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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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손아귀 안쪽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한유일은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뜨기도 전에 손부터 움직였다. 머리를 만져 주던 직원이 깜짝 놀랄 만큼 재빠른 속도였다.

메시지를 확인한 그는 이내 동요한 적 없는 듯한 낯으로 돌아와 핸드폰을 엎어 두었다. 환하게 반짝거리는 분장실 거울 아래, 핸드폰이 침울하게 잠들었다.

“뭐예요?”

아직 놀란 채 허공에 두 손을 멈추고 있던 헤어 디자이너가 물었다.

“광고 문자네요.”

“아, 요즘 진짜 많이 오죠?”

“네.”

작고 간결하게 답한 유일은 재차 눈을 감았다. 하얗고 도톰한 눈꺼풀이 스륵 닫히고, 겉보기에는 제법 평화로운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머릿속은 달랐다. 도저히 평온해지지가 않는다. 온갖 색깔과 크기를 가진 ‘강한’이라는 글자가 온 신경을 다 점령한 것만 같았다.

‘전화, 한번 더 해 볼까.’

아주 느리게 눈을 뜬 유일이 핸드폰과 눈싸움을 했다. 마음은 이미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 보기로 기울어 있었지만, 지난밤부터 숱하게 쌓아 놓은 메시지와 전화 수가 마음에 걸렸다. 우습게 연락 빈도를 두고 관계의 우위를 고심한다거나 자존심이 상해서는 아니다. 다만 새삼스러운 걱정이 들었다.

이 이상 더 집요하게 굴었다가는 집착으로 느끼지 않을까. 그러니까, 또……. 어리고 미성숙한 대처가 되지 않을까.

바늘처럼 쿡 쑤셔 오는 기억에 인상을 찌푸린 때, 엎어져 있던 핸드폰이 길게 진동했다. 문자 알림보다 더 길고 커다란 소음에 유일은 눈을 번뜩 떴다. 이번에는 디자이너가 아예 ‘엄맘마!’ 하고 튀어 올랐다.

“죄송해요.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아니나 다를까. 액정 위로 그토록 기다리던 이름이 보였다. 유일은 식겁한 직원에게 사과하며, 신속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스타일링을 위해 꽂아 놓은 형형색색 집게들을 머리에 가득 매단 채로.

“아니, 배우님, 그 커트 보라도 빼고…….”

눈을 동그랗게 뜬 직원이 손을 뻗었다. 그러나 한유일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상체에 하얀 커트 보를 그대로 덮은 남자가 바람을 휙 일으키며 달려 나갔다. 거칠게 열리고 닫힌 문이 굉음을 냈다. 그 너머에 홀로 남은 디자이너는 허망한 낯으로 고개를 젓는다. 평소 큰 소리 내는 일이 드물었던 사람인데, 얼마나 급하면……. 중얼거리던 그녀는 구석에 놓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유일이 돌아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듯했다.

복도로 빠져나온 한유일은 곧장 버튼을 눌렀다. 혹시 전화가 그새 끊기기라도 할까 봐 아주 조급하게.

“한아.”

복도를 달리다시피 행진하며 그는 가까스로 숨을 골랐다. 평온한 척 목소리를 지어내자 수화기 너머 강한 역시 평소처럼 응했다.

[어. 전화 많이 했었네, 미안. 약 먹고 일찍 잤거든.]

살짝 잠긴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갈라졌다. 아직도 감기가 다 떨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열은 어때. 괜찮아?”

[멀쩡해. 일어나자마자 전화한 거라, 목이 좀 잠겼기는 한데……. 아프지는 않고.]

“다행이다.”

그제야 내내 쫓기듯 걷던 걸음이 느릿해진다. 유일은 습관처럼 머리를 쓸어 올리려다 뾰족하게 꽂힌 핀들을 알아채고 허공에 손을 멈췄다. 낮게 허탈한 웃음을 흘린 그가 건물 밖 후미진 구석에 섰다.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면서는 잠시 핸드폰을 멀리 두었다. 이따금 흡연한다는 사실을 강한이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같은 때에는 굳이 분명하게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음, 오늘도 출근하는 거지?”

희고 매캐한 연기를 느릿하게 뱉어 내며 물었다. 조용하고 어색한 공기를 견뎌 내던 강한은 한 박자 느리게 답했다.

[어, 아무래도…….]

그 역시 유일과 같은 기억을 더듬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유일은 담배를 빨아 당기고 뱉어 내는 동안의 침묵을 굳이 채우려 노력하지 않았다. 부러 더 천천히 호흡하고 흉곽을 크게 부풀렸다. 어른스럽게, 성숙하게, 느리고 여유롭게. 그렇게 이번 일을 대하고 싶었다.

[카페 일 도와 달라고 상수랑 사장님한테 연락했었다며. 둘 다 와 줘서 어제 카페 일도 한가했어. 푹 쉬었고.]

“응, 상수가 일 많이 해 줬어?”

[너 욕 많이 하던데. 자기 직장인이라는 사실을 자주 까먹는 것 같다고.]

아하하, 한유일은 일부러 더 밝게 웃으며 벌써 다 태워 버린 연초를 갈무리했다. 다시 정적이 흐른다.

[퇴근하고 바로 연락한다는 게……. 잠들어 버려서……. 걱정했겠다, 미안.]

“괜찮아. 일어나자마자 전화해 줬잖아.”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원래도 다 타 버린 속을 드러낼 성정은 아니었지만, 평소였다면 고의적인 동정표를 얻었을 것이다. 일부러 시무룩하고 측은한 목소리를 내면서 ‘한이 걱정하느라 한숨도 못 잤어.’ 하고 은근히 콩고물을 바랐을 모습이 훤했다. 하지만 유일은 애써 의연하게 행동했다. 음성을 더 띄우고, 더욱 웃었다.

[한유일. 그, 너 가기 전에 내가 했던 말…….]

낯선 반응이 강한이라고 편할 리 없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그가 먼저 본론을 꺼내 들려 했다. 유일은 왜인지 긴장하며 핸드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워 받았다. 홀린 것처럼 새로운 연초가 입술 새에 물린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됐는데 내가.]

“유일 씨! 의상 피팅 좀 해 봐야겠는데요?”

불을 붙이는 동시에 커다란 외침이 울렸다. 한유일은 피어오르는 연기 탓에 미간을 좁힌 채로 멀리 저를 찾는 매니저를 보았다. 그는 해외 스케줄이 있을 때에만 영송 대신 일을 봐주는 새 직원이었다. 몇 번 보았음에도 눈에 영 익지 않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일은 불을 껐다. 긴 장초를 짓이기는 동안, 수화기 너머에서는 머쓱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 촬영 들어가나 보네. 이따 통화하자. 아니다, 새벽 비행기로 돌아온다고 했나? 피곤할 텐데 와서 얘기해.]

“으음……. 그래. 미안해, 한아.”

[뭐가 미안하냐. 일하는데 내가 전화했잖아.]

“그래도.”

[별걸 다 미안하대. 끊어, 일 잘하고.]

“응. 연락할게.”

뱉어 내는 글자 하나하나에 아쉬움이 뚝뚝 묻어났다. 그러나 짤막하게 끝낼 통화가 아님을 유일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 하얀 얼굴이 한숨을 삼키며 셔츠를 펄럭였다. 희미한 담배 냄새가 공기 중으로 나풀거린다.

“매니저님. 돌아가는 비행기 몇 시죠?”

정중한 질문에는 어쩐지 짜증이 가득 묻어 있었다.

***

공은수는 남들 기준으로 꽤 유별난 팬이었다. 그녀는 한유일의 온갖 필모그래피를 섭렵하고 데뷔 초 역사부터 줄줄이 꿰고 있는 이른바 코어 팬이었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극성 팬’에 대해 가진 편견과는 부합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유일의 사생활과 연애를 궁금해하지 않았고 스케줄이 아닌 이상에는 만날 기회를 피해 다녔으며, 사소한 항목 하나하나를 다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유일의 연기와 작품을 좋아했다. 아주 솔직히는, 얼굴과 몸을 포함해서.

“후우…….”

그렇기에 은수는 벌써 수십 번 쏟아진 한숨을 모르는 척했다. 강한이 죽상으로 한숨을 푹푹 쏟을 때마다 괜히 카페 테이블을 정돈하고 잘되어 있는 의자를 매만졌다. 그러면 혼자 심란해하던 강한은 아주 잠시간 정신을 차렸다. 요즘 카페는 잘돼요? 현경이는 어때요? 속이 텅 빈 그런 질문들을 해 가며 분위기를 띄우려 애썼다.

“남편분이랑은 잘 지내요?”

“응, 요즘 괜찮아. 생일 기념으로 게임기 사게 해 줬더니 아주 모시고 살 기세야.”

“아아.”

어렵게 띄웠던 목소리가 또 땅바닥에 꽂혔다. 느리게 가라앉는 시선과 낮게 쿨럭쿨럭 기침하는 얼굴에 사연이 덕지덕지 묻었다. 후우우. 이번 한숨은 공은수에게서 흘러나왔다.

“야, 한 대 피고 오자.”

안 되겠다 싶었던 그녀가 먼저 자리를 털었다. 가방에서 담배와 불만 챙겨 일어선 은수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가게 바깥으로 나섰다. 학교와 가까운 상권이라 흡연 구역은 건물과 건물 사이 으슥한 골목이 전부였다. 더러워진 콘크리트 담벼락 옆, 허용량을 초과한 은색 재떨이가 꽁초를 뱉어 내며 그녀를 반겼다.

먼저 불을 붙인 은수는 옆으로 커다란 덩치가 서기 전까지 어느 한 기억을 곱씹었다. 지금과 변함없이 거대하면서도 훨씬 더 어렸던 강한을 처음 만난 날이었다.

그즈음 카페는 아주 한적했다. 이대로라면 장사 금세 말아먹겠다 싶어 천하의 공은수조차 울적해질 만큼이나. 그래도 그녀는 부지런히 재료를 준비하고, 닦고, 직접 원액을 만들며 노력했다. 특히 나름의 무기라고 생각한 살구 에이드에는 남는 돈이 무색할 만큼 힘을 쏟았다.

그날 역시 살구를 손질하던 참이었다. 철도 많이 타고 손질도 수고로운 살구를 박박 닦아 자르고 담는 내내 카페는 적막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묘한 소음이 섞여 드는 것이다.

사람의 호흡 소리. 부스럭대는 소리. 훌쩍거리는, 젖은 소리.

