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_01 파파라치 (10/13)

외전_01 파파라치

줄리안은 눈을 번쩍 떴다. 

뒤에 클로드가 달라붙어 있는 게 느껴졌다. 줄리안은 픽 웃었다. 눈을 뜨면 늘 이런 상태였다. 클로드의 팔을 베고, 그의 팔에 허리를 붙잡힌 채 누워 있고는 했다. 다리와 다리가 얽혀 있어 감촉이 야했다.

줄리안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클로드를 마주 보았다. 줄리안이 몸을 움직이자 클로드가 가늘게 눈을 뜨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오수를 즐기던 짐승이 방해를 받으면 이런 얼굴일까. 가늘어진 청회색 달을 보며 가만히 있자 클로드는 다시 눈을 감았다. 곧 그는 새근새근 잠들었다.

줄리안은 조심스럽게 팔을 뻗었다. 사이드테이블에 숨겨두었던 휴대전화를 꺼내 설정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워드를 외웠다. 줄리안의 손끝에서 생겨난 빛이 적당히 클로드의 얼굴을 비췄다. 줄리안은 찰칵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자판을 쳤다. 4월 27일, 아침. 그리고 워드를 외워 사진을 잠갔다. 그러고서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어디 가.”

클로드가 그를 붙잡으며 물었다. 잠에 취해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샤워하러요.”

“하지 마.”

클로드가 주섬주섬 줄리안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반쯤은 끌어당기고 반쯤은 파고드는 클로드를 내려다보며 줄리안이 작게 웃었다.

“새 아침이 밝았으니 씻어야죠.”

“네 냄새가 지워져, 씻지 마. 내가 어제 씻겼어.”

섹스를 한 뒤에 줄리안은 대체로 쓰러지듯 잠들기 때문에 뒤처리를 하는 것은 언제나 클로드의 몫이 되었다. 아니, 사실은 섹스를 한 뒤가 아니라 종종 중간에 잠들어버리고는 했다. 클로드는 끈질겼고 줄리안은 체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생기는 참사였다. 그리고 일어나보면 언제나 이 상태였다. 클로드는 늘 줄리안을 뒤에서 안았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눈을 뜨면 언제나 둘은 나체였고 똑같은 자세였다.

“그래도 씻어야죠.”

“왜? 씻지 말고 좀 더 같이 누워 있어.”

클로드가 줄리안의 목에 이마를 비볐다.

줄리안은 클로드의 머리를 안고 도닥였다.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주자 클로드가 다시 잠에 빠졌다. 사실 클로드는 잘 때 푹 자는 타입이었다. 웬만한 일로는 깨지 않는 그가 잠에서 깰 때는, 주로 줄리안이 그의 품을 벗어나려 할 때였다. 그 외에는 자신을 찍을 때도 정신없이 잠들고는 했다.

“잘 자요.”

“싫은데…….”

잘 자는 게 싫은 게 아니라 줄리안이 자신의 품을 빠져나가는 게 싫다는 뜻이었다. 클로드는 싫은데, 싫은데, 라고 중얼거리면서 다시 잠들었다.

한 번 이렇게 달래면 두 번은 깨지 않는 클로드였기에 줄리안은 이번에야말로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줄리안은 발소리를 내지 않고 욕실로 향했다. 오늘은 다행히도 따뜻한 물이 제법 잘 나왔다. 봄이라 날씨가 풀려서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해도 괜찮긴 했지만 이왕이면 따뜻한 물이 좋았다. 오랜만에 따뜻한 물을 펑펑 써서 샤워를 마친 줄리안은 머리를 대충 말리고는 목욕 가운을 입은 차림으로 욕실을 나왔다. 그리고 조용히 옷장을 열어 옷을 빼내고 살금살금 갈아입은 뒤 침실을 나섰다.

“안녕하세요, 줄리안.”

미리 기다리고 있던 참모들이 일제히 줄리안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줄리안이 그들을 지나쳐 문 앞에 서자 기다리고 있던 경호원이 물었다.

“아침 산책 가시나요?”

“네.”

줄리안은 한쪽 어깨를 돌리며 대답했다. 어제 섹스를 할 때 체위가 나빴는지 어깨가 조금 쑤셨다.

하긴, 내 몸은 안 쑤시는 데가 없지.

섹스라는 게 하다 보면 익숙해진다는데 줄리안은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그도 남자이니만큼 섹스를 하다 나가떨어지는 것보다는 클로드와 끝까지 어울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클로드는 줄리안이 이를 악물고 버티면 매우 좋아하며 평소보다 더 하는 것 같았다. 결국 결말은 똑같았다. 줄리안은 잠들고, 클로드는 그런 줄리안을 데리고 자기 좋을 만큼 하다 깨끗하게 씻기고 뒤처리를 해서 품에 넣고 자고는 했다. 결과, 줄리안은 늘 일찍 일어났고 클로드는 그보다 늦게 일어나게 되었다.

“오늘은 저와 마틴이 모시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경호원들과 함께 줄리안은 호텔 정원으로 나갔다. 한참을 걷자 호텔 담 너머가 보이는 언덕에 도착했다.

줄리안은 호텔 정원에 서서 멀리 펼쳐지는 대지를 바라보았다. 끝없는 대지는 어디까지 뻗어 있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초록 풀이 군데군데 나고 있는 황량한 곳. 멀리 아이들이 보였다. 아이들은 줄리안이 보이자 손을 흔들었다. 줄리안도 씩 웃으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마법사인 줄리안은 희미하게 죽음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이곳은 국경 지대였다. 지금은 조용하지만 한때는 격전지 중의 격전지였다고 들었다. 클로드도 여기서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겼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황무지에는 마이너스 기운이 가득했다.

멀리서 군용 차량들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차들은 드넓은 황야를 오가며 뭔가를 하고 있었다. 좀 더 멀리 막사들이 보였다.

‘호텔은 장성급만 머뭅니다. 저희도 호텔 생활을 하고 있지만 저희야 각하의 참모들이라 업무 차원에서 특별히 머무는 것이고요, 대부분은 막사에서 생활합니다. 그래도 이곳의 막사들은 다른 곳에 비하면 괜찮은 편입니다. 오래도록 머물렀기 때문에 기지도 안정되어 있고 물자도 나름대로 풍족합니다.’

제이미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줄리안은 멀리 있는 막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각하께서도 전쟁이 끝났으니 여기 머무르시지, 한창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는 기지에 계셨습니다. 늘 기지에서 작전을 짜고 훈련을 감독하셨죠.’

클로드는 저기에 있었다. 황량한 대지에 있는 기지 안에서 그는 늘 생활했을 것이다. 줄리안은 기지 주변을 바라보았다. 매일 보는데도 새로웠다.

“수도에만 계셨다고 하셨죠.”

경호원인 마틴이 말을 걸었다.

“네.”

“그럼 이런 풍경은 새로우시겠군요.”

“네, 텔레비전에서는 많이 봤지만 실제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지요.”

“수도로 돌아가고 싶으시겠어요.”

마틴의 말에 줄리안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멀리 보이는 기지와, 그 기지 뒤로 펼쳐져 있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줄리안은 지평선을 본 적이 없었다. 거대한 수도에서 살아온 줄리안에게 하늘은 늘 머리 위에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눈앞에서 땅과 만나는 하늘을 보는 것은 매번 신기했다.

아니요, 줄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도 좋아요.”

줄리안의 말에 마틴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 당장에라도 돌아가고 싶은데요.”

마틴의 말에 줄리안이 피식 웃었다. 안됐네요, 라고 말하는 줄리안의 목소리가 보드라웠다.

줄리안이 국경 지대에 클로드와 같이 오게 된 것은 3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약혼을 하게 되면서 클로드의 집에서 동거하게 된 줄리안은 매일매일을 바쁘고 보람차게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줄리안이 클로드의 머리를 손질해주는 것을 보며 제이미가 한마디 했다. 그는 요즘 좀 곤란해지고 있었다. 클로드의 미모가 너무 눈부셔서 주변에서 정신 못 차리는 것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전하께서도 대공 전하이시니 주변의 눈을 좀 살피시는 게 좋지요.”

하지만 줄리안은 여상하게 말하며 머리 손질을 계속했다. 무난한 대답이었지만 그 말에서는 머리 손질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제이미는 클로드의 머리칼이 사르르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혀를 찼다. 아, 이렇게 잘생겨져봐야 도움이 안 되는데. 가뜩이나 쓸데없이 잘생긴 상관이었다. 예전부터 종종 상관을 처음 만난 사람들이 잠시 말을 잃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는 일이 있었다. 그것도 귀찮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사람들이 말을 잃는 정도가 아니라 영혼을 잃는 것 같은 표정으로 오랫동안 클로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니, 뭐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미남이시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요.”

지나치게 미남이지.

종종 클로드의 영혼을 보지 못하고 껍데기만 본 것들이 간을 비대하게 키우고 클로드를 어떻게 해볼까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놈들이 예전엔 열 명 중 하나였다면 이제는 열 명 중 다섯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엄청난 숫자의 라이벌이 양산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줄리안은 장인 정신을 발휘해 클로드의 머리를 매만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제이미는 마음이 답답해졌다.

“금붕어 똥, 줄리안 내버려둬.”

눈을 감은 채 줄리안의 손길을 음미하고 있던 클로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애인이 머리를 만져줘서 기분이 좋은데 부하라는 놈이 자꾸 초 치고 있었다. 클로드가 날파리를 쫓듯 손을 내저으며 하는 말에 제이미가 “예” 하고 탐탁잖은 대답을 하며 물러났다.

제이미가 침실을 나오자 다른 참모가 물었다.

“오늘도 꽃단장 중?”

“어.”

“아, 별로 안 좋은데. 병신 같은 놈들이 자꾸 전하가 마음도 꽃단장하신 줄 알잖아.”

“내 말이.”

제이미가 얼굴을 구겼다.

요즘 클로드는 왕궁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왕궁의 보안을 대대적으로 점검하고 싶어하는 왕은 그 일을 클로드가 해주길 원했다. 왕은 아무도 믿지 못했지만 그나마 믿는 상대가 있다면 바로 동생인 클로드였다. 말이 동생이지, 사실 둘은 법적으로는 형제가 아니었다. 종교적으로 형제였을 뿐이다. 그래도 왕은 언제나 클로드를 동생으로 대했고 클로드는 왕족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왕은 그런 동생에게 자신의 안전을 체크해달라 요청하고 있는 것이었다.

클로드는 왕명을 받아서 궁의 보안을 점검했다. 수십 명의 경비병과 시종과 시녀가 징계 해고되었고 정직이나 감봉 처분을 받은 자들도 부지기수였다. 왕궁을 일상적으로 엿보고 있는 해커 몇몇도 잡아넣었다.

그러는 사이 왕궁 내에서는 클로드를 노리는 사람들이 생겼다. 미혼인데다 유능하고 아름다운 대공에게 접근하려는 사람들이 반이었고, 클로드의 외모나 기타 등등에 빠진 사람이 반이었다. 욕망의 사다리를 타려는 사람과 사랑의 포로가 된 사람들이 뒤섞여 클로드의 주변을 흐리고 있었다.

