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5-2 그럼에도
강한은 아주 느리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제 막 동이 텄는지 방 안은 오묘한 빛으로 차오르는 중이었다. 부신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침대 끝자락으로 옮겨 간 그가 발을 내린다. 차가운 마룻바닥에 발바닥이 닿자, 전류를 닮은 통증이 지르르 올랐다. 발끝에서부터 타고 오른 소름이 단숨에 척추 언저리까지 올랐다.
본능적으로 뻐근한 골반에 손이 갔다. 몇 시간 내내 벌어져 다물리지 않을 듯했던 몸은 후유증에 잠식되어 있었다.
“아으…….”
앓는 소리를 내며 한은 아주 느리게 일어섰다. 간밤에 전투 비슷한 섹스를 견뎌 낸 침대는 습했고, 더는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확실히 일어나 내려다본 매트리스는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시트는 아무렇게나 벗겨져 반만 걸쳐져 흐트러졌고 이불도 이미 바닥에 떨어진 채였다. 게다가 매트 한구석은 얻어맞은 것처럼 푹 꺼져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더 충격적인 것은 따로 있었다.
“미친…….”
강한은 아득히 속삭이며 한유일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옆으로 누워 고요히 잠들어 있는 그의 맨몸을.
조각해 놓은 듯 잘 짜인 유일의 몸에는 온갖 상흔이 남아 있었다. 마치 어젯밤 일의 지도를 그려 놓은 듯, 붉은 손자국이 상박과 옆구리에 수두룩했다. 심지어는 벌써부터 빛깔을 달리하기 시작한 멍 자국도 여럿이었다. 대다수 허리와 허벅지 언저리쯤이었는데 그 원인을 골몰해 보던 강한은 사색이 되었다.
지난밤 기어코 욕실까지 따라 들어온 유일과 한바탕 전쟁을 치렀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물기를 다 닦지도 못하고 나온 침대에서 또 한 번. 도저히 지칠 줄을 모르는 유일 때문에 한은 난생처음 겪는 수많은 감각들과 싸워야만 했다.
무척이나 두렵고 또 심각할 만큼 좋았다. 혼잡한 감정의 홍수 속에서 강한은 유일을 마구 당겼다가 밀어내고 재차 더 강하게 움직이기를 종용하며 변덕을 부렸다. 다리로 얽어 당겼다가도 발길질을 하고, 스스로 내뻗은 다리에 놀라 움찔 굳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러니까 허리와 허벅지에 생긴 멍 자국은 아무래도 당기는 힘 때문에 생긴 듯했다. 그렇게나 세게 당겼었나. 강한은 붉어진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며, 한유일이 넣게 해 주기를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으음.”
우두커니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음침한 기운을 느낀 탓인지 유일이 눈가를 찌푸렸다. 금세 일어날 듯한 기색에 허둥지둥하던 한은 얼른 수건을 집어 들었다.
“어, 깼냐?”
이제 막 일어나 씻으러 가려던 참이야. 그런 말을 뒤에 붙이면 완벽할 만한 자세로, 강한은 무덤덤하게 물었다.
한유일은 눈살을 찌푸리며 가늘게 떴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어떤 점이 웃긴지 설명도 하지 않은 채, 한쪽 눈을 비비적거리며 웃은 그가 팔을 뻗었다. 어린아이의 잠투정처럼 무해한 포옹 요청이다.
강한은 무척 기가 막혔지만 지난밤 얽혀 있던 수많은 자세를 생각해 보면 포옹쯤은 거절할 명분도 없는 것이었다. 결국 찜찜한 낯으로 침대 위를 오른다. 한쪽 무릎으로만 매트를 짚고 엉거주춤 상체를 숙이자, 유일은 한 팔로 등을 감아 왔다.
“잘 잤어?”
자상하게 물은 그가 어깨 언저리에 입술을 꾹 눌렀다. 지나치게 간지러운 인사에 우물쭈물하기도 잠시. 일순 아래를 툭 치는 손길에 깜짝 놀란 한이 떨어져 나갔다.
순식간에 침대 바깥에 선 강한은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제 사타구니와 유일을 번갈아 보았다.
“뭐 하는 거야?”
“아침부터 잘생겨 보여서 인사했어.”
또라이, 또라이 하니까 진짜 또라이가 됐나……. 강한은 별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얼굴로 허탈한 웃음을 쏟다가 얼른 수건을 내렸다. 이미 볼 만큼 본 사이지만 강한은 꼭두새벽부터 서로의 성기를 마주하며 인사할 만큼 개방적인 성격은 되지 못했다.
수건으로 아래를 가린 채 멀뚱히 서 있자니 급작스러운 현실감이 몰려들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와 밤을 보낸 이후에 어떤 말과 행동을 해야 하는지 한에게는 아무런 지식이 없었다.
“아무튼, 나 먼저 씻는다. 곧 출근이라……. 너도 촬영 있다며.”
아무렇게나 떠오른 말을 뱉어 내며 강한은 얼른 뒤를 돌았다. 욕실로 서둘러 가는 길 내내, 엉덩이가 따끔한 기분이 들었다.
엉망이 된 욕실을 정리하며 씻느라 샤워는 평소보다 길었다. 강한은 선반이 왜 떨어졌는지, 린스 통은 어째서 나뒹굴고 있는지를 길게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부지런히 씻고 나왔다. 침 범벅이 되었던 몸을 씻고 나오니 그래도 제법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새 다시 잠들어 있는 한유일 때문에 드라이어는 켜지 않았다. 대충 수건으로만 머리를 털어 말린 강한은 연한 하늘색 셔츠와 청바지를 꺼내 입었다. 그러고도 유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괜히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한유일에게 먹고 가라며 내어 줄 만한 음식이 있을까 싶었지만 텅 빈 냉장고에 멀쩡한 식품은 우유뿐이었다.
유리잔에 우유를 따라 그 위에 접시를 포개어 두었다. 출근 시간이 임박해 있었다.
“야, 한유일.”
“으음.”
“더 자고 갈 거면 저기 우유나 좀 마시고…….”
“으응. 한이 가?”
“어.”
여전히 전라 상태로 부끄럽지도 않은지 유일은 무구한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하암, 쏟아진 하품조차도 어디 CF에서나 보던 식으로 어여뻤다.
스스로의 생각에 기가 막힌 강한은 헛웃음을 치며 얼른 신발을 신었다. 하얗고 울긋불긋한 등을 훤히 내놓은 채 엎드린 유일이 고개를 받친다. 갸름한 턱선 아래에서부터 기다란 손가락들이 감겨, 안 그래도 작은 얼굴이 손바닥만 했다.
“다녀와. 전화할게.”
잠이 가득 묻어 평소보다 더 뽀얀 얼굴로 유일이 웃었다. 마치 한창 연애 중인 커플들이나 나눌 대화 같아, 강한은 움찔 굳었다.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한 그의 눈썹이 이리저리 꿈틀거리다 멎는다.
“그러든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
서로가 서로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안다. 게다가 섹스까지 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사귀는 것일까?
강한은 종일 골몰했으나 어떤 대답도 내놓지 못했다. 사귄다니. 그런 대단한 결말을 생각하고 벌인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무척이나 화가 났고, 충동적이었으며, 누군가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다. 복수의 대상이 자신인지 아니면 범철이나 치언 같은 놈들인지조차 몰랐다. 머릿속에는 그저 ‘왜 우리는 그러면 안 되는데.’ 하는 울분이 차 있었을 뿐이다.
수년을 금기시했던 선을 넘었다.
그럼에도 세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강한은 평소처럼 출근해서 일을 했고, 날씨는 여전히 후덥지근했으며, 유일에게서는 시답지 않은 메시지가 몇 개 도착했다. 우유를 다 마시고 깨끗하게 닦아 놓은 유리잔과 한구석에 모아 정리해 둔 이삿짐 박스 사진을 포함해서.
이따금 뻐근하게 올라오는 근육통이 아니라면 지난밤 일이 다 꿈이라 착각할 만큼 평범한 날이었다. 강한은 꽤나 못마땅한 표정으로 액정 위를 두드렸다.
「촬영 잘 해라.」
은근히 대화를 끝마치는 기술은 고의였다. 그런데 유일은 기다렸다는 듯 읽더니, 곧장 사진 하나를 더 보내왔다. 이번에는 밴 안에서 찍은 유일의 얼굴이 화면 가득 찼다.
「응, 이건 나 보고 싶을 때 봐.」
바란 적도 없는 사진을 보내면서 뻔뻔하기도 했다. 강한은 헛웃음을 쏟고 누가 볼세라 얼른 핸드폰을 잠재웠다. 그랬다가 어이가 없어서 다시 한번 눌러 보았다. 참 나, 누가 보내라고 했나?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자기 사진이 수두룩하게 나오는데 뭐 하러? 툴툴거리며 재차 전원 버튼을 누르던 때였다.
“이보시오, 강한 점장님.”
“아, 깜짝이야…. 뭐예요.”
음험하게 목소리를 내린 공은수가 어느덧 코앞에 있었다. 제 이마에 머리를 박기라도 할 것처럼 성큼 다가와 있는 그녀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던 강한은 뒤늦게야 한 걸음 물러나 섰다. 그에 은수가 한숨을 내쉰다. 그녀가 잘게 고개를 저을 때마다 높게 묶은 기다란 머리가 말 꼬리처럼 살랑거렸다.
보통 공은수가 이렇게 아무 기별도 없이 찾아올 때는 ‘같이 담배나 한 대 필까?’처럼 시답잖은 목적이 전부였다. 그랬기에 강한은 별다른 긴장도 없이 물었다.
“어쩐 일이세요.”
“강한 너랑 얘기 좀 하려고.”
바 테이블에 느슨하게 몸을 기댄 그녀는 카페를 휘둘러보았다.
“예?”
“현경이는 언제 오니?”
평소보다 조금 더 붐비는 가게를 살피던 그녀는 카운터 봐줄 사람까지 챙겨 물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간단한 용무가 아닌 듯하다. 강한은 의아하게 고개를 틀다가 출입구 너머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오네요.”
“쟤도 양반은 못 되나 보다….”
은수는 피식피식 웃으며 어깨를 툭 쳤다.
“나 먼저 나가 있을 테니까, 현경이한테 넘기고 바로 나와. 잠깐이면 돼.”
장난스럽게 마무리한 그녀가 먼저 입구로 향했다. 중간에 현경에게 붙잡혀 잠시 높은 데시벨의 어떤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은수는 곧 가게를 빠져나갔다. 강한은 찜찜한 얼굴로 현경이 환복하기를 기다렸다가 혹시 몰라 담배를 챙겨 나섰다.
그녀는 카페 건물 끝자락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셔츠와 슬랙스 차림으로 제법 단정하게 차려입은 태가 아니라면 수상한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을 만큼 어색하게 화단을 기웃거리던 은수가 손을 들었다. 여어, 이상한 소리를 내는 그녀에게 강한은 천천히 다가갔다.
가까워지기 무섭게 그녀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공은수는 건물을 빙 돌아 뒤편에 있는 자그마한 뜰로 한을 유인했다. 그러고는 자그마한 동네 커피숍에서 음료를 시켰다. 카페에서 일하다 말고 느닷없이 남의 카페테라스 자리에 앉게 된 강한은 어안이 벙벙했다.
“뭡니까…….”
앞치마까지 아직 걸치고 있는데. 한은 뚱하게 중얼거리며 제 데님 앞치마를 툭 쳤다. 은수가 하하 웃으며 아메리카노를 내밀었다.
“여기 커피 괜찮아.”
어색하게 웃는 그녀를 보는 순간, 강한은 체념에 가까운 숨을 내쉬었다. 필시 무슨 일이 있는 게 뻔했다.
“그냥 바로 말씀하시죠. 무슨 일이에요?”
2호점 영업에 문제가 생겼나? 아니면 혹시 치언이 사고라도 친 건가. 수많은 상상이 종일 머릿속에 점철되어 있던 유일의 생각을 밀어내던 중이었다.
“그……. 어제 배우님 목격담 사진 올라왔어.”
썰물처럼 빠져나가던 유일의 이름이 다시금 한에게로 몰아닥쳤다. ‘목격담?’ 의아하게 중얼거리자 은수는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보여 주었다.
“이거. 우리 가게지?”
사진 속에는 현경에게 무언가를 건네주고 또 음료를 받아 가는 유일의 사진이 주르르 나열되어 있었다. 딱 붙는 운동복 차림에 검은 볼캡을 눌러쓴 모습이 평소 그와는 무척 달랐으나, 남다른 이목구비가 멀리서도 또렷했다. 강한은 잠시 말을 잃었다.
조만간 사장에게도 설명을 해야 하는 날이 오리라고는 각오했다. 어떤 식으로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지, 저도 한유일이 짜 놓은 대본과 똑같은 말을 해야 할지. 그런 것들을 고민하느라 조금 주춤했을 뿐 분명히 제 입으로 말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유일의 돌발 행동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주말 대낮부터 카페에 직접 올 줄은, 심지어는 그날 사진이 바로 당일부터 인터넷에 일파만파 퍼질 줄은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다.
강한은 무척 난감한 얼굴로 은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과 무척 비슷한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물고 있었다.
“맞아요.”
걱정 가득한 그녀의 속을 더 태우지 않기 위해 일단 먼저 답을 내놓았다. 그러고는 잠시 유일의 변명을 생각해 보았다. 갑작스레 현경에게 들켰던 그날 한유일이 내뱉은 변명을 저도 장단은 맞춰 줘야 할 듯했다.
-플래시몹이라고 요즘도 그런 말 아나요? 아하하, 모르시는구나. 아무튼 그걸 하다가 좀 가까워졌는데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어요. 형이 저를 별로 안 좋아했거든요.
-형이 고등학생 때 얘기를 안 한 이유는 아마……. 아무 사이 아니라서?
하지만 떠오른 문장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강한은 한참 말을 고르다가, 아주 낮고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사실 한유일이랑 고등학교 동창이었어요. 일부러 속였던 건 아니고. 그랬던 적 없는 듯이 살 생각이었으니까 그래서 입 닫고 있던 건데……. 최근에는….”
어떻게 말해야 유일에게 폐가 가지 않을까 고민하느라 말끝이 느려진다.
공은수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약간의 불안과 아주 많은 걱정 그리고 호기심을 안은 채 기다릴 뿐이었다. 그 진지한 얼굴을 보자 강한은 그녀를 의심해야 하는 수많은 상황들을 뒤로 밀어 두었다.
“그럴 수가 없게 됐어요. 더 이상 걔를 모르는 척할 수가 없는…. 일들이 생겨서.”
베일에 싸인 듯 흐리멍덩한 설명이었다. 하지만 은수는 수긍했다. 매일 짓궂게 놀리던 표정을 지운 채 그녀가 핸드폰 액정을 눌렀다.
“내가 배우님 팬이 됐다고 했을 때, 둘이 아는 사이라고 말 안 한 건 이해해. 아니지, 오히려 고마워. 애초에 맨 처음, 내 입덕 공연 티켓도 네가 줬던 거잖아. 갑자기 생겼다고 변명하더니……. 어떻게 표가 생겼던 건지 대충 알겠네.”
은수가 유일을 좋아하는 방식은 몇 년을 지켜보아도 다 이해할 수 없는 형태였다. 그렇기에 강한은 그녀의 곁에 오래 머무를 수 있었다. 한유일 이야기를 수천 번씩 들어도 그녀를 미워할 만한 일이 생기지 않았다.
“사실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적 있어.”
공은수는 핸드폰을 잠재워 놓은 채 의자에 등을 기댔다.
“너 우리 카페 처음 온 날 엄청 울었잖아. 살구 에이드 마시면서……. 그거 완전 실패한 메뉴였는데, 너 때문에 계속 팔까 싶었을 정도야. 근데 직원 되고 나서 그 메뉴 없애자고 한 것도 너였지.”
그녀가 다리를 꼬아 올리며 허벅지 위로 손깍지를 꼈다. 손끝이 하얗게 질리도록 힘을 준 은수는 이내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근데 그게 흔한 메뉴는 아니잖아. 살구 에이드. 정말 흔하지 않은 메뉴인데……. 배우님이 인터뷰마다 꼭, 살구 에이드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거든.”
강한은 천천히 시선을 떨어트렸다. 눈을 빠르게 깜빡여 습기를 쫓아내며, 그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이상하네요.”
“그치, 이상하더라고. 사소한 거지만 그냥……. 정말 이상하더라고.”
은수는 화를 내거나 꼬치꼬치 캐묻는 대신 그렇게만 말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녀의 얼굴에는 분노나 호기심보다는 큰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근데 강한아. 나는 아무리 그래도 네가 더 소중하다? 그때 나는 코 질질 흘리면서 울던 네가 꼭 행복해졌으면 했거든.”
“아, 또 무슨 코를 질질 흘렸다고…….”
강한은 툴툴거리며 일어서 은수를 따라 걸었다. 다시 카페 건물을 빙 돌아, 골목의 작은 흡연 구역에 선 그녀는 음료수를 내려놓았다. 한은 그제야 첫 모금을 들이켰다.