파드닥 카운터로 달려 나간 공은수는 두 번 놀랐다. 드물게 키 큰 사람이 우두커니 서 있어서 놀랐고, 그 남자의 낯이 설움으로 물들어 있어서 더욱 놀랐다. 그런데도 그는 울고 있지 않았으므로 더더욱 기이했다.

분명 젖은 호흡을 들었는데 발간 눈에 그득한 물기가 떨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고여만 있었다. 이미 충분히 울고 온 길인지 아니면 독하게 참아 내고 있는 중인지는 몰랐다. 은수는 그저 부르시지 그랬느냐 어색하게 사과하며 주문을 받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 앞에서 그녀답지 않게 말이 많아졌다. 정체불명의 손님이 쉽게 메뉴를 고르지 못한 탓도 있었다.

그렇게 길어지던 주문 한가운데서 꾸역꾸역 눈물을 참던 남자는 기어코 울컥하고 말았다. ‘저희 카페에 살구 에이드가 대표 메뉴인데 손질이 좀 까다로워요.’라는 정말이지 울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말 때문이었다. 한번 터진 눈물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그는 구석 자리에 앉아 살구 에이드를 두 손으로 쥔 채 계속 울었다. 아이처럼 엉엉 울면서도 음료를 빨아 먹고, 또다시 서럽게 울기를 반복했다. 공은수에게는 생애 가장 당황스럽고도 웃긴 손님이었다.

그 황당한 손님이 아르바이트생이 되었다가 매출 상승의 주요 원인이 되고, 직원과 매니저를 지나 마침내 점장이 되기까지. 공은수는 두 번 다시 강한의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 통곡이나 오열은커녕 시무룩하게 처진 모습조차 목격하기 어려웠다.

그는 인상과 이름대로 강한 남자였다. 좀처럼 약한 소리를 하지 않았고 불평불만이 적었다. 가까운 사람에게는 정이 많아 한없이 퍼 주고 또 잘 지는 성격이면서,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제법 매몰차게 굴 줄도 알았다. 은근히 하고 싶은 말은 참지 않았고 답답한 처세를 참고 견디는 편도 아니었다. 첫인상과 다르게 야무진 놈이라고, 은수는 분명 강한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랬는데…….

“너 뭔 일인지 말할 거야, 안 할 거야.”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울 때까지도 강한은 아무 말이 없었다. 마치 카운터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그날처럼, 설움을 가득 눌러 놓은 얼굴 그대로.

푸우우우. 입술을 울려 들으란 듯 갑갑한 숨을 터트린 은수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배우님 일이라서 말 못 하겠는데, 다른 사람한테는 더 못 하겠고. 그렇지, 너 지금?”

눈썹을 매섭게 휙 들어 올린 채 따져 물었다. 강한은 말없이 새로운 담배를 하나 물었다. 고심하며 흔들리던 눈동자가 허공을 향했다.

“오래 좋아한 사람이랑 헤어지고도 어쨌든 다들 살아가잖아요.”

“뭐?”

“…다 어떻게 그러지?”

대충 하소연이나 들어 주고 보내려던 은수의 입술이 맥없이 벌어졌다. 짧아진 꽁초를 바닥에 내던지듯 뱉어 내며, 그녀는 얼른 강한을 잡아끌었다.

“야. 너 하나부터 열까지 다 불어, 당장!”

느닷없는 불호령에도 강한은 말없이 불을 붙였다. 은수가 명한 ‘하나부터 열까지’라는 조건이 제법 어렵게 느껴진 탓이었다.

“말하려고 보니까 진짜 사소하고 바보 같은 일들인데……. 말을 좀 심하게 해서.”

“누가? 네가?”

“네.”

곧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긴박하던 은수의 눈동자가 누그러졌다.

희대의 진상 손님이 몇 시간씩 괴롭혀도 강한은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하는 놈이었다. 어제 다녀간 고등학교 동창 상수 앞에서는 말투가 조금 편해지고 비속어도 더러 사용하는 듯했지만, 은수 기준에는 여전히 심심한 투였다. 감정 기복의 폭도 크지 않았고 어떤 상황이든 대체로 담담하게 말했다. 심하게 말했다고 해 봤자 저와 남편이 연애 시절 주고받던 말들에 비하면 간지러운 수준일 테다.

“천하의 강한이 참도 말을 심하게 했겠다.”

그녀는 약간 김이 샜다는 듯 웃었다. 강한의 반박은 물고 있던 연초를 모두 피웠을 쯤에야 연기처럼 흘러나왔다.

“아프니까 좀 쉬라고 걱정해 준 건데. 거기에 대고 애처럼 왜 그러냐고 했는데도요?”

희미한 중얼거림에 허탈한 웃음이 섞여 들었다. 강한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허공에 불씨를 탁탁 튕겨 냈다.

고요해진 은수가 강한의 두터운 팔뚝을 두드렸다. 턱, 턱, 힘 빠진 위로를 건네며 그녀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애처럼 왜 그러느냐……. ‘연하 애인과 싸울 때 절대 하지 말아야 될 말’ 목록이 있다면 1위에 올라 있을 말이 아니던가. 제 일처럼 한숨을 포옥 길게 내쉬며 은수는 중얼거렸다.

차라리 쌍욕을 하지, 인마…….

“그래서. 지금 배우님 해외 촬영 중 아니야?”

“네. 뱉어 놓고 바로 수습하려고 했는데 그게 좀 안 됐어요. 타이밍이 안 맞아서. 제대로 말 못 나누고 출국한 데다가, 어제 퇴근하고는 약 먹고 뻗어 버렸고…….”

“그래서 아까 전화할 때 완전 이상했구나.”

“한유일은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데 좀, 기가 죽은 것도 같고.”

강한은 은수 말대로 완전 이상했던 통화를 상기하며 다시금 한숨지었다. 명도를 꾸며 낸 유일의 목소리가 아른거린다. 그따위 말을 해 놓고 저녁부터 연락이 두절되었던 애인에게 뱉기에는 너무 인위적인 밝음이었다. 그런 기색을 느끼는 순간 강한은 덜컥 겁이 났다. 이러다가, 정말 이런 식으로. 흔한 커플들처럼 사소한 다툼 하나에 이별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너답지 않게 말을 왜 그렇게 했어? 요즘 자주 싸우니?”

“그건 아닌데, 그……. 사실은요.”

“응.”

은수는 탓하는 듯이 흘겨보면서도 모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한은 꽁꽁 감싸 눌러 놓았던 치사한 감정을 슬며시 꺼내 보았다. 오랜 연애 끝에 결혼 생활까지 하고 있는 은수에게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듯했다.

“요즘… 그 사람 있잖아요. 유일원이라는 배우…….”

“아.”

고작 한 마디에 그녀는 가닥을 잡은 것처럼 눈썹을 꿈틀거렸다. 강한은 어쩐지 창피해진 기분으로 담뱃갑을 만지작거린다.

지난번 베드 신 질투 사건을 이후로 두 사람에게는 이렇다 할 굴곡이 없었다. 툭 까놓고 다 표현하고 보니 뒤끝이 사라지기도 했고, 유일이 매번 ‘로맨스는 하지 말까?’ 하고 물어 대는 통에 질투보다는 웃음이 먼저 났다. 오히려 그때 그렇게 질투심을 표현했던 게 민망하기까지 해서 그 뒤로는 한유일이 서운하게 느낄 만큼 의연한 대처를 했다. 어차피 한유일 너 나밖에 모르잖아. 담담한 대답 하나면 유일도 웃으며 받아들였다.

그런데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 ‘유일원’은 1년 가까이 이어진 두 사람의 안정기에 쉽게 균열을 냈다. 지난여름 방영된 예능에서부터였다.

그는 이름부터 한유일과 두 글자가 겹치는 데다가 정원고등학교 출신이었다. 그뿐 아니라 웃을 때면 보조개가 폭 들어가는 하얀 얼굴이나, 데뷔를 퀴어 독립 영화로 한 점도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이 함께 브로맨스 노림수가 충만한 웹 드라마를 찍은 이후부터는 온갖 프로그램이며 하다못해 화보 촬영조차 엮이는 일이 많았다.

일원은 어딜 가도 한유일의 후배라는 사실을 자랑스레 이야기하고, 가장 존경하는 선배로 그를 꼽았다. 유명인의 일상과 집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예능 프로그램 에서는 벽면 가득 붙인 한유일 출연작 포스터를 공개하기도 했었다.

처음 한유일은 일원을 부담스러워했다. 겉으로야 함께 일하는 동료이니 친절하게 대하고 방송에 나가 곧잘 추켜세우는 말도 해 주었지만, 보이지 않는 벽이 강한에게만큼은 느껴졌다. 보다 못한 강한이 ‘그렇게 좋아하는 선배라는데 잘 좀 대해 줘라.’ 하고 언질을 줄 정도였다.

그런데 웹 드라마 홍보 차원에서 나갔던 <못 풀면 못 나가는 방>이라는 예능 이후로는 벽이 사라졌다. 그 한유일이 먼저 말을 놓았으며 사적으로도 만나는 일까지 몇 번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강한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유일은 연예계 활동을 오래 했음에도 그쪽 바닥에 친한 지인이 별로 없었다. 팬들은 사고 칠 일이 줄어 좋다고 했지만, 한에게는 늘 신경 쓰이는 문제였다. 누군가 유일의 사회성을 두고 운운하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동종 업계 사람에게만 얻을 수 있는 위로나 힘이 또 있을 테니까. 그래서 일원과 밥을 먹기로 했다는 유일의 말에 잘했다며 칭찬도 해 주었었다.

그런데 막상 둘이 함께 찍은 예능 프로그램을 하나둘 보게 되면서는 마음이 흔들렸다. 특히 ‘못못방’이라고 불리던 방 탈출 예능에서는 스킨십이 너무 많았다. 겁이 많은 일원은 유일에게 바싹 붙어 으엉, 흐엉, 소리를 내며 온갖 트랩이 튀어나올 때마다 손을 잡거나 고개를 묻었다. 그 옆에서 유일은 내내 평온한 미소를 지은 채 문제를 해결했는데, ‘일원아, 봐. 아무것도 아니지?’ 하고 묻던 찰나의 영상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기까지 했었다. 그러자 방송사에서도 대놓고 ‘설레는 한유일의 미소’ 따위의 제목을 붙여 온갖 곳에 올려 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아예 커플로 엮였다. 브로맨스라는 조촐한 방패막 하나만 세워 놓은 채, 여기저기서 하트 효과를 사용하고 MC들마저 몰아가기 진행을 했다. 그러나 ‘유일 커플’이나 ‘우리 제법 잘 어울려요’ 같은 자막보다도 강한을 더 신경 쓰이게 만든 것은 문제를 함께 풀어내는 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자그마한 머리통을 함께 모은 두 사람은 어려운 수학 문제나 뒤집힌 넌센스, 복잡한 영어 문제를 막힘없이 풀어냈다. 시종일관 우는 얼굴을 하던 일원도 문제를 풀 때만큼은 제 몫을 했다. 그렇게 둘이 어려운 말들을 몇 번 주고받으면, 놀랍게도 정답이 나왔다. 지켜보던 패널들 모두 손뼉을 치고 소름이 끼친다며 고개를 내젓는 실력이었다.

