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6 한 번 더
합숙 촬영지는 인적이 드문 바닷가 근처였다. 낮에는 물이 빠져나가고 해가 질 때쯤 찰랑찰랑 차오르는 서해 바다 앞. 방파제에서 가장 가까운 구식 펜션 두 채가 숙소였다.
예산이 적은 독립 영화인 데다 대부분 돕는다는 마음으로 나선 촬영이었다. 오래된 나무 기둥에서 큼큼한 냄새가 올라오고, 온수와 냉수도 변덕을 부리는 숙소였지만 아무도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밤마다 고기를 구워 먹고 술을 마신 덕분에 현장 분위기가 아주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한유일과 감독의 스캔들이 터진 후, 늘 시끌벅적하던 펜션 분위기는 그 며칠 사이 싸하게 가라앉아 버렸다. 스캔들 기사 자체보다는 갑작스레 자리를 떠난 감독 탓이 컸다. 돌연 촬영까지 중단한 채 사라져 버린 그 때문에 할 일이 사라진 스태프들은 허망해했다.
그들은 남은 한유일에게 무엇이라도 묻고 싶은 듯했지만, 누구도 입을 떼지는 못했다. 그저 호기심과 약간의 비난, 혹은 안타까움이 담긴 눈동자로 흘깃댈 뿐이었다. 그 시선을 모조리 다 읽고도 한유일은 피하지 않았다. 제 방이 따로 있는데도 구태여 밖으로 나와 서 있거나 산책을 하면서 사람들의 눈길을 죄다 받아 냈다. 꼭 일부러 그러는 사람 같았다.
그 모습이 매니저 영송의 눈에는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상을 가득 찌푸린 채 성큼성큼 다가간 그는 저보다 훌쩍 큰 유일을 다부지게 잡아끌었다.
“너는 왜 자꾸 나와 있냐. 불편하지도 않어?”
방파제 가까이 서서 철썩이는 바다를 보고 있는 한유일은 위험해 보였다. 그래서 영송은 몹시 화가 났다. 평소에도 항시 불그스름하던 낯이 삽시간에 짙어진 채로 소리쳤다.
“주 감독은 아직도 연락 없고?”
여전히 붉은 얼굴 그대로, 영송은 목소리를 잔뜩 낮춰 물었다. 거칠하게 목을 갈며 나온 음성은 아주 살벌했으나 유일은 유유히 답했다. 남 일처럼 태평한 투였다.
“내일 온다고 하던데.”
“그게 다야?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도 없어?”
“음…….”
우악스럽게 끄는 매니저의 손길을 따라 걸으며, 유일은 한쪽 귀를 만지작거렸다. 이내 푸시시 웃은 그가 속 모를 말을 했다.
“뭐. 사랑에 눈먼 사람이 다 그렇지….”
유유자적한 그가 재차 영송의 분노를 끌어 올렸다. 주변을 휙휙 둘러본 매니저는 유일을 끌어다 방 안으로 격리해 넣었다.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자마자 버럭 소리를 쳤다.
“무슨 헛소리를 그렇게 하냐, 너느은! 진짜 걔랑 뭐 있었어? 없었잖아!”
“응, 없었죠.”
한유일은 그새 발갛게 달아오른 손목을 두어 번 매만졌다. 찌푸린 인상과는 다르게 순순한 답에 영송은 한풀 꺾였다.
“근데 왜 사랑 타령이냐고.”
푸념처럼 쭝얼쭝얼 묻자 유일은 가볍게 웃었다.
“주 감독님이 촬영도 팽개치고 애인한테 달려갔잖아.”
“허, 참 나, 뭐라고? 그래서 간 거라고?”
다시 눈이 돌아가기 일보 직전인 영송을 보고도 한유일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하얗고 긴 몸이 느리게 창가의 싱글 소파로 향했다. 느슨하게 기대어 앉은 그는 이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번쩍이는 새 액정이 기어코 영송의 눈을 뒤집게 만들었다.
“야! 너 이 새끼! 핸드폰 어디서 났어, 어? 너 누구랑 연락했어! 설마 아니지? 어? 너 기자들이랑 연락 안 했지?”
거의 사흘 전, 영송은 다 큰 성인의 핸드폰을 압수 처리했다. 영화감독과의 황당한 스캔들이 터지기보다도 조금 더 앞선 때였다.
그날은 소속사 측으로 파파라치가 보낸 협박 메일이 도착했다.
그들은 초범이 아니었다. 한유일 문제로만 지금까지 총 세 번 메일을 보내왔는데, 처음 것과 두 번째 메일은 어떤 사진과 증거도 없었다. 그저 애매한 투로 ‘한유일이 게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는 식이었다. CS 업무 과정에서 처리될 수준이었으므로 당사자는 알지 못했다. 처음 보고를 받았던 대표와 매니저도 그저 특종과 돈을 바라는 잔챙이들의 협박으로 생각하고 넘어갈 정도였다.
그러나 세 번째, 마지막으로 전송된 메일은 달랐다. 그들은 「돌아오는 게 없으니 이 소문 내용 그대로 풀어 드립니다.」 하고 상세한 내용을 보내왔다. 일명 지라시라고 불리는 뒷소문에 그들이 붙인 헤드는 「요즘 떠오르는 남배우 H군, 일반인 남자 친구와 열애 중?」이었다.
그쯤 되니 비상이 걸렸다.
대표는 몰라도 영송은 그 일반인 남자 친구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는 유일에게 전성기를 가져다준 ‘동창 댓글’의 주인공이었고, 유일이 고집을 부려 커피를 배우게 된 선생님이었으며, 몇 번 맡은 적 있는 강아지 무이의 주인이자, 한유일의 오랜 첫사랑이었다.
덕분에 영송은 그 지라시에서 언급한 수많은 신상 정보가 모두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대는 생각보다 더 악랄하고 치사한 놈들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직까지는 동성연애의 강제적 공개가 대중의 정서와 맞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 점을 빌미로 협상을 진행하고, 만약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대도 아니라고 잡아떼는 수밖에는 없었다. 대표와 영송은 그렇게 오랜 대화의 종지부를 찍고 반쯤 통보하기 위해 유일을 불렀었다.
처음 한유일은 아무 말이 없었다. 모니터 속에 시선이 모두 묶인 사람처럼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대로였다. 다만 가끔 입술만이 미세하게 달싹거렸다. 할 말이 있다기보다는 그저 수십 번씩 되뇌어 읽는 글을 따라 무의식중에 그러는 듯했다.
넋이 빠진 그를 달래기 위해 영송은 수없이 많은 사례를 이야기했다. 이런 놈들 수십 수백 깔려 있으니 걱정 말아라, 어차피 이 새끼들 목적은 거래다, 합의만 되면 끝이다. 그런 말들을 모조리 그냥 흘려보내던 유일은 딱 한 마디를 했었다.
-더 큰 특종을 필요로 한다면, 어디까지 괜찮아요?
아주 위험한 질문이었다. 그길로 영송은 한유일의 핸드폰을 뺏고 강제로 합방 처벌까지 내렸다. 물론 덩치 커다란 놈과 좁은 침대를 함께 쓰는 것이 그 역시 무척이나 불편했다. 하지만 불안해 어쩔 수가 없었다.
“안 했어. 몰래 연락할 거였으면 형 앞에서 쓰지도 않지.”
유일은 식식거리며 다가온 영송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입술을 나른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녹이 슬어 버린 칼날처럼 탁하고 비릿한, 위험한 냄새가 나는 눈빛이었다.
“그런데 형, 그쪽에서 금전은 필요 없다고 했다면서요. 그럼 뭐겠어요. 원하는 건 다른 특종뿐인데.”
그 음험한 눈빛이 영송을 무척 불안하게 했다. 연신 격앙되어 소리치던 영송은 도리어 차분해져서는 침대 끝에 앉았다. 굵직한 손가락들을 엮어 끼운 그가 짐승처럼 끓는 투로 말한다.
“그럼 뭐. 찌라시 대신 그거보다 더한 가짜 염문이라도 퍼트리겠다는 거야? 아니면 뭐, 음주 운전이라도 하려고? 폭행? 불륜? 뭐로 덮어 보겠다는 건데. 그거 그냥 찌라시야. 가만두면 없어져. 어차피 그 새끼들 터트리지도 못해! 기껏 찌라시 정도야, 그딴 거 믿는 사람도 얼마 없고 말이야. 가만히 있으면은 된다고. 가만히.”
부글부글 끓는 속을 잘 다려서 건네는 중에도 유일은 시큰둥했다. 늘 반짝거리던 눈의 저 너머가 시커멓게 가라앉아 있었다.
7년 전, 처음 만났던 날에도 한유일의 눈은 저런 빛이었다. 그 시절 영송은 가장 오래 담당했던 배우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으로 1년이나 매니저 일을 쉬고 있던 때였다. 당시 그는 다시 매니저 일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유일을 만나러 나간 것은 순전히 좋은 형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하기가 어려운 탓이었다.
시원한 음료 한 잔에 들어 본 적도 없는 케이크까지 덤으로 시켜 준 대표는 한참을 설득했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안다, 그런 일 없게 하겠다, 배우도 사람답게 일할 수 있게 하려고 한다, 줄줄이 이어지는 말들이 제법 그럴싸했으나 영송은 굳게 마음을 다잡았었다. 더 흔들리기 전에 자리를 뜨고 싶어 ‘그래서 걔는요?’ 하고 채근하던 때, 마침 가게 문이 열렸다.
당시 스물셋이던 한유일은 앳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자리에 앉은 그는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영송은 어쩐지 따라 웃지를 못했다. 그 시절 김영송은 타인의 상처에 무척 기민했다. 특히 곪은 상처를 묻어 놓아서 나는 냄새를 아주 잘 맡았다. 덕분에 그 아름다운 얼굴 속에 숨겨진 역린을 곧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반짝이는 눈 너머의 그늘을 보았다.
그것이 미끼가 되어 꼬박 7년을 함께 보내온 세월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일의 낯은 점점 더 느긋해졌으며 여유가 생겨났다. 역린이 사라져서는 아니었다. 그저 숨기는 데 더욱 능해졌을 뿐이다.
그래도 영송은 만족했다. 자그마치 7년이니, 꽁꽁 숨겨 놓았던 것이 무뎌질 때가 됐다고 여겼다.
그런데 고작 며칠 사이, 한유일은 7년 전과 똑같은 눈동자가 되어 있었다. 푸르스름한 날이 언뜻언뜻 눈동자 안을 스쳤다. 금방이라도 모든 판을 뒤집어엎을 듯이 맹렬한 기세였다.
“제발 부탁인데, 유일아……. 가만히 조금만 있자.”
영송은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유일의 대답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형, 제가 건방지다는 생각 한 적 없어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문제였다. 유일은 확실히 아쉬운 입장을 자처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태생적으로 친절해 보이는 낯을 가졌다. 남들에 비해 다소 냉정한 이야기를 꺼내도 부드러운 미소 하나면 예의 바른 분위기가 풍겼다. 그런 그가 건방지다니, 대낮에 누가 이상한 소리라도 했나 싶어 영송의 눈길이 날카로워졌다.
“왜? 누가 이상한 소리라도 해?”
유일은 얕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멍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많이……. 건방지게 살아온 것 같아서요.”
영송의 얼굴에 또 빗금이 가게끔 만드는 말이었다. 하지만 유일이 아주 우습다는 듯 피식거렸기에 영송은 잠시 희망을 보았다. 이대로 좋게, 잘, 모든 것이 조용히 마무리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소문은 기어코 뒷문을 흘러 나갔다. 메신저를 통해 알음알음 퍼져 나간 내용은 메일에 적힌 것보다 상세했으며 ‘얼마 전 영화감독과 스캔들이 터졌던’ 같은 수식어를 통해 더욱더 분명해졌다.
그래도 아직은, 아직까지는 겨우 뜬소문이었다. 그 어떤 증거 사진이나 측근의 증언도 없는 헛소문. 영송은 그 점만을 목이 터져라 강조하며 유일을 진정시켰고, 한유일은 아무 말도 없이 촬영에 집중했다. 필요 이상으로 무리하는 바람에 몸이 축날 정도였다.
“첫사랑을 못 잊어서 여태까지 버틴 놈이 겨우 이런 일로 산송장이 되면 어쩌냐?”
새벽부터 링거를 맞춰 돌아오는 길. 영송은 괜히 툴툴거리며 면박을 주었다. 그에 조수석에 유령처럼 앉아 있던 유일은 창문 위로 이마를 기대었다. 창백한 얼굴이 얕은 미소를 담았다.
“나는 이런 일 아무것도 아닐 줄 알았어요. 공개 연애 하면 그만이고, 일 줄어들어도 뭐, 저희 집 잘살잖아요.”
“이야, 우리 유일이 조금 재수 없네.”
“그러니까요. 내가 진짜 건방졌다니까…….”
한유일은 열에 시달려 바싹 마른 목소리 그대로 웃었다.
“다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조금 멀리 돌아가도, 무서워서 겁을 내더라도, 내가 계속 당기면 결국에는 나한테 돌아올 거라고 정말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았는데…, 막상 이런 일이 생기니까.”
유일은 아주 긴 숨을 내뱉었다. 너무도 지친 듯이, 얕고 긴 한숨을 내쉰 그가 눈을 감았다.
“겁이 먼저 나. 또 사라질까 봐…….”
아득한 중얼거림이 심장을 저리게 했다. 때문에 영송은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히 차를 몰았다. 하도 안쓰러워 손수 물수건을 짜 가며 간호를 해 주고, 열이 조금 떨어졌을 때에는 혼자 쉴 시간까지 주었다. 그렇게 해서 매니저 김영송은 뒤통수를 맞게 된 것이었다.
그날 한유일은 데뷔 이후 처음으로 말도 없이 잠수를 탔다. 그것도 아픈 몸을 이끌고 겨우 첫사랑의 얼굴을 보러 가는, 더럽게 청승맞은 일탈이었다.
***
「오늘 촬영이 마지막 맞냐? 수고해라.」
「나는 오프. 어머니 뵈러 가.」
한유일은 반쯤 감긴 눈으로 메시지를 읽었다. 쉬는 날이라는 내용과는 다르게 문장이 전송된 시각은 새벽 여섯 시였다.
바람 빠지듯 웃은 유일은 몸을 돌려 정면으로 누웠다. 단단한 가슴팍 위에 핸드폰을 올려 둔 채, 느긋한 숨을 쉬었다. 답장은 머릿속에서 줄줄 흘러나왔다.
‘오늘 마지막 촬영은 맞는데 내 배역만. 전체 촬영은 아직 이틀쯤 더 남았어. 쉬는 날에 왜 그렇게 일찍 깼어. 악몽이라도 꿨어? 어머님이랑 만나는 게 그렇게 설렜나.’
조금쯤 장난까지 곁들여 만든 답을 되뇌며 유일은 작게 웃었다. 큭큭, 숨죽여 웃던 그는 한참 후에야 침대에서 일어났다. 가슴팍 위에서 오르내리던 핸드폰을 그대로 침대에 놓아둔 채였다. 끝내 답장은 전송되지 않았다.
느긋하게 준비를 마친 한유일이 향한 곳은 숙소로 삼은 펜션 마당이었다. 그는 급하게 잡힌 인터뷰 때문에 세팅한 머리를 어색하게 매만지며 걸었다.
펜션 마당에는 이미 촬영 준비가 끝나 있었다. 커다란 스티로폼에 출력물을 붙여 만든 뒤판과 스툴 의자 세 개가 전부인 조촐한 세트지만, 프로그램 자체는 영화 소개 채널 중 가장 유명한 곳이었다. 마이크를 달기 전 주해익 감독은 ‘우리 스캔들에 업혀 가려고 온 걸걸.’ 하고 소곤거렸다. 유일은 그에 대고 ‘설마요.’ 하고 대꾸했지만 저 스스로도 답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인터뷰는 생각보다 간결하고 깔끔하게 진행되었다. 철저히 영화 위주의 진행이었으며 유명 리포터는 사소한 말도 재밌게 살려 내는 재능이 있었다. 덕분에 한유일은 강한에게 보내지 못한 문자를 더 곱씹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촬영도 막바지라고 들었는데요! 촬영장 분위기가 너무 좋으셨던 만큼 아쉬움도 크시겠어요.”
“네, 정말 아쉽네요.”
상용구와 다름없는 대답이었으나 리포터는 제 눈썹까지 축 늘려 가며 ‘어허엉.’ 하고 반응해 주었다. 더운 촬영장 내부에 웃음 파도가 일었다.
“혹시 가장 마음에 드셨던 대사나 장면이 있다면 어떤 부분인지 짜앏게! 볼 수 있을까요?”
“어…….”
여전히 가볍고 유쾌한 분위기 속. 고작 하나의 질문이 유일의 평정 위로 돌멩이를 던졌다. 그는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담백한 투로 답했다.
“그런 대사가 있어요. 음……. 저는 원래 남겨지는 일이 익숙한데, 잘 포기하는데.”
잘게 떨리는 수면을 잠재우느라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게 흘렀다.
“그쪽은 잊히지를 않았어요. 포기가 안 됐어요.”
시나리오를 받은 이후 가장 많이 되뇐 대사였다. 한 글자도 빠짐없이 너무도 제 마음 같아서. 누군가에게 뱉어 내고 싶은 이야기라서.
“처음 알아서 그래요. 함께 있어서 좋은 기분. 그쪽이 알게 한 바람에…….”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던 시선은 천천히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유일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꿈결처럼 중얼거렸다. 마치 다른 세상에 뚝 떨어진 듯한, 그의 몰입된 모습에 촬영장 내부로 일순 정적이 흘렀다.
묘한 기색을 눈치챈 감독은 얼른 ‘저도 있어요!’ 하고 외치며 분위기를 채 갔다. 그와 리포터가 우스운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가 유일의 귓가를 스쳐 지났다. 여전히 바닥을 응시한 채, 그는 아직도 무언가 곱씹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대사였던 것이 아침에 읽은 문자가 되었다가 결국에는 강한으로 나타났다.
영화 속 배역처럼, 한유일은 남는 일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상실 앞에 그의 단념은 버릇이었다. 어릴 때에는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너무도 적어서였고, 그보다 자라났을 때에는 정반대였다. 멋대로 손바닥 안을 가득 채우고 또 그만큼 쉽게 빠져나가는 감정, 사람, 물건이 차다 못해 넘쳐흘렀다. 한때 손아귀를 메우던 양감의 부재란 유일에게도 조금쯤 아쉬운 감을 남기기는 했으나 그뿐이었다. 미련은 갖지 않았다. 멀어지고 사라지는 것들은 붙잡을수록 악화되는 성질이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모의 손을 붙잡은 날도 그랬다. 열에 익은 손으로 삼남을 꼭 붙잡으며, 유일은 ‘할머니, 가지 마.’ 하고 첫 떼를 썼었다. 이제 막 여섯 살이 된 무렵이었다. 그때까지도 삼남은 솥단지 하나로 가게를 운영했다. 대신 가게를 봐줄 사람도, 유일을 부탁할 곳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처음으로 일을 쉬고 여섯 살 손자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유일에게 그 밤은 정말 달콤했다. 해열제를 먹자마자 열은 금세 떨어졌는데도 할머니가 밤새 제 이마를 쓸어 주었고, 조금만 잠을 설쳐도 안아서 달래 주었다. 긴 밤 내내 따뜻한 품에 싸여 있는 기분이 참 좋았다.
그런데 다음 날, 도리어 삼남이 크게 앓아누웠다. 열이 펄펄 끓어 아무 말도 못 하는 그녀를 마주한 순간 유일은 세계의 종말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한유일에게 삼남은 대체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유일한 보호자였으며 울타리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아픈 때에도 유일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처럼 물수건을 적셔 땀을 닦아도 주고 안아도 보았지만, 신음성은 점점 짙어지기만 했다.
그날 맨발로 뛰어나가 도움을 요청하면서, 유일은 처음 후회를 배웠다. 그리고 단념이라는 버릇이 생겼다. 이제 그는 아픈 날에 홀로 잠드는 것이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너 밥은 먹었어? 약은?
-야, 너 열 존나 높은 것 같은데. 병원 가 봤어?
그런데 그날. 비에 쫄딱 젖은 남자가 막무가내의 병문안을 했던 바로 그날. 한유일은 오랜 시간 잊고 살았던 것을 다시 만났다. 달다 못해 눈알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그런 맛이었다.
“자, 그럼 벌써 마지막 질문인데요. 이 영화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어떤 영화일까요?”
리포터의 낭랑한 목소리가 갑작스레 유일의 귓가로 꽂혀 들었다. 허벅지를 꾹 잡아 온 주해익 감독 덕이었다. ‘아.’ 작게 탄식한 한유일은 흐려졌던 초점을 다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 영화는 사실 여름보다는 가을에 잘 어울리는 달콤 쌉쌀한 사랑 영화인데요.”
허벅지를 힘주어 누른 감독은 자연스럽게 손을 떼어 내며 웃었다. 능숙하게 시간을 벌어 준 그 덕분에 유일은 가만히 대답을 정리했다. 다행스럽게도 영화 홍보용 문구 정도는 눈을 감고도 외울 수 있었다. 미스터리한 상대를 사랑하게 된 어떤 바리스타의 성장, 커피 향이 느껴지는 영화. 그런 문장들이 쉽게 떠올랐다.
“그럼 이제 한유일 배우님 이야기를 들어 볼 차례인데요. 혹시 배우님께서도 이 영화가 가을에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나요?”
하지만 예상치 못한 질문이 준비된 답을 가로막았다.
사실 그저 ‘네.’ 한마디로 넘어가도 하등 상관없을 만한 말이었다. 질문이라기보다는 인터뷰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어 가려는 도구에 불과했다. 그 모든 것을 아주 잘 이해했음에도 유일은 아주 느리게 입술을 떼어 냈다.
“글쎄요, 저는 왠지 짝사랑을 생각하면 여름이 떠올라서.”
기어코 인터뷰를 길어지게 만드는 대답에 주해익 감독은 눈총을 쏘아 댔다. 그러나 한바탕 난리가 난 촬영장 안에서 딴생각에 빠진 한유일은 홀로 그저 조용할 뿐이었다.
다 끝나 가던 인터뷰에 기름을 부은 바람에, 촬영은 예상보다 늦은 때 마무리되었다. 카메라가 철수되는 동안 유일은 영송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그는 소식이 없었다. 통화 중이라는 안내 음성을 들은 후, 유일은 두 번 다시 걸어 보지 않았다. 지금이 기회였다.
영송은 이곳에 더 남아 이틀 후 있을 쫑파티까지 모두 참석하고 돌아가기를 원했다. 주해익 감독과의 스캔들도 모두 해명했고, 그가 스태프들에게 직접 남자 친구 사진을 보여 주며 요란 떨었던 덕분에 분위기도 많이 풀려 있었다. 오히려 얼어붙기 전보다 더 돈독해진 분위기였다. 영송은 ‘이런 유대감을 잘 써먹어야 된다니까?’ 하고 충고했다.
그는 이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으며 유일은 평소 그의 조언을 구태여 뱉어 내는 법 없었다. 하지만 요 근래 한유일은 평소와 다른 사람이었다.