“목격담 올라온 이후로 팬들이 우리 카페 오겠다고들 난리야. 생일 카페 이벤트를 하고 싶다고 전화도 몇 번 왔어.”
“…예.”
“아마 앞으로 피곤해질 거야.”
그 말이 끝이었다. 은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담배를 물었고, 태연하게 라이터를 찾았다. 강한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녀에게 먼저 불을 붙여 준 뒤에 제 담배를 물었다.
그저 뜬구름 잡듯이 ‘사귀게 되나?’ 하고 생각하던 강한에게는 돌연 어떤 현실이 들이닥친 기분이었다. 그동안 막연히 한유일을 밀어낼 핑계로 삼았던 것들보다 더 구체적인 형체가 눈앞에 성큼 다가왔다. 괜스레 천만 원이 떠오르는 날이었다.
***
공은수의 경고처럼 강한의 일상은 피로와 한 발자국 더 가까워졌다.
그 목격담이라는 글이 올라온 이후로는 평일 대낮에도 손님이 마구 몰려들었다. 주로 여성 고객들이었으며 그들의 테이블에는 제법 자주 한유일 사진이 놓였다. 이따금 현경은 그런 고객들에게 제 사비로 쿠키를 하나 더 얹어 주고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었다. 그녀는 근무의 질이 올라갔다고 말했지만, 강한으로서는 정반대 상황이었다.
한유일과 그렇고 그런 시간을 보낸 지 사흘째. 아직도 이렇다 할 관계 정립이 없는 상태.
강한은 유일이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몹시 궁금했다. 그렇게 매달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는 다 잡은 고기라는 건지. 아니면 정말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기 위해 접근했던 건지.
그렇게 영양가 없는 삽질을 하고 있으면, 유일은 증명하듯 메시지를 보내고 영상 통화를 걸었다. 겨우 사흘 동안 그에게서 받은 사진만 해도 수십 장이 넘었다.
‘이건 누가 봐도 사귀는 사이 아닌가?’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지만 차마 묻지도 못했다. 제 마음 하나도 정확하게 매듭짓지 못한 채로 도대체 한유일의 생각을 알아서 뭐 하겠다는 말인가. 근래 한에게는 자기 자신이 가장 큰 복병이었다.
“근데 이번 영화에 키스 신 있을까요?”
“있겠죠? 로맨스니까…. 무무 님, 키스 신 못 보시는구나?”
“아! 저는 진짜 못 보겠더라고요!”
“저는 주호 님 좋아할 때 키스 신 있으면 망원경으로 더 자세히 보고 그랬는데…….”
“아악! 뭐예요!”
급작스럽게 터진 괴성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앗, 죄송합니다.’ 예의 바른 사과로 대부분 시선들은 흩어졌지만, 카운터 내부에서 멍하게 관망하던 강한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홀린 것처럼 손님들의 대화에 빠져들었다.
“아니, 유일 배우님도 키스 신은 아니지만, 데뷔 초에 하셨던 그 <푸른 유리>에서요. 진짜 베드 신이 진했거든요? 여주인공이 셔츠 헤집고 그러는데, 망원경으로 보니까 속살이 너무 하얗고 조명 받아서 막….”
강한은 순식간에 못마땅하게 변한 표정으로 그들의 테이블 위를 훑어보았다. 카페 트레이드마크인 치즈 케이크 앞에 사각 포토카드가 놓여 있었다. 카드 속 주인공은 당연히 한유일이었으며, 어떤 뮤지컬 속의 복장인 듯한 제복을 입은 채 아주 진지한 얼굴이었다. 한은 음식 앞에 사진을 놓아둔 행태가 너무나 제사상 같다며 괜히 폄하하다가, 일순 손님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내가 진짜 미쳤나 보다.’
한숨을 푹 내쉬며 그는 담배를 들었다. 옆에서 함께 그 테이블의 대화를 듣고 쿡쿡 웃던 현경이 ‘또 가요?’ 하고 물었다. 근래 점장님 담배가 너무 늘었다며 타박하는 소리에 강한은 성의 없는 사과 몇 개를 늘어놓고 나왔다.
심란한 기분으로 담배를 물었을 때 한유일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번 역시 허락도 받지 않고 보내는 제 사진이었다.
사진 속 한유일은 조금 피곤한 얼굴로 밴 안에 반쯤 누워 있었다. 그의 연한 베이지색 셔츠 위 한가운데에는 무이가 올라가 누웠다. 배에서부터 가슴팍까지 편안하게 기대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자태가 아무래도 잠든 모양이다. 유일은 그런 무이가 아주 귀엽다는 듯 웃는 표정으로 사진을 찍어 보냈다. 심란하던 강한의 마음이 단박에 사르르 녹았다가, 딱 두 배 더 우중충하게 변해 돌아왔다.
무성의하게 부싯돌을 탁탁 부딪혀 불을 피워 낸 한은 일단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았다. 그러고는 후우욱, 내뱉는 숨에 짜증이 가득 묻어 있었다.
며칠 내내 제 비위 맞추기가 가장 어려운 날들을 보냈다. 한유일이 연락을 해도 문제였고, 안 하면 안 해서 기분이 나빴다. 지나치게 잘나서 고민의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보내면 보내는 대로 곤욕이었고 안 보내면 또 그대로 기분이 상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강한의 마음은 멋대로 솟구쳤다가 땅바닥에 처박히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요란스러운 감정 변화는 사춘기 때도 겪어 본 바가 없었다.
타는 속 덕분에 담배는 금세 단초가 되었다. 벽에 튕겨 불씨를 털어 낸 강한은 재떨이 안으로 꽁초를 쑤셔 넣고, 터덜터덜 걸었다. 담배 냄새를 지우기 위해 셔츠를 펄럭거리는 틈으로 더운 바람이 훅훅 끼쳤다.
가게에 들어가서 손을 씻고 유일에게 답장을 보내야겠다. 이삿날이 코앞이니 이제 곧 무이를 데려올 수 있다고. 그리고 그 문제가 해결되면 우리 사이에는 그 어떤 의무적인 만남도 사라지게 되니까…….
어두운 낯으로 고민하던 강한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멀리 대각선 방향으로, 어떤 인영이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가까워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한아.”
눈앞에는 방금까지 밴 안에 있는 사진을 보냈던 유일이 서 있었다.
강한은 커다래진 눈으로 유일을 보다가, 얼른 카페를 돌아보았다. 외부가 잘 보이도록 뻥 뚫린 외관 탓에 한유일이 가까워지면 가게에도 소란이 일어날 듯했다. 미간을 확 좁힌 강한이 얼른 그에게 걸어갔다. 반갑게 웃는 그를 낚아채 으슥한 골목으로 집어넣자, 유일은 설렌다는 듯 웃었다.
“음, 뭐야? 서프라이즈?”
뽀뽀라도 바라는 듯 스윽 가까워지는 하얀 얼굴이 지나치게 뻔뻔했다. 강한은 기함하여 그 작은 낯을 밀어내고 소리쳤다.
“무슨 헛소리야. 야, 너는 뭔 연예인이 매니저도 없이 막 다녀. 어? 그리고 말도 없이 카페에 막 오면 어떡하냐? 너 온 뒤로 우리 카페 난리도 아닌데.”
“매니저 형은 저기.”
가만히 듣고만 서 있던 유일은 순순히 대답하며 골목 바깥의 차도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제 얼굴을 밀어냈던 손을 잡았다. 기다란 손이 두터운 손가락 사이사이에 깍지를 끼며 얽혔다.
“나 때문에 바빠졌어? 미안.”
일부러 몸을 기울여 눈높이를 낮춘 유일이 한을 올려다본다. 그는 깍지 낀 손가락으로 손등을 살살 문질러 대는 움직임만큼이나 은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 지금 수작 부리냐?”
“응.”
말문이 탁 막힌 강한은 한동안 침묵했다. 하, 참, 거, 같은 말들이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수작을 몇 년째 부렸는데 여태 몰랐어?”
깍지 낀 손을 달랑달랑 흔들어 대는 유일의 뒤로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덕분에 강한은 혼미해질 뻔했던 정신을 확 다잡고 손을 털어 냈다.
“가 봐, 바쁜 것 같은데. 다음엔 올 거면 얘기 좀 하고.”
강한은 자꾸만 떨리려는 목소리 끝을 간신히 가다듬었다. 가까스로 무뚝뚝한 표정마저 지어냈으나, 유일은 무척 기분 좋은 말이라도 들은 듯 눈을 휘었다.
“얘기만 하면 또 와도 돼?”
고작 이 정도 허락이 뭐라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미소가 강한을 씁쓸하게 했다. 저절로 누그러진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뭐, 손님 없을 때.”
그쯤 클랙슨이 한 번 더 울렸다. 짧았던 첫 경적보다는 길어진 음이었다. 그에 한이 먼저 골목을 나섰다.
“근데 뭐 볼일 있어서 온 거 아니야? 커피 필요해서 온 거면 가져다주고.”
“볼일 다 봤어. 한이 봤잖아.”
“…뭐?”
“보고 싶어서 잠깐 들렀어.”
차도를 향해 앞장서던 발이 우뚝 멈췄다. 하얀 밴이 코앞에 있는데, 도저히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다. 고개를 숙이고 걸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결국 이번 역시 그의 선택은 도망이 되었다.
“그래, 봤음 됐네.”
무뚝뚝하게 대답한 강한은 얼른 발을 물렀다. 휙 돌아서 인사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달려 나갔다. ‘난 일하다 나와서 먼저 간다.’ 하고 그럴듯한 변명을 떠올리기는 했지만 뱉지 못했다. 온 정신이 자꾸 씰룩씰룩 올라가는 입꼬리에 가 있었다. 행여 들킬세라, 서둘러 카페로 향하던 발걸음은 입구 앞에 우뚝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중요한 일들은 하나도 말하지 못했다.
몸을 섞은 후의 관계 정립이야 저 자신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으니 차치하고서라도, 이사 문제나 무이를 데려오는 일은 꼭 나눠야 할 대화였다. 그런데 대화는커녕 뭐에 홀린 듯 얼굴 감상만 하다 돌아서고 말았다.
설상가상, 카페 꼴도 말이 아니었다. 맥 빠진 얼굴로 서 있던 한의 시야에 이제야 현경이 들어왔다. 꽤 오랜 시간 홀로 카운터를 지킨 그녀는 울상을 지은 채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휘적휘적 저어 대는 팔이 안쓰러워, 강한은 얼른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그 잠깐 사이 인산인해를 이룬 카페가 온통 시끌벅적했다.
기함한 채 현경에게 다가간 강한은 팔뚝을 몇 대 얻어맞았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기에 메뉴를 만드는 내내 한의 입술은 연신 사과를 뱉어 내야 했다. 민망하고 황당한 기색이 얼굴을 잔뜩 물들였다.
평소였다면 상상도 하지 못할 상황이다. 업무 시간 내에는 웬만하면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 강한의 방식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한유일 생각에 담배를 태우러 나간 것만 두세 번에, 그를 마주쳐 뺏긴 시간도 십오 분을 넘겼다.
“현경아, 오늘 한 시간 일찍 들어가.”
강한은 카운터 구석 의자에 현경을 앉혀 놓고, 얼른 샷을 내렸다.
“어유, 됐어요.”
“미안해서 그래.”
“점장님, 진짜 미안한 거 맞아요? 계속 웃으시면서!”
눈을 세모로 뜬 현경이 손가락질을 했다. 강한은 ‘내가?’ 하고 입 모양으로만 물으며 제 얼굴을 비쳐 보았다. 커피 머신 상단의 반짝반짝한 스테인리스에 익숙한 낯이 맺혔다. 웃는 표정이라기에는 다소 기괴한 얼굴이었다.
눈은 당황을 담은 채 흔들거리며, 입술은 웃는 듯 우는 듯 이상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애매하기는 했지만 방금까지 웃고 있던 얼굴이 삽시간에 빛깔을 달리한 듯한 모습이었다.
강한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루 종일 자신은 그야말로 사랑을 처음 안 얼뜨기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미안하다, 현경아. 점장님 요즘 사춘기 오나 보다.”
“뭐예요, 다 커 가지고 징그럽게!”
“그러니까.”
쉽게 수긍한 강한은 새로 만든 음료를 쟁반에 올렸다. 내내 기쁨과 우울을 멋대로 왕복하며 정신 사납게 굴던 기분이 그새 놀라울 만큼 침착해져 있었다. 이상하게도 한유일을 만나고 온 그 시점부터였다.
강한은 괜찮다는 현경을 한 시간 일찍 보내고 혼자서 카페를 정돈했다. 평소보다 손님이 훨씬 많았던 탓에 마감 시간이 두 배로 늘어났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문을 열었다. 묵직한 유리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걸기 직전, 그 찰나를 이용해 핸드폰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근무 내내 한유일이 드문드문 보내 놓았던 메시지와 사진을 한 번 더 읽고, 괜히 ‘참 나.’ 하고 중얼거린 강한은 재차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다. 가사도 불분명한 멜로디 속에 철컥, 문 잠기는 소리가 났다.
“오늘은 더 늦게 끝났네.”
“아 씨, 깜짝이야.”
문을 한 번 흔들어 보고 뒤돌기 무섭게, 예상치 못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그제야 어둑한 벤치에 그림자처럼 앉아 있던 남자가 눈에 들었다. 이번에도 한유일이었다.
사람들 눈길을 좀 신경 쓰라는 말 때문이었는지 검은 볼캡을 꾹 눌러쓴 그는 다소 수상해 보였다. 그 덕에 두 배로 놀란 강한은 본능적으로 쥐었던 주먹에 슬며시 힘을 풀었다.
“아, 존나 놀랐……. 너 뭐야. 왜 또 왔어.”
강한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동그랗게 커진 눈 그대로 따져 물었다. 방금까지 콧노래를 흥얼거리게 만들었던 장본인이 이제는 원수처럼 보였다.
“무이랑 산책도 할 겸.”
유일은 아주 느긋하게 웃으며 턱짓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그의 발치에 하얀 털 뭉치가 살랑거리고 있었다. 민들레 같은 뒷모습에 벌렁거리던 심장이 녹아들었다.
강한은 따져 대던 것도 잊고 얼른 무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뒤돌아 잔디를 뜯고 킁킁거리던 무이는 뒤늦게 한을 알아챘다. 꼬리가 떨어져라 흔들며 덤벼드는 모습에 강한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산책도 할 겸?”
그는 한참 무이와 손장난을 치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겸’이라 하면 다른 볼일이 또 있다는 말이었다. 뒤늦은 물음에도 한유일은 쉽게 알아채며 웃었다. 여전히 벤치에 앉은 채 느른하게 내려다보던 눈이 보기 좋게 휘었다.
“한이랑 데이트하러.”
한유일은 하루에도 수십 번 메시지를 보내고 바란 적도 없는 사진을 첨부했다. 그것도 모자라 낮에는 고작 얼굴만 보러 들렀고, 오밤중에는 없는 시간을 쪼개 다시금 찾아왔다. ‘데이트’라는 직설적인 단어를 선택하면서.
강한은 큼큼 헛기침을 했다. 무이 털이 들어간 건지, 민들레 홀씨가 속을 날아다니는 듯한 간질거림이 느껴졌다.
“뭐래……. 그, 무이 산책은 해야 하니까 공원이나 좀 걷자.”
“응. 나 간 뒤에도 일 바빴어?”
“어, 너 때문에.”
강한이 흐지부지 말을 흐리며 일어서자 유일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받았다. 리드 줄을 부드럽게 당기며 유일이 먼저 앞장을 섰다.
카페에서 공원까지는 십 분 남짓 걸렸다. 늦은 밤의 주택가와 대로변은 고요했고, 두 사람은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며 걸었다. 이따금 무이가 냄새를 맡고 마킹을 하느라 멈추어 서면 강한과 유일의 발도 멎었다. 깜깜한 여름밤의 길에 우뚝 선 채, 같은 것을 기다리는 시간이 다소 꿈결 같았다.
마침내 도착한 공원에서 유일과 한은 공원의 커다란 트랙을 돌았다. 푹신한 바닥이 깔려 있는 원형 트랙이었다. 무이는 한동안 낯선 것을 두려워하듯 머뭇거리다가 이내 더욱 신이 나서 킁킁거렸다.
“목요일에 이사야. 집만 좀 정리되면 무이 바로 데려갈게.”
“천천히 해도 되는데.”
“그래도. 너도 바쁘잖아.”
“나는 매니저 형이 무이 봐 줄 때도 있으니까. 아, 이사 도와줄까?”
“안 그래도 점장님이랑 현경이까지 온다고 난리라서 난감해. 너까지 보태지 마라.”
늦은 밤인데도 트랙 위에는 운동 중인 사람들이 몇 있었다. 지나는 행인들을 조금 의식하며, 강한은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에 유일이 돌연 멈추어 섰다. 모자챙을 잡고 슬쩍 들어 올린 그가 눈을 마주친다. 작전을 벌이기 직전의 요원처럼 비장한 웃음이 함께 날아들었다.