-진짜 완벽한 커플이네!

농담처럼 뱉어진 말이 강한에게는 어떤 스킨십과 하트보다도 강력한 공격이 되었다.

문제의 날 역시 그 예능 프로그램을 함께 보고 있었다. 지난 보름 사이 쏟아진 ‘유일 커플’ 공격을 상쇄하느라 무리해 운동한 다음 날 아침이었다. 헬스장에서 두 시간을 운동하고 땀이 식기도 전에 밤길을 달린 죄로 강한은 지독한 몸살에 시달렸다.

[아이, 형! 아니, 아니지! 선배님! 한 번만 봐주세요.]

[어떻게 봐줘요, 내가 답을 아는데.]

출근을 딱 한 시간 앞둔 아침. 응급실에 가자는 한유일을 말리고 말려서 허벅지를 베고 누운 참이었다. 유일은 계속해서 ‘일은 쉬고 병원 가자. 한아, 응?’ 하고 안달했지만, 강한은 괜스레 고집을 부렸다. 화면 속에 맑게 웃는 유일이 얄밉게 느껴졌다.

“이거 웃기더라.”

사실 그놈의 ‘유일 커플’ 자막을 보는 순간 TV를 괜히 틀었다 후회했지만, 강한은 일부러 의연하게 말했다. 유일은 화면을 보지 않고 한을 내려다보며 ‘그래?’ 하고 물었다. 서늘한 손가락이 뜨거운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채널을 돌릴 만한 이유가 없어 강한은 가만히 화면만 응시했다. 이미 봤고, 보면서 양껏 질투도 했던 장면들이 재차 재생되었다.

[게임은 정정당당하게 해야 하니까 봐줄 수는 없고. 힌트는 줄게요.]

[아, 뭔데요? 저한테만! 저한테만!]

[뭐야, 유일 씨! 나도 알려 줘!]

편한 운동복을 입은 출연진들이 와르르 유일에게 달려간다. 그 사이에서 겅중 키가 큰 유일이 하하 웃으며 힌트가 적힌 종이를 들어 올렸다. 가장 가까이 선 일원이 깡총깡총 뛰어 대며 유일의 몸에 부딪혀 댔다. 한숨이 절로 흐르는 광경이다.

“이번 촬영도 한이랑 같이 가면 좋은데. 아픈데 혼자 두고 가니까 마음에 걸려.”

“내가 거기 가서 뭐 하냐.”

“음, 시장 조사?”

반쯤 웃음을 담은 유일의 음성이 사근사근 흘렀다. 평소라면 그저 듣기 좋다고만 생각했을 텐데, 강한은 괜히 눈살을 찌푸렸다.

“거기서 장사할 일 없을 텐데 무슨 시장 조사.”

괜히 톡 쏘아 버린 것 같아 입술은 금세 다물렸다. 유일 역시 묘한 가시를 느꼈는지, 귓불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손가락이 멎었다.

“…저분 영어 잘하시더라.”

“아……. 어렸을 때 잠깐 살았대.”

잠시 느려졌던 손가락은 이제 볼을 살살 쓰다듬었다. 강한은 제 얼굴 위로 꽂히는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괜스레 더 열심히 화면을 쏘아보았다.

“한아, 정말 약만 먹어도 괜찮겠어? 볼이 뜨거운데. 지금이라도 병원 같이 가면 안 될까.”

“멀쩡하다니까. 내가 너보다 건강해.”

“나 늦을까 봐 그러는 거면, 공항 혼자 가도 되니까. 영송이 형이랑 병원 가.”

“내가 애냐. 감기 좀 걸렸다고 무슨 보호자랑 병원을 가.”

열이 올라 버석해진 목구멍과 시야에 차오르는 ‘유일 커플’ 글자가 신경을 곤두세웠다. 강한은 또 한 번 쏘아 버린 말투를 체감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혼자 쌓아 둔 치졸한 감정을 애꿎은 사람에게 화풀이하고 있다. 그는 자각과 동시에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러다 잘 것 같다. 그냥 출근 일찍 해야겠어.”

“한아.”

곧 출국인 유일을 붙잡고 삐딱한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 강한은 얼른 바닥에 팽개쳐 두었던 가방을 주워 올렸다.

그러나 한 발자국 걷기도 전에 팔이 잡혔다. 뜨끈한 손목에 유일의 서늘한 손가락이 감겨 온다. 손가락들은 부드럽게 살결을 쓸고 내려가, 바투 쥔 손에서 가방끈을 빼앗아 들었다.

“하루만 쉬면 안 될까.”

“아까부터 안 된다고 했어.”

인상을 찌푸린 강한은 도로 가방을 앗아 갔다. 당황해 올려다보는 눈빛이 한의 마음을 뜨끔하게 했지만, 더 매몰차게 현관 앞으로 향했다. 유일은 그 뒤를 조용히 따라나섰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한유일은 지금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눈치였다.

“한아, 내가 말 잘못했으면 말해 줘.”

잘못한 것도 없이 먼저 숙이고 들어오는 태도까지 모두가 갑갑했다. 강한은 피로한 얼굴로 근래 들어 길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최근 저답지 않은 감정들에 은은하게 시달린 탓인지 지친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갔다.

논쟁을 길게 잇고 싶지 않다. 한유일은 유감을 느끼는 즉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강한은 달랐다. 이런 순간은 말을 줄여야만 하는 때였다. 자기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울적하고 치졸한 때.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감정이 부글부글 끓어 위험한 그런 때. 거뭇하게 물든 심상을 들키지 않으려면 아무 일도 없는 척 굴어야 했다.

“무슨 실수. 그런 거 없어, 나 갈게. 너도 조심히 다녀오고…….”

“한아, 아프면 하루쯤은 쉴 수 있잖아. 꼭 가야겠어?”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던 강한은 멈추어 섰다. 유일의 절절 끓는 부탁도 평소와 다르게 무척 감정적으로 변해 있었다.

이해되지 않는 고집에 짜증이 났을까. 아픈데도 기어코 출근한다는 게, 너무 악착같이 보이나.

그가 느끼고 있을 감정을 유추해 보며 강한은 습관처럼 유일원을 떠올렸다. 한유일과 아주 비슷한 사람. 예쁘게 웃고, 똑똑하게 살고, 어리광도 부리고, 사랑받을 줄 아는 사람.

“한유일.”

한유일의 방식은 잘 알고 있지만 때로는 말로 해서 더 커지는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특히 상대의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피어오르는 유치한 감정들은 더더욱 그랬다. 그런 치졸한 덩어리들은 누군가와 터놓고 이야기하기보다 혼자 삭이고 배출하는 편이 나았다. 내뱉어 봐야 어차피 서로가 상처받을 테니까.

“너는 공감 못 하겠지만 이 일 나한테는 중요해. 동네 장사는 신뢰 문제야. 갑자기 하루 쉬는 거, 별거 아닌 일 같겠지만 아니라고. 난 할 줄 아는 것도 많이 없어서…. 매일 진심으로, 열심히 여기 매달려 살아야 해. 네 말처럼 쉽게…… 그렇게 안 돼.”

그래서 피하려고 했는데. 그냥 나가 버리면 됐는데.

논지도 없이 맹렬히 쏟아 내던 말은 어물쩍 멎었다. 한유일을 잘 모르고 씹어 대던 수많은 사람들의 말이 겹쳐 떠오르며, 강한은 참담한 심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존나 질린다.’

마음속에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지겹고 익숙했다. 어디에 이렇게 못난 마음이 숨겨져 있었는지.

“애처럼 왜 그러냐.”

강한은 제 입 밖으로 쏟아진 말이 다 믿기지 않았다. 쿵, 쿵,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심장이 뛰었다.

하지 않아도 될 마음속 찌꺼기까지 전부 내보이고 말았다. 뱉는 즉시 후회한 강한은 뒤를 돌았다. 마주친 유일의 눈동자는 벌써 침착해 보였다. 상처받았을 속내를 감추며 그가 얕게 웃었다.

“한아, 부담 주려고 한 말 아니야.”

“…아.”

고작 첫사랑 하나 지키겠다고 제 인생을 걸었던 놈이 ‘부담’을 운운하게 만들었다. 그 초연한 낯이 강한을 가시처럼 찔렀다. 마치 자신이 날 선 말을 들은 사람처럼 퍼뜩 놀랐다. 다급해진 입술이 얼른 아무렇게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이 심했다, 미안. 그런 뜻이 아니라.”

초조한 사과를 허둥지둥 내놓는 순간, 문이 열렸다. 키패드를 익숙하게 눌러 들어온 영송이 ‘야아! 얼른 가자!’ 하고 크게 소리치며 얼어붙어 있던 현관을 쩌저적 갈라 버렸다. 한유일은 눈이 동그래진 채 굳은 강한을 아무렇지 않게 스쳐 지났다.

“한아, 다녀올게. 너무 무리하지 마.”

끝까지 제 걱정만 남겨 놓은 채였다.

강한은 그 쓸쓸하게까지 느껴지던 뒷모습을 묘사하다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곱씹을수록 창피하고 한심해서 은수에게조차 말하기가 어려웠다.

“……야, 강한아. 유일원 씨 얘기는 왜 안 했어?”

말을 듣는 동안 담배를 연달아 세 개비 태워 버린 은수가 한숨 쉬었다. 강한은 교무실에 끌려온 학생처럼 고개를 숙이며 그제야 새 연초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뒤풀이도 안 다니고 사람들이랑 너무 안 어울려서…. 솔직히 내가 등 떠밀었거든요, 좀 어울리라고.”

“어.”

“그 사람이랑도 친하게 좀 지내고 잘해 주라고 내가 그랬고.”

“……그래서. 말 바꾸는 것 같아서?”

“좀 치사하잖아요. 내가 잘 지내라고 해 놓고, 이젠 질투한다고 하면.”

“하이고오.”

