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Ⅰ(외전) (9/12)

겨울 한낮의 햇빛만으로 밝혀 놓은 집 안. 별다른 일과 없이 고요하고 적막하게 흐르던 하루의 한중간에서 강한은 수마를 맞이했다. 묵직한 눈꺼풀이 반항 없이 순응했고, 숨결은 서서히 느릿해졌다.

잠을 채근하듯, 머리 위에서는 이따금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울렸다. 그가 베고 누운 단단한 허벅지의 주인이 대본을 읽어 볼 때 나는 소음이었다.

강한은 그가 시나리오를 검토하는 시간이 좋았다. 평소에도 정적인 그는 각본을 읽을 때 더더욱 고요해졌는데, 말로 하기에는 퍽 민망하지만 솔직히 그림 같았다. 혼자서만 세상과 다른 시간을 보내는 듯 기이한 아름다움이 느껴져 좋았다.

은수가 사장이었던 카페를 완전히 정리하고 아예 정원시에 살게 된 지 벌써 몇 달. 그동안 강한은 모친과 어색한 만남을 몇 번 가졌고, 유일과 잠시 해외에 다녀왔으며, 이제는 은퇴한 마 감독의 도장에서 초등부 아이들을 며칠 가르쳤다. 카페를 개업한 후에는 꿈꾸기 어려울 만한, 아주 한산한 날들을 보냈다.

살면서 이토록 오래 쉬어 본 적이 없었다. 강한은 조금 어색해하면서도 이내 기꺼이 받아들였다. 제 휴식도 휴식이지만, 논란 이후 점점 더 인기가 높아져만 가는 한유일 탓이 컸다. 시간이 있을 때 봐 두어야 한다는 위기감이 생겼다.

그래서 한 폭의 그림 같은 그를 감상하다 말고 기어코 그 풍경 속으로 끼어들고 마는 일상이었다. 오늘은 느닷없이 무릎베개를 하고 눕는 방식으로 침입이 이루어졌다.

[이미 두터운 팬층을 소유하고 있는 만화다 보니, 영화 제작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다양한 반응들이 쏟아졌는데요. 원작 팬들은 특히 캐스팅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중 한 누리꾼의 글이 인기인데요. ‘내가 해 본 가상 캐스팅’이라는 제목으로 게시된 글 속에는 배우 한유일 씨와…….]

잠기운으로 먹먹하게 가라앉아 있던 청각이 트이기 시작했다. 특히 유일의 이름은 각성제처럼 수면을 몰아내고 정신을 일깨웠다.

“자도 돼.”

숨결로만 알아챈 이의 손길이 닿았다. 딱 기분 좋을 만큼만 서늘한 손가락이 한의 미간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 손길에 퍼뜩 잠이 달아났다. 이제 촬영이 시작되면 붙어 있을 시간도 모자랄 텐데, 겨우 잠이라니. 강한은 가히 반성에 가깝게 생각하며 눈을 부릅떴다. 옆구리 근처에 아무렇게나 놓았던 핸드폰을 들었다.

“너…, 그거 오디션 언제랬지.”

잠긴 목소리로 물으며, 강한은 가물가물한 눈을 비볐다. 핸드폰 안에 실행시킨 달력 화면이 아직은 흐릿했다.

“열흘 뒤. 그런데 한아.”

“어.”

강한은 열흘 뒤 날짜에 ‘한유일 오디션’이라는 항목을 적어 넣고 앉았다. 여태 제 머리로 짓누르고 있던 유일의 허벅지를 투박하게 두어 번 주물러 준 뒤, 늘어지게 하품하며 소파 등받이에 기댄다. 그러자 이번에는 유일이 그의 허벅지에 머리를 댔다.

아래에 누워 아무렇게나 올려다보아도 멀쩡한 얼굴로, 그가 물었다.

“정말 안 가르쳐 줄 거야?”

이채를 띠는 눈동자에 난감한 표정이 맺혔다. 강한은 마음 약하게 만드는 얼굴을 슬쩍 외면하며 다시 핸드폰 속에 집중했다. 그새 메시지가 수백 통 쌓여 있었다. 은수와 현경이 함께 있는 단체 대화방이 개설된 후로는 늘 이런 식이었다.

“마 감독님 도장 연결해 준다니까. 기왕이면 제대로 배워야지.”