클로드는 대체로 눈치 있고 재빠른 타입이었지만 누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혹은 좋아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무심한 구석이 있었다. 아무래도 좋을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일이 생겼다.

웬 시녀 하나와 클로드가 모퉁이에서 부딪친 것이다. 앗 하고 시녀가 귀엽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가려 했다. 그 순간 클로드는 반사적으로 시녀를 붙잡았다.

“조심해요.”

클로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시녀를 붙잡아 세워준 뒤 다치지 않았는지 흘끔 확인하고는 다시 자리를 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참모들은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시녀의 얼굴이 홍조를 띠었지만 클로드는 그녀의 얼굴 따위는 보지도 않은 채 성큼성큼 걸었다.

“각하, 아까 그 시녀 말인데요.”

“시녀? 아까 그 어설프게 달려든 걔?”

서류를 보면서 클로드가 되물었다.

오, 알고 계셨구나.

참모들은 의외라는 얼굴로 클로드를 내려다보았다. 원래 이런 걸 알아챌 사람이 아니었는데 웬일이지 싶었다.

“소매치기인 줄 알았어. 요즘 궁은 그런 게 유행인가 보지? 모퉁이에서 부딪치고 괜히 차 쏟고 이러는 거.”

클로드가 여상하게 말하며 다시 시선을 서류로 돌렸다. 아, 시발, 뭐 이렇게 많아. 그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고 참모들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제이미 블레서에게로 모였다. 어떻게 좀 해봐. 그런 시선들에 밀려 제이미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내가 왜 상관의 연애까지 신경을 써야 하나.

제이미의 속이 뭉개졌다. 상관은 애인과 질풍노도의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자신은 싱글이었다. 이 상관의 곁에 낮이고 밤이고 붙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연애를 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런 자신이 왜 상관의 연애 및 사생활에 이렇게 깊게 개입해야 하는가.

어쩔 수 없지.

클로드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는 부관이지, 베이비시터가 아닙니다’라고 딱 잘랐을 일이었다. 그러나 클로드가 대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클로드는 평생 전장에 있었던지라 입이 험했고 말을 고르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직설적이었다. 그런 상관이 왕궁에 있으니 제이미는 늘 위가 지끈거렸다. 뭘 잘못해서 미움을 사고 문제가 생길지 알 수가 없었다. 미연에 방지해야 했다. 제이미는 상관을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각하.”

책상에 앉아 있던 클로드가 제이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런 게 유행일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제이미의 말에 클로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유행일 수도 있지, 왜? 불륜도 유행하는 곳인데 뭔들 못 하겠어.”

클로드의 머릿속에서는 아마 불륜은 천륜을 저버리는 수준의 범죄인 모양이다. 제이미는 답답해졌다.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은가. 당신이 요즘 겪고 계시는 수난―누군가와 부딪치는 것, 누군가가 차를 쏟는 것, 누군가가 전화를 잘못 거는 것, 누군가가 방에 잘못 뛰어드는 것 등등―이 사실은 유혹의 일종입니다, 라는 말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제이미가 입을 달싹거렸다. 그때 해밀턴이 참견했다.

“각하, 그 유행에 대해서 줄리안에게 물어보는 건 어떻습니까? 일에 좀 방해되고 그러니 줄리안이라면 좋은 해결책을 알려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너 이 새끼 천재구나!

제이미가 뒤로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보였다. 클로드가 해밀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줄리안에게 오늘은 누구랑 부딪쳤고 누가 나한테 차를 쏟았다는 이야기를 하라고?”

클로드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해밀턴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줄리안에게 왜 하느냐는 얼굴이었다.

“전 합니다.”

해밀턴이 말하고 덧붙였다.

“저희 부부가 얼마나 잉꼬부부인지는 아시죠, 각하? 원래 부부 생활이란 그렇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해야 잘 돌아가는 겁니다. 멀리 떨어지더라도 늘 이야기를 해서 화제를 공유하는 것이 스킬이죠.”

“안 떨어질 거니까 됐어.”

“그래도 한 번 물어나 보세요. 여기서 왕궁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사실 줄리안밖에 없잖습니까. 우리야 전쟁의 프로들이지 왕궁에는 아예 문외한이니까요.”

해밀턴이 묘하게 그럴싸한 말로 대화를 끝냈다.

퇴근한 클로드는 줄리안과 함께 두서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주로 줄리안이 물었고 클로드는 대답했다. 줄리안은 많은 것을 물었다. 오늘의 업무가 무엇이었느냐는 것부터 과거사까지. 어릴 때 공부는 어떻게 했느냐, 좋아하는 놀이는 무엇이었느냐, 싫어하는 음식이 있느냐, 알레르기는 혹시 없느냐. 줄리안은 세심했고 클로드는 줄리안의 질문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었다. 줄리안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워서 눈을 감은 채 그 목소리에 대답하는 것이 좋았다. 그러다 눈을 뜨면 줄리안의 얼굴이 보였다. 가뜩이나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얼굴인데 각도가 이러면 더욱 예뻤다. 눈이 마주치면 클로드는 줄리안을 끌어당겼고 그렇게 키스가 시작되었다.

물론 키스는 늘 키스에서 끝나지 않았다.

줄리안의 무릎에서 단숨에 일어난 클로드는 그를 자신의 아래로 눕혔다. 순식간이었고, 줄리안은 멍하니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소파에 누운 줄리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밀어내려 했다.

“흣, 잠깐, 잠깐만…….”

줄리안이 사정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위를 점령하고 그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대었다.

“응, 나도 잠깐, 만…… 아, 달아. 뭐 먹었어?”

“아이스크, 흣.”

혀를 넣어 치열을 훑자 그것만으로도 줄리안이 몸을 움찔거렸다. 아, 야해. 클로드는 속으로 사납게 웃었다. 눈이 시리도록 하얀 셔츠를 입은 줄리안은 벌써 떨고 있었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배에 힘이 들어간 게 느껴졌다. 혀를 빨아주자 없는 복근이 그나마 잡혔다. 손을 더 위로 올려서 가슴을 확인했다. 벌써 가슴도 도톰하게 올라와 있었다.

키스를 하며 가슴을 애무했다. 살금살금 애무하자 줄리안이 가슴을 조금씩 내밀었다. 제대로 잡히지도 않는 납작한 가슴을 한껏 쥐어주자 줄리안이 목 안쪽을 울렸다. 그르릉거리는 게 마치 동물 같았다. 그게 좋아서 클로드는 줄리안의 혀를 잔뜩 빨아주었다. 혀를 끌고 와 깨물어주자 줄리안이 히익, 울었다.

“나, 젤 사 왔어.”

클로드는 이미 정신이 나간 듯한 줄리안에게 속삭였다. 키스 때문에 정신을 놓고 있던 줄리안의 눈이 천천히 움직였다. 눈이 풀려서 평소와는 약간 다른 모습. 이런 모습을 본 사람이 자신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클로드는 기분이 좋아졌다. 클로드가 줄리안의 턱을 가볍게 깨물었다. 줄리안이 또 흣 하고 신음을 삼켰다.

“어제 젤이 없어서 울었잖아, 너.”

줄리안은 이미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 눈으로 클로드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자신의 탓이라는 듯이 구는 클로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제 젤이 떨어졌다. 그럼 그만해야 할 텐데 클로드는 오랜만에 젤 없이 하자며 더 불타올랐다. 뒤가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빨리고 쑤셔진 다음 클로드의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안쪽이 뻐근하다 못해 아플 지경이 될 때까지 몰아붙여졌다. 평소보다 이르게 줄리안은 뻗어버렸고 그 이후로 클로드가 무엇을 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오늘 사 왔지.”

클로드가 젤을 보여줬으나 줄리안에게는 그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열이 올라서 벌써 눈이 뻐근했다. 하나 확실한 건 자신이 본 적 없는 물건이라는 것뿐이었다.

“어, 언제?”

온라인 구매도 아니고 직접 사 오다니. 이미 온라인으로 주문을 해놓은 줄리안은 클로드의 손에 들린 젤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클로드가 줄리안의 유두를 비틀었다. 제법 세게 비틀려서 줄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프, 흣! 흐으읏! 잠깐만, 아!”

“왕궁에도 약국이 있더라고.”

왕궁 약국에서 젤을 사 왔다고?

줄리안이 눈을 크게 뜬 순간 클로드가 젤의 뚜껑을 이로 잡아 뜯어 열었다. 그가 젤 튜브의 뒷면에 쓰인 깨알 같은 글씨를 읽어 내렸다. 그러더니 표정이 묘해졌다. 응? 이런 얼굴이라 줄리안은 순간 불길한 기분이 들어 손을 뻗었다.

“어허, 있어봐.”

클로드가 다시 주의 사항을 읽기 시작했다. 클로드의 손가락이 재차 가슴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줄리안이 그 손을 주먹으로 때렸지만 소용없었다. 게다가 손에서 자꾸 힘이 빠졌다. 클로드의 손은 그의 몸을 샅샅이 알고 있었다. 교묘하게 줄리안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꼬집고 잡아당겼다. 히잇. 흣, 하읏. 줄리안은 신음을 삼키려고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아 이상한 소리로 헐떡거렸다.

“전하, 흣, 이상한 젤이죠, 그거?”

왕궁 약국에서 파는 젤이 제대로 된 것일 리가 없다.

왕궁 약국은 왕궁에서 일하는 수많은 스태프들을 위한 곳이다. 물론 양호실이 따로 있지만 양호실에 요청할 수 없는 물건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여성용품이 그렇고, 남자들도 콘돔이나 무좀약 같은 걸 양호실에서 받을 수는 없으니까.

약국은 처음에는 평범했다고 하던데 가면 갈수록 기묘한 물건들을 팔기 시작했다. 불륜 귀족들과 그 귀족들에게 물들어 자유연애를 외치는 시종, 시녀들에게 비싼데다 한정품인 성인용품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떼돈을 벌어 빌딩을 세웠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 약국에서 사 온 젤이라고?

줄리안은 다시 손을 뻗었지만 클로드의 애무에 허리를 떨며 거뒀다. 소파를 잡으며 헐떡거리는데 클로드가 갑자기 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줄리안.”

“……부, 불안하게 쳐다, 흣, 보지 마시고…….”

“오늘은.”

음, 클로드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줄리안이 손으로 클로드의 손을 잡았다. 아무래도 너무 불안했다. 그러나 늘 그렇듯 클로드는 줄리안의 힘에 밀리지 않았다. 줄리안의 손을 매단 채로 그의 가슴을 어루만지던 클로드가 갑자기 줄리안의 셔츠를 양쪽으로 벌렸다. 단추가 날아가는 것을 보며 줄리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클로드가 줄리안의 뺨을 길게 핥으며 상냥하게 속삭였다.