매번 작품 쫑파티나 뒤풀이마다 홀로 쏙 빠져 있는 유일이 구설수에 올랐던 적이 있다. 멀쩡한 애인이 사회성 바닥으로 소문나는 게 싫어 한 마디 했더니, 그 이후로 한유일은 꼬박꼬박 얼굴 도장을 찍고 왔다. 물론 술 한 잔 마시지 않고 앉아 있다가 유들유들 웃는 얼굴로 금세 빠져나오기 일쑤였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변화가 뿌듯하고 귀엽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목구멍 바로 앞까지 유치한 말이 끓었다. 가기 싫으면 가지 마. 아니다, 그냥 가지 마. 정당성도 없는 요구가 양심도 없이 차오르고, ‘그 사람도 와?’ 하는 소름 끼치는 질문까지 떠올랐다.

“강한아, 너는. 내가 봤을 때…. 은근 할 말을 다 하는 용감한 놈이거든?”

“네.”

“근데 정작 진짜 속에 있는 말은 잘 못 하는 것 같다. 아니면 중요한 사람한테만 못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강한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태권도부 동기들에게도, 가끔 찾아오는 진상에게도, 치언이나 범철에게도 그는 하고 싶은 말을 억누르지 않았다. 오히려 남들보다 더 직설적으로 훨씬 빠르게 이야기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상수에게는, 한유일에게는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그러지 못했다. 그들에게 강한은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쪽팔리는 얘기라고 생각할수록 오히려 밑바닥까지 까놓고 보여 줘야 돼. 말 안 하고 잘 처리할 수 있음 괜찮아. 근데 너 벌써 화풀이까지 다 했고, 헤어지게 될까 봐 무섭잖아. 부작용이 오지게 왔다는 거거든? 그럼 터는 수밖에 없어.”

연신 고개를 느리게 주억거리면서도 강한은 떨떠름했다. 자기 자신에게도 창피한 감정을 한유일에게 드러내야 한다니. 명확한 해결 방법도 없는 문제인데.

“일단 가게랑 무이는 내가 봐 줄 테니까 이만 들어가.”

“네?”

“야, 주둥이로 죄를 지었으면 이벤트 정도는 준비해서 사과해야지?”

“아, 어…….”

“얼른 꺼져!”

영화 속 건달처럼 다리를 넓게 벌리고 쪼그려 앉아 담배를 태우던 은수가 엉거주춤 일어섰다.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내며 발길질하는 그녀를 피해 강한은 골목을 빠져나왔다. 짙은 앞치마를 벗지도 못한 채로, 허둥지둥하던 그는 일단 택시를 잡아탔다. 팔자에도 없던 이벤트를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한껏 꼬여 들었다.

***

스스로도 영화 같은 사랑이라고 자부했기 때문일까. 한 번도 남들이 연애 과정에서 겪는 사소한 문제들을 걱정해 본 적 없었다.

이 사랑은 이미 숱한 장애물을 뛰어넘었다. 직업이나 타인의 시선, 유난한 역경, 수없이 많은 시간과 편견, 각종 더러운 말들도 이겨 냈다. 그렇기에 한유일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이 사랑이 서로의 마지막 종착점이 되리라는 그런 확신이.

그러니까 유치한 사랑싸움은 다 남의 일이라고만 여겼다. 주변 사람에게 듣거나 촬영 시나리오로 접하게 되는 숱한 다툼도 그저 별나라 이야기였다. 강한과 자신 사이에 그 어떤 마찰도 없을 거라는 믿음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1년 가까이 안정기가 지속되면서 잊고 있던 오만이 고개를 들었다. 어떤 일이 생겨도 성숙한 대화를 통해 완만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강한이 피로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을 때.

‘한유일.’ 하고 낮게 불렀을 때.

‘애처럼 왜 그러냐.’ 하고 중얼거렸을 때.

유일에게는 아무런 대응책이 없었다. 그는 멍청하게 서서 입술을 벌리고, 머릿속에 휙휙 날아드는 단편적인 기억들에 얻어맞고 있었다. 이를테면 강한이 연하는 취향이 아니라고 하던 장면이나 미성년자를 운운하던 어느 날의 지하철, 술에 잔뜩 취해 멋대로 앞섶을 비비적거리면서도 ‘아, 고등학생이랑 이러면 안 돼.’ 하고 되뇌던 밤 같은 것들에.

“매니저님.”

“에에?”

어둡고 광활한 하늘을 날아가는 밤 비행기 안은 무척 고요했다. 그 탓에 매니저는 자신이 조금 전까지 시끄럽게 코를 골았다는 사실도 모른 채 숨죽여 답했다. 다 갈라진 낮은 목소리가 그 사달이 벌어지던 날 아침의 강한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질문은 다소 충동적으로 나갔다.

“애인이 아플 때요.”

원래는 도착 예정 시간을 물을 생각이었다. 계획과는 한참 먼 질문이 매니저에게도 당혹스러웠던지, 그는 광대뼈 근처에 헐렁하게 방치하고 있던 안대를 안경처럼 슥 들어 올렸다.

“네?”

“애인이 아플 때. 일 나가지 말고 쉬라고 하면, 조금……. 애 같나요?”

해외 스케줄을 올 때만 보는, 그것도 때마다 머리 스타일이 바뀌어 도통 낯이 익숙해지지 않아 데면데면한 사람이었다. 사적인 이야기는커녕 일에 관한 이야기도 딱 필요한 말만 주고받을 만큼의 사이. 그런데도 유일은 오히려 더 쉽게 질문을 꺼낼 수 있었다. 차라리 자신의 질문에 강한을 곧장 떠올리지 않는 사람이라 마음이 편했다.

“아니 뭐, 애 같지는…. 애인 사이에 그 정도 말은 할 수 있지 않…나? 걱정한다는 표현 아니에요? 아닌가? 진심으로? 진짜 일 나가지 말아라, 뭐 그렇게?”

처음 순간 눈에 띄게 당황했던 매니저는 금세 상황에 몰입했다. 유일은 그저 짧게 고개를 한번 끄덕였을 뿐인데 심각해진 그가 눈을 좁혔다. 얼굴 중간에 아무렇게나 걸고 있던 안대를 확 끌어 내리며 중얼거린다.

“그럼 뭐……. 상황에 따라서는 좀 그럴 수도. 근데 애 같다기보다는, 짜증이 좀 날 수도 있겠다는 정도? 나라고 안 쉬고 싶냐! 으씨, 네가 대신 출근할 거야? 이런 느낌이요. 하지만 그 전에 이미 기분이 좀 상해 있었거나 쌓인 게 있을 때나 그렇지. 고작 저 한 마디로는…….”

“그래요?”

“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라면 그렇겠네요. 그래도 아프다고 걱정해서 한 말일 텐데, 애 같다고 생각하면 좀 정이 없잖아요. 쩨쩨하고.”

진지한 낯으로 내내 경청하던 유일의 미간이 좁혀졌다. 일순 냉랭해진 얼굴이 창가를 향한다. 하얀 얼굴 위로 남색 하늘이 흐리게 지났다.

“왜요? 시나리오 얘기예요? 캐릭터가 좀 성격 파탄자인가.”

“아닙니다. 좋은 사람이에요.”

“아, 예에…….”

필기라도 할 기세로 열심이던 태도는 어디 가고 차가운 대답만 남았다. 이제 조금 가까워지나 싶던 매니저는 김이 샌 얼굴로 다시 안대를 끌어 올렸다. 한유일과 일해 본 사람들은 다 너무 좋았고 친절하다는 말만 일색인데, 어째 저는 늘 저 인간이 어렵기만 하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다시금 드르렁 코 골기 시작한 매니저 옆에서 유일은 어느 밤을 회상했다. 11년을 기다린 재회의 날. 고량주를 잔뜩 마시고 취한 강한을 부축한 밤이었다.

인사불성이 된 그를 침대에 눕힐 때까지만 해도 유일은 아무 흑심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품고 있는 흑심을 실현할 생각이 전무했다. 그래서 비틀대는 남자를 붙들어 칫솔까지 물리고 잠옷도 손수 갈아입혀 줄 수 있었다. 그 이상은 욕심도 내지 않았다. 그저 잠든 강한을 마음껏 지켜볼 수 있음에 만족했다.

그런데 번뜩 눈을 뜬 강한이 먼저 달려들었다. 젖은 머리칼을 잡아당겨 입을 맞추고, 아래를 노골적으로 부딪혀 오며 숨을 헐떡였다. 재회했다는 사실만으로 들끓는 심장을 애써 누르고 있던 유일의 욕망이 다 터져 나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상대가 인사불성이라는 사실도 중요치 않았다. 강한은 축축한 목소리로 자꾸만 ‘한유일, 유일아.’ 하고 불러 댔다. 더 확인하고 추궁할 필요도 없었다. 맞닿는 살결이, 섞이는 호흡이 모두 뜨거웠다. 정신이 나갈 것처럼 흥분이 쌓였고 도저히 멈추기가 어렵다고 느낀 순간. 강한의 한 마디가 찬물을 끼얹었다.

-아, 유일아, 그만…. 너 씨발, 아직, 고등학생이잖아….

사정을 앞두고 숨을 힉힉 들이켜면서도 그는 도리질을 했다. 고등학생이랑 이러면 안 돼, 그만하자, 왜 꿈에서는 나이를 안 먹냐. 그런 말들을 두서없이 중얼거리면서 어깨를 쳐 댔다. 결국 분노 실린 유일의 손길에 사정한 뒤에도 그는 스스로를 한심해했다.

-어린애랑 뭘 한 거야, 강한, 미친놈아….

그때까지만 해도 강한의 꿈속에는 고등학생 한유일이 등장하는 듯했다.

그 사실이 반쯤 화가 나고 또 반쯤은 너무 애틋해서 육욕이 차게 식었다. 서로의 첫 경험을 이런 식으로 하고 싶지 않았다. 거칠게 떠밀고 때리던 손길을 다 이겨 낸 사람 같지 않게 단념은 빨랐다. 한유일은 흐트러진 강한의 옷을 잘 정돈하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오랜 시간 기다렸던 첫사랑과 몸을 맞댄 직후라기에는 아주 차가운 표정으로.

당시에는 강한의 미련함이 아팠다. 그렇게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살아 놓고 결국 꿈속에서 예전의 자신을 보아 왔을 그가 미웠다. 남들에게는 쉬운 사랑이 왜 이렇게 어렵게 돌아야 하는지. 마음이 변한 것도 아닌데 왜 자꾸 버티는지. 속마음과 다른 말로 상처를 줘야만 하는지.

하지만 그 모든 설움이 다 녹아 버린 지금도 한유일은 그날을 기억했다. 특히 고등학생, 어린애 같은 말을 중얼거리던 강한의 표정과 숨결 하나하나가 생생했다. 지나칠 정도로.

