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서장 줄리안 일리드의 성장 과정(1권) (1/13)

서장 줄리안 일리드의 성장 과정

 

일리드 가문의 수장인 크리스토퍼 일리드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다. 

첫째 아들 윌리엄은 후계자로서 모든 것을 철저히 배웠다. 요직을 두루두루 거치고 현재 재무장관 자리에 있는 크리스토퍼 일리드의 아들답게 영특한 머리를 가지고 있어서 가르침에 어려움이 없었다. 아이는 일곱 살부터 가정교사와 공부했고 열한 살에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월반 끝에 남들보다 2년 일찍 졸업하였고 일리드 가문의 차세대 수장으로서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굳혔다.

윌리엄이 아카데미에 들어갈 무렵 일리드 백작 부부에게는 둘째가 생겼다. 부부는 딸이기를 바랐으나 이번에도 아들이었다. 부부는 아들에게 벤자민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벤자민 일리드는 어릴 때부터 예민한 아이였다. 자주 아팠다. 아이는 침대에 누워 책을 보는 일이 잦았다. 그 때문인지 공부를 의무적으로 한 윌리엄과는 달리 벤자민은 학업에 적극적이었다. 백작 부부는 벤자민이 아카데미의 집단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는 아카데미의 특성상 아이가 따돌림을 받거나 하여 건강을 해치면 어쩔까 염려가 대단했다. 혹시나 아이가 크게 다쳤다는 연락이 올까 봐 노심초사하던 부부에게 연락이 왔다. 벤자민 일리드가 교내 도박 열풍을 주동하여 정학 처분을 받게 되었다는 연락이었다.

벤자민은 몸은 약했지만 모범생 타입이 아니었다. 병약한 아들이 알고 보니 왕립 아카데미 일진이었다는 현실에 일리드 백작 부처는 한참 동안 열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벤자민이 첫 정학 처분을 받았을 무렵 부부는 뒷목을 잡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 밤, 백작부인의 배 속에는 새 생명이 잉태되었다. 셋째 아들, 줄리안 일리드였다.

백작 부처는 이번엔 딸일 것이라 굳게 믿고 아이의 이름을 데이지로 지었으나 현실은 아들이었다. 다갈색 머리카락에 고동색 눈동자. 희미한 인상이었으나 부부에게는 누구보다 귀여운 아기였다. 그러나 그 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심상찮은 구석이 있었다.

일단 아이는 11개월 만에 태어났다. 고집스럽게 어미의 배 속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 아이를 꺼내기 위해 유도 분만을 해야 했다. 그렇게 나온 아이는 첫째나 둘째보다 총명했다. 아이는 책을 좋아했고 부부는 그런 아이가 귀여웠다. 그래서 무릎에 앉히고 여러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아이는 더욱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이는 책을 읽어달라 졸랐다. 울고 떼쓰고 빌었다가 애교를 떠는 등, 사람을 달달 볶았다. 백작 부부는 물론이고 큰형까지 학을 떼게 만든 아이였다. 결국 세 명의 가족은 합심하여 세 살짜리 아이에게 글을 가르쳤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아이도 글을 배우는 걸 좋아했다. 아니, 필사적이었다. 아이는 스스로 동화책을 읽고 싶었고 본인의 의지와 적극적인 환경이 만났으니 결과는 순조로울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세 살에 글을 배웠다.

그러나 네 살이 되자 아이는 다시 떼를 쓰기 시작했다. 동화책이 없어, 새로운 책이 없어. 아이는 울부짖었다. 모든 책을 다 암송할 수 있게 된 아이는 새로운 이야기에 목말라 했다. 아이가 너무 괴로워하자 귀여운 막냇동생이 가엾어진 큰형 윌리엄은 이웃나라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1년 전을 기억해야 했다.

아이는 다시 울고불고 매달렸다. 매일 매순간 새로운 책을 읽어달라 했다. 어쩔 수 없이 이웃나라의 글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웃나라 동화책이란 동화책은 다 끌어다 주었다. 아이는 행복하게 새로운 동화책들을 읽었다. 그리고 1년. 다시 동화책은 동이 났다.