“그럼 더 가야겠네. 다른 사람들도 도와준다는데, 내가 안 가면 어떡해.”
밤이 다 환해질 것만 같은 미소에 강한은 얼른 챙을 툭 건드렸다. 작은 머리통 덕분에 볼캡이 쑥 들어가며 유일의 하얀 얼굴을 반쯤 가렸다.
“그러든가.”
대답은 검은 모자 위에다 무성의하게 내던진 채, 강한은 얼른 트랙 위를 걸었다. 옆을 휙휙 지나가는 행인들처럼 빠른 속도로 도망치자 신이 난 무이가 그를 따라나섰다. 뽈뽈거리며 달려오는 털 뭉치를 따라 자연스레 유일의 속도도 붙었다. 때아닌 술래잡기였다.
***
이삿날에는 옅은 비가 내렸다.
한여름 해조차 아직 채 뜨지 않은 시각. 일찌감치 눈을 뜬 강한은 모두에게 일러 준 때보다 두어 시간 빠르게 이사를 시작했다. 이삿짐센터 인부들마저 하품을 쩍쩍 하며 투덜거릴 정도로 이른 시간이었다. ‘아니, 뭐 죄지었소? 야반도주도 아니고…….’ 하고 시비처럼 중얼거리던 중년 남성은 상자를 번쩍 드는 한을 훑어본 후부터 조용해졌다.
짐은 고작 트럭 하나에도 공간이 남아돌 만큼 적었다. 덕분에 이사는 무척이나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이삿짐센터에서도 일해 본 바 있는 강한의 도움이 컸다.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끝나 버린 일에 인부들은 얼떨떨해했다. 처음에 투덜거리던 기색은 다 사라진 채로 허리를 꾸벅 숙이며 사라진 그들을 뒤로하고 강한은 홀로 새 침대에 앉았다. 창밖에서 푸르스름한 여명이 한껏 들어왔다. 아직도 옅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강한이 기억하기로는 이삿날마다 늘 비가 왔다. 남들보다 훨씬 잦은 이사였고 모친은 늘 지쳐 있었다. 언제인가 인부 아저씨 하나가 웃으며 ‘이삿날 비가 오면 팔자 핀다던데, 가셔서 잘되시려나 봅니다.’ 하고 넉살 좋게 말을 붙였을 때도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위로 같은 농담조차 받아들일 여유가 없는 시기였다.
그런 그녀와 도망과도 같은 이사를 반복할 때면 강한은 무력감을 느꼈다. 바쁘고 지친 모친과 커다란 짐을 불쑥불쑥 들어 올리는 인부들 곁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 수많은 짐 중에 자신이야말로 가장 처리하기 어려운 짐인 것 같았다.
어쩌면 다 커서 이삿짐센터 일을 구했던 이유도 앙금처럼 남은 기억에 대한 객기였을지 몰랐다. 강한은 푸시시 웃으며 포장도 벗기지 않은 매트리스 위에 드러누웠다. 천장에 딱 붙어 있는 동그란 할로겐 조명들이 눈처럼 그를 지켜보았다.
새로 이사한 오피스텔은 신축이었다. 강한이 좋아하는 무채색의 모던한 인테리어를 가지고 있었으며 세탁기와 TV, 냉장고 같은 전자 제품도 모두 최신식이었다. 방은 두 개가 끝이지만 이사를 도와주던 인부들도 ‘남자 혼자 살기 딱 좋네.’ 하고 구경할 만큼이나 깔끔한 집이었다. 모친과 반 강제적인 이사를 감행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집이었으며, 그만큼 아주 다른 기분이 들었다.
강한은 이제 그때처럼 무력하지 않았다. 인부들보다 더 무거운 짐을 번쩍 들어 올릴 만큼 힘도 셌고 경제적 여유도 생겼다. 더 이상 그런 과거를 떠올리며 위축되어 있을 이유가 없었다.
숨을 크게 들이켜며 그는 널따란 집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남겨 두기로 한 딱 하나의 기억을 농담처럼 핸드폰 안에 써 넣었다.
「비 온다.」
「이삿날 비 오면 팔자 핀다던데 ㅋㅋ」
「짐이 없어서 이사는 다 끝냈으니까 그냥 집들이나 와라.」
유일에게서는 곧장 답장이 왔다.
「왜 혼자 했어?」
「주소 알려 줘.」
그답게 무척이나 직설적인 문자였다. 강한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방 안 가득한 박스를 둘러보았다. 그중 특히 낡은 박스 위에 시선이 머문다. 한은 물끄러미 상자를 보다가 애꿎은 곳으로 탓을 돌렸다.
「다 했어. 이사 도와주겠다고 일찍 일어났냐? 더 자. 나도 피곤한데 좀 자야겠다. 주소는 이따 오후에 알려 줄게.」
이번에는 답장이 한참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강한이 결국 일어나 상자 하나를 해체하기 시작했을 쯤에야 답이 돌아왔다.
「응.」
짤막한 답장에 한은 숨죽여 웃었다. 평소라면 고집을 부렸을 텐데, 제 피곤을 들먹인 탓에 그러지도 못하는 듯했다. 짐을 풀어내는 동안 연신 피식피식 웃음이 흘렀다.
가장 낡은 상자는 붙박이장 안에 숨겨 놓은 채로 짐 정리를 시작했다. 옷과 세안 도구, 그릇 몇 개 외에는 그다지 꺼낼 것도 없는 짐이었다. 결국 그마저도 점심때가 되기 전에 모두 끝낸 강한은 집을 닦고 서둘러 살구 청을 만들었다. 아직 철이 다 지나지 않아 조금 딱딱한 상태기는 했지만, 열심히 솔질을 하고 하나하나 잘라 내 병에 담았다. 그의 손만큼 커다란 유리병 열 개가 꽉 채워질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그 모든 일을 끝내고서야 강한은 폭탄처럼 쌓여 있던 메시지들을 읽었다. 상황조차 모르던 은수와 현경이 난리가 나 있었다. 그는 푸시시 웃으며 짤막한 상황 설명과 함께 주소를 써 넣었다. 그런 후에야 마침내 유일에게도 주소를 보낼 수 있었다. 이제 막 다섯 시가 다 된 때였다.
하루가 무척 길게 느껴졌으나 피곤하지는 않았다. 강한은 묘하게 설렌 기분으로 몸을 씻고, 가까운 마트에 나가 장을 보았다. 분명 피로가 밀려올 만한 일정을 소화했음에도 발걸음이 너무도 가벼웠다.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신이 난 그는 또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시답잖은 것이 궁금해졌다.
「야, 너 송이버섯 좋아해?」
「팽이버섯은?」
생각난 김에 얼른 메시지를 써 넣고 마저 장을 보았다. 그런데 몇 걸음 지나지 않아 또 궁금한 것이 생겼다.
「상추가 좋냐, 깻잎이 좋냐?」
그렇게 보내고 보니 이번에는 주류가 또 문제였다. 같은 술도 어떤 특정 브랜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강한은 광활한 마트를 휘휘 둘러보았다. 과자, 음료수, 냉동식품, 고기, 생선…….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마다 물음표가 떴다. 갑작스레 그의 모든 취향을 알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신이 났던 걸음은 미아가 되었다. 커다란 마트 한가운데 선 강한은 조그마한 핸드폰을 양손으로 쥐고, 유일의 답을 한참이나 기다렸다.
본격적인 집들이가 시작된 것은 오후 여섯 시가 다 된 시점이었다. 유일과의 사적인 자리를 최대한 피하고 싶다던 은수는 현경에게 억지로 끌려온 모양새였고, 한유일은 세 사람 중 가장 늦게 도착했다. 별안간 벌어진 인터뷰에 대꾸하느라 다소 시간을 지체한 모양이었다.
강한은 어색한 기운이 감도는 식탁 위에 막 씻은 채소와 그릇을 놓았다. 한유일이 선택한 수많은 품목들이 큰 프라이팬 주위를 에워싸듯 줄줄이 선다. 그에 하얀 얼굴 위로 웃음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강한은 유일의 미소를 모르는 체하며 얼른 술을 나눠 주었다.
“대박 맛있겠다. 와!”
어색함을 잘 견디지 못하는 현경이 큰 소리로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하지만 오히려 그 ‘짝!’ 소리가 슬레이트 노릇을 했다. 전보다 더 짙게 찾아온 침묵에 강한은 눈을 굴렸다. 기다란 아일랜드 식탁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현경 씨는 이전에 인사했었죠? 사장님과는 제가……. 구면이기는 한데. 맞죠, 은수 씨?”
그 차가운 정적을 가장 먼저 깨트린 사람은 의외로 한유일이었다. 부드럽게 웃은 그가 은수를 바라보자, 공은수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네, 많이 뵀죠…….”
“제가 불편하실 텐데 괜히 끼어서 죄송해요. 꼭 오고 싶었던 자리라서.”
“아니에요. 배우님이 불편하시면 더 불편하시지….”
느긋한 한유일과 달리 은수는 낯선 모습이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것처럼 움츠러든 그녀를 강한과 현경이 외계인 보듯 바라보자, 유일은 가만 웃었다. 그러더니 두 손을 테이블 위로 모으며 조금 더 가까이 앉았다.
“그럼 우리 이렇게 할까요. 사적인 자리에서 만난 저는 배우가 아닌 걸로.”
“네?”
“제가 오늘 만난 은수 씨도 제 팬이 아니라, 아는 누나인 걸로요.”
“엄멈머…….”
즉각적인 반응은 은수가 아닌 현경에서 터져 나왔다. 청혼이라도 받은 듯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현경이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은수를 찔러 댔다. 그녀의 뾰족한 팔꿈치 공격을 받은 은수는 ‘아야야.’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항복했다.
“알겠어, 알겠다고! 알겠습니다!”
“그럼 저 오늘부터 편한 자리에서는 그냥 은수 누나라고 부를게요?”
“……어허허, 네, 허허.”
우연히 마주친 술집에서도 제 얼굴을 가리려 안간힘을 쓰던 공은수가 너무도 쉽게 함락되었다. 강한은 저절로 꿈틀 올라가려는 눈썹에 힘을 주어 버텼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누나’ 소리가 황당했고, 그런 호칭 따위에 신경 쓰이는 자신은 더 이상했다.
“형, 저 잔이 없는데.”
고작 한마디 말에 사르르 녹아 버리는 마음은 더더욱.
강한은 한유일을 거의 쏘아보았다. 그러나 비스듬하게 고개를 괸 그는 아주 느긋하게 웃을 뿐 전혀 타격 없는 낯이었다. 혼자서만 괜한 손상을 입은 한은 화난 사람처럼 과격하게 일어나 컵을 가져다주었다.
“차 안 가지고 왔어?”
“가져왔죠.”
“대리 부르게?”
술에 취한 한유일의 차를 생판 모르는 남에게 맡기자니 갑자기 그것도 큰 문제처럼 느껴졌다. 강한이 노파심에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현경은 ‘고기 올립니다!’ 하고 외치며 삼겹살을 올리기 시작했다.
“어어, 내놔. 손님이잖아.”
강한은 얼른 다가가 현경에게서 집게와 가위를 뺏어 앉았다. 고기 주변으로 한유일이 고른 얇은 감자와 양파, 버섯을 올리자 벌써 큰 프라이팬 하나가 가득이었다.
“저 고기 잘 구워요! 주세요! 그리고 이사도 못 도와드렸는데 뭘. 참, 도와드린다니까 왜 혼자 하셨어요?”
“맞아. 저거 아주 고집불통이야.”
“나한테만 고집 센 건 아니구나, 형.”
“아유, 그럼요! 황소고집이에요.”
공통 화제가 마땅치 않은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결국 타깃은 강한이 되었다. 면전에서 대놓고 벌어지는 험담에 강한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잔을 채웠다. 투덜투덜 험하게 이어지는 대화에 비해 술잔을 받드는 손들은 공손하기 짝이 없었다.
한유일의 잔은 가장 마지막에 채워졌다. 강한은 부러 손목에 힘을 조금 덜어 양을 조절하며, 다시금 물었다.
“그래서. 대리 부른다고?”
놓쳤던 물음을 다시 끌어오자 유일은 고요하게 웃었다.
“자고 가려고 했는데.”
아주 뻔뻔한 답이었다.
“누구 맘대로?”
황당해진 집 주인의 물음에 야유가 터져 나왔다. 둘 사이의 사정을 알 길 없는 그녀들의 ‘우우, 치사하다!’ 하는 공격에 강한은 퍽 억울해졌다. 지원군을 얻은 한유일만 더 의기양양이다.
“형, 저 재워 주면 안 돼요?”
음흉한 기색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무해한 눈길이었다. 그러나 강한은 저 순진무구한 얼굴로 전신을 뜯어먹을 듯 굴던 한유일을 잘 알고 있었다. 눈이 가느다랗게 좁아 들자, 그는 조금 더 결백한 미소로 술잔을 들었다.
“일단 한 잔?”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한 유혹에 강한은 헛웃음을 쳤다. 유일의 행동을 능청맞은 장난으로 해석한 현경과 은수도 까르륵 넘어가, 결국 테이블 위가 온통 웃음바다였다. 각자 빛깔이 다른 웃음들을 눈에 담으며 한이 먼저 잔을 들었다. 정작 제 잔은 힘 조절이 되지 않아 가득 채워진 채였다.
“와, 위하여!”
가장 어린 현경이 나이답지 않은 선창을 외쳤다. 다시금 웃음과 함께 잔들이 모인다. 강한은 그 조그마한 충돌에도 넘쳐흐르기 시작한 술을 얼른 들이켰다. 입 안 가득 알싸한 향과 쓴맛이 가득 찼지만, 입술 끝이 묘하게 호선을 그렸다. 이상할 만큼이나 기분이 좋았다.
수없이 많이 상상해 왔던 한유일과의 미래에 이런 장면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토록 평범한 집들이 자리에 한유일을 초대하고, 그에게 오래 알고 지낸 지인을 소개하고, 심지어는 함께 술잔을 기울이면서 놀고 있다니. 꿈에서도 바라지 못했던 일이다.
유일과 주변 사람들을 상상할 때의 강한은 기껏해야 상수에게 진실을 털어놓게 될 날의 두려움 같은 것들을 떠올렸다. 이토록 행복하고 포근한 시간은 예상해 본 바 없었다. 왜일까, 막상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강한은 잔을 다시 가득 채우면서 웃었다. 불행한 상상이 버릇되었던 자신에게 위로주를 건네고 싶었다.
“왜 안주도 없이 마셔요, 형.”
넘실대는 잔을 들어 올리기 직전이었다. 불쑥 가까워진 한유일이 제 손을 들이밀었다. 강한은 그가 입가에 대어 준 방울토마토를 가만 내려다보다, 순순히 입을 열었다. 부러 ‘아.’ 소리까지 내며 벌리자 유일의 눈썹이 찰나에 움찔했다. 한에게는 무척이나 즐거운 반응이었다.
“형 턱 빠지겠다, 유일아.”
한술 더 뜨며 능글거리자 유일의 하얀 손가락이 아주 느릿하게 움직였다. 아랫니를 고의로 건드리며 토마토를 깊게 넣어 준 그가 조용히 웃었다. 허탈한 중얼거림과 함께였다.
“턱이 빠지겠다니…….”
강한은 방울토마토를 씹는 내내 그런 한유일을 감상했다. 턱까지 괴고 대놓고 바라보자, 유일은 아예 제대로 보라는 듯 저도 턱을 괴어 옆으로 자세를 틀었다. 덕분에 잘난 얼굴을 꼼꼼히 뜯어볼 수가 있었다.
“거기 두 분, 왜 다른 세상을 만드셨죠? 고기 타요. 집게 주시든가요!”
현경의 호통이 아니었다면 몇 시간이고 감상해도 좋을 만큼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강한은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얼른 고기를 뒤집었다. ‘미안.’ 하고 뱉은 사과에 현경이 삿대질을 한다. 점장님이 또 하나도 안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를 한다며, 일러 대는 그녀 옆에서 은수가 과거 이야기를 과장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한유일은 제가 모르던 시절의 일들을 아주 열심히 경청했다. 필기라도 할 기세로 얌전하게 듣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강한은 그를 힐긋거리며 억지로 입술을 꾹꾹 눌렀다. 번지는 웃음을 삼켜 내기가 몹시 어려운 탓이었다.
***
뒷정리를 돕고 가겠다는 현경과 은수를 억지로 끌어내 대로변까지 나왔을 때는 아직도 사위가 꽤 푸르렀다. 여덟 시가 훌쩍 지난 시각에도 여름의 하늘은 제법 밝았고, 덕분에 아쉬운 걸음들이 느렸다.
“현경 씨, 조심히 들어가세요.”