“……이런 것도 다 어려서인가.”

고작 한 살 차이에 이런 말들을 놓지 못하는 점도 결국 어리다는 방증 같다. 한유일은 허탈하게 웃으며 창 가림막을 내렸다. 심해와도 같은 밤하늘이 가려지며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익숙한 땅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

“자, 자, 비켜 주세요!”

캄캄한 하늘을 한참 날아왔음에도 한국 역시 어둑한 밤이었다. 유일은 오늘따라 싱글벙글 웃고 있는 영송의 인솔에 따라 인파 속을 헤쳐 나왔다. 그 시끄럽고 복잡한 인파 속에서도 영송은 내내 웃으며 해외 스케줄 담당 매니저와 이야기를 나눴다.

“장 팀장, 피곤할 텐데 들어가 봐. 수고했어.”

“제가 모셔다드려도 되는데…….”

“에이이. 아서라, 아서! 얼른 가!”

“아, 예,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밴 앞에 도착하기 전부터 서둘러 사람을 보내는 모습이 의아하다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오랜 비행과 끈질기게 머릿속을 괴롭혀 댄 상념들로 유일은 상당히 피곤한 상태였다. 한의 목소리라도 듣는다면 좀 나을 듯한데, 시간이 애매하게 늦어 잠을 깨울까 걱정이 들었다.

그래도 그 통화 이후에 메시지 정도는 남길 줄 알았는데.

서운한 생각이 그야말로 아이처럼 솟구쳐 한숨이 흘렀다.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그는 영송이 열어 준 밴 안에 훌쩍 올라탔다.

그런데 안에는 예기치 못한 손님이 먼저 탑승해 있었다.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을 만한 좌석에 몸을 수그려 숨어 있던 강한이 머쓱하게 웃었다.

“왔어?”

그 반가운 눈과 시선을 마주한 찰나, 머릿속이 죄 하얗게 번졌다. 지쳐 찡그려져 있던 낯에도 말간 빛이 퍼졌다.

드르륵, 영송이 밴 문을 닫는 소리가 신호탄이었다. 유일은 초원을 마주한 강아지처럼 어떠한 계산도 없이 몸을 먼저 날렸다. 사람들 시선을 피하느라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강한은 난데없는 습격에 놀라면서도 얼른 품을 내어 주었다.

“보고 싶었어.”

해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 어떻게 대화를 이끌어야 할지 수도 없이 고민했다. 그런데 모조리 다 휘발되었다. 이 단단한 몸을 끌어안고 있으니 다 괜찮을 것만 같았다.

“어어…. 나도. 근데 좀……. 일단 앉아, 위험하니까.”

느리게 등을 토닥여 주는 다정한 손길이 그대로였다. 멀어지지 않았다. 한순간 마음이 놓인 유일은 강한의 가슴팍 위에 머리를 비비적거리다가 그대로 타고 올랐다. 부드러운 입술이 목덜미에서부터 턱선을 타고 쪽, 쪽쪽, 소리를 낸다.

“야, 야, 미쳤어?”

“어떻게 데리러 올 생각을 했어.”

“한유일, 일단 좀…. 매니저님도 계시는데 돌았나…….”

출발할 타이밍을 엿보고 있던 영송이 크으음 헛기침을 했다. 괜스레 혼잣말을 하며 라디오를 크게 틀어 버린 그 덕분에 아주 오래된 팝송이 밴 안을 잠식했다.

“한이는 나 안 보고 싶었어?”

타인의 눈치를 살피는 일이 거의 없는 유일은 오늘도 집요했다. 이마를 꾹꾹 밀어내도 살결을 지분거리던 그가 두툼한 강한의 가슴팍 위에 턱을 얹었다. 순진무구하게 올려다보는 눈빛은 그의 치트키였다.

“보고 싶었…어.”

노랫소리에 숨어 은근히 흘깃거리는 영송을 의식한 바람에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런 어색한 답에도 유일은 아하하 소리를 내어 웃었다.

“자아, 이제 진짜 가야 돼. 똑바로 앉아라!”

아주 늦은 호통 소리에 강한의 품을 한가득 채웠던 체 향이 멀어졌다. 대신 손가락이 얽혔다. 자연스럽게 손에 깍지를 낀 한유일이 차창을 바라본다. 비행기 안에서 밖을 바라보던 얼굴과는 전혀 다른 빛이었다.

집으로 가는 내내 강한은 유일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는데 영송이 있어 하지 못하는 모양으로, 흘깃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만으로도 한유일은 모든 유감을 다 녹여 없앴다.

그런데 정작 선물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키패드를 누르는 강한이 지나치게 긴장한다 싶더니, 집 안에 들어서니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온 집 안이 은은한 간접 조명으로 빛났으며, 향초가 피워진 욕실 안에는 목욕물이 받아져 있었다. 식탁에는 직접 만든 파스타가 예쁜 그릇에 담겨져 두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었고, 제 전용 방석에서 잠든 무이의 머리 위에는 예쁜 리본이 달려 있었다.

“오늘 무슨 날이야?”

웃으며 묻자 강한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우물쭈물하며 직접 의자까지 빼 준 강한이 맞은편을 채워 앉았다.

파스타를 반쯤 비울 때까지도 그는 준비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밴 안에서처럼, 얼굴을 뚫어 버릴 듯 열렬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 뜨거운 눈빛을 견디다 못한 유일이 결국 먼저 입을 떼려 할 때.

“야.”

강한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난데없이 고해 성사를 했다.

“나 존나 질투했어.”

“응?”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이야기하리라고는 예상했었다. 하지만 질투라니? 생각지 못한 말에 유일이 포크를 느리게 내려놓았다.

“그, 왜. 너랑 요즘 잘 엮이는 사람 있잖아. 유일 뭐더라, 아무튼.”

“아, 일원이.”

내키지 않는 말을 하는 듯 찌푸려져 있던 강한의 인상이 한층 더 그늘졌다.

“…그래, 그 사람. 내가 먼저 잘 지내라고, 친해지라고 했지만……. 존나 치사한 거 아는데 질투가 나더라. 나랑 다르게 어려운 말도 잘 통하는 것 같고. 예쁘기도 하고. 사람들이 잘 어울린다고 하고. 커플이라고 엮기까지 하니까…….”

이제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쪽은 유일이었다. 그 부담스러운 눈길에 호기롭게 시작한 말이 점차 힘을 잃었다. 막상 털어놓다 보니 마무리할 말을 찾지 못한 듯, 강한은 주저하며 파스타를 뒤적이다 집기를 탁 내려놓았다.

“좀, 유치한 생각…. 많이 했다고.”

“그랬어?”

“어, 근데 내가 친해지라고 해 놓고 딴말하는 것도 민망하고…. 솔직히 쪽팔려서. 그래서 말 못 했어.”

평소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떠듬떠듬 흘러나오는 말들이 얼마나 어려운지, 한유일은 대충이나마 짐작했다. 타인을 대신해서는 잘만 나서는 사람이 정작 자기감정 지키기에는 서툴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진지한 말을 듣는 내내, 자꾸만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날도….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 속으로 좀 쌓여 있다가 괜히 터진 거야. …미안하다.”

강한은 어색하게 시선을 흔들거리면서도 이마 위에 ‘왜 처웃어?’ 하는 글자를 써 놓았다. 그 솔직하고 노골적인 낯에 유일은 무력하게 무너졌다.

“아니야, 한아. 나도 무신경하게 말했으니까 잘못했어.”

“어, 어, 그래…….”

“연애는 처음이라 모르는 게 많아. 한이가 잘 가르쳐 줘야 해.”

한유일은 살살 눈웃음을 치며 손을 뻗었다. 식탁 위를 초조하게 두드리던 강한의 손을 마주 잡고, 그는 아주 은근하게 손끝을 매만졌다.

“그런데 한이 생각에 정말 내가 애 같기는 한가 봐.”

“뭐? 아니라니까. 그때는 그냥….”

“봐. 데리러 오고, 맛있는 거 해 주고, 욕조에 물 받아 놓고…. 연인 사이 이벤트라기에는 보호자 노릇 같은데.”

생각지 못한 지적이었는지 강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소 억울한 표정으로 입술만 벙긋거리던 그가 욕실을 가리켰다.

“야, 욕조에 꽃잎도 있거든?”

순간 한유일은 입술 안쪽을 꽉 물었다.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려 절호의 기회를 날릴 뻔했다.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한 그가 눈을 길게 휘었다.

“아니야, 계속 애 취급해도 돼.”

“시발, 뭐 어쩌란…….”

“이제 밥 먹었으니까 한이가 씻겨 주면 되겠다.”

눈웃음만큼이나 사근사근한 말투에도 강한은 경악한 눈을 숨기지 못했다. 휘둥그레 커진 눈 그대로 ‘미친 새끼…….’ 중얼거리던 그는 그래도 비장하게 일어섰다. 그냥 빨리 해치워 버리자는 표정이 기어코 유일의 웃음을 터지게 만들었다.

***

아하하 퍼져 나간 웃음 탓에 초반에는 정말 보호자 노릇 그 자체였다. 직접 세수도 시켜 주고 칫솔질까지 해 주면서, 강한은 약간 감정이 실린 장난을 쳐 댔다. 한참을 서로의 옷과 얼굴에 물을 튀기고 논 뒤에야 입을 헹굴 수 있었다. 그런 다음에는 다 식은 목욕물을 반 이상 버렸고, 그 과정에서 풍성하던 거품과 빨간 장미 꽃잎을 다수 잃어버렸다. 한유일 말대로 연인 사이 이벤트라기에는 무척 허술했다. 로맨스의 로 자도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에 강한은 허탈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좀 제대로 해 주고 싶었는데.”

축축해진 티셔츠를 벗어 던지며 그가 중얼거렸다. 유일은 낮게 웃으며 잘생긴 얼굴을 끌어당겼다. 못마땅하게 꿈틀거리는 눈썹 위로 입술을 누르자, 한에게서도 푸시시 흩어지는 웃음이 흐른다.

“제대로 씻겨 주면 되잖아.”

눈썹과 볼, 귀밑과 목덜미까지. 장난스러운 입술 도장을 꾹꾹 눌러 찍으며 유일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간지러워 흠칫거리던 강한은 진지해진 눈을 좁히고 그를 밀어 세웠다.

