다. 완전히 엉망이었다. 첫 만남부터 비웃음을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애써 구겨진 옷을 바로 하고 호텔 안으로 발을 밀어 넣자마자 공기가 육중했다. 커다란 호텔 로비를 보자마자 불안감이 샘솟았다. 쓸데없이 땅을 낭비하고 있는 넓은 입구 근처에서 머뭇거리자 직원이 다가왔다.?
“손님, 안녕하세요. 도와드릴까요?”
“아…”
머뭇거리다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억지로 목소리를 키웠다. 그래 봐야 빈티가 줄줄 흐르는 두려움을 떨칠 수는 없었다. 높은 천장의 조명을 쬐자 알몸으로 대로변에 나와 있는 기분이었다. 낡은 운동화를 숨기고 싶었다.
“손님?”
“약속이, 있는데요.”?
제멋대로 오르내리는 숨을 고르며 대답하자 여직원이 고개를 갸웃한다.
“죄송하지만, 혹시 성함이?”
“…정이소라고 하는데, 양이태라는 분과 약속이…”
“어머.”
양이태, 세 글자를 듣자마자 여직원의 표정이 바뀌더니 짧고 약한 탄성을 질렀다. 여직원이 호텔 안쪽으로 나를 안내했다. 호텔은 그래, 입구만큼 내부도 쓸데없이 넓었다. 내부에 위치한 카페는 한적했다. 드물게 사람이 몇 명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여직원은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자리에 앉히고는 묵례했다.
“여기서 기다리시면 사장님께서 오실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네, 네…”
어설프게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멀리 서 있던 웨이터가 순식간에 다가와 찬물을 따라주더니 레몬을 한 조각 컵에 넣어주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메뉴판을 받자마자 손이 떨렸다. 음료수가 왜 이렇게 비싸? 나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있는 놈들이 더 하다더니. 시발. 택시를 타고 온다고 지갑 사정이 얄팍했다. 자존심을 파느냐, 없는 자존심을 지키느냐 갈등하는데 갑자기 뺨 위로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소름 끼치는 냉기에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더니 웃음소리가 들린다. 내 옆을 스치듯 걸어온 남자가 입고 있던 정장 재킷을 벗어 직원에게 건넸다.
“여기 커피 두 잔.”
“알겠습니다.”?
직원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나는 넋을 놓고 앞을 바라보았다. 새카만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깔끔하게 넘긴 남자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이소 안녕?”
어린아이를 부르는 것처럼 자신을 부른다. 앞에 앉은 남자의 얼굴 위로 유리잔에 반사된 무지개가 그늘졌다. 두 번째 아버지가 될 사람과의 첫 만남은 충격적일 정도로 낯설 환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를 보고 싶어 했다고?”
“…안녕하세요.”?
대답 대신 인사를 먼저 했다. 남자는 의자에 앉자마자 목을 뒤로 젖히며 편안하게 기댔다. 머리가 조금 흐트러졌지만 그것마저도 아주 고상해 보였다. 남자는 흐트러진 넥타이를 정리해 다시 핀을 꽂아 고정했다. 손톱과 손가락이 깨끗하고 단정했다. 금방 내 뺨을 짚었던 서늘한 체온이 저 손이라 생각하니 쳐다보기 힘들었다. 말없이 눈을 테이블 위로 내렸다.
“응, 그래. 케이크 먹을래? 여기 케이크도 맛있는데”
남자는 혼자 떠들며 메뉴판을 펼쳤다, 접었다 부산을 떨었다. 그는 젊었다. 내 형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화사한 안색이었다. 중년의 기운은커녕 세월의 흔적이 지나간 빗금조차 보이지 않았다.
“안 먹어?”
“…괜찮습니다.”
“아쉽네. 다음에 먹지 뭐. 그럼 왜 보자고 했는지 알려 줄래?”
비서라는 사람과는 다른 종류의 상냥함이었다. 사근사근, 녹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고개를 강제로 들게 만들었다.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달리 눈동자는 신기하게도 연한 갈색이었다.?
“말 안 할 거야?”
어른 남자의 말투는 대부분 거세고 강압적이었다. 내 아버지가 그랬다. 고압적이고 명령조였다. 사장이라는 직함이 붙으면 더 심했다. 손바닥만 한 편의점 사장도 기세등등해서 아르바이트생들을 내쫓는 게 이런 부류였다. 대부분이 그랬기 때문에, 나는 독설 같은 날카로움을 기대했다. 그러나 이 남자는 그렇지 않았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투와 나긋한 몸짓에 보이지 않는 가시가 가득 박혀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어머니….”
“응?”
“어머니랑, 결혼, 하신다고…”
“아아. 역시 그거야?”
해사하게 웃는다. 남자의 뺨에 보조개가 잡혔다. 그래, 남자는 지나치게 젊었고, 비서가 있는 수준의 자산가였다. 미치지 않는 이상 주름 잡힌 늙은 오십 대 아줌마와 결혼할 생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뭐가 있었다. 명치 끝을 눌렀다. 그사이 다가온 웨이터가 커피 두 잔을 앞에 놓아주었다.
남자는 아주 불량하게, 발끝으로 테이블을 툭 쳤다. 커피 표면이 출렁거리더니 아슬아슬하게 툭, 하고 흘러넘쳤다. 턱을 치켜들고 그걸 구경하던 남자가 말했다.
“결혼하라고 주변에서 개지랄을 하는 것도 싫었는데, 딱 좋지 뭐야.”
“……네?”
“거지에 못생긴 아줌마랑 결혼을 하다니, 성도착증 환자에 미친놈으로 생각해서 말이 쏙 들어갈걸?”
그래, 엄마와 비슷한 또래는커녕 아무리 많이 쳐줘도 삼십 대 중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남자가 속닥거리는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속에서 뱉어지는 독한 언어와 달리 내 손을 잡아오는 몸짓은 친근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더 미친놈으로 보였다. 부자는 다 미친놈이라던 어른들의 뜬소문 같던 이야기가 눈앞에서 핑핑 돌았다.?
“아드님, 정혜 씨가 빚이 좀 있는 건 알아?”?
정혜. 엄마의 이름을 무슨 애인처럼 친근하게 불러제끼는 남자는 낙천적인 얼굴로 나를 보았다. 빚은 알고 있다. 이천만 원 쯤. 그러나 나를 키우고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대출이었다
한 번 더 탁자를 장난처럼 걷어차며, 남자가 물었다.
“아드님은 얼마라고 들었지? 천만 원? 이천만 원? 그것보단 더 많은 것도 알아?”
나는 이를 악물었다. 뒷골을 당겨오는 불행한 예감은 절대로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 남자가 잡고 있던 내 손바닥을 뒤집더니, 손톱을 세워 취약한 피부 중앙을 세게 긁었다. 순간적인 고통에 눈물이 솟아났다. 이런, 남자가 혀를 차면서 다정하게 내 뺨에 손을 댔다. 어느 순간 빼냈는지 반듯하게 접힌 휴지 조각이 내 눈물을 빨아먹고 있었다.
끝부분이 축축하게 젖은 휴지를 구긴 남자는 내 셔츠 주머니 안으로 휴지를 밀어 넣어줬다. 내가 쓰레기통이라도 된다는 것 처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빚도 갚고, 돈도 쓰게 해준다니 당장 고개를 끄덕이던데… 우리 정혜 씨, 못 살아서 이 바닥 생리는 잘 모르는 모양이더라고.”
날카로운 말이 정수리를 찌를 듯 주변에서 번쩍거렸다. 남자가 자기 뺨을 쓰다듬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관리를 잘해서 어려 보이는지, 타고난 동안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세상에게 혜택받은 듯 멋진 얼굴로 찡그리듯 웃는다. 그건 비웃음이 터지지 않으려고 꾹 참는 것 같이 보였다.
“왜 결혼하냐고 물어봤지?”
“……”
“재밌잖아, 쥐새끼가 식량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그걸 보면 우리 집 노인이 환장하지 않겠어?”
숨이 막혔다. 내 앞에 앉은 남자는 친아버지보다 더 한 인간이었다. 아름다운 얼굴이 주황색 불빛에 아늑한 빛을 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일제히 뇌를 찔렀다.
“아버지, 하고 불러. 그럼 잘 대해줄게. 아드님.”
명백한 조롱이었다. 엄마가 무엇을 위해 결혼을 선택한 것인지, 우리가 들고 있는 빚의 더미는 액수가 어떻게 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하나만 알았다. 우리는 늪에 빠졌다. 엄마는 이미 깊숙하게 잠겨들어 방법이 없는 것이다. 남자가 말하는 바닥에 들어가게 된 이혼녀와 거기 딸린 아들이 어떤 꼴을 당하고 살 수 있을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남자는 해류처럼 자연스럽게 테이블을 벗어나 사라졌다. 손도 대지 않은 커피 잔은 혼자 넘쳐 흘러 덜컥거렸다.
나는 억지로 사고했다. 엄마를 찾아야 했다. 엄마에게 내가 몸 바쳐 일할 테니 이 결혼은 하지 말자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엄마가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결혼하겠다고 한 거면 어쩌지? 같이 죽자고 나를 잡고 끌어들인 거면, 어쩌지?