강한의 얇은 후드 점퍼를 뒤집어쓴 유일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 그래도 커다란 점퍼 모자가 쑥 내려와 그의 얼굴을 반쯤 가렸다. 현경은 킥킥 웃으며 ‘네, 네.’ 답하다가 또 커다랗게 박수를 쳤다.
“아, 맞다! 저기 저 정류장에 생일 광고 있어요! 보셨어요?”
“봤어요. 매니저 형이 사진도 찍어 주셨어요.”
“아, 대박……. 저도 거기에다 모금했는데. 히히. 계 탔다.”
멀찍이 떨어져서 봐도 유일의 얼굴을 가늠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광고였다. 「6월의 햇살보다 빛나는 한유일 배우님! 생일 축하합니다.」 하는 필기체 글씨가 하얀 얼굴 뒤편으로 깔려 있었다. 광고판 안쪽에서 번쩍이며 빛을 내는 조명 덕분에 그의 낯은 더욱 환해 보였다. 그야말로 근사한 선물이었다. 살구 청은 견줄 수도 없을 만큼.
“참, 그리고 우리 무이들끼리 기부도….”
“현경아. 아직 사석이다?”
이번에는 은수의 팔꿈치 공격에 현경이 정신을 차렸다. 얼굴을 붉히며 이런저런 선물을 줄줄 늘어놓으려 했던 현경이 입을 싹 닫았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제 입을 스스로 때리며 벌주고, 허리를 연신 숙였다.
“앗…. 압, 넵. 저희 그럼 가 보겠습니다!”
“가 볼게요. 한아, 잘 먹었어!”
은수는 현경을 어렵게 챙기며 손을 흔들었다. 뒷걸음질로 멀어지면서도 인사를 멈추지 않는 현경 탓에 두 사람의 걸음이 비틀비틀 정신 사납게 움직였다. 유일과 한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불안하고도 경쾌한 작별을 지켜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순식간에 해가 졌다. 푸르스름했던 하늘이 어느덧 깊은 바다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상상해 본 적 없던 저녁의 마무리로 아주 좋은 색이었다.
비현실적인 저녁 식사 동안 강한은 아주 편안했다. 사춘기 소년처럼 고민하던 한유일과의 관계 정립도 이제 더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이렇게 지낼 수만 있다면, 한유일을 이토록 평범하게 소개하고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구태여 어떤 이름표를 붙이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
어떤 관계에 이름을 붙이고 나면 결국에는 떼어 내야 할 날도 오고 마니까.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야 지금 이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강한은 오늘 충분히 행복했고, 이 관계가 만족스러웠다. 더는 욕심내고 싶지 않았다.
“형, 집에 칫솔 있어요?”
그러나 한유일은 불쑥 거리를 좁혔다. 그가 빌려 입은 얇은 점퍼가 바스락거리며 강한의 팔에 닿았다. 강한은 얼른 떨어져 섰지만, 금세 따라붙은 유일이 아예 손을 휘어잡았다.
“…이제 다 갔는데 왜 또 존대야.”
“한이가 형 소리 좋아하는 것 같아서.”
강한은 꽉 잡힌 손을 뿌리치는 대신 다른 것을 따졌다. 유일은 빙긋 웃으며 막 잡힌 손을 고쳐 잡았다. 조심스럽게 깍지를 끼는 움직임이 가벼운 소름을 일으켰다.
“뭐래. 그런 취향 없는데.”
“그러니까. 없어야 맞는데 왜 좋아하지…….”
“너 취했어?”
“으음. 자고 가야 할 만큼은?”
강한의 새로 이사한 집 앞에는 긴 횡단보도가 있었다. 그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다소 일방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강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이 새끼 취했네.’ 하고 생각했다.
신호가 켜지자마자 강한은 유일의 손을 끌고 편의점에 들어갔다. 계산대에 새 칫솔과 숙취 해소제를 올린 그는 얼른 계산을 마치고 유일을 떠밀어 나갔다. 점원이 힐긋거리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아서였다. 알아보고 사인이라도 요청하면 귀찮아질 것이다.
“한아, 안 산 거 있어.”
그런데 한유일은 방금 나온 편의점을 다시 들어가려 했다.
“뭐 또.”
“내가 박스로 사 오겠다고 했었는데 까먹었어. 지금 사 올게.”
그가 아예 몸을 돌려 설 때까지도 강한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가만히 서서 ‘뭘 박스로 산다고?’ 중얼거리던 강한은 뒤늦게 유일을 따라나섰다. 딸랑, 이제 막 열리던 유리문이 도로 거칠게 닫혔다. 한유일을 우악스럽게 끌어당긴 한이 어금니를 꾹 물고 으르렁거렸다.
“너 진짜 돌았냐?”
쌍욕 같은 물음에도 한유일은 아하하 웃었다. 그의 즐거운 웃음 끝에 ‘정말 사야 하는데.’ 하는 중얼거림이 붙었다. 강한은 제가 이미 사다 놓았다는 말은 꾹꾹 눌러 삼킨 채,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워진 여름밤에도 눈에 들 만큼 강한의 귀 끝이 붉게 익었다.
부끄러움을 감추려 눈은 괜스레 더 뾰족해졌다. 집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 강한은 고집스럽게 시시각각 바뀌는 숫자만 노려보았다. 중간에 타려던 사람이 움찔 놀라며 멈출 만큼이나 살벌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는 매서운 눈빛을 방패 삼아, 애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젤 같은 것도 사면 좋다고 하던데. 그건 못 샀는데……. 그냥 사 놓을 걸 그랬나.’
콘돔까지는 변명할 여지가 있는 물건이었으나 젤은 달랐다. 그것까지 구매해 놓으면 본격적으로 한유일과 ‘그 짓’을 하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확실히 관계조차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마당에 몸부터 바라는 인상을 줄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강한은 조금 후회했다. 지난번 그 뻐근했던 둔통을 떠올리자 변태 취급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아무래도 다음번에는 꼭 사 둬야겠다고 결심하던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한아.”
하지만 강한보다 반걸음 앞서 있던 유일은 내리지 않았다. 우두커니 문 앞을 막고 선 채, 그는 제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미안한데 나 오늘은 가 봐야겠다.”
“엉?”
“대리는 괜찮아. 매니저 형이 온대.”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던 한유일은 쉽게 액정을 잠재웠다. 까맣게 변한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찔러 넣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찰나에 목도한 옆얼굴이 싸늘했다.
그러나 시선을 맞춰 오는 낯은 평소와 너무도 똑같은 온도였다. 따스하고 다정한 미소를 지은 그가 팔을 뻗었다. 닫히려던 문이 덜컹이며 다시 입을 벌렸다.
“아, 어……. 그래. 야, 그럼 여기 잠시만 있어 봐.”
분명 무슨 일이 있었다. 강한은 직감했지만, 묻지 못했다. 그저 빠르게 엘리베이터 사이를 빠져나가 비밀번호를 눌렀다. 손에 익지 않은 숫자를 두어 번 틀리고서야 집 안에 들어섰다. 신발도 벗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 강한은 베란다에 빼놓았던 쇼핑백을 챙겼다. 가득 채워진 유리병 네 개가 묵직했다.
생일 광고나 커다란 기부 금액에 비하자면 무척 초라한 선물이다. 예쁜 포장도, 정성 들인 카드도 없었다. 그럼에도 강한은 고집스럽게 그 무거운 선물을 들고 나왔다.
한유일은 엘리베이터를 떠나보낸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기다리라는 말을 11년이나 지켰던 사람답게, 그는 지루한 기색도 없이 멀끔했다.
“자, 이거 가져가.”
“나 주는 거야?”
“어. 살구 청인데……. 요즘 철이라서.”
살구 철이라기에는 아직 여름이 다 무르익지 않은 때였다. 하지만 강한에게는 그저 다 지난 이야기 대신 쓸 만한 변명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강한은 거짓말하는 사람처럼 시선을 흐리며 봉투를 건넸다. 한 손으로 받아 들려는 유일이 불안해서 손에 힘이 느리게 빠졌다. 그러나 한유일은 아주 쉽게 봉투를 받아 갔다. 무거운 기색도 없이 봉투 안을 들여다본 그는 낮게 웃었다.
“생일 선물이야?”
유일의 물음은 어딘가 바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강한은 원래 준비했던 시나리오대로 생일을 몰랐던 척 능청스럽게 대답하지 못했다.
“어, 너 주려고 만들었어.”
일순 욕심이 들었다. DVD방에 데려가 루나를 보여 줬던 그때처럼, 한유일이 반짝거리는 미소를 지었으면 했다.
“와…….”
예상대로 한유일은 무척 기뻐 보였다. 기다란 입술이 시원스럽게 벌어지고 예쁜 눈이 휘었다. 탁 터진 꽃봉오리처럼 해사한 미소가 번졌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잠시 목격했던 냉기는 이미 모두 지워진 지 오래다.
“고마워, 한아. 받아 본 생일 선물 중에 두 번째로 좋았어.”
한유일이 방긋 웃으며 내뱉은 별난 인사로 인해 강한 역시 실소가 터졌다.
“어, 이제 가라.”
“옷은 다음에 돌려줄게.”
핑계 삼아 또 만날 작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강한은 묵인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버튼을 눌렀다. 1층까지 내려가 있던 엘리베이터가 빠른 속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조심히 가고.”
“응.”
야속할 만큼 빠르게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한유일이 올랐다.
강한은 버튼을 누른 채 머뭇거렸다. 또 보자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건 지나치게 간지러운 인사 같았다.
“살구 청은……. 또 있으니까 모자라면 더 가져가.”
결국 고르고 고른 말이 이것뿐이었다. 머쓱하게 인사하며 손을 놓자,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닫히기 시작했다. 그 틈 가운데에 선 한유일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응, 또 올게.”
속을 다 읽은 것만 같은 대답만을 남겨 둔 채로.
***
잠들기 직전, 한유일은 아무렇지 않게 ‘잘 자.’ 하고 문자를 보냈다. 강한은 그 짤막한 문자를 수십 번이나 다시 읽으며 뒤척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보았던 차가운 옆얼굴이 연신 떠올라 잠이 오지 않았다.
답장으로는 ‘무슨 일 있냐?’ 하는 문장이 쓰이다 말았다. 같은 말을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 적기를 반복하던 강한은 결국 취소 버튼을 눌렀다. 지나치게 관여했다가는 지금 이 관계를 망칠 수도 있었다.
「너도.」
적당한 답을 보내 놓고도 아직 손가락이 머뭇거렸다. 흔들리는 눈동자 안에 시계가 들었다.
「11:59」
하필 한유일의 생일을 바로 1분 앞둔 시각이었다. 으음, 강한은 앓는 소리를 내며 고민했다. 억지로 정각을 맞추려 기다린 것은 아니지만 보고도 넘어가기에는 아쉬운 감이 있었다. 게다가 헤어지기 직전에 봤던 그 표정도 계속 신경이 쓰이고…….
결국 강한은 문자 하나를 더 작성했다. 「00:00」으로 변한 시각을 보자마자 생각보다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겨우 문자 한 통이지만, 한유일에게 조금이나마 기분 전환이 되었으면 싶었다.
「생일 축.」
그러나 문장을 다 마치기도 전에 화면이 쑥 꺼졌다. 돌연 액정을 가득 채운 검정 화면에 한유일의 이름이 오른다. 강한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초록색 수락 버튼을 눌렀다.
“뭐야. 잘못 눌렀냐?”
[아니. 열두 시잖아.]
“…….”
[한이랑 먼저 통화하고 싶어서.]
어떻게 된 놈이 자기 생일마저 선수를 치는지. 강한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 몸을 돌려 누웠다. 하얀 천장 위로 그의 빙긋 웃는 낯이 보이는 듯했다.
“생일 축하해.”
[고마워.]
“……어.”
전화로 듣는 유일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낮게 들렸다. 강한은 괜히 볼을 긁적거리며 다시 돌아누웠다. 이상하게 몸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예전에 우리 DVD방 갔던 거 기억해?]
“어.”
[나 그 전까지는 생일 별로 안 좋아했는데. 그때부터는 좋았어.]
당시에도 한유일은 비슷한 말을 했었다. 이유를 자세히 설명한 적은 없지만, 강한 역시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어쩐지 알 것만 같았다. 그가 루나라는 별명을 싫어했던 이유가 떠오른 탓이었다.
“더 좋은 선물 많이 받았을 텐데 너도 참 특이하다.”
아마 그때 자신도 이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다. 강한은 비식 웃으며 새로 깐 이불에 선을 그었다. 손을 가만히 둘 수 없는 기분이 자꾸만 솟구쳤다.
[그래도 한이가 준 게 제일 좋았어.]
나지막한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강한은 잠시 핸드폰을 떼어 내 귓가를 벅벅 문지르고, 다시 애꿎은 매트 위에 무수한 선을 그었다. 그러다 문득 또 궁금한 점이 생겼다.
“야, 너 혹시 나 그래서 좋아하냐?”
[어?]
“내가 생일 챙겨 줘서?”
여과 없이 흘러 나간 물음에 아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와, 알고는 있구나. 내가 좋아하는 거.]
한참 후에야 한유일은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아주 유쾌한 일을 겪은 사람처럼 아하하, 소리까지 내어 웃은 그가 덧붙여 답했다.
[그래서는 아니야.]
그쯤에야 제가 뱉은 말을 상기한 강한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제는 손가락 끝이 매트를 뚫어 버릴 기세로 처박혀 버렸다.
“……야, 나 졸리다. 잘게.”
[응, 한아. 잘 자.]
한유일은 사고처럼 뱉어진 말을 따지고 들지 않았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한의 얼굴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이, 아주 너그럽고 여유롭게 넘어가 주었다. 그래서 강한은 더더욱 제 실수를 참을 수 없었다. 통화를 종료시키자마자 핸드폰을 내던지고, 침대 위로 얼굴을 처박았다. 조금 전까지 그가 간지럽게 긁어 대기만 하던 매트리스에 이번에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퍽퍽 부딪혔다.
“아, 나가 죽자, 나가 죽어….”
그렇게 스스로에게 저주를 퍼붓는 동안에도, 강한의 머릿속에는 한유일 목소리가 아른거렸다. ‘알고는 있었구나, 내가 좋아하는 거.’ 그 나긋한 긍정이 연신 반복되며 그를 더욱 괴롭게 했다.
때아닌 소동으로 새벽은 무척이나 길어졌다. 강한은 아주 오랜 시간을 수치에 떨었고, 그 직후에는 늦은 후회를 했다. 통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귀한 기회를 날린 듯했다. 아무튼 한유일 앞에서는 늘 멍청한 짓만 하는 것 같다고, 그는 투덜거리며 다시금 핸드폰을 들었다.
당사자에게 물을 수 없으니 괜한 검색 찬스를 이용했다. 물론 그마저도 별 소득은 없었다. 강한은 그저 한유일의 최근 인터뷰 몇 개와 영화 관련 기사를 읽다가, 팬들이 정리해 놓은 사진 모음 글을 여러 개 보았다. 그러다 움직이는 사진 몇 개는 저장도 눌렀다. 그저 만들어진 방식이 너무 신기해서였다.
결국 강한은 이사 당일에 살구 청을 만들고 집들이까지 마치고서도 밤을 꼴딱 새웠다. 몸은 묵직하게 피로를 표했으나 정신이 지나치게 맑았다. 기어코 해가 다 뜨고서야 잠이 들었던 그는 오후 늦은 시간에 카페에 출근했다. 은수가 미리 배려해 준 덕분이었다.
“야, 거봐라. 피곤하지? 괜찮다고 그러더니. 오후 출근 안 했으면 기어 오셨을 뻔?”
대타를 뛰어 준 그녀는 강한을 보자마자 으스댔다. 강한은 그저 삿대질까지 하며 의기양양한 그녀에게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이 피로의 원인이 고작 이삿짐 때문은 아니었지만, 가끔은 그냥 둬야만 좋은 오해도 있었다.
한은 뻐근한 목을 뚝뚝 꺾으며 서둘러 움직였다. 오후까지 대신 자리를 지켜 준 은수를 위해 어서 일을 시작해야 했다.
“안느새요.”
바쁘게 스태프룸을 오가던 강한이 우뚝 멈췄다. 외계어에 가까울 만큼 빠르고 성의 없는 인사를 툭 내뱉은 치언 때문이었다. 그는 평소와 달리 한의 얼굴은 본 체도 하지 않고 커다란 상자만 옮기며 쌀쌀맞게 굴고 있었다.
강한은 동그랗게 커진 눈을 천천히 은수에게 옮겨 갔다. ‘얘 왜 이래요?’ 하는 물음을 눈동자에 실어 건네자, 은수는 콧잔등을 찡긋 들어 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맛없는 음식을 삼킨 표정을 지은 그녀가 잔뜩 일그러진 입술을 움직였다.
“저 화장실 좀.”
뻐끔뻐끔 소리 없이 흘러나온 글자가 이제 막 한 단어쯤 되었을 때, 치언이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은수의 암호를 해석하던 강한은 금세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다. ‘어.’ 하고 대꾸하자 조금 전보다 더 냉기가 스민 치언은 그를 휙 스쳐 지났다. 돈이라도 떼먹힌 기세였다.