“유일 씨, 수고했어. 촬영도 다 마쳤는데 인터뷰까지 남아 해 주고.”
“아닙니다.”
“좀 쉬고 놀다가 올라갈 거지? 쫑파티도 해야지.”
“안 그래도 그 말씀 드리려 했어요. 오늘 올라가 봐야 해서.”
펜션 쪽으로 나란히 걷고 있던 걸음이 방향을 틀었다. 주해익이 돌연 해안가 방면으로 이끈 탓이었다. 유일은 묵묵히 따라 걸으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감독은 다소 불안하고 긴장한 얼굴이었다.
“내가 유일 씨한테 진짜 신세 많이 졌어. 이번에도, 나 연락 없는데 그렇게 아무 이야기 안 하고 기다려 줘서 참 고마워. 그러기 쉽지 않았을 건데 말이야.”
“뭘요.”
서론을 길게 늘어놓으며 주해익은 제 손톱을 뜯었다. 한참 망설이던 그는 펜션이 다 멀어진 후에야 멈추어 섰다. 흘깃, 불안한 어린아이처럼 올라온 눈동자가 유일을 바라보았다.
“혹시……. 지난번에 내가 그, 연애 문제에 말 얹은 게 기분 나빴어?”
“……네?”
“아니이, 그때 이후로 말이야. 유일 씨가 너무 차가워진 것 같아서.”
서둘러 올라가는 이유가 저 때문인 줄 착각하는 듯했다. 유일은 미지근하게 웃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잘 기억도 안 나는데요.”
“정말이야?”
진정 솔직히 말하자면, 한유일은 일전에 회식 자리에서의 대화를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그가 ‘그래서 연예인이랑 일반인이 연애해 봤자 오래 못 가는 거야! 아무리 사랑해도, 자기 인생이 뒤집힐 상황은 아무도 못 견디거든.’ 하고 내지르던 소리는 어떤 영상처럼 선명하게 남았다.
“네, 정말. 지금은 중요한 일이 있어서 올라가야 하는 것뿐이에요.”
하지만 그때 그 말들이 다 무슨 소용일까. 유일에게는 지금 일분일초가 급한 상황이었다. 감독과의 대화가 더 길어져서는 안 됐다.
“…그럼 다행이고. 알았어. 내가 도울 일 있으면 꼭 말해. 스캔들 문제도 그렇고 이쪽 문제도 그렇구…….”
불안에 떨고 있던 눈이 이제는 아래로 축 늘어졌다. 주해익은 제법 미남형에 번듯한 이미지를 지녔으나, 경계의 울타리를 넘어가면 곧잘 아이가 되는 사람이었다. 다행히 한유일은 사람의 그러한 특성을 잘 이용할 줄 알았다.
“네. 인사 제대로 못 드리고 가는데, 감독님께서 잘 무마해 주세요. 염치없지만요.”
“에이이. 염치가 없기는! 우리 유일 씨가 촬영 다 살렸지, 뭐가 염치가 없어! 시사회 하고 그럴 때 또 만나서 제대로 먹자.”
“네, 감사합니다.”
초조하게 들끓는 속을 잘 눌러 숨겨 놓고, 그는 자상한 미소와 함께 마지막 인사를 마무리했다. 감독은 돌아서는 그의 등 뒤에다가도 계속해서 연락하라는 말을 던졌다.
그런데도 아직 매니저 영송은 통화 중이었다. 펜션 안을 다 뒤져도 보이지 않는 그를 찾아 한유일은 미적지근한 바닷바람을 따라 걸었다. 평소와 다르게 조급한 걸음이 구불구불한 돌 절벽을 타고 내려갔다.
내리막 아래에는 자그마한 백사장이 이어졌다. 물이 참방거리면 몇 걸음 걷지도 못할 만큼 작은 모래 더미였다. 원래라면 구태여 들어가 보지 않았을 장소지만, 한유일은 그곳에 찍힌 큼지막한 발자국을 보았다.
“그 새끼들 진짜 다 철창에 처넣어야 된다니까요! 아니! 직업 윤리라는 게 있지, 시벌놈들이!”
홀린 것처럼 그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백사장으로 이어지는 해안 절벽의 연장선 끝에 작은 동굴이 있었다. 한유일은 우뚝 멈추어 거무죽죽한 돌 벽을 바라보았다.
“아요, 안 돼요. 절대. 유일이 그 새끼 뭔 짓 할지 몰라요. 지난번에 못 들으셨어요? 찌라시 하나 막겠다고 뭔 짓이든 하려는 거.”
돌 벽 너머에서는 영송의 분노한 목소리가 끓고 있었다. 가슴팍을 내리치는지 살덩이 퍽퍽 치는 소리까지 파도 소리에 섞여 들었다. 유일은 현실감이 없는 표정으로 아주 고요하게 다가갔다.
“기사까지 난 줄 알면 그 자식 당장 나가서 음주라도 터트릴걸? 난 그 꼴 못 봐, 일단 우리가 어떻게든 막아 보고 그다음에…….”
검은 돌 벽을 넘어가자, 얕은 동굴 안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는 영송이 보였다. 그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분통을 터트리다가 일순 고개를 들었다. 귀신 본 것처럼 굳은 영송을 내려다보며 유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딱딱하게 굳은 안면을 움직여 겨우겨우 눈을 깜빡였다.
“대, 대표님. 일단 잠시만요. 오 분만 기다려 보세요.”
영송은 곧 터져 버릴 시한폭탄을 들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한유일은 그저 허둥지둥 손을 벌벌 떠는 그를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그동안 몇 번이나 핸드폰을 떨어트릴 뻔한 영송이 서둘러 유일에게 다가갔다.
“야, 유일아. 일단 내 말부터 들어 봐.”
“감독님께 말했어요. 지금 올라가겠다고.”
뻗어 오는 영송의 팔을 피하며, 유일은 나긋이 말했다.
“어엉?”
영송의 예상과 달리 시한폭탄은 아직 터질 때가 아닌 듯했다. 영송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
“본가로 갈게요.”
“어어, 그래, 그러자.”
설마 못 들었나. 그렇게 생각한 영송이 헐레벌떡 동굴을 벗어났다. 쫑파티까지 참석하고 올라가자며 설득하던 것도 모두 잊은 채였다. 급한 걸음이 젖은 모래를 푹푹 패며 달려 나간다.
“그리고 약속 좀 잡아 줘요, 형.”
한유일은 그 뒤를 느긋하게 따랐다. 등 뒤에서 흘러나온 평온한 목소리에 영송은 휙 뒤를 돌았다.
“누, 누구랑?”
입이 바싹 말라 거칠어진 물음에 유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이내 무슨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웃었다.
“누구겠어요. 당장 나가서 음주라도 터트릴 새끼라고, 형이 방금 말했으면서.”
날카로운 기색을 숨기지 않은 미소가 점차 깊어졌다. 영송에게는 그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가 마치 심지처럼 보였다.
“유일아.”
영송이 긴장한 숨을 꿀꺽 삼켰다. 아직 희망을 놓기에는 일렀다.
“그러지 말고 형이랑 얘기 좀….”
“형.”
“어, 어어.”
무엇이든 말해 보라는 태도로 영송은 재차 유일 앞에 다가와 섰다. 푹푹 들어간 발자국을 내려다보며 한유일은 여전히 고저 없는 투로 말했다.
“저 몰래 만날 수도 있었어요. 방금 그 얘기 못 들은 척하고, 혼자 몰래.”
아주 자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파랗게 날이 선 눈동자 안에는 불꽃이 있었다. 심지에 옮겨붙어 시한폭탄을 들끓게 만드는 불씨였다.
“적어도 나는 속일 생각은 안 했잖아요.”
그 순간 영송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손으로 불을 붙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이었다. 강한은 그 날씨에 모두가 기피하는 야외 좌석에 앉았다. 방금 받아 온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비 오듯 땀을 흘리는 대낮이었다. 그 역시 유리창 너머, 에어컨 바람이 시원할 카페 내부를 잠시 부러운 듯 바라보았지만 그저 제 검은 반팔 티셔츠만 펄럭였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끈적한 살결을 스치고 지나는 감각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야외 자리를 고집한 채 앉아 있었다.
카페 내부에 사람이 이토록 많을 줄도 모르고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온 마당이었다. 강한은 개미 하나 없는 야외 좌석을 홀로 차지하고 앉아 더운 숨을 훅 내쉬었다. 더위도 더위지만, 그보다는 초조한 마음이 숨통을 더더욱 조이고 있었다.
「오늘 촬영이 마지막 맞냐? 수고해라.」
「나는 오프. 어머니 뵈러 가.」
위로 삼기 위해 들어 본 핸드폰에는 새로운 메시지가 없었다. 그저 새벽부터 일어나 애써 덤덤한 척 보낸 문장만이 남았다. 강한은 근래 비슷한 패턴으로 이루어진 대화를 쭉 올려 보다가 한숨 쉬었다.
최근 한유일은 곧잘 이런 식이었다. 아침에 보낸 메시지는 밤이 다 되어야 회신이 돌아왔고 그때 맞춰 전화를 걸지 않으면 목소리도 듣기 힘들었다. 막상 말을 주고받을 때에는 따뜻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이전과 같았지만, 무언가 틀어지고 있었다. 이 변덕스러운 연락 패턴에는 분명히 다른 원인이 있었다.
강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야, 씹냐?’ 하고 화풀이를 작성했다가 신경질적으로 지웠다. 무척이나 답답하지만, 그래도 지금 이 만남을 마무리하기 전까지만 참아 보기로 했다. 오늘은 바로 한유일에게 일러두었던 ‘해결할 일’을 처리하는 날이었다.
긴장감 때문에 새벽 다섯 시부터 눈이 번뜩 뜨였다. 덕분에 아침부터 상수가 희생양이 되었다. 그날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며 윽박을 질렀던 죄로, 그는 이제 강한의 하소연 상대가 되어 있었다.
새벽부터 상수에게 삼십 분이나 같은 말만 반복하며 연습을 하고, 그러고도 모자라 한 시간 가까이 일찍 나와 공원 트랙을 달렸다. 긴장을 풀기 위한 행동이었으나 도리어 심장 박동만 자극한 바람에 생애 처음으로 청심환까지 사 먹었다. 그런데 이 모든 난리를 지나고도 입술은 쉽게 떼어지지가 않았다. 말로 정리할 수 없는 감정들만이 목 언저리를 맴도는 기분이었다.
‘그냥 하면 돼, 그냥 하면…….’
시합 전 늘 주문처럼 외던 말을 중얼거리며, 그는 테이블 위로 체크 카드 하나를 올려 두었다. 매번 기한이 끝날 때마다 갱신해 두었으면서도 사용감은 없이 빳빳한 새 카드였다. 그 옆으로는 커다란 쇼핑백 하나가 놓였다. 처음으로 직접 사 본 모친의 옷이었다.
‘생신 선물이에요, 맞을지는 모르겠는데. 교환하실 수 있으니까…….’
준비한 말을 달달 외며 초조해하는 그의 뒤에서 이내 단화 소리가 났다.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을 밟으며 다가온 중년 여성이 테이블 앞에 섰다.
“덥지도 않아? 왜 밖에 이러고 있니, 야, 젊음이 좋긴 좋다.”
여전히 강한을 청소년처럼 대하는 그녀가 웃는다. 햇빛을 등진 그녀의 찌푸린 웃음이 소녀 같아, 강한은 따라 웃었다. 잠깐이면 된다고 한사코 고집을 부리고서야 여자가 의자를 꺼내 앉았다.
“생신 선물이에요.”
일단은 쉬운 말이 먼저 나갔다. 강한은 올려놓은 쇼핑백을 슥 밀고, 미리 시켜 놓았던 커피도 건넸다. 벌써 얼음이 반쯤 녹은 커피였지만 모친은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마셨다.
“웬일로 이런 걸 다 샀어.”
매번 용돈 봉투로 대체하던 선물이었다. 싫지 않은지 방싯 웃은 그녀는 얼른 쇼핑백을 챙겼다. 색상이 마음에 드는지 대충 보고도 화색이 돌았다. 봉투 안을 뒤적거리며 ‘잘 샀네.’ 하고 웃는 얼굴에 이미 더위가 잊힌 채였다.
“그리고 그 옆에……. 그것도요. 그건 생신 선물은 아니고….”
긴장감에 하얗게 질린 강한 역시 더위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오히려 손발이 차갑게 얼어 한기가 느껴질 판이었다. 단단하게 질린 손끝을 꾹 누르며 그는 체크 카드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천만 원이요.”
“뭐?”
카드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던 모친이 화들짝 놀랐다. 그 바람에 손에서 떨어진 카드가 바닥을 나뒹군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걸 다시 줍는 데만 해도 서너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다. 삽시간에 화기애애하던 공기가 뒤바뀌었다.
“너 무슨 사업 시작했니, 혹시?”
먼지 묻은 체크 카드를 겨우 집어 테이블에 올린 그녀가 처음으로 뱉은 말은 의심이었다. 눈이 잔뜩 일그러져 벌써부터 화가 난 표정에 강한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저 스물 때요. 우리 여기로 오게 된 일……. 기억하시죠?”
드디어 본론을 꺼낼 때였다. 사지를 저리게 만들던 긴장감이 이제 전신으로 퍼져 나가 최고조에 달했다.
“아, 아아. 아휴…… 난 또 뭐라고.”
그러나 모친은 벌써부터 안도한 듯 웃었다.
“그게 신경 쓰여서 모아 뒀니? 됐어, 너 써. 내가 해 준 것도 없는데 뭘….”
사고 친 게 아니라면 그만이다. 그렇게 덧붙인 그녀가 다시금 커피를 마셨다.
“그래도 이런 건 아빠 안 닮아 다행이다.”
너털웃음을 터트린 모친은 농담처럼 말하며 일어섰다. 이제 시원한 데로 좀 가자며 손부채질 하는 그녀를 강한은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모친이 보인 반응은 그다지 이상하거나 충격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평범하고 친절한 편이었다. 천만 원씩이나 되는 카드를 거절하며 저더러 쓰라고도 했고, 웃으며 살갑게 대답해 주기도 했다. 그런데도 강한은 어떤 비난을 들은 사람처럼 가라앉았다.
“그때 천만 원……. 도와줬던 사람, 누군지 안 궁금하세요?”
“응?”
이런 질문은 준비한 적 없었다. 강한은 그저 그 체크 카드에 얽힌 사연을 아주 두루뭉술하게, 그녀가 나중에 어떤 소식을 듣게 되더라도 너무 놀라지 않을 정도로만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당장에 모든 껍질을 벗겨 내 노골적인 감정을 드러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차피 모친과 자신은 그만큼 친밀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저 한유일과의 도약에 있어 가장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을 뿐, 어떤 의리로 꺼낸 말도 아니다.
“그때도 안 궁금하셨어요? 왜, 안 물어보셨어요?”
그런데 시키지도 않은 말이 저절로 입술 새로 비집고 튀어나왔다. 차갑게 식었던 손끝으로 불티가 솟아났다.
“그게 뭐가 중요하니, 다 지난 일인데.”
난데없는 물음에 여자는 당혹했다. 다소 웃음을 섞어 답한 그녀가 덧붙였다.
“천만 원이 어디 쉽게 생겨? 그런 기회가 왔으면 그냥 넙죽 받아야지. 재고 따질 게 어디 있어.”
흠잡을 데 없는 논리였다. 무척이나 현실적이고 당연한 처사다. 그럼에도 강한은 왜인지 서러운 기분을 느꼈다. 마음에 응어리로 남았던 것은 죄책감이 아니었나? 그가 혼란스러운 눈동자를 내렸다. 지글지글 끓는 태양 아래 더러워진 체크 카드가 데워지고 있었다.
“누가 그 큰돈을 줬는지, 제가 왜 그 자식을 때렸는지…….”
당시 강한은 그녀에게 어떤 설명도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해서였고 그 이후에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아서였다.
반면 범철은 의기양양했다. 한유일 때문에라도 진짜 이유를 밝힐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는지 그는 저 유리한 대로 이야기를 꾸며 냈다. 그 이야기는 그의 부모 입을 통해 한 번 더 과장되었다. 귀가 따갑도록 울리는 비난 앞에서 강한은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천만 원을 준 소속사도, 제 옆에 앉아 한숨을 내쉬는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그 앞에 나서 줄 사람은 없었다.
“그거 소속사에서 준 거예요.”
“…얘가 갑자기 왜 이래?”
당황한 모친이 아무도 없는 주변을 살피다가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청소년기에도 한 번 대든 적 없던 아들의 모난 말투에 놀란 기색이었다. 강한 역시 그 자그마한 동요조차 신경 쓰였으나, 입술을 한 번 꾹 깨물었다.
“제가 좋아하던 애가, 데뷔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게 들켜서요. 숨기는 대신 받은 거예요.”
주름진 여자의 눈가가 찌그러졌다. 더위에 대한 짜증과 의문, 당혹이 함께 섞인 빛깔이 오묘했다.
“왜 돈까지 줘 가며 숨기려고 했냐면, 제가, 그러니까, 걔가….”
오늘 강한이 준비한 말은 소속사 이야기와 천만 원을 모친에게 돌려주는 이유가 전부였다. 그저 ‘당시 그런 일이 있었고 속 썩여 죄송했다.’가 본론이어야만 했다. 이토록 마른침을 삼키며 당사자에게도 고백하지 못한 말을 내뱉을 생각은 없었다.
“남자여서요.”
이전까지 모친은 대화의 흐름을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하지만 한순간, 그녀의 얼굴 위로 어떤 깨달음이 스쳤다. 인지보다는 충격에 가까운 색이었다.
“다 소문내겠다고 해서, 주먹이 먼저 나갔는데……. 그건 아직도 후회해요.”
“너 지금….”
“어머니 인생이요, 나아질 만하면 제가 엎어트린 거니까. 늘 죄송했어요. 그래서 또 그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강한은 이상하게도 그녀의 충격받은 얼굴을 보는 순간부터 초연해지기 시작했다. 온몸에 가득 차올라 있던 긴장감이 천천히 빠져나가며, 준비하지도 않은 말들이 술술 흘러 나갔다.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대신 입술을 움직이고 있는 기분이었다.
“너, 설마, 지금도야? 네가 그….”
모친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강한은 그 위로 수많은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그의 기억 속에 여자의 아연실색한 얼굴은 언제나 자신 때문이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 아버지를 들여서, 온갖 재산을 빼돌려 나가도록 기회를 줘서, 교통사고로 오랫동안 입원해서, 오랫동안 참아 줬던 태권도조차 할 수 없게 돼서, 난데없이 사람을 패고 들어와서.
그 모든 순간마다 강한은 뼈저리게 후회했다. 기어코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자신이, 아버지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 돈, 소속사나 걔한테 돌려줄 생각으로 모았어요.”
지금도 여전히 강한은 그녀를 보면 죄책감을 느꼈다. 연민과 동정, 후회와 죄책이 사랑보다도 훨씬 묵직한 무게를 지녔다. 하지만 그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아니더라고요.”
아주 어릴 때부터 강한은 그녀를 연민하는 만큼 자신을 이해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 앞에서만큼은 단 한 번도 제 편이지 못했다.
“그거. 제가 어머니께 빚진 감정이에요. 그래서 계속…,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녀에게 천만 원을 주겠다고 결심하면서도 진짜 속내를 몰랐다. 그저 면죄부를 받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태권도……. 그것도 사고 때문에 그만둔 거 아니에요.”
아득하게 중얼거린 강한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테이블에 남아 있던 체크 카드를 조금 더 밀어 주고 고개를 숙였다. 꾸벅 굽힌 머리통 위로 따가운 해가 내리쬐었다.
“죄송해요. 들어갈게요.”
기어코 한 번 더 사죄를 남긴 후에야 발이 움직였다. 등 뒤에 고요한 모친을 남겨 두고 걷는 길, 땀이 비 오듯 흘렀다. 합숙 훈련을 받을 때처럼 정수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축축한 물기가 배어 나왔다. 그래서 강한은 자꾸만 얼굴을 훔쳐 냈다. 젖은 낯이, 아무리 쓸어내려도 마르지를 않았다.
어머니와의 만남을 끝내고 나면 의기양양하게 전화를 걸 생각이었다. ‘너만 감당할 줄 아냐. 나도 한다.’ 자신 있게 떵떵거리기 위해 벼르고 있었다. 비록 11년 내내 한유일이 준비해 온 것들에 비하면 미약하지만, 적어도 자신에게는 아주 큰 도약이었으니까.
도약 하나로만 보자면 지나치게 성공적인 기록이었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과감한 고백까지 하고 말았으니, 이제 그 누구에게 들켜도 무섭지 않을 듯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후련하지는 않았다. 준비했던 말과는 영판 다른 하소연을 늘어놓고 돌아오다니. 찜찜한 죄책이 마음에 들러붙고, 과거의 온갖 음울한 기억들이 기분을 가라앉게 했다.
한번 생각에 빠지면 헤어날 수 없을 때가 있었다. 겉으로만 아는 사람들은 그의 성격을 두고 시원하고 호쾌하다고 말했지만, 실상 그렇지 않았다. 제 문제에서만큼은 생각이 많고 제법 수동적이었다. 다만 그러고 싶지 않아 노력할 뿐이었다.
학생일 때는 이런 날에 더 열심히 훈련을 받았다. 숨통이 터져 나갈 정도로 운동을 하고 나면 모든 잡생각이 지워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태권도를 그만둔 이후로는 어떤 운동을 해도 그만큼 가슴이 터질 듯 뛰지 않았다.
아쉬운 대로 그는 맥주 한 봉지를 그득 담아 귀가했다. 유일에게 떵떵거리는 것은 내일로 미룬 채 하루 종일 영화를 볼 생각이었다. 루나 시리즈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서 맥주를 마시고, 무이와 놀아 주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금세 괜찮아질 것이다. 그럼 밝은 투로 전화해 경고할 생각이었다. 사람을 여기까지 오게 했으면서 이제 와서 뒷걸음질 치지는 말라고.
긴 샤워를 마친 강한은 집 안 불을 다 꺼 놓고 거실에 자리 잡았다. 테이블 위에 맥주며 간단한 안주를 다 준비한 채, 옆구리에 무이를 끼고 누웠다. 이제는 눈 감고도 외울 수 있는 <루나 더 퀸>의 첫 장면이 시작되려 했다.
일순 진동 소리가 몰입을 방해했다. 강한은 눈썹을 꿈틀 올린 채 무시했다. 아침부터 제 일처럼 전전긍긍하던 상수 전화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전화는 뚝 끊겼다가도 다시 걸려 오기를 반복했다. 우우웅, 웅, 테이블 위에서 덜덜 떨어 대는 요란스러운 소음이 거슬린다. 결국 쌍소리를 얕게 중얼거리며 강한은 몸을 일으켜야만 했다.
예상과 다르게 액정 위에 뜬 번호는 전혀 모르는 것이었다. 저장조차 되지 않은 낯선 번호를 가만 쳐다보고 있으니 그다음에는 다른 번호가 올라왔다. 전화 한 통이 끊기면 또 다른 번호로 걸려 오는 식이었다.