벼락이 내리쳤는데 서리같았다.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꼼짝도 못 하고 커피잔을 노려보다 잔을 집어 들었다. 홧김에 앞쪽에 놓은 다른 잔에 커피를 그대로 부어 넣었다. 꽉 찬 잔에 다시 커피를 옮기니 테이블 위로 가득 커피가 흘러넘쳤다. 치워야 하는 직원에게 미안하다는 생각보다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우선이었다. 엄마와 이야기를 해야 한다.
등 뒤로 직원의 상냥한 인사가 들렸다. 평생 못 왔을 호화스러운 호텔의 접대에 감동 같은걸 할 겨를도 없었다. 뛰어가듯 달려가 택시를 잡아탔다. 열 시였다. 엄마가 식당 일을 정리하고 집에 왔을 시간이었다.
택시가 살고있는 원룸 건물 앞에 차를 대자마자 현금을 내밀고 4층까지 뛰어 올라갔다. 단숨에 계단을 올라가 비밀번호 4자리를 누르고 문을 벌컥 열었다. 이불을 펴고 있던 엄마가 깜짝 놀라 굳어 있었다.
운동화를 벗어 던지고 집 안으로 들어가 엄마를 마주 봤다. 위장이 배배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소야?”
“엄마, 제대로 말해.”
“가, 갑자기 왜 그러는…”
“얼마를 빌린 거야?”
없는 살림이라지만 친구들과 싸구려 패키지여행도 못 가 망설이는 걸 의아하게 생각한 적은 있었다. 돈은 언제 급하게 쓰일지 모르고, 여행을 사치라고 생각하는 걸까 싶어 망설이다 말았었다. 둘이 한 달에 버는 돈을 합하면 이백은 나오는데, 그리 빠듯하게 굴기도 힘들었다. 지금 이렇게 좁은 집에 사는 것도 이혼하면서 당장 급해 빌려 쓴 대출을 갚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단순한 사고방식이었다.
순진하다.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알 수 있다. 2천만 원을 대출했는데 이자가 삶이 힘들 정도로 많을 리가 없다. 정상적으로 대출만 받았으면.
“이소야, 그게 무슨 말이야?”
“그 아저씨, 엄마 패물만 가져간 거 아니지?”
택시를 타고 오는 내내 생각했다. 엄마는 아버지와 헤어진 이후로도 꾸준히 애인을 만들어왔다. 하나같이 형편없는 주정뱅이들이었다. 그중 최악은 내가 열여덟 살에 만나던 세 치 혀였다. 딱 봐도 사기꾼같이 생긴 놈은 엄마를 살살 녹여 이 집을 당당하게 드나들더니 삼 개월 만에 패물을 훔쳐서 도망가버렸다.
엄마가 그 일로 몇 날 며칠을 앓아누웠다. 아까워 잘 착용하지도 못하는 패물을 가지고 달아나니 화병이 날 만하다고 생각해 학교도 가지 않고 극진히 간호했다.
그 뒤로 엄마의 행동이 더 조심스러워졌다. 늘 내 눈치를 살피며 가난한 살림, 허리띠 졸라매야 한다고 입이 부르트도록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그 양반한테 얼마 줬어?”
“이소야, 엄마는.”
“얼마 내줬냐고!”
불쌍한 엄마가 눈을 딱 감고 오들오들 떤다. 사기꾼들이 하는 말은 대부분 비슷했다. 내가 어디 뭘 투자할 건데…
“돈 빌려서 줄 정도로 좋았어?”
창백하게 질린 엄마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몸을 덜덜 떨었다. 그 꼴을 보자 더 화딱지가 났다.
“엄마, 결혼 상대 방금 만나고 왔어. 나보고 뭐라는 줄 알아?”
“……”
“재밌어서 결혼한다더라. 쥐새끼가 찍찍거리는 거 기대한대.”
“엄마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엄마가 기어코 눈물을 흘린다. 답답해서 주먹으로 가슴을 퍽퍽 쳤다.
“같이 죽자고 덤벼들 거면, 나는 왜 낳았어?”
해서는 안 될 말도 한다. 엄마는 산산이 조각난 얼굴로 훌쩍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고생은 고생대로, 지뢰는 지뢰대로 골라 밟고 살아오는 인생이 슬프다고 생각해 본 적은 있다. 하지만… 눈을 가리고 숨을 몰아쉬는 내 귀에 엄마의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상상 이상이었다.
“안녕하세요, 서주영이라고 합니다.”
비서란 이렇게 생긴 사람이다, 라고 말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일 것 같이 생겼다. 얇은 안경에 단정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웃으면서 악수를 신청 한다. 뚱한 얼굴로 악수를 받았다.
“이소 군을 만나신 뒤로 사장님 기분이 아주 좋으십니다. 기대가 크세요.”
“아아, 예.”
“오늘 이렇게 부르신 것도 이례적인 일입니다.”
이례적으로 재수 없는 일이겠지. 지퍼라도 채운 것처럼 입을 닥치고 있자 비서가 곤란한 듯 웃는다.
오늘도 갑자기 문자로 통보를 받았다. 전화로 이야기를 해도 모자랄 판국에, 약속 시각을 한 시간씩 남기고 사람을 불러대는 건 있는 놈들의 재수 없는 습관인 모양이었다.
남자를 만나기 위해 왔던 호텔을 다시 찾았다. 비서가 내 옆에서 사장이 이렇게 개인 시간을 내는 것은 처음이라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로 묵묵하게 서 있다 안내해주는 방문 앞에 섰다.
“그럼, 들어가세요.”
비서가 내 등을 밀어 넣는다. 팔리는 심청이의 심정으로 입장하자마자 문이 휙 닫혔다. 카펫이 깔린 방 안은 영화에서 보는 것과 똑같이 생겨있었다. 웅장한 통로 끝에 남자의 형체가 보였다. 커피를 마시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머그잔을 입에 댄 채로 눈을 휘며 웃는다.
정말 가지가지 경험하는구나. 성난 속을 다스리며 안으로 들어가자, 탁자 앞에 앉아 있던 남자가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누가 보면 친하기 그지없는 사이로 보일 몸짓이었다. 남자의 앞에 서서 예의상 고개를 숙였다.
“왜 보자고 하셨어요?”
“응, 이제 내 집에 들어올 거니까. 기본적으로 내용 숙지는 시켜줘야지.”
“결정된 것도 아니잖아요.”
“너네 엄마가 그래?”
뻔뻔한 얼굴을 한 남자가 웃음을 흘리며 두툼한 종이 뭉치를 건넸다. 본능적으로 받아서 들어 앞 장을 읽었다. 목차라는 글자가 크게 적혀 있었다. 그 밑으로 단어가 빽빽했다.
“…가족?”
“위로 누나 하나, 그리고 노인 하나.”
목차로 적힌 카테고리만 열 두 개였다. 가족 인적사항부터 주변인, 집에서 지켜야 할 행동수칙이며 활동 반경이 적힌 종이는 한 손으로 들기 힘들 정도로 두꺼웠다.
“이것도 못 외우면 구제 불능이잖아. 그 아줌마 대신 너라도 열심히 외워야 살아남지. 이것도 지겨워서 못 하겠어.”
“그럼 다른 사람으로 고르시죠.”
“머리 돌아가는 애 딸린 여자 찾는 게 은근히 힘들어.”
개소리하고 있네. 없는 사람도 만들어 낼 것 같은 인간이. 지지 않고 노려보자 남자가 픽 웃으며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껐다.
“얼른 외워. 한 시간 줄 테니까.”
한 시간 만에 이걸 다 외우라고? 질린 얼굴로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뒤적거린 종이에는 별 쓸데없는 내용이 가득했다. 내가 왜 이 남자가 닭고기를 싫어한다는 걸 알아야 하는 거지. 저절로 입안에서 욕이 터져 나왔다. 씨발, 하는 욕설을 들었는지 남자가 보조개까지 패면서 활짝 웃었다. 얼굴 앞에서 쌍욕을 얻어먹은 사람답지 않은 밝은 웃음이었다.
“조금 고분고분해졌나?”
남자가 담배를 든 손으로 내 뺨을 쓰다듬는다. 괜한 반항심에 노려보자 남자가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말했다.
“좀 듣긴 했나봐.”
판단은 자기가 다 하고 있었다. 책도 혼자 쓰지그래. 빈정거리고 싶은 걸 참고 종이 위로 눈을 돌렸다. 첫 장은 양이태, 남자의 인적사항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모르거나 궁금한 건 다 비서에게 물어봐, 응?”
종이에 적힌 내용을 다 외운다면 절대로 물어볼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내가 궁금하면 나한테 물어보고.”
“안 궁금해요.”
“슬프네, 아들이 아빠한테 관심도 없고.”
