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벨이 울려서
보안 점검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퍼졌다.
『루시, 당분간은 만나지 말자.』
며칠 뒤 아침, 줄리안은 일어나자마자 루시드에게 문자를 보냈다. 루시드에게서 곧 답장이 왔다.
『알았어. 줄스, 조심해. 난 앞으로 보안 마법 안 풀 거야. 너도 풀지 마.』
『응, 알았어. 사랑해, 루시. 보고 싶어. 보안 점검 끝날 때까지는 문자 안 보낼 테지만 그래도 내 마음 의심하지 마.』
『너도, 줄스. 난 너뿐인 거 알지? 사랑해. 우리 이런 험난한 세상에서도 꿋꿋이 살아가자.』
평소라면 나도 너뿐이야, 라고 말해야 했다. 그러나 줄리안은 저도 모르게 클로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클로드와 만나게 된 이상 사랑한다는 말을 남에게 쓰는 것도 반칙처럼 느껴졌다. 줄리안은 톡톡 문자판을 두드렸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딱히 사귀거나 하기로 한 것도 아닌데 이런 걸 신경 쓰는 건 이상하지 않나?
줄리안의 고동색 눈동자가 도로록 움직였다. 에라, 내가 왜 이렇게까지 신경 써야 돼! 줄리안은 반항기에 들어선 틴에이저 소녀 같은 마음으로 문자판을 두드렸다.
『나도 너뿐이야. 사랑해. 나 일기도 열심히 쓰고 있어. 우리 점검 끝나면 꼭 만나자. 그때까지 건강하고 일기 열심히 쓰고 있어. 잘 지내.』
그 메시지를 끝으로 줄리안은 삼중 보안 마법을 걸었다. 루시드의 메시지와 연락처에만 걸어둔 것이었다. 그리고 줄리안은 일기를 내려다보았다. 루시드와의 교환 일기. 둘은 서로 일기를 쓰고 휴일에 만나 교환해왔다. 일기에는 본인의 일이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궁정 사교계의 온갖 소문이 담겨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아.
줄리안은 어젯밤에 쓰다 만 교환 일기를 보며 생각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연락하라던 클로드의 말이 심중을 어지럽혔다. 아무래도 윗선에 무슨 일인가가 생긴 것 같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지?
잡지사에 기사를 팔아먹은 것은 니콜라스 팀의 누군가였다. 뻔한 일인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비정기적 보안 점검이라니. 왕궁은 가뜩이나 보안이 엄격했다. 모든 시종은 셔틀버스를 타면 휴대전화를 반납해야 했다. 퇴근할 때까지 돌려받지도 못했다. 쓸 수 있는 휴대전화는 업무용 휴대전화뿐이었다. 언제나 몸수색을 당했고 왕궁 복도에는 늘 총기를 감지하는 마법 시스템이 있었다. 마법 인증된 총기가 아니면 들고 들어오는 즉시 근위대에 알람이 울린다. 이중 삼중으로 고안된 보안 정책이 있는데 왜 비정기적 보안 점검까지 하는가.
줄리안은 노트를 침대 아래 잘 숨기고 몸을 가볍게 움직였다. 어제 잠을 잘못 잤는지 찌뿌드드했다. 허리를 좌우로 돌리고 어깨도 돌리기 시작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잘 잤어?』
보낸 사람의 이름은 클라우드. 줄리안은 피식 웃었다. 클라우드라고 저장해놨지만 사실은 클로드였다. 혹시 남이 볼 때를 대비해서 본명으로 저장할 수가 없었다.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 아주 좋은 꿈을 꿨지.』
『그러셨군요. 좋으셨겠습니다.』
『무슨 꿈인지는 안 물어봐?』
『왠지 듣고 싶지 않은 기분이네요.』
클로드는 줄리안의 대답에 칫 하고 혀를 찼다. 그래도 그의 얼굴에는 내내 웃음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제이미가 “아놔, 환장하겠네”라고 중얼거렸다. 첩자가 분명하다는 둥, 산 채로 안구를 적출하겠다는 둥 하셨던 분은 어디 가셨단 말인가. 제이미의 눈초리가 싸늘해져도 클로드는 그쪽으로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휴대전화 안으로 들어가시겠네, 들어가시겠어요.”
제이미가 빈정거리거나 말거나 클로드는 진지한 얼굴로 문자판을 두드렸다.
『난 존나 말하고 싶은 기분인데.』
『됐습니다.』
『구멍은 좀 회복했어? 다른 놈들에게 물어봤는데 자꾸 뚫어줘야 익숙해진대.』
그렇게 문자를 보내자마자 당장 전화가 울렸다. 클로드가 키들거리며 전화가 울리는 걸 느긋하게 바라보자 제이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의외로 줄리안 일리드는 순진한 면이 있었다. 툭하면 걸려들어 전화를 걸어서 닦달하기 일쑤였다. 전화벨이 울리다 끊기고 띠링, 문자음이 울렸다.
『전화 당장 받으십시오.』
『화낼 것 같아서 싫은걸. 화 안 낸다고 약속해줄 거야?』
『웃기지 마시고 당장 받으시라니까요!』
음, 이번 전화도 무시하면 사달이 나겠는데.
벨소리가 울리자 클로드는 어쩔 수 없이 후,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
‘전하! 누구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줄리안이 매섭게 소리쳤다.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 같은 목소리라 클로드가 히죽 웃었다. 그는 줄리안이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좋았지만 파르르 떠는 것도 좋았다. 좋아하는 아이에게 심술궂게 굴고 싶어하는 건 남자의 본능인가 봐. 클로드가 웃고 있을 때 줄리안이 다시 캐물었다.
‘전하, 누구에게 하셨느냐니까요?’
“애들한테.”