“아유, 아니, 우리끼리 집들이했다고 저래.”
치언이 멀리 사라지자마자 후다닥 다가온 은수가 제 가슴을 쳤다. 종일 은수에게도 냉랭한 태도를 보인 모양이었다.
“애새끼도 아니고 정말.”
그녀는 속 터진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강한은 짧게 웃으며 ‘애는 맞죠, 뭐.’ 하고 답했다.
“애가 화내면 풀어 줘야죠, 어쩌겠어요.”
“야아, 점장님아. 정말 쟤 자르면 안 되겠니?”
“아직 어려서 그래요. 어려서.”
사실 치언은 입사 때부터 은수의 눈 밖에 난 직원이었다. 유일의 팬인 그녀 앞에서 입단속을 제대로 못 하는 면모도 한몫을 하기야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업무였다. 공은수는 개인적인 감정보다는 일적인 측면에서의 실수를 더더욱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결국 치언을 이유로 한 컴플레인이 열 개가 넘어간 순간이 마지노선이었다. 은수는 곧장 해고를 말했으나 강한이 뜯어말렸다. 제가 더 잘 가르쳐 보겠다며 떠안은 지가 벌써 몇 달. 그녀에게는 굳이 전하지 않았지만 아직도 치언은 뒷수습이 필요한 직원이었다.
“우리 강한 점장님이야말로 아직 어린가 보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니까,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으시네.”
해고를 결심한 이후로 공은수는 치언에 대한 기대를 모조리 놓은 상태였다. 인간적으로나 직원으로나. 그녀는 그저 표면적으로 예의 바르고 친절하게 치언을 대했을 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 점이 철딱서니처럼 구는 그녀를 무척이나 성숙한 어른으로 보이게 했다.
“다음에는 안 봐줄게요.”
“구라인 거 다 알아요.”
은수는 눈을 접어 웃으며 얼른 멀어졌다. 치언이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강한은 보지 않고도 알아채며, 포스 기계 앞에 섰다.
“치언아. 오늘 저녁에 뭐 하냐?”
“……왜요?”
“소고기나 먹을까 하고.”
“또 저 빼고 드시지 왜요.”
바싹 붙어 선 은수가 강한에게만 들리도록 킥킥 웃었다. 사람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던 그녀의 목소리가 따라붙는 것만 같다.
한은 얕은 숨을 아주 길게 내쉬며 치언을 바라보았다. 그는 뻗대는 대답을 해 놓고도 은근슬쩍 눈치를 살피며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저도 잘못한 줄은 아는 모양이라, 강한은 어른 된 도리로 한 번 웃어 주었다.
“별일 없으면 먹자. 소고기 싫으면 치언이 네가 고르고.”
너그러운 제안에 치언의 낯이 비죽비죽 풀리기 시작했다. ‘그럼 뭐…….’ 어물쩍 넘기는 대답이 이미 긍정이었다.
“가만 보면 우리 점장님은 자기 무덤 파기가 취미야. 쯔쯔, 나는 오늘 빠진다.”
여전히 목소리를 잔뜩 낮춘 공은수는 놀리듯 말하고 얼른 카운터를 벗어났다. 앞치마를 벗어 수건처럼 흔드는 그녀에게 강한은 대거리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 역시 어느 정도는 은수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고작 소고기 미끼 하나로 치언은 금세 본래 성격을 되찾았다. 쉬는 날 무엇을 했는지, 얼마나 웃긴 일이 있었는지. 과장된 말투와 까불까불 흔드는 몸짓을 한참 견디고서야 마감 시간이 되었다.
현경은 가게 문을 막 닫기 전에 합류했다. 은수에게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치언 몰래 강한에게 다가가 ‘점장님 구해 주러 왔어요.’ 하고 속삭였다. 한은 비식 웃었고, 치언은 영문도 모른 채 현경의 등장에 신이 나 있었다.
강한에게는 이삿날의 후유증을 풀기는커녕 도리어 날까지 새운 날이었다. 몰려드는 피로감에 그는 다소 가라앉아 있었다. 덕분에 건배를 종용하고 큰 소리로 떠들어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은 오롯이 치언에게 돌아갔다. 그나마 현경이 대답이나 제때 해 주었기에 한은 몹시 고맙게 느꼈다.
호응할 기력마저 사라진 기분이었다. 강한은 그저 묵묵히 고기를 구워 주면서 가끔씩 핸드폰을 확인했다. 며칠 내내 귀찮을 정도로 연락을 취하던 한유일이 고요했다. ‘생일이라 바쁜가…….’ 그렇게 생각하며 액정을 괜스레 문질러 대던 손가락이 일순 멎었다.
귀신처럼 한유일의 이름이 액정 위에 떠올랐다.
“어.”
나가서 받을 만한 여유도 없이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대뜸 수락해 버린 전화에 대고 강한은 멋없이 인사했다.
[밖이야?]
“어어. 카페 애들이랑 고기 먹으러 왔어.”
[또 고기 먹어?]
“…그냥 어쩌다 보니까.”
수화기 너머로 하하 웃는 소리가 넘실거렸다. 강한은 간지러운 볼을 긁적이며 조금쯤 안도했다. 한유일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한이 보러 가려고 했는데.]
의미심장한 말을 몹시 담백하게 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볼을 긁던 손이 귓가로 움직인다. 느리게 귓불을 매만지며, 강한은 슬쩍 고개 숙였다.
“아마 곧 들어갈 것 같은데.”
목소리가 멋대로 기어들어 갔다. 그럼에도 단번에 알아들은 유일이 재차 웃었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웃음소리 끝으로 ‘응.’ 하고 짧은 대답도 함께 돌아왔다. 강한은 언제 어디로 어떻게 올 것인지 캐묻지 않은 채 통화를 마쳤다. 그새 뜨거워진 것만 같은 핸드폰을 바지에 슥 닦아 내며 그저 헛기침을 했다.
그쯤에야 그는 제게 몰린 시선을 알아챘다. 현경과 치언 모두 고기 먹는 것도 잊은 채 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점장님, 연애하세요?”
젓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은 치언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왜? 뭐가. 별말 안 했는데.”
“에에이! 뭐 있는 거 맞네요!”
바싹 굳은 반응 덕분에 곧장 삿대질이 날아왔다. 강한은 동그랗게 뜬 눈을 굴려 옆에 있는 현경을 바라보았다. 반은 구조 요청이었고 반은 ‘정말 그렇게 보여?’의 물음이었다. 덩달아 커진 눈으로 있던 현경이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펄쩍 뛰었다.
“아, 거참, 치언 님은 남의 이런 얘기 너어무 좋아하더라.”
격앙된 그녀의 목소리가 도리어 확답을 주었다. 강한은 묵묵히 입술을 물고 술잔을 들었다. 술자리에서 말을 돌리는 데는 아무렴 건배만큼 제격인 게 없었다.
“아니……. 누나는 맨날 저만 미워하시고.”
그러나 말 속에 숨은 뼈를 알아챈 치언이 시무룩하게 투덜거리기 시작하면서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강한은 허공에 들었던 잔을 그대로 가만히 내렸다.
“요즘 진짜 저만 왕따 시키고 너무해요, 다들.”
치언은 그동안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문제를 슬쩍 끄집어냈다. 서운한 기색이 뚝뚝 묻어나는 투에 테이블 위로 정적이 돌았다.
“헐, 왕따라뇨. 솔직히 치언 씨가 사장님을 더 괴롭혔지.”
강한이 차라리 연애 이야기를 제물 삼아야겠다 결심할 때였다. 현경은 묵은 짐을 털어놓겠다는 듯 평소보다 공격적인 투로 대꾸했다. 겉모양만 가벼운 대화가 핑퐁처럼 이어졌다.
“네? 제가요?”
“좋아하는 거 뻔히 알면서 저번 회식 때도 욕하고. 단톡에다가 링크 뿌리고! 그랬잖아요. 분위기 완전 이상하게 만들었으면서? 그리고 뭐 배우님한테 열등감 있어요? 왜 그래요, 도대체?”
조금 전까지는 그래도 장난의 모양새라도 취하고 있던 대화가 방향을 틀었다. 명백히 드러나는 분노에 허공 위로 냉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강한은 놀란 눈으로 현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평소 화를 잘 내지 않았다. 감정 표현이 격앙될 때는 있었지만 워낙 긍정적이고 활발한 성격이라 나쁜 감정은 금세 사라지는 편이었다. 아무리 진상 고객에게 시달려도 몇 분이 지나면 생글생글 웃기까지 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치언을 그대로 깔아뭉갤 수 있는 사람 같았다. 누군가 한유일에게 돌을 던진다면 열 배로 돌려줄 준비가 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당당했고, 그럴 권리를 마땅히 쥔 사람처럼 보였다.
그 깨달음이 강한을 다소 멍하게 만들었다. 알 수 없는 욕심이 마음 깊은 곳을 쿡쿡 찔러 대기 시작했다.
“아니, 그거는 그냥 이런 일이 있었다고…. 현경 누나도 팬 되실 줄은 몰랐고. 그리고 설마 이런 얘기 저 없을 때도 나누신 거예요? 하, 대박이다. 진짜….”
맹렬한 공격에 치언은 소극적으로 변했다. 수동 공격적인 대응에 현경이 헛웃음을 친다.
“뭔 소리예요? 저희 치언 씨 얘기 따로 안 해요. 그럴 만큼 관심도 없는데?”
“지금 겨우 연예인 욕 했다고 이러는 거예요? 와…, 진짜…….”
“겨우 연예인 욕이 문제가 아니라!”
몇 마디로 끝나리라 여겼던 논쟁은 끝없이 격앙되었다. 이제는 주변 테이블에서도 그들을 힐긋거릴 만큼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강한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낮게 만류했다.
“현경아.”
“아, 점장님.”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저를 부르냐는 듯이 현경이 눈을 흘겼다. 강한은 알겠다며 그녀의 주먹 쥔 손등을 톡톡 두드리고 치언을 바라보았다.
“치언아. 지난번에 점장님이 얘기했었잖아.”
“뭐요…….”
치언은 이제 거의 울고 있었다.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답하는 그가 이제 더는 안쓰럽지도 않았다.
“개념 챙겨 가며 일하자고.”
“…네?”
“사실 그때 한유일, 나 때문에 왔던 거야.”
“네?”
심연에 작은 물거품을 만들며 보글보글 끓어오르던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참고 싶지 않은 욕망이었다.
“사실 걔, 나랑 친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금 이 상태가 만족스러웠다. 관계 정립 없이도, 굳이 더 욕심내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런데 거짓된 합의였을까? 강한은 멋대로 제 입술 밖으로 흘러 나가는 말들이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유일을 두둔하고 이상한 이야기를 막아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짜릿한 희열이 발바닥에서부터 번져 가고 있었다.
“네가 상상도 못 할 만큼 존나 친해.”
“……어, 아, 진짜 몰… 몰랐어요.”
“몰라야지. 너한테 말할 생각 없었으니까.”
강한은 두 번째 기회를 믿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치언 같은 부류에게 두 번째 기회란 사치라는 것을, 그도 이제는 알 것만 같았다.
“오늘은 이만 정리하고 내일 맨 정신에 얘기하자. 약속이 생겨서.”
아까까지만 해도 서운해했던 현경이 가장 먼저 ‘넵!’ 하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곧장 가방을 챙겨 일어난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가득했다. 참지 못한 웃음마저 입가를 맴돌았다.
강한은 그 생글생글 웃는 낯을 모르는 척하며 일어섰다. 이 와중에도 죽상을 하고 있는 치언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그의 손은 넋을 빼놓고 앉아 있는 치언의 어깨 위가 아닌, 제 핸드폰으로 향했다. 동정을 만류하듯 한유일의 전화가 걸려 오고 있었다.
“어, 유일아.”
그는 부러 다정한 어투로 대답하며 치언을 스쳐 지났다.
[……한아, 어디야? 많이 취했어?]
한동안 침묵하던 한유일은 아주 심각해졌다. 진지한 어투에 강한은 웃음을 터트리며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그가 계산하는 동안, 뒤로 다가온 현경이 등을 도닥도닥 치며 웃었다. ‘점장님 완전 멋있었어요.’ 속닥거리는 말에 한은 소리 없이 웃고 문을 열었다.
“안 취했는데, 유일아.”
객기 비슷한 욕심을 멋대로 투척한 밤. 강한은 시원스레 문을 열어젖히며 미적지근한 바람을 맞이했다. 내부의 냉랭한 에어컨 바람보다도 어쩐지 그 습기 가득한 여름 바람이 더욱 시원하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막혀 있던 무언가가 터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야. 나 보러 온다며.”
내딛는 걸음의 보폭이 평소보다 훨씬 컸다.
***
한유일은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아직 강한에게도 낯선 오피스텔의 검은 출입구 앞. 커다란 쇼핑백과 상자 하나를 들고 있는 그의 몸은 자로 잰 듯이 꼿꼿했다.
“뭘 그렇게…….”
강한은 그 비현실적인 남자를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유일은 그의 시선이 멈춘 상자와 쇼핑백을 가볍게 들어 보이며 웃었다.
“늦은 집들이 선물.”
산뜻한 미소였다. 강한은 쇼핑백 너머로 비죽 고개를 내밀고 있는 와인 병을 가늘어진 눈으로 쏘아보고 비식 웃었다. 선물이라기보다는 자기 사심이 우선인 듯했지만 아무렴 좋았다. 저도 오늘만큼은 욕심을 내보이고 오는 길이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한유일은 아일랜드 식탁 위에 짐을 풀었다. 쇼핑백 안에서는 묵직한 와인과 체리, 과일 치즈 같은 것들이 나왔다. 마치 제집처럼 행동하는 그 옆에서 어슬렁거리던 강한은 상자를 풀었다. 제법 큰 손을 한껏 벌려도 다 가려지지 않는 크기였다.
“이건 뭔데?”
강한은 칼 없이 손으로 포장을 북 뜯어내며 물었다. 유일은 답하지 않고 빙긋 웃었다. 그저 직접 확인하라는 듯 턱짓을 했다.
상자 속에는 또 다른 박스들이 가득 줄을 서 있었다. 빨간색, 보라색, 파란색, 분홍색. 형형색색의 작은 상자들이 열을 맞춰 나열되어 있다. 강한은 고개를 갸웃하며 영어로 쓰인 상품명을 읽어 보았다.
“……너, 이거.”
속으로 발음해 본 브랜드 이름이 심상치 않았다. 화들짝 놀란 강한은 빡빡하게 들어찬 상자 사이를 비집고, 하나를 꺼내 확인했다.
“박스로 사 온다고 했었잖아.”
하얗게 질린 얼굴을 마주하고도 한유일은 느긋했다. 짐을 다 꺼낸 쇼핑백을 정리하는 손길이 단정하고 담백하다. 콘돔을 박스째 사 온 남자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야, 박스를……. 누가 콘돔을 이렇게 박스로, 어? 아니, 하….”
기가 막혀 웃음이 터졌다. 강한은 허망한 눈길로 겉포장 문구를 읽었다. 작은 박스 하나에는 콘돔 여섯 세트가 포장되어 있었는데, 각 세트의 낱개 수는 열 개였다. 가늘게 좁혔던 눈이 순식간에 동그랗게 커졌다.
“너 이거 설마 여섯 개 들은 줄 알았어? 이 상자 하나에 콘돔이 60개야, 미친놈아…….”
강한은 보라색 박스 하나를 경고 카드처럼 내밀어 보였다. 허공에 대고 따지듯이 흔들거리자 유일은 ‘음.’ 하고 침음을 흘렸다. 내리깐 속눈썹이 길게 그늘을 드리웠다.
“글쎄, 나는 한이가 처음이라 잘 몰라서. 종류도 그냥 있는 대로 사 봤어.”
식탁 어딘가를 향했던 눈동자가 스윽 움직였다. 상승한 눈동자와 함께 입꼬리도 호선을 그렸으나, 그의 미소는 어딘가 서늘한 기색이 있었다. 강한은 죄지은 사람처럼 입술을 말아 물었다.
강한의 연애 경험 또한 있다고 말하기에는 민망할 수준이었다. 특히 진도 문제에 관해서는 더욱 그랬다. 좋은 애인이 되려면 스킨십 문제 또한 빼놓을 수 없었기에 노력은 해 봤지만, 잘되지 않았다.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밤을 보낸다는 것이 강한에게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콘돔에 관해서는 그도 한유일만큼이나 초심자였다.
그럼에도 고작 두어 번, 타인과 침대에 누워 본 경험이 있다는 것 자체가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어쩐지 그를 배신한 것만 같은 죄책감에 강한은 말을 어물거렸다.
“아니, 내가 잘 아는 게 아니라…….”
“돌기 달린 것도 있어.”
그러나 유일은 곧장 미안한 마음을 날아가게 만들었다. 금세 눈이 세모꼴로 변한 강한이 욕설처럼 중얼거렸다.