아이는 ‘다른 나라 동화책’이라는 존재를 알았다. 세상에는 외국이 한 나라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다른 나라 말을 알려달라 매달렸다. 엄청나게 매달린 끝에 이번에는 어머니가 아이에게 글을 가르쳤다. 아이는 또 행복하게 1년을 보냈고 그다음에는 아이가 조르기 전 아버지가 외국어를 가르쳤다. 아이는 또 행복한 1년을 보냈지만 다른 식구들에게는 악몽의 1년 후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는 읽을 책이 있는 한 순하고 얌전하고 책에만 빠져 있는 귀여운 어린애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읽을 책이 없어지면 엄청난 떼를 부리며 매일 통곡했다. 매를 맞거나 어두운 옷장 속에 갇혀도 끝없이 울었기 때문에 식구들은 아이에게 손을 든 지 오래였다. 식구들은 오들오들 떨면서 행복한 1년이 지나가는 것을 두려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줄리안 일리드. 일곱 살. 기초 수준 4개 국어 가능.

궁정 사교계 내에서는 일리드 가문의 셋째가 천재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아버지인 크리스토퍼 일리드는 그때마다 뜻 모를 미소만 지었고, 어머니인 스칼렛 일리드는 ‘뭐, 우리 애가 예쁘고 똑똑하긴 하죠’라고 말하며 일단 잘난 아들을 둔 어머니의 역할을 즐겼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는 큰아들을 붙잡고 ‘남들이 막내가 어떤 애인지 알게 되면 뭐라고 말할까?’라며 한숨을 쉬었다. 윌리엄은 그때마다 모친을 안심시켰다. ‘남들이 알게 되기 전에 꿍쳐놓은 동화책을 쥐여주면 됩니다, 어머니.’

가정교사로 온 남자는 아이의 괴상한 집착을 알아차렸다. 아이는 공부를 싫어했고 동화책만 읽고 싶어했다. 가정교사는 싱긋 웃었다. 그는 평범한 가정교사였다. 아주 잘 가르치지도 않았고 아주 훌륭한 학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매우 특별한 재능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이야기였다. 그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데 특별한 능력이 있었고 그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아이는 바로 달라졌다. 아이는 언제나 가정교사가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렸고 가정교사에게 이야기를 한 토막이라도 더 들어내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기세였다. 하지만 가정교사는 자신이 가진 카드를 결코 쉽게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아이가 애달 만한 곳에서 이야기를 끊고 ‘숙제 잘하지 않으면 내일은 아무것도 얘기해주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며 많은 숙제를 내주었다. 아이는 가정교사에게 매일 매달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안 돼요? 조금만요.’

그러나 가정교사는 쌩하니 가버렸다. 그는 초과 근무를 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그 무정한 뒷모습을 보며 울고, 숙제를 하면서 울고, 잠을 자면서도 분해서 이불을 씹으며 울었다. 그리고 다음 날의 태양이 뜨면 두근두근한 얼굴로 가정교사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나 이 가정교사와도 헤어질 그날이 찾아왔다. 줄리안 일리드는 열한 살이 되었다. 즉,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때쯤에는 벤자민도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벤자민은 자신의 막냇동생을 몹시 귀여워했다. 막내는 새집처럼 엉키는 다갈색 고수머리에 밤비 같은 고동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고조모가 동양인이라고 말만 들었지, 막내처럼 진하게 타고난 혈육은 이제까지 없었다. 내 귀여운 동생, 우쭈쭈. 벤자민은 막내를 가끔 놀리기도 하면서 언제나 품에 싸고돌았다. 우리 천사 같은 막내, 등에 날개는 왜 없나? 이런 낯간지러운 말도 서슴지 않을 정도였다.

‘안 돼애애애애―.’

그리고 그는 지금 천사 같은 막내의 진정한 자아를 목격하며 말을 잃었다.