어두운 회색 욕실 벽에 유일을 세워 놓은 채, 강한은 일단 입술부터 들이밀었다. 아직 물기가 촉촉한 입술을 빨아 당기고 미끄덩한 점막을 훑어 대며, 같은 치약 맛을 느꼈다. 가만 즐기던 유일이 깊숙이 혀를 쓰고 저돌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한 때부터는 손을 내렸다. 유일의 셔츠 단추와 바지 버클을 풀어 내리고, 자연스럽게 입술을 떼어 냈다.

유일이 곧잘 그러하듯이 강한 역시 날카로운 턱선을 따라 움직였다. 말캉한 입술로 도드라진 뼈마다 인사를 남기며 점차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 보기 좋게 단단한 가슴을 갉작거리며 셔츠를 아예 벗겨 내고, 배꼽 밑에 이를 세웠다.

“하아…….”

어느덧 장난 같던 분위기는 다 사라져 버렸다. 유일의 낮은 신음을 만끽하며, 강한은 부드러운 음모 위로 혀를 굴렸다. 꺼떡거리며 일어서기 시작한 성기가 턱을 찔러 댄다.

이게 어딜 봐서 애들 좆이냐…….

강한은 남몰래 흉을 보며 뜨거운 기둥을 감싸 쥐었다. 부드럽게 훑자 금세 더 단단해진 성기가 입술 새로 파고들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머리칼을 쥐고 인도한 유일이 상냥하게 웃었다.

“한아, 무릎 안 아파?”

커다란 좆을 물려 놓고 하기에는 늦은 걱정이었다. 강한은 한쪽 눈썹을 찡긋 들어 올려 괜한 말 하지 말라는 경고를 내비친 뒤, 입 안에 가득 찬 성기를 빨았다. 이가 닿지 않도록 혀로 아랫부분을 부드럽게 감싸며 입 속을 조이자 유일이 나른한 숨을 토했다.

강한은 그의 느끼는 얼굴이 좋았다. 그래서 이따금 얼굴만큼 잘난 좆을 빨아 줄 기회가 생기면 절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일부러 더 집요하게 바라보며 혀를 움직이고 침을 크게 삼켰다. 그럴수록 한유일이 더 흥분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니, 알기에 더 포기할 수가 없었다.

“아, 읏…. 좋아, 한아…….”

흥분에 번들거리는 눈이 강한을 내려다보았다. 거친 숨을 토해 내며, 그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인상 쓴 얼굴로 신음했다. 고조되는 흥분을 따라 입 안을 후비는 성기 또한 거칠어졌다. 입술이 쓰라릴 정도로 밀려와 목구멍을 쿡쿡 찌르는 열기가 버거웠다. 그럼에도 구역감을 참아 낼 만한 가치가 있었다. 한은 으웃, 욱, 어렵게 호흡하면서도 차마 물지 못한 성기 기둥을 문지르고 고개를 움직였다. 잔뜩 흥분한 유일이 밭은 숨을 뱉어 내며 머리칼을 당겼다.

“왜.”

쑥 빠져나간 성기에 강한은 인상을 썼다. ‘애애.’ 소리에 가깝게 물으며 혀를 다시 내밀자, 유일은 아예 그를 일으켜 세웠다.

“무릎 아프잖아.”

“괜찮다니까.”

“그래도. 아, 그리고 한이가 준비해 놓은 목욕물도 써야 해.”

부드럽게 웃은 유일이 먼저 욕조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허벅지도 다 가리지 못할 만큼 낮아진 수위가 초라했다. 그래도 하얀 다리에 달라붙는 장미 꽃잎이 예쁘고 잘 어울리기는 해서, 강한은 비식 웃으며 바지를 벗어 던졌다. 욕실 바닥에 버려진 옷가지들이 한가득 쌓였다.

유일을 마주 보고 앉자 그의 것을 빨면서 세웠던 성기가 잡혔다. 한유일은 빳빳하게 일어선 좆을 기특하다는 듯 어루만져 주다가, 제 것과 함께 손바닥 안에 가두어 문질렀다.

“으음, 읏….”

강한은 뜨거워진 이마를 유일의 어깨에 얹었다. 오랜만에 몸을 맞대어서인지 벌써부터 열이 훅 올랐다.

“한이가 만져 줘.”

“하아, 윽….”

한유일의 성기를 무는 동안 진작 빳빳해진 아래에서 쿠퍼액이 흘러내렸다. 강한은 유일이 이끄는 대로 손을 움직여 점액질을 묻히고, 두 손 안에 성기를 가두어 문질렀다. 처음에는 한유일의 좆을 흔들고 문지르는 데 더 열중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본능에 더 가까워졌다. 어느덧 그는 유일의 성기에 대고 자위하듯 골반을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두 손 안에서 성기를 비비는 야한 소리와 얕은 물의 마찰음이 비슷해진다. 물기 가득한, 찔꺽거리고 찰박이는 소리 안에 숨어 강한은 이를 악물었다. 사정감이 솟구치고 있었다.

“흣…….”

잘게 움직이던 하체가 움찔 멈췄다. 원망스럽게 바라보자, 한유일은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듯 무구한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순수한 얼굴과는 다르게 그의 길고 부드러운 손은 엉덩이 살을 주물럭거리며 의도적으로 구멍을 눌러 댔다.

강한은 잠시 눈을 흘기고서 오히려 엉덩이를 조금 들어 주었다. 침입하기 쉽게 내밀어 주는 모양새에 한유일이 낮게 웃는다. 그래도 뒤를 파고드는 손가락은 전혀 장난스럽지가 않았다.

“여기, 되게 기분 좋아.”

유일은 마치 자신이 범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른한 신음을 토했다. 수분을 머금은 야한 목소리가 점막을 눌러 대는 손가락보다 더 큰 흥분을 불렀다.

“뭐…가, 아….”

“한아, 계속 만져 줘야지.”

“하아, 으읏…….”

빠르게 늘어난 손가락이 내벽을 빠듯하게 채웠다. 유일의 채근에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이면서, 강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앞뒤로 쏟아지는 자극이 너무 강해서 호흡이 곤란했다.

허억, 흐, 급하게 쏟아지는 숨을 유일이 받아 마셨다. 아랫입술을 거세게 빨았다가 귀여운 뽀뽀를 짧게 남기기도 하면서 그는 부지런히 키스했다. 엉덩이 사이에서 철퍽철퍽 울리는 물소리가 남의 것인 양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뭐가 좋냐면……. 여기 안에 들어가면 되게 부드러워. 말캉거리고, 따뜻해. 그리고 한이가 기분 좋을 때마다 나를 꽉 잡고 안 놔주려고 하는데. 그럴 때 너무 좋아.”

내벽 깊숙이 손가락을 박아 넣은 유일은 손목을 힘 있게 흔들었다. 나머지 손가락으로 일부러 회음부를 문질러 대면서 퍽퍽 쑤시자, 강한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모양은 도망이었지만 유일을 와락 끌어안는 바람에 오히려 움직이기는 수월해졌다. 유일은 우는 아기를 달래듯이 드넓은 등을 당기며 손을 쳐올렸다.

“으흣, 그만, 어… 어읏, 그만….”

괜한 말을 들어 그런가. 강한은 유난히 빠르게 차오르는 흥분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의문 가득 묻은 신음이 와르르 터져 나갔다. 그러나 그 유별나게 놀란 반응에 멈추어 줄 틈도 없었다.

“헉, 아으, 읏….”

몸이 바싹 굳는가 싶더니 그대로 사정이었다. 요동치는 성기 끝에서 정액이 투두둑 튀어 올라 두 사람의 가슴팍과 목덜미로 흘러내렸다. 유일은 거친 숨을 내쉬는 한의 내벽을 조금 더 문질렀다. 흥분에 겨워 마구잡이로 손가락을 씹어 대는 점막을 예쁘다는 듯 쓸어 주고 아주 천천히 빼낸다.

“오랜… 하아, 오랜만이라서…….”

강한은 괜한 변명을 중얼거리며 눈가를 문질렀다. 행여 자국이 남을까 세게 당기지도 못하고 두르고만 있던 팔을 무겁게 떨어트리며 그가 민망한 듯 웃었다. 유일은 아무 유감없이 먹음직스러운 그의 살결을 감상했다. 육욕에 익어 달궈진 피부 위로 미끄러지는 점액질이 맛있는 시럽처럼 느껴졌다.

한유일은 욕구를 느끼는 동시에 행동했다. 목덜미에서부터 쇄골을 타고 떨어질 듯 말 듯 느리게 내려가는 궤적을 따랐다. 숨결을 훔치던 입술이 이제는 사정의 흔적을 노골적으로 핥고 빨아 당겼다.

“아, 읏! 그걸 왜, 먹어.”

내친김에 단단해진 유두까지 삼켜 잘근거리자, 강한이 유일의 어깨를 밀어냈다. 기겁하는 그를 올려다보며 유일은 능청을 떨었다.

“원래 애들은 뭐든 입에 가져가고 그래.”

그렇게 괜찮은 척 의연하게 행동하더니 뒤끝이 남은 모양이었다. 강한은 입을 꾹 다문 채 미간을 좁히다가, 팔을 뒤로 뻗었다. 뜨겁고 곧은 유일의 좆을 일부러 끈덕진 손길로 매만지며 무릎으로 일어섰다. 시작할 때 마음과는 다르게 저만 실컷 즐긴 것 같아 조바심이 생겼다.

그러나 삽입을 주도하려는 강한을 유일이 멈추게 만들었다. 내려앉으려던 허리를 꽉 잡은 그가 은근히 웃으며 무언가를 종용했다. 한참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강한은 다시 한번 미간을 좁혔다.

“왜.”

“이것도 무릎 아플 것 같은데.”

허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제야 의중을 파악한 강한은 ‘그놈의 무릎은.’ 하고 투덜거리며 돌아섰다. 유일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도록 앉으며 성기를 삼키자, 등 뒤로 또다시 뽀뽀 세례가 내린다. 말캉한 입술이 피부를 짓누르는 간지러운 감각에 움찔거릴 때마다 강한은 조금 전 들었던 말을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이가 기분 좋을 때마다 나를 꽉 잡고 안 놔주려고 하는데. 그럴 때 너무 좋아.

지금도 그렇게 안을 조이고 있을까. 강한은 입술을 아프게 물고, 괜스레 아래에 힘을 풀려 노력해 보았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천천히 내벽을 파고드는 성기의 존재감이 더 선연해질 뿐이었다. 등골에 소름이 내달린다.

느린 삽입 내내 한유일의 손은 바쁘게 움직였다. 허벅지 안쪽을 부드럽게 쓸어 대는가 하면, 벌써 일어선 강한의 성기를 흔들고 선단을 비비적거렸다. 강렬한 자극에 움찔 놀란 몸이 굽어지면, 뱃가죽 위에 다정한 손길이 닿았다. 살갗을 쓸어내리는 다정한 손길만큼이나 부드러운 목소리가 재차 안 해도 될 말들을 뱉어 냈다.