“줄리안, 오늘은 운동 좀 하자. 내가 잘해줄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개소리임은 확실하다. 줄리안이 클로드를 밀어냈다. 어라, 클로드가 잠시 밀려났다. 줄리안이 소파를 박차고 뛰어나가려는 순간 클로드가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클로드의 손이 줄리안의 뒤통수를 받쳤다. 그리고 숨결이 삼켜졌다. 혀가 얽혔다. 줄리안은 클로드의 팔을 잡은 채 그 키스를 받았다. 몸 안에 있는 살덩이들이란 어쩌면 이렇게 뜨겁게 젖어 있는 것일까. 어질어질한 머리로 그렇게 생각했을 때 갑자기 가슴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그리고 다시 소파에 눕혀졌다.

“뭐 하시는 겁니까?”

“음, 잠깐만.”

클로드가 줄리안의 가슴 위로 젤을 죽 짜냈다.

“뭘 바르고 계신 거예요? 하지 마세요. 하지, 어……?”

가슴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줄리안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장미색 젤이 그의 유두를 덮고 있었다. 그리고 클로드의 희고 단정한 손이 그 젤을 펴 발랐다. 줄리안이 손을 뻗었다. 클로드의 손에서 젤을 빼앗으려 했지만 손가락 끝만 아슬아슬하게 닿았을 뿐이었다. 클로드가 줄리안을 피하며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클로드의 몸이 줄리안의 위로 올라왔다. 잘생긴 얼굴이 화사하게 웃고 있었지만 줄리안은 속지 않았다. 섹스에 있어서만은 클로드만큼 못 믿을 남자가 없었다.

“이게, 뭐예요? 무슨 젤이에요?”

“그냥 젤.”

“주의 사항에 뭐라고 쓰여 있기에 그렇게 여러 번 읽으셨어요?”

“음, 어디 보자. ……본 젤은 성교를 위한 보조 물품입니다. 보다 쉬운 성교를 위해 다소의 최음제가.”

“미쳤습니까?!”

줄리안이 비명을 질렀다. 최음제라니, 예전에 미약을 먹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이미 그의 위를 점령하고 있는 클로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줄리안이 자신의 다리를 밀어내려 하는 것을 보며 클로드는 그냥 웃었다. 줄리안의 힘은 참 약했고, 클로드는 종종 줄리안이 자신을 밀어내고 때리는 걸 보며 즐기고는 했다. 되게 귀엽다니까. 줄리안이 알면 환장할 생각을 하며 클로드는 줄리안이 밀어내는 것을 버티고 있었다.

줄리안의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남들은 잘 모르지만 줄리안의 눈썹은 우아한 모양이었다. 그 눈썹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아, 온다. 손가락 끝이 욱신거리네. 아, 존나 야한데. 네 구멍이 막 무는 것 같아. 줄리안, 너는 어때?”

어떻겠냐, 이 나쁜 놈아!

줄리안은 입술을 깨물고 클로드를 노려보았다. 가슴이 간질거리다 못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손이 가려는 것을 꾹 참고 눈을 감고 있자니 클로드의 손가락이 갑자기 줄리안의 가슴을 눌렀다. 그 순간 날카로운 쾌감에 머리끝까지 찔렸다. 힉. 줄리안이 숨을 삼키자 클로드가 작게 웃었다.

“시발, 야해 죽겠어. 줄리안, 너 얼굴 너무 야하다고. 알고 있어?”

“몰, 흣, 하지 마, 하앗, 아, 하지 마, 흣, 응, 흐읏, 아!”

클로드가 제멋대로 가슴을 꼬집고 쥐어짰다. 줄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엉망으로 머리를 흔들자 머리칼에 얼굴이 가려졌다. 클로드가 젤이 묻지 않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싫어…….”

가슴이 뜨거웠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줄리안은 고개를 마구 움직였다. 가죽 소파에 얼굴을 비볐다. 마구잡이로 비비며 정신을 차려보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가슴이 예민하게 곤두선 게 느껴졌다. 공기가 닿는 것조차 괴로웠다. 줄리안은 이를 악물고 참아보려 했다. 신음하는 것이 싫었다.

반대쪽 가슴에 축축한 것이 닿았다. 클로드의 혀가 유두를 짓누르고 핥았다. 줄리안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손바닥의 두툼한 부분을 물었다. 그래도 힛, 흐윽 하는 소리가 새어나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느 게 좋아, 응?”

클로드가 물을 때 가슴에서 숨결이 아른거렸다. 그게 미칠 것 같아서 줄리안은 몸을 비틀었다. 좋기는 개뿔이! 고함을 지르고 싶어서 입을 열었더니 신음성이 터졌다.

“좋, 하으읏!”

“좋구나. 아, 바짝 섰네. 아래도 섰어?”

“정말, 흣, 이번에야말로, 죽여, 버릴.”

줄리안이 이를 갈았다. 가슴이 이상했다. 뜨겁고 욱신거리면서도 간질간질했다. 클로드가 손을 멈출 때마다 빨리 만지라고 애원하고 싶은 걸 참고 있었다. 클로드가 반대쪽 유두를 깨물면 그 머리채를 잡아 젤이 묻어 있는 쪽으로 끌고 오고 싶었다. 제발, 제발 좀 어떻게 해봐. 빌고 싶었다.

하하, 클로드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청회색 눈동자가 반짝이는 게 얄미워 미칠 것 같았다. 줄리안은 억울해서, 그리고 몸이 들떠서 눈물이 고였다.

“넌 늘 죽여주는걸. 존나 새삼스러운 말씀을.”

클로드가 젤이 묻지 않은 손으로 줄리안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다리 좀 벌려볼래, 라고 클로드가 속삭였다. 줄리안은 발로 클로드를 후려차려 했지만 발목만 잡히고 말았다. 그 상태로 한계까지 벌려졌다.

“완전 젖었네, 응?”

클로드가 고개를 숙여 줄리안의 가랑이에 입술을 눌렀다. 바지가 젖어서 입술에 닿는 감촉이 나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줄리안이 흥분한 증거였다. 음. 클로드는 잠시 젖은 부분을 내려다보다 피식 웃었다. 여유로운 척하고 있었지만 이미 그의 아래도 부풀 대로 부풀어 있었다. 속옷이 거추장스러울 정도였다. 빨리 벗고서 뒹굴고 싶었다. 줄리안의 손등에 파랗게 핏줄이 선 것을 보자 더 마음이 동했다.

클로드는 줄리안을 들어 올렸다. 클로드의 어깨에 매달려 침대로 향하게 된 줄리안이 분을 참지 못하고 클로드의 등을 후려쳤다.

“아, 귀엽게 굴긴.”

클로드는 키들거렸다. 아프기는커녕 아래만 더 서고 있었다. 줄리안의 희게 질린 손등이 자신의 등을 때렸을 거라고 생각하자 아래가 더 근질거렸다.

침대에 내려놓자 줄리안이 흐윽 하고 신음했다. 시트가 출렁거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모양이었다. 윗옷을 벗어 던진 클로드가 다시 줄리안의 위로 올라갔다. 줄리안이 그를 노려보았다.

클로드는 줄리안을 보며 웃었다. 줄리안에게는 미안하게도, 그는 줄리안이 분통을 터뜨리거나 자신을 노려볼 때 등골이 오싹했다. 섹시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감정을 터뜨릴 때 서지 않을 놈이 몇이나 될까. 그런 놈이 있다면 그놈은 변태이다. 클로드는 다분히 자기 위주의 생각을 하며 줄리안의 바지를 벗겼다. 매일 하다 보니 옷을 벗기는 게 손에 익어서 클로드는 자신의 옷을 벗는 만큼이나 빨리 줄리안의 옷을 벗기고는 했다.

“하, 시발. 어떡하지. 어떡할까…….”

클로드가 중얼거렸다. 줄리안은 이게 미쳤나 하는 눈으로 클로드를 올려다보았다. 미친 것까지는 아니어도 확실히 제정신은 아닌 것처럼 보이는 클로드였다. 눈이 마주치자 클로드가 웃었다. 제 입술을 스스로 깨물면서 클로드가 줄리안의 머리부터 발까지 죽 훑었다. 줄리안은 양주먹을 불끈 쥐며 욱신거리는 가슴을 모른 체하려 애썼다.

“줄리안.”

클로드가 불러서 줄리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눈이 좋았다. 반짝거릴 때도 좋았고 눈물이 고여 흐릴 때도 좋았다. 하늘을 보는 것처럼 다채로운 눈동자였다. 지금은 잔뜩 흐려져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눈.

입술도 좋았다. 키스를 하면 금세 붓는 입술. 도톰해져서 눈물과 타액으로 젖고는 했다. 오물거리면서 뭔가를 씹을 때도 귀여웠다.

몸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인간 최음제였다. 나신을 볼 때면, 아니, 옷을 입은 뒷모습만 봐도 종종 아래가 부풀었다. 야했다. 제스처 하나하나가 허공에 미약을 뿌리는 것 같았다.

“이제부터 할 거, 다 미안.”

줄리안의 눈이 커졌다. 클로드는 싱긋 웃었다. 온 이성을 쥐어짜 내 담백한 미소를 지어 보았지만 별 효과는 없었던 듯 줄리안의 눈이 더 흐려졌다.

클로드가 줄리안을 뒤집었다. 줄리안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기어갔다. 뒤집히다니, 이 뒤에 벌어질 일이 뭔지 뻔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기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클로드의 팔에 붙잡히고 말았다.

클로드는 재빨랐다. 줄리안의 허리를 한 팔로 감싸고 위로 올리더니 배 밑에 베개를 끼워 넣었다. 엉덩이가 높이 들렸다. 줄리안이 몸을 움직일 틈도 없이 아래에 무언가가 쑤셔 박혔다. 그것이 젤 튜브의 주둥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배 속에 차가운 액체가 들어차면서였다.

히이이잇. 줄리안이 비명을 지르며 등을 둥글게 말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갑던 것이 곧 뜨거워졌다. 분명 점성이 있는 젤의 느낌이었는데 어느새 뜨거운 물이 되고 있었다. 줄리안은 놀라서 뒤를 오므렸다. 흘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오므리고 있자니 안쪽에서 정체 모를 물이 펄펄 끓었다. 엄청난 자극이었다. 온 내벽이 다 데는 것 같은데 수치심에 힘을 풀 수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엉덩이를 맞았다. 아픔보다 짝, 소리에 놀라서 줄리안은 힘을 풀고 말았다.

“줄, 내가 급해.”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은 줄리안의 엉덩이를 마구잡이로 주물렀다. 벌어졌다가 오므라들면서 안쪽에서 물이 계속 새어나왔다. 질질 흐르는 물 때문에 줄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안쪽이 미칠 것같이 뜨겁고 간지러웠다. 클로드가 박아줬으면 했다. 퍽, 퍽, 때려줬으면 했다. 그러지 않으면 좋아지지 않을 것 같았다. 온몸이 차가워졌다 뜨거워지기를 반복했다.