누가 아들이야, 누가. 토가 나올 거 같아 이를 꽉 깨물었다. 남자는 근육이 볼록하게 올라온 내 턱을 툭 치더니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노트북을 켜고 이어폰을 양쪽 귀에 꽂은 남자의 눈이 들고 있는 종이로 내려가 앉더니 가볍게 움직인다. 닥치고 외우라는 몸짓에 이를 악물고 종이에 코를 박았다. 남자가 가볍게 웃었다.
일주일 전, 남자를 처음 만난 날 엄마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자초지종 떠들어대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사기꾼에게 1억이나 빚을 내 투자했다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간도 작으면서 왜 그런 일에는 간이 커지는지 모른다. 위기에 몰리면 강해지는 주인공도 아니고, 다들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한다.
이자를 갚는 것도 허덕이는 마당에 일하는 식당이 곧 폐업까지 하게 되었단다. 급한 김에 물어물어 가정부를 구한다는 집에 연락을 넣었는데 갑자기 결혼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남자는 엄마한테도 아주 상세하고, 가감 없는 결혼 생활을 설명해 주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장 빚을 갚고 돈을 버는데 쫓기던 엄마가 그 제안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당연했다.
“철없는 아줌마 하나 엿 먹이니까 좋아요?”
내 질문에 휴대폰을 보던 남자가 고개를 들고 나를 본다. 잠깐 눈을 마주쳤다 태연한 척 종이를 뒤적거렸다. 한참 나를 보던 남자가 대답했다.
“엿이라니, 구원이지.”
“구원 같은 소리 하네.”
“너네한테는 이게 로또야. 어디 빚 갚아주는 재력가 남편이 흔할 거라고 생각해?”
“그냥 월급 주는 가정부로 부려주면 감사하겠는데요.”
“음, 그건 안 돼. 가정부란 것들은 손버릇이 나빠서…”
하아, 가벼운 한숨을 쉬며 남자가 어깨를 으쓱한다.
“내가 성격이 좀 나빠지더라고. 또 결혼도 해야 했고. 너도 이 나이쯤 먹으면 결혼 이야기가 얼마나 질리는지 느낄걸?”
“그럼 제대로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시던가.”
“그건 싫어. 세상에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우리 누나도 결혼 안 했단 말이야. 남자가 어린애처럼 투덜거리면서 다시 휴대폰 액정으로 시선을 박았다.
“이제 47분 남았어.”
“……”
“실망하게 하지 말고 외워.”
마지막은 명령이었다. 대꾸 없이 종이로 눈을 돌렸다.
3년 만에 제대로 하는 공부에 눈이 핑 돌았다. 굳은 뇌를 억지로 가동해가며 종이를 읽었다. 성과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남자의 나이가 서른다섯이라는 걸 알자마자 머리 한구석에서 실소가 터졌다. 열 세 살 많은 남자가 아버지가 된다고? 이게 무슨 개그 프로그램이야? 짜증 나서 종이를 휙 넘겼다. 남자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아 종이 몇 장을 한 번에 넘겼는데도 그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아예 자서전을 쓰지. 미간에 주름을 잡고 페이지를 휙휙 넘겼다. 남자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무려 30장에 달했다. 점점 표정이 굳어졌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남자가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렸다. 혀를 깨 물고 싶었다.
남자가 미나리를 싫어하지만, 콩나물은 좋아한다는 개같고 쓸모없는 내용을 억지로 외우는데 진동 소리가 울렸다. 집중이 산산조각이 나자 두통이 밀려왔다. 이마를 짚으며 굽었던 허리를 제대로 폈다. 앞에서 남자가 휴대폰 진동을 잠재우고는 물었다. 철두철미하게 알람을 설정해둔 모양이었다.
“다 외웠어?”
“…아니요.”
“멍청하긴.”
정말로 구제 불능인 멍청이를 보는 것처럼 안타깝게 중얼거린다. 이걸 어떻게 한 시간 만에 외워. 순간적으로 울컥해 대꾸했다.
“이렇게 많은 내용을 한 시간 만에 외우는게 가능합니까?”
“아들, 뭔가 상황파악이 안 되는 건 아니지?”
날카로운 음성이 내려와 박혔다. 나긋나긋한 음성은 그대로였지만 곤두서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시키면 해야지, 못하면 죽는시늉이라도 해야 예뻐.”
죽는 게 낫지. 그대로 빈정거렸다.
“그럼 죽는시늉 하러 갈까요?”
“음, 설마. 아버지가 어떻게 아들에게 죽으라고 하겠어.”
남자가 이어폰을 귀에서 완전히 빼내며 웃었다. 단정한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을 낸다. 놀랍도록 예쁜 얼굴이었다. 이런 겉껍데기만 완벽한 정신병자랑 같은 호적을 덮어쓰게 된다니. 요 며칠 사이 억울해서 잠도 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진짜 죽여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열심히 해.”
“……”
“대답 안 해?”
“……알겠습니다.”
“좋아, 착해.”
이번에는 정말로 아버지가 아들을 칭찬하는 것처럼 머리를 쓰다듬는다. 장난스럽게 머리카락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고 쓰다듬는 몸짓이 애완동물을 보는 주인 같았다. 그래, 개새끼가 된 느낌이라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저열한 인간 같으니라고. 속으로 시근덕거리는데 남자가 천천히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입술을 꾹 닫았다 열었다. 뺨에 가느다란 홍조가 맺혀져 있었다. 또 왜 이러는 거야, 미친 새끼가.
소름이 끼쳐 몸을 뒤로 빼려는데 남자가 내 뺨을 툭 쳤다. 애교라도 부리는 것처럼 가벼운 몸짓이었다.
“그런데 너, 예쁘게 생겼네.”
“뭐라고요?”
얼이 빠져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남자는 뻔뻔한 얼굴로 너. 하고 나를 지목했다.
“정말이야. 흠, 그 아줌마는 하나도 안 닮았네. 좋아, 마음에 들었어.”
남자가 검지를 까딱하더니 눈가를 가볍게 찌르면서 얼굴 옆 선을 죽 내리그었다. 변태 같은 행동에 변태 같은 대사를 뱉는 내내 붉어진 뺨은 그대로라 더 소름이 끼쳤다. 몸서리를 치자 남자가 즐겁게 말했다.
“우리 집이 예쁜 걸 좋아해. 다행이다. 노인네가 너는 좀 좋아하겠는걸?”
단체 변태 집단이라는 말인가. 말문이 막혔다. 혼자 입을 벙긋거리는 나를 보던 남자가 갑자기 나를 끌어안았다. 이 미친놈, 속에서 올라오는 욕 대신 비명을 질렀다. 악! 내가 싫어서 몸부림을 치거나 말거나 남자는 강한 힘으로 나를 끌어안고 연신 얼굴을 비벼댔다.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어.”
“씨발, 이거 놔!”
“너 진짜 예뻐.”
활짝 웃는 남자의 얼굴을 보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놓으라니까!”
“예쁜 것.”
“개새끼야!”
한참 남자 품에 안겨 힘도 못 쓰고 버둥거리는데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 난장판을 보고 말려줄 생각도 없이, 한참 내 꼴을 보던 비서가 활짝 웃었다.
“보기 좋은 부자지간이군요.”
그러면서 박수를 치는데 가능하다면 턱이라도 날려버리고 싶었다.
남자와 비서는 그딴 식으로 사람을 열 받게 하더니, 다짜고짜 숙제라며 종이뭉치 위에 종이뭉치를 하나 더 얹어 주었다. 삼 일 뒤에 만나자며 전부 외워오라는데, 종이를 눈앞에서 박박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비서는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며 친절하게 충고했다. 복종을 좋아하세요. 아무 말 없이 집으로 두툼한 종이를 들고 들어갔다. 그날부터는 외출도 하지 않았다.
집에 처박혀 종이만 들여다보는 나를 보고 엄마는 갑자기 웬 공부냐며 어리둥절했지만 대답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유치찬란하지만 이게 다 엄마가 자초한 일이라는 생각에 묵언 시위를 시작했다. 분노 조절 장애가 있었다면 이미 어디 가서 알몸으로 뛰어다니며 불이라도 질렀을 것이다.
자존심 꺾이기는 싫어서 3일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내용을 외웠다. 여전히 쓸데없는 내용이 많았다. 강아지에 미쳐 산다는 누나와 성격파탄자라는 노인, 아마 남자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사람의 자료를 읽는 것만 하루가 걸렸다. 그다음은 집에서 지켜야 할 행동이었다. 충격적인 항목을 읽었다. 남자를 만나기로 약속한 날, 인생에서 두 번째로 꼴 보기 싫은 비서가 문을 열어 주자마자 방 안을 박차고 들어갔다. 남자는 휴대폰 게임을 하면서 소파 위에 방자하게 누워있다 내가 내민 페이지를 쓱 읽었다.
이게 뭐가, 하는 얼굴로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국어가 이해가 안 가?”
“그게 아니잖아요.”
“그럼?”
남자가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열이 받은 나는 소리를 꽥 질렀다.
“도대체 왜 이런 항목이 들어가 있는 건데요!”