일부러 무심하게 대꾸하고 메시지 창을 열었다. 남은 열흘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 상담받기 위해서였다.

“다른 애들은 가르쳐 줬으면서.”

“……다른 애들?”

강한의 기억 속에는 없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한유일 외에 다른 사람이 태권도를 가르쳐 달라 부탁한 적도 없었거니와, 들어줄 리도 없었다. 그나마 최근 마 감독의 부탁으로 초등부 아이들을 며칠 봐 준 적은 있지만 품새 자세를 점검해 주는 정도에 그쳤다.

곰곰이 생각해 보던 강한은 불현듯 홱 고개를 돌렸다. 조금의 경악을 묻힌 헛웃음이 터졌다.

“너 설마 초등학생 질투하냐?”

설마 싶은 질문에도 유일은 좀처럼 주눅 들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되냐는 듯한 눈길로 뻔뻔하게 응수한 그가 대본에 시선을 내렸다.

“한이가 몰라서 그렇지. 나는 다 질투해.”

그 담담한 대답이 강한을 더 웃게 했다. 이번에는 순전히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모르진 않는데.”

도저히 모를 수 없게끔 하면서. 강한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멈추었던 손가락을 움직였다. 수백 개 쌓인 메시지는 읽지 않은 채, ‘한유일이 쉴 때 뭐 하고 싶은지 인터뷰한 적 있어?’ 하고 제 할 말만 작성하던 손이 멈칫했다.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화면을 죽죽 올려 대는 메시지들이 심상치 않았다.

「공은수: 야 강한 ㅡㅡ 배우님 진심 꿀밤 한 대만 때려 줄래?」

「현경: 그래도 때리는 건 좀…….」

「현경: 점장님 손 매울 것 같아요 ㅠㅠ」

「공은수: 아니 요즘 세상에…… 아무리 해외라 해도 진짜 둘 다 미쳤냐고 ㅋㅋㅋㅋ」

「공은수: 야 강한 너 읽지만 말고 뭐라고 말을 좀 해 봐. 일단 지금 이건 현경이랑 내가 주작 어그로로 몰아서 글삭했거든? 근데 담에 또 이러면 죽는다.」

‘주작 어그로, 글삭…….’

암호와도 같은 말들은 문맥만으로 대략 의미를 유추할 수 있었다. 어쩌면 해외라는 단어 하나로 단박에 떠오른 일이 있어 더욱 그랬는지도 몰랐다. 강한은 순식간에 심각해진 얼굴로 은수가 보내온 캡처 이미지를 확인해 보았다.

나 독일 사는 익명인데 오늘 한유일이랑 남친? 봄;

일부러 따라간거 절대 ㄴㄴㄴ

나 유학중이라 원래 독일 살거든

과제에 치여사는중.. 시부렐... 암튼 오늘도 교수님 욕하면서

카페 앉아서 과제 중이었는데 앞에 존잘남 앉는거임..

한국인 같은데 존나 개잘생긴거; 몸이랑 어깨도 쩔고

그래서 헐 번호 딸까 드릉드릉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태리계??;암튼 단발미남 하나가 와서 반대편 앉더라??

존나 느끼한 미소에 꿀 뚝뚝 눈빛 장착하고ㅡㅡ 결정적으로 윙크하는거 보고

아.. 진짜 잘생긴 새끼들은 다 게이인가보다...

하구서 관심 끌라 했는데;; 저기서 익숙한 사람이 오는거야?

근데 막 얼굴에서 빛이 나???

그럴리가 없거든??

내가 이렇게 생긴 사람이 익숙할리가 절대 없는데?

뭐지????하면서 보니까 한유일이더라ㅇ0ㅇ...

ㅇ0ㅇ.......

진심 나 이 표정으로 잇엇음ㅋㅋㅋ

근데 한유일이.. 그 존잘남 뒤로 와서는 백허그를 하는거야;;

마치 존나.. 내거 건들지 말라는 느낌으로..;;

거기까지 보고 뭔가 보면 안되는걸 목격한거 같아서

괜히 내가 후다닥 도망쳐나왔는데.. 지금까지 멍하다.. 와..... 한유일 게이설은 꾸준하긴

했지만 ... 내가 실제로 목격할 줄은.. 아무튼 개잘생김..;; 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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