유두를 괴롭혀져서 위도 아래도 바짝 세운 줄리안이 분한 눈으로 노려보기까지 하자 이미 클로드는 한계였다. 개처럼 엉덩이만 든 자세로 허우적거리는 것 또한 일품이었다. 줄리안은 그 와중에 자극받은 가슴을 침대 시트에 문지르고 있었다. 자신은 모르는 듯했지만 클로드에게는 똑똑히 보였다. 엉덩잇살을 벌리자 개폐를 반복하고 있는 곳이 보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투명한 물이 줄줄 샜다.

“하, 흣, 하지 마요…….”

줄리안이 중얼거렸다. 하지 마, 보지 마. 헐떡거리면서, 말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새는 발음으로 줄리안이 말했다. 앞도 뒤도, 위도 아래도, 전부 질질 새고 있었다. 자극이 너무 심한지 평소보다 더 엉망이었다. 울다 못해 기어서 도망가려는 줄리안은 몹시 꼴렸다. 클로드는 지나친 자극에 머릿속 한쪽이 엉망이 되는 것을 느끼며 줄리안의 구멍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매일 보는 곳이었는데 질리지 않는 걸 보면 자신도 어지간하다 싶었다.

아니, 사실 질리기는커녕 볼 때마다 머리가 끓어올랐다. 용암이 부어진 것처럼 이성이라는 게 남아나질 않았다. 뇌가 모두 녹고 정욕만이 펄펄 끓었다.

“어떡하냐.”

클로드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는 정말 줄리안을 걱정하고 있었다.

“너 이렇게 예뻐서 어떡하냐.”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도 유분수지.

“시발, 이건 다 네 탓이야.”

그리고 클로드는 자신을 유혹하고 미치게 만드는 인간 최음제에게 단숨에 박아 넣었다.

줄리안이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등을 뒤로 휘었다. 그 바람에 줄리안의 몸이 조금 앞으로 튕겨 나갔는데 클로드는 그마저도 참지 못하겠는지 그를 잡아당겼다. 끝까지 박혔다고 생각했는데 안쪽의 내벽을 가르며 클로드가 조금 더 들어왔다. 달궈진 안쪽에는 그 조금도 자극이 대단했다. 줄리안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때 클로드의 손이 줄리안의 잇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물어.”

그 순간 줄리안은 망설이지 않고 콱 물어버렸다. 아프거나 말거나 알 바 아니었다. 지금 당장 미칠 것 같은데 클로드의 손이 아프든 말든 그게 뭐가 중요한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클로드가 허리를 빼는 듯하더니 더 거칠게 치고 들어왔다.

“아주 살을 물어뜯네, 응? 위도 아래도 거칠어.”

클로드가 헐떡였다. 그가 귓불을 빨아서 줄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안이 뜨거워서 미칠 것 같았다. 열이 지나치게 올라서 눈이 뻐근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게 멍한데 피부 위의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다.

“그러니까 나도 좀 거칠게 할게, 괜찮지? 너도, 날 물어뜯고 있으니까. 응?”

제멋대로 말하며 클로드가 퍽퍽 박기 시작했다. 줄리안은 결국 클로드의 손을 놓쳤다. 입술이 벌어지자마자 비명이 튀어나왔다.

“하지, 마! 아아! 아, 흣! 싫, 싫어! 그냥, 아, 제발, 그냥 해! 하라고!”

“흣, 야하네. 응? 안에 해줘? 싸줘? 그럴까?”

“해줘! 아, 아아, 거기, 거기에 해줘! 제발, 좀, 그냥, 해! 흐아, 아, 아아아―.”

줄리안의 내부가 클로드에 의해 무너지고 있었다. 클로드도, 줄리안도 분명하게 느꼈다. 한 사람은 미친 것처럼 파고들었고 다른 한 사람은 미칠 것 같은 감각 속에서 파고드는 것을 품었다. 어느 쪽이 먼저 절정에 올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클로드는 줄리안을 뒤에서 꽉 끌어안았고, 줄리안은 시트를 움켜쥔 채 벌벌 떨었다. 절정은 소리 없이 빠르게 다가와서 터졌고,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게 되는 세상을 선사하고 수그러들었다.

줄리안의 등에 몸을 기댄 채 클로드가 가볍게 숨을 헐떡이다 몸을 일으켰다. 줄리안의 등뼈가 보이자 클로드는 그곳에 입을 맞췄다. 조금씩 내려가던 입술이 꼬리뼈에 닿았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때까지도 줄리안은 자세를 바꾸지 못한 채 헐떡이고만 있었다.

클로드가 줄리안에게서 몸을 빼내었다. 흥분한 나머지 부어 있던 내벽을 거칠게 쓸면서 나간 통에 줄리안이 다시 한 번 작게 비명을 질렀다.

클로드가 줄리안을 똑바로 눕혔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한 줄리안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작게 뺨과 입술에 입 맞춘 클로드가 그에게 속삭였다.

“최음 성분이 있기는 해도 별거 아닌가 본데? 예전에 너 미약 먹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약해.”

클로드의 손이 줄리안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줄리안이 그 손을 잡아 내렸다.

“괜찮지? 별거 아니었, 읏.”

그리고 줄리안은 클로드의 손을 콱 깨물었다. 부지불식간에 당한 클로드가 눈살을 찌푸렸을 때 줄리안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클로드의 옆에 굴러다니던 젤 튜브를 잡더니 클로드의 성기 위로 남은 걸 몽땅 짜냈다. 

“별거인지 아닌지 한 번 당해보세요.”

흥, 줄리안이 눕더니 휙 등을 돌렸다. 그런 그의 뒷모습과 자신의 성기를 번갈아 보던 클로드가 고개를 가볍게 모로 기울였다. 성기에서 열감과 욱신거림이 느껴지자 클로드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는 천천히 줄리안에게 다가가 뒤에서부터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신의 중심부를 줄리안의 엉덩이 골에 비볐다.

“줄, 자기야, 있잖아.”

클로드가 아주 다정해서 위험한 흑심이 듬뿍 묻어나는 목소리로 줄리안을 불렀다. 줄리안이 움찔 몸을 떨자 그의 목소리는 더 사근사근해졌다.

“이렇게 되면 누가 책임을 져야 하게?”

줄리안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또로록, 소리가 날 것처럼. 그게 참 귀여워서 클로드는 작게 웃었다. 얼마나 귀여웠느냐 하면 당장에라도 박고 싶어질 정도였다. 줄리안은 그제야 제 실수를 알아챘는지 흘끔 욕실에 시선을 주었다.

“……수건에 물이라도 묻혀 올…….”

클로드가 줄리안을 바로 눕혔다. 줄리안이 버둥거렸지만 힘으로는 역시 클로드를 당할 수가 없었다. 클로드가 가증스럽게도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금발이 사르르 흘러내려 클로드의 얼굴을 반절쯤 가렸다. 반절만 드러난 얼굴이 교활해 보이는 것은 줄리안의 착각일까, 아니면 얼굴이 반절 가려졌기 때문인가.

“네 몸에 묻히고 난 책임을 졌어. 그렇지?”

“…….”

“이제 네가 책임을 져줄 차례야.”

……엄마, 절 왜 멍청이로 낳으셨어요…….

줄리안은 똑똑하게 낳아주신 어머니를 모함했다. 클로드의 눈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어보았다. 그러자 클로드가 생긋 웃었다. 정말 예쁜 웃음이었다.

“괜찮아. 다리만 벌리고 있어.”

줄리안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줄리안은 정말이지 깨고 싶지 않았다. 그냥 죽은 듯이 자고 싶었다.

짐승의 것을 단 사람은 사람인가, 짐승인가.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일 것이다. 얼굴은 껍데기와 연이 깊고 가랑이는 영혼과 연이 깊다. 분명 거시기는 영혼의 짐승이 얼마나 크고 야만적인지를 드러내는 표식일 것이다.

……난 짐승과 약혼했어…….

줄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이 부서지도록 아팠다. 다리만 벌리고 있으라는 말은 뻥이었다. 그럴 줄 알고는 있었지만 그 정도일 줄이야. 클로드는 여러 체위로 줄리안을 건드렸다. 그리고 끊임없이 사기를 쳤다. 내벽에 젤을 바르고도 한 번의 절정 뒤에는 흥분이 가라앉은 줄리안이었다. 그런 줄리안을 앞에 두고 내벽과 성기는 약효가 다르다는 둥, 자신은 아직도 배고프다는 둥, 헛소리를 해대며 허리를 들이밀었다.

줄리안이 쓰러지려고 할 때마다 책임져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자신을 자극했냐고 닦달하는 통에 정신을 붙잡고 또 붙잡았지만 결국 한계가 다가왔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일어나니 지금 이 순간이었다.

영원히 잠들고 싶다. 줄리안은 그 바람 하나로 다시 눈을 감았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탓에 몸이 좀 미끄러진다 싶었다. 따뜻한 것이 좋네, 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읏, 차. 빠진다, 빠져.”

클로드가 줄리안을 잡아주며 중얼거렸다. 빠져? 뭘? 줄리안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이 따뜻한 물속에 있다는 걸 깨닫고 미간을 좁혔다. 여기가 어디야? 고개를 돌리자 욕실 천장이 보였다.

“전하?”

줄리안이 뒤를 돌아보자 클로드가 보였다. 젖은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뺨에 붙어 있는 상태로 나른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잘 잤어?”

클로드는 당연한 듯이 줄리안의 입술에 제 입술을 대었다. 입술이 열리고 혀가 들어와 안쪽을 쓸었다. 다정하게 도닥거리는 듯한 움직임으로 혀는 입안을 한 번 유영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전하께서는요?”

“아, 좀 졸았어.”

“졸리시면 굳이 욕조까지 쓰실 필요는.”

“깰 때라서 쓴 거야. 곧 7시거든.”

줄리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7시라면 아침 7시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7시.”

“……주무시긴 하신 거죠?”

“당연히 못 잤지.”

밤새도록 해서 지금 깨려고 욕조에 앉아 있다는 이야기였다. 줄리안은 어이가 없어 그를 바라보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그의 등에 누워버렸다.

“정말 성기에만 최음 성분이 남다른 젤이었나 보네요…….”

“그럴 리가.”

새삼스럽다는 어조로 돌아온 대꾸에 줄리안은 헤식은 미소를 지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찰랑, 찰랑. 어깨가 따뜻해졌다. 클로드가 손으로 물을 떠 줄리안의 어깨에 뿌리고 있었다. 마음에도 따뜻한 물이 찰랑거렸다. 아까 섹스를 할 때는 죽여버리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또 사랑스러운 마음이 가득했다. 이런 게 연애이고 이런 게 사랑인가. 줄리안은 천천히 머리를 옆으로 숙였다. 욕조의 턱에 올린 클로드의 팔을 베고 눈을 감자 물러간 줄 알았던 잠이 다시 쏟아졌다. 줄리안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을 때였다. 클로드가 줄리안의 목에 입 맞추며 중얼거렸다.

“아, 물어볼 게 있는데.”