‘애들, 누구요?’
“뻔하지. 내 참모들.”
줄리안은 기절할 것 같은 목소리로 ‘뭐라고요?!’라고 소리쳤다. 클로드가 웃으면서 손을 뻗어 서류 하나를 끌어당겼다.
“내 꿈에서 참모들이 그러더라고.”
그 순간 줄리안이 침묵했다. 열 받고 짜증 나면서도 안도하는 기분이 침묵 속에서도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클로드는 서류를 넘기면서 이름을 확인했다. 루시드 레플래스. 그의 눈이 무심코 그 부분을 넘겼다.
‘왜 이렇게 유치하십니까…….’
줄리안이 환장하겠다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안 물어봐주니까 그렇지. 내가 무슨 꿈을 꿨는지 안 들으려고 했잖아.”
‘음담패설일 게 뻔하니까 그렇죠.’
“나 그런 사람 아니거든. 너 사람 잘못 봤어.”
‘가슴에 손을 얹고, 정말 아닙니까?’
“뭐, 조금은 그럴지도.”
앓느니 내가 죽지, 줄리안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클로드는 즐겁게 웃으며 루시드 레플래스에 관한 서류를 읽었다. 딱히 눈에 띄는 구석은 없었다. 출퇴근 기록도 정확했고 배경 조사에서도 눈에 띄는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위험 인자로 분류된 이유는 단 하나, ‘사생활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는 부분 때문이었다. 독신으로 혼자 살며, 애인이나 친구도 없고, 휴일에 무엇을 했는지, 무슨 영화를 좋아하는지 등에 대해 주변 사람에게 언급하지 않는다. 동료와의 교류도 전무. 단 한 번도 동료와 술을 마시러 간 적이 없으며 어떤 초대에도 응하지 않았다. 이상한 놈이로군. 클로드는 루시드 레플래스의 서류를 ‘위험’ 쪽에 남겨두었다.
‘지금 뭐 하시는 중이세요?’
“1차 보안 점검.”
‘서류 분류 말씀이십니까?’
“응, 이상한 놈이 있네.”
클로드의 말에 줄리안이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
“이상한 놈? 아, 아닙니다. 저한테 말씀하시지 마세요, 보안 점검은 제가 들으면 안―.”
욕실 세면대에서 칫솔에 치약을 짜고 있던 줄리안이 서둘러 막았다. 요즘 클로드는 그에게 뭐든지 말해주려 했다. 들어서는 안 되는 것까지 말해주었기 때문에 줄리안은 알아서 클로드가 주는 정보를 차단하려고 노력했다.
‘레플래스라는군.’
그러나 클로드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종종 줄리안의 노력은 먹히지 않을 때가 있었다. 이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그리고 줄리안은 희게 질렸다. 레플래스? 루시드를 말하는 건가?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열었다.
“들으면 안 되는 정보를 자꾸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줄리안은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말했다. 거울 속의 그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느라 어색한 미소가 입가에 간신히 돌 뿐, 그 외에는 돌처럼 굳은 얼굴이었다. 그래도 목소리는 나쁘지 않았다. 클로드는 모를 것이다. 줄리안은 불안감으로 쿵쾅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말했다.
‘자꾸 절 곤란하게 하지 마세요.’
클로드는 레플래스의 서류를 위험 분류에서 다시 끌어왔다. 줄리안은 숨긴다고 숨겼지만 그의 목소리는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레플래스가 이상한 놈이라는 게 왜 줄리안이 굳을 일일까? 이 새끼, 줄리안에게 집적거리기라도 하나? 클로드는 루시드 레플래스의 서류를 다시 읽어보았다. 키도 크고 몸매도 제법 좋아 보였다. 얼굴도 남자다웠다.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마 얼굴이 여자 같아도, 호쾌해도, 소인배처럼 보여도 모두 마음에 안 들었을 테지만 남자다운 것이 특히 싫었다.
“시발 놈이…….”
클로드가 중얼거리자 귓가에서 줄리안이 ‘전하?’라고 의아한 듯 그를 불렀다.
“아니야. 정말 이상한 놈이어서 말이야. 줄리안, 레플래스라는 놈을 알아?”
‘아니요, 모릅니다.’
아는 목소리인데?
클로드가 서류를 한쪽으로 따로 보관하며 일어났다. 자신과 통화를 하는 줄리안이 다른 데에 신경을 쏟고 있는 것이 유쾌하지 않았다. 그는 창가로 걸으며 “그래?” 하고 확인차 물었다.
‘아예 모르는 사이는 아니고요, 스치는 정도의 사이입니다.’
“어떤 사람이지, 레플래스는?”
‘그런 걸 알 정도로 친분이 있지는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아무 생각도…….’
“전혀?”
‘그냥 좀 무뚝뚝한 남자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거짓말이라는 게 티가 났다. 클로드는 씩 웃었다. 줄리안의 목소리가 점차 경계의 가시를 세우는 것이 듣기 싫었다. 둘이 어떤 사이인지 알아내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다. 줄리안이 말해주지 않겠다면 다른 쪽에서 알아내면 그만이다.
“제법 잘생겼던데 나와 비교하면 어때?”
클로드의 질문에 줄리안은 잔뜩 굳은 얼굴로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게 뭡니까.”
줄리안은 괜히 수도꼭지를 열었다 잠갔다 하면서 중얼거렸다. 클로드가 이렇게 애인 같은 소리를 할 때마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아, 어서. 나와 비교하면 누가 더 잘생겼어?’
“비교가 됩니까. 당연히 전하께서 더 핸섬하시죠.”