강한은 손안에서 진동하는 물체를 한참 내려다보다 ‘아이 씨.’ 하고 중얼거렸다. 또 누군가 제 번호를 여기저기 흩뿌린 모양이었다. 예전에도 한 번 어디 카페 아르바이트생이라며 SNS에 사진이 올라갔을 때, 모르는 사람들에게 수백 통의 전화가 걸려 와 번호를 바꾼 적 있었다.
“날을 잡아도 꼭 이런 때.”
한숨처럼 중얼거린 그가 전원 버튼을 눌렀다. 까맣게 잠든 핸드폰을 확인한 뒤, 강한은 다시 만반의 준비를 마친 보금자리 속을 파고들었다. 커다란 화면 속에는 한유일을 무척 닮은 루나가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언젠가 루나라는 별명이 한유일에게 과분하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이겨 내고 개척함으로써 비로소 눈이 부실 만큼 반짝거리게 된 그녀가, 그저 외모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한유일과 엮이게 된 것 같아 싫었던 날이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강한은 그녀를 보면서 유일을 떠올렸다. 비단 반짝이는 눈동자가, 기다란 속눈썹이, 시원한 입매가 아름다워서만은 아니었다. 이제 한은 알고 있었다. 유일이 얼마나 용감한지, 무모할 만큼이나 대담한지, 그래서 또 얼마나 빛나는지.
[루나.]
루나를 짝사랑하는 꽃사슴이 속삭였다. 언제인가 한유일이 저를 닮았다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던 인물이었다. 그가 밤하늘을 배경으로 하얗게 빛나는 루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는 나에게 유일한 달이야.]
아스라이 사라지는 작은 속삭임을 지켜보며 강한은 살포시 웃었다. 우울하게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금세 날아가며 헛웃음이 터진다. 저렇게 예쁘장하게 생긴 캐릭터를 닮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한유일 그 새끼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
한밤중이 되어서야 눈을 뜬 강한은 널브러진 맥주 캔을 치웠다. 평소보다 부은 눈꺼풀을 비비적거리며 청소를 마치고, 연달아 루나를 틀어 주다 못해 광고 화면으로 넘어간 TV를 껐다. 모든 과정은 아주 느리고 조용했다. 코를 고롱고롱 골며 잠든 무이를 깨우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무이는 자그마한 인기척 하나에 게슴츠레 눈을 떴다. 졸음 가득한 눈이 끔벅거리며 강한을 감시하듯 쳐다보았다.
“무이야, 산책 갈까?”
그 말 하나에 무기력하던 강아지가 벌떡 일어났다. 빛나는 눈동자와 바쁘게 흔들리는 꼬리가 웃음을 새어 나오게 해, 강한은 낮게 웃으며 옷을 챙겨 입었다. 어차피 몸도 무겁고 생각도 많은 밤이니 그에게도 운동이 필요했다.
강한은 눌린 머리 위에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집을 나섰다. 아직 잠들어 있는 핸드폰은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어차피 평소 한유일의 답장이 오던 시간보다는 아직 이른 때였다.
무이는 보통 공원 서너 바퀴를 뛰고 나면 더 이상 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럼 강한은 트랙 바닥에 엎드려 시위하는 강아지를 들어 올려 안았다. 그렇게 무이를 품에 안고 달리면, 그나마 운동하는 느낌이 들고는 했다.
등골에 땀방울 흘러내리는 감각이 선연했다. 금세 한낮처럼 달아오른 체온 덕에 숨이 가쁘게 올랐다. 강한은 낮에 그랬듯이 얼굴을 훔쳐 내며 벤치에 앉았다. 이번에는 한 번 쓸어내린 것만으로 쉽게 시야가 닦였다.
“오늘은 전화 받았으면 좋겠는데.”
벤치에 기댄 몸이 크게 부풀었다 꺼지며 숨을 뱉어 냈다. 후욱, 심호흡하며 무언가 다스린 강한은 마침내 핸드폰을 들었다.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액정이 천천히 밝은 빛으로 깨어나기 시작했다.
화면이 켜지기 무섭게 손안에 쥔 핸드폰이 마구 진동했다. 쌓여 있던 문자며 전화, 메신저 알림이 폭격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강한은 놀란 눈으로 마구 올라가 버리는 미리 보기 메시지들을 읽어 보았다.
「너 괜찮아? 어디야? 출근 어려우면 얘기해.」
「가게는 현경이랑 내가 보면 되니까 걱정 말고. 무이도 맡아 줄게.」
「형 왜전화를안받아요시바류ㅠㅠㅠㅠㅠ」
「안녕하세요? NKN 기자 서이지입니다. 금일 올라간 기사와 관련하여…….」
「올댓가십 김철원 실장입니다.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 이렇게 실례를…….」
보낸 이도 가지각색인 수십 개의 문장이 휙휙 지나갔다. 강한은 비현실적인 숫자를 뒤로하고, 통화 목록을 눌러 보았다. 그곳 역시 모르는 번호와 아는 이들의 조합으로 난리였다. 상수와 현경, 은수, 그리고 수없이 많은 번호들 옆에 (11), (13), (15) 같은 숫자가 빨갛게 붙어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구나.’
강한은 직감했다. 빳빳한 손끝이 가장 먼저 유일의 이름을 눌렀다. 근래 일부러 저를 피하는 듯 행동하던 그에게서도 무려 스무 통이나 부재중 전화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다시 걸어 본 전화에는 반응이 없었다. 단조롭게 이어지던 연결음이 뚝 끊기고, 낯선 여성의 안내 음성이 들려왔다. 강한은 인상을 찌푸린 채 메신저를 켜 보았다. 수백 개의 붉은 알림을 뒤로하고 한유일의 이름을 눌렀다.
「한아.」
「미안해. 놀랐을 텐데.」
「전화 받아 주면 안 될까.」
제 핸드폰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모두 목격하면서도 아무 감각 없이 얼어붙어 있던 강한은 그제야 현실감을 느꼈다. 뭔가 아주 나쁜 일이 일어났다. 심장이 쿵, 쿵, 갈비뼈를 부술 듯이 울려 대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묻을게.」
「한이한테 피해 가는 일 없을 거야.」
유일에게서 가장 마지막으로 남은 메시지는 딱 두 문장이었다. 지나치게 간결했으며 그만큼 불길한 말이었다.
강한은 곧장 다시 유일의 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이번 역시 응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불쑥 치민 욕설을 아무렇게나 뱉어 내며, 그는 다른 번호를 눌렀다. 이번 시도는 아주 빠르게 성공했다. 신호음이 두 번 가자마자 달칵 소음이 울렸다.
[예에, 대표님.]
유일의 매니저 영송이었다.
[저 유일이랑 같이 있는데요, 왜요….]
일부러 누군가를 속이는 듯 그는 어색한 연기를 했다. 강한은 아주 긴 한숨을 내쉬며 이를 갈았다.
“그 자식 지금 어디 있어요?”
낮은 물음에 영송은 잠시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대표님도 참.’으로 시작하는 한탄을 아무렇게나 웅얼거리면서 시간을 벌었다. 그사이에 메시지 한 통이 새로 도착했다. 영송이 찍어 보낸 주소가 거기 있었다.
“얼굴 가리고 가야 합니까?”
강한은 얼른 일어나며 물었다. 벌써부터 갈 준비를 마친 채 기다리고 있던 무이가 앞장을 섰다.
[그나마 다행이죠, 최근에 옮겨 놓은 데라 아직 주소가 유출 안 돼서…….]
영송은 아직도 어색한 연기를 이어 가며 에둘러 답변해 주었다. 그에 강한은 재차 무이를 안아 들었다.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과 함께 다시 뜀박질이 시작되었다. 공원을 돌던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강한은 마치 훈련 때처럼 달려 나갔다. 허공을 가르고 바닥을 딛는 한 발 한 발의 폭이 무척이나 길게 이어졌다.
영송이 보내온 주소는 정원시였다. 도로가 텅텅 빈 이 밤중에 택시를 타고도 두 시간이 훌쩍 넘게 걸렸다. 가는 동안 강한은 무이를 맡아 준 은수에게 감사 인사를 보내고, 상수에게는 걱정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마지막 문자는 정원고등학교를 지날 쯤에 영송에게 전송했다. 거의 도착했다는 말에 영송은 미리 나와 있겠노라 답했다. 한유일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지 문자에는 오타가 가득 담겨 도착했다.
익숙한 정원시의 풍경을 한참 지나고서야 택시가 섰다. 11년 전에는 황량한 논밭이었던 외곽 근처에 이제 번듯한 주택들이 줄지어 있었다. 집집마다 화단과 울타리가 조성되어 있는 동네에서는 이국적인 느낌이 났다. 오는 내내 말 한마디 않던 택시 기사도 ‘이야, 동네 좋네요.’ 하고 중얼거릴 정도였다. 강한은 그저 고개만 주억거리며 값을 지불하고 내렸다. 그 역시 동의할 만한 감상이었지만, 지금은 대거리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영송은 낯선 회색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전전긍긍 두리번대던 그는 택시를 본 직후부터 다리까지 떨어 댔다. 그 초조한 기색에 강한 역시 마음이 급해져 무작정 달렸다.
그를 마주하고 서자마자 영송은 덥석 강한의 손을 잡았다. 생명의 은인을 만난 듯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횡설수설했다.
“아, 진짜,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제가 연락을 드리고 싶었는데 한유일 저 자식이 절대 하지 말라고 해서 진짜.”
전후 사정을 하나도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두서없는 말이었다. 강한은 그저 손이 붙잡힌 채로 묵묵히 기다렸다. 영송이 조금 진정된 후에야 설명을 들을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 보아도 영송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어디 털어놓을 데가 생기니 더욱 흥분한 듯이, 그는 발갛게 익은 얼굴 그대로 발을 동동 굴렀다.
“제가 생각해도, 하 씨, 강한 씨는 일반인인데. 이렇게 휘말리면 안 되는데요……. 그래도 저거 미친 짓은 말려야 하지 않겠나 싶어 가지고, 아우, 아니, 내일 그 새끼들을 만나기로 했거든요. 그리고 저거 저렇게 눈 돌아간 건 처음 봐 가지고요.”
한참을 조용히 듣고만 있던 강한은 붙잡힌 채 흔들거리던 손을 빼내 영송을 도닥였다.
“매니저님. 어디 가 계실 데 있으십니까?”
두터운 어깨를 토닥토닥 자상하게 두드리던 손길과는 다르게 단호한 목소리가 물었다. 그에 훌쩍이던 영송이 눈을 크게 떴다. ‘예에?’ 되묻는 표정에 대고 강한은 회색 건물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언제까지 붙잡아 두면 해결이 될 것 같으세요?”
나지막한 물음에 매니저 영송은 당장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을 벌벌 떨며 ‘아니, 그게, 그러니까…….’ 하고 망설이던 그가 작게 답했다.
“지금 제일 문제인 건, 강한 씨 신상이고…. 솔직히요, 아니라고 잡아떼면 그만인 일이거든요. 그렇게 큰일도 아닌데 문제는 유일이 저게 자꾸……. 아니. 그렇다고 신상 퍼진 게 아무 일도 아니란 건 절대 아닙니다. 예.”
강한의 눈치를 힐긋힐긋 보면서도 영송은 솔직하게 답했다. 그의 기나긴 대답은 여전히 정리가 하나도 되지 않은 채였지만, 한은 대충 요약할 수 있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인 그가 짧게 묵례했다.
“저는 상관없어요. 편한 대로 처리해 주세요.”
이상하게도 모든 것은 상상보다 쉬웠다. 강한은 스스로의 답변에 비식 웃으며 회색 건물로 향했다. 그의 널따란 등 뒤에 한참을 서 있던 영송이 부리나케 앞서 달린다. 직접 번호 키를 눌러 문을 열어 준 영송은 작게 속삭였다.
“그럼 일단 이틀만이라도 좀 부탁드려요…….”
자그마한 속삭임 뒤로 현관문이 쿵 닫혔다.
그동안 두 사람 관계에서 닫힌 문을 두드리고 끊임없이 침입하는 일은 유일이 도맡았다. 강한은 언제나 밀어내고 회피하며 모르는 척하는 입장에 있었다. 특히 지난 11년은 아주 일방적이었다. 그는 유일의 미래를 위한다는 합리화로 모든 문을 꽁꽁 닫아 둔 채 살았다.
그러나 정작 기사를 읽었을 때 강한은 묘한 전율을 느꼈다. 한유일의 이름 옆에 고작 ‘일반인 남자 친구’로 납작하게 눌러진 제 처지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승리감과 해방감을 느꼈다. 한유일과 주해익 감독의 스캔들을 보았을 때부터 마음 깊숙이 남아 있던 응어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덕분에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강한은 주저도 없이 낯선 집의 복도를 가로질러 성큼 들어섰다.
한유일은 삭막할 만큼 넓은 거실 한복판에 앉아 있었다. 잘 손질되었던 머리가 헤집어진 듯 흐트러졌으며, 늘 단정하던 셔츠는 구깃구깃했다. 그중에서도 평소와 가장 다른 것은 눈빛이었다. 공허하고 텅 빈 눈빛은 새로운 침입자를 확인하지조차 않았다. 그저 멍한 눈길 그대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죽어도 안 된대요?”
느슨한 투로 물은 한유일이 손목시계를 풀어냈다. 그는 풀어낸 시계를 보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유리 테이블에 빗맞은 시계가 카펫 바닥에 나뒹군다.
그는 마치 함부로 살기로 작정한 탕아 같았다. 버림받은 도련님 같기도 했고 신념을 잃어버린 방랑객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저 화보를 촬영 중인 배우처럼만 보였다. 그의 말간 얼굴은 유리 테이블에 널린 양주 더미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형, 정말 오늘은 안 된대요?”
적막을 한참 내버려 두던 유일이 느리게 목을 가누었다. 아무렇게나 젖혀져 있던 흰 목선이 제자리를 찾는다. 잿빛으로 탁하게 느껴지는 눈동자가 마침내 강한을 담았다.
확실히 영송의 말대로 이런 한유일은 강한에게도 처음이었다. 유일은 당장 절벽에 떨어질 사람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그 감각이 강한을 조급하고 슬프게 했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침착한 얼굴 그대로 유일의 맞은편에 앉았다.
“뭐가 오늘은 안 되는데.”
담담한 물음에 힘없이 느슨하던 눈동자가 잔뜩 커졌다. 여전히 텅 비어 있는 위험한 빛깔이기는 했지만, 그는 단박에 강한을 알아보았다.
“한아, 여기…….”
유일은 꿈결처럼 중얼거리다 일순 일어섰다. 무척 다급하고 조심성 없는 몸짓이었다. 술에 취해 가누어지지 않는 몸이 마구 휘청거렸다. 불안해진 강한이 벌떡 일어서는 순간, 기어코 유일이 유리 테이블을 쳤다. 거센 힘에 양주병이 넘어가며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울렸다. 테이블 위에서 부딪히고 깨진 잔의 파편과 독한 술이 마구 섞여 흘러내렸다.
“한유일!”
“오늘은 진짜, 만나면 안 되는데, 또…….”
순식간에 벌어진 난장판이었다. 강한은 얼른 팔을 뻗어 유일을 부축했으나, 그는 자꾸만 품을 벗어나려 했다.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발밑으로 유리 조각이 서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유일은 깨진 술과 파편을 딛고서도 신음 한번 흘리지 않았다.
“아, 씨발, 가만히 좀 있어.”
강한은 제 발을 베인 것처럼 숨이 훅 달아올랐다. 이를 악문 채, 유일을 꽉 안아 들어 올렸다. 체격이 비슷한 터라 아주 조금밖에는 들지 못했지만 파편을 피해 소파 위로 다시 앉힐 만큼은 되었다. 강한은 그를 소파 위로 내팽개치며 으름장을 놓았다.
“너 움직이기만 해. 가만히 있어.”
씨근덕거리는 낯을 보고서야 유일은 잠잠해졌다. 꿈결처럼 중얼거리던 말도 드디어 멎었다. 그는 다시금 텅 빈 눈빛으로, 바닥에 꿇어앉아 카펫을 둘둘 마는 강한을 지켜보았다. 한참 바쁘게 움직이던 강한은 마침내 구석에 카펫을 처박아 둔 채 돌아왔다. 다시 끈적한 바닥에 꿇어앉은 그가 유일의 양말을 벗겼다. 정장 바지와 맞춰 입은 검은 양말이 피에 젖어 축축했다.
“술주정 한번 좆같다, 진짜.”
매서운 눈을 치켜뜨며 그가 유일을 나무랐다. 그러면서도 양말을 벗기고 상처를 살피는 손은 무척 조심스러웠다.
다행스럽게도 아주 깊게 박힌 파편은 없었다. 강한은 마치 제 살이 베인 것처럼 인상을 찌푸린 채 조각들을 빼내고 닦아 주었다.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을 서너 번이나 갈아 가며 수발을 들었을 때에야 피가 멎었다.
“한아.”
“뭐. 야, 업혀.”
그제야 한유일 역시 반쯤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이전보다 명확한 목소리가 무척 반가웠으나, 강한은 괜히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등을 보이고 앉았다.
“아, 빨리 업히라고.”
재촉에 한유일은 천천히 몸을 붙였다. 업힌다기보다는 뒤에서 껴안아 오는 자세였다. 널따란 어깨 위에 볼을 붙이고 다정하게 비비적거리며, 유일은 중얼거렸다.
“나 다시 안 볼 줄 알았는데.”
아주 오래전 병문안을 갔던 날처럼.
강한은 순간 열이 솟구쳤지만 꾹 눌러 참으며 그를 덥석 업어들었다. 목에 성의 없이 감긴 팔을 휙 잡아당기고 단단한 허벅지와 엉덩이를 받쳤다. 순간 억 소리가 날 만큼 무거웠다. 하지만 자존심 탓에 어금니를 꾹 문 채로 움직여야 했다.
“너는 시발, 11년이나 포기 안 했으면서.”
이를 부득부득 갈며, 강한은 침실로 보이는 방에 도달했다. 다행스럽게도 열린 문틈으로 하얗고 커다란 침대가 보였다.
“왜 이제 와서 도망이야?”
이번에도 유일은 침대 위로 내팽개치듯 눕혀졌다. 온 힘을 다해 업어 치기 한 덕분에 강한은 가득 차오른 숨을 헉헉 골라 쉬었다.
“안 어울리게 왜, 하아, 왜 그러냐고. 이딴 일 생길 거 몰랐어?”
인상을 잔뜩 찌푸린 한은 답답한 모자를 벗어 던졌다. 땀이 배어 나온 머리칼을 휙 쓸어 넘긴 그가 유일의 위로 올라탔다. 느슨하게 취한 그를 보았을 때부터 은근하게 자극되었던 음심이 호승심에 섞여 타오르기 시작했다.
한유일은 그저 무방비하게 강한을 올려다보았다. 제 얼굴만큼이나 하얀 침대에 잔뜩 흐트러진 채 반항조차 하지 않았다.
“몰랐냐고, 이 새끼야.”
그 초연한 태도가 불을 지폈다. 강한은 유일의 입술을 씹어 먹을 것처럼 물고 질겅거렸다. 이마를 맞댄 채, 화기 가득한 눈을 숨기지 않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유일은 순종적으로 입을 벌려 주었다. 더 하라는 듯 턱을 들어 주며 팔을 뻗었다. 아예 상을 깔아 주는 태도에 의지가 꺾인 강한은 천천히 상체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이내 거센 힘이 등을 짓눌렀다. 조금 전까지는 다정하게 어깨를 쓸어 내던 유일의 손이 강압적일 만큼 세게 한을 끌어안았다. 서로의 가슴이 맞닿아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몰랐어.”
한유일은 아주 작게 속삭이며 입술을 옮겼다. 목선에서부터 쇄골, 어깨까지. 텁텁할 게 분명한 옷 위로 부드럽고 자잘한 입맞춤이 남았다.
“이런 일이 생겨도 나한테만 문제가 될 줄 알았어.”
다시는 만지지 못할 물건을 대하듯 그는 아주 조심스러웠다. 강한은 그 간지러운 감각에 흠칫거리며 멀어지려 했지만 유일은 한사코 놓아주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떨어지려고 하면 도리어 꽉 당겨 안는 바람에 결국 강한은 온몸에 힘을 뺐다.
“그래서 커밍아웃 해도 놀라지 않을 만한 필모 쌓았고, 계약에도 문제없게 만들었고……. 너무 유명해지지 않으려고도 노력했는데.”
“와, 한유일 건방지네.”
작게 울리는 목소리가 조금씩 젖어 드는 것 같아 일부러 농담을 건네자, 유일은 다행스럽게도 따라 웃었다. 마른 웃음을 하하 터트린 그가 한의 어깨에 눈을 비비적거렸다.
“응, 건방졌어. 더 유명해졌어야 하는데.”
“왜, 전 국민한테 공개하고 싶냐?”
조금 가벼워진 분위기에 강한은 한시름 놓았다. 장난스럽게 이야기하며 몸을 조금 떼어 내자, 유일의 웃음이 멎었다. 조용해진 그가 고개를 슬쩍 들어 시선을 맞춘다.
“……아니, 더 유명했다면 덮기도 쉬웠을 테니까.”
의문 가득한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강한은 깨달았다. 한유일에게는 자신이 이 스캔들을 인정하고 나아가리라는 예상이 단 한 톨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아주 당연하게, 강한의 포기와 도망을 예상하고 있었다.
-한아, 나는 그냥 너만 있으면 되는데…. 너도 그러면 안 돼?
그렇게 부탁하던 말도 사실은 이루어지지 않을 소망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강한은 짧은 조소를 터트렸다. 반쯤은 자기 자신을 향한 자책이었고 나머지 반은 객기였다. 미안한 마음과 조금의 화가 뒤섞인 아주 모순적인 눈으로, 그는 한유일을 내려다보았다.
“너 허튼짓 말고 가만히 있어.”
차갑게 경고한 그가 재차 유일의 입술을 물었다. 아랫입술을 형벌처럼 잘근거리며 아주 살벌한 고백을 내어 놓았다.
“너 나만 있으면 된다며. 나도 그런 것 같으니까, 괜한 일 좀 벌이지 말라고.”
자그마치 11년의 세월이 소요된 아주 늦은 고백은 금세 서로의 입 안으로 녹아들었다.
***
“하, 아… 윽…….”
강한의 커다란 손이 하얀 복근 위를 정처 없이 맴돌았다. 마음 같아서는 살결을 콱 쥐고 긁으며 제 뒤가 벌어지는 감각을 모조리 표현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한유일의 고운 살결이 남아나지 않을 터였다.
“한아, 그냥 내가, 읏….”
“가만히, 아읏, 가만히 있으라고…….”
유일이 몸을 일으키려 하는 반동으로 삽입은 더욱 깊어졌다. 강한은 헛숨을 들이켜며 얼른 단단한 뱃가죽을 내리눌렀다. 다시금 매트 위에 풀썩 누운 한유일은 애가 타는 표정이었다. 여전히 무방비하게 머리칼이 흐트러진 채, 그는 갈급한 손길로 강한을 쓰다듬었다. 흉포하게 솟아오른 박근과 허리, 옆구리에서부터 가슴까지를 가리지 않고 만져 대는 손길이 몹시 애틋하다.