“……네…….”

“요즘 자꾸 나한테 차를 쏟는 사람들이 있는데 유행인 걸까?”

잠에 반쯤 가라앉아 있던 탓에 머릿속으로 내용이 들어오는 게 좀 늦었다. 줄리안은 가늘게 눈을 떴다. 방금 뭐라고?

“예……?”

“자꾸 나한테 차를 쏟는 애들이 있어. 모퉁이에서 기다리다 부딪치고……. 하는 짓을 보면 딱 소매치기인데 왕궁 시녀나 시종들이 소매치기를 할 리 없잖아. 실제로 없어진 물건도 없고.”

내 애인에게 누군가가 찝쩍거린다는 것보다 지금 클로드의 발언이 더 놀라웠다. 줄리안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지만 다행히도 클로드는 그의 뒤에 있어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소매치기…… 말입니까?”

어떻게 생각이 그쪽으로 튀냐. 클로드는 종종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 같았다. 줄리안이 피식 웃었을 때 클로드가 줄리안의 목을 입술로 더듬으며 말했다.

“그래. 난 거의 당한 적 없지만 다들 당하면서 살거든.”

“다들?”

“국경 지대에는 소매치기가 많아. 대부분 어린애들인데……, 먹고살려면 뭐라도 해야 하는 게 현실이니까.”

줄리안은 눈을 내리깔았다.

조금 전에 자신이 누구를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라고 했던가.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줄리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클로드가 작게 웃으며 뺨을 비볐다.

“거기는 거기, 여기는 여기. 신경 쓰지 마, 줄. 그렇게 신경 쓰는 거 아니야.”

“…….”

“거기에 대해 모르는 네가 마음이 무거워질 필요는 없어. 네 마음만 무거워지는 거고, 네가 생각하는 그곳은 실제의 그곳과는 어차피 다를 거거든.”

“그건 그러네요.”

줄리안이 가볍게 혀를 찼다. 자신은 그곳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클로드는 좋게 말해주었지만 사실 자신이 그곳 현실에 대해 멋대로 생각하며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헛짓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줄리안은 한 번 혀를 차는 것으로 무거운 마음을 털어내고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사람들이 차를 쏟는 게 유행이냐고 물어보셨죠?”

“응.”

“소매치기는 아닙니다. 그건 확실해요.”

“나도 소매치기라고 생각 안 했다니까.”

“모퉁이에서 부딪친 뒤 상대가 꼭 품으로 떨어지진 않나요?”

“……어떻게 알았어?”

마법학을 배웠다더니 점도 치나. 클로드가 줄리안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며 물었다. 신기하다는 듯 감탄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줄리안은 수면 위를 톡톡 두드렸다.

그래, 내가 행복에 젖어 잊고 있었는데 내 애인은 내가 지켜야 하는 곳이었지.

왕궁 파티가 소규모로 자주 열리긴 하지만 클로드는 그런 곳에 일절 가지 않았고 그래서 줄리안은 방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방심할 일이 아니었다. 클로드는 엄청난 미남에 부자인데다 대공일뿐더러 미혼이었다. 신분 상승의 밧줄 중 왕, 아니, 황제급이었다. 다른 밧줄이 그냥 밧줄이라면 이건 금을 녹여 만든 밧줄이었다. 그래, 밧줄을 타고 오르지는 못하더라도 금박이라도 긁어 가겠다는 애들이 나오는 게 당연하지.

어떡할까…….

줄리안의 눈동자가 도록도록 움직였다. 25년 만에 처음 사귀게 된 애인이며 약혼자였다. 전직 가십 하이에나였던 줄리안은 클로드의 스펙과 몸값을 유추하고 그의 앞길에 펼쳐질 유혹의 산이 얼마나 높고 클지 예상해보았다. 하늘 아래 태산 수준이다.

클로드를 못 믿는 게 아니다. 그의 눈에서, 행동에서, 손길 하나하나에서 줄리안은 그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줄리안도 결국 귀족 가문 태생이었고, 가진 것을 지키고 이어나가기 위한 교육을 철저하게 받아온 몸이었다. 내 배우자를 누가 건드리려고 한다, 그럼 싸우는 것이 바로 귀족의 철칙이다.

“역시 유행 같은 건가?”

클로드가 물었다. 줄리안은 고개를 들어 클로드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마주하자 클로드가 습관처럼 미소를 지었다. 가끔 (주로 섹스 때) 사람을 분통 터지게 만드는 남자지만 젖은 채 나른하게 풀린 얼굴은 정말이지 관능적이고 아름다웠다. 줄리안은 그 얼굴에 대고 말해주었다.

“유혹하는 거예요.”

“……유혹?”

밤새도록 거친 운동 끝에 몸이 이완되고 있는 클로드가 노곤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전하와 자고 싶은 거죠.”

흐응. 클로드는 작게 비웃었다. 줄리안은 그가 이렇게 나올 줄 예상했었으므로 같이 웃을 수 있었다. 섹스를 할 때 클로드는 미친 사람처럼 섹스에 매진했지만 섹스의 대상이 한 명을 초과한다는 것에는 매우 거부감을 갖는 사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데, 왜 내가 다른 사람과 몸을 섞어야 해? 다른 사람의 체액을 먹어야 한다니, 대체 왜. 반대의 경우도 그래.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체액을 먹고 받아들이고 그리고 내 체액도 그 몸에 넣는 거야? 둘 다 더럽고 역겨워.’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왕립 아카데미를 다니고 왕궁에서 일한 줄리안에게는 아주 신선한 발언이었다.

어쨌거나 이 정도로 극렬한 불륜포비아인 걸 보면 그가 쉽게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임은 분명했다. 세상에서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해보자면 클로드는 아마 바람 따위는 피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해서 공격에 방어를 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줄리안은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하와 부딪쳤을 때 잡아주면 같이 자겠다는 뜻이 되는 거예요, 전하.”

클로드의 웃음이 확 사라졌다. 그가 잠이 깼다는 얼굴로 “뭐?” 하고 되물었다. 줄리안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해주었다.

“차를 엎었을 때 괜찮으냐면서 상대를 닦아주기라도 하면 상대는 같이 자겠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거예요.”

“뭐?!”

클로드가 몸을 확 일으켰다. 욕조에서 물보라가 일었다. 줄리안은 싱그럽게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설마 그러신 건 아니죠?”

클로드의 눈이 흠칫 굳었다. 당연히 그랬겠지. 그는 무심하게 상대를 잡아주고 신경 쓰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매너가 좋은 남자였으니까.

자, 거짓말을 하려나 아니면 솔직하게 사과를,

“이런 시발 연놈들이…….”

예상은 빗나갔다. 줄리안의 생각과는 달리 클로드가 이를 갈기 시작했다.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런 짓을…….”

어, 어라?

줄리안은 당황했다. 그가 예상했던 것은 이런 반응이 아니었다. 숨기거나 미안해할 줄 알았는데 화를 낼 줄이야.

쉽게 얘기한 것과는 달리 클로드는 크게 화가 났다. 그는 줄리안에게 “미안해. 내가 몰랐어. 다시는 그렇게 받아주지 않겠어”라고 말했다. 거의 사지로 가는 기사가 배우자에게 살아 돌아오겠다 맹세하는 수준의 엄숙한 목소리였다. 아, 아니, 그럴 것까지는. 줄리안이 입을 달싹거렸다. 그래도 사람이 부딪쳐서 넘어지려고 하면 적당히 잡아주거나 피하거나 해야 하고, 차를 쏟았다고 목을 자를 수는 없는 건데, 클로드의 기세가 너무 흉흉해서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날 아침, 줄리안은 평소처럼 클로드의 옷을 골라주고 머리도 매만져주면서 그를 달래보려 했다.

“그게 반드시 성적인 어필은 아니거든요…….”

“그럼 뭔데?”

“연애에 대한 어필, 같은 거랄까.”

생각보다는 순수한 종류일 수도 있어요. 무엇보다 너에게 잘 보이겠다고 한 일이지 널 엿 먹이고자 한 일은 아닐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클로드가 눈을 부라렸다.

“미친 연놈들이 쥐약을 퍼먹었나. 내가 너와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산다는 걸 아는 새끼들이, 심지어 네 전 직장 동료라는 시발 것들이 날 꼬드겨? 그것도 나 모르게?”

모른 건 네 잘못인 것 같…….

“걸리기만 해봐. 네가 예쁘고 착해서 다른 새끼들이 널 우습게 보는 모양인데 내 앞에서 절대로 그렇게 못 해. 한 놈만 걸리라고 해. 다신 내 그림자와도 닿고 싶지 않게 만들어줄 테니까.”

줄리안이 클로드의 머리를 만지는 사이 클로드의 옆에 서 있던 제이미가 줄리안에게 눈을 부라렸다.

이게 뭡니까? 이게 뭐예요! 왜 우리 각하를 미친놈으로 만듭니까?!

줄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온 얼굴로 해명했다.

안 그랬어요! 나도 왜 이렇게 되었는지 진짜 몰라요.

정말 모르겠다. 그냥 장난 좀 친 것이었는데 이렇게나 클로드가 화를 낼 줄이야. 그는 거의 사기를 당한 사람처럼 굴고 있었고 줄리안은 곤란해졌다. 그는 클로드를 더욱 반짝반짝하게 만들었다. 자꾸 가려고 하는 클로드를 붙잡아 앉히고 계속 그 피부며 머리며 옷을 가꿨다. 그러면서 살금살금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 거예요”라며 그를 달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클로드가 줄리안의 머리채를 잡아 자신의 앞으로 끌고 왔다.

“그냥 로맨틱한 시작을 해보자는 의도…….”

줄리안은 순순하게 끌려오면서도 우물거리다 클로드의 화가 난 눈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클로드가 물었다. 차가운 말투에 줄리안은 어깨를 움츠렸다. 클로드는 입에 욕을 달고 살긴 했어도 줄리안에게 차가운 적은 별로 없었다. 처음에는 차가웠었는데. 어느새 다정한 클로드에게 익숙해져서 차가운 그가 낯설었다.

“아, 시발, 화내자는 게 아니고.”

줄리안이 어깨를 굳히는 걸 보면서 클로드가 중얼거렸다. 너한테 뭐라 하겠다는 게 아니라, 라고 덧붙인 그가 잠시 입술을 씹다가 말했다.

“그 새끼들이 나한테 작업 건 거라며.”

“……그, 그렇죠…….”

“그런데 왜 네가 그 새끼들의 변호를 해주고 있어? 넌 화를 내야 정상 아니야?”

“아니, 공정을 기하려고요. 제가 말을 좀 잘못 전달한 것 같―.”

“나한테 자자고, 연애하자고 하는 연놈들이 있어. 당연히 넌 날 관리해야지, 왜 그것들 이미지를 관리해주고 있어?”

딱히 이미지 관리는 아닌데.