그의 막냇동생은 울고 떼쓰고 가정교사에게 가지 말라며 다리를 잡고 매달렸다. 열한 살짜리는 제법 무거웠고 가정교사는 고용주의 아들을 한쪽 다리에 매단 채로 걸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솔직히 이 도련님이 사랑스럽기도 했다. 정이 갔다. 매일 자신만을 기다리고 자신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4년간 그래온 도련님에게 어떻게 애정이 안 갈까. 가정교사는 난처해졌다.

‘가야죠. 도련님도 아카데미에 가셔야 하고 저도…….’

가정교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 저도 다른 도련님을 가르쳐야 하고요, 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나 자신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다른 아이에게 너처럼 해줄 거야, 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아이를 가르치긴 하겠지만 이 아이에게처럼 잘해줄 수 있을지 스스로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 도련님이 워낙 잘해준 덕분에 귀족 가문 사이에서 가정교사의 주가는 확 뛰어올랐다. 그러나 이 도련님만큼 잘 따라와줄 학생이 또 있을까.

‘저도 가서 결혼 준비해야죠, 도련님? 신부가 삐지겠어요.’

가정교사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아이는 눈을 크게 떴다. 겨, 결혼. 우느라 콧물에 침까지 흘리고 있는 얼굴이었다. 조그만 입술이 반질거렸다. 아이는 크게 뜬 눈을 깜빡이다 ‘그럼 나랑도 해요!’라고 매달렸다.

백작가의 구성원들이 황당한 얼굴을 하든 말든 당시의 줄리안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줄리안은 그저 자신의 소중하디소중한 가정교사만이 중요했다. 이렇게 재미있게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은, 그리고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어린 줄리안은 확신에 차 있었다.

‘도련님, 그건 안 돼요.’

잠시 아이에게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가정교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안 돼요, 왜애. 그럼 내가 첩이 될 테니까 나도 같이, 악!’

벤자민 일리드는 더는 참지 못하고 사랑스러운 막냇동생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벤!’

어머니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책망했지만 벤자민은 도리어 얼굴을 찌푸리며 ‘어머니, 오냐오냐할 일이 아닙니다’라고 어머니의 말을 막았다. 순간 세 명의 머릿속에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네가?’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시집살이도 해본 사람이 더 시킨다고 일진 출신의 벤자민은 우악스럽게 막내의 뒷덜미를 잡았다.

‘이거 놔! 놓으라고! 가지 마, 가지 마요, 선생니임!’

줄리안이 사지를 버둥거리며 울었으나 가정교사는 이때다 하는 얼굴로 마지막 급료를 받고 부랴부랴 저택을 떠났다.

그렇게 줄리안 일리드는 집안의 반대로 첫사랑을 잃었다.

그해, 줄리안은 매일같이 울어서 퉁퉁 부은 붕어 같은 얼굴을 하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검술, 마법학, 인문학. 세 개의 클래스 중 ‘아무거나’라고 말했고 무난한 인문학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줄리안은 왕립 아카데미의 자랑인 도서관과 만났다.

세상의 모든 책이 있을 듯한 그 도서관은 줄리안의 마음을 한순간에 사로잡았다.

『그대의 목소리는 세상의 모든 새가 화음을 이루어 노래하는 듯,

그대의 존재는 우주의 의의입니다.』

줄리안은 저학년 때 매일같이 연애시를 썼는데 상대는 언제나 도서관이었다. 2학년이 되었을 때 줄리안은 3학년부터 인문학부와는 달리 마법학부는 밤에도 자유롭게 도서관을 드나들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마법학부는 세 개의 클래스 중 가장 인기가 많았다. 줄리안은 죽기 살기로 공부하여 1년치 마법학부의 기초 공부를 독학으로 마치고 2학년 중반에 마법학부로 편입했다.

2학년 때 줄리안의 룸메이트는 회상한다.