누가 봐도 당연한 일이었다. 루시드는 시종 중에서는 제법 훈훈한 외모로 알려져 있지만 그래봤자 시종 제일도 아니었다. 그에 비하면 클로드는 놀라울 정도의 미모를 가진 남자였다. 애초에 게임이 되지 않는 둘이었다.
‘역시 네 눈에는 그렇지?’
“제 눈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설사 루, 레플래스 본인조차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누가 봐도 전하가 더 잘생기셨죠.”
줄리안이 그렇게 말하며 뺨을 문질렀을 때 클로드는 속으로 빙고, 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줄리안은 마음이 놓이자 레플래스를 퍼스트 네임으로 부르려고 했다. 둘이 무슨 사이지? 서류에 의하면 매우 비밀스러운 레플래스였다. 그가 줄리안과 도대체 어떤 접점이 있단 말인가.
줄리안이 첩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딱 첩자가 할 짓이었다. 동료인데도 서로 모르는 척을 하고 있는 것이 전형적이었다. 클로드는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톡톡 두드렸다. 어젯밤 내린 눈으로 인해 바깥은 온통 하얗기만 했다.
“줄리안.”
‘네?’
“오늘 같이 밥이나 먹을까?”
‘오늘은 제가 야간조라서요, 곤란하겠는데요.’
“낮에라도 먹지. 나와. 아니면 네가 올래?”
‘시종이 대공 전하와 아무 용건도 없이 외부에서 뵙는 건 곤란하지요, 전하.’
“넌 시종이 아니라 줄리안 일리드잖아. 내 애인.”
그 말에 줄리안이 피식 웃는 소리가 났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웃음을 들으며 한쪽으로 입술을 올렸다. 요 며칠째 그는 줄리안을 애인이라고 칭하고 있고 줄리안은 그를 전하라고 칭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사이야? 클로드는 불만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사실 줄리안에게 ‘우리 사귀자’는 말을 명확하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부관인 제이미가 ‘요즘은 유치원생들도 안 그럽니다, 각하. 자연스럽게 사귀셔야지, 전쟁 선포도 아니고 그게 뭡니까’라고 혀를 차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이상한 건가? 사귄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없다. 그냥 우리 사귀는 거, 퉤퉤퉤, 오늘부터 1일! 이러면 안 된단 말이지? 클로드는 성질을 죽이느라 자신이 연애를 하는 건지 수행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졌다.
‘네, 그러네요.’
하지만 가끔씩 이렇게 줄리안이 상을 주면 연애든 수행이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종이 아니라 줄리안 일리드잖아’라는 말에 수긍한 것일 수도 있지만 본인이 명확하게 하지 않은 이상 클로드는 자신이 좋은 쪽으로 알아듣기로 했다.
‘하지만 요즘 궁의 분위기가 좋지 않아서 자숙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런 게 어디 있어?”
‘시종들은 다 이렇습니다. 아무래도 민감한 직업이니까요.’
줄리안이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클로드를 달랬다. 클로드는 그 듣기 좋은 미성에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불퉁하게 말했다.
“빌어먹을, 시종이라는 직업은 엿 같아.”
뭐 하나 좋은 부분이 없어. 휴일은 제멋대로고 근무 시간도 시소를 탄다. 정해진 것이 없으니 데이트 한 번 마음대로 할 수 없는데 기껏 하려고 해도 이제는 눈치를 봐야 해서 안 된다고 하니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다. 클로드가 한 번 더 투덜거렸다.
‘시발, 왕궁을 폭파시키든가 해야지.’
그 말에 줄리안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씻기 위해 욕실에 온 지 40분째였고 그동안 한 일이라고는 칫솔에 치약을 짠 게 전부였다. 체중계에 네 번 올라갔다 내려오고 괜히 샤워 부스와 욕조를 오갔다. 옷을 입은 채로 욕조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고 휴대전화를 들지 않은 손으로 세면대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내가 못 할 것 같아?’
“그것보다는 제 다리를 부러뜨리는 게 더 쉬우시지 않으실까 했어요. 병가를 얻으면 되니까요.”
‘시발,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내가 네 다리를 어떻게 부러뜨려?!’
클로드가 화난 음성으로 소리쳤다가 ‘미안, 소리 지를 생각은 아니었어’라고 곧장 사과해왔다. 줄리안은 새집처럼 헝클어진 머리를 제 손으로 흩뜨려 더 엉망으로 만들며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목소리는 멀쩡했지만 얼굴은 자꾸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사람은 내 어디가 이렇게 좋은 거지?
줄리안은 의아한 기분으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의 자신은 매우 평범한데 클로드는 도대체 어디를 보고 자신에게 빠졌을까.
호, 혹시 내가 섹스를 되게 잘하나? 속궁합이 좋은 걸까? 안이 소위 말하는 명기, 그런 건가?
줄리안은 자신이 세계 최고의 섹스 능력을 가진 섹스 천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그런 거면 납득할 만했다. 클로드는 자신이 처음이라고 했다. 처음에 파라다이스를 만난 거면 당연히 뻑갈 수밖에.
나 좀 대단한데?
줄리안이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을 향유하고 있을 때 클로드가 ‘줄리안?’ 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미안함에 줄리안은 들리지 않게 키들거렸다.
“네, 전하. 듣고 있습니다.”
줄리안은 클로드와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대부분은 그들 둘만 즐거울 잡담이었다. 줄리안은 세면대에 물을 받았다. 그리고 클로드가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워드를 외웠다. 그는 물 위에 손가락으로 글을 썼다. 루시드. 보안 점검. 일기를 없애야 하나? 홈페이지는? 줄리안은 물 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클로드와 점심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은 뒤에도 줄리안은 그 물에 쓰인 글자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지우……, 안 돼. 난 못 지워.”