다친 발과 술을 이유로 들며 감행한 체위는 사실 일종의 복수였다. 저도 한다면 하는 놈이라고 외치기 위한 치기였고, 가만히 있지 않으면 혼내 주겠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그러나 호기와는 다르게 직접 성기를 삼키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젤도 없이 대충 바른 로션의 힘으로는 무리였다. 얼굴만큼이나 예쁘게 곧은 성기를 반만 삼킨 채, 강한은 밭은 숨만 내쉬며 고전하고 있었다.
“너, 하아, 막 박기만 해. 죽는다…….”
혹여 허리라도 쳐올릴까 두려운 마음에 식은땀이 흘렀다. 강한은 거친 숨을 훅훅 내쉬며 아주 미세하게 허리를 내렸다. 성기는 빠듯한 구멍을 천천히 밀고 들어왔다.
“응, 안 그럴게.”
유일은 순하게 답했다. 성기를 옥죄는 감각이 그에게도 참기 어려운 고문일 텐데 제법 침착한 투였다.
“그럼 여기는 괜찮아?”
그러나 반쯤 풀 죽어 있던 아래를 덥석 쥐는 손길은 대담했다. 답도 듣지 않은 채, 기다란 손가락이 성기 기둥을 훑었다. 강한은 얻어맞은 사람처럼 헉하고 움츠러들었다. 내벽이 절로 좁아지며 허벅지에 힘이 풀렸다.
“아, 윽….”
틈을 비집고 들어선 좆이 너무도 뜨거웠다. 강한은 얼른 손을 뒤로 뻗어 엉덩이 사이를 더듬었다. 녹은 로션으로 젖은 유일의 성기는 아직도 두 마디쯤 남아 있었다.
“아, 시발, 진짜…….”
아득히 쏟아 낸 욕설에 유일이 속도를 높였다. 성기를 만지작거리던 손길에 의도가 실리며, 척척한 소음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흣, 으…, 잠깐, 하, 아읏, 잠깐만.”
삽입하기 전 이미 한 차례 사정한 성기는 쉽게 달아올랐다. 기다란 손가락이 선단을 비벼 점액질을 옮겨 가는 과정만으로도 찌릿한 성감이 오를 만큼.
미끌미끌해진 손바닥 안에 기둥이 야한 소리를 내며 마찰했다. 강한의 상체가 자꾸 굽어 들며 발끝이 들썩인다. 위험했다. 이대로 사정한다면 애매하게 유지하고 있던 자세가 무너질 것 같아 덜컥 겁이 났다.
“아, 할, 것… 학, 그만해, 좀…….”
힘을 다 뺀 손바닥으로 가슴을 쳐 댔지만 유일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농밀해진 손길로 질척이는 소리가 날 만큼 좆을 애무했다. 음낭까지 훑어 올리며 선단을 문지르고, 기둥을 세게 탁탁 쳐 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절정감이 강한에게로 몰아닥쳤다.
“아, 윽!”
기어코 사정을 하는 동시에 골반이 내려앉았다. 머릿속을 하얗게 탈색시키는 절정감에 빠진 채, 강한은 유일의 성기를 끝까지 삼키고 말았다.
“헉, 으읏…….”
몽롱한 탈력감에 젖어 있어야 할 감각에 날이 섰다. 강한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유일의 상체를 꾹 눌렀으나 이미 한계까지 들어선 성기가 빠져나가지는 않았다.
“으음, 한아, 아파.”
한유일은 느른한 신음을 쏟았다. 그 뻔뻔한 태도에 강한의 눈이 음산하게 들렸다.
“너 진짜 오늘 혼날 줄 알아.”
낮게 경고한 그는 천천히 엉덩이를 들었다. 아직 절정의 여파가 다 빠져나가지 않은 몸이 아우성을 내질렀으나 모르는 척 위아래로 찧어 보았다. 단숨에 이상한 신음이 목구멍을 타고 올랐다.
“음, 읏….”
강한은 입술을 깨물어 참으면서 얕은 움직임을 이어 갔다. 처음에는 그저 골반을 아래위로 흔드는 수준이었으나 내벽이 적응해 가는 느낌이 들면서부터 과감해졌다. 품었던 좆을 반쯤 뽑아냈다가 삼키기를 반복했다. 한유일이 박아 댈 때처럼 안이 번쩍거리는 쾌락은 없었지만, 다른 이점이 있었다. 강한은 육욕을 감추지 못하는 유일의 눈을 바라보며 움직였다. 이따금 눈살을 찌푸리고 뜨거운 숨을 내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의 낯 자체가 쾌감이 되었다. 이대로 사정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아, 움직이면 안 돼?”
하지만 유일의 갈급한 물음이 자존심을 건드렸다. 눈썹을 꿈틀거리며 강한은 천천히 성기를 뱉어 냈다.
“어. 가만히 있어, 제대로 해 줄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아직은 마주 본 채 난잡하게 움직일 자신은 없었다. 차라리 얼굴이라도 피해 보자는 심산으로 그는 뒤돌아 앉았다. 한번 끝까지 삼켰던 성기가 이전보다는 쉽게 들어서 주었다.
후우, 길게 숨을 내쉰 강한은 상체를 조금 숙였다. 유일의 양 무릎 사이의 매트를 짚으며 다시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쩐지 아까보다 빠른 속도로 열기가 차오르는 듯했다.
“후, 읏…….”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용기가 생겼다. 강한은 전보다 더 깊게 좆을 삼키고 뱉어 냈다. 뜨겁게 달아오른 성기가 내벽을 훑어 대는 감각이 너무 좋았다. 그러나 동시에 무언가가 부족했다. 이보다 더 자극적이고 안을 다 녹게끔 만드는 쾌락을 강한은 이미 경험한 바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본능을 따라 움직였다. 허리가 묵직하고 느리게 돌아가며 어딘가를 찾기 시작했다.
“한아, 잠시만.”
그 광경을 감상하던 유일이 속삭였다. 되물을 새 없이 그가 골반을 꾹 당겨 안을 찔러 올렸다. 왼쪽을 겨냥해 눌린 성기가 안을 둥글게 휘젓는 순간, 강한의 신음이 높게 튀었다.
“아!”
눈앞이 번쩍이는 감각에 깜짝 놀란 그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그러자 유일은 무고한 표정으로 두 손을 허공에 들어 보인다.
“빠질 것 같아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배 속이 다 짓눌린 것만 같은데 어디가 빠졌다는 말인가. 강한은 경고의 눈빛을 쏘아붙인 뒤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후우, 비장한 숨이 쏟아졌다. 절로 차오른 기대감에 발바닥이 간질거렸고, 내벽은 움찔거리며 성기를 빨았다. 이제는 제 몸조차 ‘제대로 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마침내 강한은 전보다 훨씬 과감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일이 몸소 찔러 올려 주었던 곳을 겨냥해 내려앉을 때마다 전율이 일었다. 저절로 속도가 빨라졌다. 이제는 두꺼운 성기가 내벽을 가르는 행위 자체가 좋을 지경이었다.
“흣, 으음, 읏!”
고개를 푹 숙인 채, 강한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목 안쪽으로 아무렇게나 들끓은 신음 소리는 여전히 창피한 감이 있었다.
“소리, 읏, 듣고 싶어, 한아…….”
그러나 오늘 역시 유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골반과 엉덩이 근처를 끊임없이 지분거리며 그가 달콤한 유혹을 쏟았다. 음욕에 익은 유일의 음성은 도저히 거절하기 어려운 색을 지녔다.
“아읏, 흐, 아! 아아!”
결국 강한은 하얗게 질렸던 입술을 뱉어 냈다. 차올랐던 신음이 와르르 터져 나가고, 아주 모순적이게도 그 순간 더 큰 희열이 몰려왔다. 스스로 창피해 억눌렀던 신음성이 도리어 촉진제 역할을 했다.
한층 더 조급해진 그는 육욕에 취해 움직였다. 요령도 없이 마구 허리를 흔들다가, 흐느끼며 앞으로 기어 나갔다. 한순간에 바싹 달아오른 몸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하아, 하…….”
밭은 숨을 고르며 강한은 침대 끄트머리에 이마를 얹었다. 과도한 흥분을 식힐 틈이 필요했다.
“힘들어?”
아주 나긋하게 물은 유일이 금세 몸을 붙였다. 땀이 배어 나와 미끄러운 살결이 닿고, 그만한 자극으로도 강한의 몸에는 소름이 돋았다. 목을 움츠린 그는 뒤로 손을 뻗었다.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말릴 틈도 없이 성기가 닿았다. 방금까지 커다란 것을 물고 있던 탓에 벌름대는 구멍 위였다.
“허윽, 아! 아읏!”
“이번엔 정말 빠져서.”
단번에 끝까지 차오른 좆이 명치를 찌르는 기분이었다. 강한은 딱딱한 침대의 나무틀을 쥐고 앓았다. 매서운 말로 훈계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한이 힘들면 내가 도와줄게.”
유일은 빈틈을 잘 파고드는 사람이었다. 이번 역시, 그는 분노 대신 쏟아져 나오는 숨소리의 뜻을 잘 알았다.
“응?”
등 위로 자잘한 입맞춤을 남기며 유일이 채근했다. 강한은 아주 잠시 갈등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맛본 강렬한 감각이 아쉬워 어쩔 수 없었다.
허락이 떨어지자 유일은 어깨 위를 장난스럽게 한 번 물고는 상체를 일으켰다. 강한은 긴장한 채, 멀어지는 그의 체온과 골반을 바투 잡아 오는 손길을 느꼈다. 다가올 쾌락에 대한 기대감이 종아리를 굳게 했다.
하지만 한유일은 바로 내벽을 쑤셔 대지 않았다. 먼저 기대에 굳은 몸을 매만지고 주무르며 긴장을 풀어 주었다. 딱딱하게 굳은 허벅지에서부터 예민한 성기, 옆구리와 가슴팍까지. 부지런하게 움직이던 손은 가슴에 도드라진 유두를 조금 오래 매만졌다. 한의 몸이 꿈틀거리며 피하려 해도 끈질기게 따라붙어 손톱을 세우고 둥글게 굴려 댔다. 결국 달큼한 신음이 새어 나온 순간에야, 성기가 쑥 빠져나갔다. 헉 소리가 날 만큼 멀어졌던 열기는 내벽이 다물릴 틈도 주지 않고 재차 밀려들었다. 무지막지한 삽입이었다.
“아! 아윽, 잠…, 아, 읏, 살살, 조금만… 아!”
온몸이 울릴 만큼 벅차게 박아 대는 힘에 강한은 쉬이 함락되었다. 근력으로 버텨 보자면 못 할 것도 없었지만, 내장을 다 녹일 것처럼 몰아치는 쾌락에는 손도 쓰지 못했다.
한유일은 풀썩 엎어진 그의 어깨를 내리누르며 움직였다. 이미 배 안을 가득 채우고 있으면서도 더 깊이 들어가고 싶은 듯이 효후했다.
“하아, 읏…, 미안, 한아….”
거친 신음을 내뱉고 사나운 짐승처럼 함부로 움직이는 동안에도 유일은 자상했다. 그래서 강한은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그저 애꿎은 침대 틀을 부여잡고 발을 뻗어 댔다.
“아, 으읏, 미안하면 좀, 천천히 좀….”
“오늘은……. 적당히 못 할 것 같아.”
“시, 발, 언제는 적당…히, 흐읏!”
나지막이 경고한 유일은 아예 엉덩잇살을 양쪽으로 벌려 냈다. 탄력 있는 살덩이를 꽉 잡아 벌린 그가 노골적으로 내벽을 쑤셔 대기 시작했다. 강한은 몰려드는 사정감에 파르르 떨었다. 아래를 쥐어흔들고 싶었으나, 매트리스에 바짝 눌린 몸 때문에 틈이 없었다. 초조해진 그가 바르작거리자 유일은 오히려 더 달라붙어 허리를 흔들어 댔다. 처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아! 학, 으흣!”
사정은 한순간에 찾아왔다. 다리가 저절로 접히고, 소리가 잠시 멀어지는 것만 같은 아득한 절정이었다.
“응, 좋아…….”
한유일은 바싹 굳어 떨고 있는 등 근육 위로 입술을 내렸다. 마치 자신이 사정한 듯 나른하게 젖은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강한은 사정 후의 탈력감에 늘어진 채로 그 달콤한 후희를 즐겼다. 하지만 휴식은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곧바로 안을 푹 짓누르는 좆이 여전히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골반을 강하게 잡아채는 힘을 따라 강한의 하체가 딸려 올라갔다. 한은 나무틀을 꽉 쥐며 외쳤다.
“아! 잠…깐, 한유일, 유일아, 유일아.”
“응, 한아, 너무 좋아….”
다급한 만류에 대고 동문서답을 내놓는 유일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강한의 골반을 세게 틀어쥔 그가 내벽을 쳐올렸다.
“흐윽! 아흣, 으, 으으응…….”
“하아, 하….”
기어코 목소리가 뒤집히고 말았다. 강한은 얼른 시트를 말아 물고, 자꾸만 몸을 끌어 올렸다. 잡고 있던 틀을 당기며 그 힘으로 도망을 쳤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유일은 더 세게 골반을 잡아당겼다. 질척한 살결끼리 맞닿는 야한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울렸다.
“안에…, 해, 빨리 그냥…… 하라고.”
절정을 맞이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생경한 감각이 몰려들고 있었다. 덜컥 겁이 난 강한은 목에 잔뜩 힘을 주며 유일을 재촉했다. 조금만 긴장을 놓으면 이상한 소리를 쏟아 낼 것만 같았다. 한유일은 안간힘을 쓰며 버티는 강한의 목덜미를 핥고 빨며 움직였다.
“한아, 정말……. 나만 있으면 돼?”
절정의 코앞. 그는 확연히 거칠어진 목소리로 확답을 요구했다. 그 아이 같은 물음이 오늘 이 흥분의 원인을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덕분에 조금쯤 너그럽게 관용이 생겼다.
“어, 너만 있으면, 아읏! 윽! 미친, 놈아, 대답할 시간을… 아, 아!”
하지만 관용 가득한 대답은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한유일은 어린 짐승처럼 참을성이 부족했고, 생전 처음 겪는 절정감에 놀란 강한은 여유가 없었다. 거칠어진 움직임에 다시금 시트를 물어 낸 한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잔뜩 예민해진 점막을 성기가 그저 스치고 지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할 만큼 좋았다. 배 속이 멋대로 수축했고, 그에 달아오른 좆도 화답했다. 민감하게 부풀은 내벽을 힘 있게 눌러 대던 유일이 마침내 사정했다. 더 이상 달아오를 수 없다고 생각한 안쪽에 더 높은 열기가 차올랐다.
“응, 나도, 한이만 있으면 돼, 한이만 있으면 돼…….”
사정을 하는 동안에도 그는 계속해서 안을 문질러 댔다. 강한은 지나친 쾌락을 견디다 못해 발장구를 치며 몸을 뒤틀었다. 안쪽이 너무도 이상했다. 아주 작은 자극에도 절정이 끊이지 않는 듯한 감각이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아주 추운 사람처럼 온몸이 경련했다.
“한아, 괜찮아?”
그 심상치 않은 기색을 뒤늦게 알아챈 유일은 몸을 낮추었다. 곧이어 납작 엎드린 강한의 배를 쓰다듬었다.
“으긋, 괜, 찮으니까, 빼…. 흣…….”
울음소리에 가까운 답에 한유일은 멈칫했다. 조금 전까지 뜨겁기만 하던 침대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분명 지나친 걱정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강한은 얼른 오해를 풀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좋아서, 계속 싸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 괴물 같은 목소리가 나갈 것 같아서 이런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한아, 오늘은…. 적당히 못 할 것 같다고 했잖아.”
아무리 고민해도 혼몽한 정신은 적당한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 침묵을 깨트린 것은 결국 한유일이었다. 그의 나른한 음성이 아주 느리게 한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으읍!”
연속되던 얕은 절정의 파도에 열기가 난입했다. 한유일이 극도로 예민해진 내벽을 마구 짓찧어 자극했다. 강한은 여전히 시트를 말아 물은 채로 목을 놓아 울었다. 목덜미가 아플 만큼 크게 끓는 신음이 걱정했던 대로 괴물 소리 같았다. 그럼에도 다잡아 정제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강한은 그저 고문처럼 몰아치는 절정을 견디며 매달리고 신음했다. 마침내 쥐고 있던 침대의 나무틀이 부러질 만큼이나 처절하고 격정적인 섹스였다.
***
이른 아침. 강한은 영송의 전화를 받기 위해 도둑고양이처럼 방을 빠져나왔다. 채광이 좋은 건물은 조명 없이도 거실을 환히 밝히고 있었지만, 깨진 양주병 탓에 한밤중 주점 같은 냄새가 났다. 강한은 인상을 쓰며 소파에 앉았다.
[유일이랑 어떤 결론을 내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은요. 그. 회사 입장은 아무래도……. 잡아떼는 게 최선이다 싶었거든요. 아, 근데 아침은 드셨어요?]
대뜸 본론부터 꺼낸 것이 민망했는지 영송은 뒤늦게 단출한 인사말을 갖다 붙였다. 그의 목소리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기색이었다. 거칠거칠한 음성에 강한은 조금쯤 연민을 느끼며 답했다.
“아뇨, 아직… 근데 어제 못 주무셨….”
그런데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쉬어 버린 음성이 목구멍에 턱 걸려 버린다.
[예? 아이고, 목소리가 맛이 가셨네요. 에어컨 켜 놓고 주무셨는가 봐요?]
“네……. 뭐.”
강한은 무척이나 머쓱해져 제 목덜미를 쓸어 올렸다. 괜히 매니저에게 지난밤을 다 들킨 것만 같았다.
“아무튼, 부인 기사를 내겠다는 말씀이시죠?”
[아. 처음에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는데……. 대표님은 애초에 도장 찍을 때부터 말한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 유일이 성격에 꽁꽁 숨기고 살겠느냐 하세요.]
“네.”
[그것도 맞는 말이고. 아니라고 잡아뗐다가 나중에 진짜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나오면 역풍 맞을 테고…….]
“예에…….”
강한은 말끝을 길게 늘이며 맨무릎을 만지작거렸다. 어쩐지 면목이 없었다. 모든 문제가 저 하나만 사라지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11년 전처럼 고개 숙이지 않았다. 그때처럼 도망을 선택하고 또다시 한유일을 홀로 남겨 둘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려고요?”
긴장감 가득한 물음에 상대편에서는 뜻밖에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어허헛, 영송이 조금 어색하고 민망한 기색으로 웃었다.
[못 미더우시겠지만……. 그냥 가만히 있으려고 합니다. 일단은 말이지요, 그것도 일종의 전략이거든요. 이 바닥에서는.]
그 수더분한 웃음이 강한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한은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뱉으며 또 한 번 말끝 늘인 대답을 건넸다. 예에, 답하는 순간 저벅이는 걸음 소리가 났다.
“어, 일단 알았어. 끊을게.”
강한은 죄지은 사람처럼 서둘러 통화를 종료했다. 그사이 다가온 한유일은 천천히 자리 잡았다. 아주 뻔뻔하게 빈틈을 파고들어 무릎을 베고 누운 그는 강한과 똑같이 대충 속옷만 주워 입은 채였다. 부끄러움도 없이 울긋불긋한 몸을 다 내놓고 눈 감은 얼굴이 평온하기만 했다.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도 자국이 남냐.’
심각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은 모른 채, 유일은 금세 고른 숨을 뱉어 냈다. 동화 속 인물처럼 고요하게 잠든 얼굴이 한의 시선을 붙잡아 두었다. 이 순간의 한유일은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란과는 전혀 무관한 얼굴이었다. 그저 평화롭고 편안했다. 11년 전, 강한이 도망을 결정할 때 상상했던 낯과는 몹시 다른 빛이었다.
그런데 강한 역시 이 상황이 싫지만은 않았다. 세상의 소음을 피해 단둘만 남은 이 집도, 평소와 다르게 위태롭게 흔들리던 한유일도, 그의 이름 옆에 붙는 각종 추측도. 심각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만족감이 들었다. 아주 오래 기다리던 순간을 마주한 것처럼. 모순적이고 오묘한 기쁨에 헛웃음이 새어 나온다.
“나 그때…….”
말간 얼굴을 가만 내려다보며 강한은 불현듯 중얼거렸다.
“널 생각해서 도망간 게 아니었구나.”
낮은 음성에 한유일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방금 일어난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맑은 눈동자가 한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한동안 그렇게 바라만 보다가 어떤 대답도 없이 웃었다. 아주 얕고 희미하게.
한유일은 이내 몸을 돌려 누웠다. 강한의 맨허리를 끌어안고 코끝을 단단한 뱃가죽 위에 비비적거리며 한동안 잠투정을 부렸다.
아주 늦은 깨달음을 고했는데도 한유일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 태도가 이미 모든 속내를 다 알고 있었다는 것 같아 강한은 한숨 쉬었다. 야속하고도 안타까워서 마음이 무척이나 쓰렸다.
“이 아침부터 누가 전화했어?”
유일은 고개를 숙여 살결 가까이에 속삭였다. 입술을 부러 닿게끔 만든 간지러운 속삭임에 강한은 흠칫 허벅지를 굳혔다.
“어……. 상수.”
덕분에 더듬거린 대답이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신상수랑 아침마다 통화해?”
“미쳤냐. …그, 뭐냐, 걔도 대충 알게 됐어.”
“뭐를?”
“우리, 그……. 이번에 기사 나기 전에 소문으로 들었다고 하더라. 먼저 연락 왔었어.”
“음….”
“여태 어떻게 자기만 모르게 했냐고 억울해하고 난리였어. 너한테 연락 없었냐?”
“있었어.”
간략히 대답한 유일은 다시금 몸을 돌려 누웠다. 강한을 올려다보며 무언가 생각하는 듯 조용하던 그가 비식 웃었다.
“신상수가 이제 알았다고 그래?”
“어.”
“상수도 참 큰일이다…….”
“왜.”
“전혀 눈치 못 챘다니까 웃겨서. 내가 이상한 짓 많이 했을 텐데.”
지난 과거를 회상해 보던 유일은 아예 소리 내어 웃었지만, 강한은 도리어 표정이 굳었다. 이상한 짓이라니. 순식간에 어둑해진 강한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너는 내가 밉지도 않았냐?”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술 틈을 벌리고 기어코 물음이 샜다. 그러자 한유일은 더 짙게 웃었다. 아무 유감도 없이 맑게, 정말이지 속도 없이 웃는 낯이었다. 그 반응은 곧장 강한의 피를 덥혔다. 방향 잃은 노기로 말은 저절로 거칠게 나갔다.
“혼자만 무섭다고 발 뺀 새끼가 뭐 좋다고.”
살벌한 어조에도 유일은 아직 웃는 낯이었다. 부드럽고 자상한 미소 그대로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웠어.”