“…미쳤나, 진짜.”
“씻고 올래? 와인 준비해 놓을게.”
고작 열아홉 시절에도 한유일은 좀처럼 강한을 겁내지 않았다. 아무리 무뚝뚝하게 밀어내도 늘 빙긋이 웃는 낯이었다. 그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오히려 묘하게 능구렁이 같은 면모까지 더해져 당할 길이 없는 얼굴에 강한은 한숨 쉬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수건을 챙겼다. 괜히 거절해 곤혹을 돌려주고 싶기도 했지만 옷에 밴 고기 냄새가 더 신경 쓰였다.
“편한 옷 필요하면 아무거나 꺼내 입어.”
강한은 정말 집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주방을 누비는 유일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던져 놓고 욕실로 들어섰다. 단순히 고기 냄새를 핑계 삼기에는 몹시 기나긴 샤워의 시작이었다.
***
아일랜드 식탁 위에서 시작되었던 술자리는 점차 소파 앞으로 옮겨 갔다. 높은 스툴 의자에 앉아 있기에는 몸이 지나치게 늘어진 탓이었다.
혼자 사는 오피스텔의 거실은 그렇게 넓지 않았다. 대신 커다란 TV 앞에 그보다도 더욱 큰 소파가 있었다. 손님용 침대를 겸할 용도로 산 2인용 소파는 좌석 아래를 당겨 공간을 확장할 수 있는 형태였다. 소파 끝자락에 걸터앉아 있던 몸이 자연스럽게 녹아들 만큼 푹신하기도 했다.
강한은 평소보다 훨씬 알딸딸한 기분으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사실 와인을 입에 대기도 전부터 그는 무척 들뜬 상태였다. 이틀 동안 축적된 피로와 소주 몇 잔이 주는 몽롱함보다는 치언과의 일이 더 큰 이유가 되었다.
그토록 오래 겁내던 걸음을 떼었다. 용기를 내서 감행한 도약이라기에는 소폭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강한은 기분이 좋았다. 마음 같아서는 한유일에게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다.
“근데 무슨 와인을 가져왔냐…….”
그러나 당사자가 들으면 기분만 나쁠 일이다. 강한은 괜히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다른 말을 했다.
“좋아하는 사람 집에 갈 때 무슨 술을 사 가나요, 물어보니까. 다들 와인이라고 하던데.”
아직 소파 끝에 앉아 있던 유일도 몸을 눕혔다. 11년 전의 DVD방에서처럼, 나란히 반쯤 누운 채로 팔뚝이 맞닿았다.
‘좋아하는 사람…….’
한유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입에 담는다. 그러나 강한은 아직도 그 말에 익숙하지를 못했다. 들을 때마다 몸이 움찔 튀고 심장이 뜨끔했다. 되돌려 주기는커녕 항상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그 반응조차 익숙해진 한유일은 답을 원하지 않았다. 한 번도 채근하거나 따져 물은 적 없었다. 그는 마치 더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는 것처럼 의연했다. 닫힌 문을 수없이 두드리고 찾아오면서도 그뿐이었다. 먼저 다가와 줄 때까지 수십 년이고 그렇게 해 줄 사람 같았다.
“야, 만약에….”
그러나 이제 강한의 문에도 창이 달렸다. 그는 유일이 찾아오지 않는 날에도 수십 번씩 그 앞을 기웃대고 밖을 넘겨보게 되었다.
“진짜 만약에. 너랑 내가……. 사귀게 되면.”
아주 긴장한 숨을 꿀꺽 삼키며 강한은 몸을 약간 일으켜 앉았다. 유일은 따라 일어나지 않은 채, 오히려 더 무방비하게 누워 한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들키면. 그때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본 적 있냐?”
비장한 목소리를 꾹꾹 눌러 건네자 한유일은 푸시시 웃었다. 와인 덕에 평소보다 분홍빛으로 물든 볼이 보기 좋게 방싯 올라갔다.
“뭘 어떻게 해. 인정해야지.”
다른 대답은 생각해 본 적도 없다는 듯이 명쾌한 답이었다. 강한은 아주 오묘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고심했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만족인지, 황당함인지, 아니면 비현실적인 기분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만약에…. 네가 나를 막상 만나 보니까 존나 별로야. 그러면?”
“그럴 일 없어.”
“어떻게 장담하냐? 아니, 그러면 반대로. 내가 그러면?”
“나를 막상 만나 보니까 존나 별로일 것 같아?”
유일은 여전히 웃는 낯 그대로 상스러운 말투를 따라 했다. 강한은 단박에 인상을 찌푸리고 ‘아니.’ 하려다가 입술을 꾹 물었다. 못마땅한 얼굴 그대로 그저 침묵을 지키자 하얀 손이 불쑥 올라왔다.
“형, 만나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한유일은 마치 키스를 조르듯 두 팔을 올려 한을 당겼다. 얼굴 근처로 다가오는 손길에 강한은 저도 모르게 상체를 숙여 내어 주고 말았다. 단박에 목뒤로 감긴 팔이 힘을 주었다. 훅 당긴 힘과는 상반되는 예쁜 얼굴이 어느덧 코앞이었다.
“만약에 지금 키스하면 존나 별로예요?”
가지런한 이가 강한의 코끝을 살며시 물었다. 이어서 쏟아진 속삭임에 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고개가 무작정 아래로 돌진하듯 내려갔다.
부드럽게 얼굴을 감싸 당겨 준 한유일 덕분에 입술은 올바른 행선지를 찾았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뭉개지며, 금세 열기가 피어올랐다.
가만히 누워 입맞춤을 받던 유일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강한은 버티지 않고 기울어지는 힘을 따라 넘어갔다. 항상 그랬듯, 밀려드는 유일을 거절하는 일은 그에게 몹시 어려운 것이었다.
처음보다는 훨씬 느긋한 밤이었다. 서로의 옷을 벗기고 매만지는 손길부터 살결에 닿는 입술까지, 모든 것들이 부드럽고 느릿했다.
젤은 아직도 구비하지 못했지만 한유일은 차선책을 마련했다. 그가 양껏 사 온 콘돔의 윤활제가 구멍 위로 비벼졌다. 유일은 찔걱거리는 소리가 날 만큼 문지르며 손가락을 얕게 쑤셔 댔다. 곧 안을 길게 후벼 팔 것이 분명했다.
“아, 잠깐….”
강한은 섬찟해 몸을 돌려 누웠다.
“이렇게 해.”
스스로 엎드려 엉덩이를 내보인 채 그가 웅얼거렸다.
“얼굴 보고 싶은데.”
“……마주 보고 하면, 내가 자꾸 너 잡잖아. 자국도 엄청 남고.”
엉덩잇살을 쥐어 벌리면서도 불퉁하던 한유일은 멈칫했다. 제법 평온을 가장하던 얼굴 위로 검은 욕망이 스멀스멀 드러난다.
“으, 흣!”
“나는 더 남아도 좋은데.”
기다란 손가락이 구멍 안을 파고들었다. 윤활제를 내벽 전부에 묻히려는 듯 꼼꼼히 문지르고 눌러 대는 바람에, 강한은 제 안쪽 구조를 다 그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소파에 처박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너, 촬영… 헉, 읏, 할 때, 다들 볼 거……, 아!”
내벽 깊은 곳을 꾹꾹 눌러 대던 손가락이 늘어났다. 일순 움찔 몸을 튄 강한이 본능적으로 몸을 말았다. 둥글게 휜 등골 위에는 입술이 따라붙었다.
유일은 울룩불룩한 등 근육 위에 이를 세우고 혀를 내어 핥으며 손을 움직였다. 내벽을 찔러 올릴 때마다 흠칫거리며 솟구치던 등은 달콤한 입맞춤에 어쩔 줄을 모르고 함락되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몸은 스스로 허리를 들썩이는 듯 보였다.
“응, 다 보는 데서 옷도 갈아입지.”
한유일은 어쩐지 조금 음산한 투로 대답하며 손가락을 더욱 집요하게 움직였다. 안을 매만져 주는 것에 가까웠던 손길이 이제는 명백한 의도를 지녔다. 힘을 바싹 들인 손끝이 어느 한곳을 빠르게 비벼 대며 흔들었다. 눌릴 때마다 미약한 전류가 흐르는 곳이었다.
“흣, 웃….”
“그래서 안 남기려고 하는 거야?”
“당연, 아, 아읏! 잠깐, 헉, 아…!”
강한은 당황한 기색으로 몸을 뒤틀어 댔으나 유일은 비켜 주지 않았다. 오히려 골반을 더 꽉 당기고 엉덩이 사이를 벌려 노골적으로 쑤셨다.
“착해라…….”
행위는 흡사 징벌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모순적이게도 그는 아주 다디단 칭찬을 속삭였다. 강한은 울음처럼 터져 나가려는 신음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 붉게 달아오른 눈이 유일을 돌아보며 이유를 묻고 있었다.
“그런 이유라면 난 오히려 자국을 더 남겼을 것 같은데.”
한유일은 순순히 대답해 주고는 짧게 웃었다. 그 웃음기 묻은 입술은 금세 바르르 떨리는 엉덩이 위로 향했다. 잔뜩 긴장해 움찔대는 살결을 물고 핥으며 장난을 치던 그가 천천히 손가락을 빼냈다.
벌써 한바탕 섹스를 마친 것처럼 탈력감이 몰려들었다. 강한은 몰아치는 숨을 고르며, 흐트러졌던 자세를 다잡았다. 무릎으로 소파를 딛고 팔을 뻗자 이제는 정말로 벌을 서는 자세가 되었다.
한유일이 콘돔을 씌우고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유일의 말을 곱씹었다. 확실히 생각할수록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특히 몸을 만든 이후로 노출 화보가 많아졌다는 현경의 증언도 있지 않았던가.
안 그래도 좋다는 사람이 널렸는데, 이제는 아예 맨몸까지 마구 드러내고 다닌다니. 되뇔수록 심기가 불편해져 강한은 무척 심각한 얼굴로 다리를 벌렸다. 지금이라도 다시 자세를 바꿀까, 생각하는 찰나에 유일이 다가왔다.
그는 이미 준비를 다 마치고 비장하게 자세를 잡은 강한을 웃으며 당겼다. 엎드려 있던 몸이 반만 일으켜 세워진 채, 소파 등받이를 바라보게 되었다.
유일은 자연스럽게 등받이를 짚고 무릎으로 서게 된 강한의 어깨 위로 이를 박아 넣었다. 아릴 정도로 세게 깨물어 내고 살결을 힘 있게 빨아 당겼다. 견디다 못한 한이 어깨를 움츠릴 쯤에야 기나긴 입맞춤이 멎었다.
“예쁘게 남으면 나도 보여 줘.”
쪽, 가벼운 소리를 남긴 유일은 이제 점차 안쪽으로 입술을 옮겼다. 넓은 어깨선을 따라 점점이 목선을 타고 오르며, 아래로는 구멍을 지분거렸다. 빳빳하게 일어선 성기가 엉덩이 사이를 꾹 눌러 오고 있었다.
“흐읏…….”
굵은 성기 끝은 구멍이 빠듯하게 벌어질 만큼만 얕게 들어섰다가 다시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그런데도 오묘한 전류가 흘렀다. 강한은 입술을 꾹 깨물며 생경한 감각을 버텨 냈다.
“한아, 그런데 이거 말이야.”
“으윽, 읏…….”
아주 얕은 움직임만으로도 사정감이 불쑥 치밀어 당황스럽던 찰나에 드디어 내벽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꾹 밀고 들어오는 뜨거운 양감에 강한은 숨을 참았다. 등받이를 쥔 손끝이 하얗게 질려 가기 시작했다.
“울퉁불퉁하던데…….”
“…흐, 아!”
“하아, 읏….”
강한은 버거운 삽입에 끙끙거리느라 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저 끝없이 밀려드는 좆을 원망하며 고개만 흔들었다. 목뒤에 숨결을 쏟아 내던 유일이 간지럽다는 듯 짧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바싹 굳은 몸을 끌어안은 유일은 한의 탄탄한 가슴을 매만졌다. 옆구리에서부터 근육의 결을 타고 올라 불룩한 가슴을 주무르고, 유두를 꼬집었다. 작고 말랑한 젖꼭지를 희롱하듯 두 손가락 사이에 굴리거나 손톱으로 찍어 누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한은 엉덩이를 움칫거리며 허리를 숙였다. 학학, 밭은 숨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쯤에야 조금 더 삽입할 수 있을 만한 틈이 생겼다. 그럼에도 한유일은 서두르지 않았다. 복근을 훑고 바싹 선 성기를 매만져 주었다. 점액질을 훑어 젖은 손으로 선단을 비벼 대자 한의 신음이 달게 녹아들었다.
“허윽! 아, 아!”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한유일은 깊이 파고들었다. 윤곽이 도드라지는 배를 제 쪽으로 잡아당기며 초장부터 사정없이 밀어붙였다.
“아! 학, 으, 윽! 이거… 아….”
그제야 강한은 자신이 놓쳤던 말을 복기했다. ‘울퉁불퉁하던데.’ 의미를 알 수 없던 문장이 직접 체득한 후에야 머릿속을 흔들어 댔다. 내벽을 짓눌러 대는 성기가 저번과는 달랐다. 안 그래도 버거운 좆의 사방에 무언가가 둘러져 있었다. 한유일의 말대로 ‘울퉁불퉁한’ 무언가 내벽을 지나치게 자극해 왔다.
“미친, 새…끼야, 아, 아읏, 으응….”
수백 개에 달하는 콘돔 중 돌기형 모델이 있다고 했었다. 순간 눈앞이 아뜩해진 강한은 고개를 젖혔다. 휙 넘어간 고개가 유일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거렸다.
“응, 한아…….”
한유일은 태연하게 답하며 허리를 쳐올렸다. 처음부터 거세게 몰아붙이며 속도를 줄이지 않는 바람에, 강한은 벌써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생경한 쾌락이 배 속을 물들이고 음낭이 아릿하게 당겨 왔다.
분명 지난번은 이렇지 않았다. 종국에는 무척이나 느끼고 좋아하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쾌감에 잠식된 섹스는 아니었다. 강한은 분명 한참을 힘들어했고 뒤로 느끼는 쾌락에 거부감을 느꼈다.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감각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버겁고 힘든 감각은 아주 짧았고 순식간에 열락이 몰려왔다. 오돌토돌한 돌기가 구멍을 오가는 감각마저 미치도록 좋았다. 억울할 만큼 빠른 변화였다. 고작 두 번 만에, 한유일이 제 몸을 이상하게 만든 것 같았다.
“흐으, 헛, 으… 천천…히, 천… 아….”
아래를 흔들지 않고도 사정할 듯한 위기감이 몰려들었다. 강한은 급하게 벌벌 떨리는 손으로 제 성기를 쥐어흔들었다. 천천히 해 달라는 애원과 상반되는 행동이었다.
“읏, 한이, 여기는…. 돌기 있는 게, 하아, 더 좋은가 봐.”
“하윽, 그게 아니라… 아! 아!”
초장부터 퍽퍽 박아 대는 네 탓이라고, 강한은 속으로만 으르렁거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몇 번 추어올리기도 전에 아래에서부터 정액이 터져 나왔다.
“한아, 너무 조여.”
몇 번씩 나누어 쏟아지는 정액이 다 멎기도 전에 유일은 연신 내벽을 찧어 댔다. 사정의 여파로 잔뜩 달구어져 있던 점막이 바르르 경련하기 시작했다. 정도 이상으로 날카로운 쾌락이었다.
“흑, 아, 그만, 씨…발, 그럼, 안 움직이면 될, 거, 아, 아응….”
목구멍에 잔뜩 힘을 주고 버텨 봐도 말끝은 저절로 고부라졌다. 둥글게 뭉그러져 뚝뚝 흘러내리는 신음이 너무도 낯설어 강한은 벽에 이마를 박았다. 다리가 자꾸 더 벌어지며 유일을 밀어내려 했다.
그러자 한유일은 아예 몸을 일으켰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좆이 쑥 빠져나가며 소름 끼치는 감각을 선사했다. 소파의 낮은 등받이에 풀썩 엎드린 강한은 제 배를 쓰다듬으며 헐떡였다. 아주 짧은 휴식이었다.
한유일은 낮게 무너진 한의 상체는 그대로 둔 채 엉덩이만 잡아끌었다. 허공으로 엉덩이가 휙 솟구쳐 올라가며 다리는 저절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유일은 구태여 다리 사이를 벌려 내지 않고 엉덩이 위를 타고 오르듯 삽입했다. 위에서부터 박아 넣자, 깜짝 놀란 강한이 다리를 바르작거리고 아예 발목을 꼬아 모아도 상관없었다. 바싹 들어 올려진 엉덩이 사이는 잔뜩 벌어진 채였다.
“아읏, 아, 흐윽!”
생각지 못한 자세에 강한은 경악한 눈으로 난잡한 하체를 바라보았다. 사정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성기가 벌써부터 발딱 서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형, 너무 좋아요.”