“한이 배, 하아, 꿈틀거려….”

“흐아, 읏!”

강한은 그 입을 막기 위해서라도 빠르게 움직이는 편을 택했다. 아직 엉덩이에 유일의 샅이 닿지는 않았지만, 더 삼켜 낼 여유가 없어 먼저 뱉어 냈다. 반쯤 빼냈다가 다시 아래로 삽입하기를 몇 번. 느린 대신 그만큼 묵직하게 느껴지는 쾌락에 어느새 시야가 흐릿해지려 했다.

“한아, 벌써 힘들어?”

지난한 삽입 과정을 견뎌 내고도 포상을 받지 못한 유일이 웃듯이 중얼거렸다. 강한은 일순 발끈했지만, 티를 내지 않고 조금 속도를 높였다. 그래도 체력이라면 어디 가서 딸리지 않고 한유일보다 운동도 더 많이 하는 편인데……. 이상하게 섹스를 할 때는 체력만으로 버텨지지가 않았다. 쾌락이 온 근육을 뭉글뭉글 녹이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두터운 허벅지가 장식은 아닌지라 뜀을 뛰듯 성기를 삼키고 뱉어 내는 과정이 힘겹지 않았다. 다만 뜨거운 성기가 안쪽 어딘가를 스칠 때마다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으음, 후, 읏…….”

욕실 안은 소리가 쉬이 울렸다. 덕분에 더 노골적으로 들리는 신음이 듣기 싫어, 강한은 일부러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렇게 하면 목구멍 안쪽으로 삭여진 소리가 조금이나마 여유를 흉내 낼 수 있었다.

“이거 이벤트 아니야? 참으면 어떡해.”

하지만 한유일은 언제나 그 지점을 알았다. 너무 좋아서, 그래서 입을 다물고 싶어지는 그때를 귀신같이 알아챘다. 오늘 역시 기민한 그는 투정처럼 중얼거리며 답삭 성기를 쥐었다. 그의 손바닥 안에서 움찔 놀란 좆이 부드럽게 만져진다.

“아흐, 흣, 잠깐, 지금 말고.”

“형, 움직여 주세요. 저 애라서 참을성이 부족한데.”

“아, 씨….”

“어, 욕한 거예요? 애 앞에서.”

“미친, 새…끼, 진짜, 읏!”

이토록 뒤끝이 길 줄은 몰랐는데. 강한은 이를 갈며 골반을 움직였다. 욕조 틀을 바투 쥔 채, 빠르고 깊게 요분질했다. 흡사 운동하듯이 비장하게 속으로 수까지 세어 가며 임했지만 눈앞이 번쩍 튈 때마다 본능적으로 엉덩이가 멎었다.

“하아, 하….”

움찔 놀란 채 아래를 바라보자 어느덧 완전히 기립한 성기 끝에서 선액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또 혼자만 즐기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부채감이 들었다. 결국 결심한 듯한 강한은 멀리 손을 뻗었다. 좆이 다 빠져나갈 정도로 먼 곳에 손을 뻗은 그는 욕조 마개를 빼냈다. 쿠루룩, 얼마 남지 않았던 물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다시 엉덩이를 뒤로 밀며 천천히 힘을 풀었다.

체중이 실리자 성기는 더 깊은 곳까지 들어섰다. 마침내 유일의 위에 완전히 앉아 버린 강한이 느리게 상체를 젖혔다. 유일의 몸에 슬쩍 기대며 다리를 아예 넓게 벌리자, 한유일은 기다렸다는 듯 무릎을 세웠다. 넓게 벌어진 강한의 두 다리 사이에 유일의 무릎이 솟아올랐다.

“네가 해 줘…….”

후우우. 긴 숨을 내쉰 강한이 거칠게 속삭였다.

한유일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골반을 쳐올렸다. 여태 가만히 있었던 것이 신기할 만큼, 거세고 빠르고 안을 쑤시며 침범했다. 억 소리 하나 내기도 힘들 만큼 거센 움직임이었다. 강한은 마치 아주 놀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뜬 채 신음했다.

“하악, 아!”

“좋아… 한아, 후으…….”

평소에도 한유일은 섹스를 부드럽게 하지 않았다. 달콤한 말들과 표정, 다정한 입맞춤이 그런 모양새를 갖추고는 있었지만 모두 속임수였다. 일단 몸이 맞붙으면 그는 육욕에 솔직했다. 거칠고 노골적이며 상스럽기까지 한 섹스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특히 좆을 쑤셔 박을 때 그에게는 자비나 인내, 망설임 같은 것들이 전무했다. 언제든 마치 이 섹스가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움직였다. 손에 쥐고 있어도 빠져나가는 모래알들을 붙잡듯. 애절하게 갈구하며 강한을 마구잡이로 뒤흔들어 댔다.

그런 모습이 강한을 절대 거부할 수 없게 만들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침착하고 속을 알 수 없게끔 행동하는 그가, 자신 앞에서만 이성을 잃는 것 같아 희열을 느꼈다. 가져도 또 가져도 부족하다며 갈급하는 눈동자를 볼 때면 제 몸 따위야 샅샅이 발라먹도록 내던져 주고 싶었다.

“더, 하아, 윽, 더 세게, 아윽, 으!”

한껏 고양된 흥분이 괜한 말을 부추겼다. 반쯤 이성을 잃고 뱉어 낸 신음에 유일이 강한의 어깨를 짓씹었다. 낮게 욕하는 음성이 희미하게 부서졌다.

난폭하게 몸을 일으킨 한유일은 강한을 욕조 끝으로 밀어붙였다. 쑤욱 빠져나간 성기 덕에 정신없는 틈을 타, 욕조 턱을 짚고 엉덩이를 내밀도록 종용했다. 강한은 순순히 따르며 비어 버린 뱃가죽을 헛헛하게 매만졌다. 지나친 쾌락에 산소가 부족한 기분이 들었다. 입이 헤 벌어진다.

“힛, 으윽!”

좆은 벌름거리는 구멍을 쉽게 침입했다. 퍽, 소리가 나도록 거세게 쳐들어오는 불덩이에 무방비한 신음이 터져 나갔다. 내내 점액질을 뚝뚝 흘리던 성기가 사정을 하는 것과 동시였다. 강한은 잔뜩 뿌옇게 흐린 시야 속에서 흔들리는 몸뚱이와 줄줄 흘러나오는 정액을 아연하게 내려다보았다.

“윽…, 하아, 하…….”

절정을 따라 빠듯하게 조이고 풀기 반복하는 내벽 안에서 한유일 역시 사정했다. 달아오른 내벽 안에 뜨겁게 쏘아 대는 정액의 양이 평소보다 많았다. 강한은 앓는 소리를 내며 상체를 무너트렸다. 욕조 턱에 아예 가슴을 대고 무너지자, 유일은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형, 미안해요. 제가 경험이 많이 없어서.”

안에 사정한 일이 처음도 아닌 데다가 평소에는 강한이 부추겨 한 적이 더 많았다. 그런데도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는 그가 우스워 강한은 힘 빠진 웃음을 실실 터트린다.

“두 번 더 어리네 마네 했다가는 뒈지겠다…….”

한유일은 그를 따라 웃으며 강한의 몸을 쓰다듬었다. 한껏 성감에 예민해진 축축하고 미끄러운 살결은 그저 매만지는 손길에도 잘게 진동하며 유일을 반겼다. 이러다가는 또 설 것 같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그 위에도 손이 닿았다.

물과 정액으로 질척질척한 성기는 자그마한 애무에도 무척 야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즐기듯, 유일은 일부러 더 농익은 손길로 좆을 매만졌다.

“흣, 지금 하지 마, 아, 응….”

“왜요. 형도 해야죠.”

“했, 했어… 아! 아윽, 했….”

꿀쩍거리며 달콤한 소리를 흉내 내던 마찰음이 점차 빠르고 노골적으로 변해 갔다. 기둥을 힘 있게 쳐올리던 유일이 아예 선단 위로 손바닥을 세웠다.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손바닥에 요도구가 마구 비벼진다. 강한은 본능적으로 바르작거렸지만, 욕조와 한유일 사이에 갇힌 몸은 갈 곳이 없었다.

“어, 안…안 돼, 잠… 아, 아아!”

이대로 가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처음 겪는 감각이 아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뇌보다 신체 반응이 더 빨랐다. 아까의 사정처럼 강한은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팍 터져 나온 물줄기에 당황했다. 평소처럼 한계 근처까지 아른거리다 터져 나가는 식이 아니었다. 일순, 방심한 사이 이성보다도 먼저 쾌락이 치고 올랐다.

“허억, 흐읏, 으으응…….”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아래를 내려다보는 중에도 유일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부드럽고 집요하게, 물을 흘려 대는 성기를 자꾸 매만졌다. 욕조에 토도독 물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아, 씨…발…….”

결국 이번 욕은 잘리지 못한 채 튀어 나갔다.

“한이 쉬했네.”

한유일은 주눅 한번 들지 않고 바르르 떠는 뱃가죽을 매만졌다. 그러면서 뒤끝의 최종점을 찍는 것이다.

“한이도 아기야?”

여러모로 강한을 털썩 꿇게 만드는 말이었다.

***

은 사람들 사이에서 ‘립어노’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프로그램은 배우와 가수부터 운동선수, 영화감독이나 작가까지 폭넓은 유명인들의 일상을 다뤘다. 출연진들은 이 박 삼 일 동안 자신의 집이나 취미 생활을 드러내고 그 과정에서 본업을 위한 준비 과정이나 색다른 대인 관계를 공개하기도 했다. 덕분에 팬들은 다양한 모습을 영구 소장할 수 있었으며, 평소 베일에 가려진 사람일수록 립어노 출연 요구가 빗발쳤다.

한유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유일의 팬들은 립어노 출연을 몇 년째 목 놓아 부르짖었다. 그러면서도 그 누구보다도 ‘한유일이라면 당연히 안 나가겠지…….’ 하고 체념하고는 했다.

[와, 정말 저희가 오매불망 기다렸죠? 특히 지난번 유일원 배우님께서 한번 노력해 보겠다 하신 후로……. 목을 빼고 기다렸었는데! 드디어, 드디어 모셨습니다. 한유일 배우님! 나와 주세요.]