펼쳐둔 조항은 남자의 집에서 살기 위해 지켜야 할 조항이 낱낱이 적혀져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내 입으로 말하기도 끔찍했다. 아니, 남사스러워서 인터넷에 익명으로도 올리지 못할 이야기였다. 지극히 평범한 내 기준으로는 그랬다.
13항. 꾸준히 제모를 받을 것. (브라질리언 왁싱 필수)
처음에는 브라질리언 왁싱이 뭔지 모르고 인터넷에 검색까지 했다. 그리고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핀셋으로 털이 가닥가닥 뽑히는 악몽이었다.
“그럼 너는 아랫도리 털을 내 집에 질질 흘리고 다니겠다는 거야?”
남자가 처음으로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인상까지 찌푸리고 있는게 정말 싫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씨발, 싫을 게 따로 있지. 그리고 질질 흘린다니. 상상을 초월하는 언어에 대꾸할 말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떻게 남자가 거시기 털을 밀 수 있단 말인가.
“겨드랑이, 팔, 다리, 음모까지 체모는 전부 정리해.”
기가 막혔다. 아랫도리도 모자라서 겨드랑이에 다리? 팔? 도대체 뽑히지도 않는 팔다리 털을 왜 정리하라는 건가.
“그쪽은요?”
“아버지.”
지금 호칭을 정정해줄 상황인가. 분노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종이가 꽉꽉 구겨지는 걸 보며 남자가 즐겁다는 듯 히히 웃었다. 다시 게임을 시작한다. 요란한 소리에 혈압이 터져 폭발할 것 같았지만, 꾹 참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버지는요?”
“내 집인데 내가 왜 해?”
남자는 태연했다. 천진난만하게 깜박거리는 눈동자를 보는데 손가락이라도 확 찔러넣고 싶었다.
“내일 당장 받아.”
다음 날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비서가 나를 으리으리하게 생긴 샵에 데려갔다. 벽에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남자 브라질리언 왁싱 전문 샵. VIP전용. 탈출하기 위해 좀 지랄을 했더니 강제로 손발을 묶었다. 이건 인격 모독이라고 발광을 했더니 입을 틀어막았다. 연예인처럼 예쁘게 생긴 누나는 사지가 결박당한 내 꼴을 보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콧노래까지 부르며 내 아랫도리를 깠을 때는 자살이라도 하고 싶었다. 문제는 수치심도 잠시, 예민한 부위를 잡아 뜯는 고통으로 눈물이 터졌다.
생전 처음 느끼는 고통이었다. 군대에서 눈밭을 구르며 선임에게 삽자루로 두들겨 맞았을 때도 이것보다 아프진 않았다.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을 때마다 그 새끼를 죽여버리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다.
말 못할 부위가 터져 나갈 것처럼 아파 온종일 앓아누워있는데 집에 택배가 도착했다. 포경수술이라도 한 사람처럼 어기적거리며 나가 택배를 받아들었다. 택배는 무거웠고, 남자의 이름으로 배달이 와 있었다. 상자를 뜯었더니 흉기로 써도 될 정도로 두꺼운 책이 쏟아졌다. 경영학 개론. 경제학 개론. 한국사. 세계사. 미술사. 한 달 동안 공부할 책이라는 메모를 보고 말없이 책을 내다 버렸다.
다음 날 똑같은 책이 배달왔다. 또 내다 버렸다. 그 날로 호출을 당했다. 충분한 반항심을 보여줄 생각이었는데 들어가자마자 질질 끌려가 호텔 방 안에서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 사근사근 잔소리를 퍼붓고 사람을 냅다 후려갈기는데 반항은커녕 말대꾸도 못 했다.
사람이 준 걸 그렇게 버리는 거 아니라고, 마음이 아프다며 웃는 얼굴을 했다. 마음이 아픈데 왜 웃어. 지랄한다고 소리를 치려고 했는데 귀신같이 틈을 주지 않고 사람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바닥을 구르면서 나는 저 남자가 그냥 미친놈도 아니고 대단히 미친놈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내게 공부를 강요하는 남자의 방식은 두 가지였다. 칭찬 아니면 폭력. 잘하면 칭찬을 받고 못 하면 두들겨 패고. 이게 재벌들의 공부 방식이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소시민으로 사는 게 낫다.
남자가 나한테 시키는 공부는 여러 가지였다. 식사 예절, 태도는 기본이었고 말투와 기본적인 대학교 교양 강의까지 들어야 했다. 경제학과 경영학을 가르쳐주는데 상고를 나온 내가 도대체 뭘 알아듣겠는가. 이상한 글자를 보자마자 무심코 프린트물을 보는 앞에서 찢었을 때, 또 그 자리에서 두들겨 맞았다.
강제로 끌려가 쳤던 토익 점수가 220점이 나온 적도 있었다. 남자는 한참을 웃더니 성적표를 인쇄한 종이를 분쇄기에 집어넣었다. 드르륵, 종이 갈리는 소리를 듣고 후련한 표정을 지은 남자는 자기 집에 있는 개가 풀어도 그 점수는 나올 거라고 나를 비웃었다. 영어가 살면서 얼마나 필요하다고. 개랑 똑같은 지능으로 평가당한 날 집에서 몰래 소주를 깠다.
그렇게 장장 한 달이 흘렀다. 우리 엄마는 순진하게 내가 공부에 미쳐 사는 줄 알았다. 아니면 재혼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그냥 미쳤거나. 쉬엄쉬엄 공부하라고 바쁜 와중에도 간식거리를 준비해놓고 식당으로 사라졌다. 엄마는 남자와 결혼을 하기 위한 준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누가 보면 결혼은 내가 한다고 착각할 지경이었다.
“도대체 엄마랑 결혼은 언제 하세요?”
탁자에 오늘까지 읽으라고 준 서류를 던지며 짜증을 냈다. 남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내가 제출한 숙제를 읽었다.
“언제 하시냐고요.”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에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이자 남자가 숙제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고 이마를 짚었다. 침울한 표정만 보면 내가 남자에게 욕이라도 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저 끔찍한 면상. 꿈에서라도 볼까 진저리가 날 지경이었다.
“왜?”
“그냥요.”
“할 말 있으면 제대로 해. 빙빙 돌리면 어지럽단다.”
늙어서 요즘 눈치가 부족해. 남자가 우는 소리를 냈다. 당장 테이블을 엎어버리려고 하다 참았다.
“도대체 제가 왜 이런 공부를 합니까.”
남자가 운영하는 기업은 규모가 컸다. 아직도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계열사만 해도 여러 곳이었고 다루는 영역만 수백 개가 넘었다. 그만큼 큰 대기업의 사장이 오늘 내게 던져준 것은 각 계열사의 하반기 영업 이익 목표 보고서였다. 난 그래프를 보는 이해도가 부족했고 목표 이익 분기점 따위 알고 싶지 않았다.
“너는 내 아들이니까.”
“아직 아니잖아요.”
“곧 되긴 하잖아.”
“…아들이 된다고 쳐도 왜 이런 공부를 해야 하는데요?”
내 질문에 남자가 음, 하고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
“경영을 해야 하니까.”
요즘 경영은 토익 220도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제가요?”
“원래 기업은 혈족 승계야.”
“나는 당신 핏줄 아니에요.”
“누누이 말하지만, 나는 아들도 없고, 아들 키울 자신도 없어.”
한숨을 푹 쉬며 남자가 슬픈 표정을 짓는다. 저 예쁜 표정이 속아 넘어갈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자 남자가 내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입술을 삐죽거렸다. 서른 넘은 아저씨가 저게 무슨 추태야. 욕이 산처럼 솟아났다.
“너처럼 예쁘고 적당히 가난과 비참함에 굴러서 철 일찍 들고, 어른스럽고, 인내심 있는 애가 흔할 거 같아? 그리고 나는 일하기 싫은걸.”
쌍욕으로 뺨을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미친놈, 뒤져.”
“응?”
본심이 그대로 튀어 나갔다. 웃으면서 몸을 슬쩍 일으키는 남자를 보고 허겁지겁 말을 돌렸다.
“그, 그렇구나. 라고요.”
“경박한 말을 한 것 같았는데.”
“…아니에요.”
“정말?”
“정말로요.”
식은땀이 새어 나왔다. 남자의 구둣발에 몇 번 차여본 소감을 말해보자면, 다시는 두들겨 맞기 싫었다. 남자는 전문 고문관처럼 사람의 약점만 골라가며 두들겨패는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맞았을 때는 관절 구석구석이 쑤셔서 이틀을 내리 꼼짝도 못 하고 앓아누웠다.
“내 귀가 정상이라면 제대로 들은 것 같은…”
“아버지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어요.”
황급히 변명하면서 억지웃음을 짓자 남자의 표정이 사르르 풀어졌다. 남자는 내가 아버지, 하고 불러줄 때 굉장히 약했다. 꼬박꼬박 아들, 아들, 하고 나를 부르는 것도 그렇고 이 부자지간 놀이에 푹 빠진 모양이었다.