줄리안이 잘못 비튼 일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는 말을 못하고 어물거리자 클로드가 짜증 난다는 듯이 줄리안을 밀었다. 엉겁결에 밀린 줄리안은 클로드와 벌어진 거리를 보며 눈을 미친 듯이 깜빡였다.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클로드는 줄리안을 달랠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줄리안을 달래기엔 그도 기분이 많이 상해 있었다.

“너한테 연애하자는 놈 있으면 난 목을 따버릴 거야.”

“…….”

“해밀턴은 부부끼리 이야기를 많이 해야 사이가 좋아진다고 하지만 난 반대야. 너한테 자자고 연애하자고 하는 새끼가 있고 놈을 살리고 싶다면 나한테 말하지 마. 난 놈에게 지옥을 보여줄 거니까.”

줄리안이 뭐라고 하든 죽여놓을 것이다. 줄리안 일리드. 아, 시발, 성이 일리드인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줄리안 스토메어에게 집적대면 인생이 어떻게 꼬이는지 확실하게 보여줄 것이다.

줄리안도 그랬으면 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본다면 그 눈알을 뽑고 싶을 정도로 자신을 좋아해줬으면 했다. 그러나 줄리안은 공정을 기하려 했다. 줄리안의 약혼자인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공정’이라니. 클로드는 죽어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화나신 거, 정말 아니에요?”

“…….”

“클로드.”

평소에는 전하라고 부르면서 이럴 때만 클로드지.

클로드는 혀를 찼다. 줄리안은 가만히 서 있었다. 인종을 알 수 없는 얼굴이 말갛고 어여뻤다. 이 와중에 어여쁘다고 생각해버리는 자신에게 어이가 없어서 클로드는 하― 실소했다.

“클로드.”

줄리안이 한 번 더 불렀다. 참 비싼 이름이었다. 이렇게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야 불리는 이름이라니.

“화난 게 아니라 실망했어.”

클로드는 줄리안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파랗게 타오르는 눈을 보며 줄리안은 숨을 멈췄다.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다녀올게.”

클로드는 줄리안의 시선을 외면하며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줄리안은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 정신을 차렸다.

―실망했어.

그렇게 말하는 클로드의 얼굴이 차가웠다.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어젯밤에도 그렇게 둘이 몸을 섞어댔는데 지금 이토록 낯설다니. 고작 오해일 뿐이다. 설명을 하면 곧 풀릴 만한 작은 오해에 이런 참담한 기분이 들다니. 이런 게 연애라고 생각하자 좀 무서워졌다. 클로드와 일행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줄리안은 멍하니 서 있었다.

클로드는 진심으로 실망했다.

실망했다는 말을 내뱉은 자신에게 실망하다 못해 돌로 쳐 죽이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 순간 참을 수 없이 그 소리가 나왔고 줄리안이 가만히 숨죽이는 것을 본 순간 자신에게 욕이 나왔다. 개 같은 소리였다. 거기서 그렇게 실망했다고 말하는 건 반칙이었다.

클로드는 물론 실망했다. 줄리안이 자신에게 독점욕을 부리지 않는 것에 열을 받고 실망했다. 그러나 줄리안 자체에게 실망한 건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줄리안 일리드는 클로드를 위해 태어난 마돈나였다. 아, 물론 첫눈에 반할 그런 이상형은 아니었었다. 사실 줄리안은 클로드의 취향(이라고 해봐야 매우 추상적이고 뜬구름 잡는 수준의 것이었지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어느새 그는 클로드의 취향이 되었다. 줄리안이 클로드의 취향이 된 것이 아니라 클로드의 취향이 줄리안에게 요모조모 맞춰졌다. 그래서 이제 줄리안은 클로드의 유일무이한 취향이 되었다. 줄리안보다 피부가 더 흰 사람도, 어두운 사람도 싫었고 줄리안보다 더 키가 크거나 작은 사람도 싫었다. 줄리안의 머리색과 똑같은 다갈색. 고동색도, 검정색도, 적갈색도 싫었다. 눈은 반드시 줄리안처럼 따뜻한 고동색이어야 했고 반짝거려야 했다. 줄리안 일리드는 클로드 스토메어의 단 하나뿐인 이상형이었으니 그에게 실망한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클로드는 그저 감정의 온도차에 실망했을 뿐이었다. 그러니 그 순간 줄리안을 똑바로 보며 실망했다고 말하는 건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다.

전화를 해볼까.

그래도 줄리안이 충격을 받은 듯 숨을 멈춘 순간 클로드는 작은 희열을 느꼈다. 그가 상처 입었다는 것이 자신을 좋아하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난 왜 이렇게 애새끼처럼 굴고 있지.

쯧, 클로드가 혀를 찼을 때 운명의 모퉁이가 다가왔다. 그리고 그 모퉁이 뒤에는 오늘의 첫 희생자 게일 유스(27, 시종 2년차)가 숨어 있었다. 그가 숨어 있는 줄도 모르고 클로드는 모퉁이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전화를 해서……, 데이트라도 하자고 할까. 식사를,

클로드가 줄리안에게 전화를 걸어 뭐라고 할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있을 때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또냐.

제이미 블레서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 다들 진부하지?

다른 방법도 많을 텐데 왜 이렇게 진부하고 웃긴 방식으로 자신을 어필하지?

제이미는 몰랐지만 궁 안에서의 대시가 진부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진부한 것은 그만큼 확실한 어필이 된다. 나는 널 노리고 있다, 그런 쪽으로 너를 보고 있다는 확실한 의미가 되기 때문에 굳이 이런 방식을 택하는 것이다. 물론 대책 없이 로맨틱한 이유는 왕궁의 로맨스는 본래 책임은 요만큼도 지지 않은 채 낭만만이 가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모르는 제이미의 눈에 이런 방식은 드라마에서도 나오지 않겠다 싶은 것이었다.

그때 드라마에서도 나오지 않을 장면이 또 하나 펼쳐졌다. 클로드가 모퉁이에서 나온 시종을 피한 것이다. 시종이 어, 어 하고 휘청거리며 앞으로 고꾸라지는 찰나에 클로드가 그의 뒤통수를 잡아 확 밀어버렸다. 시종은 허우적댈 틈도 없이 바닥에 처박혔다. 클로드가 그 처참한 모습에 대고 경고했다.

“다시 한 번 이따위 수작 부리면 죽여버린다.”

얼굴을 바닥에 박은 시종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움찔거리기만 했다. 클로드가 서릿발 같은 시선을 시종의 뒤통수에 보낸 뒤 다시 움직였다. 제이미는 클로드의 뒤에서 그를 따라 걸으며 시종을 흘끔 보았다. 잘못 박은 것 같진 않은데……. 뒤에서 걷던 참모 하나가 먼저 가라고 손짓해 보였다. 제이미는 눈짓으로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고 클로드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그날 여러 명의 희생자가 속출했다. 차를 쏟으러 온 시종은 클로드에게 다리를 차여 제 몸에 차를 쏟아야 했다. 그리고 욕을 먹었다. 단추가 헐렁한 것 같아 달아드리러 왔다며 다가온 시녀는 시력이 엉망인 것 같으니 해고당하기 싫으면 시력 검사 제대로 해 오라는 소리나 듣고 쫓겨났다.

오전 중 세 명이 그렇게 사라진 이래 클로드의 주변에는 갑자기 사람이 뚝 끊겼다. 늦은 오후쯤 되자 시녀와 시종들이 클로드를 노골적으로 피하기 시작했다. 이건 이거대로 안 좋은데. 제이미는 곤란해졌다.

“각하, 좀 적당히…….”

너무 악감정을 살 만한 대응인 것 같다고 여긴 제이미가 한마디 하려고 했을 때 서류를 보고 있던 클로드가 말했다.

“시종장, 궁내부 장관. 고위 인사들 건 왜 없어?”

“……거기까지 가시게요?”

대충 피라미나 잡자는 거 아니셨습니까, 라는 얼굴로 제이미가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클로드가 픽 웃었다. 장난하냐는 듯이.

“싹 뒤져 와. 특히 세컨드, 애새끼, 애새끼 친구들. 놓치지 마.”

냉랭한 목소리에 제이미가 태블릿에 휘갈기며 대답했다.

“예.”

“그리고 괜찮은 레스토랑 하나 예약해.”

“예, 각하. 어느 분과 만나시려 하십니까? 스케줄 먼저 잡겠습니다.”

클로드가 본격적으로 잡아낼 줄은 몰랐다. 제이미는 빠른 속도로 펜을 놀리며 속으로 혀를 찼다. 왕궁의 고위 인사들과 척지는 건 별로 좋지 않은데. 하지만 클로드는 정치적인 부분은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제이미 자신이라도 신경을 써야 할 텐데, 그라고 잘 아는 것도 아니었다. 군대 정치는 알지만 왕궁은 제이미에게도 신세계였다. 아는 바가 없으니 모든 것이 조심스러운데, 클로드는 여기서도 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니 소시민인 제이미는 자꾸 심장이 덜컹거렸다.

줄리안에게 상담을 해보는 것이 좋을까?

제이미는 고민했다. 시종이었던데다 귀족 가문 출신인 줄리안이니 최소한 그나 클로드보다는 아는 것이 많을 테다. 한 번 이야기를 해보는 게…….

아니, 아니지. 오늘의 이 참사를 보라고. 줄리안은 도움이 되지 않아.

“줄.”

클로드의 말에 줄리안은 도움이 안 돼, 라고 한 번 더 생각하며 글씨를 쓰던 제이미가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줄리안이요?”

“그래, 줄리안. 왜?”

“……업무상 석찬이 아닌 겁니까?”

“전혀 아닌데.”

퇴근해서까지 업무라니, 내가 왜?

클로드가 코웃음 쳤다. 아니었구나. 데이트 약속이었구나. 데이트할 때 만날 레스토랑을 잡으라고 하신 거구나. 심지어 ‘괜찮은’이라고만 하신 걸 보니 알아서 체크하고 예약하라고 하시는 거구나…….

시발, 포상금. 너 이 새끼, 언제쯤 내 품에 안겨줄 거냐. 네가 제일 개새끼야.

후,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을 인질로 잡은 악당의 꼭두각시가 된 기분으로 “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자 클로드가 다시 일에 빠져들었다.

줄리안과 식사를 하려면 일에 박차를 가해야 했다.

사실 클로드는 최근에 굉장히 바빴다. 왕궁의 보안을 점검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왕궁은 말이 왕궁이지 하나의 도시와 다를 바가 없었고 엄청난 사람들이 관계되어 있었다. 그들을 하나하나 추적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클로드에게는 여전히 일상적인 업무들이 할당되어 있었다. 그는 국경 지대의 총 관리자였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감독할 책임이 있었다.

차 안에서까지 일에 빠지는 클로드를 보며 제이미는 태블릿으로 업무 스케줄을 확인했다. 묘하게 밀리네. 마감이 있는 일들을 먼저 앞당겨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예, 제이미 블레서입니다.”

‘제이미, 해밀턴인데요.’

“응.”