말끔한 인정에 강한은 할 말이 뚝 떨어져 버렸다. 갈 길을 모르는 입술이 멍하게 벌어진다.
“많이 미웠어. 얼굴만 보여 줘도 조금은 나을 것 같았는데, 너무 잘 숨어서.”
“…….”
“보고 싶은 만큼 미웠어.”
아주 간단하게 털어놓은 유일이 손을 뻗었다. 힘없이 벌어진 강한의 입술 위로 하얀 손가락이 닿았다. 덧그리듯 천천히 쓰다듬던 그가 상체를 일으켰다. 불시에 미지근한 입술이 겹쳐졌다.
혀가 닿지 않는 담백한 입맞춤이었다. 그저 입술로만 베어 물고 짓누르며 짧게 키스한 유일은 그대로 목선을 타고 내려왔다. 건조한 뽀뽀 세례가 목선을 타고 어깨까지 이어졌다. 간지러워 움칫 굳었던 강한은 충동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저를 아주 많이 미워했다던 남자와 무척이나 닿고 싶었다.
습격 같은 키스 역시 건조했다. 강한은 다만 더 집요하고 거세게 힘을 주어 눌러 대며, 어떤 표식을 남기듯 굴었다. 입술과 볼, 귓가를 가리지 않고 도장 찍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아예 한유일을 당겨 눕히고 올라탔다. 즐겁게 웃는 유일의 낯을 붙잡아 두고, 강한은 수십 번씩 입술을 내리눌렀다.
“이제 안 그래.”
한참을 부드러운 살결 위에 머물던 입술이 달싹거렸다. 쇄골 근처, 얇고 투명한 피부 위였다.
“이제 안 그런다고…….”
강한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머리꼭지만 내보인 채 주어와 목적어도 없이 털어놓은 고백은 초라했다. 그러나 유일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소리 없이 목 안을 울려 웃은 그가 ‘응.’ 하고 짤막한 답을 내놓았다.
***
정원시에 위치한 임시 거처는 한유일을 그대로 빼닮아 있었다. 건물은 세련되고 깔끔한 선으로 이루어져 차가운 느낌을 주면서도, 자그마한 정원과 정겨운 나무 울타리가 온화하게 보였다. 내부는 유일처럼 무척 희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는데 가구와 소품에 사용된 원목 덕분에 아주 황량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차갑고도 아늑한 모순적 감상이 정말이지 한유일 그 자체였다.
그 집에서 강한은 일주일을 보냈다. 원래 지내던 집에는 은수와 현경이 들어가 살았다. 처음에는 무이를 돌봐 달라는 부탁 때문이었지만, 날이 갈수록 그녀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몇 시간 간격으로 보내오는 무이 사진과 날마다 달라지는 배달 음식 사진이 그를 증명해 주었다.
덕분에 강한에게는 이 집이 아지트가 되었다. 매니저가 찾아와 식량과 옷을 넣어 주고 함께 술을 기울인 날을 제외하고는, 오롯이 둘만의 세계였다.
세상 사람이 죄 없어진 그 공간 안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했다. 두 사람은 공기마저 멈춘 듯이 적막한 시간을 보내다가도 금세 불이 붙어 입술을 맞대고 몸을 섞었다. 타오른 불을 일부러 소강시키지 않아도 될 만큼 자유롭고, 복잡한 생각 없이 행복했다. 밤낮 할 것 없이 무척이나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마치 꿈결처럼, 자고 일어나면 사라져 버릴 신기루처럼.
하지만 꿈은 연약하고 한시적인 행복이다. 강한은 11년이나 자신을 기다려 온 한유일에게 고작 그런 해피엔딩을 만들어 주고 싶지는 않았다. 심연에 둥둥 떠오른 부유물을 더 이상 모르는 척할 수 없는 때였다.
“야, 상수 곧 도착한다니까 옷 입어.”
“응.”
“대답만 하지 말고.”
강한은 하얀 현관에 선 채 으름장을 놓았다. 신발을 정돈하느라 숙인 허리 탓에 치켜뜬 눈이 한층 매서웠다.
“응.”
그래도 유일은 온순하기만 했다. 날카로운 눈빛에도 오히려 더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강한은 바로 그 점이 한유일을 이길 수 없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딴 것도 그냥 뒀지…….’
속으로 한탄한 그는 신발장 위에 덩그러니 놓인 나무 조각을 흘겨보았다. 강한의 팔뚝보다 조금 더 작은 그 나무 덩어리는 원래 침대의 한 구성이었다. 사각 나무틀의 각 꼭짓점을 이어 주는 장식이자, 발이 바깥으로 비죽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해 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전직 태권도 선수의 힘을 이기지 못한 나무는 이제 우지끈 부러진 채 엉뚱한 역할을 소화하고 있었다.
“야, 이거 진짜 안 버릴 거냐?”
“버리긴…. 전시해 둘 거야.”
격렬한 정사의 흔적을 신발장 위에 과시해 둔 한유일은 그저 평온했다. 말간 눈을 깜빡이는 뻔뻔한 낯이 강한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할 말이 없다는 표정으로 한참 서 있던 강한은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아무튼 진짜 정상은 아니야.”
작게 중얼거리며 강한은 현관 잠금장치를 풀었다. 아침 일찍부터 찔릴 만한 짓을 했으므로, 환기가 필요한 때였다.
문틈으로는 어느새 성큼 다가온 가을바람이 끼쳐 들었다. 일순 장난기가 솟은 강한은 일부러 현관문을 아주 세게 열어젖혔다. 살결이 스산할 만큼 시원한 아침 바람이 현관으로 확 빨려 들어왔다.
그 바람을 등지고 선 강한이 유일을 바라보았다. 불어닥친 바람에 순식간에 머리가 온통 헤집어진 한유일은 멍한 표정이었다. 여전히 검은 드로어즈 한 장만 걸친 채, 부스스한 머리로 눈만 깜박거리는 그는 어떤 콘셉트의 화보를 촬영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귀여운 새끼.”
강한은 낮게 웃으며 문틀에 기대어 섰다. 순간 탁하던 유일의 눈동자에 빛이 돌았다.
“아까 모자랐어? 왜 도발을 하지…….”
“무슨 도발이야. 옷 입으라고, 야, 왜 오는데.”
“상수 얼마나 걸린대?”
“아, 다 왔다고 했다니까!”
한유일은 활짝 열린 문틈은 상관하지도 않고 현관으로 향했다. 성큼성큼 걸어 순식간에 강한의 앞에 도달한 그가 입술을 들이미는 바람에 환기는 도루묵이 되었다. 강한은 얼른 현관문을 잡아당기며 입맞춤에 응했다. 문이 다 닫히기도 전에 입술이 먼저 부딪히고, 물기 어린 소리가 미약하게 흘러나왔다.
“뭐야, 여기 아닌가? 문이 열려 있….”
진득한 키스를 방해한 것은 문 너머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였다. 화들짝 놀란 강한이 여태 붙잡고 있던 문고리를 거세게 당겼다. 미약한 틈이 쾅! 소리를 내며 사라진다.
“어엥……. 여기 맞, 맞는데, 형? 저기요! 뭐야, 지금. 오라고 해 놓고 문전 박대하는 거야?”
상수의 커다란 불평은 묵직한 현관문을 뚫고도 아주 명확히 들려왔다. 그럼에도 한유일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양 강한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예 턱을 부여잡고 다리까지 얽어 가며 깊이 입을 맞췄다. 강한은 나름에 필사적으로 밀어냈다. 틀어막힌 입술 새로 으읍, 항변도 해 보았고 힘을 절반도 안 주었지만 어깨도 떠밀어 보았다. 그래도 한유일은 굳건했다. 한 걸음도 밀리지 않은 채로 더 가까이, 더더욱 깊숙이 고개를 틀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정말 어찌할 도리 없이, 강한은 유일의 목 너머로 팔을 둘렀다. 현관문 바깥에 상수를 세워 둔 채였다.
결국 상수에게 온 부재중 전화가 세 통 쌓였을 때쯤 문이 열렸다. 강한은 아주 부자연스럽게 부은 입술을 손등으로 꾹 누르며 ‘어, 왔냐.’ 하고 인사했고, 한유일은 그제야 옷을 입고 나왔다. 몹시 유유자적하게 걸어 나온 그는 상수에게 별 미안한 기색도 없이 손을 흔들었다.
“……도대체 뭘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문을 늦게 열어 줘요? 난 잘못 온 줄 알았네.”
유일과 한을 번갈아 노려보며 상수가 투덜거렸다. 강한은 못 들은 척 주방으로 가 맥주를 꺼냈다. 아침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지만, 이 민망한 자리를 위해서는 제격이었다.
한유일은 대답 없이 그저 웃으며 음식을 옮겼다. 미리 시켜 놓은 음식들이 하나둘씩 주방 원목 테이블 위에 올랐다. 왜인지 부산하게 움직이는 두 사람 사이, 우두커니 선 상수는 아직도 불퉁한 표정이었다.
“아, 뭐 했는데요!”
기어코 짜증이 터진다. 발을 쿵쿵 굴려 테이블 코앞에 선 상수가 숨을 씩씩거렸다. 그러면서도 손은 직접 들고 온 쇼핑백 안에서 선물을 꺼내 놓았다. 크고 묵직한 샴페인 병이었다.
“뭐 이런 걸 사 왔어. 고맙다.”
강한은 얼른 샴페인을 받아 코르크 마개 뽑는 데에 열중했다. 그래야만 상수의 집요한 물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듯했다.
“와, 진짜 끝까지 말 안 해 주네……. 하긴, 알아서 말 안 해 줘도 눈치 못 채는 내가 바보지.”
“진짜 알고 싶어?”
“……한유일 표정 뭐냐?”
“왜, 친절하게 알려 주려는데.”
“와아, 진짜…….”
할 말을 잃은 상수가 허망한 눈으로 유일을 노려보았다. 눈동자에 담긴 서운함은 비단 지난 몇 분에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
“애들처럼 왜 이래. 앉아, 일단.”
길게 늘어진 뒤끝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탓에 강한은 일부러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뒤이어 탁, 샴페인 병이 테이블에 놓였다.
그 둔탁한 소리가 신호탄 역할을 했다. 조용해진 두 사람이 의자를 빼 앉고 강한 역시 유일의 옆에 자리 잡았다.
입을 떼기에 앞서 강한은 식탁 위 줄줄이 진열된 음식과 술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후우우,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아주 느리게 뱉어 내며 커다랗게 부풀었던 흉곽이 제자리를 찾을 쯤 시선이 상수를 향했다.
“상수야.”
“예에.”
짐짓 비장한 태도에 여태 비죽거리던 상수도 자세를 가다듬었다. 조금 전까지 아이처럼 다투던 얼굴 대신 진지한 낯만이 남았다. 덕분에 강한은 더 뜸을 들이지 않고 뱉어 냈다.
“대충 얘기한 적 있지만. …기사 내용은 사실이야.”
“……네에.”
“그런… 사이가 된 건 최근이고.”
근래 강한은 상수와 몇 번의 통화를 했지만, 결정적인 말들은 흐지부지 뭉그러트려 말하고는 했었다. 자신이 한유일을 좋아한다고는 말했지만 그 감정이 쌍방이라고는 확답하지 않았고, 기사가 전부 사실이라고도 터놓고 인정하지 않았다. 끝까지 한유일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은 셈이었다.
“좀 늦었지만 그래도 직접 얘기해 주고 싶어서 불렀어.”
그러나 이제는 더 미루고 도망칠 필요가 없었다. 강한은 손수 모든 출구를 닫아 버릴 생각이었다.
어젯밤, 그는 매니저 영송으로부터 메일 하나를 전달받았다. 간결한 문장 두 개로 시작된 메일은 사진 석 장으로 마무리되었다.
「너무 오래 시간을 끄셔서 저희도 더 기다릴 수 없겠네요. 3일 내로 답변 안 주시면 월요일 아침 메인에 이 사진들 나갈 겁니다.」
문장 밑 사진 속에는 한유일을 부축한 채 호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자신이 있었다. 얼굴은 희뿌연 연기처럼 가려져 있었으나, 지인이라면 금세 알아볼 만한 태가 드러났다. 강한은 그 사진을 한참 바라보았다.
한유일이 아프던 밤이었다. 그가 바람 앞에 초처럼 흔들거리던 그날, 강한은 아주 불안하고 초조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한유일이 멀어질까 봐, 이대로 사라져 버릴까 봐.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할 것이 가장 두려웠다. 그 선명한 감각을 상기하며 강한은 ‘그냥 두세요.’ 하고 답장 보냈다.
그런 뒤에 가장 먼저 한 일이 상수를 초대하는 것이었다.
“음, 그리고 무슨 말을 또 해야 하나…….”
사진이 보도되면 일주일 새 간신히 조용해진 세상이 또 뒤집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을 안은 채로도 강한은 아주 시원하게 웃으며 턱을 괴었다.
“더 궁금한 거 있냐?”
마음속의 부유물을 하나둘 지워 갈 때가 왔다.
그 물음에 툭 떨어진 정적은 아주 잠시였다. 허, 탁한 숨을 내뱉은 상수는 기다렸다는 듯 쏘아붙였다.
“아니, 그럼 11년 동안 연락 안 한 거 혹시 사랑싸움이었어요?”
그렇게 시작한 물음은 도통 끝날 줄을 몰랐다. 준비해 놓은 음식이 다 식고 부르틀 때까지 이어져, 결국은 안주를 새로 시켜야 했다.
상수의 질문이 모두 고갈된 후부터는 회포를 푸는 자리였다. 상수는 언제 눈을 부라리고 화냈냐는 듯이 가장 신나서 추억을 떠들어 댔다. 매점에서 가장 맛있었던 햄버거부터 범철의 만행이나 처음으로 셋이 함께 떡볶이를 먹었던 날 같은 이야기가 두서도 없이 흘러나왔다. 냉장고 가득했던 맥주를 모두 비우고 샴페인을 다 마실 때까지도 멈춤 없이.
어느덧 따뜻한 가을 햇살이 한가득 들어오는 오후였다. 배가 가득 찰 만큼 밀어 넣은 알코올이 몸을 늘어지게 했고, 모든 것을 털어놓은 후련함과 탈력감에 졸음이 몰려왔다. 강한은 소파에 길게 누운 채 눈을 가물가물 뜨고 있었다.
“아, 근데 솔직히 그때 나는 형님이 좀 무서웠는데…….”
몇 시간을 떠들어 댄 상수도 이제 지친 모양이었다. 맥없이 바닥에 철퍼덕 앉은 그가 중얼거렸다.
“한이가 왜?”
유일은 전혀 피곤한 기색도 없이 맑게 물었다. 소파 가까이 앉아, 반쯤 잠든 한의 머리칼을 정돈해 주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야, 그래, 맞아. 나는 그때 존나 무서웠는데 너는 걸핏하면 반말하고. 내가 얼마나 전전긍긍했는지 앎? 그 얘기 하나만큼은 범철이가 맞았어.”
반쯤 죽어 들었던 상수의 목소리가 다시 커졌다. 유일은 좁혀진 강한의 미간을 살살 문지르며 ‘쉬이.’ 하고 작게 달랬다.
“한이가 연하는 연애 상대로 안 보인다고 한 적 있어.”
“……뭐?”
“그래서 그랬어.”
“…연하처럼 안 보이려고 반말했다고? 그게 존나 어리다는 증거 같은데.”
“그럴지도. 조금 후회는 해. 요즘 보니까 형 소리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으으으으!”
상수가 진저리를 쳤다. 그러고는 몇 방울 남지도 않은 맥주를 탈탈 털어 넣었다. 쩝, 입맛을 다신 그는 널브러졌던 몸을 갈무리하며 강한을 힐긋거렸다. 고르게 오르내리는 가슴팍을 확인한 뒤에야 상수는 다시금 입술을 뗐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게. 소속사에서는 뭐라고 해?”
진지해진 목소리가 낮게 흘렀다. 공간이 침착하게 가라앉자, 잠든 강한의 얼굴 역시 편안해졌다. 유일은 잘생긴 눈썹 뼈를 살살 매만지며 답했다.
“한이 신상 관련 기사는 법적으로 조치하고,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논란은 방치하자는 주의야.”
“흠……. 뭐, 하긴….”
상수는 그 애틋한 손길을 못 본 척하며 한숨 쉬었다. 천장을 향해 후, 숨을 내뱉고 한탄처럼 중얼거린다.
“진심 피곤한 직업이다…. 유일아, 그냥 할머니 사업 물려받지 뭐 하러 배우를 했냐.”
유일은 답 없이 웃었다. 그가 한의 짙은 눈썹을 덧그리듯 쓰는 동안, 홀로 생각에 빠져 있던 상수가 벌떡 일어섰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진짜 그러면 되네. 돈도 많이 벌 텐데.”
“나 돈 많아.”
“재수……. 암튼 나라면 물려받았다.”
유일을 흘겨본 상수는 느닷없이 거실을 걸어 다녔다. 호기롭게 일어나기는 했으나 별달리 할 일이 없어 그런 듯했다. 어슬렁거리며 장식품을 구경하고, 주방까지 기웃거리던 그가 현관 앞에 섰다.
“근데 이건 뭐야?”
상수가 나무토막을 들어 올리는 순간, 유일은 저도 모르게 강한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세상모르고 잠든 한은 평온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사실 배우를 꼭 해야 할 이유는 없었어.”
한유일은 짓궂은 대답 대신 말머리를 돌렸다. 제법 흥미로운 주제 덕에 상수는 재빠르게 나무토막을 놓고 돌아왔다. 재차 바닥에 앉은 그가 눈을 빛냈다.
“없었는데?”
되묻는 열렬한 반응에 유일은 낮게 웃었다.
배우라는 꿈의 시작점에서 가졌던 동기는 이미 희미해졌다. 기실 자신을 버린 부모를 향한 복수심마저 빛바랜 지 오래였다. 물론 그 이유를 차치하더라도 유일은 배우라는 직업이 마음에 들었다. 적성에 잘 맞았으며 특히 타고난 외양 조건이 좋았다. 스스로 판단하기에도 배우를 하지 않으면 아까운 낯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항목은 저울 반대편에 강한이 놓이는 순간부터 지나치게 가벼워졌다. 직업 때문에 강한과의 거리를 좁히기 더더욱 어렵다고 느낄 때마다, 유일은 그 꿈을 버리고 싶었다.
“그만둘 생각도 했었어. 그러지는 못했지만.”
“왜?”
호기심으로 빛나던 상수의 눈은 어느덧 축 처져 있었다. 자기 일처럼 슬퍼진 눈동자를 바라보며 유일은 나지막이 웃었다.
“내가 배우 그만두면 한이가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처음으로 입 밖에 내보는 말이었다. 뱉고 보니 겸연쩍어, 유일은 괜히 일어나 빈 병을 정리했다. 반쯤은 상수에게 이만 가 보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아……, 진심, 나 눈물 고임.”
그러나 제 입으로 눈치가 없다 선언한 상수는 아예 자리를 깔고 앉아 코를 훌쩍거렸다. 어흑, 흐느끼는 소음은 쉬이 멎을 것 같지 않았다. 유일은 아주 지루하고 느른한 눈동자로 벽시계를 확인하며 한숨 쉬었다.
***
그 건조한 시선이 이번에는 강한을 바라보았다. 온화하던 눈동자가 날카롭게 벼려져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근래 강한은 유일의 표정을 누구보다 잘 읽을 수 있었다. 덕분에 꺼림칙한 낯 역시 곧바로 알아챘다. 하지만 그는 아무 기색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평이하게 말했다.
“금방 올 테니까 점심 챙겨 먹고.”
신발 뒤축을 갈무리한다는 핑계로 눈을 덜 맞춘 채 문이 열렸다. 확실히 강한은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고 있었다.
“같이 가. 짐 많을 텐데.”
“됐어. 올 때는 매니저 형 오신대.”
강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열었다. 반대편 손에 쥔 핸드폰을 무심히 내려다보면서였다. 유일은 그 시큰둥한 뒷모습을 지켜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짜증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형이라고 부르기로 했어?’
치졸한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정도였다. 하지만 가까스로 참아 낸 유일은 그저 현관 파티션에 기대어 섰다. 현관문은 이미 반 가까이 열려 있었다.
“갔다 올게.”
강한은 여전히 핸드폰만 내려다보는 채로 집을 나섰다. 무거운 문이 제법 큰 소리를 내며 닫힐 때까지도 한 번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쉬운 것 하나 없는 말끔한 태도였다.
유일은 길고 얕은 한숨을 내쉬며 여전히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노려보면 현관문이 다시 열리기라도 할 것처럼 무척 오래도록 집요하게.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문은 굳건하기만 했다. 마치 영영 열리지 않을 벽 같았다.
최근 강한은 잘 만지지도 않던 핸드폰을 손에 달고 살았다. 이름을 불러도 잘 듣지 못했고 둘만 있음에도 눈을 마주하기 어려웠다. 갑작스럽게 잦은 흡연을 핑계로 밖을 나갔으며, 화장실에 들어가 통화하는 일이 많아졌다. 심지어는 사흘 내내 몸을 맞대지도 않았다. 키스라도 하려고 치면 은근슬쩍 고개를 무르며 장난스러운 뽀뽀로 마무리하기 일쑤였다.
처음에는 온통 스캔들과 관련된 이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저 모르게 매니저와 내통을 하고 있다거나, 기자들에게 연락해 이상한 수를 쓰는 게 아닐까 추측했다. 그러나 영송을 밤낮으로 고문해도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듯 보였고, 강한이 매번 들여다보는 핸드폰 화면 역시 메신저보다는 웹 사이트나 은행 애플리케이션에 가까웠다.
그쯤에는 혹여 금전적인 문제가 생겼나 싶었다. 그런데 넌지시 운을 떼자마자 돌아온 반응은 황당한 웃음이었다.
-무슨, 그런 거 아니야. 요즘 할 일이 많아서 그래.
강한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핸드폰 안에 무엇인가를 입력했다. 그 순간조차도 눈길이 맞닿지 않았다. 그저 바쁘게 화면 속을 읽는 눈동자와 빠르게 움직이는 손가락을 보았을 때, 한유일은 투명한 벽을 느꼈다. 언제 생겼는지 모를 벽이 어느덧 두껍게 자리하고 있었다.
마지막 가정은 그 순간에야 떠올랐다.
강한의 마음이 벌써 다 닳아 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아주 끔찍한 추측이었다.
사실 가장 처음부터 마음을 지글지글 끓게 만들던 불안이었지만, 한유일은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했다. 강한과 저의 감정은 영송이 말하던 흔한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몇 년씩 짝사랑하다가도 사귀는 순간 모든 환상이 깨져 질리고 마는, 그런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되뇌었다.
하지만 강한의 태도 변화는 도저히 모르는 척할 수 없게끔 노골적이었다. 야속할 만큼 투명했다.
한유일에게 삶은 쉽게 조종 가능한 것이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더욱 원하는 물건을 갖기도, 필요한 사람과 가까워지기도 쉬웠다. 그는 말 한마디, 표정 하나라도 제게 더 유리하게 쓰는 법을 알았다. 힘들여 계산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본능이 인도하는 길이었다. 덕분에 유일은 무엇을 잃고도 초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얻기 쉬운 만큼 잃는 일도 쉬웠다.