‘처음 한 달은 평범했거든요. 그리고 갑자기 미친 듯이 마법학 공부를 하는 거예요. 그러더니 온갖 마법학 교수들과 애들을 쫓아다니면서 모르는 걸 배우고 안 가르쳐주면 화장실까지 쫓아다니더니 다음 학기에 마법학부에 편입하더라고요. 걘 천재예요. 어릴 때부터 일리드 가문의 삼남이 천재라는 소문은 들었거든요. 그런데 아카데미 와서 보니까 그냥저냥 평범하더라고요. 그런데 갑자기 자지도 먹지도 않고 공부를 하더니 아카데미 최초로 학부 편입에 성공했어요. 솔직히 그게 가능하다는 생각도 안 해봤었거든요.’

‘부러웠나요, 일리드 씨의 천재성이?’

룸메이트는 코웃음 쳤다.

‘전혀요. 전 천재가 아니어도 좋으니 미치지 않은 채로 살고 싶거든요.’

줄리안 일리드가 스물다섯 살이 되었을 때 한 신문사가 그의 친구들을 찾아가 진행한 인터뷰이다. 줄리안의 3학년 때 룸메이트의 증언은 더 심했다.

‘룸메이트…… 라고 말하기에는 좀 어폐가 있네요.’

‘어째서죠?’

‘걘 방에 들어온 적이 없거든요. 전 혼자 방을 썼어요. 줄리안은 도서관에 미쳐 있었어요. 샤워는 체육관 옆에 있는 공용 샤워실에서 하고 세수와 양치는 도서관 화장실에서 했어요.’

줄리안은 4학년 때 마법학부와 인문학부를 통틀어 전체 성적 우수자 세 명에게만 주어지는 도서관 내 독방을 쟁취했다.

7학년을 마치고 18세, 2월에 졸업할 때까지 줄리안은 내내 그 방을 놓치지 않았다. 아무도 줄리안에게서 그 방을 빼앗지 못했다.

아카데미의 모든 구성원―동급생은 물론이고 선배, 후배, 교수들, 행정과 직원들, 심지어는 미화원이나 경비원들까지도―이 줄리안 일리드가 괴상하다고 생각했다.

천재면 뭐해, 미쳤는데.

이것이 줄리안 일리드에 대한 세간의 평가였다.

남이 뭐라고 하든 간에 줄리안 일리드는 왕립 아카데미 도서관과 사랑에 빠졌다. 그의 두 번째 사랑은 첫 번째보다 장기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결국 헤어질 날이 왔으니, 줄리안 일리드의 졸업식 날이 다가온 것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에 있어서 한없이 적극적이었다. 왕립 아카데미에 남아 이 도서관과 계속 사랑을 이어갈 수 있는 법이 없는지, 그는 필사적으로 찾았다. 급기야 미화원이나 경비원이 돼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일리드 백작이 애지중지하는 막내아들을 채용할 아카데미가 아니었다. 줄리안은 졸업 전 한 달 동안 모든 의견을 제시했지만 아카데미는 그 모든 의견을 무시했고 줄리안은 하루하루 비척비척 말라갔다.

졸업식 당일, 졸업생 대표 줄리안 일리드는 강당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도서관을 빠짐없이 어루만지고 그 한중간에서 이별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사과주―왕립 아카데미에 있는 유일한 술이었다―를 와인 잔에 담아 도서관의 펼쳐진 책 조각상 앞에 두고 저도 한 잔 든 채 ‘사랑해’라고 말하다 질질 짜고 있었다. 그리고 퍽, 뒤통수를 맞은 줄리안이 앙칼진 눈으로 뒤를 노려보았다.

작은형 벤자민이 서 있었다.

‘왜!’

‘너 때문에 내가 못산다, 진짜. 쪽팔려서 살 수가 없어!’

줄리안의 등짝에 차진 스매시 한 방.

‘아야! 하지 마! 아야! 아야! 아야!’

스매시는 계속되었다. 줄리안은 도망쳤고 벤자민은 쫓아다니며 그 등을 계속 후려쳤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나머지 세 식구는 벤자민이 질색하는 얼굴을 보며 ‘우리도 낯부끄럽긴 하지만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도 아닌 왜 네가……?’라는 표정이 되어 멍하니 추격전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줄리안은 두 번째 사랑을 잃었다.