한유일은 골반이 턱, 턱, 폭력적으로 맞닿을 만큼 쑤셔 넣으며 다정하게도 신음했다. 그 모순적인 태도가 얄밉게 느껴지면서도 강한을 더욱 만족하게 했다. 평소보다 낮고 거칠어진 그의 신음이 이 모든 격동을 견디고 싶게끔 만들었다. 그가 더욱 흥분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절로 배 속에 힘이 들어간다.
“내가 형이라고 부르면 더 좋은가 봐.”
“아학, 흣, 윽, 누르지… 누르지 마.”
“여기가 막 조여요, 형.”
골반을 잡아챘던 손이 이제는 배를 끌어당겼다. 울룩불룩한 뱃가죽을 더듬어 꾹꾹 누르는 손길에 강한은 흐느꼈다. 제법 억울한 취조였다.
“하아, 너, 읏! 너 꼴리라고 한 건데, 아, 윽….”
거세게 몰아치던 움직임이 느려졌다. 아주 느리고 깊게 안을 휘저어 대며, 유일은 목을 울려 웃었다.
“그랬어?”
다정하게 물은 그는 상을 주듯 가슴을 문지르고 유두를 만져 댔다. 그러고는 강한의 등에 애교 부리듯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너무 꼴려서 어떡하지…….”
장난스러운 혼잣말에 강한은 짧게 웃었으나, 한유일은 농담을 한 것이 아니었다. 골반이 징 울릴 만큼 거센 움직임을 받아 내면서야 한은 뒤늦은 깨달음에 몸부림을 쳤다.
***
강한은 아주 느리게 눈을 떴다. 소금기가 말라 따끔거리는 눈꺼풀 위로 햇살이 닿았다. 새로 이사한 집은 채광이 아주 좋은 편이었다.
속눈썹에 달라붙은 눈물의 흔적들을 비비적거리는 동안 잠이 다 날아갔다. 그는 내친김에 아예 일어나 앉아 뻐근한 목을 돌리고 스트레칭하며 몸을 풀었다. 잔뜩 뭉쳐 있던 근육들이 깨어나 비명을 질렀으나 아직도 정신은 몽롱하기 짝이 없었다.
아직도 영혼의 반절이 지난밤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피로한 눈동자가 침대 이곳저곳에 나뒹구는 흔적들을 바라보았다. 침실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콘돔 껍질은 활짝 열린 문을 따라 거실까지 길을 내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듯 아뜩해졌던 시선이 마지막에는 유일에게 닿았다.
한유일은 옆으로 누워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새근새근,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처럼 잠든 얼굴이 한에게는 무척이나 괘씸해 보였다. 심술 묻은 손가락이 곤히 잠든 이의 코끝을 잡는다. 그래도 유일은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온 햇살을 얼굴로 받아 내면서도 그저 곤한 그가 신기해 강한은 다시금 드러누웠다.
아예 옆으로 누워 자리를 잡자 한의 등이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유일은 전보다 더욱 편안해진 얼굴로, 슬며시 미소 지었다.
일순 마음이 요동을 쳤다. 아무런 경계도 없이 풀어진 그 낯이 갑작스레 무언가를 벅차오르게 했다. 마치 처음 그를 향한 감정을 인정한 날처럼, 강한은 솟구치는 애틋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음…….”
환한 햇빛을 직격으로 받고 코를 꼬집어도 깨지 않던 유일이 강한의 시선에 반응했다. 낮은 침음과 함께 기다란 속눈썹이 천천히 움직였다.
강한은 처음처럼 허둥지둥하며 도망치지 않았다. 그저 잠기운 가득한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거리며 자신을 담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처음 눈을 뜬 그의 눈에 각인되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수마를 아주 느리게 몰아낸 유일은 가장 먼저 손을 뻗었다. 잘 잤느냐는 인사도 없이 문득 어깨를 매만진 그가 웃었다.
“예쁘다.”
꾹 누르는 손길을 따라 미약한 통증이 일었다. 강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잘 내려다볼 수도 없는 어깨를 흘깃거렸다.
“뒤에도 남았어?”
“못 봤는데.”
어젯밤 종일 어깨를 씹고 빨아 대더니 기어코 앞뒤를 다 물들인 모양이었다. 강한은 한숨을 푹 내쉬고 눈을 치켜떴다.
“뭔가 억울하다? 너만 존나 남기고.”
각고의 노력 덕에 유일의 몸은 처음에 비해 무척 깨끗한 편이었다. 강한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결과건만, 그는 왜인지 만족스럽지 못했다. 누구는 하루아침에 몸이 달라진 것만 같은 변화를 겪었는데 저 태평한 미소와 하얀 살결은 뭐란 말인가.
“나는 더 남아도 괜찮다고 했어, 한아.”
뻔뻔하게 마주 보는 눈동자가 객기를 부추겼다. 눈썹을 꿈틀, 들어 올린 강한은 유일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러고는 하얗고 단단한 팔을 움켜쥐고 손목 근처를 왁 씹어 버렸다. 섹슈얼한 분위기는커녕 식사를 마주한 좀비 같은 태도였다.
“아…….”
갑작스럽게 벌어진 습격에 한유일은 늦은 신음을 쏟았다. 커다래진 눈동자가 강한과 잘근잘근 씹히고 있는 제 살을 오갔다.
“지나가다 물렸다고 해.”
강한은 한참 씹어 타액이 묻은 살결을 제 팔뚝으로 멋없이 쓸어 냈다. 그러고는 툭, 주인에게로 돌려주며 웃었다. 복수에 성공해 아주 시원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때까지도 멍한 표정을 유지하던 한유일이 갑작스레 그 위로 달려들었다. 치미는 감정을 참을 수 없다는 듯 갈급한 움직임을 따라 그림자가 졌다. 강한은 양치질을 이유로 들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늘 그랬듯이 밀려드는 유일을 거절하는 일은 무척 어려운 것이었다.
그 달콤한 아침으로부터 겨우 몇 시간 후. 강한은 무척 찡그린 얼굴로 카페에 들어섰다. 일을 할 때보다 훨씬 편하게 입은 운동복 탓에 현경은 단번에 알아보지 못하고 ‘어서 오세요.’ 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 점장님.”
반 박자 늦게 알아챈 현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때에서야 옆에 서 있던 치언도 묵례를 했다. 찌푸린 인상을 더욱 짙게 만드는 행동이었다.
강한은 직접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가 샷을 내렸다. 원래도 진한 샷을 두 번 뽑아 내리고서는 치언의 팔을 톡 쳤다.
“얘기 좀 하자.”
“아, 네.”
“5분 뒤에.”
영문 모를 조건을 내놓고 그는 먼저 자리로 향했다. 카페 가장 안쪽, 하얀 벽면 옆의 구석진 자리였다. 새하얀 좌석에 털썩 앉은 강한은 정면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하필 시야에 걸린 치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물쭈물하다가 조금 비켜섰다. 덕분에 강한의 매서운 눈길은 허공과 커피 머신 사이쯤을 향하고 있었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기분은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한유일과 같은 침대에서 일어나 잠든 그의 얼굴을 감상하는 동안 꾸준히 올라가던 그래프는 끝나지 않을 듯한 키스에 정점을 찍었다. 더할 나위 없는 기상이었다.
그 완벽한 곡선이 돌연 푹 꺾이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한유일이었다. 무이를 언제쯤 데려올 수 있는지에 관해 이야기하던 때였다.
-조만간 합숙 촬영 들어가, 그때 한이가 도와줬던 영화. 규모가 크지는 않아서 보름 정도…. 데뷔작 찍어 주셨던 감독님이라 일하기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아.
유일은 아주 여상한 투로 말하며 한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그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행동했기 때문에 강한 역시 별다른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저 멍한 눈동자만 깜빡거리다가 ‘어, 그럼 무이 빨리 데려와야겠네.’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불씨는 그보다 아주 늦은 때에 타올랐다. 치언과 면담을 이유로 먼저 집을 나선 후였다. 현관문을 쿵 닫자마자 어떤 열기가 화르르, 심장 안쪽을 지폈다. 그는 즉시 인터넷 창을 열어 ‘한유일 데뷔작’을 검색했다.
페이지를 가득 채운 것은 아주 익숙한 영화였다. 강한은 그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며 출연 배우, 상영 시간까지도 알고 있었으나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상수가 직접 티켓까지 사 주었음에도 영화관에 가지 못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볼 수 없는 이유야 차고 넘쳤다. 소속사에서도 데뷔만 하면 뜨는 건 일도 아니라고 추켜세우던 그가 겨우 7분 남짓 출연하는 조연으로 시작해서. 눌러 놓은 마음이 너무 쉽게 되살아날 것 같아서. 게다가 하필이면 영화에 퀴어 요소가 분명하게 들어가 있어서.
특히 그 영화는 평생 게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살아온 감독의 작품으로 화제가 되어 있었다. 그게 그 시절의 강한을 무척이나 뜨끔하게 했다.
다소 흐려졌던 기억이 검색 한 번에 모두 되살아났다. 강한은 파랗게 링크 표시가 걸려 있는 감독의 이름을 눌렀다. 「주해익」 세 글자를 누르자, 생각보다 훨씬 젊고 반반한 얼굴의 프로필 사진을 볼 수 있었다. 거기서 한 번 솟구친 눈썹은 바로 아래 놓인 기사 제목으로 인해 완전한 빗금을 그렸다.
「게이라고 남자 배우에 다 환장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한유일은 예외…」
강한은 걸음마저 멈춰 세우고 기사를 정독했다. 내용은 그저 가십 수준이었다. 기자가 먼저 ‘남자 배우들과 함께 일하시니 좋으시겠어요.’ 하고 다소 무례한 질문을 했으며, 주해익 감독은 받아쳤다. ‘게이라고 일할 때도 배우들 얼굴만 보고 그러진 않아요. 근데 가끔 유일 씨 얼굴은 좀 감상할 때가 있죠. 사실 일반적으로 게이들 취향은 아니에요. 그냥 너무 예쁘니까 신기해서.’ 제목에 정리된 것처럼 아주 의미심장한 뜻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강한은 불쾌해진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장마가 다가오기 직전의 아주 습하고 찝찝한 여름 길거리 한복판이었다. 그는 아주 비겁한 경기를 경험한 선수처럼 뜨거운 바람을 훅 내쉬었다. 어디 풀어낼 곳 없는 화가 몸 안에 그득 쌓인 기분이었다.
그길로 공원의 트랙을 두 바퀴 뛰었음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치언에게 5분의 유예 시간을 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최대한 성숙한 태도로 대화를 끌어가기로 다짐했는데, 애먼 곳에 화풀이를 하게 될지도 몰랐다.
“저도 어제 생각 많이 해 봤는데요.”
하지만 5분을 다 채우기도 전에 치언은 강한의 맞은편 의자를 빼냈다. 불퉁한 표정으로 앉은 그가 다소 딱딱하게 선언했다.
“그냥 저 그만둘게요.”
강한은 되묻지도 못했다. 하도 황당해서 눈만 조금 찌푸렸을 뿐, 어떤 반응을 택할 만한 사고가 되지 않았다. 아직도 주해익 감독과 관련된 열기에 잠식되어 있던 뇌가 느리게 깨어났다.
“이미 뭐 저만 이상한 사람인 것 같고…. 실업 급여 해 주실 거죠?”
치언은 아주 빠르게 준비한 말을 늘어놓았다. 그의 태도는 이미 믿을 만한 구석이 있는 듯 보였다.
회식 소동이 끝나자마자 제 친구들에게 좋을 대로 떠들었을 그가 훤했다. 강한은 허탈한 숨을 길게 내쉬며 의자에서 몸을 떼어 냈다. 느슨하게 기댔던 몸을 당겨 테이블 가까이로 숙이자, 치언은 움찔했다.
“언제까지 다닐 수 있는데?”
“다 저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데 뭐 어떻게 더 있어요…. 오늘까지만 할게요.”
강한은 어중이떠중이들의 조언으로 똘똘 뭉친 치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답을 기다리다 못한 치언이 초조하게 다리를 떨기 시작할 쯤에야 그의 입술이 열렸다.
“퇴사 통보 당일에 한 사람을 뭐가 예쁘다고 실업 급여까지 쳐줘, 치언아. 너 내가 등신 같구나.”
치언의 수없이 많은 실수와 만행에도 강한은 단 한 번 정색한 적 없었다. 이렇게 냉정하고 차가운 투로 경고하기보다는 ‘제대로 안 하냐.’ 하며 툭 치고 마는 편이었다. 그러면 치언은 언제나 으헤헤 웃고 넘어갔다.
“…제, 제가 그만두고 싶어서 그만두는 게 아니, 아니잖아요.”
이렇게 덜덜 떨며 눈치를 본 적은 치언 역시 한 번도 없었다.
“제 의지로 그만두는 게 아니니까, 이거는, 사유가 사측에 있는 거죠.”
치언의 목소리 끝이 파르르 떨렸다. 평소였다면 조금쯤 안타깝게 여겼을 테지만, 외워서 뱉는 듯한 어색한 어투가 강한을 더욱 냉정하게 만들었다.
“치언아.”
아주 조용히 그를 타이르듯 부르며, 강한은 잠시 범철을 떠올렸다. 어쩌면 한유일이 범철을 매점으로 데려갔던 그날도 이 비슷한 풍경이 펼쳐졌을 듯했다.
그때 한유일은 범철에게 어떤 경고를 했을까. 무엇이 그의 열등감을 그토록 자극했나. 강한은 일순 궁금해졌으나,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왜인지 지금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방도가 그때 유일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만 같았다.
“우리 정말 계산 정확히 해 볼까. 그럼 네가 깨 먹은 컵, 네가 유통 기한 지난 우유 써서 배탈 났던 손님 치료비, 네 불친절 컴플레인으로 보상해 드린 상품값, 레시피 못 외워서 수십 번씩 새로 만들어야 했던 음료들. 그런 것도 다 받아 볼까?”
강한은 달달 떨리는 치언의 눈동자를 담담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치언은 아주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입술을 비죽거리면서도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 우물쭈물 망설이기만 하는 어린 얼굴에 대고 강한은 웃음 비슷한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너나 현경이 그만둔다고 하면 퇴직금에 조금 더 얹어 줄 생각이었어. 그건 그대로 줄게. 그러니까 추잡하게 마무리하지는 말자, 좀.”
유일에게 고작 한 번 지적을 당했다는 이유로, 범철은 한유일의 앞길을 막으려 하고 오명을 씌웠다. 강한은 제 눈앞에 앉은 치언 또한 그와 비슷한 과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붉으락푸르락 난리가 난 낯빛이 확신을 더해 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그때처럼 바보같이 모든 오물을 뒤집어써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만 가 봐. 마감 내가 볼 테니까.”
먼저 일어선 강한이 제 컵을 치웠다. 그 일마저 이제 치언의 것이 아니라는 양 말끔히 일어선 그는 좁은 어깨를 꾹 눌러 주었다. 치언은 한 대 맞은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동안 수고했다.”
마른 뼈를 도닥이는 것으로 아주 간단하게 끝나는 작별이었다. 강한은 조금 후련한 얼굴로 카운터 안쪽에 들어섰다. 내내 힐금거리던 현경이 묻지도 못하고 기웃거리기만 했다.
“점장님, 욕이라도 하셨어요?”
우물쭈물하던 그녀는 강한의 팔을 콕 찔렀다. 우두커니 앉아 일어서지도 못하는 치언을 걱정스레 바라보면서.
강한은 고개를 내저으며 웃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만둔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그는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시종일관 시야를 가리고 있던 어떤 불투명한 막을 걷어 낸 기분이었다.
“언제부터요? 설마 지금요? 엑, 진짜 가는데요?”
그쯤 한참을 앉아 있던 치언이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앞치마를 벗어 던졌다. 하얀 테이블 위로 거칠게 내려놓은 데님 천이 금세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는 바닥으로 떨어진 앞치마를 주워 두지 않았다. 그저 뾰족한 눈으로 강한을 휙 노려보았다가 그마저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도망쳤다.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덜컹거렸다.
심상치 않은 기색에 손님들도 유리문 너머 치언을 힐긋거렸지만, 강한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앞치마를 주워 들고 카운터를 정돈했다. 그러다가 문득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평소처럼 갈등하지 않고 곧바로 유일의 이름을 누른 그는 망설임 없이 문자를 써 내려갔다.
「만약에 그 감독이 너한테 작업 걸면 어떻게 할 거야.」
한참 늦은 화풀이가 마침내 올바른 상대에게 전송되었다.
***
한유일의 합숙 촬영은 예정보다 빠르게 이루어졌다. 상대 주연 배우의 스케줄이 꼬인 탓이었다. 덕분에 강한은 그의 매니저에게서 무이를 받아들어야만 했다.
“그래도 얼굴 한번 보고 가는 게 어렵나. 그치, 무이야.”