그런데 오로지 강한만이 예외에 속했다. 강한은 의도하지 않은 때에 불시에 성큼 들어와 그만큼 멋대로 사라져 버리는 사람이었다. 계산대로 가질 수 없었고 준비한 길을 걸어도 만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를 잃는 일은 전혀 쉽지가 않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손아귀 새로 흘러 나가도록 방치하기란 불가능했다.
한참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던 한유일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강한의 휴대폰과 달리 지난 며칠 내내 방치되어 있던 유일의 것은 배터리도 간당간당한 상태였다. 어둑한 화면 위로 웹브라우저가 실행되었다.
포털 사이트 메인에는 아직도 유일의 이름이 드문드문 등장했다. 하지만 한유일은 그 짤막한 기사 제목들을 다 읽지도 않은 채 검색창을 눌렀다. 지금 그에게는 제 사생활을 씹어 대는 기사보다 다른 정보가 훨씬 급했다.
「권태기 극복하는 법」
살면서 단 한 번도 필요하리라 여겨 본 적 없는 정보였다.
***
집을 나선 강한은 미리 불러 두었던 택시에 올랐다. 그길로 세 시간가량 달린 차가 멈춰 선 곳은 제 오피스텔 근처였다. 혹여 지켜보는 이가 있을까 싶어 선택한 후문의 낯선 골목. 두리번거리며 내린 강한은 이내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다.
“여기!”
편한 옷차림의 공은수가 머리 위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얼마나 거세게 휘저어 대는지 며칠 사이 확연히 짧아진 그녀의 커트머리가 부스스하게 일어날 정도였다. 그 부산한 움직임을 따라 신이 난 무이의 꼬리도 난리법석을 떨었다.
강한은 얼른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만난 무이가 무릎이며 허벅지를 타고 오르려 들었다. 한은 나지막이 웃으며 하얀 털 뭉치를 안아 들었다. 품 안에서도 헥헥거리며 신난 무이가 턱과 목을 할짝거린다. 강한은 만류하지 않고 그저 턱을 조금 치켜들었다. 떨어져 있던 시간에 대한 미안함 탓이었다.
“이걸 다 들고 내려왔어요? 그냥 기다리시지.”
“어차피 너 바로 다시 갈 거 아니야? 수고 덜어 주려고.”
너스레를 떠는 은수 양쪽으로 온갖 짐이 한 무더기였다. 강한은 여전히 턱을 치켜든 채 다소 부자연스럽게 눈동자를 내려 보았다.
여러 봉투에 나누어 담긴 물건은 대부분은 무이의 물품이었다. 배변 패드와 장난감, 가지각색 간식들이 종이 가방 안에 가득했다.
“너 되게 걱정하는 척하면서……. 오자마자 내 얼굴은 보지도 않고 무이만 찾는 거 다 봤어.”
“무슨. 걱정했죠.”
“걱정은, 아유, 덕분에 아주 매출 뛰어서 부자 되겠는데…. 희한하게 다들 뭘 찾는 것처럼 기웃거리긴 해도 말이야!”
은수가 짐을 하나씩 건네며 뼈 있는 농담을 했다. 그녀는 아주 재미있는 말처럼 웃었지만, 강한은 따라 웃지 못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기자들 많이 왔었어요?”
“농담, 농담. 첫날부터 경찰 부르겠다고 난리를 쳤더니 이제 안 와.”
신상 정보가 생각보다도 더 많이 퍼진 모양이었다. 강한은 조금 침전된 낯으로 짐을 챙겨 들었다. 한 손에 모두 몰아 쥔 채 남은 팔로 무이를 안았다.
“아이고, 우리 무이 또 언제 보나. 덕분에 아지트도 생기고 완전 내 세상이었는데.”
공은수는 그 짧은 정적을 견디지 못했다. 괜스레 평소보다 상기된 음성과 과장된 몸짓에 강한은 비식 웃었다.
“야, 근데 너 진짜 무이 데리러 온 거야? 더 봐 줄 수 있다니까. 그냥 하는 말 아니고 난 정말 천국이었어.”
“일주일을 넘겼는데 이제 남편분이랑 지내셔야죠.”
“에이, 괜찮아. 걔도 행복했을걸?”
어깨를 으쓱 올린 은수의 얼굴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강한은 못 말린다는 듯 웃고, 가득 받아 버린 짐을 한번 훑어보았다. 그 눈동자에 실린 망설임을 은수가 놓치지 않고 묻는다.
“뭐, 왜. 바로 갈 거 아니야?”
“음……. 우리 아직 할 이야기 있잖아요.”
“아, 그거?”
“네. 저희 집에 잠깐 올라갔다 가실래요?”
나지막한 물음은 아주 느리게 나왔다. 은수는 평소처럼 곧바로 답하지 않고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 놀란 사람처럼 끔벅, 끔벅, 멍하게 있던 그녀가 일순 웃음을 터트렸다. 찰싹! 팔뚝을 내리치는 손길이 무척 매서웠다.
“어우, 너 어디 가서 그런 말 쉽게 하지 마라?”
깔깔 웃은 그녀는 몇 번 더 강한의 팔뚝을 가격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건네주었던 물건들을 몇 개 빼앗아 앞장서 걸었다. 무척이나 씩씩하고 믿음직한 걸음이었다.
사람 없는 길을 능숙하게 골라 인도해 준 은수와 직접 데리러 온 매니저 덕분에 강한은 아무런 소란 없이 편하게 집을 다녀올 수 있었다. 게다가 짐을 챙겨 오겠다는 타당한 이유를 연막 삼아 처리할 일도 모두 마무리했다.
시간도 너무 늦지 않은 저녁. 인터넷 속 세상이 얼마나 뒤집어져 있든 상관없이, 차 안은 몹시 고요하고 편안했다. 모든 것이 아주 순조로웠다.
그럼에도 강한은 퍽 긴장했다. 불안한 긴장보다는 두근거리는 설렘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유일과 똑 닮은 집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크게 부풀고 목구멍이 조이며 온 혈관에 맥박이 쿵쿵 울려 댔다.
“한동안 한유일 핸드폰도 못 보게 할 거니까……. 잘 부탁드려요.”
이제 차가 마지막 코너를 돌기 전이었다. 강한은 출전을 앞둔 선수처럼 비장한 인사를 내놓고 내릴 준비를 했다. 매니저 영송의 ‘옙.’ 하는 대답 역시 비장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 역시 무척 긴장한 듯했다.
“어, 저거 왜 저러고 있지?”
그러나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분위기는 금세 허물어졌다. 차를 세운 영송이 아주 맹하게 중얼거린 탓이었다.
강한은 그의 시선을 쫓아 보도블록 위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의 입술 역시 영송처럼 맥없이 벌어졌다.
“…소속사에 또 뭐 연락 온 거 있었어요?”
자기 자신을 빼다 박은 건물 앞에 한유일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는 주인을 잃은 강아지처럼 아주 외롭고 처량하게 앉아 그 어느 것도 바라보지 않았다. 자동차의 엔진 소리와 빛에도 반응 없이 그저 몽롱하게 허공을 바라보는 낯은 강한의 심장을 내려앉혔다.
“아, 아니, 없는데요? 무슨 일 있었나?”
적잖이 놀란 매니저가 허둥지둥 기어와 안전벨트 사이에서 손을 방황하는 동안, 강한은 얼른 문을 열고 내렸다. 큰 보폭으로 몇 걸음 만에 유일의 앞에 우뚝 서자 그제야 텅 빈 눈동자에 초점이 잡혔다.
“왜 여기 이러고 있어, 언제부터 있었어. 무슨 일 있어?”
한유일의 눈동자가 위로 올라오는 시간마저 견디지 못해, 강한은 얼른 따라 앉았다. 눈높이를 맞추며 걱정스럽게 추궁하자 유일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나와 있고 싶어서.”
고저 없이 말끔한 대답이었으나 강한은 믿지 않았다. 한유일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밖에 나와 앉아 있을 놈은 아니었다.
바른대로 말하라는 재촉 대신, 그저 눈을 맞췄다. 강한의 날카롭고 또렷한 눈이 유일을 꿰뚫을 것처럼 바라보았다.
“야, 왜 밖에서 청승을 떨고 있냐아. 누가 보면 어쩌려고!”
하지만 영송의 속삭임 탓에 정적이 깨졌다. 차 문마저 조심조심 닫아 낸 매니저는 얼른 집 문을 열고 한유일과 강한을 밀어 넣었다. 빗자루질하듯 두 사람을 쓸어 넣은 그가 문을 쾅 닫았다.
닫혔던 문은 그 뒤로도 세 번이나 다시 열렸다. 강한의 집에서 가득 챙겨 온 짐을 영송 혼자 옮긴 탓이었다. 그가 낑낑거리며 모든 짐을 다 내려놓고 마지막으로 무이를 끌어안고 등장할 때까지, 현관에 서로를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은 그대로였다.
“…이 분위기 뭐…. 야, 유일이 너 왜 밖에서 그러고 앉아 있었느냐고. 누가 뭐라디?”
영송은 품에 안은 무이를 어화둥둥 달래면서 아주 상반된 얼굴로 채근했다. 넓게 정리되지 않은 눈썹이 ‘으잉? 엉?’ 하는 소리와 함께 씰룩이자 꽤 험악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한유일은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바깥에서처럼, 여전히 강한을 응시하는 눈동자가 오묘했다. 서운하면서도 기쁘고, 불안하면서도 안심한. 그런 모순적인 빛깔이 잔잔하게 감돌고 있었다.
“이상하게…….”
한동안 느리게 눈만 깜빡이던 유일은 표정을 숨기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가며 시선이 비껴간다.
“한이가 이대로 안 올 것만 같아서.”
그의 헛웃음 같은 고백이 현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강한은 그 실체를 눈으로 본 것처럼 커다래진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누군가 머리를 거세게 가격한 기분이었다.
“……이야, 나, 내, 나는 가 봐야 쓰겠네.”
험상궂게 추궁하던 영송은 입이 합죽해져서는 문을 더듬거렸다. 한참 걸려 손잡이를 찾아낸 그가 뒷걸음질로 현관문을 열었다.
“그, 뭐야, 얘는 내일 다시 데리러 올게요…….”
그의 말이 작게 사그라지며 문이 다시금 쿵 닫힌 후에도 침묵은 사라지지 않았다.
강한은 아주 천천히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눈앞에 한유일은 흐트러진 머리칼 그대로, 여상하게 서 있었다. 기민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볼 수 없을 정도로 무척 미세한 균열을 내보인 채로.
지난 3일 내내 그를 조금이나마 편하게 만들어 주고 싶어 노력했다. 11년이나 빚진 세월을 다 갚을 수는 없더라도, 이만하면 나름 선방했다며 섣부른 만족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잊었다.
“……아, 이런 말 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죄책에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하며 유일은 작게 중얼거렸다. 강한은 ‘뭐?’ 하고 숨처럼 미약하게 되물었다.
“사람들이 이런 건 물어보는 순간 확정 짓는 거라고 했어.”
“…뭐를?”
“…….”
한유일은 답지 않게 말을 줄이며 시선을 피했다. 마치 들은 적 없는 듯 천연덕스럽게 신발을 벗고 거실로 향하는 그를 강한은 뒤늦게 붙잡았다. 돌아보는 유일의 낯은 여전히 평이했다. 무엇을 단념한 사람이 그렇듯.
“누가? 뭘 확정 짓는데?”
그 초연한 기색이 강한을 불안하게 했다. 차 안에서만 해도 기분 좋은 설렘에 가까웠던 긴장이 검게 물들어 버린다.
유일은 입술을 아주 작게 벌렸다가 재차 다물었다. 그러고는 한숨 쉬었다. 꼭 이야기해야 하냐는 듯, 조금 원망스럽게 변한 눈동자가 하얀 눈두덩에 가려졌다. 느리게 눈 감은 그가 느닷없는 협상안을 내놓았다.
“한이가 시간을 가지고 싶으면 그렇게 할게.”
“어?”
“오래 서로를 잘 몰랐는데, 갑자기 너무 붙어 있었으니까. 쌓였던 환상이 깨지면…. 그러면 쉽게 질릴 수도 있대. 당연한 일이랬어.”
이별을 통보받은 사람처럼 절박한 말이었다. 강한은 얼어붙은 채 지난 며칠을 삐걱삐걱 되돌려 보았다.
인정한다. 지난 3일, 은수와 벌인 일로 유일에게 조금 소홀하기는 했다. 준비하고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강한은 평소 팬들의 문화를 잘 알지 못했고 특히 여러 사람이 함께 돈을 모아 광고를 내는 과정은 미지의 분야였다.
그 탓에 은수가 주로 연락 가능한 시간대에 자료를 검토하고 의견을 나누다 보니, 특히 밤에 더더욱 바빠졌다. 유일이 불러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때도 많았고 침대에서 몰래 빠져나와 혼자 밤을 샌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별까지 걱정하다니.
스킨십을 한번 시작하면 중간에 멈출 자신이 없어서 사흘 내내 뽀뽀만 했지만, 핸드폰만 부여잡고 살기는 했지만…….
“한유일.”
다소 억울하게 시작되었던 생각은 머쓱하게 마무리되었다. 강한은 저도 모르게 반성 가득한 목소리를 내며 유일의 손목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런데 그 따스한 손길이 더욱 오해를 만들었는지, 유일은 짙은 숨을 내쉬었다.
“떨어져 있고 싶으면 그래도 돼. 그런데 한아, 나 그래도 너를…….”
그의 평온했던 낯은 이제 아프게 찡그려져 있었다.
“놓지는 못하겠어.”
부드러우면서도 끝이 허스키하게 가라앉는 한유일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애달프게 울렸다.
강한은 아주 허망했다. 그렇게 유일을 위했던 날들이 결국 그에게 고통을 준 듯해서 무척 미안했고, 속이 쓰렸다. 괜한 짓을 했다는 자괴와 후회가 차올랐다.
그러나 동시에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 올 만큼 뭉클했다. 오로지 저와의 이별 앞에서만 평정을 잃는 한유일이 지나치게 어여뻐서 발을 구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 벅찬 숨을 크게 내뱉은 강한은 일단 저도 신발을 벗었다. 바투 쥐고 있던 유일의 손목을 놓아주고 당장에 윗옷까지 벗어 던졌다. 난데없는 탈의에 한유일은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웬만해서는 그에게서 잘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 낯이 객기와도 같은 흥분에 불을 지폈다.
“내가 존나 오해하게 만들었지. 미안, 내일 다 설명할게.”
“……한아?”
“질리기는 무슨.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강한은 내친김에 바지 버클까지 풀며 유일을 떠밀었다. 거실 소파에 허벅지가 턱 걸린 그가 멈춰 서자, 그대로 무릎을 꿇어앉았다. 허벅지가 눌리자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이 불편하게 걸렸다.
“내가 요즘 이것만 봐서 서운했냐?”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강한은 팽팽하게 늘어난 청바지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한아, 무릎을 왜……. 일어나.”
평소 한유일은 좀처럼 당황하지 않았다. 그러나 느닷없이 웃통을 벗어 던지고 무릎을 꿇는 강한 앞에서만큼은 달라졌다. 그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기지 못한 채 손을 뻗었다. 당장 한의 어깨를 잡아끌어 일으킬 요량이었다.
그러나 강한은 손이 닿기도 전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내던졌다. 휙 몸을 돌려 현관에 강속구를 던지는 폼에 망설임이 없었다. 현관 바닥 타일을 향해 메다꽂은 핸드폰은 ‘퍽!’ 소리를 냈다. 충돌 이후로도 길게 미끄러진 기기가 신발장 아래에 힘없이 터엉, 부딪히며 사망 선고가 내려졌다.
“저것도 현관에 전시해 둬라, 너.”
강한은 입술을 길게 늘여 웃었다. 급작스럽게 핸드폰을 박살 낸 사람치고는 아주 속 시원한 웃음이었다. 도저히 따라가기 어려운 상황에 유일이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순간, 바지 버클이 풀렸다.
“해 본 적 없어서 자신은 없는데…….”
“한아, 잠깐….”
“형이 노력해 볼게.”
호기가 식기 전에 속히 행동을 감행했다. 굳은 허벅지를 꽉 쥐고 앞섶을 풀어 헤치자, 아직 흥분보다는 당황에 휩싸인 유일이 허리를 숙였다. 어깨를 붙든 손에 주저가 묻어났다.
강한은 만주하는 손길을 모르는 척 눈앞의 드로어즈를 내렸다. 구태여 허벅지에 걸리도록 조금만 내려 구속한 채 성기를 쥐었다. 제대로 발기하지 않은 채로도 묵직한 좆이 손바닥 안에서 꿈틀거렸다.
단숨에 입 안으로 밀어 넣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강한은 일단 한 손으로 유일의 셔츠 밑단을 잡아 올린 채 거슬거슬한 아랫배에 입술을 묻었다. 부드럽고 얇은 체모가 입술과 턱 근처를 간지럽히는 감각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자꾸 비비적거리고 싶은 욕망이 들었다.
욕심껏 살을 베어 물고 핥아 대며 손을 움직였다. 강한의 커다랗고 조금은 거친 손안에 들어찬 성기는 점차 힘을 받았다. 부풀어 단단해진 열기가 자연스럽게 입술과 가까워진다.
“한아…….”
이제 유일은 긴장으로 움츠러졌던 허리를 편 채, 한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매만져 주었다. 당황만 가득하던 음성에 흥분이 차차 스며들었다.
그 열기가 강한을 북돋아 망설임을 없앴다. 입을 벌린 그가 덥석 선단을 물었다. 아이스크림을 빠는 듯이 끝을 물고 혀를 움직이자 머리 위로 뜨끈한 숨이 터졌다. 재차 음심을 솟구치게 하는 반응이었다.
내친김에 입을 더 크게 벌려 낸 강한은 유일을 당겼다. 자연스레 성기가 더 깊이 들어서고 턱이 아릿하게 벌어졌으나, 아직도 반을 채 삼킬 수가 없었다.
아쉬운 대로 뿌리를 손으로 매만지며 고개를 움직였다. 동영상에 나오던 사람들처럼 능숙하고 빠르게는 불가능했다. 그저 자꾸만 커지는 성기를 물고 핥아 대며 타액을 삼키는 일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원래도 큰 좆이지만 발기했을 때 특히 더욱 비대해지는 탓에 시간이 갈수록 입술 사이가 쓰라렸다.
“하아, 읏….”
하지만 서툰 애무만으로도 뜨거운 신음을 쏟아 주는 한유일이 너무 보기 좋았다. 느른하게 풀린 눈을 하고 제 머리칼을 헤집는 그가 좋아서, 강한은 아픔과 불편함을 모두 꾹 누른 채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더욱 기분 좋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턱을 조금 더 들어 목구멍을 열었다. 입천장과 혓바닥에 문질러 대던 성기를 조금 더 깊게 머금자, 목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듯 처박혔다. 순간 본능적인 구역질이 치밀었다. 하지만 강한은 붉어진 눈을 질끈 감은 채 여러 번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굵고 단단한 좆이 약한 점막을 야하게 치대고 눌렀다.
“윽, 한아… 잠시만, 하아.”
기분 좋고 나른하던 유일의 숨이 거칠어졌다. 다시금 허리를 굽힌 한유일은 만류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친다며 다급히 붙인 말이 허풍 같지는 않았다.
알면서 강한은 제 어깨를 힘껏 누르는 손을 거스른 채 더 깊이 빨았다. 젖은 입 안을 오가는 성기가 축축한 소리를 내고, 역치를 아슬아슬하게 맴도는 구역감에 목구멍이 일렁거렸다. 무척 힘이 들었다. 그런데도 미끄러운 성기가 구강을 찔러 대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더 욕심이 났다. 기어코 찢어진 입술 끝에서 피 맛이 나는데도, 강한은 목울대를 바삐 오르내리며 좆을 빨았다. 멀어지려는 유일을 집요하게 당기고 놔주지 않은 채로 제 입 안을 혹사시켰다.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사정이 다가오는지 유일의 손길도 거칠어졌다. 말려도 멈춰지지 않는 행동에 적응한 듯, 그는 이제 강한의 머리칼을 쥐고 신음했다. 부드럽게 쓸고 만져 주던 때와는 다르게 다소 힘이 들어갔다. 치솟는 흥분을 그대로 표현하는 듯도 했고 입 안에 사정하지 않으려 제동을 거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강한은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입에 해.”
발음이 다 뭉개져 엉망으로 흘러나왔다. 그래도 한유일은 단박에 알아들은 눈을 했다. 걱정스럽게 찌푸려져 있던 눈가에 날카로운 흥분이 감돌았다.
강한은 부추기듯 더 깊이 성기를 머금었다. 선단을 힘 있게 빨아 당기며 다 삼키지 못한 뿌리를 매만지고, 손을 내려 예쁘게 올라붙은 고환을 주물렀다. 단숨에 유일에게서 거친 신음이 토해졌다. 목 안까지 성기가 깊게 박혀 들었다.
“으웁, 음!”
“하아, 하…. 좋아, 한아…….”
한유일은 탁한 음성만큼이나 과격하게 머리칼을 잡아채 움직였다. 목구멍 너머를 탐할 것처럼 집요하고 거칠었다. 강한은 생리적인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바닥을 짚었다. 유일의 몸을 더듬어 대며 여유 부릴 틈이 사라지고 말았다. 눈앞이 하얗게 번질 만큼 숨이 막혔다.
더는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불덩이 같은 좆이 점막을 콱 찌르고 빠져나갔다. 비릿한 정액이 혓바닥에서부터 바깥으로 길을 냈다.
허억, 강한은 헛숨을 쏟아 내며 엎드렸다. 오랫동안 참아 온 구역감이 기침으로 토해지며 한참을 콜록거렸다. 흐린 눈앞으로, 스스로 떨구어 대는 눈물과 타액이 허연 점액질에 더해졌다.
밭은기침이 다 멎기 전에 한유일이 먼저 강한을 이끌었다. 그는 온갖 체액으로 범벅이 된 강한의 얼굴을 쓸어 주고 이리저리 입을 맞추었다. 달콤히 젖은 얼굴을 짓누르던 입술은 비릿한 향이 맴도는 입가에 오래 머물렀다.
“상처 났어.”
속상한 목소리였다. 강한은 비식 웃으며 기운 빠진 팔을 그의 목에 둘렀다.
“안 아파. 박아 댈 때는 아픈 거 상관도 안 하면서 무슨…….”
“음, 그거랑은 달라.”
나지막이 대꾸한 유일은 답변할 입술을 막아 버렸다. 물기 어린 소리가 끊이지 않을 만큼 질척하고 깊은 입맞춤이었다. 강한은 욱해서 치켜뜬 눈썹 그대로 입술을 잡아먹히며 떠밀렸다. 마치 함께 블루스를 추듯, 유일은 붙인 몸을 떠밀어 침실로 이끌었다.