3년간 루시드와 둘이서 정성껏 만들어온 것들이었다. 얼마나 재미있었는데. 한 세계의 완성이었다. 인간의 욕망에 대한 기록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코웃음 치겠지만 줄리안과 루시드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한 세계를 기록하고 있다. 그 세계의 이름은 궁정 사교계다!
얼마나 열심히 모은 자료인데 그걸 없애. 난 못 해, 난 못 한다고!
줄리안은 손으로 물을 팍 쳐버렸다. 물 위의 글씨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점심을 한 번 같이한 이래, 줄리안과 클로드는 하루 한 끼를 같이하게 되었다. 어느 끼니를 같이하느냐는 것은 오로지 줄리안의 스케줄에 달려 있었다. 줄리안이 조간조라면 늦은 점심을, 주간조이면 점심을 함께 했다. 야간조일 때는 점심부터 만나 자정까지 같이 있든가 아니면 저녁을 같이했다.
주간조인 경우는 어쩔 수 없었지만 조간조나 야간조의 경우에는 종종 호텔에 처박혔다. 클로드는 줄리안이 자신의 집으로 오든가 아니면 자신이 줄리안의 집으로 가길 바랐지만 줄리안은 둘 다 안 된다고 단호히 잘랐다. 그래서 대안으로 나온 것이 호텔이었다.
클로드는 아예 호텔 한 층을 업무용으로 빌렸다. 물론 호텔 측에서는 믿지 않았다. 업무용인데 왜 개인 신용카드를 쓰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들은 믿는 척하며 한 층을 대여해주었다. 그리고 클로드의 부하들은 그 층에 허가 없이는 개미 한 마리 들어오지 못하도록 보안을 강화했다.
클로드는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줄리안을 기다렸고 줄리안은 여러 수단을 사용해 눈에 띄지 않는 방법으로 그를 만나러 오고 있었다. 클로드의 경호팀은 혀를 내둘렀다. 줄리안이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줄리안은 갑자기 나타나고는 했다. 비어 있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화장실 안에서. 줄리안은 어느 순간 나타났고 클로드가 빌린 층에 내리고는 했다. 모든 엘리베이터는 보안 카드 없이 클로드가 빌린 층에 설 수 없는데도 줄리안이 탄 엘리베이터는 그곳에 멈추었고 문을 열었다.
첫날 문이 열렸을 때 모든 경호원들이 일제히 총을 겨누었다. 줄리안이 어 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일리드 시종님?’
‘예, 그렇습니다.’
경호팀장이 눈살을 찌푸리자 줄리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경호팀장이 줄리안과 그의 뒤에 서 있는 엘리베이터를 번갈아 보더니 ‘어떻게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 어떤 방법으로 여기에 올 수 있었냐는 뜻이지만 줄리안은 약간 멋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아리스트 대공 전하와 약속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아니, 그건 우리 모두 다 알지.
경호팀 모두의 얼굴에 쓴웃음이 감돌았다. 아리스트 대공 전하와 약속? 말이 고상하다. 대공은 지금 이 평범한 시종에게 눈이 돌아가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시발, 존나 귀여워. 새침하게 구는 것도 깜찍해 미치겠다. 대공은 참모들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했다. 참모 중 대공과 가장 격의 없이 행동하는 부관 제이미 블레서가 ‘전 그냥 평범하던데’라고 중얼거리면 대공은 혀를 찼다. ‘안목 좀 키워라.’ 진짜 한심하다는 어조라서 부관이 울컥한 얼굴로 대공을 바라보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예, 그건 저희도 다 아는데.’
‘뭐야?’
클로드의 목소리에 경호팀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부관을 대동한 클로드가 싸늘한 눈으로 경호팀을 훑어보았다.
‘얘가 무슨 테러리스트라도 되냐, 총을 수십 자루씩 겨누고 있게.’
이것들 다 미친 거 아니야? 클로드의 말에 경호팀장은 억울해졌다. 그가 ‘그게 아니고’라며 변명하려는데 클로드의 뒤에서 제이미가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말이 길어지니까 그냥 입 닥쳐.
그런 마음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는 얼굴이었다. 경호팀장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클로드도 클로드지만 제이미도 뒤끝이 제법 있는 성격이었다. 두고두고 피곤해지지 않으려면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각하.’
경호팀장의 말에 클로드가 코웃음을 쳤다. 줄리안은 경호팀장과 클로드를 번갈아 보다 목례로 경호팀장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다음 클로드에게 시선을 주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하.’
그리고 클로드와 줄리안이 들어갔다. 그리고 닫힌 문이 갑자기 쾅,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몇 번 그렇게 흔들리는 것을 보며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테러리스트면 좋을 텐데.’
그럼 바로 쏴 죽여서 이런 꼴을 안 봐도 되는데.
그날 이후 제이미는 경호팀장에게 줄리안이 S급 라이선스를 가진 마법사임을 알려주었다. 경호팀장은 줄리안의 서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위험인물 같은데요.’
‘뭐, 이렇게까지 마법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 있다면 그렇지.’
‘각하 곁에 둬도 될까요?’
제이미가 너 미쳤냐는 얼굴로 되물었다.
‘각하를 멀쩡한 시종 옆에 둬도 되냐고 물어야 하지 않겠어?’
하긴, 그건 그렇다며 경호팀장이 혀를 찼다.
‘요즘 각하께서는 아주 반짝반짝 빛나시더라고요. 원래도 참 잘생긴 분인데 요즘은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가.’
‘어제 먹은 파스타가 넘어올 것처럼 잘생겨지셨지. 피부가 아주 반들반들하신 게.’
‘역시 그동안은 욕구 불만이셨나 봐요.’
경호팀장의 말에 제이미가 흘끔 그를 바라보았다.
‘너네도 그렇게 생각했어?’