“역시 그렇지? 그러니까 적당히 기어오르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남자는 그러면서 다시 숙제를 검사하기 위해 시선을 서류 위로 돌렸다. 사각사각, 빨간 볼펜이 내가 쓴 글의 몇 부분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남자의 말을 종합해보자면 지금 이 공부는, 내가 남자 밑에서 일을 대신 죽어라 하고 자기는 탱자탱자 놀겠다는 것 아닌가. 거기다 육아는 귀찮으니 다 큰 남의 아들 끌어다 쓰겠다는 거겠지.
응, 정말 대단히 미친놈이구나. 엘리트도 아니고 상고 나온 나를 가져다가 무슨 기업 경영을 시키겠다는 거야. 경영을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점점 꼬이고 망해가는 인생을 한탄하는 내 얼굴 위로 남자가 파일을 집어 던졌다. 얼굴을 가격당하고 코를 틀어쥐며 몸을 비틀자 남자가 또 웃었다. 고통스럽게 몸을 웅크리는데 커다랗게 -78점이라고 써둔 내 숙제가 보였다.
저걸 하기 위해 장장 28시간이 걸렸는데, 빵점도 아니고 마이너스라니.
“다시 써와, 이 머저리 같은 아들.”
네가 해. 결혼 취소야. 이건 무효야. 나는 오늘부터라도 로또를 사기로 했다. 하지만 이 남자라면 로또가 당첨이 돼도 그걸 박박 찢어버리고 불태울 인간이었다.
“대답.”
“…네.”
몸에 힘을 쭉 빼고 걸어나가자 비서가 웃으면서 직접 문을 열어줬다. 황송해서 눈물이 다 나왔다. 오늘은 술이라도 마셔야겠다. 휴대폰으로 빈약한 인간관계를 뒤졌다.
[어, 죽은 거 아니었나?]
“안 죽었다. 이근영, 나랑 술 좀 먹자.”
[응? 니가 사면.]
집안 사정 뻔히 알면서 치사하게 사람을 털어먹으려고 하는 친구를 욕했다. 그런데 친구라곤 몇 명 없어서 비빌 언덕이 급했다.
“내가 살게. 제발 마시고 같이 죽어줘.”
이근영이 유쾌하게 웃으면서 콜을 외쳤다. 그대로 길을 꺾어 사거리로 나갔다. 소주 한 잔에 남자의 수명이 일 년씩 깎이길 기도할 계획이었다. 길 건너편 성당의 성모마리아 상이 보였다. 나는 무단 횡단을 하며 성호를 그었다. 하나님 성모 마리아 저 좀 살려주세요. 남자는 사탄이었다.
집 근처 술집에서 보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자리를 잡고 기다린 지 얼마 안 돼서 근영이가 달려 나왔다. 고등학교 친구 중 연락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주량이 비슷하고 성격이 맞아서 술자리에서만 친하게 지내는 놈이기도 했다. 이근영이 나를 보자마자 기겁하더니 외쳤다.
“로또 당첨됐냐?”
냉큼 대꾸했다.
“자살해.”
“아니, 신수가 훤해졌길래.”
이근영이 말을 더듬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신수야 훤해졌겠지. 남자는 내 거지 같은 몰골이 꼴 보기 싫다며 각종 관리도 강요했다. 옆에서 가정교사라고 데려온 사람이 영어 회화를 떠들어댔고, 나는 피부에 이상한걸 처바르거나 머리카락에 영양을 주고 있었다. 몸에 넣을 영양소도 부족한데 머리카락에 왜 영양분을 준다는 말인가. 식물처럼 가만히 주는 걸 처먹고 주는 옷을 입어야지만 남자는 나를 방 안에 들어오게 해줬다.
그리고는 독설을 퍼부으며 나를 머저리로 만들지. 스트레스가 사무쳐 소주 한 병을 말없이 깠다. 뻥튀기를 밀어주며 근영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인데? 또 아줌마가 사고 쳤냐?”
“재혼.”
“…세상에.”
우리 엄마가 남자 보는 눈이 바닥을 뚫고 들어갔다는 걸 아는 근영이 탄식했다. 근영이가 주섬주섬 가방에서 십자가를 꺼냈다. 나무로 된 십자가를 가슴에 품고 엄숙한 목소리를 낸다.
“목사의 아들 이근영이 필요하십니까, 형제님.”
“제 주변에 사탄이 붙었습니다.”
진지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이근영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무려 목사의 아들이면서 폭탄주에 환장하는 이근영은 우리 엄마가 남자를 만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회개를 부르짖었다. 그래 봐야 엄마의 남자 보는 눈이 나아지진 않았기 때문에 나는 자주 이근영과 술을 퍼야만 했다.
“사탄이라니, 심하신가 봅니다.”
“제가 전생에 죄를 지었을까요.”
“기부하시고 참회하세요, 형제.”
“내 주머니에 기부를 해라.”
“안돼.”
“씨발.”
두 손을 모으고 쇼를 했다. 또래로 보이는 알바생이 우리를 미친놈처럼 보더니 머뭇거리다 안주를 내려놓고 도망쳤다. 손가락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빙글빙글 돌리는 태도가 아주 고까워 보였다.
컴플레인을 걸어볼까 망설이는데 이근영이 내 소주 잔에 자신의 잔을 두드리며 물었다.
“사탄급이면 어느 정도?”
“그놈은 완전히 미쳤어요.”
“얼마나?”
“……”
“저기요?”
“상상 이상…”
소주를 한 잔 따라 쭉 들이키며 중얼거렸다. 근영이 나를 툭툭 친다. 무시하고 숟가락으로 짬뽕 탕을 떠먹으며 인생을 회고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태어난 게 죄가 아니었을까. 불교든 기독교든, 영혼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나라는 인간은 눈치도 없이 있다가 술에 만취해서 태어날 곳을 잘못 찍었을지도 모른다. 삐끗했다거나.
“내 인생은 이미 망했어.”
“뭐라고?”
“죽을까.”
“야?”
“먹고 죽자.”
소주 한 병 더요. 팔을 들어 올리고 힘차게 외쳤다. 나한테 무슨 말을 듣길 포기했는지 이근영이 한숨을 쉬며 같이 팔을 들어 올렸다. 여기도 소주 한 병.
자고로 마시고 죽을 때는 소주도 병나발이었다. 우리는 나란히 빨대를 꼽고 소주를 마셨다. 이근영이 짬뽕 탕에 빠진 홍합을 건져 먹으면서 물었다.
“재혼하는 아저씨가 빚쟁이냐?”
“아니.”
“사기꾼이냐?”
“아니.”
“그럼, 그냥 무능력자냐?”
“능력은 좋아.”
“그럼… 인성이 쓰레기냐.”
“쓰레기한테 사과해.”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이근영이 내 말을 듣자마자 테이블 밑으로 내려가 쓰레기통 앞에 무릎을 꿇었다.
“쓰레기님, 죄송합니다.”
“씨발, 진짜 사과하다니 쪼다 새끼.”
내가 이근영을 비난하자마자 이근영이 음, 하고 나무 십자가로 등을 긁으며 쓰레기통에 구토를 시작했다. 멀리 있던 알바생이 뛰어와 이근영 목을 조를 것처럼 통 안에서 빼냈다.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안될 게 뭐 있어…”
“네?”
알바생이 이근영의 목을 두 손으로 잡은 채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마시다 만 소주병을 기울여 이근영의 머리통 위에 부어주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토익 900점도 받으라는 판국에 쓰레기통한테 사과하면 왜 안 되는데?”
“저기, 손님. 만취하신 거 같은데 가시면…”
“내 소주는 누가 다 마셨지?”
목이 말라 소주를 마시려고 했는데 병이 텅 비어 있었다. 빈 병을 붙들고 우울해서 중얼거렸다. 이근영이 뭘 뿌렸는지 축축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쥐어짜며 콧물을 훌쩍거렸다.
“으흑.”
“왜 우냐.”
“불쌍한 우리 이소.”
“내가 한 불쌍하지.”
“손님들, 문 닫을 시간이에요.”
이근영과 나는 동시에 알바생을 올려다보았다. 언제 왔는지 테이블 앞에서 깔작거리던 알바생이 낯빛을 새파랗게 해서는 우리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휙휙. 마치 만취객을 내쫓는 주인 같았다. 기분이 나빠진 나는 이근영을 챙겨서 일어났다.
“문 닫는다니까 가자. 진상처럼 굴면 어쩌냐.”
“그럼, 가야지.”
우리는 계산대까지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걸어갔다. 이근영은 당당하게 자기 카드를 내밀었다. 나는 감동을 받아 옆에서 손뼉을 쳤다. 계산하는 내내 이상하게 알바생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이 시간까지 일하면 피곤하겠지. 의젓하게 알바생의 어깨도 두들겨주고 나와 이근영과 헤어졌다. 숨을 쉴 때마다 소주 냄새가 푹푹 올라왔다. 알코올이 훅 올라온 기분에 비틀대고 걸으면서 애써 집으로 향했다.
그 뒤로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눈을 떴더니 화장실 입구에서 자고 있었다. 속에서 뭐가 올라와 그대로 화장실 바닥에 기어들어 가 변기를 잡고 토했다. 죽기 직전까지 올리고 겨우겨우 씻고 나왔더니 앉은뱅이 밥상에 콩나물국이 한 그릇 올라가 있었다. 엄마 최고야. 나는 감동해서 콩나물국을 그릇째로 들고 마셨다.