감미로운 키스에 이끌려 강한은 어느덧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웠다. 처음의 호기를 모두 잊고 몽롱해진 눈이 유일을 올려다본다. 유일의 눈동자에는 아직도 곧 사라질 것을 바라보듯 애틋한 기색이 있었다.
“내일 정말 다 설명할 테니까 이상한 생각 그만해.”
이번에는 강한이 유일을 어루만졌다. 저와 다르게 물기 하나 없이 멀끔한 볼을 쓰다듬고 입가를 간지럽히자, 유일은 아주 천천히 미소 지었다.
“응, 괜찮아.”
일부러 노력해 만든 그 얼굴빛이 마음을 한없이 약해지게 만들었다.
“대신 오늘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결국 강한은 후회하고 말 법한 포상을 걸었다. 서서히 가까워진 유일의 ‘정말?’ 하는 달큼한 속삭임에마저 고개를 끄덕이며, 돌이킬 수 없는 도장을 찍어 주었다.
***
커다란 창에서 햇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스름한 푸른빛을 걷어 내며 공간을 밝히는 일광이 눈부셨다.
강한은 따갑고 쓰린 눈을 찌푸리며 몽롱한 시야에 방의 전경을 담았다. 침대와 바닥 아래로 형형색색의 콘돔 껍질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고 서로가 벌컥 들이켠 생수병이 굴러다녔다.
밤새 쉬지 않고 붙어 댄 바람에 온몸이 끈적거리고 따가웠다. 사지 끝에 전류가 흐르는 기분이었다. 감각만으로 따지자면 당장 울며불며 그만하자 매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침이 밝았으니 곧 기사가 뜰 시간이었다. 한에게는 모든 일이 소강될 때까지 한유일을 붙잡아 놓을 의무가 있었다.
강한은 힘없이 늘어진 다리를 들어 올려 유일의 허리를 더 세게 감아 당겼다. 흠뻑 예민해진 점막으로 좆이 더 밀고 들어오는 감각이 소름 끼치게 선연했다.
“하아, 아…….”
한계치를 진즉 벗어난 쾌락 때문에 신음은 점점 더 미약해졌다. 소리를 내지르는 것조차 힘이 들어, 강한은 끙끙 앓으며 몸을 뒤챘다.
“한아, 괜찮아?”
자상한 물음과 다르게 한유일은 더 깊숙이 몸을 숙였다. 강한의 단단한 허벅다리를 제 팔에 꿰어 당기며 숙인 상체 덕에 성기는 자연스레 끝까지 도달했다. 푹 박아 넣은 열기가 아주 부드럽게 움직이자 말랑하게 풀린 구멍에서 꿀쩍거리는 소음이 울렸다.
“흐아, 아, 아흐으…….”
강한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앓았다. 수없이 많은 절정이 쌓여 예민해진 신체가 이제 조그마한 자극으로도 퍼들퍼들 떨리는 바람에 신음도 그만큼 농익었다. 평소라면 창피해 입술을 물어뜯고 참았을 소리들이 무방비하게 흘러 나갔다.
그럴 때면 다소 사그라져 보였던 유일의 흥분도 금세 불이 붙었다. 이제 막 섹스를 시작한 사람처럼 아주 쉽게 열기를 내뿜으며, 그는 다 녹아 버린 내벽을 들이쑤셨다. 아무래도 지난 며칠간 쌓였던 감정이 도화선인 듯했다.
느리고 진득하게 안을 문질러 대던 좆이 다시금 속도를 높였다. 도톰하게 부은 지점을 일부러 힘껏 눌러 대며 내벽을 가르고 쑤시는 행위가 격렬했다. 강한은 흐느끼며 제 뱃가죽을 쥐어짰다. 배 속 어딘가가 욱신거리고 아픈 것 같다가도 참을 수 없는 쾌락이 찌릿찌릿 올랐다. 끝 간 데 없이 솟구치는 환락은 고통에 가까웠다.
“흐읏, 읍, 거기, 흐윽…, 거기, 그만…….”
“하아… 읏, 여기?”
“아, 앙, 으읏…, 흐, 거기… 그만해… 다른 데, 다른 데로….”
결국 애원을 내뱉고 만 강한은 횡설수설 방향을 돌렸다. 한유일을 더 붙잡아 놓아야 한다는 이성과 이러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본능이 혼란스럽게 뒤섞였다. 안을 깊게 쑤석거리던 유일의 성기가 느리게 멈췄다. 가만히 멈춰 뚝뚝 흐르는 눈물을 핥고 달래 준 그는 아주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그럼 여기는?”
내내 자극하던 곳보다 훨씬 옆으로 장벽이 벌어졌다. 강한은 생소한 감각에 눈을 찌푸리며 일단 끄덕거렸다. 묵직하고 옅은 통증이 쾌락을 중화시키는 듯했다.
“아, 흐, 으읏….”
“한아……. 여기도 똑같은 것 같은데.”
그러나 유일이 일정한 속도로 안을 찔러 대자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조짐이 몰려왔다. 강한은 바르르 떨리는 배를 움켜쥐고 유일을 올려다보았다. 당황한 눈이 흔들거린다. 그 변화에 맞춰 내벽을 부드럽게 누르던 성기도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어읏, 왜…, 아! 하아….”
분명 한참을 비껴 누르는데도 예민한 점막이 파르르 진동했다. 이제 속이 아주 망가진 것은 아닐까, 불쑥 두려워진 강한이 허리를 띄웠다. 하지만 성기가 반쯤 빠져나가는 느낌 자체만으로도 발끝이 굽었다.
빠지는 것마저 기분 좋다니. 충격에 굳어 있는 틈을 타, 유일은 빠졌던 성기를 깊게 밀어 넣으며 안을 들쑤셨다.
“어떻게 해도 좋아?”
“흐아, 아! 아윽, 으!”
“응, 나도…. 좋아, 한아…….”
한유일은 격렬하게 몸을 치받아 대면서 다디단 신음을 흘렸다. 귀를 집요하게 잘근거리며 그 안으로 흘려 넣는 거친 숨이 흥분을 고조시켰다.
강한은 의지와 다르게 터져 나가는 신음을 방치한 채 시트를 쥐어뜯었다. 배 안이 너무도 이상했다. 절정이 끝나지 않는 듯한, 극도의 자극이 몸 안을 연거푸 조이게 만들었다. 생경한 느낌에 놀라 얼른 유일의 어깨를 두드렸다. 맨살을 차닥차닥 때리며 ‘잠깐만.’ 하고 애걸했으나 사정을 향해 달려가는 몸짓에는 제동이 걸리지 않았다. 유일은 그 손을 제 목뒤로 감아 주며 더 가깝게 몸을 붙였다.
거의 반쯤 몸이 접힌 강한이 고개를 젖혀 흐느꼈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전율이 아주 빠른 속도로 척추를 타고 올랐다. 힘없던 신음이 비명처럼 커졌다.
“이상, 해, 아…, 안에… 아읏! 아! 잠…깐, 아아! 허억, 흣!”
급속도로 치고 오른 전류는 단숨에 정수리를 관통했다. 몸이 저절로 들썩거리며 배 속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충격에 가까운 절정이었다.
“한아……. 쉬이, 괜찮아.”
한유일은 다정히 달래며 초점 없는 눈 위에 입술을 내렸다. 그 담백한 접촉에도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오한에 떠는 사람같이 이가 닥닥 부딪혔다.
“흐, 아……. 아흣….”
안을 짓찧던 좆은 가만히 멈추어 있는데도 신음이 줄줄 새어 나갔다. 내벽이 저절로 성기를 꽉 물었다 뱉어 내며 떨었다. 아주 긴 절정이었다.
한참 후에야 경련이 멎은 강한은 두려운 기분으로 유일을 감싸 안았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아래를 살폈다. 분명 극적인 환락을 겪었음에도 쏟아져 나온 정액이 없었다.
사정 없이 겪는 절정이라니. 어디서 들어 본 적도 없는 생소한 경험이었다. 강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유일의 어깨 위에 이마를 콩 찧었다.
“나 진짜 너 때문에 몸이……. 존나 이상해진 것 같아.”
목이 다 쉰 채 하소연하자 유일은 낮게 웃었다. 목을 울려 웃은 그가 허리를 슬쩍 무른다. 마개가 뽑히는 것처럼 내벽이 딸려 나가며 재차 이상한 감각을 선사했다.
“그만할까.”
“너, 흐으읏……. 못 했잖아.”
“괜찮겠어?”
그렇게 물은 유일은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벌써 느리게 안을 오가는 성기의 움직임이 노골적이었다. 강한은 비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키며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 부드럽게 점막을 문질러 대던 성기에 속도가 붙었다. 턱, 턱, 한계까지 벌어진 골반에 탄탄한 몸이 부딪혀 오는 감각조차 흥분이 되었다.
사정이 가까워지자 유일은 찡그린 얼굴로 아래를 쳐올렸다. 흥분과 열기에 잠식된 얼굴이 끊임없이 한을 부르며 신음했다.
“한아, 후으, 읏….”
“앞에, 학, 하지 마…. 나 됐…어. 안 나와, 너만 해도, 헉, 너만 해도 돼.”
절정을 향해 달음박질하던 유일은 문득 강한의 좆을 움켜쥐었다. 부드럽고 축축한 손아귀에 흔들리는 성기가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강한은 필사적으로 말리며 허리를 뒤틀었다.
“그래도.”
한 팔로 매트를 눌러 지탱한 채, 한유일은 성기를 추어올렸다. 아래를 탁탁 쳐올리며 달아오른 낯으로 강한을 살피는 그의 얼굴은 몹시 선정적이었다. 강한은 그가 수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듯한 흥분에 입술을 질끈 물었다. 조금 더 참아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갈증 어린 표정으로 헉헉거리는 한유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와 상관없이, 신체에 쌓인 쾌락은 이미 고통과 맞닿아 있었다. 얼마 버티지 못한 강한은 이내 흐느끼며 유일의 팔을 잡아챘다. 아주 미약한 힘으로.
평소처럼 자국이 남을까 두려워 힘을 뺀 것은 아니었다. 생소한 절정을 겪은 이후부터 온 근육이 죄 풀어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유일의 하얀 팔뚝을 그저 쥐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벌벌 떨렸다.
그 덕에 진심이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유일은 고집스럽게 선단을 문지르며 안을 쳐올렸다. 거센 삽입으로 호흡이 뚝뚝 끊기는 틈, 강한은 겨우겨우 한 토막씩 애절한 말을 끼워 넣었다.
“흐앗…, 아, 안 해도…. 나는 안…, 아윽, 안 돼….”
“같이, 아읏, 한아……. 같이 좋고 싶어.”
“윽, 으! 시…발, 안, 싸도 좋, 다고! 아, 안, 안…!”
기어코 오늘만큼은 참아 보려던 욕설이 터졌다. 그러나 강한은 말을 모두 마무리하지도 못했다. 혀가 빳빳하게 굳어 발음이 뭉개지고 있었다. 유일의 크고 뜨거운 좆이 내벽을 진창으로 만드는 감각이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너무, 아니, 심각할 만큼 좋았다.
“으흣, 으으응!”
“하아, 하…….”
서서히 곡선을 그리던 등이 확 젖혀지며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었다. 붕 떠오른 허리를 콱 잡아챈 유일이 깊게 박아 넣으며 사정하는 순간, 강한의 성기 끝에서도 무언가 터져 나왔다. 투명하고도 조금은 미끄러운 액체였다.
“흐아, 학, 아…….”
복근 위를 흠뻑 적신 물기를 내려다보며 강한은 어쩐지 서러운 눈물을 흘렸다. 몸이 달싹거릴 정도로 울음이 터졌다.
한유일은 축축한 배 위를 상냥하게 매만지며 엉엉 우는 한을 달랬다. 마침내 울다 지친 강한이 곤히 잠들 때까지, 유일은 아래위로 푹 젖은 그의 낯과 몸에 아낌없이 입을 맞췄다. 지난 사흘간 쌓였던 심술을 모두 풀어 버린 남자라기에는 아주 다정한 태도였다.
그 격렬했던 시간을 힘겹게 견뎌 낸 강한은 해가 다 진 무렵에야 눈을 떴다. 그사이 너저분했던 방과 진득하던 몸이 모두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텅 빈 침대 옆자리를 짚고 일어나 이불을 몸에 둘둘 감았다. 축축한 얼룩이 남은 매트리스를 보았을 때는 얼굴이 붉어졌으나 모르는 척 방을 나섰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둑한 거실에는 한유일이 앉아 있었다. 유일은 커다란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강한을 바라보았다. 강한이 잠들기 직전 목도한 얼굴과는 전혀 다른 온도를 지닌 채.
서늘하고 진중하게 가라앉은 낯이 의미하는 바를 강한은 알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주 조용히 그 어떤 것도 묻지 않고 유일의 옆에 앉았다.
“기사 봤구나.”
목을 잔뜩 긁으며 나온 말이 거칠었다. 그제야 강한을 돌아본 유일은 아무렇게나 두른 이불을 정돈해 맨살을 꽁꽁 숨겨 주었다. 그는 아주 고요하게 침전된 채로도 손길이 다정했다.
“미리 설명 못 해 줘서 미안해.”
다 쉬어 버린 목소리가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 같아 강한은 일부러 목을 가다듬지 않고 이야기했다. 눈치를 살살 살피며 느리게 변명하자, 유일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목 끝까지 이불을 들어 올려 단단히 막아 준 채로 그저 눈을 맞출 뿐이었다.
“네가 막으려고 할 것 같아서 그랬어.”
“…….”
“어차피 나는 주변에 알려져서 문제 될 것도 없어. 어머니도 알고 계시고. 상수는 당연하고. 사장님이랑 현경이도 다 대충 알아. 걱정할 만한 일 없어.”
“……어머니도 알고 계셔?”
“어. 뭐……, 반응은 별로였지만. 내 속은 시원해졌어.”
부러 투박하고 과장되게 늘어놓은 말들에 유일은 얕은 한숨을 쉬었다. 어떤 말 한마디 없이도 길게 허공으로 쏟아진 숨에 모든 감정이 담겨 있었다.
강한은 두툼하게 감긴 이불을 갈무리하며 유일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뒤뚱뒤뚱, 상황에 맞지 않게 우스꽝스러운 걸음을 택한 그가 씨익 웃었다.
“걱정 마. 보험도 준비해 뒀어. 다 잘될 거야.”
“……아무리 얼굴 가린 사진이라고 해도 문제 생길 거야. 분명 이상한 사람들이 말 얹고, 없는 소리 지어내고, 한이 너한테 감히 역겨운 단어들 붙일 거라고.”
밤새 붙어먹으면서도 총기를 잃지 않았던 유일의 눈동자가 피로하게 가라앉았다.
“무슨 수를 써서든 다 돌려줄 거야. 법적 조치는 당연하고, 돈이 얼마나 들어도 상관 안 해. 기사 올린 새끼들 멀쩡히 못 살게 만들 거야, 나.”
살기 가득한 말을 하면서도 한유일의 눈빛은 부옇게 안개가 낀 듯 탁했다. 그는 강한을 힘없이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근데 그렇게 해도……. 이미 퍼진 걸 없앨 수는 없잖아.”
“유일아.”
“이딴 미래를 계획한 건 아니었는데. 내가 너무 좆같아.”
강한은 평소처럼 얼굴과 안 어울리는 단어 선택이라며 놀리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일자로 길게 입술을 말아 물며, 유일의 무릎에 손을 올렸다.
“한유일.”
“…….”
“나는 그냥 너만 있으면 되는데.”
동그란 무릎을 감싼 손등 위로, 강한은 제 턱을 얹었다. 최대한 순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는 느리게 고개를 틀었다.
“너도 그러면 안 돼?”
언젠가 제 심장을 쿵 치고 갔던 말이다. 강한은 한유일이 그때 자신이 입었던 타격만큼 그 또한 영향 받기를 바라며 미소 지었다.
조용하던 유일은 천천히 고개 숙였다. 강한에게로 쏟아지듯 허물어진 그가 한의 이마 위로 제 이마를 맞댔다. 하아, 전보다 가벼워진 한숨이 강한의 눈썹을 간지럽혔다.
“하여튼……. 한 방이 있다니까.”
삽시간에 함락된 그가 하얀 깃발을 들어 올렸다.
***
열애설은 생각 외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오랜 시간 침묵했던 한유일 측의 반응 탓에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던 대중들은 오히려 사진을 본 뒤에 흥미를 잃었다. 진득한 입맞춤이나 포옹도 없이 그저 부축할 뿐인 사진을 두고 무얼 믿으란 소리냐며 혀를 찼다. 특히 확실하지도 않은 열애설에 일반인 신상을 그대로 노출시킨 데에 비판과 조롱이 쏟아졌다.
그 바람을 타고, 소속사는 ‘해명할 가치가 없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영송과 미리 말을 맞춰 두었던 그대로, 언론인 보도 윤리에 관한 반성을 촉구하며 강경한 법적 조치를 경고했다. 그때쯤 타이밍 좋게 광고가 걸렸다. 강한이 은수와 현경의 도움을 받아 진행한 모금 광고였다.
하루에도 수천 명이 오가는 서울의 커다란 지하철역. 출구를 나서기 직전 보이는 가장 거대한 광고판에 한유일의 화보가 걸렸다. 하늘색 셔츠를 입고 편안하게 웃고 있는 그의 뒤에는 모금에 참여한 수많은 팬들의 이름이 작고 옅은 회색 글씨로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마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의 편이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한유일 배우의 모든 행복을 응원합니다.」
메인 문구는 그의 가장 오랜 팬이었던 은수가 정했다. 강한이 제안한 ‘배우의 사생활을 지켜 주세요.’ 같은 문구는 지나치게 캠페인 같다며 기각된 탓이었다.
하지만 그 은유적인 문장 하나만으로도 의미는 모두 전달된 듯했다. 광고판은 걸린 직후부터 수십 개의 기사로 소개되고, ‘달라진 팬들의 인식’ 같은 주제로 재해석되기도 했다. 그 영향은 염문 기사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물살을 타고 언론사를 향한 비판과 조롱이 거세지면서 끝내 사과문을 게시해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사건은 우스울 만큼 빠르게 일단락되었고, 대중의 관심 또한 쉽게 사라졌다.
당사자에게만 폭풍 같던 날들은 마치 거짓말처럼 소멸되었다. 아무 데서나 쉽게 씹히고 밟히던 유일의 이름은 이제 과한 선의에 둘러싸였다. 그를 보호하고 그에게 호감을 가지는 것만으로 어떤 대단한 인권 의식을 가진 사람이 되는 양 묘한 분위기가 흘러갔다.
그 소란마저 모두 잠잠해졌을 때에는 새로운 겨울이 찾아왔다.
그사이 한유일은 생각지 못하게 흥행한 <드링크 유어 럭>의 영향으로 꽤 바쁜 일상을 보냈다. 이제 그를 추궁하듯 연애 문제를 물어 대는 눈치 없는 사람은 없었고, 다만 가끔 에둘러 사랑이나 이상형에 관한 유도 심문이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유일은 그 어떤 것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답했다. 그러다 키가 저보다 커도 상관없다는 말이나,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데에 성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둥의 답변을 할 때면 또 한 번씩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은수는 매번 그런 유일을 요령이 없다며 분통 터져 했지만 강한은 그저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느물느물 웃으며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받아치면 은수와 현경이 팔뚝을 공격해 오는, 고작 그런 정도가 별일인 아주 평화로운 일상.
강한은 카페에 방치되었던 짐들을 마지막으로 정리해 길을 나섰다.
“야, 가서도 연락 자주 하고.”
“네.”
“카페 오픈 날짜 잡히면 꼭 초대해 줘야 돼요!”
“알았어.”
기분 좋은 송별회를 마친 밤이었다. 강한은 웃는 얼굴로 은수와 현경을 떠나보낸 채 오피스텔을 향해 걸었다. 추운 밤거리를 걷기에는 다소 긴 거리였지만 땅을 딛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딱 적당히 마신 술에 마음 맞는 사람들의 애정이 뒤섞여 찰랑찰랑, 기분 좋게 차올랐다.
‘이런 때 한유일이 옆에 있다면 더욱 완벽했을 텐데.’
강한은 꽤 간지러운 생각을 하며 유일의 이름을 눌렀다. 오늘 무이와 함께 본가에 다녀온 그는 별도의 스케줄이 없는 날이었다.
[이제 헤어졌어?]
한유일은 신호음이 세 번도 넘어가기 전에 전화를 받았다. 상투적인 인사말 없이 그저 담백한 본론에 강한은 조용히 웃었다.
“어. 집 가는 길. 밤이 늦어서 자고 가야겠다.”
[걸어서?]
“응, 오늘 별로 안 춥더라.”
[추운데…….]
나지막이 반론하는 목소리 뒤로 노랫소리가 들렸다. 강한은 차가운 코끝을 비비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어디냐?”
[카페. 한이 기다리고 있어.]
그저 집이 아닌 것 같아 던진 말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경쾌하게 이어지던 걸음이 우뚝 멎었다.
“뭐? 어디서.”
[오피스텔 건너편. 우리 전에 와 본 곳.]
“말을 하지. 좀 일찍 나왔을 텐데.”
멈췄던 발이 이전보다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강한은 흡사 훈련받던 시절처럼 필사적으로 근육을 썼다. 훅, 한순간에 거칠어진 호흡이 삐져나왔다.
[천천히 와, 괜찮아.]
“피곤할 텐데 뭐 하러 여기까지 왔냐…. 밥은 먹었어? 할머님은 별말씀 없으시고? 무이는?”
전혀 줄지 않은 속도를 숨기기 위해, 강한은 괜히 유일의 하루를 물었다. 대답을 듣는 동안에는 아예 보폭을 크게 넓혀 달렸다. 싸늘한 공기를 가르는 몸이 금세 달아올랐다.
[무이는 잘 놀고 집에. 영송이 형이 봐 주고 있어. 그리고 우리 할머니는 나 가면 한이 얘기밖에 안 해. 오늘도 왜 혼자 왔냐고 그러셨어.]
횡단보도 앞에 멈추어 선 강한은 열 오른 볼을 거칠게 문지르며 웃었다. 여전히 유일의 할머니를 대하는 것은 어려워, 민망하고 머쓱한 웃음이 나온다.
그의 조모는 이미 11년 전부터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첫 소속사와의 계약과 위약금 문제로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적어도 속이기는 싫었다고. 담백하고 평온하게 이야기하는 유일 앞에서 강한은 완전히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죄책과 걱정, 충격이 한 번에 몰려온 탓이었다. 제 모친보다도 30년가량 세월을 앞서 있는 그녀가 어떤 반응이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재앙 그 자체였다.
하지만 손자를 끔찍이 사랑하는 그녀는 단숨에 시점을 바꿔 받아들였다. 그녀가 생각하기로 남자를 사랑한다는 손자보다는 제 손자를 비정상 취급하는 세상이 문제였다. 물론 너무 미지의 영역인 탓에, 대뜸 ‘그래서 둘 중에 누가 여자가 될 거냐.’고 묻기는 했지만.