‘다 그렇게 생각했죠. 전장에서 한 번도 섹스하시는 걸 못 봤으니까요. 동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걸요.’
‘나도 한 번도 못 봤어.’
‘그럼 정말 동정이셨을까요?’
헐 하고 둘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한숨을 쉬었다. 경호팀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그 맛을 지금에야 아셨으면 눈이 돌아가시겠죠’라고 중얼거렸다. 제이미는 그렇지, 라고 대꾸하면서 CCTV 속의 줄리안을 바라보았다. 비어 있는 엘리베이터에 갑자기 줄리안이 나타나고 그는 태연하게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그의 입술이 작게 움직이고 있었다. 워드를 외우는 중인 것이다.
우리 각하는 그렇다 치고 당신은 무슨 생각입니까, 일리드 시종?
동성 간의 섹스에서 클로드가 받는 역을 할 리 없을 테니 아마 줄리안이 받아주고 있는 것일 테다. 무슨 생각인가? 몸에 부담이 되는 그런 섹스까지 해주면서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정말 첩자인가.
‘주의해서 보도록 해.’
제이미의 말에 경호팀장이 ‘아까는 위험한 건 시종이지 각하가 아니라면서요’라고 말했다. 제이미가 그래, 라고 중얼거리며 CCTV 안을 들여다보았다.
‘우리 각하가 산 채로 눈알이라도 뽑기 전에 주의해서 봐야지.’
‘에이, 설마요.’
‘사랑에 배신당한 남자가 얼마나 맛이 갈 수 있는지 자네도 알 텐데. 심지어 우리 각하라고. 남보다 훨씬 빠르고 강하게 맛이 갈 남자지.’
‘……그건 그러네요.’
부하들이 복잡한 마음으로 상관을 지켜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클로드는 줄리안에게 시간이 날 때마다 호텔에서 줄리안을 기다렸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흐, 읏―.”
줄리안이 신음했다. 그가 허리를 뒤로 젖히자 클로드가 손을 뻗어 그 허리를 잡았다.
“하아, 너, 오늘 너무 흐물거린다.”
클로드가 중얼거렸다. 줄리안의 안쪽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안에 손가락을 넣어 휘저었다. 그때마다 줄리안의 입구가 뻐끔거렸다.
“누, 구 때문인데요.”
줄리안이 클로드의 어깨에 손톱을 세웠다. 희미한 시야에 클로드의 붉은 어깨가 보였다. 섹스하는 내내 손톱을 세워서 어제도 그제도 생채기가 나서 마치 고양이한테 할큄을 당하기라도 한 듯 엉망이었다.
“나 때문이지, 당연히.”
클로드가 대답하면서 줄리안의 뺨에 입 맞췄다.
“흐, 으으, 그냥, 좀…….”
“다른 새끼가 널 이렇게 만들면 그 새끼를, 잠깐, 진짜 그 새끼를 어떻게 죽여야 내 속이 시원해질까?”
어떻게 죽여도 안 시원해질 것 같은데.
클로드의 손가락이 거칠게 움직였다. 줄리안은 비명을 삼키며 눈살을 찌푸렸다. 손가락도 두꺼운 남자가 마구잡이로 안을 헤집자 미칠 것 같았다. 아프기도 하고 빠듯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들보다 더 두려운 것은 쾌락이었다. 내벽이 흐물거리고 있다는 게 무슨 말인지 줄리안 자신도 알 것 같았다. 이 손가락이 좋았다. 그리고 더 대단한 걸 바랐다. 섹스에 중독되는 것 같았다.
“하, 하지, 마, 흐응, 하지, 읏, 마, 하읏!”
“네 이런 얼굴을 본 새끼니 일단 눈부터 팔까.”
“아, 아아, 나, 나, 할 것 같.”
“귀부터 자르는 게 좋을지도.”
“클로드!”
줄리안이 비명을 지르자 클로드가 줄리안의 허리를 잡은 팔을 당겼다. 줄리안이 클로드의 품으로 끌려왔다. 클로드가 줄리안의 귀를 콱 깨물었고 그 순간 줄리안의 안쪽이 확 수축되었다.
“너무 쫀득하면 나 못 참는데.”
줄리안이 머리를 저었다. 귀가 아프다는 건지, 음담패설을 하지 말라는 건지, 안쪽에 다른 것을 꽂으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클로드는 뭐든 상관없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우울하게 짙어진 청회색 눈동자로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줄리안이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준다?
그런 생각을 하자 뜨거운 심장에 차디찬 오물이 끼얹어진 기분이었다. 더럽고 추웠다.
시발, 내가 이런 생각을 왜 하지?
클로드는 줄리안의 귀를 가만히 빨아주었다. 그러자 줄리안의 내벽이 부들부들 떨렸다.
“안쪽이 달달 떠는데…… 가고 싶은데 참는 거야? 왜? 창피해?”
클로드가 젖은 귀에 대고 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줄리안은 창피해서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저 입에 뭐라도 쑤셔 박아 닥치게 하고 싶었다. 아까부터 클로드와 질펀하게 뒹굴었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안에서 나오지도 않고 세 번이나 토정했다. 그리고 클로드를 품기 위해 처음부터 집요하게 애무받은 줄리안은 다섯 번이나 정액을 쏟아낸 상태였다. 참고 있다기보다는 더 뱉어낼 게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해도 사정은 사정이었고, 사정을 한 다음에는 지치기 일쑤였다. 그러니 사정하고 싶지 않아 꾹 참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클로드가 내벽의 움직임만으로도 알아챘다. 보여서는 안 될 부분까지 보인 수치심에 눈이 뜨거웠다.
“아, 젠장할, 울지 마.”