창밖을 보니 벌써 한낮이었다. 그래도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고 아침 여덟시면 일어났는데, 어제 과음을 하긴 한 모양이었다. 이근영은 잘 들어갔으려나. 땀으로 축축한 몸을 긁적이며 휴대폰을 찾아들었다. 부재중 통화가 다섯 통이나 와 있었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다섯 통이나 연달아 와 있다니. 불안한 느낌에 뺨을 긁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몇 번 가지 않아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일어났어?]
악몽인가? 나는 순간적으로 내 뺨을 내리쳤다. 굉장히 아팠다.
[속은 좀 괜찮니?]
다정한 질문에 나는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힘썼다.
“저,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
[네가 나한테 걸었는걸.]
도피하기도 전에 확인 사살을 당했다. 멍청한 정신을 비집고 목소리가 또박또박 내 만행을 알려주었다.
[주영이한테 전화해서 내 전화번호도 모른다고 한탄했다며. 그렇지만 주영이도 밤에는 쉬어야 하니까, 막 전화하고 그럼 안 돼.]
“…….”
[궁금한 건 나한테 직접 물어보라고 했잖아.]
사근사근한 목소리만 들으면 속이 노곤해질 정도로 상냥했다. 하지만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이라도 안다면, 저게 악마의 속삭임인지 알 수 그것보다 쪽팔려서 죽고 싶은 심정이 먼저였다.
[나 보고 싶으면 여기로 전화해. 알았지?]
“……”
[응?]
“……아, 예.”
전화를 뚝 끊고 얼굴을 가렸다. 세상에… 술에 취해서 무슨 일을 저지른 거지. 벽에 머리를 박았다. 보통 머리에 충격이라도 받으면 뭐가 기억이 난다는데, 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병나발을 분 건 확실한데.
눈을 비볐다.
부재중 통화 기록이 찍힌 휴대폰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돈이냐, 현실도피냐. 몇 번이나 반복해서 고민하다 휴대폰을 변기통 안에 넣고 물을 내렸다. 속이 다 시원했다. 앓던 이가 빠진 느낌이었다.
내 인생에서 남자가 잠깐이나마 사라지니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숙제도, 외워야 할 내용도 다 잊고 좁은 원룸 안에서 대자로 뻗어 다시 잠이나 잤다. 이때까지도 나는 천하태평이었다. 만 하루 연락이 안 된다고 열 받은 남자가 나를 다시 잡아 끌어내 호텔 방으로 부르기 전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는 졸렬한 인성이었다. 돈도 많으면서 졸부같은 심성이라니. 겨우 24시간 연락 두절 상태라고 사람을 끌고 와? 엄마는 갑자기 들이닥친 사람들 때문에 덜덜 떨었고, 끌려나가는 나를 거의 울다시피 하며 보냈다. 오밤중에 일어난 난리에 원룸에 사는 사람들이 전부 나와 차에 발버둥치며 올라타는 나를 구경했다. 이제 집에 고개 들고 들어가지도 못할 상황이 되었다. 나는 남자의 개념 없고 사정없는 행동에 욕을 했다.
“왜 그러셨어요.”
문제의 입 싼 비서가 나를 타일렀다. 이게 다 만취로 인사불성인 사람의 전화를 그대로 남자에게 옮긴 저놈 탓이다. 나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사장님이 화가 많이 나셨답니다.”
“……”
“직접 전화를 하시는데 안 받으면 싫어하세요. 들어가시면 꼭 잘못했다고 말씀드리세요.”
“예에.”
건성으로 대꾸하자 비서가 내 옆에서 후회할 텐데, 하고 중얼거렸다. 후회는 이미 휴대폰도 없이 심심한 24시간을 보냈던 거로 충분하다. 신발도 신지 못하고 납치당하는 바람에 부끄럽게 맨발로 호텔에 들어가야 했다. 얼굴이 익숙해진 호텔 직원은 맨발인 나를 보더니 방에서 신는 슬리퍼를 가져다주었다. 부직포로 된 슬리퍼를 신고 얼굴을 가린 채 질질 다리를 끌면서 남자가 기다리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 씻었는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고 있던 남자가 나를 보더니 턱짓으로 자신의 앞을 가리켰다. 오늘따라 책상 앞에 아닌 카우치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꼬았다.
“꿇어.”
지은 죄가 있으니 일단 얌전히 남자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남자는 자신의 발이 얼마나 예쁘고 각질관리가 잘 되었는지 보기라도 하라는 것처럼 맨발로 내 뺨을 눌렀다. 남자가 발에 힘을 줄 때마다 얼굴이 옆으로 휘청휘청 돌아갔다. 이런 파탄자 새끼. 나는 발바닥을 잡아 꺾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전화는?”
“물에 빠트렸어요.”
“물에 버린 게 아니고?”
귀신같은 새끼. 나는 얼굴을 굳히고 딱 잡아뗐다.
“맹세코 아닙니다.”
“뭘 걸고?”
“아버지요.”
냉큼 대답했다. 남자의 자상한 얼굴 한쪽이 꿈틀거린다. 친아버지든 남자든,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이면 나는 장기라도 대신 팔아 줄 수 있었다. 옆에서 비서가 들으라는 듯 크게 한숨을 쉬었다. 뻔뻔한 얼굴로 남자를 쳐다봤다.
“네 친부?”
“아뇨, 아버지요.”
“아하.”
남자가 웃더니 엄지발가락을 내 입에 처넣었다. 씨발, 더럽게! 기겁을 하고 뱉어낸 다음 침을 퉤퉤 뱉어냈다. 개새끼, 씨발. 무좀 있는 거 아니야? 오만 인상을 다 찡그리며 입을 벅벅 닦았다.
“이걸 배짱이 두둑하다고 해야 할지, 정신이 나갔다고 해야 할지.”
남자는 투덜거리면서 손을 내밀었다. 옆에서 상황을 죄다 보고 있던 비서가 남자에게 다가가 물수건을 건넸다. 남자는 병균이 옮기라도 한 사람처럼 내 침이 묻은 엄지발가락을 박박 닦았다.
“더럽게 무슨 짓이에요.”
“네 입에 들어간 내 발가락이 더 불쌍하겠지.”
“발이 더 더럽죠.”
“거짓말하는 네 입이 더 나빠.”
젖은 수건을 바닥에 던지며 남자가 입 밖으로 바람을 훅 불었다. 젖은 채로 내려와 있던 남자의 앞머리가 숨결에 흔들거렸다.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남자가 물었다.
“내가 왜 네 돌대가리를 참아주며 공부시킨다고 생각해?”
매끄러운 이마에 잠깐 시선이 팔렸다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아들 필요하다면서요. 덤으로 아내도.”
“세상에 똑똑한 놈들도 많을 텐데 왜 하필 너를 붙들고?”
그걸 내가 알면 이미 돗자리를 깔고 무당으로 개업했겠지. 사주팔자 도사 이런 거로. 아무 말 없이 남자의 흰 발등을 쳐다봤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공부 머리가 뛰어나진 않았다. 한 달이 넘게 공부했다. 토익점수도, 영어 회화 실력도, 각종 개념이나 이론도 여전히 제자리였고 형편없었다. 나한테 쏟아붓는 돈으로 복권을 샀으면 당첨이 됐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내가 쪽지시험을 칠 때마다 한숨을 쉬면서 분쇄기에 시험지를 그대로 갈아 넣었다. 거의 꼴도 보기 싫다는 태도였다. 저렇게 대할 거면 도대체 공부를 왜 시키는 거야?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집 주변 공원으로 달려나가 반항심으로 분노의 뜀박질을 했다.
그걸 어떻게 들었는지 남자는 시키지도 않은 운동을 한다고 나를 칭찬했다. 그 날은 공원을 두 바퀴나 돌았다.
“몰라요.”
“눈치가 좋아서야. 원래 가정불화가 심한 애들은 눈치가 빠르거든.”
“……”
“생존적인 부분에서 특히.”
지금 내 인생에 침 뱉나. 남자에게 욕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남자는 타이밍 좋게 내 입술을 손가락으로 꽉 잡아 비틀면서 한마디 더 했다.
“애정결핍도 심하고, 당장 빚 때문에 빠져나갈 구멍도 없고.”
그 말에 남자가 꼬집지 않아도 입이 다물렸다. 애정결핍은 인정한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울고 아빠가 사람 패는 걸 보면서 자랐는데 애정이 충분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너한테 잘 해줬잖아.”
그는 쉽게 나를 걷어찼고, 한심하고 모자란 뇌세포로 나를 사정없이 깎아내렸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일을 했을 때는 가감 없이 칭찬을 해주기도 했었다.