그런 그녀를 완전히 이해시키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그래서 강한은 유일과 그의 조모를 볼 때마다 조금쯤 희망을 얻었고 반면에 아주 쓸쓸해지기도 했다. 매번, 유일의 조모 이야기를 들을 적마다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저와 어머니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다가 거품처럼 사라졌다.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도 그 생각을 하면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오래 붙잡고 싶지 않은 고민이었다.
“다음에 한번 또 뵈러 가야겠다.”
강한은 부러 코를 킁킁거리며 불이 켜진 횡단보도를 건넜다. 잡생각을 지울 수 있을 만큼 빠르게 땅을 디뎠다.
[한아, 천천히 와도 돼. 서두르다가 다칠까 걱정돼.]
볼에 딱 붙인 차가운 기기 안에서 걱정이 흘러나왔다. 그 나긋하면서도 단호한 음성이 강한을 웃게 했다.
“거의 다 왔어.”
[나갈게.]
상가를 코앞에 두고 재차 신호가 걸렸다. 강한은 밭은 숨을 정돈하며 휴대폰을 문질러 넣었다. 노란 조명으로 아늑한 카페 안에서 한유일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한 손에 테이크아웃 잔을 들고 옅은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그는 익숙한 풍경에 낯설게 녹아들었다.
짧은 횡단보도는 금세 불을 바꿨다. 강한은 서둘러 유일에게로 다가갔다. 그 몇 걸음을 다 기다리지 못한 한유일도 두어 걸음을 성큼 좁혀, 손부터 쥐었다.
“춥지.”
그가 강한의 손에 쥐여 준 기다란 종이컵은 방금 나온 듯이 뜨끈했다. 손을 녹여 주려 일부러 사 온 모양이었다.
“곧 집인데 뭐.”
담담히 대답하면서도 강한은 커다란 두 손안에 컵을 감싸 쥐었다. 잔 안에 가득 차올라 찰랑거리는 온기가 좋았다.
“바쁘면서 먼 데까지 오고 그래. 어차피 나도 내일 바로 정원 올라가려고 했는데.”
적막한 밤거리를 나란히 거닐며 괜한 소리를 했다. 이런 비현실적인 행복에 익숙해지는 것이 생소한 본능의 발버둥이었다.
“보고 싶어서.”
하지만 유일은 무엇이든 사리는 법이 없었다. 어떤 꾸밈도 없이 직구로 꽂히는 고백은 강한을 옴짝달싹 못 하게끔 만들었다.
입을 꾹 다문 한이 조용히 잔을 옮겨 들었다. 비어 버린 손이 스르륵 내려가 유일의 손을 맞잡는다.
크음, 괜한 헛기침 뒤로 한유일은 나지막이 웃었다. 목을 울려 웃은 그가 엉성하게 잡힌 손을 더욱 깊이 얽었다. 싸늘하던 손끝이 서로의 손바닥을 긁고 문지르며 온기를 옮았다.
“이제 놔. 여기 CCTV 많아.”
어둑한 지상 주차장을 지나자 오피스텔 입구가 나왔다. 여태 걸어온 어두컴컴한 길과는 달리 불빛도 많고 카메라도 많은 곳이었다. 강한은 슬쩍 손가락을 비틀어 보았지만, 유일은 집요하게 깍지를 꼈다. 감미로운 목소리가 아이처럼 떼를 써 댔다.
“싫어요.”
억지 부리는 모습마저 귀엽게 보이면 심각한데. 강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괜스레 단호하게 일갈했다.
“너 그 불리할 때만 존대하는 것도 존나….”
그러나 냉정한 척 이어지던 말끝은 일찰나 뚝 잘려 버렸다. 제자리에 멈춰 선 강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피스텔 입구에 낯익은 여자가 서 있었다.
“…엄마.”
고등학생 이후로는 한 번도 그녀를 그렇게 불러 본 적 없었다. 저도 모르게 아이처럼, 혹은 친밀하게 그녀를 부르고 만 강한은 한 번 더 흠칫 놀랐다. 여태 고집을 부려 대던 유일이 슬며시 손을 놓은 탓이었다.
마주친 유일의 눈동자는 ‘괜찮아.’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강한의 미간이 아주 천천히 좁아 들며 인상이 쓰였다.
“카페에 찾아갔더니…, 이제 안 나온다고 하더라. 너 통화 중이래고……. 주소 알려 주길래.”
천천히 다가온 그녀는 그렇게 중얼대며 유일을 힐긋거렸다. 그가 무척 궁금하면서도 또 알고 싶지 않은 듯한 눈빛이었다. 한유일이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여 ‘안녕하세요.’ 인사했으나, 데면데면한 여자의 태도는 친절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강한은 자꾸 마음이 벅찼다.
그녀가 지난번에 한이 선물한 옷을 입고 있었다.
“네. 정원으로 이사 가요, 곧.”
강한은 대답하는 동시에 다시금 손을 내렸다. 어색하게 떨어져 선 유일을 당겨 손을 꾹 잡았다.
“…반찬이나 주려고 왔는데 괜히 했네, 그럼.”
“아니에요. 주세요.”
“가자마자 냉장고에 넣고.”
“네.”
그녀는 맞잡은 두 손을 못 본 것처럼 서둘러 이야기하고는 쇼핑백을 내밀었다. 노력이 무색하게, 손이 없는 강한 대신 유일이 반찬을 받아 들자 기류는 한층 더 어색해졌다.
“그리고 이거….”
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어색해하던 그녀가 강한의 윗옷 주머니에 무언가를 꽂아 넣었다. 얇고 딱딱한 사각 물체가 가볍게 안을 굴러 들어갔다.
“너, 빚진 거 없어.”
그 말에 강한은 보지 않고도 물건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거는……. 네 돈이야, 너, 아무한테도 빚진 적 없어.”
그녀는 금방 도망가고 싶은 사람처럼 발을 움찔거리며 말했다. 그러고는 정말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잠바, 예쁘긴 한데 좀 작아. 다음엔 한 치수 크게 사.”
그녀의 마지막 인사는 반쯤 강한을 지나쳐 가며 나왔다. 덕분에 대답할 때를 놓친 강한은 할 수 없이 멀어지는 뒷모습만을 바라보았다. 부끄럽다는 듯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그녀가 무척이나 다른 사람 같다가도, 정작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여자 같기도 했다.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다가도 그녀를 떠올리면 울적해지고는 했다. 그래도 강한은 제법 의연하게 생각했다. 인생에 완벽한 해피엔딩이란 없는 법. 그의 기준에 이 정도 일은 비극으로 칠 수도 없었다. 남들처럼 뺨을 맞거나 미친 취급을 받기는커녕 욕설 한마디 못 듣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괜찮았다.
은수와 현경, 상수에게 유일의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을 때도. 유일의 할머님을 만나 며느리 소리를 듣고 기함했을 때도. 오늘처럼 저도 모르게 한유일을 부러워할 때도.
강한은 자신이 아주 괜찮다고 여겼다.
그런데 삽시간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어둠 속으로 까맣게 사라진 그녀를 인지하자마자, 속 어딘가를 잘못 누른 것처럼 눈알이 익었다. 당혹스러운 울음이 아프게 목울대를 치고 올라 강한은 고개 숙였다. 유일을 은근히 등진 몸이 작아졌다.
“한이가 어머님 닮아서 예쁘구나.”
한유일은 굽어진 강한의 허리춤을 껴안았다. 손목에 건 쇼핑백이 한의 무릎 근처를 달랑거리며 치는 바람에 눈물은 사그라지지 못했다.
“지…랄…….”
치고 오르는 설움을 욱욱 누르며 강한은 주변을 살폈다. 조명이 훤한 입구에 기함한 그가 유일을 매단 채로 걷기 시작한다.
한유일은 그의 등에 얼굴을 묻으며 웃음을 참았다. 허엉, 엉, 아이처럼 울면서 제가 준 커피를 끝까지 놓지 않고 꿋꿋이 전진하는 그가 너무 귀여운 탓이었다.
“하, 씨…, 나 진짜, 윽, 잘 안 우는데…….”
자기 객관화가 전혀 되지 않은 중얼거림은 유일의 인내를 시험했다. 유일은 반쯤 벌어진 입술을 힘겹게 다물고 손가락이 자꾸만 헛도는 강한 대신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길로 집에 들어갈 때까지, 강한은 내내 그토록 드문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한유일은 덩치 큰 울보를 욕실로 끌어 얼굴을 닦아 주고 칫솔까지 물려 씻겼다. 과정마다 ‘내가 애냐.’ 하고 울컥 반문하면서도, 눈물에 젖은 강한은 금세 순해졌다. 종국에는 옷까지 갈아입혀져 침대에 누웠다.
그제야 자신도 잘 채비를 마친 유일이 옆자리를 채웠다. 아직도 훌쩍거리고 있는 한을 꼭 껴안아 토닥거리자, 품에 꽉 차 있던 그가 몸을 돌려 누웠다. 마주한 눈가가 무척 붉었다.
유일의 하얀 손은 조심스레 눈가를 매만졌다. 길고 날카로운 눈매가 바르르 떨리며 이내 순응하듯 감겼다. 도톰하게 오른 눈두덩이 키스를 바라는 것만 같았다.
충동을 참지 않고 입술을 내리자 강한은 간지럽다는 듯 목을 움츠렸다. 눈을 찌푸리며 뜬 그의 입가에는 웃음이 묻어 있었다.
“야.”
강한은 그렇게 달콤한 표정을 하고서 아주 무뚝뚝하게 유일을 불렀다. 유일은 답 없이 시선을 맞추며 뒷말을 종용했다.
어쩐지 벌써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게 평소보다 무심한 투를 고를 때에 강한은 도리어 더 간지러운 말을 하고는 했다.
“너, 나 언제부터 좋아했냐?”
역시나. 유일은 나지막이 웃었다.
“우리 같은 반 되기 전부터.”
앞뒤가 뚝 잘린 불친절한 물음에도 한유일은 상냥했다. 쉬운 이실직고에 강한의 기다란 눈이 가늘게 좁아 들었다.
“어? ……그 겨울 방학 때?”
“그것보다 더 먼저.”
상대를 가늠하던 눈이 이번에는 동그랗게 커졌다. 짚이는 구석을 찾아 도르르, 굴러 대는 눈동자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유일은 작게 웃으며 강한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매번 자신이 밀어붙이고 괴롭히던 몸에 착 감겨 눈을 감았다.
“아직 한이 태권도 하고 있을 때야. 음, 처음 본 건 매점에서. 한이가 새치기하려던 태권도부 애들을 말렸지.”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강한은 어렴풋한 기억을 길어 올렸다. 아주 오래전, 떠보듯 나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던 때. 그날도 유일은 비슷한 대답을 내놓았다. 같은 반이 되기 전에도 이미 자신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어투가 여상했다.
그때 강한은 심심하면 조회 시간에 불려 나가 상을 받는 학생이었다. 해서 유일이 자신을 이미 본 적 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때부터 혼자 짝사랑을 하고 있었다면 말이 달랐다.
“허…….”
충격에 눈과 입이 힘없이 벌어졌다. 제가 한유일을 모르던 때부터 이미 그가 자신을 짝사랑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가슴속이 뻐근했다.
“그때부터 한이가 궁금해져서 얼쩡댔는데 모르더라. 한이 친구들도 저 새끼가 자꾸 쳐다본다고 그럴 만큼이었는데, 한이는 끝까지 별 신경 안 썼어.”
“……내가? 아니, 너를 보고도?”
이 얼굴을 보고도 그럴 수 있나. 강한은 저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리며 유일의 얼굴을 꼼꼼하게 살폈다. 한유일은 바람처럼 웃음을 쏟았다.
“제일 많이 본 모습은 하얀 반팔에 파란 더플백. 되게 잘 어울렸어.”
“아, 어. 그 가방 되게 좋아했지.”
“그러다 한이가 갑자기 사라졌고, 한겨울 운동장에서 다시 만난 거야.”
처음에는 그저 감정이 고양되어 꺼낸 질문이었다. 딱 한 가지 마음에 걸리던 문제가 사라지니 완벽한 매듭을 지은 듯했고, 그러자니 시작이 궁금했을 뿐이다.
그런데 한유일의 시작은 생각보다 더 멀었다. 강한으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을 만큼 아득하게 멀고 깊어서, 문득 눈앞이 깜깜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한 사람만을 그렇게 오래 잊지 않고 좋아할 수 있을까? 정작 11년이나 유일을 잊지 못했던 자신도 확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는 사람들이 첫사랑이나 애인의 유무에 대해 물을 때마다 어물쩍 말을 흐렸다. 마음 한구석에 유일의 자리를 비워 놓고 살기야 했지만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저 미련이나 후회, 추억에 더 가까울 수도 있겠다고 방어적으로 생각했다. 11년이나 한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니. 입 밖으로 내어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영화 같고 비현실적이었으며, 다 감당할 자신이 없는 말이었다.
“같은 반 됐을 때는 운명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한유일은 비현실보다 더 낭만적으로 모든 감정을 받아들였다. 단 한 번을 숨지 않고 나아갔다.
“너는 내가 왜 좋냐.”
그쯤 되니 강한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진지하게 얼굴을 굳히고 던진 질문에 유일은 아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정답 있는 거야?”
“아니다, 헛소리야.”
말해 놓고 보니 감수성이 넘쳤던 것 같다.
“답은 뭐였는데?”
“…헛소리에 정답이 어디 있어. 그냥 지껄인 거지.”
강한은 말끝을 뭉그러트리며 품 안에 안긴 유일을 더 세게 껴안았다. 눈이라도 맞추려 들면 창피할 것 같아 미리 취하는 방어 자세였다.
“음…….”
유일의 침음이 길게 이어졌다. 강한은 얼른 대화 주제를 돌려 보려 했으나, 일순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였다. 말을 돌리자는 이성적인 자신과 ‘저 새끼 지금 이유 하나를 못 고르는 거야?’ 하며 욱한 본능적인 자신이 싸우고 있었다.
“글쎄, 좋아하는 이유…는 모르겠어. 그냥 이제 나한테는 한이 자체가 기준이야. 내가 누구를 좋아하고 말고 할 때.”
하지만 뒤이어 흘러나온 말은 욱했던 마음을 금세 가라앉혔다.
“기준점이 한이니까,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 이건 인과 관계가 뒤바뀐 것 같은데.”
그는 정답이 없던 질문에 정답을 만들어 냈다.
강한은 한숨을 내쉬며 유일을 속박하던 힘을 풀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고개가 들리며 강한을 바라본다. 촘촘히 수놓아진 속눈썹과 별이 박힌 듯한 눈동자를 가만 바라보던 한은 고개를 숙였다. 비스듬히 각도를 꺾어 내려가며, 자연스럽게 유일의 몸 위로 올라탔다.
“운명처럼 간지러운 말, 별로 믿지는 않는데…….”
입맞춤은 머쓱한 중얼거림과 함께 시작되었다. 유일의 예쁜 이마에서부터 코끝, 볼과 입술까지 자잘하고 얕은 키스가 이어졌다.
“맞는 것 같아.”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 <루나 더 퀸>인 사람치고는 무척 무뚝뚝한 고백이었으나, 한유일은 그것만으로도 기쁘게 웃었다. 어차피 더 많은 고백을 받아 낼 날이 무수히 많이 남아 있었다.
***
눈을 뜨기도 전에 미약한 전류가 정신을 일깨웠다. 강한은 감은 눈을 꿈틀거리며, 저릿한 손과 발끝을 움칠했다. 둔하고 미미하던 감각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어읏…….”
찌릿한 전류가 마지막으로 도달한 곳은 배 속이었다. 불씨를 품고 있는 듯이 홧홧한 감각에 강한은 눈을 번뜩 뜨며 뱃가죽을 매만졌다. 단단한 살갗 위에 타인의 온기가 만져진다. 유일의 팔뚝이었다.
강한은 작게 끙끙거리며 품을 벗어나려 애썼다. 부드러운 팔이 배를 감싸는 온기야 퍽 좋았지만, 그보다는 여전히 내벽을 꽉 채우고 있는 성기가 문제였다.
하지만 옆으로 누운 채 속박당한 자세로는 몰래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엉덩이를 슬슬 빼낼수록 성기에 빡빡하게 들러붙어 있던 내벽이 열을 올렸다. 이미 발기한 성기가 꺼덕거리기 시작했다.
잠든 한유일 몰래 좆을 빼내다 서 버리다니. 전혀 마뜩할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강한은 어느 틈에 안심했다. 지난밤의 걱정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안 그래도 한바탕 울어 젖힌 후의 몸이 지나치게 예민한 날이었다. 심지어 모든 불안이 사라져 버린 해방감으로 한층 더 고양된 강한은 모든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스스로 허리를 흔들고 다리를 벌리며, 구멍에 슬쩍 힘을 줘 보기도 했다. 그러한 노력이 한유일을 부추긴 탓에 섹스는 끝날 줄을 몰랐다. 묽은 정액을 토해 내던 성기가 결국 발기조차 하지 못할 만큼.
그런데도 몸을 꿰뚫는 쾌감은 사정감보다 짙었다. 사정하지 않고도 숨이 꺼떡꺼떡 넘어가는 쾌락 속에서 강한은 원초적인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나올 것 같았다. 성기는 완전히 단단해지지도 못했으니 정액일 리는 없었다. 이미 경험한 바 있는 극치감이 일었다. 그는 턱을 덜덜 떨며 유일을 밀치고 버텼으나, 몸을 섞을 때 한유일은 무자비한 사람이었다.
기어코 물 같은 무언가를 쏟아 낸 후에도 움직임은 멎지 않았다. 한유일은 재차 울기 시작한 강한을 어르고 달래 한 번 더 물을 쏟게끔 하더니, 새로운 이부자리를 펼쳤다. 보송한 이불 위에 누워 몸이 닦여지는 동안 강한은 반쯤 정신을 잃은 채였다. 이목구비를 다잡을 힘마저 떨어져 입을 헤벌린 채로 구멍에 힘을 주었다. 잔뜩 벌어진 곳이 자꾸만 벌름거려 일부러 닫아 주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도리어 힘을 주면 줄수록 안이 근질거렸다. 안을 빠듯하게 채워 주던 열기가 그리워 다시 성기를 물고 싶었다. 온몸이 감전된 것처럼 찌릿찌릿해, 더 이상의 자극이 무서운 상황 속에서도. 저도 모르게 칭얼거리는 신음이 흐르고 내벽이 빈속을 끊임없이 쥐어짜 댔다.
쉽게 기회를 놓치지 않는 유일이 다시금 삽입하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기억이 희미했다. 신음조차 내지 못한 채 그저 두려움과 환희에 젖어 있었다. 사정하지 않고도 죽을 것처럼 좋아서, 성기가 빠져나가는 감각이 몹시 아쉬워서. 환락과 동시에 몸이 영영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공포에 떨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고작 물고 있던 좆을 질금질금 뱉어 내는 움직임에도 성기에 반응이 왔다. 강한은 불안하면서도 안심한 모순적인 표정으로 찡긋거리며, 허벅지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후우……, 읏….”
골반을 슬슬 빼낼수록 내벽이 근질거렸다. 등골이 오싹하게끔 만드는 부근에 대고 허리를 흔들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양심이 찔렸다. 잠든 한유일을 억지로 범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어코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성기를 뱉어 낸 강한은 숨을 몰아쉬며 욕실로 향했다. 결국 수없이 많은 섹스에 기절하듯 잠들어 놓고도, 아침부터 제 성기를 쥐고 흔들어 대는 생경한 경험을 해야만 했다.
그는 연신 벌름거리는 구멍을 모르는 척하며 집을 정리했다. 푹 젖어 버린 침구를 세탁기에 쑤셔 넣고, 유통 기한이 남은 냉동식품을 선별했다. 다행히 식사가 될 만한 김치볶음밥이 있었다.
가열되기 시작한 김치볶음밥에서는 제법 매운 냄새가 났다. 지나친 체력 소모로 굶주린 배 속이 요동치게 하는 냄새였다. 어느덧 요리에 몰두하게 되었다.
“언제 일어났어?”
문득 아침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팔뚝이 강한의 허리에 감겨들었다.
“얼마 안 됐어. 야……. 옷은 좀 입고 나와.”
“다 봤으면서.”
“본 게 문제가 아니라 닿는다, 아침부터.”
대놓고 아래를 쿡쿡 찔러 대는 양감 탓에 간신히 잠재운 엉덩이 사이가 또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강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팔꿈치를 뒤로 밀었다. 슬슬 떠밀린 유일이 기분 좋은 웃음을 쏟아 내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옷을 입고 나오는 동안 강한은 ‘한유일이 매운 걸 못 먹으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다.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니면 아예 김치볶음밥을 싫어할 수도 있지 않은가. 뒤늦은 걱정에 모차렐라 치즈를 뿌려 넣고 보니, 이번에는 치즈를 못 먹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통 확실히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쌓인 세월은 무척이나 긴데, 정작 서로를 알아 간 날이 부족했다. 허탈하게 웃은 강한은 일단 볶아 낸 밥을 그릇에 옮겨 담았다. 벼르던 질문은 간단하게 씻고 옷을 입은 유일이 식탁에 앉자마자 쏟아졌다.
“김치볶음밥 괜찮아? 치즈는? 너 매운 거 별로 못 먹나.”
수저와 함께 놓인 질문 폭탄에 유일은 말간 눈을 깜빡거렸다.
“다 괜찮아.”
방금 씻고 나와 물기 어린 속눈썹을 비비적거리며 그가 웃었다. 아주 즐겁다는 듯한 표정 덕분에 강한 역시 괜한 생각을 멈췄다. 자칫 깊게 패일 뻔했던 홈이 너무도 쉽게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강한은 식탁 위에 턱을 괸 채로 유일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한유일과 같은 집에서 눈을 뜨고 아무렇지 않게 입술을 맞댈 수 있는 날은 감히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재회를 상상해 볼 때면 늘 입이 썼다. 고작 유일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따위가 고민이 되는 시나리오는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항상 그런 날들이 연속됐다. 어떤 관성처럼, 힘들고 아픈 상상은 너무도 쉬웠다. 무던히 야무지고 강단 있게 살아가려 노력하는 와중에도 손쉽게 일상을 흔들고 용기를 무너트렸다. 결국 중요한 순간마다 늘 도망과 회피를 선택하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고난을 두 번은 겪을 수 없겠다고 생각하던 순간들마저 희미해졌다. 이제 미화되고 축소된 과거가 모두 지금을 위한 발판처럼 느껴졌다.
“한유일.”
“응.”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강한은 숟가락도 들지 않은 채로, 유일과 눈을 맞췄다.
“우리가 이렇게 될 거라고 상상해 본 적 있어?”
낮은 물음에 유일도 식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조금 전보다 더 길게 미소 지으며, 아주 확실한 답을 내놓았다.
“응, 매일.”
앞으로도 강한은 버릇처럼, 나쁜 상상과 도망을 불쑥 떠올릴지 몰랐다. 그러나 유일의 미소 앞에서 그는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자신이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순간을 매일 그려 온 사람과 함께이니까. 그래서 강한은 용기를 내기로 했다.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루나처럼.
“유일아, 우리 같이 살자.”
한유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