제이미는 무심하게 대답하며 손을 움직였다. 어제의 스케줄과 오늘의 스케줄을 확인하며 반나절씩 밀린 일을 어떻게 수정할지 고심하는데 해밀턴이 말했다.

‘미행이 붙었습니다.’

제이미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클로드의 일행은 차 세 대로 이동하고 있었다. 클로드가 포함된 A팀은 리무진을 타지만 나머지 사람들로 구성된 B팀과 C팀은 SUV를 사용한다. 그리고 바로 뒤에는 SUV가 바짝 다가와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해밀턴이 오른쪽을 가리켰다. 제이미가 시선을 돌린 곳에서는 소형차 한 대가 B팀의 SUV와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해밀턴이 손가락을 세 개 펴 보였다. 제이미는 바로 손을 뻗어 리무진 내 전화기를 들었다. 운전석과의 직통 전화였다.

“달릴 준비 해.”

‘……예?’

“미행이 붙었다. 액셀 밟을 준비해.”

‘아, 예! 알겠습니다, 중령님.’

미행이 붙었다는 말에 클로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전시도 아니고 여긴 수도인데 미행이 왜 붙어? 뭐 하는 놈들이 미행을 하고 있는 거지? 클로드가 제이미에게 시선을 주었다. 무슨 일이냐는 눈이라 제이미가 고개를 저었다. 그도 아는 바가 없었다.

제이미가 뒤차의 조수석에 앉은 해밀턴에게 수신호를 보내자 그가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그리고 그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가 다시 3을 만들어 보였다.

“3. 2. 1!”

제이미의 카운트다운에 맞춰 차가 앞으로 급하게 쏠렸다. 끼이이이익―. 그리고 뒤쪽에서 C팀의 SUV가 B팀의 SUV를 스치고 나오며 소형차를 압박하더니 그 앞을 막았다.

리무진은 엄청난 속도로 현장에서 멀어졌다.

“누구래?”

“아직 연락 안 왔습니다.”

“뭐 하는 새끼들이기에 저렇게 조그만 차로 사람을 미행해?”

미행의 기본이 안 되어 있잖아?

클로드의 말에 제이미가 그러게 말입니다, 라고 말하며 이미 보이지 않는 현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행이라고 말하기에도 뭐한, 그냥 쫓아오는 수준이었다. 너무나 미행 같지 않아서 미행인지도 몰랐다.

뭐, 그렇게 유심히 보지도 않았다. A팀의 업무는 클로드의 보좌가 주이다. 경호는 B와 C가 맡기 때문에 대체로 주변 상황까지 신경 쓰지는 않게 된다. 게다가 미행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 그저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차인 줄만 알았는데.

“뭐 하는 놈들이래?”

클로드가 레스토랑 앞에 내리며 물었다. 제이미는 주변을 살피며 “아직 연락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미행이 붙은 이상은 주의해야 했다. 설마,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암살 시도인가?

클로드는 여러 번의 암살 시도를 겪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저 배경에, 저 외모에, 저 지위. 그냥 숨 쉬는 것만으로도 적을 만들 스펙이었다. 그런데 심지어 성격이 개차반이라 그냥 지나가는 사람도 적으로 만드는 신통한 재주가 있는 남자였다.

제이미와 동행했던 두 명의 경호원이 클로드에게 바짝 붙어 섰다.

“각하, 주의하여주십시오.”

제이미의 말에 클로드가 쯧, 혀를 찼다.

“어떤 병신 같은 게 또 이 지랄인지.”

평생 암살 위협과 함께 살아온 클로드였다. 그는 긴장하기는커녕 하품을 했다. 그러면서 레스토랑으로 움직였다. 레스토랑은 지대를 높여 만들어놓아서 3층 건물 높이였는데 1층을 완전히 비워 주차장으로 조성했다. 자잘한 계단을 오르면 아시아풍 대문이 열리면서 거대한 연못과 그 위의 방갈로로 만든 좌석들이 보였다. 대문이 열리자마자 시작되는 연못의 물은 적당히 깨끗했고 물 위의 연꽃들도 새초롬하니 어여뻤다.

분위기가 괜찮군.

수도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제이미가 고른 것치고는 제법이었다. 클로드는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며 줄리안이 오면 어떻게 사과를 할까 고민했다. 그러다 그는 얼굴을 구겼다.

“젠장할, 줄리안.”

자신이 암살 위협을 받고 있다면 줄리안이 여기 오면 안 되는 것이었다.

“줄리안을 지금 누가 데려오는 거지?”

클로드는 초조하게 휴대전화의 메시지 창을 띄워 확인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밖으로 나와줄 수 있어? 워터릴리 레스토랑에서 보고 싶어.』

『좋아요, 워터릴리. 2구역에 있는 거 말씀하시는 거죠. 몇 시까지?』

『7시.』

클로드의 말에 제이미가 아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모시러 간 사람은 없습니다, 각하.”

이런, 빌어먹을.

제이미도 혀를 차며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데이트이니 알아서 나올 줄 알았지, 설마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 생각이나 했겠는가. 클로드가 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줄리안은 받지 않았다. 아마 휴대전화를 주머니나 가방에 넣어둔 모양이었다.

클로드가 줄리안에게 내내 전화를 걸고 있을 때 제이미는 반대로 행동했다. 그는 자신의 부하에게 전화를 걸어 줄리안의 위치를 찾아내라고 닦달했다. GPS의 위치는 바로 나왔다. 그리고.

“각하, 줄리안이 여기에 있답니다.”

제이미가 송화구를 막은 채 보고했다. 클로드는 고개를 돌려 워터릴리 레스토랑 안을 바라보았다. 레스토랑이 아시아풍인 건 확실한데 어느 나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실례합니다. 여기 혹시 줄리안 일리드 씨, 와 계십니까?”

제이미가 카운터에 물었다. 카운터에 서 있던 여직원이 “잠시만요, 손님” 하고 양해를 구하며 노트를 뒤적거렸다. 왔어야 하는데. 제이미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고 있을 때였다.

“저게 뭐야.”

클로드의 기막혀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제이미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눈이 경계의 빛을 띠었다.

갑자기 소형차들이 나타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까 미행을 했던 소형차들과 비슷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의아해하는데 소형차 사이에 오토바이도 보였다. 그리고 내린 사람들은 거의 다 남자였다. 남자들만 즐비했다. 그럴 리가. 이곳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었고 이런 곳은 대체로 여자들끼리 오거나 커플이 오지 남자들만 오는 경우는 없었다.

“각하, 물러나십시오.”

제이미가 클로드를 뒤로 물리며 총을 꺼내려 했다. 그리고 같이 있던 경호원 둘도 클로드를 몸으로 막으며 총을 꺼내고 있을 때였다. 그때 소형차 사이에 택시 한 대가 서더니 누군가가 내렸다. 줄리안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들 사이에 줄리안이 서 있는 것이다. 마치 굶주린 늑대들 사이에 떨어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양처럼.

“줄!”

클로드가 제이미를 밀치며 튀어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기관총 소리처럼 엄청난 소리와 뜨거운 빛이 쏟아졌다.

“줄리안 일리드 씨 맞죠?”

“아리스트 대공과 약혼하신 줄리안 일리드 씨 맞으십니까?”

“포즈 좀 취해주시겠어요?!”

“줄리안, 여기 봐요. 웃어요, 치이즈!”

튀어나가려던 클로드도, 그를 막던 제이미도, 그리고 택시에서 내린 줄리안도, 모두가 멍한 얼굴로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줄리안이 애매하게 미소 짓는 게 보이자 클로드는 속이 확 뒤집혔다.

“뭐야, 저 새끼들.”

“저, 저도 모르겠는데요.”

기자인가? 제이미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기자? 클로드의 얼굴이 단숨에 험악해졌다. 어떤 시발 새끼가 또 정신 못 차리고 비공개 인터뷰를 하고 싶은 건지 궁금하네. 클로드가 제이미를 밀치고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파파라치네요.”

제이미의 넓은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여직원이 한마디 했다.

“파, 파파라치요?”

제이미가 이게 무슨 신종 벌레 이름이냐는 듯한 태도로 되물었다.

“네. 파파라치요.”

여직원이 상큼하게 대답해주었을 때 이미 클로드는 줄리안의 근처까지 가 있었다.

줄리안은 굉장히 당황한 상태였다. 클로드가 할 이야기가 있다며 만나자고 하는 바람에 잔뜩 긴장해 있었다. 아침에 실망했다고 말한 남자가 저녁에는 워터릴리같이 비싸고 좋은 레스토랑에서 할 말이 있다고 하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이었는데 레스토랑 앞에서 내리자마자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으니 정신이 없었다.

“줄리안, 이쪽도 봐줘요.”

“웃어요, 줄리안!”

“오늘 워터릴리에는 뭐 하러 왔어요? 데이트인가요?”

“오, 저분이 아리스트 대공 전하신가요? 커플분, 같이 이쪽 좀 보실까요!”

이런 엿 같은…….

클로드는 기가 막혀서 한쪽 입술을 올렸다. 줄리안은 그 순간 그가 입술을 여는 것을 보았다. 뻔했다. 클로드는 욕을 참지 않을 것이다. 줄리안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달렸다. 약간 멀리 있었던 클로드가 눈을 크게 떴을 때 줄리안은 그의 품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풀썩, 줄리안이 클로드의 품 안으로 들어왔다. 줄리안이 쓰는 바디클렌저 냄새에 클로드가 흠칫 굳었다. 아침에 같이 목욕을 했던 게 생각났다. 정신을 잃은 줄리안을 끌어안고 뒤에 손가락을 넣어 정액을 빼주던 것부터 그 몸을 씻기던 기억이 영화 필름처럼 지나갔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밤새도록 빠져 있던 열락의 맛을 기억해낸 몸이 슬쩍 굳은 상태에서 카메라의 난도질을 당하자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클로드는 걸치고만 있던 외투를 벗어 줄리안의 머리 위에 씌우며 “이런, 시발” 하고 욕의 시동을 걸었다. 그때 줄리안이 그의 코트를 머리에 쓴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클로드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존나 귀여워’서, 잠시 그는 말을 잃었다. 그때 줄리안이 빠른 속도로 워드를 외웠다. 목소리가 꾀꼬리 같네. 금 구슬이 다이아몬드 쟁반을 또르르 또르르. 잠시 그렇게 생각했을 때 줄리안이 뭐라고 워드를 외워 주문을 완성했다.

“미안해요. 올라갈 때까지만 이렇게 갑시다, 전하.”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클로드가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그는 입을 달싹거릴 뿐 말을 하지 못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설마 하고 클로드가 줄리안을 내려다보자 줄리안이 양손을 모아 빌듯이 하며 “미안” 하고 한 번 더 사과했다.

그리고 줄리안은 클로드의 손을 잡았다. 줄리안에게 손을 잡힌 게 처음이어서 클로드는 또 움찔했다.

“가요.”