언제였지, 처음으로 남자가 시킨 숙제를 제대로 끝냈을 때다. 그는 활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른 남자의 손바닥이 뺨이며 머리카락을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었다. 친아버지가 어릴 때도 해주지 않던 사랑스러운 몸짓에 순간 정신이 몽롱해졌다. 한참 내 뺨을 매만지고 눈꺼풀이며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웃어주던 남자에게 살짝 풀어졌을지도 모른다. 열심히 하면 사랑받을 수 있지만, 기대치에 부응하지 않을 거란 단호한 분노가 섞여서.
남자가 내 입술에서 손을 떼고 부은 내 뺨을 살살 쓰다듬었다. 눈 아래도 짚어보고, 목과 귀 뒤를 짚으며 건강을 걱정하는 척 자상한 얼굴을 했다.
“나랑 있는 건 좀 적응했니?”
뜬금없는 질문에 잠깐 생각에 빠졌다. 짧은 시간이다. 인생을 크게 펼쳐보면 찰나였다. 하지만 나는 최근 한 달간 엄마보다 남자와 더 많이 대화를 나눴다. 아니, 시간 대부분을 남자와 남자가 시킨 일에 소요했다.
남자는 곱게 미친놈이었고 개새끼였지만… 나는 여전히 얼굴을 남자에게 내준 채로 망설이다 대답했다.
“……네.”
“후우.”
남자가 내 대답에 긴 숨을 내쉬고는 웃었다. 저 얼굴은 사탄보다는 천사에 가깝긴 했다. 그래서 내가 남자를 과소평가 한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좀 더 엄해져도 괜찮겠지.”
서슬 퍼런 눈동자가 웃으면서 내 뺨을 훑었다. 첫 만남처럼 서늘하고 차가운 손가락을 그제야 느꼈다.
“엄한 아빠가 되어야 애가 잘 크니까.”
씩 웃는 남자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이 남자가 첫 만남에 나와 엄마를 쥐새끼라고 서슴없이 불렀던 것을 기억했다.
호텔 방에 감금을 당했다. 의식주를 전부 방 안에서 해결했다. 남자가 일어날 때 같이 일어나고, 씻고 나오면 내가 씻으러 들어가고, 출근준비를 마친 남자와 식사를 한다. 남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빈틈없이 짜진 시간표를 내밀고 거기에 무조건 따르도록 명령했다. 엄마와 연락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발광했더니, 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휴대폰을 버린 게 누구지?”
“……”
“난 네 휴대폰을 뺏은 적이 없단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남자의 입에서 들으니 열이 받았다.
“그럼 내 보내주던가!”
“버릇이 없어서 그건 안 돼.”
내가 물건을 집어 던지고 난동을 부릴수록 억제는 더 심해졌다. 방에서 기물이 하나씩 파손될 때마다 남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나를 두들겨 팼다. 읽어야 할 책과 숙제를 산더미처럼 내줬다. 볼펜 한 자루만 던져주고 이면지에 책을 베껴 쓰게 한 뒤에는 내 등 위로 다리를 한 짝 얹고 통화를 하곤 했다. 그때는 진짜 목이라도 졸라버리고 싶었다.
“숙제는 왜 안 했니?”
“몰라서요.”
“선생 붙여줬잖아.”
“아시다시피 학습력이 떨어져서.”
퇴근하고 돌아온 남자는 내 말대답을 듣고는 이마를 짚었다. 팽팽한 신경전이 수명을 깎아 먹는 것 같았다. 엄한 아버지 좋아하시네. 남자는 그냥 자기 입맛대로 사람을 굴리고 싶은 성격 파탄자 그 이상도 이하고 아니었다. 남자가 손을 들어내 뺨을 때렸다. 머리가 울릴 정도로 강하게 따귀를 맞았다. 얼얼한 뺨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남자가 쓰다만 내 보고서를 반으로 찢으며 웃었다.
“정말 머리가 나쁜건지, 너무 좋아서 사람을 화나게 하는 건지 모르겠네.”
“……”
“정혜 씨가 매일 네 안부를 물어와.”
어김없이 엄마가 튀어나왔다. 남자는 최근 내 화를 돋우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감내할 수 있는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오늘은 네 끼니 걱정에 도시락을 보내왔더라. 주영이가 받아왔지. 감동적이지 않니, 아들 걱정에 도시락 싸주는 엄마라니.”
비서가 남자의 말에 재깍 도시락 하나를 내밀었다. 낡은 보온 도시락은 내가 고등학교 때 늘 들고 다니던 도시락이었다. 엄마가, 식당에 나간다고 힘든 와중에도 끼니 걱정에 싸주던. 엄마가 헌신적이라는 걸 도시락을 먹을 때마다 알았다.
추억이 뭔지, 모성애가 뭔지 모를 남자가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엄마답게 소박하고 무뚝뚝한 반찬이 들어 있었다.
“주영이한테 전화 걸어 이걸 가져다준 성의도 있고… 오늘 숙제만 잘했어도 주려고 했거든?”
남자는 내 턱을 붙잡고 귓가에 속삭였다. 진심이야. 다정한 목소리로 하는 서슬 퍼런 말들이 귓가에 저릿저릿하게 내리꽂혔다. 주먹을 쥔 손을 움찔했다. 남자는 순식간에 도시락통을 거꾸로 뒤집었다. 입안에서 비명이 터지기도 전에 바닥에 내용물이 떨어져 뒤섞였다. 슬리퍼를 신은 발로 음식을 꽉꽉 밟아 으깨면서 남자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건 전부 네 잘못이란다.”
“나쁜 새끼.”
“말이 험하네.”
그 자리에서 또 얻어맞았다. 저녁도 쫄쫄 거르고 두들겨 맞고, 도시락을 눈앞에서 엎어버리는 정신적 충격까지 겹쳐졌더니 마음이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다.
다음 날, 한쪽 구석에 엎어져 있다 눈을 떴다. 삭신이 쑤시는 몸을 이끌고 겨우 샤워를 하고 나왔다. 테이블 위에 아침 식사가 올라가 있었다. 입 한쪽을 빼뚜름하게 올려 웃으면서 테이블을 발로 걷어찼다. 옛날 같았으면 비싸서 건드리지도 못했을 테이블이 그대로 뒤로 엎어졌다. 위에 올려져 있던 음식이 죄다 쏟아져 내리고 접시가 깨졌다.
한 시간 뒤 식기를 치우러 온 직원이 내가 펼쳐둔 난장판을 보고 말없이 청소를 하고 나갔다. 점심시간에도 똑같았다. 이번엔 가져오는 즉시 테이블을 엎어버렸다. 물과 커피만 가끔 마셔가며 숙제로 내준 책과 서류들을 집어 묵묵히 공부만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비서가 찾아왔다.
호텔 방에 감금을 당하기 시작하면서 비서와 이야기할 기회가 조금 늘었다. 물론 엄마가 아직도 이 비서의 전화번호를 남자의 연락처라고 알고 있다는 재수 없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비서가 충고를 가장한 잔소리를 시작했다.
“식사는 하세요.”
“배가 안 고파서요.”
“큰일 나실 텐데.”
“감금, 폭행, 다음은 뭐, 사지 결박이라도 하시게?”
코웃음을 치면서 빈정거리자 비서가 사 왔던 도시락을 정리해 내 앞에 내려놓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싸워도 끼니를 챙겨가며 싸우는 게 좋다, 이런 말입니다.”
“고양이 쥐 걱정 대단히 해주시네요.”
손가락으로 도시락을 한쪽으로 쭉 밀어서 치우며 고개를 저었다.
“안 먹어요. 가져가세요.”
“사장님 성격을 아직도 모르시는군요.”
“대단히 미친놈이라는 건 알겠는데요.”
“그게 아니고…”
비서는 결국 말없이 방을 나갔다. 그 날 저녁, 입 싼 비서가 일러바쳤을 테니 분명히 남자가 오자마자 어디를 또 팰 거라고 각오하고 있었다. 전투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는데 사람 힘 빼는데 일가견이 있는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와 사람을 괴롭힐지 몰라 새벽까지 잠을 설쳤다.
생각해보면 늘 호텔에서 자는 것도 웃긴 일이지. 편한 마음으로 생각하기로 하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머리카락이라도 붙들려 강제로 입에 음식을 쑤셔 넣는 거 보단 나은 일 아니겠나. 개새끼. 사람 정성을 그렇게 눈앞에서 짓밟고. 남자에 대한 분노는 단식이 이어질수록 거세졌다. 말없이 다음 날 아침도 식사를 거부했다.
다섯 끼를 넘겼다.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도 지쳐서 멈출 무렵, 고대하며 기다리던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손목시계를 풀어 소파 한구석에 던져넣으며 남자가 뻐근한지 머리를 이리저리 풀었다. 제대로 패려고 그러나. 읽고 있던 책을 던지고 팔짱을 낀 채 남자를 노려봤다. 남자가 넥타이를 풀어 내리면서 의뭉스런 표정으로 웃었다.
“밥을 안 먹는다며?”
“네.”
“반항하는 거라고 생각해도 괜찮아?”
“마음껏 하세요.”
“좋아, 나도 강요할 생각은 없어. 처먹기 싫으면 먹지 마.”