클로드가 줄리안의 얼굴을 보더니 그 얼굴에 입술을 눌렀다.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촉, 촉, 소리가 나도록 키스했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아, 썅, 내가 뭘 잘못했는지는 몰라도 잘못했으니까 울지 마. 야, 네가 울면 내가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잖아. 뭐가 안 좋았는데? 내벽이 달달 떠는 게 싫어? 손으로만 하는 게 싫었, 읏.”
줄리안은 더 못 참고 클로드의 머리채를 잡은 채 키스했다. 이 미친 입을 막을 수 있는 게 오로지 자신의 입술뿐이라는 것이 억울했다. 클로드는 눈을 크게 떴지만 곧 줄리안의 혀를 받아들였다. 들어온 혀를 농밀하게 애무하며 클로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 진짜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줄리안은 더 억울해졌다. 차라리 클로드가 얄밉기만 하면 좋겠는데 자신이 이렇게 먼저 키스하면 그는 노골적으로 기분이 좋아지고는 했다. 클로드는 줄리안이 키스하는 것을 한참 동안 즐기다 갑자기 줄리안을 눕혔다. 허리를 들게 해서는 밑에 베개를 쑤셔 박았다. 줄리안이 섹스 후 허리를 두드리자 그다음부터는 정상위 때마다 베개를 대주었다. 하지만 클로드가 제일 좋아하는 체위는 후배위였고 심지어 줄리안도 그 각도로 가장 잘 느꼈기 때문에 여전히 허리는 아팠다.
“미안, 줄리안.”
클로드가 낮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뒤처리는 한 번 더 싸고.”
흐아아아―.
줄리안이 비명을 질렀다. 클로드가 단번에 줄리안의 안으로 들어갔다. 줄리안의 입구는 풀려 있었고 안쪽은 부어 있었다. 부어서 더 통통해진 안이 처음보다 바짝 조이지는 않았지만 더 뜨거웠다.
“존나 뜨거워.”
“으, 이, 상해.”
줄리안이 더듬거리며 양손으로 배를 감쌌다. 안쪽이 잘못 찔린 듯 몸을 떨면서 신음했다. 가슴은 빨갛게 달아올라 유두는 퉁퉁 부은 채로, 온몸에는 클로드의 흔적을 빼곡하게 남긴 채 안을 조이며 허리를 떠는 것이다.
“어디가?”
클로드는 성기를 빼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바로 빼주지 않았다. 줄리안의 이 모습을 조금 더 즐기고 싶었다. 줄리안이 임신이라도 한 것처럼 배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 좋았다. 클로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흐릿한 시야에 줄리안의 납작한 배가 약간 부른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아이를 임신해서든, 자신의 성기를 품고 있어서든 뭐라도 좋았다. 헐떡거리면서 배를 감싸는 줄리안의 모습은 시각적으로 그를 몹시 자극했다.
“아, 안이, 흐으으, 이상해, 이상합니다, 흣.”
“안에, 조금만 움직여봐. 잘못 박혔나 봐.”
클로드의 말에 줄리안이 저도 모르게 안을 움찔거렸다. 머리가 맛이 갔는지 이게 말도 안 되는 개소리라는 걸 바로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 곧 알아채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클로드를 노려보았다.
“전, 하. 정말, 흣, 이러시면, 전, 하읏!”
줄리안이 몸을 떨었다. 클로드가 몸을 뒤로 물렸다. 성기가 한 번에 쑥 빠져나가자 상실감에 줄리안이 이를 악물고 참아내는 사이 다시 성기가 다가왔다. 작게 열린 입구를 두어 번 문지른 것이 단숨에 치고 들어왔다. 좁은 곳을 쑤시며 찢어 벌리는 움직임에 줄리안이 몸을 떨었다. 억지로 허공에 들린 다리가 죽 펴지고 발가락이 곱았다. 클로드는 그 다리를 욕정에 젖은 눈으로 훑었다. 줄리안의 다리가 매끈했다. 시발, 다리도 야해. 얜 뭐 이렇게 야해? 미치겠네, 진짜. 클로드가 마구잡이로 박아대기 시작했다. 줄리안이 몸을 떨었다. 배 위에 있는 줄리안의 손등에 핏줄이 섰다.
“아, 시발, 미안해. 네가 존나 귀엽잖아.”
“닥, 치, 읏, 시고요, 이, 하읏, 아, 아, 아, 나, 벌써, 응!”
“아까 잘 참던데, 참아봐. 같이 가자, 응?”
클로드가 줄리안의 성기를 움켜잡았다.
“싫어, 하지 마―.”
줄리안이 울음 섞인 비명을 질러도 클로드는 그 손을 치우지 않았다. 줄리안이 배를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려 클로드의 손을 떼려 했다. 손가락 사이로 억지로 파고드는 떨리는 손은 늘 클로드를 성적으로 자극했다. 클로드는 줄리안을 더 몰아붙였다. 줄리안의 몸이 거의 침대 끝까지 밀렸다. 싫어, 흐, 나, 놔, 놔줘, 하아아, 안 돼, 나, 나, 못 참아, 하으읏, 싫어요. 줄리안이 눈물과 타액이 가득한 얼굴로 애원하고 비는 모습은 또 얼마나 야한지, 클로드는 더 부풀고 있었다.
줄리안은 울고 불면서도 아래를 바짝 세웠다. 나올 것도 없을 텐데도 세우고 있었다. 위도 아래도 세우고 몸을 흔들었다. 안 되겠는지 안을 잔뜩 오물거렸다. 빨리 싸달라고 퉁퉁 부은 내벽이 애원했다. 바들바들 떨면서 참을 때는 언제고 지금은 발정 난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흣, 시발, 귀여워. 너, 존나, 진짜 존나 귀여워. 너, 흣, 이런 모습, 남에게, 보여주면, 존나, 그 새끼, 죽일 거야, 알았어?”