심지어는 립어노 고정 패널들마저 기립 박수로 그를 맞이했다. 강한은 언젠가처럼 소파에 길게 누워 유일의 무릎을 벤 채 웃었다. 그의 배에 등을 대고 동그랗게 말려 자고 있던 무이가 짜증을 내듯 고개를 푸르르 털었다. 그러더니 소파를 내려가 탓하듯 흘겨보며 자기 방석에 눕는 것이다. 강한은 ‘와, 봤냐?’ 하고 유일의 허벅지를 토닥거리며 웃었다.

“아, 맞다. 지난주에 예고 나가자마자 나도 현경이랑 사장님한테 문자 폭탄 맞았어.”

“응, 다들 기대도 안 했대.”

한유일은 남 이야기를 하듯 웃으며 귤 한 조각을 내밀었다. 일부러 말랑한 과육을 강한의 입술 위로 꾹 눌러 입맞춤을 연상하게끔 하며.

“하긴……. 한이가 하라고 안 했으면 생각 없었겠지.”

확실히 유일은 사생활을 절대 노출하지 않는 주의였다. 재회하기 전에는 강한을 효과적으로 회유할 수 있는 무기였고, 재회한 후에는 강한을 지킬 수 있는 방패였다. 그럼에도 이번 방송 출연을 수락한 것 역시 순전히 강한 때문이었다.

무릎 걱정이 허사로 돌아갔던 섹스 이후. 뒤끝을 다 풀어낸 한유일은 유일원이라는 사람에 대해 설명했다. 그나마도 ‘한이가 싫다고 하면 안 놀게.’ 하는 전제를 깔아 놓은 후였는데, 모든 이야기를 들은 이후 강한은 또 한 번 무릎을 꿇고 싶어질 뿐이었다.

정원고등학교 후배이자 이름마저 두 글자가 겹치는 유일원. 알고 보니 그는 유일처럼 어릴 적부터 혼자 자란 사람이었다. 심지어는 그 역시 할머니 손에 오래 맡겨졌는데, 그마저도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였다. 급격히 건강이 악화된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혼자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여러 큰일을 겪게 되면서 방황도 하고 힘든 시간도 겪었다. 크지도 않은 유산을 노리고 연락 하나 없던 할머니의 핏줄들이 집을 들쑤시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유일의 영화를 보게 된 것이다. 정확히는 영화 홍보로 진행한 인터뷰가 먼저였다. 유일이 작중 캐릭터의 고난에 대해 ‘저도 부모님이 어려서부터 안 계셨기 때문에…….’ 하고 서두를 열었고, 그에 마음이 끌린 유일원은 당장 영화를 구매해 보았다. 그것을 계기로 연기자의 꿈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한유일 역시 이 내막을 전혀 몰랐으므로 막연히 벽을 쳤다고 했다. 그에게 타인의 호감을 감지하고 거절하는 일은 별난 행동도 아니었다. 언제나 숨 쉬듯 해 왔으므로 자연스러웠으며, 빈틈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리얼리티 촬영 중 흉내로 마신 술에 거나하게 취한 유일원이 제 입으로 다 털어놓은 것이다. ‘선배님 저 싫어하지 마세요. 저 선배님한테 관심 없어요. 저 여자 좋아해요.’를 포함한 모든 고백을.

게다가 그 가정사는 이제 비밀도 아니게 되었다. 유일원이 얼마 전 방영된 립어노에서 모두 이야기한 것이다. 한유일을 특별히 존경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면서 자세히 털어놓았다는데, 강한은 알지 못했다.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그쯤에는 그가 꼴도 보기 싫었기 때문에 채널을 돌렸을 것이다.

그러한 배경들이 있기에 한유일도 경계를 풀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후배랑 잘 지내면, 한이가 우리 애 친구 없다고 걱정하는 꼴도 안 보고.’ 하고 덧붙이기도 했다. 해사한 미소와 다르게 말본새가 싸가지 없었지만 강한은 입을 다물었다. 죄인 된 기분으로 묵묵히 이야기를 마저 듣고, 종래에는 유일원과 자리를 만들자 제안했다. 질투한 사실을 사과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밥 정도는 사야 죄책감이 풀릴 것만 같아 그랬다.

립어노 출연은 그 자리를 계기로 제안받았다. 사실 말이 제안이지, 대다수 억지에 가까운 생떼였다.

-아, 형. 저 반응 좋았다고 몇 주 더 나오라고 하시는데 소재가 없어요. 노잼이잖아요, 저.

-아는구나.

-으어엉, 진짜, 한 번만요! 룸메이트분 계셔서 집 공개하기 그러신 거예요? 아님 저희 집에 놀러 오는 정도만 출연해 주셔도 진짜 좋을 것 같은데. 네?

일원은 화면에서 보던 것보다 더 밝고 어린 구석이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상수와 겹쳐 보일 만큼 정감이 가는 모습에 강한은 마음이 슬쩍 기울었다. 결국 묵묵부답인 유일을 조르다 못한 일원이 잠시 화장실에 간 틈을 타, 직접 설득하게 된 것이다.

-우리 집으로 일원 씨를 초대해서 찍으면 어때. 잠깐만 특별 출연 식으로.

-우리 집?

-어.

-한아, 아무리 미안해도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는 집에는 카메라 앞에 내보이기 어려운 물건들이 많았다. 현관에서부터 부서진 핸드폰과 의미를 알 수 없는 나무토막이 반기지 않던가. 게다가 고작 룸메이트 사이라기에는 커다란 침대 하나뿐인 침실과 곳곳에 숨겨진 콘돔, 젤, 호기심에 샀던 성인 용품들도 문제였다. 특히 냉장고에 자석을 이용해 붙여 놓은 둘만의 사진들은 단순한 친구 사이로 설명하기엔 특별한 기류가 흘렀다.

-나 없을 때 찍고, 들키면 안 되는 물건은 다 침실에 숨겨 두자. 무이도 내가 가게에서 데리고 있을게. 촬영은 침실 빼고 하자고 하고.

-그래도. 집요한 사람들 붙으면 한이한테 또…….

-유일아.

강한은 유일의 성을 잘 떼어 부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유일아.’ 하고 부를 때면 한유일은 눈에 띄게 약해졌다. 어떤 부탁이라도 다 들어줄 사람처럼.

-유일원 씨 나온 편 보면서 나도 좀 욕심이 나더라.

물러진 유일의 마음속을 파고들기 위해 강한은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너 좋아하기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는데. 남들 앞에 대놓고 소리치지는 못하더라도, 언제까지고 죄지은 것처럼 꽁꽁 숨어야 하나.

애초 한유일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아웃팅을 고민해 본 적 없는 남자였다. 그는 오랜 시간, 비밀이 밝혀져도 괜찮을 만한 인생을 계획하고 준비해 왔다. 그런 그가 사람들의 시선에 극도로 예민해진 것은 모두 강한이 인질이 된 순간부터였다. 그 사실이 제법 오랫동안 강한의 발목에 매달려 있었다.

-다들 그냥 같이 사는 친구구나 할 거야. 눈치 빠른 사람은 이상하게 볼 수도 있지만, 뭐. 그러라고 해. 보이는 사람 눈에는 그냥 보이고 살자. 나는 너 일에 방해만 안 되면 다 괜찮아.

그래도 끝까지 그의 꿈을 위태롭게 하는 결정은 할 수 없었다. 최후의 마지노선만을 남겨 놓은, 열렬한 고백과도 같은 설득에 유일은 아주 늦게 고개를 끄덕여 답해 주었다.

그렇게 반쯤은 등을 떠밀어 감행한 촬영이기에 강한은 다소 심심한 콘텐츠를 예상했다. 하지만 집에 초대받은 일원이 신발을 다 벗기도 전에 유일은 ‘들어와. 너 온다고 형이 청소 열심히 해 줬어.’ 하고 상기된 목소리를 냈다. 느긋하게 누워 감상하던 강한은 불안한 예감과 함께 슬며시 일어나 앉았다.

[이건 형이 고른 그림이야.]

[형이 이 맥주를 좋아해서 항상 채워 놔.]

이름을 이야기하면 단서가 될까 봐 싫고 룸메이트라는 호칭은 너무 격하되는 것 같아 싫다더니 결국 선택한 게 ‘형’이었다. 화면을 바라보며 아연해진 강한의 입 앞으로 또 다시 귤이 대령되었다. 한은 심각한 얼굴 그대로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파스타 레시피도 형이 알려 줬어. 그런데 내가 형만큼 맛있게 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방영분 내내 유일의 말 80%가 그놈의 ‘형’과 관련되어 있었다. 스튜디오에서 미리 편집된 영상을 보며 반응을 따내는 패널들도 모두 ‘도대체 어떤 형이냐’부터 시작해서 ‘혹시 그분이 목숨을 구해 주신 적 있느냐’까지 혀를 내둘러 댈 정도였다.

그쯤 강한의 핸드폰에도 불이 났다. 현경과 은수가 함께 있는 단체 대화방과 상수의 메시지가 번갈아 신규 알림을 갱신해 댔다. 강한은 한숨을 얕게 내쉬며 그들이 보내 준 커뮤니티 실시간 반응을 읽어 보았다.

익명32: 아니ㅆㅂㅋㅋㅋ 우리가 지금 한유일 집을 구경하는 거니 형님 일상 브이로그를 보는 거니

익명38: 얼굴도 모르는 형에 대한 정보 벌써 오천개 알게 됨

익명39: 나 지금 켜서 잘 모르는데.. 혹시 한유일 그 형?이란 사람이랑 결혼해? 아니 사귀어?

└익명35: ㅋㅋㅋㅋㅋㅋㅋㅋ그런듯

└익명36: 오히려 좋아;;

익명48: 얘들아 대충 모른척해 주자... 평범한 형동생 사이 같네요 ^^

└익명52: 맞아 일반인이신데 괜히 구설수 오를라

└익명59: 아!넵!진짜!넘!평범한룸메이트같아용!!캡숑짱평범!!

└익명61: ㅋㅋㅋㅋㅋㅋㅋㅋ

익명62: 한유일 기혼이었어?

익명68: 말할 때 눈빛 보소.. 최소 그 형을 짝사랑하고 있는 수준 아님 말 안 됨

익명70: 우리가 기대한 것 : 한유일 tmi, 요리솜씨, 집 분위기, 취미, 일상

우리가 얻은 것 : 한유일과 같이 사시는 형님의 tmi, 요리솜씨, 집 소품 고르는 취향, 형님의 취미와 일상

└익명77: 존웃ㅋㅋㅋㅋㅋ큐ㅠㅠ 근데 현관에 장식품은 한유일이 골랐대 좀 난해하더라 앞으로도 형님이 고르시는 게 나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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