단식은 금식이 되었다. 끼니마다 배달오던 음식이 발길을 끊었다. 불안감이 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냉장고에 차 있던 음식들이며 양주까지 전부 사라졌다. 마실 생수도 없어지는 바람에 수돗물을 마시면서 버텼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남자는 뱃가죽이 들러붙은 나를 보면서 식사를 했다.
남자의 입안으로 들어가는 음식을 볼 때마다 미칠 것 같았다. 음식은 또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콩나물 아삭거리는 소리에도 침이 나와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씨발, 음식을 줬으면 다 처먹어야지 남기는 건 또 오지게 많이 남겼다. 이인분은 될 만한 양을 혼자 먹다니. 재벌들은 다 배가 불러 터진게 분명하다.
굶기기 시작한 이후로 남자는 내게 숙제를 내주지도 않았다.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아침에 일어나면 사라졌고, 저녁에 오면 신나게 밥을 먹고 자기 볼일을 보다가 잠을 잤다. 나는 새벽 내내 남자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어 이를 박박 긁으며 열을 내다 잠들기를 반복했다. 입고 있던 바지 주머니에 서랍장까지 뒤집어 엎어가며 먹을 걸 찾았지만 쌀 한 톨도 없었다.
4일째 음식을 먹지 못하자 기운이 빠졌다. 화를 내는 것도 포기하고 잠만 잤다. 배가 고프니 공부를 할 기운도 없었다. 숙제를 내주지 않는 것에 감사해야 할 판국이었다. 종종 비서가 내 상태를 보러 방에 들렀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걸 보곤 조용히 나가기를 반복했다. 더러운 걸 극도로 싫어하는 남자 때문에 샤워를 하는 것 조차고 고역이었다. 배고파. 너무 배가 고프니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아들, 오늘도 잘 지냈어?”
밥을 굶기면서 뻔뻔스럽게 나를 아들이라고 부르는 남자가 돌아왔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있었다.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뭐, 이제 슬슬 한계일 테니까 신경 안 쓸 게.”
남자가 뭐라고 하든 들리지도 않았다.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배가 고프니 졸음이 쏟아지는 거로 육체가 생존권을 붙들고 있었다. 한숨이 짧게 들리더니 미약하게 단 냄새가 났다. 배고파… 뭐라도 맛이 느껴지는 거 먹고 싶어. 후각과 미각을 고문당하며 숨을 쉬었다. 굶주림은 꿈에서도 끈덕지게 나를 괴롭혔다.
입안으로 들어올 것 같던 음식이 사라지거나, 부서지거나, 더러워졌다. 더러워진 음식이라도 먹으려고 손을 뻗으면 꿈에서 깨는 게 일상다반사였다. 식사가 제한당한 사람이 이렇게 무력하구나. 우는 것도 배가 고파서 못 할 지경이었다. 사고가 뭉친 근육처럼 뻐근했다. 또다시 격렬한 허기짐에 잠에서 억지로 일으켜졌다.
몸이 아프니 정신이 몽롱한데 입술에 달콤한 것이 스며들어왔다. 무의식중에 혀를 내밀어 핥았다. 달았다. 늘 마시던 수돗물의 밍밍한 맛이 아니다. 달아. 오랜만에 혓바닥 안에 맛이 스며들자 눈도 뜨지 못하고 그것을 삼켰다. 초콜릿이었다. 입맛을 다셨다. 이번에는 조금 더 많이 들어왔다. 나는 입술에 힘을 주고 단 것을 허겁지겁 빨았다. 머리맡에서 남자가 짧게 혀를 차며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남자의 농간에 이미 당했다는 생각이 들다가 끊겼다. 이대로라면 정말 아사라도 할 것 같았다.
“그만, 그만.”
아이가 빨던 사탕을 빼앗는 것처럼 남자는 단호하게 나를 밀어냈다. 더 줘. 헐떡거리며 억지로 눈을 떴다. 어지러운 시야 속에서 남자가 자신의 검지와 중지를 수건에 닦고 있었다. 입안에 들어왔던 게 남자의 손가락이었나.
남자는 손가락에 묻은 내 타액을 꼼꼼하게 닦더니 옆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통을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열자 아까 먹었던 진한 초콜릿의 향기가 났다. 유명한 초콜릿 잼이었다. 하도 유명해서 샀었는데, 너무 달아서 한입 먹고 버렸던 기억이 있다. 그때 저걸 왜 버렸지? 과거의 내가 한심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남자가 침대 위로 올라와 내 앞에 딱 붙어 앉았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남자가 들고 있는 초콜릿 잼의 향기가 더욱 강해졌다. 셔츠를 입은 남자의 가슴팍을 뚫어져라 보며 입에 고인 침을 삼켰다.
내 눈앞에 진한 초콜릿을 들이밀며 남자가 물었다.
“줄까?”
“……”
안 먹는다고 딱 잘라 이야기 해야 하는데, 한 번 맛본 단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잠결에도 본능적으로 손가락이라도 핥았을 정도로. 잊었던 허기가 자극당하자 몸이 덜덜 떨렸다. 남자는 내 상태를 알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개운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통 안에 넣고 휘저었다. 끈적한 초콜릿이 손가락에 흠뻑 묻어나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내 입에 남자의 손가락이 들어와 있었다. 나는 정신병자처럼 초콜릿을 빨았다. 달았다. 배고파. 내가 중얼거리자 남자가 깨끗한 손으로 내 뺨과 눈을 쓸면서 웃었다.
남자가 통을 기울여 자신의 손을 적셨다. 시트 위로 초콜릿 잼이 뚝뚝 녹아내려 지저분해졌다. 단 냄새가 자욱했다. 입에서 끝없이 침이 샘솟았다. 나는 정성스러운 개처럼 남자의 손바닥을 핥았다. 남자가 내 목덜미를 개를 다룰 때처럼 간지럽혔다.
“맛있어?”
“으응.”
“진작 굶겨볼 걸 그랬나.”
남자가 손바닥을 내 얼굴에 치우며 혀를 찼다. 잘 먹던 음식을 뺏기니 갑자기 서러워졌다. 배고파. 입에서 문장이 나오기 시작하고 사고가 돌기 시작하니 서러워졌다.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초콜릿과 타액으로 더러워진 시트 위에 눈물을 쏟으면서 훌쩍거렸다. 정이소, 병신새끼. 더러운 놈.
자괴감에 빠져 얼굴을 가리고 우는데 남자가 내 입술 안으로 부드러운 조각을 밀어 넣었다. 본능적으로 입을 벌리고 뭔가를 씹었다. 부드러운 식빵이었다. 씹을 수 있는 것이 안에 들어오니 눈물을 흘리면서도 턱이 움직였다. 남자는 작게 찢은 식빵을 초콜릿에 적셔 내 입에 계속 넣어주었다. 나는 정말 모자란 등신처럼 울면서 남자가 주는 것을 있는 대로 받아먹었다.
평소라면 달아서 쳐다보지도 않았을 초콜릿인데. 그걸 핥아 먹기 위해 남자의 손가락을 기꺼이 입에 넣고 빨았다. 찰싹 매달려 혀로 흘러내린 초콜릿을 핥자 남자가 기분 좋은 숨소리를 냈다.
“하아, 이렇게 고분고분하면 좋을 텐데.”
안 들려. 안 들린다. 귀와 눈을 꼭꼭 막았다. 거친 식욕이 이성을 동강 낸 지 오래였다.
“이제 말 좀 들을 거야?”
“……”
“또 굶을래?”
남자의 말에 몸을 떨며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남자는 내 입술을 문지르며 뺨에 짧게 키스했다.
어. 낯선 감촉에 몸을 움츠린 채로 뺨을 경직시켰다. 남자는 킥 웃으면서 내 눈가와, 이마 위로 다시 짧게 립키스를 날렸다.
“내일 아침부터 제대로 먹고, 다시 공부해. 기대할게.”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욕구 중 하나를 빼앗겼다 되찾은 결과는 컸다. 나는 결국 남자의 말에 복종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자는 나에게 가장 큰 폭력 중 하나를 휘둘러 굴복시킨 것이다.
분해. 입술을 깨물고 다시 울기 시작했다. 남자는 그것마저 기껍다는 듯 지저분해진 내 얼굴과 뺨을 닦아주었다. 품 안에 나를 끌어안고 다독거렸다. 입술에서 재잘거리는 말들은 달콤하고 끝이 없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눈물로 짓무른 얼굴을 매만질 때마다 남자가 느끼는 기쁨과 쾌감이 전해진다.
변태 새끼, 개새끼. 속으로 욕을 하면서 울다 정신을 잃었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남자는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아침을 먹으라는 시늉을 했다. 아무 말 없이 앉아 숟가락을 들고 죽을 한 입 떠먹었다. 내가 제대로 음식을 삼키는 걸 보던 남자는 사랑스럽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방을 나섰다.
나와 남자 중 누가 우위에 있는지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남자와의 관계에 적응해 풀어진 건 나였다. 반성한다. 죽을 삼키며 나는 다짐했다. 어젯밤, 개처럼 헐떡거리며 핥았던 초콜릿만큼. 딱 그만큼 돌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