“아, 아, 안 해, 흣, 주, 죽여, 나, 그러니까.”
“죽여도 되지? 하아, 너 진짜 죽인다. 죽이게 야해. 그러니까, 내가, 흣, 그 새끼 죽여도 되지?”
“죽여, 나, 죽어, 싫어, 이제, 해, 해.”
줄리안이 클로드의 손가락을 풀려다 되지 않자 고개를 저었다. 머리를 마구 흔들 때마다 눈물이 흩뿌려졌다. 클로드가 줄리안과 키스하기 위해 손을 뻗으려고 했을 때 줄리안이 클로드의 손을 힘없는 주먹으로 때렸다.
“하라고, 시발 새끼야―!”
갈라진 목소리로 줄리안이 고함을 쳤다. 그 순간 클로드는 참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줄리안의 안을 쑤셨다. 아슬아슬하게 빼고 단숨에 처박았다. 줄리안이 힉, 힉,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도 멈출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절정이었다. 클로드는 줄리안이 가장 달아오른 곳까지 파고들어 힘을 풀었다. 벌써 네 번째인데 엄청나게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줄리안이 배가 아픈 듯 싫다며 울었다. 하, 하. 클로드는 바짝 마른 목소리로 웃었다.
“시발 새끼가 너무 많이 싸지?”
이제는 말도 섞기 싫다는 듯 흐어엉, 줄리안이 울기 시작했다. 클로드가 줄리안의 것을 놔주었다. 그러자 줄리안의 몸에서 희미한 색의 액체가 조금 흐르다 멈췄다. 클로드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 빨아먹으며 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섹스를 할 때 감정적이 되는 줄리안이 붉어진 눈을 옆으로 돌리고 있었다. 사정을 한 뒤라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은지 숨만 내쉬고 있었다.
“미안, 화났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클로드도 생각했다. 자꾸 말을 섞다 보면 줄리안이 감정적으로 격해지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섹스 때는 반드시 울리고 싶고 평소에도 곤란하게 만들고 싶어 근질거렸다.
“나가기나 하세요.”
“이번에는 얌전히 뒤처리 해줄게. 화 풀어라, 응?”
클로드의 말에 줄리안이 입 모양만으로 중얼거렸다. 퍽이나. 클로드가 손을 뻗어 줄리안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네가 존나 예뻐서 그랬어.”
“존나, 시발, 젠장을 빼면 전하의 입에는 뭐가 남는지 궁금하네요.”
줄리안의 말이 뾰족했지만 클로드는 개의치 않았다. 줄리안의 눈이 여전히 붉었다. 그의 가슴이 심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많이 분해 보였다. 그가 뭐라고 하든 당분간은 들어줘야 할 때였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안에서 느리게 자신을 빼내었다. 줄리안이 눈살을 찌푸렸다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만 눈을 감는다고 해서 표정이 감춰지는 게 아니었다. 클로드의 눈에는 줄리안의 표정이 그대로 보였다. 나가는 걸 아쉬워하고 아쉬운 감정을 느끼는 자신에게 짜증을 내는 듯했다.
“시발 새끼라서 그런가 보지.”
줄리안이 이를 악물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건 제 실수예요. 죄송합니다.”
“아냐, 기분 좋았는데, 왜? 계속 그렇게 불러.”
“실수라니까요.”
클로드가 완전히 나오자 줄리안이 몸을 일으키다 휘청거렸다. 클로드가 재빨리 줄리안을 잡아주었다.
“욕실까지 바래다줄게.”
“됐습니다.”
“씻겨줄게. 너 많이 지쳤어.”
“더 지치게나 안 하시면 다행이시겠네요, 전하.”
줄리안이 코웃음 치며 일어났다. 그의 다리 사이에 하얀 액체가 흐르는 것을 보며 클로드의 눈이 어두워졌다. 줄리안이 고개를 돌리다 그의 얼굴을 보고 “전하”라고 엄하게 그를 불렀다.
“얌전히 침대에 누워 계세요, 제가 올 때까지. 아셨습니까?”
클로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알았어, 알았어.”
줄리안이 클로드를 노려보고 욕실로 걸었다. 줄리안의 벗은 뒷모습을 보며 클로드가 흐음 하고 신음했다. 줄리안은 클로드를 자극하고 싶지 않은지 엉덩이에 힘을 주고 있었는데 그 바람에 엉덩이에 보조개가 생겼다. 후배위를 할 때마다 때려서 붉고 푸른 엉덩이라 가뜩이나 야한데 보조개까지 생기자 아래에 또 힘이 들어가려고 했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행에 옮기기 직전 줄리안이 욕실 안으로 사라졌다.
칫, 클로드는 혀를 찼다. 잠시 침대에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게 곤욕이었다. 줄리안이 올 때까지 누워 있을까 생각했던 그는 생각을 바꿨다. 피식, 피식, 그는 웃으며 줄리안의 휴대전화로 걸어갔다.
시발 새끼라고 했겠다?
얼마나 싫었으면 시발 새끼라고 했을까. 줄리안은 전혀 욕을 안 했는데 많이 열 받았던 게 분명했다.
“욕도 존나 깜찍하게 하지, 우리 애인.”
클로드는 킥킥 웃으며 휴대전화를 열었다. 그리고 그는 얼굴을 굳혔다.
『줄스, 보고 싶어. 못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이제 괜찮지 않을까? 나와 데이트 언제 해줄 거야?』
루시, 라는 이름이었다. 기집애 이름이군. 클로드는 입술을 올렸다. 맞아, 기집애일 수도 있지. 라이벌이 꼭 남자라는 법은 없었다. 그래, 그렇지.