줄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클로드의 손을 잡은 채 뛰었다. 잠시 멍하니 있던 것 같던 클로드가 천천히 끌려왔다. 둘은 그렇게 뛰었다. 긴 계단을 오르는 동안 클로드가 줄리안의 어깨를 잡았다. 뒤에서 찰칵, 찰칵 소리와 플래시가 계속 터졌다. 정신을 놓고 있던 경호원 둘이 뛰어 내려왔고 마침 도착한 B팀의 참모와 경호원들도 합세해 파파라치들을 계단 아래로 밀었다.

“줄리안, 여길 좀 봐요!”

“둘이 약혼했다는 게 정말입니까?”

“그럼 백작 되는 건가요, 줄리안?”

“왕족이 동성 결혼이 가능한가요? 왕궁에서는 허락했어요? 대공 전하, 왕궁의 허락을 받고 약혼하신 겁니까?!”

개새끼들이 진짜.

남의 사생활을 대놓고 캐묻는 놈들을 향해 클로드가 확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였다.

“참아요.”

“…….”

“제발, 참으세요. 참아주세요.”

나를 위해서, 라는 말은 없었지만 줄리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애원하는 눈동자가 촉촉했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어깨를 확 당겨 안았다. 오오오오. 벌레 같은 파파라치들이 찰칵찰칵 소리를 내며 탄성인지 야유인지 모를 소리를 질렀다.

묘한 기분이었다. 줄리안은 클로드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약혼을 했고 또 결혼을 할 생각이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안겨 있자니 얼굴이 홧홧하게 뜨거워졌다.

워터릴리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직원들이 재빨리 문을 닫아버렸다. 그제야 줄리안은 숨을 쉴 수가 있었다. 그가 “아, 놀랐네요”라고 말하며 품을 벗어나려는 순간 클로드가 한 번 더 힘주어 잡았다. 줄리안은 클로드의 힘에 막혀 그의 품에 안겼다가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미칠 것같이 부끄럽고 배 속이 간질거렸다. 온 혈관에서 꽃이 피는 듯한 이 기분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줄리안은 클로드와 같이 연못 위의 가장 구석진 방갈로로 들어갔다. 그러자 직원이 재빨리 사방의 커튼을 쳐서 둘이 고즈넉하게 있게 해주었다. 클로드가 어깨를 안고 있는 탓에 줄리안과 클로드는 2인용 좌석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줄리안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하는 사이 클로드는 줄리안의 귀를 보고 있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귀가 예뻤다. 빨고 싶었다. 줄리안은 난처한지 입술을 씹고 있었는데 하얀 이 아래로 짓뭉개지는 붉은 입술이 얼마나 야한지, 마치 꽃잎을 터뜨리는 것 같았다. 클로드는 굶주린 짐승 같은 눈으로 줄리안을 바라보았다.

“지금 메뉴판을 가져올까요?”

클로드가 어떤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모른 채 줄리안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직원이 묻자 그제야 그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생각해보니 클로드는 말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직원이 나가자마자 줄리안은 클로드의 품에서 몸을 돌려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지금 침묵 마법 풀어드릴게요.”

줄리안이 워드를 외우기 시작했다. 금세 부은 입술이 오물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참을 수가 없어서 클로드가 줄리안의 뒷머리를 잡아챘다.

입술이 닿는 순간 줄리안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익숙한 입술이었다. 클로드의 입술은 줄리안의 온몸에 닿았었다. 가장 더러운 곳, 가장 소중한 곳, 무심코 지나쳤던 곳, 혼자서만 신경 썼던 곳. 그 모든 곳을 빨고 애무했던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열었다. 줄리안은 손으로 클로드의 옷자락을 잡았다. 밀어내야 할지, 당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빨리, 풀어.

클로드가 소리 없이 말했다. 줄리안은 입술을 댄 채 워드를 외웠다. 클로드의 입술이 닿은 채 워드를 외우는 건 이상했다. 줄리안이 어깨를 움츠리자 클로드가 그의 양어깨를 잡았다.

“풀었어요.”

줄리안이 속삭였다. 그 순간 클로드가 입술을 겹쳤다. 읏. 줄리안이 작게 신음했지만 클로드는 물러나지 않았다. 혀가 엉켰다. 숨결이 누구의 것인지 불분명해졌다. 줄리안은 클로드의 옷자락을 구겼다. 입술이 떨어졌을 때 줄리안은 멍한 눈을 깜빡였다.

“아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조금 늦게 들어왔다.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어. 정말 미안.”

클로드가 사과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너무 달아서 사과를 하는 건지, 고백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긴장이 확 풀려서 줄리안은 가볍게 헐떡거렸다. 물론 클로드가 헤어지자든가 하는 극단적인 말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무서웠다. 클로드를 실망시켰다는 것이 속상했다.

“바람피워도 된다는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줄리안이 소곤거렸다.

“응.”

“바람피우면 저주할 거예요. 대대손손 고자 되라고.”

줄리안의 말에 클로드가 뺨과 뺨을 비비며 말했다.

“어차피 너와 결혼할 건데 나한테 자손이 어디 있어.”

아뿔싸, 그렇구나.

줄리안은 음 하고 생각에 잠겼다. 클로드가 줄리안의 뺨에 입술을 대었다. 입술은 점점 내려가서 목에 머물렀다. 줄리안이 고개를 들자 클로드가 줄리안의 쇄골에 이를 세웠다.

“그럼, 전하를, 임포텐스, 흣.”

“아쉬운 사람이 누군데.”

클로드가 줄리안의 셔츠 안으로 손을 넣으려고 했을 때였다. 흠, 흐음! 헛기침 소리가 커튼 밖에서 울려 퍼졌다.

“이 커튼 비칩니다, 손님들.”

직원이 한마디 하자 줄리안과 클로드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네 탓이야, 라고 동시에 말하고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식사는 유쾌했다. 둘은 직원에게 물어서 가장 잘나가는 음식으로 두 개를 주문했다. 전부 맛있었지만 각자의 음식 취향이 미묘하게 달라서 둘은 서로의 것을 먹여주며 웃었다. 클로드는 맥주를 연달아 시켰고 술을 즐기지 않는 줄리안은 와인을 한 잔 시켜서 식사가 끝날 때까지 마셨다.

이야기는 두서없이 흘러갔다. 문화생활에 대해서는 둘 다 관심이 없어 이야기를 하다 말았고 전쟁에 대해서는 제법 이야기에 날이 섰다. 전쟁에서 쓰는 마법을 두고 그 효용성과 효율성에 대해서 둘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팽팽하게 맞섰다. 한참 동안 계속된 이야기는 전쟁고아들로 옮겨 갔다. 줄리안은 여기에 대해 아는 게 없었고 클로드가 해주는 말에 대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요즘 전쟁고아들이 노동력 착취를 많이 당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아동의 인권 문제, 그리고 공정 무역 문제로 이야기가 번졌다. 수십 가지의 이야기를 흘러가는 대로 대화하며 즐겁게 웃는 사이 어느새 밖은 어두워졌고 레스토랑의 폐점 시간이 다가왔다.

“와, 우리가 지금 폐점 시간까지 이야기한 거예요?”

줄리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난로를 가져다주긴 했지만 연못 위의 방갈로는 쌀쌀한 편이었고 줄리안은 내내 외투를 입은 채였다. 그에 비해 외투를 벗어 줄리안에게 씌웠다가 아예 담요 대용으로 줄리안의 몸에 덮어주었던 클로드는 드디어 외투를 돌려받아 입고 있었다.

“그러네.”

“우리 진짜 대단하네요. 같이 살면서 폐점 시간까지 이야기를 하다니.”

줄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클로드를 올려다보았다. 격렬하게 논쟁하기도 했고 조곤조곤 이야기해주기도 했던 애인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군용 코트를 본받아 주문해 입힌 코트는 클로드에게 무시무시하게 잘 어울렸다. 단정하고 냉랭한 미모를 한껏 뽐내주는 옷이었다. 줄리안은 클로드의 옷매무새를 잘 정돈하고 커튼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던 참모들이 일제히 일어났고 클로드와 줄리안, 그리고 참모들은 걸음을 옮겼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오자 추위가 한층 강해졌다. 줄리안이 어깨를 움츠렸고 클로드가 춥냐고 물으려던 찰나였다.

펑―, 찰칵, 찰칵, 찰칵. 플래시 터지는 소리와 함께 셔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스토랑의 대문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사진기를 들이밀었다.

“언제 결혼하십니까? 왕실에서 허락한 교제입니까? 둘의 관계가 연애가 아니라 한쪽의 일방적인 구애로 인한 사이라는 소문이 있―.”

퍼억, 소리와 함께 줄리안은 사람이 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포물선을 그리는 물체는 두 개. 하나는 사람이었고 하나는 카메라였다. 상당히 높은 계단에서 발로 차여 허공으로 떨어지는 남자의 얼굴은 몹시 인상적이었다. 남자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멀뚱멀뚱한 얼굴. 그리고 그는 엄청난 속도로 땅에 추락했다. 추락하는 순간 줄리안은 고개를 돌렸다. 윽, 아프겠다. 줄리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사건은 전국에 크게 보도되었다. 클로드 스토메어가 파파라치를 발로 차서 허공으로 밀어버렸다는 내용은 온 나라에 갑론을박이 벌어지게 만들었다. 군인인 클로드가 심했다. 파파라치들 한번 큰코다칠 줄 알았다. 왕실에서 동성 결혼이라니 절대 반대한다. 드디어 왕실도 인권에 눈을 떴구나. 제멋대로의 이야기가 중구난방 펼쳐졌다.

『아리스트 대공, 결혼 임박.』

『대공의 피앙세는 재무장관의 삼남, 줄리안 일리드.』

『최연소 S급 마법사, 왕족에 합류하나? 마법과 왕실, 그 정치적인 의미.』

『일부 종교계 반발, 왕족의 동성 결혼 절대 반대. 법조계에서는 문제없다는 입장.』

『대공의 결혼,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로열 웨딩! 슈퍼 커플 탄생!』

아리스트 대공과 그의 뒤에 있는 왕궁과 군대가 무서워 이 스캔들을 알면서도 쉬쉬했던 매스컴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인터넷을 시작으로 왕족 최초의 동성 결혼 루머가 퍼져나가더니 금세 각종 잡지의 표지를 장식했다.

왕궁 앞에서는 몇 날 며칠 동안 시위가 일었다. 전통을 수호하는 모임이라는 단체에서 왕실을 비난하느라 시위를 하고, 인권 단체 연합에서는 전통을 수호하는 모임을 공격했다. 파파라치들은 소형차와 오토바이를 이용해 클로드와 줄리안을 쫓았다. 고대부터 도시로 존재했던 수도는 길이 좁고 복잡했다. 그리고 그 좁은 길을 이용해 소형차와 오토바이로 뒷골목을 질주하며 따라붙는데 감당이 되지 않았다. 줄리안은 본래도 집 밖에 거의 나가지 않았지만 이제는 나갈 수 없게 되었고 클로드 또한 업무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상황이 엉망으로 치닫자 사흘 만에 왕은 클로드에게 일단 기지로 내려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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