역대 손꼽히는 성적으로 졸업한 줄리안 일리드였으나 그는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채 집 안에 처박혔다. 친구들은 최고 대우를 받으며 전장에 나간다, 회계 법인에 들어간다, 사법고시를 본다, 다들 할 일도 많고 계획도 많은데 정작 수석이었던 줄리안은 침대 안에서 고치를 만들고 있었다.

‘우리 막내, 이제 슬슬 진로도 좀 찾아봐야지.’

어머니는 다정하게 줄리안을 달랬다.

‘아, 좀 일어나라! 그럼 도서관 사서로 취직이라도 하든가!’

둘째형 벤자민은 줄리안을 닦달했다.

‘조금만 쉬고 같이 생각해보자. 분명 네가 좋아할 만한 일이 있을 거야. 응?’

큰형 윌리엄은 줄리안을 위로했다.

그리고 아버지, 크리스토퍼 일리드가 줄리안의 방에 들어온 것은 어느 봄날이었다. 줄리안은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오셨어요.’

크리스토퍼 일리드는 막내아들의 손에 들린 책의 제목을 확인했다. 보석 사과. 유명한 동화책이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웃었다.

그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다. 영특하고 점잖으며 믿음직스러운 첫째, 예민하고 몸이 약하지만 그만큼 총명하면서 센스가 좋은 둘째, 그리고.

도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도 알 수 없는 괴상하고 사랑스러운 막내.

자식들은 전부 귀여웠고 자랑스러웠으나 그의 눈에 가장 밟히는 이는 역시 막내인 줄리안이었다. 좋아하는 것에 맹목적으로 집착하고 그 외의 것에는 시들한, 이 극단적인 아이는 아직 열여덟 살이었다. 이렇게 빛바랜 표정으로 침대 위에 앉아 있을 나이가 아니었다.

크리스토퍼는 아들의 침대에 앉아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 책이 좋으니?’

‘예, 제일 좋아합니다.’

‘무슨 내용이었지?’

보석 사과를 찾으러 가는 공주님과 그녀를 보필하는 기사의 이야기. 알고 보니 기사는 공주의 약혼자인 옆 나라 왕자였다. 철없는 공주님과 그녀를 사랑하는 기사는 보석 사과가 열린다는 보석 사과나무를 찾아 헤매지만 정작 찾아낸 나무는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향기로운 사과가 아닌 이상하게 번뜩거리는 돌멩이만 열린다며 울고 있었다. 그리하여 공주님과 기사는 사과나무에게 마법을 건 나쁜 마법사를 찾아내 그를 혼내주고 사과나무에는 다시 향기로운 사과가 열리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줄리안은 시무룩한 얼굴로 외운 내용을 읊었다. 대사 하나, 묘사 하나 틀리지 않는 아들은 우울해 보였다.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어서 우울해하는 아이라니.

‘넌 어릴 때부터 그런 이야기를 좋아했지. 공주님, 왕자님, 기사님, 마법사, 이런 이들이 나오는 이야기들 말이다.’

아버지의 말에 줄리안은 고개를 들었다. 그랬다. 줄리안은 그런 이야기가 좋았다. 그는 현실에 관심이 없었다. 공부를 열심히 한다든가 친구들과 이런저런 일을 한다든가 하는 일에 무심했다. 줄리안은 그런 것들이 따분했다. 그에 비하면 책 속의 이야기는 얼마나 근사한가. 모험과 사랑, 우정과 배신. 모든 감정들이 증폭되어 있는 세계.

‘여전히 좋으니, 줄리안?’

‘예.’

‘그럼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건 어떠니?’

아버지의 말씀에 줄리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직접…… 보다니, 무엇을? 보석 사과를?

‘머리라도 식힐 겸 현실의 왕자님과 공주님은 어떤 사람들인지 보고 오려무나, 마법사 줄리안.’

그렇게 줄리안 일리드의 새 인생이 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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