그동안 관리를 잘 받은 모양인지 무이는 살이 조금 오른 상태였다.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털을 매만지며, 강한은 그를 제 가슴 위로 올렸다. 널따란 가슴팍에 자리를 잡고 앉은 무이가 턱을 핥아 댔다. 덕분에 심각하던 얼굴은 금세 풀어졌다.
단단한 턱 근처를 핥아 대던 무이는 몇 초 만에 흥미를 잃었다. 가슴을 묵직하게 밀어내며 내려간 무이가 강한의 골반 옆쯤으로 자리를 잡았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누운 무이의 하얀 털이 선풍기 바람에 팔랑거렸다. 얼마 동안 그 부드러운 털을 매만지고 쓰다듬으며 마음의 안정을 얻던 강한은 색색거리는 호흡 소리를 듣고 손을 거두었다.
무이의 숙면을 위해 거두어진 손은 버릇처럼 재차 핸드폰을 찾았다. 근래 그의 핸드폰은 평생 받아 본 적 없는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에 그 감독이 너한테 작업 걸면 어떻게 할 거야.」
「전화 왜 안 받아?」
「왜 전화를 해. 일하는 중이야. 대답이나 해.」
「그럴 일 없어.」
「만약이라니까?」
「ㅋㅋㅋ 뭐라고 했으면 좋겠는데?」
자음을 이용한 웃음은 한유일이 잘 쓰지 않는 방식이었다. 그 낯선 답장이 그가 얼마나 상기되어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 같아 강한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꼬박 이틀이 넘도록 마땅한 답안을 찾을 수 없었다.
보통 이렇듯 강한의 답이 별안간 사라질 때면 유일은 다시 묻지 않고 말머리를 돌려 주었다. 묻지도 않은 제 식사나 스케줄 이야기를 하고, 무이 사진을 보냈다.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가벼운 이야기들로 대화는 다시금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꼬박 이틀. 그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촬영이 바쁘다는 것은 알지만 분장을 받을 때나 하물며 잠을 자기 직전이라도 틈은 있을 터였다. 게다가 언제인가 지나치게 고운 얼굴 사진에 놀란 강한이 괜스레 ‘넌 안 바쁘냐?’ 하고 투덜거리자, 그는 ‘촬영 중에도 이동이나 대기 시간이 길어서 오히려 평소보다 핸드폰 만질 시간은 많아.’ 하고 답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많다더니 무려 48시간을 훌쩍 넘겼다.
그 조용한 시간 동안 강한의 걱정은 이리저리로 튀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건 아닐까, 촬영이 아주 악랄한 조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별별 걱정이 머릿속을 물들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그를 괴롭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지친 건가.’
강한은 묵직한 한숨을 삼키며 대화 창을 위로 올려 보았다. 한유일의 길고 다정한 문장들에 비해 제 대답은 다소 성의가 없어 보였다. 게다가 늘 사진과 함께 근황을 보고하는 그와 다르게 자신은 무뚝뚝한 단어 몇 개의 조합이 전부였다. 이모티콘이나 기호는 단 한 번도 쓴 일이 없었다.
이런 태도가 그를 지치게 하지는 않았을까.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을 치고, 섹스는 하면서도 문자 답장 하나는 이토록 어려운 자신이 질리게 하지는 않았을까.
그런 걱정이 깊어질수록 무척 심란해져서 강한은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액정을 눌렀다.
키패드가 올라오자마자 손가락은 아주 빠르게 움직였다. 한유일의 물음을 본 순간부터 떠올랐던, 그러나 도저히 써 넣을 수가 없었던 문장이 이 순간만큼은 쉽게 쓰였다.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해.」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부터 심장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윽, 작게 앓는 소리와 함께 핸드폰이 침대 위를 나뒹굴었다. 옆으로 누워 한껏 웅크려도 여전히 커다란 몸이 소리 없이 발악했다. 생전 처음 겪는 분홍빛의 수치가 전신을 타고 오른 탓이었다.
그는 한참을 끙끙거리다가 나무라듯 ‘왕!’ 하고 짖은 무이 덕에 정신을 차렸다. 단잠을 깨운 주인 덕에 강아지는 아주 심기가 불편해져 있었다. 산책이라도 다녀와야 풀어질 법한 기세였다.
내친김에 온몸에 돋아난 소름도 가라앉힐 겸, 강한은 부러 핸드폰을 두고 산책을 다녀왔다. 무이와 함께 트랙을 수십 바퀴나 뛰고 들어와 긴 샤워를 했다. 노곤하게 늘어진 무이를 따라 소파에서 그대로 낮잠을 자기도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사위가 다 캄캄하게 잠든 시각이었다.
답장이 오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어쩌면 부재중 전화 몇 통이 쌓여 있을지도 몰랐다. 강한은 내심 기대를 하며 핸드폰을 눌러 보았다.
그런데 알림 창은 고요하기만 했다. 전화는커녕, 메시지의 읽음 표시조차 그대로였다. 얼어붙은 그는 액정 상단의 배터리 표시와 와이파이 수신 정도를 확인했다. 혹여 데이터를 꺼 놓았나 싶어 인터넷 애플리케이션을 실행시키기까지 했다. 하지만 기본으로 설정되어 있는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은 얄미울 정도로 빠르게 로딩되었다. 초록색 아이콘과 검색 창 밑으로 곧 장마가 오리라는 기상 예보와 정치인들의 싸움이 중계되고 있었다.
강한은 의미 없이 창을 쭉 내렸다가 다시 올려 보았다. 인터넷은 아주 빠른 속도로 그의 손가락에 반응했다. 어떤 오류로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았을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 보였다.
그는 심란한 얼굴로 액정을 노려보았다. 이틀이나 답을 하지 않아 놓고 고작 한나절을 기다리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순이 화가 났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건 너무 추한 데다가……. 정상이 아닌 것만 같았다.
‘나잇값 좀 하자.’
이제 더 이상 스물의 어린애가 아니다. 강한은 제법 단호하게 자기 자신을 질타하며 창을 닫았다. 아니, 닫으려고 했다.
하지만 검색 창 아래로 익숙한 글자가 보였다. 동그랗게 뜨인 눈동자 안에 「한유일」, 「주해익 감독」, 「한유일 열애설」 등의 글자들이 시시각각 위치를 바꾸며 올라섰다. 실시간 화제 토픽 모음의 반절이 한유일 이야기였다. 강한은 크게 확장된 눈 그대로 한참을 서 있었다.
스캔들 자체에 대한 충격은 없었다. 그 열애설이 가짜라는 것쯤은 누구보다 강한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현재 한유일이 보내고 있을 시간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점이 그를 얼어붙게 했다.
강한은 한유일의 세상을 알지 못했다. 알려고 한 적도 없었으며 도리어 모르고 싶어 회피하듯 살아왔다. 데뷔 영화도, 친한 배우도, 팬들은 줄줄이 외우고 있는 인터뷰 내용도 그에게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러니 아주 당연하게도 이렇게 큰일이 닥쳤을 때 한유일이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을지, 연락이 안 되는 것도 이 일과 연관이 있는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 같은 문제들은 더더욱 알 수 없었다. 이런 때에 유일의 안부를 묻기 위해 연락할 만한 번호 하나조차 알지 못했다.
그는 무너지듯 소파에 앉았다. 그동안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유일에게로 뻗어 놓았던 날카로운 창들이 이제야 눈에 보였다. 이기의 날을 세운 방어 기제였다.
뾰족한 창끝이 이제는 강한의 가슴을 노렸다. 그는 밀려드는 흉통을 벌처럼 감내해야만 했다.
***
그길로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엄살 부릴 곳 없는 사람들이 그렇듯, 강한 역시 수면을 도피처 삼을 때가 많았다.
불편한 자세로 소파에서 잠이 들었던 탓에 온몸이 찌뿌드드했다. 그가 나지막한 신음을 흘리자 어느덧 다가온 무이가 주변을 맴돌며 덩달아 낑낑거렸다. 강한은 입술만 당겨 웃으며 무이를 껴안고 안심시켰다. 그러나 무이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품을 벗어났다. 하얀 발이 무척 용맹한 몸짓으로 소파 밑을 디뎠다.
무이가 낑낑거리며 맴도는 근처에는 강한의 핸드폰이 떨어져 있었다. 번쩍 빛을 내고 있는 액정 위에 모르는 번호가 떠 있다. 우웅, 웅, 바닥을 시끄럽게 울리는 진동이 무이를 불편하게 했던 모양이었다.
“나 걱정해서 그러는 줄 알았더니.”
강한은 허탈하게 웃으며 소파 아래로 내려갔다. 시끄럽게 떨고 있는 핸드폰을 주워 들며 무이의 털을 장난스럽게 비볐다. 그에 무이는 귀찮다는 듯 또 그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제집으로 쏙 들어가는 뒷모습이 새침했다.
“네.”
허탈하게 웃은 강한은 여태 끊어지지 않은 전화를 받았다. 방금 잠에서 깨어나 낮고 거칠어진 목소리가 깜깜한 거실을 울렸다.
[한아, 나야.]
요동치던 마음은 수면의 효과로 제법 잠잠해져 있었다. 그런데 고작 한마디를 듣는 순간, 강한은 다시금 뻐근해지는 심장에 숨을 참았다. 미간이 좁혀 들고 몸이 저절로 의지할 곳을 찾아 앉았다. 소파 등받이에 천천히 몸을 기대며, 그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한유일?”
그렇게 물으며 흘깃 확인한 시간은 새벽 한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응, 연락 늦어서 미안.]
“……뭐, 바쁘면 그럴 수 있지.”
강한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놓으며 비식 웃었다. 이 늦은 시각에 한유일이 전화를 감행했다는 것만으로도, 속에 엉켜 있던 실타래가 벌써 풀리기 시작했다. 참 쉬운 심장이다.
[핸드폰을 쓸 수 없었어.]
“그러냐…….”
심지어 바빴다는 핑계보다 훨씬 마음을 편하게 하는 말이 돌아왔다. 강한은 이제 긴장을 다 놓아 버린 얼굴로 웃었다. 자존심도 없이 바람 같은 웃음이 픽픽 터져 나갔다.
[자는데 깨웠어?]
“낮잠도 잤고 해서…. 안 그래도 깼을걸.”
[다행이다. 잘 것 같았는데……. 그래도 그냥 걸었어. 오해 남기기 싫어서.]
유일의 듣기 좋은 미성은 묘하게 허스키한 면이 있었다. 음성마저도 그처럼 아주 양면적이라고 생각하며 강한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했다는 말은 입술을 꾹 눌러 참았다.
[기사, 다 지어낸 이야기니까….]
평소에도 느릿하던 어투가 더욱 길게 늘어졌다. 이미 무척이나 시달린 듯한, 그 피곤한 기색이 강한을 흠칫하게 했다. 대번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너 지금 혼자 있냐?”
[응.]
“이상한 놈들 붙으면 어쩌려고. 매니저랑 같이 있어. 기사 같은 건 읽지 말고.”
아주 단호하게 덧붙이며 강한은 스르륵 눈을 감았다. 뻐근하게 아리던 심장이 쿵쿵 떨려 댄다. 불안이 쉽게 녹아 버린 마음은 이제 오롯이 한유일을 향한 감정만을 담았다.
“나한텐 해명하지 마. 나는…….”
스스로가 다치기 싫어 바깥으로 날을 세워 놓았던 그날들을, 강한은 까무룩 잠에 드는 순간까지도 후회했다. 되돌리고 싶었다. 한유일에게 그런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가장 큰 짐이 되기는 싫어. 내가 너한테, 그런 놈은 아니었으면 좋겠어.”
[한아.]
“도망치려는 거 아니고.”
한유일의 다소 불안한 부름에 강한은 얼른 말을 덧붙였다. 감은 눈이 긴장에 바르르 떨려 댔다.
“나도 좀 노력하고 싶어졌다고.”
수화기 너머 유일은 고요했다. 이따금 멀리서 차가 지나는 소리나 사납게 부는 바람 소리만이 들려왔다. 휭휭 우는 소리가 철썩이는 파도에 섞여 있었다.
강한은 이 어둑한 밤, 낯선 지역의 바닷가에 선 그를 상상해 보았다. 새까만 물결의 춤사위를 바라보며 한유일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쩐지 그가 아득하게 멀어진 것만 같은 기분에 한은 반쯤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보고 싶다.”
답은 단말마 같은 숨소리로 돌아왔다. 훅 쏟아진 숨이 짤막한 울음소리를 닮아 있었다. 일순, 강한은 눈을 번뜩 뜨며 일어나 앉았다. 울기라도 하나 싶어 가슴이 뻑적지근하게 아파 왔다.
[……나도 한이가 너무 보고 싶어.]
한유일은 모든 숨결이 다 흩어진 후에야 아주 늦게 말했다. 흐트러졌던 것들을 다 갈무리해 정제한 목소리였다.
[음, 무이는 요즘 어때?]
순식간에 아주 멀끔하게 돌아온 음성이 말을 돌렸다. 매번 말을 돌리는 쪽은 자신이었기에 강한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역시 장단을 맞춰 답했다.
“잘 지내. 새집도 좋아하고. 아마 너보다 날 더 좋아할걸.”
그가 부러 장난스럽게 말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흩어지게끔 웃는 그의 숨결을 따라, 상상 속의 한유일 역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깜깜한 세상 속에서도 홀로 빛이 날 것만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무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새벽의 통화는 길게 이어졌다. 강한은 다음 날 있을 근무까지 없는 셈 치며 자꾸만 유일을 붙잡았다. ‘너 피곤하면 자도 돼.’ 하고 조그마한 출구만 열어 놓은 채였다. 그럴 때마다 한유일은 아주 기분 좋게 웃었다. 그 포상이 강한을 더더욱 충동적으로 만들었다.
보고 싶다는 말을 직접 입 밖으로 꺼낸 직후부터 충동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형태를 지녔다. 은닉했던 감정이 모두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처럼.
덕분에 강한은 때꾼한 눈알로 새벽같이 오픈 출근을 하고, 아무도 없는 카페 안에서 한유일의 이름을 검색했다. 고작 몇 시간 새에 또 그의 소식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적막한 카페 카운터 안의 접이식 의자를 펼쳐 앉은 채, 강한은 한동안 액정 안에 빠져 있었다. 아직도 사방에서 한유일의 스캔들 이야기를 떠들어 댔기에 최대한 뉴스 카테고리는 피했다. 그럼에도 도저히 누르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글들이 눈에 들고는 했다.
「한유일 이번 스캔들 게이 커뮤 반응 캡처」
한참 갈등하던 손가락이 결국 굵게 처리된 제목을 눌렀다. 수십 장의 댓글 캡처 이미지가 주르륵 나열되기 시작했다.
익명1: 근데 한유일 게이인 거 모르는 사람도 있음?? 다 알았잖음
└익명23: 익홈이 너 무당이냐? 어케앎;
└익명31: 한유일 원래 블루엔터랑 계약하고 데뷔하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무산되고 한참 있다가 데뷔한거ㅇㅇ 지금 소속사는 블루에 비하면 완전 개중소 이건 반박불가임 그럼 파기할만한 뭔가 이유가 있었던건데 얼마전에 자작충 때문에 학교생활 클린한건 인증댓고ㅇㅇ 굳이 커밍아웃한 감독 작품으로 데뷔하더니 대학로에서도 퀴어코드 쩌는 극만 골라 하니 뭐.. 걍 대충 다 눈치로 그렇구나했지
익명2: 아 ㅆㅂ 진짜냐? 유일이형 그 새낀 안돼요ㅠㅠ
└익명11: 왜?? 감독 뭐 있었나?
└익명2: ㄴㄴ 그냥 내가 사귀고싶어서;
└익명5: ㅅㅂㅋㅋㅋㅋㅋㅋ
익명3: 야 근데 연예인중에 게이 많아도 아웃팅이니까 쉬쉬하는거 아녔음? 기레기 오졌네
└익명6: ㄹㅇ;;
└익명18: 둘다일반인이아니라서그런듯..
└익명20: 그래도 그렇지. 진짜 요즘 기자들 수준 왜 이럼?
익명4: 유일행님덕에 더 큰 대한민국 갈수있는거냨ㅋㅋㅋㅋㅋ 이정도면 반응 나름 선방함
익명7: 솔직히 나만 누가 탑일지 궁금함? 주감독은 바텀이란 썰 많았는데.. 한유일도 존예잖아 둘다 올인가?
└익명8: 그래도 이런것까지 유추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난 한유일 한표
└익명9: 윗댓미친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익명14: 윗윗 익홈이 말이 맞다 침대사정까지 상상하는건 매너가 아니지않냐.. 난 주감독에 표 던질게~
└익명21: 원래 한유일 같은 애들이 거기 존나 큼
└익명26: ㅅㅂ놈아 뭔 소리옄ㅋㅋㅋ 그거랑 뭔상관??은 아니지 사실이라면 탑 할 일
└익명34: ㄹㅇ?
└익명39: ㄹㅇ이면 익홈이가 뭐 어쩌시게요;;