다른 사람이 줄리안에게 데이트를 청하고 있었다. 입술을 올린 것과는 달리 클로드의 눈은 얼어붙어 있었다. 그는 아주 차가운 얼굴로 휴대전화를 노려보았다. 루시, 루시란 말이지.
그때, 징―, 휴대전화가 울렸다.
『대공은 우리 사이에 대해 모를 거야. 이제 만나도 될 것 같은데 언제 볼까? 난 언제든 좋아. 내가 시간을 맞춰볼게. 사랑해, 줄스. 너뿐이야. 안녕.』
클로드는 저도 모르게 휴대전화를 움켜쥐고 벽에 집어 던지려 했다. 그러나 그는 곧 힘없이 팔을 내렸다. 심장이 아팠다. 시발, 화가 날 줄 알았는데 토할 것 같았다. 내장이 모두 지끈거렸다. 모든 내장이 다 제멋대로 구겨지고 있었다. 자존심이 아파야 될 것 같은데 내장이 너무 아파서 자존심이 어디 있는지 찾지도 못하겠다.
클로드는 얌전히 줄리안의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침대로 돌아갔다. 지금이야말로 얌전히 누워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줄리안이 나왔을 때도 그는 여전히 누워 있었다. 이미 나갈 준비를 끝낸 줄리안은 얌전히 누워 있는 클로드를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가 아는 클로드는 아무리 얌전히 누워 있으라 해도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이 누워 있는 것을 싫어했다.
어디 아픈가? 아니면 뭔가 기분이 상했나?
줄리안은 걱정스러워져 클로드의 옆에 앉았다. 그러나 클로드는 눈을 감은 채 미동이 없었다. 자는 것 같기도 하고. 줄리안이 손을 내밀어 클로드의 금발을 쓸어내렸다. 차분히 만지고 있을 때 클로드가 갑자기 줄리안의 손목을 붙잡았다.
“전하?”
“우린 언제까지 이렇게 만나야 하지?”
이렇게?
이렇게 호화스럽게 만나야 하냐는 말인가? 하긴 아무리 대공이라고 해도 돈을 너무 많이 쓰는 방식이지. 줄리안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이런 방식은 좀 그렇죠, 전하.”
“그래?”
클로드가 눈을 떴다. 줄리안은 정말 걱정스러워졌다. 평소에 이만큼 섹스를 하면 환한 안색으로 얄미운 소리를 늘어놓는 클로드였는데 오늘은 표정이 어두웠다. 내가 들어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예, 그냥 룸을 하나만 빌리셔도 되는데요. 이건 너무 돈이 많이 들―.”
“시발, 누가 돈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아?!”
클로드가 고함을 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줄리안이 당황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클로드가 입을 달싹거렸다. 평소라면 이럴 때 미안하다고 했을 클로드가 아무 말도 없어서 줄리안은 고개를 돌렸다.
정말 내가 씻는 사이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그때 클로드가 줄리안의 턱을 붙잡았다.
“날 봐, 줄리안.”
“예.”
“나만 보고 있어.”
줄리안이 하하 하고 힘없이 웃었다.
“그건 좀 곤란합니다, 전하.”
클로드는 둘의 관계를 너무 빨리 진전시키고 있었다. 그러니 모든 것을 고려하는 건 줄리안이 되어야 했다. 대공과 백작가의 삼남. 대공과 시종. 남자와 남자. 대공은 선왕의 양아들이지만 스토메어 가문의 가주이기도 했다. 아직 미혼인 대공이 시종과 연애를 하는 것에 대해서 스토메어 가문은 어떻게 생각할까? 귀족들은 기혼이 되면 연애를 하거나 말거나 상관없지만 미혼인 시절에는 연애에 대해 상당히 간섭이 심했다. 결혼이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재산이 분할될 수 있는 위기. 스토메어 가문이 자신과 클로드의 관계를 탐탁잖게 여길 것은 당연했다.
줄리안도 클로드가 좋았다. 얄밉고 야하고 제멋대로에 욕을 입에 달고 사는 남자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와 만나기 위해 줄리안은 매일 마나를 들이붓고 있었다. 마나가 부족해서 더럽게 맛이 이상한 약까지 먹으며 마나를 보충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그와 계속 같이 있고 싶었다.
결혼하지 않겠다는 각서라도 쓰면 좀 낫지 않을까.
줄리안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곤란하다?”
클로드가 가만히 물었다. 숨이 막힌 사람처럼 얼굴이 굳어 있었다.
뭔가 이야기가 어긋나고 있다.
줄리안이 눈살을 찌푸렸을 때 클로드가 줄리안을 밀었다. 힘껏 민 것은 아니었지만 만나게 된 이래 클로드가 이런 식으로 줄리안을 민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거부? 나 지금 거부당한 거야?
줄리안은 생각보다 충격받았고, 그런 자신에게 놀랐다. 거절당할 거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감정을 가지게 된 걸까. 줄리안은 강제로 벌어진 클로드와의 거리를 바라보다 “이만 가겠습니다, 전하”라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고도 그는 기다렸다. 클로드가 뭔가 말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말이 없었다. 줄리안은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코트를 입고 휴대전화와 가방을 들었다. 잠시 멈췄으나 클로드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줄리안은 방을 나갔다. 클로드는 입을 달싹거렸다. 줄리안이 돌아보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이 일방적으로 화를 내고 있다. 그럴 만한 메시지를 보았다고 해도 해명 한 마디 들어보지 않았다. 줄리안이 뭐라고 하든, 설사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일단 들어봐야 했다.
줄리안, 돌아봐.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 아니, 멈추기라도 해. 제발, 나한테 조금만 시간을 줘봐.
그러나 줄리안은 멈추어주지 않았다.
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